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본래 단편인가 장편인가?’ 이 물음을 뤼미에르에게 묻는다면, 그는 아마 영화가 짧든 길든 관객에게 충격적이라면 그것은 같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화는 애초에 이미지의 거대함이 시각적으로 관객을 덮치는 충격의 체험이었다. 15미터 길이에 불과한 짧은 포토그램들이 움직일 때 그것의 매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러나 영화가 길어지면서 그 거대한 이미지가 주는 매혹은 점차 사라져 버렸고 그 매혹적인 자리에 길고 긴 서사가 대신 들어섰다. 이미지는 설명과 논리가 뒤따라야만 하는 운명으로 몰락했다. 이야기가 영화의 이미지들을 집어삼킨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강력한 내러티브에 종속되었다. 이야기의 힘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이며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극, 회화, 음악, 문학, 건축, 무용이라는 예술의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나 그들을 바라보며 성장했다. 예술의 끝자락에서 영화가 제7의 예술이라는 위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에 특별한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적인 요소를 담은 영화의 움직임은 그 어떤 예술보다 대중적이라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은 “현대의 영화는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고 말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영상기록매체의 발달로 우리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다만 예산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영화를 짧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
단편의 힘은 이 ‘불행한 기회’ 속에서 생겨난다. 단편은 제한된 장면에서 압축된 이미지로 은유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의 한계가 때때로 목을 죄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슬에 얽매이지 않고 분연히 그 속박을 끊어낼 때, 비로소 감독은 시인이고 화가가 된다. 불행한 이 예술가가 그려낸 이미지의 힘은 강력해진다. 단편영화의 여과되지 않고 검열되지 않은 표현은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기존 영화의 이미지를 비틀고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단편영화의 이 힘은 최초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단편영화가 빚어내는 찰나의 인상과 메시지들을 관객들과 함께한 지 어느새 15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단편영화는 예술영화’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상업영화 고유의 생태계에서 발생한 장르를 훔쳐 왔다. 예술 지향과 대중화라는 경계의 외줄타기에서 장르의 역할은 영화제를 좀 더 균형적이고 관객에게 친근하게 만들었다. 장르는 결과적으로 이 짧은 영화들을 대중과 쉽게 만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소통의 대문을 만든 셈이 됐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동료들과 후배들이 이 대문의 프레임을 짜고 못질을 하며 경첩을 달았다. 집행위원들의 지속적인 역량과 시간의 기부가 없었더라면 영화제는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허락된 짧은 지면을 빌어 그들의 진정한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특히 우리들에게 무대를 마련해주며 ‘후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고수해준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님께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지금까지 총 11,075편의 단편영화를 출품해준 연출가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연기의 혼을 사른 연기자분들과 호명되지 못한 은막 뒤 기술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만든 대문을 열어젖히고 그동안 걸어왔던 뒤안길을 돌아보려 한다. 스크린에 그려진 미쟝센 뒤편에 사리고 있던 감독 고유의 숨겨진 본질을 뒤져보자는 의도는 결국 그들에게 카메라 대신 마이크를 건네어보는 일이었다. 본 단행본은 인터뷰의 형식을 갖췄지만 의식의 검열 없이 행해졌던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 그대로를 담으려 노력했다. 조금은 거칠 수 있는 대화의 결을 굳이 손대지 않은 까닭은 그들의 생각을 윤색하여 전달하기보다 단편영화의 정신과 걸맞게 날것 그대로의 표현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우선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뿌리가 짧은 이미지로 시작되었음을 상기하듯 연출가들에게는 자신의 뿌리였던 단편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의미 있는 대담이었기를 바란다.
다들 단편영화가 점점 길어진다고들 말한다. 물론 이 현상은 매체의 눈부신 발전이 가져온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여전히 단편영화의 매력은 짧은 시간 속에 담아내는 간결한 은유와 발칙한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초의 영화가 쉬었던 짧고 가빴던 호흡이 지금 단편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들에게 또 다시 필요할지 모르겠다. 앙드레 바쟁은 “단편영화의 힘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분방한 정신이 어울려 만들어낸 연금술의 신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이 말을 언제까지고 믿고 싶다.
2016년 6월 여름의 초입에서
운영위원장 이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