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정치학

도서정보 : 정희진, 권김현영, 루인,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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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에서는 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추궁당하는가?
누가, 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가?
‘미투 운동’의 성장을 기록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페미니즘의 실천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 조직 내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정계, 문화예술계, 스포츠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미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뿌리째 뒤흔들어 일상의 혁명을 촉구하는 매우 급진적인 운동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 이후 이렇게 전 세대의 여성들이 고르게 지지한 운동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투 운동은 법과 제도, 사회 질서 전반에 성차별적 통념이 얼마나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기’ 이후 피해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여전히 너무 크고,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거의 진전이 없다. 용기 있는 목소리가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쉽게 조성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직장 내에서 벌어진 권력형 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남성이면 노동 문제가 되고 피해자가 여성이면 성적인 문제로 둔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폭력 문제를 다루어 온 연구 모임 ‘도란스’는 네 번째 책 《미투의 정치학》에서 미투 운동을 둘러싼 주요 쟁점을 분석하고 미투 이후를 모색한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성적 자기결정권’,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는 한국 사회의 남성 연대, 사법부의 젠더 감수성, 젠더 폭력과 젠더 개념 등을 살펴봄으로써 성차별과 성폭력을 지속시키는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파헤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개인도 조직도 모두 이기적일 뿐, 정의로움을 찾기 어렵다고 느꼈다. 조직을 앞세워 개인을 희생하거나, 오로지 개인만 남게 될 뿐이었다. 내가 원한 건 이타적인 예민함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대선 캠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됐다. ‘미투’는 마지막 외침이었다. 이 싸움의 끝에는 정의가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는 미투 사건의 본질인 ‘위력’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집필 작업에 함께 참여했지만 끝내 원고를 담을 수 없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는 아직까지 법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본질과 맥락, 사실을 잘 다루고 있어 큰 위로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성범죄,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함께 이해하고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미투의 정치학》을 계기로 또 다른 가해자를 막고, 현재의 피해자를 위로할 수 있는 마법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 김지은(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피해자이자 고발자)

‘안희정 사건’의 의미와 미투의 정치학

2019년 2월 1일, 한국 여성 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바로 안희정 전 충남 도지사 성폭력 사건의 2심 판결이었다.
안희정 전 지사는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수행비서 김지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등 총 10건의 성폭력 혐의로 기소하여 4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2018년 8월 14일에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성폭행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관한 것이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폭행 피해를 당한 뒤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거나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한 점 등을 들어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은 공판에서 판결에 이르기까지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보수적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완전히 뒤집고 10개의 공소 사실 가운데 9개를 인정하여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안희정 전 지사는 법정구속 되었다. 전문가들은 2심 결과를 두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하는 판례가 거의 없는 한국 실정에서 중요한 지표가 될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현행법상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에서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위세를 말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한 성폭력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법정에서 ‘위력 성폭력’이 인정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안희정 사건은 피해자 김지은의 ‘미투’ 고발 이후 거의 1년간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다른 성폭력 사건 재판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안희정 사건을 비롯해 여러 ‘미투’ 사건이 법정으로 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성적 자기결정권’ ‘성인지(性認知) 감수성(gender sensitivity)’ 같은 낯선 개념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개념들은 성폭력 사건에서 재판부의 판단을 좌우하는 주요 쟁점이기도 하다. 《미투의 정치학》은 이러한 쟁점들을 중심으로 안희정 사건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아 여성의 ‘말하기’, 미투의 본질,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의미 등을 살펴본다.
안희정 사건은 조직 내 최고 권력자가 남성일 때, 그 권력이 임면권이라는 구체적인 권한부터 해당 업계 전반에 걸친 영향력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때, ‘부하 직원’의 위치에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얼마나 손쉽게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미투 사건을 떠올려보라. 문화예술계와 체육계에서 터져 나온 미투 대부분이 이 같은 구조에서 반복해서 일어났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은 특정 영역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
모든 운동은 맥락을 이해할 때만 효과를 낼 수 있다. 미투 운동 역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미투 운동의 핵심이 ‘위력’이며 그 위력의 작동 방식과 맥락은 젠더 인식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이 점이 이 책에서 안희정 사건이 주요 분석 대상이 된 이유다. ― 〈머리말〉(10, 21쪽)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권김현영)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기이다. 권김현영은 1심과 2심 공판을 방청하면서 사건과 관련해 무엇이 어떻게 언론에서 보도되는지, 피해자를 둘러싼 음모론이 어떻게 확산되고 어떤 프레임이 만들어지는지, 여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했다.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재판부에 대한 차가운 분노와 피해자를 향한 뜨거운 연대의 마음으로 써 내려간 이 글에서 필자는 언론의 지나친 개입과 왜곡에 주목한다. 언론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를 거치면서 여성 인권 의제는 가십거리로 전락했다. ‘정치 공작’이라는 프레임도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이 글은 성폭력을 “큰일 하는 남자의 사생활 문제”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 진보 남성 집단에 대한 정신 분석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정희진)은 미투 운동을 중심에 두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젠더 개념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희진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으로 가시화되는 폭력은 극히 일부임을 지적한다. 드러나는 폭력과 감추어지는 폭력은 누가 결정하는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성 사회가 관심을 두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이나 인권 침해가 아니라 해당 사건이 남성 사회에 얼마나 타격을 주는가이다. 가해자가 조직의 권력자인가, 사건이 남성 전체의 위신에 타격을 주는가 따위가 사건의 성격을 좌우한다. 가정 폭력 피해나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피해가 ‘미투’로 수용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춘향에겐 성적 자기결정권이 필요했다〉(한채윤)는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소설 《춘향전》을 통해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이 바뀐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한다. 또 ‘(여성이) 정조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 정도로 오해받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안희정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않은 것이 곧 동의를 뜻한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죄를 가해자에게 묻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피해자에게 죄를 묻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조를 지킬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를 비난하고 처벌했던 과거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 한채윤은 《춘향전》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지금껏 우리 사회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왜 남성에게는 전혀 없는 정조 관념이 여성에게는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젠더 폭력과 젠더 개념〉(루인)은 성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한다.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대외 침략을 지지하는 우익 페미니즘이나 성 역할을 이용해서라도 여성이 출세해야 한다는 ‘파워 페미니즘’과도 다르다. 루인의 글은 미투 운동이 대중화되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일부에서 페미니즘과 퀴어를 나누어 진영화하려는 흐름을 비판한다. 루인은 왜 어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젠더 폭력이 되고 어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다. 곧 누가 진정한 ‘여성’이며 폭력의 개념은 누가 정하는가라는 여성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위력은 반드시 행사된다
-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연구 모임 ‘도란스’는 이 책에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이자 고발자인 김지은의 글을 실을 예정이었다. 김지은은 미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당사자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간 날조된 여론을 바로잡는 글을 썼다. 하지만 소송이 진행 중이고 결국 대법원까지 가게 될 터인데(실제로 2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자 피고인 안희정의 변호인단은 즉각 상고했다) 김지은이 쓴 글로 인해 다른 법적 분쟁이 생길 수 있다는 법조인들의 우려에 따라 결국 싣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 안희정 사건 1심과 2심 재판을 방청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글을 통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재판이 되어버린 1심 진행 상황과 이 사건을 계기로 뚜렷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적 통념을 확인할 수 있다.

누가 무엇으로 재판을 받았나
피고인 안희정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끝내 휴대폰을 제출하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 폐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증거 인멸의 우려 등을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 그러나 구속 영장을 심사한 재판부는 피의자의 방어권이 충분히 행사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 …… 공동대책위원회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안희정의 휴대폰이 폐기된 것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피해자의 사생활 자료 전체를 제공해야 하는지 여부로 공방을 벌인 것 자체가 ‘피고인’ 재판이 아니라 ‘피해자’ 재판으로 흘러가는 시작이었다고 비판한다. (45, 46쪽)

성폭력 가해자의 두 얼굴
어떤 성폭력 가해자들은 조직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유형의 성폭력 가해자들은 조직 내에서 자신이 권력자가 아니라 평등한 상사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어 한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여직원에게는 원치 않는 성적 접근을 상습적으로 하면서 한편으로 다른 직원들에게는 권위적이지 않은 좋은 상사의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되면 조직 전체가 그 여직원이 겪고 있는 피해는 보지 않으려 한다. 한 사람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상황을 만들어놓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다. (56쪽)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판결
존재하는 위력은 반드시 행사된다. 그 점을 재판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피 신청 같은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닌가. 위력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행사되기 때문에 당사자들 간에 직접적인 업무 관련성이 얼마나 있는지 살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위력이 존재만 하고 행사된 적이 없다는 것이 1심 재판부 판결의 전부였다. 애초에 위력에 의한 간음죄 자체가 폭행이나 협박 등 명시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위력을 활용해 성을 착취하는 경우를 법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따라서 “위력이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만든 목적 자체에 위배되는 판결이다. (60쪽)

‘정치적 음모’라는 프레임
안희정 1심 재판에서 피고소인 안희정 측 변호인들은 고소인 김지은이 박근혜 정부 시절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을 정치적인 성향 문제로 만들고자 했다. …… 그러나 피해자가 실제로 특정 세력과 결탁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은 바로 진보와 인권을 표방했던 그들을 지지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여성 지지자들을 남성 정치인 개인의 매력에 끌린 일종의 팬덤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시가 가능했을 것이다. (40쪽)

한국 진보 남성 권력과 미투 운동
소위 진보 남성 엘리트들은 자신의 지지자, 팬, 제자, 학생 들이 미투할 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다. 한때 좋아하고 지지하고 따르던 이들이 선생님, 상사, 대표를 향해 미투를 제기했을 때 이것을 성폭력의 문제로, 남성 기득권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진보 남성 정치인들은 (보수와 다름없이) 미투를 ‘여자 문제’로 이해한다. “큰일 하는 남자가 아랫도리 간수를 제대로 못한 일”로 취급한다. 진보 남성 엘리트들은 대체로 이를 “좌절된 사랑 때문에 생긴 복수” 정도로 생각했고, 다소부적절한 수준의 여자 문제 혹은 스캔들이라고 생각했다. (67, 68쪽)

드러나는 성폭력, 가려지는 성폭력
-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여전히 사소한 이슈다. 미투 운동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기존의 여성 운동을 넘어, 대중 운동이자 문화 운동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이어지면서 도저히 ‘사소화’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런데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심각한 폭력 중 하나인 가정 폭력과 성 산업 종사 여성에 대한 폭력은 ‘미투’에 수용되기 매우 어려운 사안이다. 미투 고발은 가해자가 특정 커뮤니티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거나, 그에 준하는 유명세를 지니고 있어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경우, 그리고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을 때로 국한된다. 정희진은 이러한 미투의 ‘선별성’에 주목하고 이유를 분석한다.

범죄 신고가 혁명이 되는 사회
‘미투 혁명’.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혁명’보다 더 정확한 명명은 없을 것이다.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법치국가에서 미투는 비상식적인 운동이다. 성폭력과 성적 괴롭힘/학대/추행은 모두 법에 명시된 명백한 불법 행위다. 거듭 말하지만, 미투는 범죄 신고 ‘캠페인’일 뿐이다. 절도나 사기 피해를 당하면 (귀찮아서 안 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상식이고, 시민은 신고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피해 사실을 말하려면, 인생을 걸거나 커리어와 평판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83, 84쪽)

남성과 여성의 ‘자의성’은 같지 않다
미투 운동에 반발하는 남성들이 가장 흔히 하는 주장은 다음 두 가지다. “미투는 여성들의 자의적(自意的)인 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 문제가 남녀 대립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 논의 구도 자체가 틀린 주장이다. 재현되는 모든 이야기는 자의적, 부분적 지식이다. 여성의 이야기를 자의적이라고 판단하는 이들의 인식과 판단 역시 자의적이다. “모든 이야기는 자의적이라 등위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적 위치에 따른 자의성을 고려하는 적극적인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갑’의 자의성과 ‘을’의 자의성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89쪽)

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추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상황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해야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렇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피해자에 대한 호기심, 통념에 근거한 여론 재판은 법적 심판 이전의 일상 문화다. 유아 성폭력이거나 피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 절도나 사기 사건, 즉 다른 형사 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95, 96쪽)

남성 사회가 선별하는 피해자
여성 검사의 미투는 검찰의 망신이었기 때문에, 그 망신이 싫은 다른 남성들이 ‘나선 것이다’. 여성 검사가 가정 폭력 피해자라면 우리 사회는 관심이 없다. 가정 폭력은 집안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을 당했다고 TV에 나와 폭로하는 전문직 여성도 드물 것이다. 아니, 그런 문제에 관심 있는 매체가 ‘없다’. 많은 경우 여성의 인권은 강남역 살인 사건처럼 아무 이유 없이 낯선 남성에게 살해당하거나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을 피해 다니다가 살해당해야만 가시화된다. (101, 102쪽)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무엇인가
- <춘향에겐 성적 자기결정권이 필요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왜 정조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 고학력 엘리트 여성인데도 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질문했다. 그러고는 피고인(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자기 권리를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므로 가해 행위는 없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바로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성적 자기결정권’은 법률에서뿐 아니라 성교육에서도 널리 쓰이는 개념이지만 그 뜻이 정확히 알려지지도, 또 제대로 쓰이지도 않는 듯하다. 한채윤의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한채윤은 고전 소설 《춘향전》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면서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성적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설명한다.

