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이끈 조선의 왕족부터 양반, 그리고 민초들까지
그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는가!
자살에 대한 관점은 민족이나 문화, 종교, 법, 사회제도 등에 따라 다양하다. 대개 서구 사회에서는 기독교, 아시아에서는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영향으로 자살을 범죄 내지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왔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자살을 어떻게 봤을까? 인조 대의 문신 홍호는 마음가짐에 따라 자살을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높은 등급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 그다음 등급은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 마지막 등급은 형세가 반드시 환난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는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음에도 조선시대에는 왕족을 비롯하여 양반, 여성, 민초들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왕족으로 태어나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자결을 강요받은 인성군,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자결을 택한 유성원, 기묘사화 후 남편이 사약을 받고 죽자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따라 죽은 김정의 부인 송씨,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아내지 못해 몸을 던진 신립 장군 등이 그 예로, 그들은 하나같이 명예롭거나 또는 안타깝게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 책에서는 자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에서 배제되었거나 잘 드러내지 않았던 자살을 통해 조선시대의 정치적·역사적 사건의 이면과 사회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출간 의의와 이 책의 특징
역사가 기억해야 할 조선의 죽음과 희생정신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삶, 돈, 사랑 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체제 저항의 수단, 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한 이유에서 선택한 자살이 많았다. 대부분 조선의 집권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거나 역모에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당쟁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며, 힘없는 백성들은 체제 저항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했다.
이 죽음들을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들이 무엇을 지키고자 했고, 말하고자 했던 외침이 무엇이었는가? 역사는 이 죽음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비극을 어떻게 애도하고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사연을 넘어 정치 상황과 사회문제, 풍속, 가치관 등의 이유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사회는 결코 정상적인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만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원인과 이유는 조금씩 달라졌어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회적 모순과 압박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자살을 방조하는 현상이 아직까지도 팽배한 지금, 자살에 대한 고민은 우리 사회가 모두 함께 해결해야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 미리보기
_ 왕족으로 태어나 희생당한, 광해군의 세자 ‘이지’
조선시대에는 왕족 및 권력의 암투에 희생당한 비극적인 죽음이 많았다. 광해군 15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세운 정변인 인조반정으로 이지는 폐세자가 됐다. 이지는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운의 인물 중 유일하게 자결한 사람으로, 그로 인해 아내인 폐비 박씨, 그리고 폐비 박씨의 아버지 박자흥, 박자흥의 아버지 박승종까지 자결하게 된다.
_ 정치적 암투와 그 패자들의 죽음, 유영경
조선시대 당파 싸움은 굉장히 치열했다. 각 당파는 상대 파를 용서하지 않고 아예 뿌리를 뽑아버려야 훗날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다. 유영경은 당시 소북파의 영수였는데, 대북파와 세자 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었고, 막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에 의해 자결하라는 명을 받는다.
_ 여인들의 한스러운 자결, 김정의 부인 송씨
남성들에게 사회, 정치적 명예가 중시되었듯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는 정절이었다. 이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거나 몸을 더럽혔을 때 선택한 자살은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기까지 했는데, 이 책에서는 정절을 지킨 여성뿐 아니라 의로운 죽음을 택한 여성들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고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약을 받은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정의 부인 송씨를 비롯하여 정난정, 장희빈, 화순옹주, 박문랑, 황해도의 열녀 등 126인의 자결에 대해서 재조명하고 있다.
_ 전쟁터에서의 의로운 결단, 신립? 신급 형제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의로운 결단으로 자살한 경우는 흔치 않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을 막아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몸을 던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무예 닦기를 좋아한 신립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수적 열세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자 오랑캐에게 잡혀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남한강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의 형인 신급도 적병을 만나 쫓기다 절벽해서 투신했다.
_ 민초들의 마지막 선택, 군역으로 인한 죽음
요즘 병역 기피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요즘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군역의 고통은 자신의 목숨과 일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었다. 조선 중종 때에는 병사와 수사의 횡포 때문에 자살하는 수군들이 많았고, 또 군대에서 번을 서는 대신에 바치던 돈인 번가의 독촉도 매우 심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처자를 이끌고 목을 매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권세가들이 글을 읽는 동안, 힘없는 백성들은 군역을 질 수밖에 없던 조선시대의 민초들의 고통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