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
언어는 사유 세계의 공기와 같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운용하고, 다른 정신과 만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거의 의식되진 않지만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 자체를 관조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는 이는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들다. 작가 고종석이 발표해온 수십 편의 언어학 에세이는 이런 맥락에서 교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이 책은 고종석선집(총5권 기획: 소설, 언어학, 시사, 문학, 에세이)의 둘째 권으로서, 작가 고종석의 사유 세계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 에세이를 엄선해 담았다. 고종석의 단행본 《감염된 언어》《말들의 풍경》《국어의 풍경들》《자유의 무늬》 중에서 선집의 위상에 걸맞은 글 20편을 가려 수록했다. 1998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기간 동안 생산해온 글들이다. 그가 서문 격인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류 언어학 내부의 좁다란 논점들보다는 언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널따란 논점들과 주로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더러 다른 자연언어들에 대한 탐색도 포함하고 있다.” 고종석은 학술적 딱딱함도, 화려한 말잔치도 아닌 적절한 균형의 지점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어와 한자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이른바 ‘한국어’의 실체란 무엇인지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친다. 또한 표준어/사투리, 외래어/순우리말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의 양상을 살펴보는가 하면, 모음체계의 변화와 심리형용사?부정문?시제 등 한국어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독자들은 논리적이고 수려한 문장으로 담아낸 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한국어‘들’이다
좋은 학자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언어학자 고종석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학자다. 이를테면 그는 한국어와 한글이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점을 관찰하고, 이를 분명히 구별한다. 즉 한국어는 언어이고, 한글은 이를 표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또 그는 한국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중엽으로 돌아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음운학자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세종대왕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어와 21세기 한국어는 서로 ‘다른’ 언어다. (…) 우리는 7∼10세기에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5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9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를 모두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인데도 말이다._16쪽
사실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은 없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들’이다. 그런데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해 이 점을 자주 망각하면서 수많은 담론상의 혼란과 금기가 생겨났다. 즉 지금 여기의 한국어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것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을 ‘타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어를 좁은 테두리에 가두면서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고종석은 한국어가 실은 한국어‘들’임을 분명히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색채로 물든 담론의 난마를 헤쳐나갈 강력한 전제를 확보한다.
만일 순수한 한국어,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도, 회복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외래의 언어를 막을 이유 또한 없다. 고종석이 보기에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미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럴 때 지극히 아름답다. 예컨대 18세기 말 이래 시작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이 그렇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_61쪽
한자어가 일본제라고 해서 그것이 한국어의 굴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프랑스어에 미칠 듯한 열등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어의 그 넉넉함은 프랑스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오늘날 확립하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빈곤하고 위축되는 것은 민족주의적 열정 아래 ‘순수 한국어’를 고집할 때다.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한다
언어학자 고종석의 미덕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욕망을 거부하고, 그보다 정확한 관찰과 사실에 무게를 둔다. 그가 1998년 학계의 일대 파란을 일으킨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하는 까닭이다. 고종석이 보기에 영어와 한국어를 같이 쓰는 상황은 거리낄 게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굴욕적인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_153쪽
21세기 한국어와 21세기 영어의 거리만큼이나 21세기 한국어와 7세기 한국어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영어공용어화는 그저 좀더 쓸모 있는 언어를 하나 더 쓰는 것일 따름이다. 더구나 기록언어로서의 한국어는 사실상 번역문에서 그 형태를 잡아나갔다. 단적으로, 한글로 쓰인 한국어의 제1성은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라는 ‘훈민정음 언해’의 번역문에서 시작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만드는 내재적인 순수함 따위는 없는 것이다. 고종석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긴 글에서 이 논쟁이 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동서양의 사례를 아우르며 세밀히 검토한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주류 언어관에 민족주의가 깊이 침윤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한국어에 대한 인식 지평을 확장시킨다.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다
수천에서 1만여에 이른다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는 12∼13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제2 언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어의 위세는 그에 못 미치는 것이다. 고종석은 이러한 현실과 그 이유를 〈한국어의 미래〉에서 짚어보면서,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냉철하게 진단한다. 이런 현실에 더해 영어공용어화론을 주장하는 고종석은 한국어가 곧 소멸할 것이라고, 소멸해도 된다고 믿는 것일까?
나로서는 민족어가 사라지는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민족어들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어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이, 민족국가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의 소멸을 추구했던 70여 년의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고도 살아남았다._142쪽
역시나 현실적인 진단이다. 그는 민족어인 한국어가 긴 시간을 두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아래 그는 한국어의 다양한 현상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즉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무조건적인 예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짚어낸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상찬하면서도, 중국 한자의 영향으로 글자를 퇴행적으로 네모 형태로 모아쓰게 된 점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한국어의 다층적인 겹과 복잡한 논리를 드러낸다. 가령 ‘이 국은 짜지 못하다’는 가능하지만 ‘이 국은 못 짜다’는 불가능한 이유, ‘신은 내일 죽어요’는 되지만 ‘어머니는 내일 아프셔요’는 안 되는 까닭을 언어학적으로 규명한다. 독자들은 투명한 눈으로 한국어를 가감 없이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언어와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