춘향이 지키려 한 건 정조가 아니다
익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과 달리 춘향은 이몽룡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여인이 아니다. 한번 맺은 언약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순진한 여인도 아니다. 현직 사또의 자제와 사귀는 데 어떤 위험과 이익이 따르는지 바로 파악할 만큼 현명하고,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고 합방을 실행할 만큼 과감하며,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뒤탈이 생기지 않을지까지 치밀하게 살펴보는 냉철한 인물이다. …… 어쩌면 춘향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꿈꾸고 결심했던 삶이 아닐까. 사회가 정해놓은 ‘정조’가 아니라 신분의 귀천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119, 120쪽)

정조권을 넘어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90년 간통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1990년 9월 10일 선고)이었다. …… (판결문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 1항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규정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려나가는 자율적 주체임을 존중받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자기 삶의 주체로서 당연히 사랑, 연애, 결혼, 성관계를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할지 혹은 하지 않을지를 타인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131, 132쪽)

누구를 위한 저항인가
가부장제가 만든 강력한 정조 이데올로기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원하지 않는 성관계는 최선을 다해 거부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마치 기계가 스위치만 누르면 작동하듯 여성은 정조를 지키려고 본능을 작동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 까닭에 법은 거부의 행동은 즉각적이고 동의는 침묵으로도 표현된다고 이해하며 항거 불가능성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다룬다. …… 대체 피해자에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저항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그런 강력한 저항을 원한 법은 막상 피해자가 목숨과 인생을 걸고 어렵게 피해 사실을 고발했을 때는 왜 그 저항을 인정하지 않는가. (136, 137쪽)

성적 자기결정권은 ‘거부할 권리’가 아니다
흔히 성적 자기결정권을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이 오해를 불러왔다. 사람들은 거부하지 않았으니 너도 원했던 것이 아니냐 혹은 원하지 않았는데 왜 거부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권리가 있는데도 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는지 그 속내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누구에게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곧 누구에게나 ‘상대의 거부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 피해자에게 왜 거부하지 않았냐는 질문은 가해자에게 거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139, 140쪽)

누가 ‘여성’이고 무엇이 ‘성폭력’인가?
- <젠더 개념과 젠더 폭력>

최근 들어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성 소수자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은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공론장에서 ‘젠더’, ‘젠더 폭력’ 개념은 논란 속에 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나 연구는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며 이는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가 드러낸 성 소수자 혐오의 배경이기도 하다. 루인은 이러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젠더 개념이 인식되지도, 합의되지도 않은 한국 사회에서 왜 어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젠더 폭력이 되고 어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렇지 않은가를 질문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나 남성으로 태어나는가?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섹스-젠더로 태어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여자 아니면 남자 둘 중 하나의 섹스-젠더로만 태어난다면, 인터섹스(intersex)를 비롯해 이원 섹스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인간은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변태’로 치부될 뿐이다. …… 인간이 태어났을 때 지정받는 섹스-젠더는 ‘생물학적 사실’과 무관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태아의 모든 생물학적 조건을 검토해서 섹스-젠더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부 성기 형태를 ‘힐끗 보고’ 음경으로 판단할 수 있으면 남아, 음경으로 판단할 수 없으면 여아로 분류한다. 이런 분류 관습 때문에 나이가 들어 인터섹스로 진단받는 경우도 많다. (161, 162쪽)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많은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페미니즘은 참된 생물학적/신체적 섹스가 있다는 믿음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여전히 젠더 관점은 (특정 경험에 한정되어 있는데도 보편적이라고 가정하는) 여성의 관점을 뜻하며, 젠더 분석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여성이라는 젠더 범주는 여전히 언제나 ‘섹스’로서 여성, ‘생물학적 여성’을 가리킨다.
젠더와 폭력의 관계를 다루는 논의도 예외가 아니다. 젠더와 폭력 혹은 여성과 폭력의 관계를 다룬 논의의 대부분이 비트랜스여성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여성은 언제나 ‘비트랜스여성’의 축약어인데도(뿐만 아니라 비장애 여성, 이성애 여성의 축약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제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인식에서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 트랜스여성의 경험은 누락된다. (167쪽)

‘여성’은 동질적인 집단일 수 없다
여성 범주 내에서도 다양한 권력이 작동하고 착취와 억압이 작동한다. 이것은 은폐할 것이 아니라 성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문제다. 젠더 연구는 젠더,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횡단의 정치로 접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젠더 자체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상호 교차성 연구가 되어야 한다. (172쪽)

새롭게 해석하는 젠더 폭력
이제 젠더 폭력을 한 개인이 태어났을 당시 지정받은 젠더로 평생 살아가고 그 젠더 규범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실천으로 체화하도록 강제하는 장치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즉 젠더 폭력이란 각 개인에게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특정 젠더 범주를 지정하고 이렇게 지정한 젠더에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압하는 일상의 실천이다. (184쪽)

새로운 해석을 바탕에 두고 보면 ‘아내 폭력’은 여성 파트너에게 적절한 젠더 역할을 훈육하는 실천일 뿐만 아니라 파트너를 여성 젠더 범주로 환원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가해자 남편의 주장처럼 ‘아내 폭력’이 ‘교육 실천’이라면, 이것은 아내 위치에 있는 사람을 우선 여성 젠더 범주로 환원하고 그 여성 젠더 범주에 적절한 사회문화적 규범을 강압하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 이렇게 해석할 때 ‘아내 폭력’은 퀴어를 향한 혐오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 ‘아내 폭력’에서 가해 남성은 폭력을 통해 남성 범주를, 퀴어 혐오 폭력에서 가해자는 혐오와 폭력을 통해 자신의 지배적 규범성을 체화하고 선언한다. (185, 186쪽)

구매가격 : 8,100 원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서정보 : 정희진, 루인, 권김현영, 류진희,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을 지향하는가?
이분법적 젠더 규범 밖에서 다시 만나는 페미니즘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녀 차별 극복의 바탕이 되는 개념으로서 여성주의의 주요 전략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화인 ‘여성 혐오(misogyny)’에 대응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남성 혐오’로 명명되면서, 성을 ‘남성/여성’의 대칭적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양성평등 담론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성문화(性文化) 연구 모임 ‘도란스’가 내놓는 기획 총서의 첫 번째 책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양성평등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한국 사회의 성차별 인식을 결코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남녀 평등의 이름 아래 여성에게만 지워지는 이중 구속의 현실을 들추어내고, ‘비정상’ 혹은 ‘소수자’라 불리는 젠더 규범 외부의 존재들을 억압하는 권력을 드러내며, 한국 개신교의 유별난 동성애 반대의 감추어진 이유를 밝히고,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을 통해 규제 중심의 청소년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며, 메갈리아 미러링 논쟁을 통해 새로운 페미니즘 주체의 출현 가능성을 엿본다.

“페미니즘은 여성 특권주의, 여성 우월주의이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성평등”이라는 남성들의 모순된 주장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양성평등’ 담론은 여전히 성차별적인 현실을 어떻게 은폐하는가? 여성과 남성은 ‘메갈리아’와 ‘일베’로 대표되는 상호 혐오를 통해 마침내 ‘평등’해진 것일까? 성 소수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양성 담론은 어떻게 남성 중심 사회의 이익에 기여하는가? 이 책은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젠더 이슈들을 제시하고, 이분법적 젠더 규범의 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한다.

본래 언어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이데올로기’지만, 최근 ‘양성평등’이라는 말처럼 반대 진영에 의해 완벽히 전유된 경우는 드물다. 그 효과도 엄청났다. 지난 30여 년간의 여성 운동의 경험과 역사는 재검토가 불가피해졌고, 많은 여성 운동 단체들이 전망을 모색하느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성차별이 있는 현실을 다시 증명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여성 운동은 “여자 일베, 미러링이라는 또 다른 혐오……”로 폄하되었다. 양성평등이라는 ‘무기’는 여성이 쥐었을 때는 칼날이었지만, 남성이 쥐었을 때는 무소불위의 칼자루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양성평등 담론이 대칭적인 논리로 오용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논리 자체의 모순에 주목한다. 또한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혹은 당연하게 유통되어 왔던 한국 여성주의의 주요 인식론인 양성평등의 실체를 분석하고자 한다.
…… 양성평등 담론에 대한 비판은 남성/여성의 범주와 개념 자체의 허구성을 밝힘으로써 개인이 좀 더 젠더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성차별에 대한 저항)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성적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의 존재와 투쟁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젠더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성애 제도가 가부장제의 전제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성적 소수자 억압은 물론 젠더 문제도 풀 수 없다. - <들어가는 글>(정희진) 중에서

양성평등 패러다임의 틀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의 첨예한 젠더 이슈들을 읽는다!

양성평등은 여성에게 유리한 담론인가? 양성평등 개념은 여성에게 저항 가능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가? 아니, 오히려 여성의 노력과 저항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의 저자 정희진, 루인, 권김현영, 류진희, 한채윤은 이 책에서 다루는 당대 한국 사회의 이슈가 기존의 양성평등 패러다임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현실이라 보고, 젠더와 관련한 기존의 논쟁 구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저자들은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사유임을 보여준다. 여성주의는 다양한 인식자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 입장과 조건을 경합하는 사유이다. 이 책이 그러한 여정에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정희진)는 양성평등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해제에 해당하는 글이다. 동성애자 · 양성애자 · 트렌스젠더 · 인터섹스(간성間性) 등 성적 소수자의 존재를 구체화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양성 개념이 허구임을 입증하고,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 평등 담론의 문제점을 논한다.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루인)는 속칭 ‘바바리맨’ 사건으로 분류된 한 고위직 남성 공무원의 ‘성추문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음란이 범죄가 되는 과정을 깊이 분석한다. 또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양성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고 믿는 사회에서 퀴어(queer)란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시화되는지를 다룬다.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권김현영)는 오직 연령만을 기준으로 삼아 ‘양성’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의 모순을 드러낸다. 저자는 이러한 모순을 파고들면서 기존의 양성 개념에서 연령이 어떻게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지를 탐색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리아 미러링>(류진희)은 양성평등 패러다임 이후 새로운 여성 주체의 등장을 다룬다. 기존 페미니스트들에게 혼란과 성찰의 계기를 가져다준 온라인 페미니즘의 대명사 ‘메갈리아’를 2000년대 이후 여성 정치 주체의 계보 속에서 살펴본다.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한채윤)는 동성애자를 사회의 뿌리인 이성애 가족을 위기에 빠트리고 성 윤리의 타락을 불러오는 집단으로 낙인찍는 한국 개신교의 논리에 맞서, ‘동성애와 개신교’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전복하고 재해석한다. 이러한 시각은 곧 이성애 커플과 가족을 당연시하는 양성 중심의 젠더 개념을 재구성하고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 남녀 구분을 전제로 하는 ‘양성’ 개념의 허구성

