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새겨진 핏빛 아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은오 앞에 승일이 나타난다. 누구든 남자로 보던 은오를 첫 눈에 여자로 알아본 승일과의 인연.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은오가 어설프게 승일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너무도 갑자기 사랑이 다가왔다. 사랑인지도 모르고 상대에게 빠져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따스한 빛이 되어주고 상처 입은 여자는 그 따스한 빛을 쬐면서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발췌글(소개글)
주방에서는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승일이 은오를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있는 동안 은오는 이 방 저 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의 집에 처음 와보는 은오로서는 승일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민망하고 쑥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들어왔다. 방들도 깔끔하게 정리가 잘돼 있어서 놀라웠다. 하지만 은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거실 창가였다.
서울에서 좀 떨어진 아파트라서 그런지 주변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차장에서 내릴 때 코끝에 닿았던 공기가 달콤했었다. 주위 풍경도 이토록 멋질 줄 몰랐던 은오는 창밖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청소는 승일 씨가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두 번 일하는 아주머니께서 오세요.”
“그렇구나. 참 깔끔해요.”
“내가 할 때도 있고요. 나, 살림 잘해요. 장가가면 사랑받는 남편 될 자신 있거든요.”
은오는 주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프런을 입고 있는 승일의 모습은 상상한 적이 없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청소 잘하고 주방일 해준다고 해서 사랑받는 남편이라고 할 순 없다고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 남편이 될 수 있는데요? 으음, 잠자리 테크닉이 뛰어나야 하나?”
“뭐, 뭐라고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뭘까요? 은오 씨가 알려줘 봐요.”
승일이 주방에서 나와 다가오자 은오는 슬슬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오지 마요.”
“왜요? 내가 가까이 가는 게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뭐요? 생각하는 거 있음 확실하게 말해보라고요.”
“지, 징그럽다고요.”
“풋. 뭐라고요? 내가 징그러워요?”
승일은 강시처럼 손을 뻗고는 은오에게 접근했다. 은오는 인상을 찡그리며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둘만이 할 수 있는 은밀한 장난이기에 싫지 않았다. 그에게 잡힐 찰나 은오는 주방 가스렌지에 올려놓은 것이 넘치는 걸 보았다.
“어어? 저거 넘쳐요.”
“네? 아, 이런. 잠시 타임!”
승일은 주방으로 허둥지둥 들어가 불을 줄이고 넘친 것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남자 집에 편한 마음으로 있는 자신도 신기했고 말이다.
“밥 먹기 전에 차 한잔할래요? 커피?”
“네, 커피요.”
“안 달려들 테니까 안심하고 앉아 있어요.”
“네에.”
“이럴 땐 말도 잘 듣네.”
승일이 코를 찡그리는 걸 보고 은오는 웃었다.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정감이 있고 귀여웠다. 저 남자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라면 외모로 판단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일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나와 은오의 옆에 앉았다. 은오가 살짝 옆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려 하자 승일은 그녀를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왜요?”
“어딜 도망가려고요. 이렇게 바짝 앉아 있어야 정이 더 드는 겁니다. 난 은오 씨하고 정이 아주 많이 들고 싶은데 은오 씨는 싫어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가만히 있어요.”
승일은 대뜸 은오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아! 편하다. 내 머리에 든 것이 많아서 좀 무겁겠지만 참아요.”
“네에?”
“요즘 머릿속에 더 들어가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손은오라는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들?”
“뭐라고요? 엉큼하네요.”
“늑대니까요.”
“늑대라서 좋아요?”
“늑대라서 행복하죠. 늑대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거든요.”
“됐고요. 미니어처 보여주세요.”
“으음. 솔직히 창피한데.”
“어서요.”
승일은 일어나 앉아 은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걸 보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집으로 데리고 오긴 했다. 유치하고 어린애다운 공간을 보여주는 게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봉인해 둔 곳을 개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 걸음을 떼었다.
은오는 문고리를 돌렸을 때 잠겨 있던 방 앞으로 오자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승일이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방문을 열자 고개를 들이민 은오는 깜짝 놀랐다. 미니어처의 신세계? 미니어처들로 꾸며져 있는 방은 너무도 멋졌고 은오를 황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