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서 시작해 20세기 유물론의 정점에까지 올랐던 스피노자
누구보다 신을 사랑했지만, “죽은 개” 취급을 당하며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철학자!
그러나 근대의 노발리스는 그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재평가했으며
20세기 유물론자들은 그를 유물론 철학 한가운데에 우뚝 세우기까지 했다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을 여러 점의 삽화와 곁들인 이 책은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그의 주요 저서들을 따라 읽으며
그의 뛰어난 통찰에 다가가게 만든다
거대한 폭풍 속에서 고요한 눈과 같이 살다
스피노자는 흔히 ‘비운의 철학자’ 혹은 ‘고독과 은둔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유대교 공동체에서 저주와 함께 파문을 당했다. 또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뿐 아니라 대중까지도 그에게 암스테르담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의 생애는 갖은 모욕과 배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았다. 정치·사회적으로 격랑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지만 쉬이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다.
암스테르담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랍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20세 때 그는 좀더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해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인 반 덴 엔덴의 학교에 입학했다. 17세기의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보수적인 분위기의 유대교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스피노자는 이단으로 판명받아 파문당하고, 광신도로 추정되는 자객에게 습격을 받는 등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고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일련의 사건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이후 스피노자는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어인 바뤼흐Baruch에서 라틴어인 베네딕투스Benedictus로 바꾸고, 거처 역시 암스테르담에서 레인스뷔르흐·포르스뷔르흐로 옮겨 그곳에서 폭풍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저서인 『신학정치론』은 금서로 지정되어 불살라졌고, 『에티카』의 출간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정치론』은 집필 도중 스피노자가 사망해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추후 그의 이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를 비근대적 유물론자로 규정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으로 보았으며, 네그리는 대중 자신의 지성과 능력으로부터 자유의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구성의 정치학’이라 여겼다.
그러나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의 저자는 이 책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계보를 세우거나 요약 혹은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오로지 스피노자를 ‘읽는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며, 어렵게만 느껴지던 스피노자의 철학을 ‘신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라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이 책은 주요 철학적 논제들을 실제적인 삶 자체에서 끌어낸 스피노자를 따라서, 그가 실제 고민했던 명제를 탐구하고 실제로 내렸던 답을 찾아간다.
스피노자의 자연론-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스피노자의 목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주목한 대상은 신이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집착하지만 유한한 존재는 인간에게 항구적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하고, 때문에 인간은 일희일비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인 신을 향한 사랑은 인간에게 참된 행복, 즉 지복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신은 기존의 철학적·종교적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신과는 다르다. 이에 앞서 우선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존재의 가치를 평가할 때 유용성의 여부를 큰 기준점으로 삼게 된다. 하지만 자연 만물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부여한 ‘목적’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적 사고의 바탕에 인간중심적 사고가 있음을 인지했다.
분명 스피노자는 신을 자연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피노자가 신을 자연 만물과 동일시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다만 신이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자연 만물을 산출하는 원인인 동시에 그 결과인 자연 만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다. 신은 자연과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며 인간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의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자기본성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초월적 신의 개입으로 인한 우연적 현상으로 설명되던 물체의 운동을, 스피노자는 물체들 간의 역학관계에 따른 자연학적 현상으로 해석한다. 그에게 있어 운동과 정지는 개별 물체의 내적 원리다. 자연 만물이자 신은 제각기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즉 다른 개체와 맺는 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산출된다.
스피노자는 재정립한 신 개념을 바탕으로 각 개체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여, 그동안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걷어낸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참된 행복이 신에게 바치는 사랑이라면, 거기서 행복을 얻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의 두 얼굴-신체와 정신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 속성인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주목한다. 서구의 전통적 사고는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이 신체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앞서 언급한 신 개념과 연관지어 이 명제를 반박한다. 신이 자연보다 우월하지 않듯이 인간 역시 자연 만물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와 정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존재가 연장과 사유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정신과 신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신체와 정신은 동등하고 평행한데,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평행론’이다. 이는 곧 모든 속성이 동등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은 제각기 질적으로 다를 뿐, 지위상 동등하다. 그렇기에 사물이 각각의 질서와 연결에 따라 이어지듯 관념 역시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결에 따라 진행된다.