“여성부는 있는데 왜 ‘남성부’는 없는가?”, “여성 전용 주차장은 남성을 차별하는 제도 아닌가?”, “매 맞는 남편도 있다”, “평등을 원하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한국 여성들이 이미 ‘여성 상위 시대’에 살고 있으며, 여성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역차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성평등을 넘어 마침내 여성 상위 시대가 열린 것일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이처럼 대칭적 이분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인가?
정희진은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통념을 반박하고, 그동안 한국 여성주의와 여성 운동의 바탕이 되어 온 양성평등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평등의 기준이 남자일 때 여성에게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 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남성과 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가? 여성은 출산을 경험해야 ‘여성으로서의 생물학적 의무’를 다한 것인가?
정희진에 따르면,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는 것 같지만 현역병으로 복무하는 남성의 비율은 1986년 51%, 2014년 89%, 2020년 이후에는 90%(추정)로 시대에 따라 다르다. 또한 비혼으로 인한 저출산, 딩크족의 출현, 원래 전체 여성의 20% 정도는 불임이라는 의학적 사실을 고려해볼 때, 여성의 출산 역시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성 역할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의 범주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별화된 사회라 해도 우리가 실제로 남성과 여성으로 인식하는 ‘진짜’ 남성과 여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진정한 남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기존 자원까지 갖추어야 하는 압력이 추가되었다. 요즘 여성은 젊고 예쁜 데다 ‘능력 있는 개념녀’여야 한다. ‘아줌마’는 여성이 아니고(‘아저씨’는 비칭이 아니기 때문에 남성으로 간주된다), ‘노숙자 남성’은 남성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나 여성이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회가 싫어하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 ‘바람직하지 않은’, ‘매력적이지 않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다. (36, 37쪽)

남녀로 구성된 ‘양성’ 개념이 허구인 까닭
인류의 오랜 역사를 거쳐 이성애만이 성적 지향에서의 절대적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며, 동성애 · 양성애는 인륜과 도덕을 위협하는 이단적 패륜 행위로 지탄받아 왔다. 정희진에 따르면, 이분법적 양성 체제에서 누가 남성이고 여성인가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성적 지향’이다. 남성이 남성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면 남성이 아닌가?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면 여성이 아닌가? 정희진은 성별은 남/녀로 구성되는 한 쌍이 아니라 다양한 ‘복수’이며 동성애자 · 양성애자 · 이성애자의 존재는 이분법적 양성 체제가 허구라는 가장 강력한 반증이라고 설명한다.

가부장제, 젠더 체제는 모두 이성애를 전제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섹스와 생식, 성적 긴장을 가장 중요한 성차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여성(남성)을 규정하는 수많은 개념의 핵심은 성적 활동(sexuality)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만큼 성별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우를 보자. ‘생물학=자연’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욕망한다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은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를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만들어진 여성 중 하나이다. (38쪽)

‘평등’이 은폐하는 여성의 이중 노동
정희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평등’으로 오해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변함없는 상태에서 그간 한국 여성 운동이 지향해 온 평등(여성의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은 여성에게 “허울뿐인 평등만을 약속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성 해방이 아니라 여성의 ‘이중 노동’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은 양성평등 담론이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 위계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여성이 ‘사회’에 나와 있다(즉, 집은 사회가 아니라고 인식된다). 특히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불안 속에서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 사회로 진출한,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중 노동, 워킹 푸어, 비정규직의 여성화, 빈곤의 여성화, 남녀 임금 격차의 지속……. 사회 진출 자체가 평등 혹은 여성 상위로 인식되는 것은 그만큼 “여성이 있을 곳은 집”이라는 강력한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노동 시장 진출이든 사회 운동이든 지식 생산이든 지하 경제(‘black’ economy)든 간에 일하지 않는 기혼, 비혼, 미혼 여성은 거의 없다. 여성들의 공적 영역 진출에 비해, 남성들의 사적 영역으로의 진입은, 즉 가사 노동, 육아, 돌봄 노동은 ‘없다’. 여성 인구는 거의 모두 공사 두 영역에서 노동하지만, 남성 인구는 극히 일부만이 사적 영역의 노동에 종사한다(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쪽)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 ‘퀴어 범죄학’으로 재구성한 ○○○ 전 지검장 사건

2014년 11월 ○○○ 전 제주지방검찰 지검장(이하 ○○○ 전 지검장)이 공연음란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3개월 전인 2014년 8월, ○○○ 전 지검장은 음식점 옆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자위행위를 했고, 이 장면을 마침 지나가던 여고생이 목격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루인은 ○○○ 전 지검장이 공공장소에서 벌인 음란 행위를 두고 범죄인지 아닌지, 어떤 처벌이 적절한지를 논하는 대신, 공공장소에서 성행위를 한 것이 범죄로 구성되는 맥락과 공공장소에서의 성행위를 두고 합법/불법의 위계를 만드는 ‘권력’이 퀴어의 존재를 어떻게 은폐하는지를 질문한다. “인간은 남녀 양성으로 뚜렷이 구분되며 그것이 자연의 법칙으로 철저히 규범화된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공공성’의 모순
현행 형법에 따르면, 공연음란죄의 근거가 되는 공공성은 제3자의 현존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 전 지검장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성행위를 했지만 목격자(여고생)가 없었다면 공연음란죄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다. 루인은 제3자의 현존이나 인지만으로 공사 영역을 구분하고 공공성을 구성하는 공/사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은 거의 모든 공적 공간이 성행위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그곳은 거의 항상 누군가가 엿볼 수 없도록 창문을 가린 구조를 취한다. 모텔이 그렇고 DVD방이 그렇다. 이른바 공적 공간이 성행위가 발생하는 공간이며 모텔 주인이나 DVD방 매니저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런 공공장소에서의 성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조되고 권장된다.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도록 창문을 가리는 방식, 즉 제3자가 언제나 이미 인지하고 있지만 제3자의 현존/목격/인지 가능성을 차단한 것처럼 인식하도록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처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에서 데이트 성폭력을 비롯한 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지만 다른 많은 이유와 함께 증인/제3자가 현존할 가능성이 희박하여 성폭력 사건은 입증되기 어렵거나 사건으로 구성되지 않고 은폐된다. 혹은 피해자가 ‘성관계를 즐기고선’ 뒤늦게 돈을 뜯어내려고 고소한다며 피해자를 ‘꽃뱀’으로 비난할 공간적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공적 공간의 구조 자체가 성폭력 사건을 조장하고 은폐한다. (84, 85쪽)

공공장소에서의 음란 행위가 범죄로 구성되는 방식
대법원은 ○○○ 전 지검장 사건에 관해 “공공장소에서의 음란 행위 혹은 성행위 자체가 시대의 건전한 사회 통념에 비추어 그것이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고 또한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고,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에 반하는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루인은 ‘건전한 사회 통념’,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 ‘보통인’이라는 논쟁적 표현을 문제 삼는다. 이 표현들은 “이성애 입장으로 구성된 것이지 LGBT/퀴어를 포함하거나 사유”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LGBT/퀴어나 이분법적 양성 체제에서 벗어난 비규범적 젠더가 공공에서 이성애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애정행각을 한다면 공연음란으로 고소될 수 있다.

JTBC는 2014년 12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선암여고 탐정단>이란 드라마를 방영했다. 그중 한 회에서 두 여고생이 키스하는 장면을 내보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 장면을 문제 삼아 경고 조치를 했는데 경고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흥미로운 발언이 나왔다.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박효종 위원장은) 가족 모두가 볼 수도 있는 방송에서, 이성애자 부부의 애정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성관계 장면을 방영할 필요가 없듯 동성애자의 키스 장면도 내보낼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 ‘동성애’가 ‘보통인’의 ‘건전한 사회 통념’에 비추어 성애적 형태가 없는 ‘건전한’ 모습으로 공공에 출연한다면 괜찮다. 하지만 동성으로 인식되는 사람 사이의 키스는 ‘이성애자의 성관계’와 같은데 그런 키스/성관계 장면이 공공에 등장한다면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을 위반하기에 경고/범죄라는 의미다. (80, 81쪽)

이성애라는 ‘권력’
루인은 언론에 보도되는 많은 성범죄 사건이 이성애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이성애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호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동 성폭력이 문제가 되어도, ‘바바리맨’ 사건을 심각한 성폭력 범죄로 인식한다고 해도 가해자는 정신이상이나 성도착증 환자로 추방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성애는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토대임에도 범죄와 가장 무관한 것으로 규정된다.

‘바바리맨’ 사건은 여성이 놀라거나 충격받는 상황을 통해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행동이란 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인 동시에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일상 행동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성범죄 행위는 이성애-이원 젠더 관계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바리맨’ 사건은 그들의 실제 성적 선호나 지향이 무엇이건 성기 중심으로 판단하는 남성의 이성애적 능력,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사유하는 태도, 즉 모든 개인을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하고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며, 여성은 남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는 이성애-이원 젠더 토대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바바리맨’ 사건을 언급할 때는 아무도 이성애를 말하지 않으며 ‘피해자’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건 하지 않건 가해자가 피해자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젠더 폭력이 발생함을 말하지 않는다. (87쪽)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
- 의제강간법의 이중성과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미성년자 의제강간이란,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강간으로 취급’하여 법적 처벌을 가하는 법 조항을 일컫는다(형법 305조). 당사자들끼리 동의한 관계이므로 본질적으로는 강간이 아니지만 법으로 정한 성교 동의 연령(만 13세)에 이르지 않는다면 강간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권김현영은 미성년자 의제강간 문제를 통해 연령만을 기준으로 삼아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의 이중성을 밝혀내고,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신체의 발달 여부나 연령이 아닌 정치경제학적 조건에서 탐색한다.

의제강간죄의 ‘이중성’
권김현영은 미성년자 의제강간이 ‘아버지의 자산인 딸의 순결’을 보호하는 문제에서 미성년자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문제로 쟁점이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미성년자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보호 담론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이 성인과 미성년자 모두를 ‘성 중립적인 존재’로 가정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소녀와 소년이 경험하는 현실적 차이와는 무관하게 성별 중립적인 기준을 통해 특정 연령 이하의 소년·소녀들을 모두 순진한 천사이자 잠재적인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른 현실을 경험하는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범죄와 달리 성폭력 범죄에서 수사관과 재판관들은 피해자의 상황을 끊임없이 문제시한다. 특히 사건 당시의 옷차림, 당사자의 외모, 직업, 가족 관계, 혼인 여부, 성 경험 여부 등에 대한 질문들처럼 피해자가 성적인 주체로서의 위치를 드러내는 경험과 태도는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고 믿는다. 피해자의 상황을 묻지 않는 유일한 예외는 연령이다.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성비와 연령 통계를 살펴보면, 성인 남성들이 가장 많이 가해를 저지르며 최근 들어 청소년 가해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제강간의 경우, 보도된 사건들의 성비는 양성의 비율이 매우 잘 맞춰져 있다.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현실을 가리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101쪽)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을 둘러싼 오해
권김현영은 미성년자 의제강간이 특정 연령까지의 아동을 더 강력하게 보호하는 법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제강간에서는 연령이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말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가 13세 미만임을 몰랐거나 피해자가 나이를 속였다고 주장하면 처벌을 면한다.
또한 현행 미성년자 의제강간은 ‘동의 여부를 결정할 능력’이 특정 나이에 따라 단계별로 구축된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권김현영은 “청소년기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나 ‘아직’이라는 유예 명령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론에서 청소년의 사랑과 성적 욕망은 “사회적 의미를 얻는 데 실패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파괴하거나 소비하는 행동으로 간주”되며, 결국 미성년자의 섹슈얼리티는 부정당하게 된다.

