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고도프레도 크리스토페르센 아를트는 1900년 4월 2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세기 전환기에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수십만의 유럽 이민 가운데 한 쌍이었다. 아버지는 갖가지 장사를 하였으나 제대로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고, 어머니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그중 둘이 무질서하게 팽창하는 도시의 빈민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아를트의 아버지는 그에게 공포심과 증오심을 심어준 듯하다. <7인의 미치광이Los siete locos>에서 주인공 에르도사인이 묘사하는 굴욕감은 아를트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분명하다. 그는 결국 불행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열여섯 살에 집을 떠난다. 이후 몇 년간 코르도바의 작은 오지 마을에서 지내다가 결혼하여 어린 딸을 데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다.
1900년대 초 아르헨티나는 사회적 분위기나 경제력에 있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를트가 알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제 미지의 대륙 남단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국제도시로 빠르게 변화해 갔다. 유럽 각국에서 다양한 인종과 이력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폭력과 범죄가 난무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책, 새로운 사상,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종교 및 정치 운동이 전파되었고,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사회는 문화적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를트는 바로 이 급부상한 사회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192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아를트는 기자로 일하며 나중에는 고정 칼럼을 쓰기도 한다. 1926년에 첫 번째 소설 <미친 장난감El juguete rabioso>이 출간되었으며, 1929년 10월에는 아를트 스스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여기는 <7인의 미치광이>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1930년 이 작품으로 제3회 부에노스아이레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에는 <7인의 미치광이>의 속편 <화염방사기Los lanzallamas>가 출간되었다. 그는 병치, 반어, 혼동을 통해 자신의 인물들을 근본적인 신념과 방향감각이 전혀 없는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일부로서 그려 보였다. 또한 그의 작가적 천재성은 아르헨티나 사회의 갈등을 한발 앞서 포착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 무렵 아를트는 배우 친구들의 권유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신문과 잡지에 계속 기고를 하면서 이후 몇 년간 몇 편의 희곡을 썼고 공연도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를 발명가라고도 생각했는데, 여성용 스타킹의 올 풀림을 막는 방법으로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를트의 삶은 안정적이지도 풍요롭지도 못했다. 그의 대표작들은 비평계로부터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희곡도 대부분 재공연되지 못했다. 그는 종종 고유한 ‘문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같은 작가들이 아르헨티나 문학의 가장 완벽한 표현으로서 조명을 받으며 연구된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아르헨티나 현대문학의 선구자로서 주목을 받았고, 그때부터 그의 문학 세계는 신세대 아르헨티나 작가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1942년 7월 26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