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는 스승과 제자 간
창조적 배신의 역사
수많은 사제관계를 통해서 지식의 진보와 문명의 발달이 이뤄졌다. 세상을 바꾼 획기적인 사상과 발견, 발명의 역사는 스승과 제자로, 다시 또 다른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한 편의 거대한 릴레이 경기를 보는 것처럼 긴박한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한 조가 되어 만든 수많은 공동작품들이 모여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이 갤러리는 수십만 개의 크고 작은 퍼즐 조각들로 구성된 거대한 그림 한 점만 소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맞물린 전체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리고 퍼즐 조각이 본질적으로 네모반듯한 정형성을 가질 수 없듯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는 단순히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로 규정할 수 없는 기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거나 혹은 증오하면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세계와 가치관을 완성해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라가면서 그림자를 자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제자는 스승이 가지 말라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평생 스승과 반목한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간 숙명과도 같은 이러한 갈등과 도전, 충돌, 파괴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왔다. 따라서 세상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제자와 가르침을 거스르면서 스승과 대립한 제자들의 치열한 삶 속에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과 원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계승과 발전, 배신과 창조로 대표되는 이 묘한 관계 속에서 스승과 제자 개인의 삶과 운명뿐만 아니라 역사의 도도한 흐름도 관찰할 수 있다.
불멸의 스승을 뛰어넘다!
청출어람으로 배우는 역사와 창조의 순간
스승과 제자. 어떤 인간관계도 이렇게 이율배반적일 수는 없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로 이루어졌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는 말에서 유래된 청출어람(靑出於藍) 자체에 사제 관계의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다. 스승을 뛰어넘는다는 은유적 표현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행위가 배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새로움의 탄생과 구물의 사라짐을 넌지시 예고한다.
스승은 제자를 아끼고 자신의 평생의 깨달음과 지식과 경험을 온전히 다 전수하면서 끝까지 지켜보지만 언젠가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감하고 때로는 기꺼이 본인 자신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세상을 부숴주기를 기대한다.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르고 감사하면서 가르침을 흡수하지만 서서히 스승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지금의 자리를 부정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기를 꿈꾼다. 보통의 인간관계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배신자로 불리겠지만 창조의 세계에서는 개척자, 선구자로 기록된다.
제자가 결국 스승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새로운 시대를 보는 안목과 변화를 주도하는 용기다. 제대로 된 스승이라면 퇴물로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불멸의 영광을 얻는 방법임을 안다. 또 제대로 배운 제자라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또한 부숴야 할 것 중에는 스승의 가르침도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렇듯 제대로 된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도전의 씨앗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스승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1. 정도전은 스승인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하지만 현상 유지를 바랬던 스승과는 달리 그는 변화를 꿈꿨다. 스승이 보지 못했던 모순을 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승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는 극한의 결심이 필요했다. 이색과 반목한 정도전에게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꿈꾼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스승과 결별했다. 스승의 가르침보다 더 큰 목표를 이루는 소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 한때 송시열의 후계자라는 얘기까지 들었던 윤증은 몇 가지 오해와 갈등을 거치면서 스승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송자’라고까지 불리면서 추앙받던 송시열과 대립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윤증은 아버지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등을 돌렸다.
3. 김옥균에게는 풍운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안동 김씨의 일원이라는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스승인 박규수에게 배우지 않았던 혁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가진 것을 포기하고 모험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틀을 깨고 나옴으로써 더 큰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4. 우륵의 제자인 계고는 스승의 음악을 멋대로 고쳐버렸다. 그러면서 스승인 우륵이 가지고 있던 가야의 색깔을 빼버리고 신라의 색깔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계고 덕분에 가야금은 가야와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5. 평범한 제자였던 김장생은 당대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송익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김장생은 끈기 있게 배웠다. 덕분에 노비이자 죄인의 후손으로 태어난 스승 송익필의 뒤를 이어 예학의 대가이자 산림의 거두로 설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평범함을 탓하기만 했다며 결코 이룰 수 없는 업적이다.
6. 진도라는 궁벽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허련은 그림 솜씨 하나로 김정희라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정치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허련이 그의 제자가 됐을 때는 이미 다른 제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허련은 그들을 제치고 김정희가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 붓 하나로 승부를 보겠다는 집념을 보인 덕분이다. 그는 스승의 뜻을 따라 남종화의 맥을 잇겠다는 의미로 이름과 호조차 바꿀 정도의 결의를 보였다.
7. 이승희와 김창숙은 아마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시골의 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혼란기였다. 스승은 자신을 중용하지도 귀를 기울여주지도 않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제자는 그런 스승의 뜻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따랐다. 나라를 잃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스승과 제자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 고려 최초의 세계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제현은 스승인 백이정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 성리학을 한민족의 DNA 속에 장착시켰다.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이 가져온 변화였다.
9. 김굉필과 조광조가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하지만 조광조에게는 배움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승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집념이 어떤 측면에서는 스승을 뛰어넘는 운명과 맞닥뜨리게 만든 것이다.
10. 허균은 미천한 스승 이달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다른 미천한 사람들을 위한 혁명의 길에 나선다.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세상을 향한 울분을 읽은 것이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랐지만 자신의 길을 갔다. 그것 또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잃어버린 관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말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한 몸이라는 다분히 유교적인 개념이지만 스승의 영향력이 혈연과 최고의 권력에 버금갈 만큼 크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단어이다. 기술의 발달로 세대 간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많아졌다고 하나 한 인간의 정수는 그 사람의 삶 자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한 온전히 주고받기란 힘들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왜 탁월한 사상가와 행동가, 혁신가가 나오기 힘든지 유추할 수 있다. 탁월함은 체계적인 커리큘럼이나 단계적인 학습 같은 시스템적 교육의 결과라기 보다는 탁월한 한 인간과 그 인간을 본받고 따르고자 하는 또 다른 한 인간의 인격적 만남이 빚은 부속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