욕구에 대한 금지는 가해자의 자유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제한한다. ‘보호’는 가해자의 권력을 제한하고 피해 당사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 미성년자에게 관심을 집중할수록 미성년자의 섹슈얼리티는 더욱 매력적인 것이 된다. 미성년자가 성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고 성적 호기심과 모험을 하는 행위 자체를 ‘오염’되는 것으로 보고, ‘면역력이 저하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 자체를 매우 위험하고 나쁜 것이라고 보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 미성년자들이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성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고 토론하게 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미성년자의 섹슈얼리티는 불가해하고 순수한 것으로, 오염되지 않은 어떤 순백의 것으로 상상된다. (118~120쪽)

‘성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의 관계
권김현영은 성과 관련된 권리는 혼인 가능 연령, 직업 결정권, 투표권 등의 경제적 · 사회적 · 정치적 권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선거 가능 연령 기준을 살펴보면, 주요 국가의 선거권이 대부분 18세부터 주어진다.(세계 190개국 중 147개국) 한국의 선거 가능 연령은 19세로,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18세가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반면, 한국에서 미성년자 의제강간이 적용되는 연령인 만 13세는 조혼 풍습이 남아 있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와 혼전 성교를 금지하는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이처럼 선거 연령과 의제강간 연령 기준 사이의 격차는 현재 한국이 가장 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성에 대해서만 동의 여부를 만 13세 이상부터 결정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성관계를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부모 혹은 성인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야말로 성적 자기 결정에 유해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미성년자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장할 수 있게 하려면 이 문제를 청소년의 신체적·정신적 ‘건전한’ 발달 과정의 문제라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오히려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을 받을 권리, 미성년자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더 좋은 교육 환경과 정치 제도를 요구할 권리, 생활 임금이 가능한 최저 임금을 받을 권리 등이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123쪽)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리아 미러링
- 포스트 여성 주체의 탄생에 부쳐

2015년 메르스 사태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현상은 2016년 소라넷 폐쇄, 강남역 살인 사건, 넥슨 성우 교체 사건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갈리아 현상의 주체인 ‘메갈리안’은 여성 혐오(misogyny) 발화를 그대로 되비추는 ‘미러링’을 수행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폭력’에 문제를 제기했고 온라인 페미니즘의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류진희는 메갈리아 현상을 ‘여혐 대 남혐’이라는 젠더 논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온라인 페미니즘이라는 방식을 가능케 한 새로운 정치 주체의 탄생에 주목한다. 그리고 미러링이라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 역량에 주목하면서 메갈리아를 둘러싼 쟁점에 접근한다.

“여혐혐을 수행하라”, 메갈리아의 탄생
2015년 5월 메르스 사태 당시 홍콩을 방문한 한국 여성 두 명이 격리 검진을 거부했다는 낭설이 일자 곧 “한국 여자 개념 없다”고 조롱하는 혐오 발화가 등장했다. 그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발화에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불만이 이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여성들은 성별 역전 콘셉트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차용해 자신들을 ‘메갈리아’라고 지칭하며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젠더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류진희는 여성 혐오 발화와 이에 대항하는 메갈리아의 탄생이,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허용하는 사회에 내포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2013·2014년>에 따르면, 한국에서 일어나는 강력 범죄의 피해자 대다수, 즉 10명 중 8, 9명이 여성이다. 그리고 대검찰청 통계 자료 <2015년 범죄 분석>은 성폭력 범죄가 지난 10년간 형법 범죄가 증가하는 주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 통계 자료 <2015년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배우자와 연인 등 가까운 사이에서 거의 이틀에 한 명꼴로 여성이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친다고 밝혔다. (128, 129쪽)

새로운 정치 주체 : 촛불소녀, 배운녀자, 그리고 메갈리안
2000년대 이후 젊은 여성 대중이 한국의 정치 현상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등장한 ‘촛불소녀’, ‘배운녀자’, ‘유모차 부대’는 “집단적이고도 산발적인, 또 익명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여성 청년들의 행위성”을 보여주며 “민주화 이후 ‘탈정치’ 시대에 도래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했다.
류진희는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여성 주체들이 여성 혐오를 비판하고 가부장제를 폭로하는 방식이 온라인에서 현실 세계로 나아갔다는 데 주목한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규범과 금기를 찢는 이들의 활약은 가정 폭력, 성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 이별 범죄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2016년에는 ‘소라넷’ 문제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전 사회를 뒤흔들었다. 해외 서버라서 “절대 없앨 수 없다”던 ‘소라넷’은 결국 폐쇄됐다. 이 사이트는 웬만한 광역시 인구에 버금가는 1백만 회원을 보유한 맹위를 떨치며 ‘몰카’, 즉 몰래 찍은 인권 침해 사진과 강간 모의 범죄 동영상들을 유통했다. 서울 서초구 소재 노래방 공용 화장실 여성 살해 사건은 피의자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동기를 밝혔는데, 경찰은 그의 정신과 병력을 이유로 삼아 ‘묻지마 살인’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곧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은 ‘포스트잇’ 추모 시위를 통해 ‘여자라서 죽었다’는 페미사이드(femicide)로 재의미화되었다. 이 사건 이후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슈화를 위해 이들이 감행하는 집단 활동, 즉 ‘화력 지원’에 힘입어 곳곳의 젠더 이슈들이 긴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129, 130쪽)

미러링은 또 다른 혐오 폭력인가?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피해자로서 여성에게 허락됐던 목소리, 즉 비탄·절규·울음이 아닌 조롱·호통·웃음을 자신의 전략”으로 내세웠다. 메갈리아는 주로 여성 혐오 용어를 반전시켜 “남성 중심적 구조에 깃든 일반적 서사를 낯설게하고 단숨에 해체하는 패러디”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삼일한(여성은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에 대응하는 ‘삼초한(남성은 3초에 한 번씩 때리겠다)’이나 ‘낙태충(낙태한 여자)’의 반례로 나온 ‘싸튀충(싸고 튄 남자)’은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던 기존의 성 규범을 조롱하고 전복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발화는 한국 사회의 젠더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메시지로 전환되었다.

많은 이들이 메갈리아에서 나온 미러링 표현을 도저히 여성들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 수년간 여성들도 혐오 발화의 문법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다만 이번에는 침묵하는 게 아니라 적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활용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미러링은 린치를 수반하는 증오 발화(hate speech)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여성의 저항이다. 여성 혐오 발화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지만, 소위 ‘남성 혐오’ 발화는 오직 온라인에서만 가능하다. …… 미러링은 역전된 혐오 발화로 원본을 아카이빙하는 동시에 그 표현에 대항하며, 결국 여성 혐오의 시대를 생생하게 고발하게 된다. (143쪽)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
- ‘반(反)동성애’, 한국 개신교의 생존 전략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아 동성애를 격렬하게 반대해 왔다. 《성경》에 동성애가 ‘죄’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성서주의적으로 해석할 때 동성애는 하느님의 섭리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동성애뿐만 아니라 수백 개가 넘는 죄목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는 왜 동성애만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 것일까? 이들은 왜 동성애를 향한 혐오를 ‘조직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한채윤은 사회적 · 역사적 맥락에서 ‘동성애 혐오’가 구성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한국 개신교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대표적 타자’인 동성애자를 외부의 적으로 삼아 비리, 횡령, 세습 등 개신교 내부의 문제와, 식민지와 전쟁, 친미 독재 정권이 주도한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정치계와 결탁해 성장해 온 교회의 세력화를 묵과해 왔다는 것이다.

‘공동의 증오’의 필요성
2007년 10월 법무부가 차별 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 금지법을 입법 예고했다. 같은 해 7월에 정부가 추진해 온 사립학교법 개정에 격렬하게 반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했던 개신교는, 정부의 입법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단체를 대거 조직했다. 한국 개신교는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범죄자가 될 것이고, 국가는 점차 교회를 장악하고 인사권이나 교육 내용, 재정권에 간섭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이후 한국 개신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개최를 둘러싼 개신교 내 교파 간 다툼, 대형 교회의 예배당 증축 계획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 행위, 그리고 스타 목사의 성추행 사건까지 내부적으로 갈등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개신교는 이러한 행보를 반성하고 더 투명한 종교 활동에 매진하는 대신, 갈등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동성애’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이용한다.

반동성애 운동을 이끄는 목사들은 동성애자가 교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로 동성애자가 반기독교 운동을 펼치거나 교회를 공격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공격하고 싶어 하는 ‘외부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곧 교회에 ‘고난’이 닥쳐온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 고난을 극복하자는 이러한 목표 제시는 언뜻 내부 분열을 봉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내부의 부패와 부조리,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어느 것부터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에서 우선순위를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교회 세습과 담임 목사의 전횡, 횡령, 금권 선거 등 비민주적 조직 체계, 여성 목사 안수 불허 등 교회 내 성차별과 성직자들의 성폭력 문제 등을 거론할 틈이 없어진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 사상은 이런 문제들을 내부의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180, 181쪽)

동성애 반대는 왜 교회의 사명이 되었는가?
한채윤은 한국 개신교가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사회적 지배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동성애를 활용해 왔다고 말한다. 목사들의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이 지속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현실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개신교는 가장 절실히 동성애를 필요로 하는 곳이 되었다. ‘건전한 사회’, ‘올바른 성문화’를 기독교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동성애 혐오를 통해 자신들의 폐단을 덮어버리고, ‘성적으로 타락한’ 동성애자로부터 가족·결혼·국가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위치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가 근본주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근본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사실상 젠더 이데올로기”였다는 강남순 교수의 지적도 기억해야 한다. 신학자 잭 로저스는 “남녀 평등을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교회와 국가의 안정에 열쇠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서 가부장제와 애국심과 기독교는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며, 그 깃발은 동성애에 대한 모든 논의 위에서 휘날린다. 동성애와 여성 평등은 둘 다 남성 우위의 모델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확대하면 교회와 국가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184, 185쪽)

구매가격 : 8,100 원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서정보 : 정희진, 권김현영, 루인,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성폭력 피해 고발을 어떻게 사회 변화로 이끌 것인가?
한국 사회 강간 문화를 낱낱이 해부하는 페미니즘의 언어

“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는 한 페미니스트 시인의 말은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특정 집단 내 성차별 · 성폭력을 고발하는 ‘○○계 내 여성혐오/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 ‘꽃뱀’이라는 비난과 무고죄와 명예 훼손의 협박에 시달리며 ‘무결한’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만 피해와 가해라는 말이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무엇이 성폭력인가? ‘2차 가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 판단하는가? 성폭력 문제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성 문화(性文化) 연구 모임 ‘도란스’의 세 번째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관한 주된 쟁점들을 ‘피해’와 ‘가해’ 개념을 중심에 두고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이상이다.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드러내는 것, 성폭력은 ‘누구’ 혹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목표이자 이 책의 목표이다.

피해자가 직접 나와 말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상사태이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직접행동주의는 매우 힘이 세지만, 그만큼 당사자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준다. 모든 피해가 공론장에서 잘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침묵도 더는 답이 아니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줄 각오를 하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진 정치인은 성희롱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었던,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은 정작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당시 한 기자는 나에게 대학생들이 기자를 지망하면서도 용감하게 나서지 않았다며 기자로서 이들의 자질을 의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비난하고 고립시키는 기제는 이토록 다양하다.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25쪽)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거듭 강조하건대, 피해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약자가 겪은 피해가 그대로 인정된다면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며 무엇이 피해인지, 이 문제에 관한 복잡한 논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남성들은 피해 의식마저 남성 문화의 일부로 ‘소유’하고 있다. 가해자의 피해 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210~211쪽)