정신과 신체가 동등하다고 여겼던 만큼 스피노자는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신체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신체의 본성을 인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본성이 서로 다른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체가 인간의 신체라고 보았다.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정신 역시 무수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관념들은 수많은 관념의 집합으로 신체의 자극에 따라 생겨난다. 즉 인간은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이자 ‘공동체’이며,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는 개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개인과 공동체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통념을 뒤바꾼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결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며 신체와 함께 해체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기존 철학에서 제기되던 ‘참된 인식’이란 개념을 비판한다. 가장 확실하고 참된 것이란 다만 이성의 구별에 불과하므로, 실재적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적합성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원인을 통해 결과가 설명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관념이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각 관념이 발생한 원인을 아는 것이다. 관념 자체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 오류는 인간이 받아들인 부분적인 결과를 거꾸로 원인으로 간주하면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사물 간의 인과관계를 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내적 파악은 사물의 공통 개념을 간취함으로써 가능하다. 공통 개념의 인식 범위가 넓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된다. 이 공통 개념은 유類나 종種과 같은 외적 유사성을 뜻하는 보편 개념과는 다르다. 두 개념을 혼동하면 결국 근본적으로 부적합한 관념인 추상 개념이 생겨난다.
우리 모두는 욕망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은 과연 자유의지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사고하는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무지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의지가 무엇이며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외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믿음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데, 진정 자유로운 삶은 인간의 내적 본성·내적 필연성에 대해 탐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양태mode’라는 개념을 말한다. 존재의 두 가지 방식 중 자립하지 못하고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언젠가는 소멸된다. 이것이 양태다. 양태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이 속한다. 양태와 달리 자립하며 존재하는 것을 실체substance라 부른다. 실체는 원인이며 양태는 그 결과다. 스피노자는 양태가 모두 신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능력은 곧 양태들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능력이다. 그렇지만 양태들의 능력이 신의 능력과 동일하진 않다. 어디까지나 양태들은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즉, 모든 사물에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코나투스Conatus’라 일컬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물도 코나투스 없이 존재하거나 활동할 수 없다.
이로 인해 모든 사물은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사물들은 존재 유지에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추구한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과 연결된다. 인간에게 있어 욕망과 코나투스는 같은 것이다. 욕망은 곧 인간의 본질로 작용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작용하는 힘으로 본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욕망은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능력의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며 이성에 반하는 행동이라 여겼다.
욕망과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변용affectio, affection이라 표현한다. 실체의 변용을 통해 무한한 양태가 발생하는데, 양태들은 언제나 다른 양태들 안에서 끊임없이 자극받고, 또 자극을 가한다. 이로 인해 생겨난 변용으로 다른 양태를 파악하고 이에 따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변용 능력은 그 양태의 실존 방식을 결정한다. 양태들은 변용에 따라 코나투스의 증대나 감소를 경험한다. 스피노자는 능력의 증감에 따라 갖게 되는 신체의 변용, 또는 변용에 대한 관념을 가리켜 아펙투스affectus, 즉 정서라 부른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서를 능동과 수동으로 분류한다. 스스로 행위하여 갖게 된 정서는 능동이지만, 다른 신체와 마주치면서 갖게 된 정서는 수동, 즉 정념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안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끊임없이 수동적 상태에 고착되도록 만드는 정념, 즉 ‘예속’을 경계한다.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며,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게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존재하거나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린다. 이로 인해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판단하는 능력을 잃고, 능력을 증대시킬 만한 적합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유익하고 해로운지 판단하는 능력, 즉 적합한 관념을 지녀야 한다. 그 출발점이 공통 개념이다. 공통 개념은 신체들 간의 공통된 것에 대한 인식이다. 다른 신체와의 관계에서 공통 개념을 많이 인식할수록 인간은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된다. 공통 개념은 기쁨의 정서에서 온다. 기쁨의 정서는 무엇이 인간에게 유익한 신체인지를 알려주고 인간이 그를 위해 노력하도록 만든다. 또 공통 개념은 반대되는 신체를 이해하여 결합할 수 있게 해주고, 그로부터 능동적인 정서까지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만든다. 스스로의 능력에서 나오는 능동의 정서는 더 많은 공통 개념을 인식할 수 있도록 새로운 능력을 신체에 부여한다.
