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도서정보 : 연호탁 | 2017-01-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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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관동대에서 30여 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연호탁 교수가 2013년 말부터 2015년 말까지 2년간 총 55회 분량으로 매달 2~3회씩 <교수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펴낸 책이다. 저자는 온통 미스터리로 둘러싸여 있는 광활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경험과 고대사.언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역사.문화.언어.풍습을 탐구한 결과를 에세이 형식으로 써냈다.
저자 연호탁이 갖춘 가장 큰 강점은 여행을 통한 현장 경험이다. 저자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엿보고 사람살이를 엿보고자 했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일대를 여행하며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곳의 분위기와 전통을 몸소 체험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역사.문화.언어.풍습 등을 세밀히 연구, 고대사.언어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하나씩 쌓아올린 이야기를 썼다. 저자가 여행한 흔적은 책 속에 실린 사진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는 역사 기록에 근거한 사료를 제공하고, 중간중간 내용과 관련이 있는 문학작품도 인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친근하게 중앙아시아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한다. 때로는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또 때로는 지역의 역사를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으로, 독자들에게 두 가지의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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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인권의 지도자 김대중
도서정보 : 조한서 | 2017-01-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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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은 청소년을 주 독자층으로 염두에 둔 책이므로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주안점을 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난으로 가득 찬 김대중의 생애와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 낸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절망을 희망으로, 좌절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꿈과 용기를 갖게 하는 삶의 아름다운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소년들이 우리 현대사를 보다 바르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김대중의 생애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컨셉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라 할지라도 제외된 측면이 없지 않다.
목포 방문이후 서거하기 까지 3년 남짓 동안 많은 변화와 사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김대중의 문민정부를 계승한 노무현의 참여정부 이후 보수 정권이 들어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연장선 위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일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사건들을 김대중과 관련지어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간단히 사실 관계만을 언급한 채 여백으로 남겼다.
저자가 여백으로 남긴 부분에 대해서는 읽는 이들이 그 여백을 채워주고, 저자와 함께 김대중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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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도서정보 : 김형곤 | 2016-12-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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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은 ‘긴급 소집병’으로 구성된 아메리카 독립군이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군을 물리치고 인류 최초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까지의 미국 독립전쟁을 조망함으로써 시대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구매가격 : 4,800 원
미국 남북전쟁
도서정보 : 김형곤 | 2016-12-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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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은 는 경제적 이익의 충돌,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 정치적 선동 등으로 꼽히는 남북전쟁의 배경부터 꼼꼼히 살펴나간다. 모든 전쟁이 참혹하지만 내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참혹한 이 전쟁은 복잡하고 광범위한 배경에서 터지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이어 남북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짚어보는 가운데 그 중심에 몸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링컨과 그의 리더십을 조망함으로써 역사적 의미를 헤아려본다.
구매가격 : 4,800 원
하마비를 찾아서 2
도서정보 : 이희득 | 2016-12-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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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를 찾아서 2』는 앞서 출간했던 1권에 이어 역사의 현장에 남아있는 오래된 돌에 새겨진 의미를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답사해 얻은 ‘하마비’에 관련된 사진 및 여타 정보를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구매가격 : 12,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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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던 조봉암,
그는 왜 사형되어야만 했나?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의 최후,
이승만과 겨룬 ‘죄’, 대가는 죽음이었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재조명하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3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3권의 주제는 ‘조봉암과 이승만’이다. 조봉암의 생애를 되짚는 작업을 통해 이 시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역정(驛程)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조봉암이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 활약한 시기는 이승만 집권기이다.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과 이승만은 자연히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은 이런 조봉암과 이승만을 중심에 두고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 1950년대의 한국 정치와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은 어떤 정치를 펼쳤는가? 진보당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은 극우 반공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왜 조봉암은 사형되어야 했는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려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던 시기에 조봉암은 활약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이 책은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재조명하는 책이며,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조봉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했던 정치인
조봉암은 뛰어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의 진보 세력 가운데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3·1운동을 겪으면서 한 명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한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때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맹활약했다. 상해에서 1932년에 체포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1945년 1월경 헌병사령부 예비 검속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뒤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고, 이 외에도 농민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협동조합을 육성·장려하고, 농민이 직접 교육받고 실천할 수 있는 농사 훈련 기구 같은 것을 창설하려 했다. 이런 조봉암의 급진성을 이승만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반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권고에 의해 조봉암은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선 2위를 기록하며 이승만의 라이벌로 급부상하게 된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승만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었다. 956년 대선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정 선거가 만연했고, 이 부정 선거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
