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사랑한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마지막 장편소설.『기나긴 이별』은 1954년에 발표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지명도와 문학성에서 그의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전 작품과 달리 냉혹한 현실 인식과 염세주의가 가득한 『기나긴 이별』안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기사도적 정체성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을 심각하게 의식하는 필립 말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북하우스 판 필립 말로 시리즈, 그 완간의 의미
2004년 1월 <빅 슬립>을 시작으로, 북하우스에서 펴내온 레이먼드 챈들러의 장편소설 ‘필립 말로 시리즈’가 여섯번째 권인 <기나긴 이별>로 드디어 완간되었다. 과거에는 단순히 흥미 위주의 통속문학으로만 취급되면서 졸속기획과 저질번역이 난무하던 한국 추리소설시장 풍토에서, 추리소설 마니아들이 기획하여 장르문학 번역 경험이 풍부한 학자가 번역을 맡고 전문가가 성의 있는 해설을 붙인 북하우스 판 ‘필립 말로 시리즈’는 실로 기념비적인 성과를 남긴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 문화계가 엄청난 영향을 받아왔던 코드인 미국 영화, 특히 누아르 영화들의 모태는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와 같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었으며, 그의 글쓰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포스트모던 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챈들러의 작품들은 흥밋거리로서의 추리소설을 넘어서 ‘미국을 보는 새로운 눈을 마련했다’고까지 평가를 받는 걸작들이니만큼, 그의 작품세계를 오롯이 한국에 소개한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말에서 내려온 기사, 갑옷을 벗고 집으로
<기나긴 이별>은 1954년(영국은 1953년)에 발표된 챈들러의 마지막 장편으로, 지명도나 문학성 공히 필립 말로 시리즈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작품이다. 히치콕 매거진 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추리소설에 꼽혔고, 1955년에는 추리문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영예인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작품상(에드거 상)을 수상했으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대실 해미트의 <몰타의 매>,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과 함께 하드보일드 3대 걸작으로 꼽히기도 하는, 그야말로 추리문학의 명품 중의 명품이다.
<빅 슬립>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이 유머감각 뛰어나고 두뇌 회전이 빠른 청년탐정 말로의 터프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재미가 있다면, <기나긴 이별>은 냉혹한 현실 인식과 염세주의적 미학이 완성되는 데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리틀 시스터>에서 이미 외로움에 못이겨하는 모습을 슬쩍슬쩍 비추던 중년 탐정 캐릭터 필립 말로는, 마침내 그 탈출구를 ‘우정’에서, 아니 정확히는 우정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변질되어버린 모호한 감정에서 찾아낸다.
또한 <기나긴 이별>에서 필립 말로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심하게 이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 마흔두 살이 된 말로는 자신의 기사도적 정체성보다는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을 심각하게 의식하며,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도 끊임없이 ‘변해버린 세상’을 이야기하고 ‘변질된 감정’을 연기한다. 그 때문에 이 작품에서 실존주의 철학의 여운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 싸워온 세상 속으로 동화되어가는 모습은 어쩌면 타락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드보일드(hard-boiled,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뜻)의 정신을 구현했다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