즉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먼저 인간 자신이나 정념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한 뒤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스스로가 가진 능력과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종교와 사회를 위하여
스피노자가 제시한 진정한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신체와 마주친다. 이 부분에서 그의 철학은 정치학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줄 수 있는 사회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을 통해 이야기한다.
먼저 스피노자는 ‘미신이 되어버린 종교’를 원인 분석을 통해 비판한다. 미신은 공포를 그 발생 원인으로 삼는다. 공포의 정서는 자신의 존재가 파괴당하거나 위협당한다고 느낄 때 생겨나는 것으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을 예속한다. 이런 강렬한 정서로 유지되고 있는 미신에서 생겨나는 것이 ‘처벌과 보상의 종교’다. 스피노자는 신을 인간을 처벌하거나 보상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그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처벌과 보상의 종교는 대중의 무지와 공포에 의해 유지된다. 이는 결국 인간을 종교에 예속된 노예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종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미신의 예속에서 벗어난 참된 종교를 희망한다. 인간들이 각자 신앙에 대해 자유롭게 판단해야 하며, 참된 종교란 외적 형식이 아닌,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의 실천 여부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참된 종교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그 자체로 삶이 된다.
스피노자는 사회 조직 전과 사회 조직 후의 사회를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로 구분한다.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던 인간은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인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이행했다고 표현한다. 이런 자연권 개념은 토머스 홉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명백히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기본적으로 그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룰 때 개별 신체의 능력을 뛰어넘는 사회적 신체가 생겨난다고 여겼으며, 자연권은 타인에게 절대 양도될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성 상태에 도달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러나 사회 상태 아래서 국가를 설립하면 이성 상태에 도달하기에 유용한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스피노자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국가가 최선의 국가라고 주장한다. 최선의 국가는 국가에 속해 있는 개별 인간들이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공동선을 추구하며, 이에 따라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돕는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국가는 시민들의 결합에 의해 이뤄진 공동체로서의 도시로, 일종의 지역 공동체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최선의 국가가 다만 국가가 지향해야 할 이성 상태라는 것은 이와 연관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사회의 좋고 나쁨을 사회 구성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덕을 행함으로서 능동적인 기쁨을 누리는 자유로운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최선의 국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최선의 국가에 대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모든 고귀한 것들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즉,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문 최선의 국가야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다.
책을 펴내면서
1장 스피노자, 고요한 폭풍이여!
1. 추방된 자의 평화-스피노자의 생애와 사상
격랑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암스테르담 | 유대교가 거부한 유대인 철학자 |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 | 공화정의 실패와 『신학정치론』| 스피노자가 꿈꾸던 세상 | 고요한 폭풍과도 같았던 삶
2. 반시대적 사상가의 고독
-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영향
2장 신은 어떻게 자연이 되는가?
스피노자의 목적론 비판 | 신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서 | 신을 자연이라고 부르는 스피노자 | 신과 피조물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 신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 변용으로서의 양태| 내재성, 양태들의 바다 | 개체의 발생 원리로서의 "운동과 정지" | 어째서 윤리학인가?
3장 신체 없는 정신과 정신 있는 신체: 신체 없는 정신은 자유로운가?
1. 신체 없는 정신은 자유로운가?
데카르트에게서의 신체와 정신 | 신체와 정신은 평행하다 |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 영혼은 과연 불멸하는가? | 허위 또는 거짓 관념이란 관념의 혼동에 불과하다 | 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 혹은 공통 개념으로 |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2. 아담이 선악과를 딴 이유는?: 아담이 몰랐던 것들에 대하여
"선과 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아담이 오해한 것 | 좋은 마주침과 나쁜 마주침에 대하여
4장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1. 코나투스, 욕망에 대한 저주를 넘어서다
능력에 대하여 | 코나투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 욕망은 과연 사악한 것일까?
2. 욕망의 존재론과 기쁨의 윤리학
우리가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 인간은 정념의 노예인가? | 공통 개념을 형성하려면?: 기쁨의 정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5장 미신 없는 종교와 공포 없는 국가
미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공포에 대하여 | 성서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들 | 신앙과 이성은 서로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 처벌과 보상의 종교를 넘어 |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자: 스피노자 vs 홉스 | 스피노자의 홉스의 사회계약설 비판 | 좋은 정치체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제안한다 | 스피노자의 절대적 통치와 민주주의
6장 자유로운 인간들의 덕과 지복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 | 지복과 영원성에 대하여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