들불처럼 일어난 피해 고발의 목소리가
혁명적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2018년 1월, 한 여성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이후 한국 사회에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문화예술계, 법조계, 정치계, 학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피해 고발이 이어졌다. 그런데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직후 한 남성 시사평론가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일을 다루면서 “한국에는 미투 운동 같은 게 없었죠?”라고 말해 거센 비난이 일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고” “오만하다”며 분노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과 공론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2003년부터 매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2009년 배우 장자연 씨가 남긴 유서,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 2016년 10월 인터넷상에서 일어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7년 11월 한샘 사내 성폭행 피해자의 고발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되어 왔고 실제로 크고 작은 법적,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투’가 있었다.
그런데 성폭력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일이 이렇게 많았는데도 어째서 여전히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일까? 지금 이 폭발적인 ‘미투’ 운동을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2018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이 뜨겁고 민감한 사안을 더 깊이, 더 멀리 보려 한다. 이 책은 유례없는 페미니즘의 대중화 시대를 맞아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상의 정치로 지속시키기 위해 “미투 운동 이후”를 생각한다.
특히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권김현영)와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여성 우선’을 외치는 페미니즘 일부의 ‘정체성의 정치’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를 성찰한다(정희진).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권김현영)는 성폭력 피해자의 직접행동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현실과, 피해자의 ‘말하기’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필자는 성폭력이 본질적으로 이성애 중심주의와 젠더 권력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성차별 ․ 성폭력 문제의 밑바탕에 뿌리 깊은 ‘강간 문화’가 있음을 여러 사례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나아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반(反)성폭력 운동을 돌아보며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더 사유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등장한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이 오히려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연대자와 지지자들을 위축시키는 한계를 드러냈음을 지적한다.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자를 지지하고 연대해 온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이 쓴, 현재 진행 중인 고투의 기록이다. 이 글에는 피해 고발이 공론화된 이후 현실에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연대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증언과 지지의 말들을 모아 책을 출간하고, 펀딩을 통해 피해자들을 법률적 ․ 의료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연대자의 자격, 지지와 연대의 방식 등을 두고 숱한 논란이 벌어져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 글은 연대자의 위치를 끝까지 질문해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토론과 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한채윤)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송하고 ‘아웃팅’을 끔찍한 범죄로 보는 시각에, 소수자를 ‘피해자’의 위치에 가두고 길들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밝힌다. 필자는 먼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커밍아웃’과 “ㅇㅇ는 동성애자다”라고 폭로하는 ‘아웃팅’이 사회에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피면서 두 개념에 관한 상식을 뒤집는다. ‘커밍아웃’을 당당함과 용기의 표식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아웃팅’이 범죄가 되고,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너무 드러내지 말고 살아가라는 사회적 압력(‘커버링’)의 요구에 저항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정작 동성애자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루인)는 한국 최초로 ‘패닉 방어’를 단행본에서 다룬다. 이 글은 ‘피해’와 ‘가해’라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패닉 방어’란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 정체성 혹은 성 정체성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므로 자신의 행위는 ‘패닉’의 결과로 일어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뒤섞는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혐오나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이다.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니까, 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성폭력이 일어난다.” “여성이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과도하게 권리만 주장해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같은 식이다.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밝히고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놀랄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피해 여성들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일명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불린다. 쉽게 말하면 트랜스젠더 여성(특히 mtf, 즉 남성에서 여성으로)을 배제한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우선순위는 사회 정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필자는 정체성의 근거가 피해에 머무르게 되면, 여성들은 고통을 경쟁하고 피해를 자원으로 삼는, 남성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 수행 주체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이 목소리가 되어 나올 때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일이 확실히 늘어났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물적 조건과 소셜네트워크(SNS)라는 뉴미디어를 기반 삼아, 인터넷 의사소통에 능숙한 여성 대중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직접행동에 나서면서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피해 경험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상황이 나아진 것일까? 하지만 “피해자의 용기 있는 직접행동으로 인해 겨우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도, 그 이후에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가해자들이 피해 사실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여론을 만드는 데 성공하거나, 연이은 폭로로 인해 피로감만 쌓이고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 권김현영은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폭력을 ‘피해자’와 ‘가해자’만 관련되는 ‘협의의 당사자성’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을 것인가?”

‘2차 피해’란 무엇인가
성폭력 2차 피해는 성폭력 문제를 여타의 폭력과 구분해주는 핵심적인 문제다. ‘2차’라는 뜻의 ‘second’는 ‘social’과 혼용된다. 성폭력 2차 피해는 다른 말로 ‘사회적 강간(social rape)’이라고 불린다. …… 피해자가 의료 조치 과정에서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을 듣거나, 언론이 사실 관계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입장만을 전달해 피해자를 사실상 꽃뱀 취급 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사건 자체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 역시 모두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즉, 2차 피해란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31, 33쪽)

성폭력은 성별 권력의 문제다
성폭력은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이자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남자도 성폭력을 당한다거나, 성희롱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말로는 성폭력이 왜 성별 간 권력의 문제이며,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남자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거나 여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남자와 남자 사이에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만했다.”고 비난하는 문화는 없다. 여자 직장 상사의 성적 괴롭힘을 고발한 남자 직원은 남성성에 대한 고투와 낙인이 있을지언정 “큰일 하는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는다. (33~34쪽)

왜 여전히 피해자는 말하기 어려운가?
성폭력을 당해도 그것이 성폭력인지 몰랐거나, 성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피해를 피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피해가 있었다’는 발견의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의 조건이 변화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말할 권리가 ‘민주화’되고, 말하는 주체가 필요에 따라 익명으로 감춰질 수 있는 조건의 변화는 말할 수 없었던 상황일 때보다 말하는 주체에게 ‘정당화의 의무’를 더욱 엄격하게 부과한다. 순결 신화의 규범적 힘은 약화된 반면, 남성 사회의 꽃뱀 공포는 더욱 강화되었다. 왜 지금 말하는지, 다른 목적은 없는지, 당시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경찰에 가지 않고 여론의 힘을 빌리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피해자의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인지 등을 가려내려는 여론의 검증은 예전보다 혹독하다. (49쪽)

“강간은 섹스가 아니다” -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
강간 문화란, 남성에게 성적 공격성을 장려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지지하여 성적 폭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일련의 신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년 문화에서 강간은 정상적인 소년이라면 흔히 겪는 성장담으로 격려되어 왔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시인사이드의 대학 갤러리에서는 “전쟁 나면 〇〇학과의 ××를 강간하고 싶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게시판 문화는 대학 내 익명 게시판과 단체 채팅방으로 이어졌다. ‘강간’이 남자끼리 즐기는 짜릿한 놀이 문화의 일종으로 ‘정상화’된 것이다. …… 강간 문화는 강간에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계속 퍼뜨리며, 섹스와 강간을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강간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남성들은 ‘강간 문화’라는 언급 자체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고 남성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항의한다. (58, 59쪽)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폭력 관련 법 제도를 제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해 있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술을 마셨거나, 밤늦게 다녔거나, 가해자와 아는 사이였거나, 사적 공간에 드나드는 것을 허용했다면 말이다.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내가 거기를 왜 갔을까, … 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상대의 말을 믿었을까.) 성폭력 피해를 고소하지 않는다. 당사자 간의 법적 분쟁을 넘어서, 무엇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27~28쪽)

‘2차 피해’라는 말과 ‘2차 가해’라는 말
‘2차 가해’는 점차 ‘2차 피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대신, “2차 가해자는 〇〇〇.”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전자는 2차 피해라는 용어에 내포된 개념과 사례에 집중하게 하고, 후자는 누가 가해자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 즉, 2차 가해라는 말은 가해를 저지른 행위자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앞서 설명한 대로 민주노총처럼 공동체의 규약에 대한 충성도(?)가 높거나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규제 효과가 있다. 토론을 하는 것보다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런 곳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그들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끈끈하게 하며 피해자를 고립시켰다. (42쪽)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사회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에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채무자의 독촉처럼 취급하면,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피해자는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말을 의무로 생각하자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 더는 무엇인가를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70쪽)

‘말하기’ 이후, 연대와 책임에 대하여
-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2016년 가을, SNS에서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한 사람의 피해 고발 글을 읽은 또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이 이어졌다. 10여 명의 남성 소설가, 시인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언론은 문단 내 성폭력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했고, 문예지들은 처음으로 이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말하기’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고발 직후 ‘자숙’을 말하던 가해자들은 곧 서로 연대했고 가해 사실 인정을 번복했다. 가해자들은 본격적인 ‘반격(backlash)’을 시작해 피해 고발자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불리며 비난받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위로받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피해를 알리고 나서 상상도 못했던 싸움을 해야 했다.
이 글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기록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비리가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고 은폐될 수 있는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 그런 사회에서 남성 권력이 폭력을 통해 실행되고 정당화되는 과정, 피해를 공론화한 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
회사나 학교 등의 조직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폭력 상담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온 것과 달리, 이러한 해결 기구가 없는 문단의 기괴한 구조가 그 민낯을 드러낸 것이 바로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신고할 곳이 문단 내부에 없으니, 피해자들은 매번 개인으로서 법적 투쟁을 했고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무사히 문단에 복귀해 왔다. 피해자는 문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삭제된 여성 문인들을 암암리 모르지 않기에, 피해자들은 더더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81쪽)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 발화, 싸움, 연대의 기록이자 피해 고발자를 지지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피해 고발자의 증언 글, 여성 작가들의 자기 성찰의 글을 한데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그 수익금을 피해 고발자들의 법률 비용과 의료비 지원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 펀딩을 시작한 지 2주 후, 프로젝트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SNS에서 ‘E’가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E는 5년 전 데이트 폭력 가해자로 출판사 봄알람(텀블벅 펀딩 진행과 단행본 제작 및 출간을 맡은 출판사)의 구성원을 지목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봄알람 구성원은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했고 피해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이행했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논란과 비난도 뜨거웠다. (87, 90쪽)

연대자의 자격
우리(준비팀)는 ‘무결’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이 운동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단이라는 네트워크 안에 함께 있었던 작가로서, 성찰을 하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여성 문인’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명단에 왜 저 사람의 이름이 있는지” 그 자격을 따지는 제보가 이어졌다. 준비팀은 명단 참여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 참여 여부는 자발성에 맡기겠다는 원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있는가,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없는가. 한 치의 흠결도 없는 도덕적 순결함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 프로젝트 참여자에 대한 가혹한 도덕적 검열이 계속되었다. (97~98쪽)

연대와 책임
봄알람 구성원은 퀴어 담론의 피해와 가해에 대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고통받았다. 흡사 연좌제처럼 봄알람 출판사 전체가 가해자로 지목되었으며,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파트너였던 준비팀도 가해자라는 프레임에 함께 갇히게 되었다. 가해자 프레임 속에서 준비팀의 모든 조치와 행위와 입장은 반성 없는 폭력 행위이거나 자기 합리화, 혹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취급되었다. 연대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다. 우리는 ‘누가 가해자인가’보다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했어야 했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에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했어야 했다. (108~109쪽)

공론장으로서 SNS를 생각하다
트위터 공론장에는 누구에게나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반복적으로 발언하며 발화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부각되는 반면,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유령처럼 지워지고 말았다. 입장문과 사과문이 빠르게 오가는 공론장 특유의 속도 때문에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제되는 경우도 있으며 섬세한 논의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을 망각할 위험도 컸다. 성폭력 없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모두의 목적이 희미해지도록 모두가 방치한 셈이 되었다. (113~114쪽)

‘가련한’ 약자, ‘순결한’ 피해자이기를 거부한다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소수자는 사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약자이자 피해자인가? 왜 사회는 소수자가 당당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지배 규범에 거슬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자는 어떻게 세상에 맞서야 하는가?
‘커밍아웃’을 개인의 용감한 결단으로 만들수록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기회를 놓치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자임이 폭로되는 ‘아웃팅’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이런 ‘아웃팅’을 방지하려고 애쓸수록 동성애자의 존재는 더 ‘위험’해진다. 동성애자라고 너무 유난 떨지만 않는다면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커버링’은 교묘하게 동성애자를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길들인다. 한채윤은 이 글에서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문제를 통해 동성애자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순적 상황을 분석해보려 한다. 또 낙인찍힌 자들에게 더 빨리 솔직하게 말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말하면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사회적 성찰을 요구한다.

벽장 속에 누가 살고 있는가
커밍아웃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비밀을 밝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커밍아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 그 숨겨진 구조를 밝히는 단어다. ……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에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 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 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놓았기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129, 132쪽)

커밍아웃에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다
내가 커밍아웃 후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그들이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지, 나의 커밍아웃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할 때 우리는 개인이 감당할 몫과 나를 포함하여 사회가 감당할 몫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각각의 몫의 경계를 구분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나거나 주변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거나 해고나 사퇴 권유와 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개인이 겪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실패다. 피해를 입은 이들 곁에 서서 함께 싸워 나갈 이들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공동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135~136쪽)

‘아웃팅은 범죄’라는 인식
커밍아웃이든 아웃팅이든 드러나는 것은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커밍아웃이 우리 존재를 억누르는 벽장의 차별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 숨겨야만 한다고 강요받는 낙인을 오히려 드러내어 자유를 얻는 전략임을 상기할 때 아웃팅 역시 마찬가지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커밍아웃을 원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아웃팅 역시 원하지 않을 것이다. …… 아웃팅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를 막아야 하는데 ‘아웃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은 아웃팅 자체를 범죄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웃팅을 ‘당했다’는 말은 곧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 되었고, 아웃팅을 ‘시켰다’는 말은 가해자를 지목하는 일이 되었다. (138, 139쪽)

커버링, 티 내지 말라는 가장 교묘한 억압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노출이 심하다는) 비난은 성적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사회를 잘 설득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참가자들 때문에 성적소수자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비난한다. 건전한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동성애자가 아무리 단정한 옷차림을 한다고 해도 건전한 존재로 칭송받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건전이라는 잣대가 이미 이성 간의 사랑, 결혼, 성생활로 짜여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인 채로는 건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이 동성애자에게 ‘건전’을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자와 유사해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152쪽)

‘순결한’ 피해자의 위치를 거부하며
이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성애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이성애자 중심의 질서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동성애자의 자리를 만들자고 하는 모든 요청들을 거부해야 한다. 같아지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무리 없이 섞이고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남들과 ‘다른’ 나로서 살아야 한다. 다르다는 ‘티’를 일부러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티’가 저절로 나는 것이다. 우리는 순응하라고, 적당히 넘어가라고, 너무 유난 떨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한 점 부끄럼 없고 당당하고 무결해야만 인정받는 피해자, 상처받아 웅크린 가련한 약자, 주류의 배려와 관용을 기다리는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거부해야 한다. (155쪽)

어떤 폭력의 이유
-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2010년 5월 말, 대구에서 트랜스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언론은 가해자가 “(4년여 전 알게 된) 자신의 교제 상대가 트렌스젠더인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격분해 살해”했으며 “성별을 알 수 있는 접촉은 갖지 않아 상대방이 여장 남성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며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가해자가 내세운 논리는 전형적인 ‘트랜스 패닉 방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루인은 이 글에서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인 ‘패닉 방어’를 다룬다. ‘패닉 방어’는 혐오 폭력과 혐오가 발생하는 구조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사람이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라고 먼저 밝히지 않은 것이 상대에게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구타, 감금 혹은 살해를 유발할 정도의 ‘잘못’인 것일까? 피해자가 사라지면 혐오도 사라지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특정한 속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혐오가 발생하지 않을까? 한편, ‘패닉 방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인 ‘피해자 유발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교묘하게 뒤섞는다.

