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제8회 작가세계문학상 본심 입선작.
어느 현실 도피자의 인도, 유럽 방랑기.
작가지망생인 ‘나’는 6개월간의 인도 여행이 끝나면 직장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 피터를 만났다. 그는 만난 지 일주일 만에 나에게 청혼하였고 여행이 끝나면 함께 독일로 가자고 제의하여 마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생활비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터의 말대로 독일에 가서 그가 직장을 구할 때까지 한두 달 동안만 어머니 집에서 살다가 아름다운 도시 마르부르크에 아파트를 얻어 분가하면 대학도 다니고, 단둘이 조촐하게 살 수 있고, 틈틈이 독일과 인근 유럽을 여행할 수 있으니까 그와 결혼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나와 나이차가 많아서 싫었고 과거에 마약중독자였기 때문에 언제 또다시 마약에 손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의 문제다. 독일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어느 한쪽이 싫으면 쉽게 이혼이 성립되니까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독일에 돌아가자 지하실을 개조하여 살림집으로 꾸몄다. 원룸형이라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독립된 공간은 어림도 없었다. 독일에 가면 바로 직장을 구하겠다던 그는 실업률이 높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서 정원이나 손질하고 명상만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와 함께 사는 동안 그가 힌두 경전 [바가바드기타] 이외의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힌두교 음악 이외에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가끔 나에게 순수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 힌두교 신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둘 다 관심 없다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마리화나를 피운 것을 꼬투리 잡아 나는 훌훌 털고 그 집을 떠나 델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내가 인도에 가고 싶어서 방 핑계, 마리화나 핑계를 대는 거라고 원망하였다. 그는 붙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며 꼭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실업자 신세였고 만약에 베를린에 간다면 내년 1월에나 자리가 난다. 나는 소중한 시간을 희망 없는 남자에게 저당 잡히기 싫었으므로 마음의 큰 갈등 없이 그와의 잠정적인 이별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스웨덴 남자 로버트를 만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