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나는 대뜸 비명을 내지르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역시 이승이든 저승이든 삶이란 녹록지 않구나.
이곳에서의 죽음은 다양하다. 영혼이 파괴되는 것만이 죽음인 건 아니었다.
라야는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죽음이라고.
_본문
한류연과 이효성의 두 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선량한 시민에 납세 의무도 꼬박꼬박 지키며, 특별한 병치레 없이 살다 23살의 나이로 사망한 시연. 그런데 지옥에 와 있다. 시연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 만큼 살아서 나쁜 짓을 일삼았는지 불만이고, 죽었음에도 어째서 아직도 감각이 생생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이제 전생이 돼버린 삶에는 미련도 없고 원망도 없지만, 죽었으면 고이 영면이나 취할 것이지 왜 지옥 한가운데서 깨어나서 이따위 개고생을 해야 되냐고... 시연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자신을 지옥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섬뜩한 진주색 눈을 한 위협적인 놈이 그녀 앞에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라야. 놈은 그녀에게 정해진 길을 따라서 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넌 내가 정해놓은 그대로의 삶을 살다 여기로 돌아왔어. 그러니 앞으로도 그래야 정상이지 않아?’ 라며. 녀석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꽤 정확하게 알고 있다. 만취 중 주정부린 것도 모자라 구토까지 하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실까지. 시연은 그런 거지보다 못한 꼴로 자신을 비참하게 죽도록 운명을 예정해둔 이가 바로 라야임을 깨닫고 항의한다. 하지만 ‘데스노트’라도 되는 듯 자신이 예정해놓은 인간들의 운명을 한 치도 거스르지 못하겠다는 오만한 완벽주의자에, 생긴 것까지 번지르르한 염라대왕의 태연함. 그녀는 기가 막히다. 하지만 힘의 우위는 이미 갈렸다. 미천한 일개의 영혼이 광활한 지옥의 주인인 녀석과 대결하기엔 역부족.
시연은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자신이 전생에 뭘 했든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고, 신세한탄도 뒤늦을 뿐이므로. 그녀는 번개가 내리치고 하늘이 붉어지면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시바늘 비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 모든 걸 불태우는 사나운 모래폭풍 화염, 영혼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도살자들 등 무시무시한 고통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아프지 않고’(고통을 덜 받고) 살아남거나 거둬지려면 라야의 환심을 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는데. 라야는 시연이 지옥에 떨어진 직후, 라야 자신을 거스르는 반역자들의 모임에 시연이 동참했다고 의심을 품고 있다. 반박해 보려하지만 시연은, 지옥에서 로델 언니를 만나 일행과 잠깐 보냈던 때의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라야는 시연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그녀는 지옥에서 ‘고통 받지 않고’ 거둬들여지기 위해 일단 라야의 명령을 받아들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