혐오 폭력,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피해자 유발론’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 혐오나 성폭력을 둘러싼 의제에서 특히 많이 거론된다. 예를 들면 “여학생의 학교 성적이 좋아 남학생의 손해가 크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식이다. 이것은 가해자 자신의 범죄 사실, 혹은 특정 집단의 무능력 따위를 그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타인으로 인해 ‘내’가 부당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인식이다. …… 페미니즘의 오랜 반(反)성폭력 운동은 피해자 유발론이 가해자를 옹호함으로써 사회의 통치 체제(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161, 162쪽)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 - 이성애-남성성과 ‘게이 패닉 방어’
재판정에서 게이 패닉 방어 논리를 펼치는 가해자들 역시 바로 지배 규범적 남성성을 중시하고 강요하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호모포비아를 동원해 자신을 방어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이 남성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은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자신이 게이로 오해받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이기에 가해자 중 한 명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 이성애자 남성성을 남성의 유일한 남성성 실천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가 없다면 패닉 방어 전략은 재판 과정에서 수용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애당초 전략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168, 169쪽)

“나야말로 진짜 피해자” - ‘트랜스 패닉 방어’와 기만의 논리
트랜스 패닉 방어는 가해자 남성이 연애나 성관계의 대상으로 ‘여성’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성이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았으며 음경 형태의 외부 성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패닉 상태에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 트랜스 패닉 방어 전략은 외모를 통해 타인의 섹스(혹은 외부 성기 형태)와 젠더(혹은 겉으로 인지되는 이원 젠더 범주)를 즉시 그리고 어떤 실수 없이 파악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언제나 등치한다는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 바로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 여기서 mtf/트랜스여성을 살해한 많은 가해자가 사실은 “나야말로 기만당하고 사기당한 진짜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 (174, 177, 178쪽)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
패닉 방어 혹은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자를 처벌하고 가해자를 구제하며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특히 패닉 방어와 피해자 유발론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살인 사건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섞는다. 무엇이 가해이고 무엇이 피해일까? 사회적 인식에 따라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무고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와 피해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역학 관계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해와 피해를 뒤섞는 작업이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혹은 지능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지배 규범,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비난과 부정적 인식이 공모해 철저하게 규범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다는 점이다. (199~200쪽)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생각하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언제나 연대의 정치였다. 그런데 이 연대의 정치를 부정하는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이들은 피해 여성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서 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으며 ‘나중’으로 미뤄졌다. 정희진은 “여성 우선”을 주장하며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나중에”를 외치는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여성의 정체성을 ‘피해자’로 한정하는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희진은 이 글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피해’,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개념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성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성주의에 불리한 전략임을 밝힌다. 나아가,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감과 연대에 토대를 둔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피해’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인류 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 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208, 211쪽)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에 차이를 제기함으로써, ‘인간=남성’이 아님을 주장한 급진적인 정치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여성이 여성에게 동일시하는 문화가 없었을 때,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성의 정치는 억압받는 개인이 억압받는 약자의 집단에 자신을 ‘소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종의 정치적 귀향으로서 ‘노예’에게도 집이 있다는 (잠시지만) ‘안도의 정치’인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이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나 가부장제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은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민주화하는 과정을 낳는다. (216쪽)

‘피해’를 여성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는 것
삶도, 투쟁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과의 차이를 깨달은 ‘다음 날’ 여성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차이와 이로 인한 문제를 남성적인 방식으로 봉합하기 시작하면, 정체성의 정치는 타락하기 시작한다.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 걸려든다면, 즉 피해는 여성의 본질이며 여성은 피해자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또다시 보편성(uni-versal)으로 묶이게 된다. 이것이 페미니즘 사상사에서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이 그토록 비판받았던 이유이다. (218쪽)

모든 여성은 ‘여성’으로서 동일한가?
여성들은 당연히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여성인 동시에 인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기보다는 흑인이거나 노인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젠더 시스템은 1) 개인을 남녀로 분리하고 2)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며 3) 같은 성별끼리는 같은 속성(남성성, 여성성)을 공유한다는 규범을 전제한다. 이것은 차별을 위해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가부장제가 인간을 필사적으로 남녀로 구별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논의한다. “차별은 나쁘다. 하지만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라는 평등주의는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차별이라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215쪽)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된다. 여성은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과 유혹을 느낀다. ‘피해자다움’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중요한 성 역할이다. 물론, 피해자화는 여성의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은 피해자성을 자원으로 삼거나 그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성이 타자화, 피해자화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온존한 생존이 가능했을까. …… 그렇지만 피해자성을 중심에 둔 페미니즘은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보고, 나의 고통을 타인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권리’를, 여성은 ‘고통’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사회적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이다.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 세력이 원하는 피해자가 될 것인가. (224~225쪽)

구매가격 : 8,780 원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서정보 : 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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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에 쫓기며
여성 혐오로 불안을 달래는
한국적 남성성에 대한 전방위적 탐구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보편’이자 유일한 ‘인간’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을 비하함으로써 성립된다. “계집애 같다” “너 게이냐?” 같은 말이 남자들 사이에서 욕으로 쓰이는 것은 여성이나 퀴어가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로 인정받으려면 남자다운 몸, 남자다운 성격, 남자다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 남자다움의 신화가 깨지고 있다.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가부장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젊은 남자들이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일베’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사이버 마초로 변신해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은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지만 전통적인 지위는 유지해야겠다는 비합리적 사고. 이런 어긋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주의에 필요한 새로운 전략은 무엇인가?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의 두 번째 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는 각기 다양한 지적 배경에서 당대 한국 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필자들은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남성다운 몸 ․ 심리 ․ 문화는 현실이 아닌 규범이자 신화임을 밝힌다. 일제 강점기 이광수와 김유정과 이상 같은 남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식민지 남성성’의 기원을 확인하고, 그동안 남성성의 목록에서 지워졌던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female-to-male)의 남성성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고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남성성의 위기와 가부장제의 쇠퇴에 관한 담론은 페미니즘의 주요 관심사이다.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심화된 결과, 근대적 남성성의 핵심인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의 역할은 불가능해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 경제는 외벌이로 지탱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들들은 이제 더는 여자를 먹여 살리는 것을 남자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남성으로서 성 역할이 점점 불가능해졌는데도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련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 <들어가는 글>(권김현영) 중에서

‘한국 남자’는 어쩌다 욕설이 되었나?
― ‘남자의 위기’ 담론과 ‘남자다운 남자’의 허상을 넘어,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를 분석하는 새로운 인식론과 방법론

인류 역사상 남성은 언제나 인간 보편이자 ‘일반’이었고 여성은 항상 보편의 ‘특수’로 존재해 왔다. 여성은 ‘여비서’ ‘여교사’ ‘여기자’처럼 ‘여성’이라는 특수의 위치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남성은 노동자, 시민, 유권자, 청년으로 불리며 보편을 대표해 왔다. 보편이 아니기 때문에 잊히고 묻힌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여성성 연구의 한 방식이라면, 남성성 연구는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바로 그러한 남성성 연구, 특히 한국 남성성 연구의 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6명의 필자들은 역사와 문화를 넘나들고, 문학과 철학, 인류학을 바탕 삼아, 한국적 남성성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 전통적 남성성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분열하는 남성들의 모습까지 한국 남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나아가 보편이 아닌 차이로서 ‘남성성들’의 목록을 다시 설정하고자 한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정희진)은 이른바 ‘남자답지 못한 남자’가 여성을 더욱 억압하는 종속적(주변적)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시론이다. 여기서 정희진은 먼저 근대 자유주의부터 후기 구조주의까지 ‘남성성’을 분석하는 기존 여성주의 이론들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이론으로는 한국적 남성성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이자 문화 권력으로서 ‘식민지 남성성’에 주목한다.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의 성격을 ‘식민지 남성성’으로 규정하는 정희진의 글에 이어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에서 바로 그 ‘식민지 남성성’의 역사적 기원과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별 이분법적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식민지 남성의 위치를 고찰한다.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루인)은 세계사와 20세기 한국사를 넘나들며 ‘남자다운 몸’, 즉 음경을 중심으로 한 신체적 ‘남성성’의 규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 ‘근대 남성 신체 발명기’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산업 발전과 군국주의 기획의 일환으로서 ‘남성성’이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것은 징병 신체 검사의 항목들과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억압에서 잘 드러난다.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엄기호)은 신자유주의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한국적 남성성의 양상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분석한다. 성차별적 현실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남자도 피해자라며 항변하고 스스로 ‘찌질함’을 내세우는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고, 그러자 이들을 비판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성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한채윤)과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준우)는 흔히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는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남성성’의 실체를 거꾸로 재구성하게 도와준다. 한채윤은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거나 선망해서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핵심에 남성성은 남자만 소유한다는 관념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한다. 한채윤의 글이 ‘여자의 남성성’을 설명한다면, 준우의 글은 ‘평범한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남성의 욕망을 분석한다. 특히, 준우의 글은 다섯 명의 트랜스남성들과 심층 면접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의 언어를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과 한국의 남성성에 대하여

남자는 어떻게 ‘남자다움’이라는 속성, ‘남성성’을 체화할까? 한국 남성과 미국 남성의 ‘남성성’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왜, 어떻게 다를까?
이 글에서 정희진은 권력 관계이자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의 의미를 살피고 서구 여성주의 이론의 남성성 연구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여성주의 이론으로는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의 남성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자신을 ‘강대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동시에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로 여기는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고찰 없이는, 성 평등을 두고 한국 남성들이 보이는 전반적인 문화 지체 현상과 온라인의 혐오 문화를 제대로 분석하고 논의할 수 없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말할 것도 없이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속성(‘합리적인’, ‘감성적인’…)은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성별을 불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성다움/여성다움이라는 표현을 수시로 사용하지만, 그런 현실은 없다. 실재냐 부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임의적이라는 의미다. …… 여성주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위계와 차별을 주로 비판하지만 이는 비장애인, 성인, 이성애자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성별성은 정상성을 향한 욕망일 수 있다. 최근에는 분리 설치된 경우가 많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 많았다. 이는 성별 구분을 전제로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인간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43~44쪽)

‘남성의 위기’와 ‘여성 상위’라는 거짓말
어느 시대나 지배적 남성성의 핵심 요소는 앞 시대의 남성성과 겹치거나 재구성되고 재결합된 인용의 결과들이다. 남성 권력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를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boundary setting)을 의미한다. 각각의 남성성들은 상호 배반하거나 불일치하고 양립하지 못하는 것들이 모순적인 짝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남성성의 변화나 대체가 남성 권력의 쇠퇴나 변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시대에나 출몰하는 ‘남성의 위기’ 담론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남성성 중 하나가 다른 남성성으로 교체될 때 나타나는 남성 문화의 반응인데, 젠더 이분법에서는 이를 ‘여성 지위 향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남성 내부의 차이로 ‘대세’ 남성성의 이미지가 바뀐 것인데, 남성 사회는 이를 ‘여성 상위’라고 주장한다. (48쪽)

남성도 피해자일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한 남성은 ‘조작된 이미지’이므로 남성도 피해자일까? 요점은 피해자냐 피해자가 아니냐가 아니다. 남성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변명과 해결의 논리가 있다. 괴로운 일상의 원인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 때문인데, 여성들에게 문제를 전가한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는 남성 연대를 활용한다. …… 남성은 자신도 남성성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스스로 남성 문화를 바꾸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구의 경우 극소수이고 한국에는 없다. (55, 56쪽)

식민지 남성성 – 강대국 콤플렉스와 자국 여성 착취
한국 남성은 역사상 한 번도 외세와의 관계에서 한국 여성을 보호한 적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소유한 여자를 적에게 빼앗긴 자존심의 상처를 다시 한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나 구타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혹은 한국 여성에게 이러한 자신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강요한다.(많은 ‘군 위안부’ 여성들이 일제의 만행‘보다’ 해방 후 귀국하여 당한 가족 내 따돌림과 남편의 구타가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한다.) …… 식민지 남성성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성별과 정체성 등 존재의 모든 이슈를 강대국과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논리다. 미국을 대타자(the Other)로 설정하고 자신의 모든 문제는 그들 때문이라는 전가와 투사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다. (63, 64쪽)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 제국주의 남성성과 식민지 남성성의 위치

권김현영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남성의 ‘남성성’은 근대 전환기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에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남자다움이란 결국 ‘어떤 남자와 동일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에게는 동일시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국’이 사라졌으므로 본받을 ‘아버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스스로 새로운 근대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남성들은 피지배 상황에 놓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제국 일본의 남성성에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거나, 식민 지배 상황을 안정화하려는 제국 남성들과 공모해 일본 여성과 혼인을 꿈꾸거나, 식민지 조선 여성에게 기생해 살아가면서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권김현영은 이광수 · 채만식 · 이상 · 김유정 등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본다.

근대 전환기 식민지 남자들의 처지
식민지 조선의 소년, 청년, 혹은 ‘모던보이’들에게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모던보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식민지 조선 남자라는 위치는 조선의 아버지들과의 단절과 함께 근대 문물을 가져온 제국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각되고 각인되었다. 귀족의 기사도를 승계하면서도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규범 속에 다시 새겨 넣는 과정을 거쳐 아버지-아들 간의 적대적 동일시와 승화를 이루어냈던 서구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의 남성성은 어떤 것도 승계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78쪽)

1920년대 식민지 남자에게서 2017년 ‘한국 남자’를 보다
김유정은 1928년 일개 학생 신분으로 당대의 스타였던 박녹주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기행을 일삼는다. 해방 후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던 박녹주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유정의 구애 사건이 이상스러우리만큼 자세하게 장안에 요란히 퍼졌다며 의아해하는데, 그가 밝힌 김유정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 내내 섹스를 졸라대다가 끝내 거절하면 저주를 퍼붓고야 마는 ‘한국 남자’에 대한 ‘고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이다. (88, 89쪽)

“아아 님은 갔습니다” - 제국의 남성 앞에서 ‘여성’의 위치에 선 남자들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의 위치를 타자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여성의 위치를 점유하여 자신의 위치를 피해자로 정한 후, 피식민지 여자들을 피식민지 남자들을 위한 ‘자원’으로 만든다.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은 피해자이자 약자로서 위치를 점유하며 자신을 ‘여자만도 못한 존재’라고 자기 비하를 일삼는 습관이 있다. 여자에게 기생한다며 처지를 비관하는 피식민지 남자는 남자가 아닌 자, 즉 여자가 된다. 이때 이중으로 비하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자이다.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 “아아 님은 갔습니다.”라고 노래하면서 식민 상황에 놓인 남성들의 곤경을 숨기는 모습은 식민지 남성성의 핵심적 표상이다. 식민지 남성성은 자신을 여성화함으로써 식민주의자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점을 부인하고,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95, 96쪽)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 외과 의학과 군대를 통한 ‘남성’ 몸 만들기

루인의 글은 근대적 남성 신체가 발명되어 온 과정을 세계사와 한국적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두루 살핀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 유럽에서 외과 의료 기술을 통해 ‘남성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음경과 ‘남성 몸 되기’의 관계를 인터섹스의 경험을 중심으로 탐구한다. 인터섹스는 의료 규범상 여자의 몸이나 남자의 몸에 부합하지 않거나, ‘여성의 생물학적 특질’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질’이 섞여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병역을 위한 신체 검사가 ‘남성 몸 만들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것이 ‘남성성’을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인한다.

보편이 된 백인 남성의 몸과 열등한 몸의 발명
(젠더화된) 인종 발명과 인종 간 해부학적 차이의 발명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아프리카 부시족 여성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흑인을 비롯한 비(非)백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비백인이나 장애인과 같이 백인 남성과 ‘다른’ 몸을 쇼 무대에 올려 전시하던 그 시기에, 부시족 여성은 현생 인류로 진화하기 이전 단계의 인류로 전시되었다. 유럽인은 이 여성을 비유럽 지역의 ‘기이함’, ‘낯섦’, ‘미개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 차이를 발명하고 증명하기 위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의료 사기는 인종 차이를 해부학적 ․ 과학적 사실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기준과 규범은 백인 남성의 몸이(었으)며, 그 외의 몸은 과학적으로 ‘다른’, 열등한 몸이 되었다. (119쪽)

외부 성기로 증명하는 ‘남성의 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의료 기술, 의학의 기준을 통과한다. 흔히 진짜 여성 혹은 남성이라 불리는 젠더 범주 역시 출생 당시 의사의 승인을 거쳐 여성이나 남성으로 지정된다. 때로 인터섹스로 인지된다고 해도 서둘러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지정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해진다. 그러니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로 가공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내’가 외과 기술을 거치지 않은 ‘남성’이라면 이 말은 신생아일 때 의사가 ‘나’의 외부 성기 형태를 힐끗 본 다음 적절한 크기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남성’(혹은 젠더)이란 의학이 보증하는 남성인 동시에 생물학이나 의학을 통해 제대로 확인/검사하지 않은 남성/몸이다. (134, 135쪽)

군사 정권의 ‘국민’ 관리, 그리고 남성성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의 또 다른 주요 목적은 남성성 관리였다. 군인인 남성을 만들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주민 등록 제도를 시행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몸을 군인으로 승인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즉 어떤 몸이 국민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근대적 남성성을 재현할 수 있는지 가려야 했다. 주민 등록상 남성으로 분류되는 이들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제한된 이들만 군대에 간다. 즉 남성 내에선 특권층에서 배제되지만 남성/비남성 위계에선 특권적 지위에 있는 남성이 군대에 간다. 군 입대는 특권층은 아니지만 비남성도 아닌 위치의 남성을 표지하는 방식이다. (140~141쪽)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 ‘루저’와 ‘남성 페미니스트’의 탄생

2016년,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여성 혐오에 맞서 20~30대 여성들이 공론의 장에 나서자, 남자도 피해자라고 항변하는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찌질하다’고 고백하면서 이제 남자는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 남성들을 비판하는 또 다른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인권이라는 보편의 언어로 ‘찌질한 남성들’을 비판했다. 엄기호는 ‘찌질한 남성’과 ‘페미니스트 남성’ 둘 다 이전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라는 데 주목하고 두 남성성의 등장 배경과 의미를 탐구한다.

기득권자 대 피해자
과거라면 자신이 찌질하다는 것을 감추려 하거나 찌질함마저 남성다움(manliness)의 일부로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찌질함을 남성다움의 일부로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이 시대의 보편적 남성성(masculinity)이라고 정의하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 이들이 남성은 이제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의 남자라면 자기가 여자에 비해 손해를 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남성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라 감추겠지만 자신들은 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들은 과거의 남성 기득권자 마초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다. (157~159쪽)


평등의 문 앞에서 엎어지다 - ‘찌질이’라는 속물
연애든 결혼이든, 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이미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다. 나누지 않는다면 관계는 유지될 수 없으며,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한 그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배분하고 함께 짊어지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약하고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인정이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성의 거세, 혹은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머뭇거리고 웅얼거리고 투덜거리거나 ‘거래’를 요구 ― 내가 모든 여행 경비를 제공했으니 당일에 올라가자고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경제와 섹스를 교환할 것을 요구하는, 지루할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 말이다. ― 하는 것으로 만회하려다가 찌질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171쪽)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묻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키려 한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 정희진과 권김현영에 따르면 여성주의는 남성들이 독점한 보편성의 언어에 저항하며 지식의 맥락성과 국지성을 강조한다.(물론 이때의 맥락성과 국지성은 국민국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여성주의는 보편과 쉽게 화해할 수 없다. 보편의 헤게모니와 당파성을 질문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183, 184쪽)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 레즈비언의 ‘남성성’은 가능한가

한채윤의 글은 레즈비언의 남성성에 주목하여 남성성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남성 혐오증이 있어서 남자 대신 여자를 사귀는 여성이거나, 남자를 강하게 선망하여 남자 흉내를 내며 다른 여자와 사귀는 여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정상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이성애를 하는데, 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고 선망하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인해 본능을 거스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채윤은 레즈비언의 남성성 분석을 통해 이성애 성 규범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남성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선망이라는 착각
레즈비언이 남성성을 모방하거나 혐오한다는 분석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첫째, 원래 여자에게 남성성은 없다. 남성성은 남자만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성성이 없는 여성은 바로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끌린다. …… 그런데 선입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질문해보면 비논리적인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자에게는 남성성이 정말 없을까? 아니면 없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여자에게 남자만큼의 남성성이 있다면 그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여자는 왜 굳이 남성성의 결핍을 메꾸려고 하는가? (188~189쪽)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남성성은 생물학적 성별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거나, 자신의 성별을 남성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남성성이 저절로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부치(butch)와 트랜스남성은 남성성이 얼마나 쉽게 복제 가능하고, 변용 가능한지, 그래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며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어도 남성성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섹스와 젠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199쪽)

여자와 남자, 동성애와 이성애… 모든 이분법을 넘어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도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성애를 일컬어 동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도 정상임을 설명하려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순간, 이성애는 아무런 검토나 증명 과정 없이 ‘정상’이 된다. 그래서 동성애와 이성애의 유사함이 강조될수록 오히려 동성애자의 실체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 차별은 차이로 인해 자연 발생 하는 것이 아니며, 평등은 그 차이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209, 210쪽)

적정량의 남성성은 얼마만큼인가?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렇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난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까? (212쪽)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 트랜스남성의 ‘보통 남자’ 되기

준우의 글은 트랜스 남성 다섯 명을 직접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트랜스남성의 남성성을 고찰한 것이다. 필자는,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가진 트랜스남성들 중에 한국 보통 남성들의 남성성, 이른바 ‘한남’의 남성성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마초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 것에 의문을 품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트랜스남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특별함, 즉 차이를 지우고 ‘보통 남자’로서 확인받고자 한다. 그렇다면, 트랜스남성들이 지향하는 ‘평범한 남자’란 대체 누구인가? 트랜스남성들의 욕망과 남성성의 수행 과정을 통해 ‘평범한 한국 남자’, 보편을 대표하고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간주되는 남성성의 정체가 드러난다.


‘남성 되기’의 전제 조건 - ‘여성’의 흔적 지우기
트랜스남성은 남에게서든 자기 자신에게서든 끊임없이 “너 여자 아냐?”라고 의심하는 질문에 그렇지 않음을 입증해야 하는 삶을 산다. 트랜스남성은 여성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자신을 더욱 엄격히 검열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 여성으로 양육된 경험이나 여학교에 다닌 경험 등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전부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 경험은 완전히 버리고 싶더라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무언가로 남는다. 여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간직한 채, 현재의 자신을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평범하게 보일 남성으로 정체화하기 위해 애쓰는 점이 트랜스남성성의 큰 특징이다.
(218~219쪽)

남성 간 유대 관계에서 ‘남성 되기’
인철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공동 생활을 한다. 그에게 회사 기숙사는 남성성을 재사회화하기 좋은 공간이다. …… 자위 경험 공유, 성적 능력 과시, 여성의 대상화 등은 남성 집단을 끈끈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남성끼리 나누는 ‘몇 명과 자봤다’, ‘하룻밤에 몇 번을 사정했다’, ‘내 물건은 크고 굵어서 상대 여자가 힘들어 죽는다’ 따위의 말 상당수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다. …… 트랜스남성들은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집단 내 위계에 소속됨으로써 보상받는다. 위계 서열에 소속되는 것은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생존 수단이 됨과 동시에,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일원의 자격, 즉 평범한 성인 남성의 위치라는 사회적 남근인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223, 224쪽)

낭만이자 권력인 남성의 ‘몸’
이상적인 남성성은 정치적 맥락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사회적 담론이 변하면서 계속 바뀐다. 그래서 남성성은 그 누구도 100퍼센트 이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열등한 위치에 있는 남성 집단일수록 더 강하게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실천하기를 열망한다. 이때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몸이 규범에 적합한지, 즉 얼마나 남자다운 몸을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다수의 트랜스남성은 몸의 상태가 규범적 남성의 이미지, 즉 보통 남성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남성 되기의 척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은 의료적 조치(호르몬 투여, 가슴 제거 수술, 생식 능력 제거, 페니스와 고환의 외형을 만드는 수술 등)를 통한 트랜지션(transition) 과정을 선택한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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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교육 트렌드 리포트 2024

도서정보 : 박기현, 온정덕, 정제영, 조용상, 김수환, 송석리, 정영식, 송은정, 조기성, 이동국, 이은상, 김지혜, 정훈 | 2023-06-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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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교육혁신 원년, 지금 대한민국 교육자들에게 꼭 필요한 모든 지식과 쟁점
교육부는 2023년을 디지털 교육혁신 원년으로 선언했다. 이제 모든 교육자들에게 디지털 교육 문해력은 필수다. 이에 국내 최고 전문가 13인이 모여 디지털 교육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쟁점을 빠짐없이 다룬 디지털 교육혁신 해설서를 펴냈다. 이 책은 에듀테크 주요 요소 간 관계를 해설하여 디지털 교육 이슈를 바라보는 구조적 관점을 길러주고, 디지털 교육 3대 주제와 10대 핵심 키워드를 제시한 뒤 이에 대한 설명과 현재 진단, 미래 전망을 보여 준다.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디지털 교육 박람회 ISTE(미국), Bett show(영국)에 대한 배경지식과 최신 현황, 시사점을 제공하고, 5개 시·도 교육감 인터뷰를 통해 지역의 디지털 교육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것인지를 독자들이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든 내용을 한 권에 담은 이 책은 이 책은 지금 한국의 디지털 교육에 관한 국내 유일의 전방위 해설서다.

구매가격 : 15,000 원

질병과 전쟁

도서정보 : 김한수 | 2023-06-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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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전쟁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큰 도전입니다.
이 책은 그 현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며, 독자들에게 질병과 전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대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질병과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안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질병과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안도하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비와 대처를 고민해보기를 제안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미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질병과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넓히고,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작품과 그림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를 희망합니다.
질병과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진지하게 다루고자 하는 이 책과 함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취시키고,
향후 도전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구매가격 : 7,000 원

전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이론

도서정보 : B.B.FRIEDMAN / 김한수 | 2023-06-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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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술에 대하여는 혼란스럽고 지금까지 정립되지 않은 전술 이론의 영역을 보완하고 위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한 책이다.

1부에서는 전쟁의 원칙 체크리스트를 대체할 수 있는 전술 체계를 확립한다.
첫째, 전략 및 전쟁과 관련하여 전술의 맥락적 역할을 확립할 것이다. 전술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해 주요 전략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섹션은 J.F.C 풀러와 존 보이드와 같은 이론가들이 사용한 전장 상호작용의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측면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런 다음 각 측면을 차례로 살펴보고 고전적인 전쟁 원칙과 새로운 원칙을 함께 논의한다. 각 개념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전술가가 전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표준 방법을 제시한다. 이러한 '전술적 원칙'에는 기동, 병력, 화력, 템포, 기습, 기만, 혼란, 충격, 전투에서 도덕적 측면의 역할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1부에서는 전략에 기여하는 전술적 승리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

2부에서는 승리의 정점, 임무 전술과 분산형 지휘통제, 공격 및 방어 작전, 이니셔티브 등 전술가가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개념을 탐구함으로써 1부를 기반으로 한다.

3부에서는 제시된 전술 체계가 전략 연구의 다양한 다른 이슈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은 초급간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전문 학자와 비전문 학자 모두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구매가격 : 17,000 원

빈 살만의 두 얼굴

도서정보 : 브래들리 호프/ 저스틴 셱 | 2023-06-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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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타임스&맥킨지 올해의 비즈니스북 선정” “사우디아라비아와 세계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로버트 베이어 『악마와 동침하기: 미국이 사우디 원유를 위해 영혼을 팔아넘긴 방법』의 저자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빈 살만의 모든 것, 유혈 낭자한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섰던 그가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로 우뚝 서기까지 2022년 11월 17일,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SK 최태원 회장, 현대차 정의선 회장 등 대한민국 재계를 이끄는 대기업 총수 8명이 방한 중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만났다. 이 회담에서 670조 원 규모의 초대형 사우디 신도시 프로젝트 ‘네옴시티’를 비롯한 경제협력 방안을 광범위하게 논의했고 40조 원에 달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왕세자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은 총수들의 사진이 한동안 화제였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사우디에서 무슨 사업을 하고 싶냐”는 질문으로 굴지의 기업 회장들을 긴장시킨 사람, 바로 38세의 젊은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이다. 어린 시절 맥도날드를 너무 좋아해 체형은 비만했고 게임에 빠져 공부에는 무관심해 아버지를 걱정시켰던 빈 살만은, 10대에 접어들며 다른 형제들처럼 유학을 가는 대신 리야드 주지사였던 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돈과 권력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구축해 나갔다. 2011년에 아버지 살만이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아버지의 특별보좌관이 된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마침내 2017년 6월, 당시 왕위계승서열 1위였던 사촌 형 모하메드 빈 나예프를 몰아내고 왕세자로 등극하자마자 ‘왕족 부패 척결’이라는 미명하에 피의 대숙청을 단행하여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정리하며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국왕보다 더 큰 권력을 쥔 사우디의 실세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계무대 장악을 위한 전폭적인 개혁을 추진 중인 빈 살만은 사우디 국민들을 짓눌러 온 이슬람율법을 완화하겠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정책들을 수립했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과제인 탈석유경제를 위해 국가개혁계획을 대대적으로 공표하여 실리콘 밸리에 대한 투자 및 최근 네옴시티 관련 수십조 원대의 글로벌 수주도 거침없이 진행해나가고 있다. 『빈 살만의 두 얼굴』은 유혈 낭자한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섰던 그가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로 우뚝 서기까지의 전 과정을 그렸다. 빈 살만 관련 도서로는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책으로, 모하메드 빈 살만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빛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두 기자가 수많은 인터뷰, 금융 자료, 정부 비밀문서 등을 토대로 완성한 모하메드 빈 살만 추적 프로젝트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로 근무하며 전 세계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기사를 써 온 브래들리 호프와 저스틴 셱은 2017년 급부상한 모하메드 빈 살만을 주시했다. 예멘 내전 개입, 사우디 유력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레바논 총리 납치 및 사임 협박, 미국과의 외교 동맹, 대이란 정책 등 빈 살만이 중심에 섰던 행적들을 파헤치면서 두 저자는 밝혀낸 사실들을 책으로 남겨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들은 빈 살만이 수년간 교류해 온 인물들 가운데 접촉 가능한 여러 나라의 모든 사람을 찾아 인터뷰했고 가능한 한 이메일, 법적 증서, 사진, 동영상, 기타 여러 형식의 기록물로 보강했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금융 자료와 정부 비밀문서, 빈 살만과 사우디아라비아에 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고 자신들이 썼던 기사들을 토대로 책을 완성했다. 다채로운 방식의 풍부한 조사를 거쳐 속도감 있게 쓰인 이 훌륭한 전기는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관계와 중동의 정치 역학에 관한 탁월한 입문서로서 기능한다. 80년 이상 석유와 군사적 보호를 맞교환하며 유지되어 온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맹이 느슨해지는 시점에 맞추어 공교롭게도 빈 살만이 권력의 정점으로 수직 상승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우며, 매력적이고 교활한 왕세자와 그를 열렬히 성원하게 된 미국의 유명 은행가, 할리우드 인사, 정치인 들과의 연대 관계 역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책은 특히 빈 살만의 향후 국제적 행보를 예측해야 할 정치 및 사회경제 분야 전문가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젊은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앞으로 다가올 여러 세대를 책임질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985년생으로 한국 나이 39세, 추정 재산 약 2,700조 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모하메드 빈 살만.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빈 살만을 주시해야 한다. 미스터 에브리싱은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구매가격 : 17,500 원

불가능했던 동맹 성공한 동행

도서정보 : 최형두 | 2023-06-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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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계획 속에 한국은 없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은 2023년
철저한 고증 분석, 세계적 석학들과 대화하며 찾아낸 한미동맹의 진실



◎ 도서 소개

“한국은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고, 미국은 잘못 엮일 것을 염려했다!”
70년 한미동맹의 출발과 전개, 그리고 미래

1953년 맺어진, 상호방위조약·장기 경제원조·한국군 현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한미동맹은 전후의 폐허에 섰던 대한민국이 생존하고 번영하는 발판이 되었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숱한 오해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왔다. ‘미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 한국을 지배 혹은 관리하고 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최형두 의원 역시 젊은 시절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386세대의 첫 학번으로 운동권이었던 그는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반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기자로 일하며 취재 현장에서 다양한 사료를 접하고 많은 전문가를 인터뷰하며 70년 한미관계 뒤편의 진실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불가능했던 동맹 성공한 동행』(21세기북스)에 담았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며 설득해 얻어낸 외교적 성취이다. 그리고 단순한 군사동맹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동맹으로 출발했다. 이승만은 불가능했던 한미동맹을 현실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그 한미동맹을 발판으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협, 특히 북핵 위기에 맞서며 동맹을 유지해왔다. 한미동맹은 안보 위협에 처한 대한민국이 현재의 발전상을 만드는 데 결정적 안전판이 되어주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는 2023년의 국제 정세는 날로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한미동맹 역시 질적 도약이 요구된다. 북한 위협에 공동에 맞서던 차원을 넘어 동북아의 평화 공영에 기여하는 단계로의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본문 중에서

미래는 불확실하고, 더욱 힘든 도전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지만, 과거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선입관·편견·흑백논리로 접근하면 미래를 직시할 기회조차 잃게 됩니다. 한미동맹의 탄생, 6·25전쟁의 내막, 지난 70년간 한미관계의 진실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9쪽_개정증보판 서문】

이승만은 무모할 정도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까지를 바꾸려 했다. 그 때문에 한때 미국은 그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한마디로 미국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의 노회함은 미국 지도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조야의 지도층을 파고들 줄 알았다. 미국 지도자들은 그가 골치 아픈 존재라고 생각했다.
【103쪽_제1장 준비 안 된 만남, 뜻밖의 동맹】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12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한미동맹의 얼개가 결정됐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② 미국은 한국에게 최초 2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해주고, 향후 장기 원조를 보증한다. ③ 미국은 한국 육군 20여 개 사단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을 승인한다.
【123쪽_제2장 한국은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고, 미국은 잘못 엮일 것을 염려했다】

북핵을 둘러싼 한미 간의 마찰은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빚어졌다. 북핵의 위험성에 대한 판단에서 한미 간의 체감도는 서로 달랐다. 제네바 협상 당시 미국의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견제를 받았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협정을 맺으며 북한에 대해 너무 유화적인 정책을 사용한다고 우려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나 노무현 대통령 때는 미국이 무력 사용 가능성이나 대북 제재에만 열중한다는 한국 정부의 걱정에 직면했다.
【235쪽_ 제3장 민족인가 동맹인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진실】

한미관계, 한중관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취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주한미군에 국가 방위를 의존하는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국방예산 감축 때문에도 한미 군사동맹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한국은 오히려 한미군사동맹이라는 역사적 고리를 넘어서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인도주의라는 가치 위에 미국과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321쪽_제4장 숙명적 선린과 선택적 동맹, 글로벌 코리아와 한미관계의 미래】

이승만은 불가능했던 한미동맹을 현실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그 한미동맹을 발판으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따라서 한미동맹 70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한미동맹 뒤에 웅크리고 있는가, 아니면 한미동맹을 혁신하고 있는가.
【359쪽_개정증보판 후기】

구매가격 : 19,200 원

김두황 평전 : 시를 사랑하고 늘 봄볕 같았던 한 청년의 기록

도서정보 : 홍기원 | 2023-06-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구매가격 : 18,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