조봉암은 당시 현실에 맞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려 했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진보당은 ‘피압박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 세력의 전위’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진보당이 발당식을 했을 때도 피해 대중의 당이라는 걸 명시했다. 이건 공산주의하고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례를 봐도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없다. 진보 세력의 정강 등에는 대개 ‘노동자, 농민, 진보적 소시민 또는 당하고 있는 여러 소수 세력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조봉암은 피해 대중이라는 걸 명시했다.” 그러면서 개성을 맘껏 발휘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했다. 또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북진 통일’만을 강변하던 시대에 ‘평화 통일’을 주창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그 당시에는 용기가 없다면 ‘평화 통일’을 얘기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중요한 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1950년대에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1950년대 상황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조봉암은 1958년 1월 간첩죄 혐의로 진보당원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 당시 60세였던 조봉암은 형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억울하게 사형에 처해진 조봉암은 52년이 흐른 2011년에야 명예를 회복한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전원 합의 판결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냉전 체제에 도전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은 것 아니겠나. 사실 냉전 체제에 도전한 정치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조봉암을 역풍(逆風)의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역풍에서 풍이라는 게 뭐겠나. 냉전 체제 아니겠나. 냉전 체제를 거슬러 그것에 도전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권력욕이 남다른 독재자
뉴라이트가 ‘국부’라고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은 어떤 대통령이었는가? 우선 권력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다른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1952년 악명 높은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발췌 개헌을 통해 정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 흘리고 도처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감수하던 때, 후방 부산에서 최고 권력자가 집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한 것이다.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권력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거세게 일어난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은 점점 커졌고 1954년에는 5·20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자유당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 뒤부터 선거 때마다 갖은 부정을 저지르며 정권을 유지해왔다.
이승만에게 조봉암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민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해 자신에게 도전했으며, 게다가 1956년 대선은 자칫 뒤집힐 뻔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정적 조봉암을 제거했고, 자신의 집권 기간 내내 그랬듯이 그 뒤에도 영구 집권을 꿈꾸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고, 민중에 의해 12년간의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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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이룬 거대한 승리,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4월 그날,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독재의 총구보다 강했다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4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4권의 주제는 ‘4월혁명’이다. 서중석 교수는 4월혁명을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며, ‘제2의 해방’으로 부르고 있다.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선거 부정, 악정, 폭정 등으로 숨이 턱턱 막히던 시기였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이런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1960년 드디어 민중이 일어섰다.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에서 4월 26일까지 이어진 4월혁명은 막힌 숨통을 틔운 사건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 결론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이었다. 이 책은 이런 4월혁명의 의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4월혁명 전후의 한국 사회를 반추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뉴라이트가 국부로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항쟁인가, 혁명인가, 4월혁명에 서린 민주주의 고투
4월혁명을 가리키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헌법에도 그냥 4·19라고만 돼 있는 것처럼 4·19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고, 또 4·19의거, 4·19학생혁명, 4·19학생운동, 4·19혁명, 4월혁명, 4월학생혁명, 3, 4월 항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용어가 정리되지 않은 까닭을 4월혁명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2월 28일 경북 지방의 고등학생 시위부터 3·15 제1차 마산의거와 4월 11~13일에 있었던 제2차 마산의거를 거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4월혁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월혁명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가 반드시 4월 19일과 4월 26일, ‘피의 화요일’과 ‘승리의 화요일’에서 다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승만을 하야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여러 가지 활동은 오히려 4월 26일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5·16쿠데타로 일단락된다고는 해도, 4월혁명 정신은 그 이후까지도 숨을 쉬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4월혁명’으로 불러야 적절하다는 것이다. 곧 4월 26일을 경계로 해서 그날까지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는 과정, 그 이후는 4월혁명 정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4월혁명 운동기 또는 4월혁명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좋으며, 그래서 4·19혁명보다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4월혁명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4·19 기념식이 열리는 곳에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5·18이 다가오면 5·18을 전후한 시기를 ‘5월 항쟁기’로 선포하고 ‘4월혁명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루자’고 소리 높이 외쳤다. 곧 4월혁명은 1987년 6월항쟁까지 가는 데 5·18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19는 난동”, 반성과 사죄는 이승만 사전에 없었다
“어제 일어난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0일 오후 5시가 돼서야 처음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도 미국이 압력을 가해서 겨우 발표한 것이었다. 자유당도 이날 처음 성명을 내고 “본당은 선량하고 순진한 학도를 선동하여 폭력 사건을 자행하게 한 장본인 및 그 도당의 악랄한 비국민적 만행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발포는 부득이했다고 강변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반성은커녕 시위한 사람들을 두고 ‘비국민’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에 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도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직을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유당과 국무위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위기에 빠진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대신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린 것이다.
25일, 4월혁명에 한 획을 그은 큰 규모의 시위가 전개됐다. 교수 300여 명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선 것.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 이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시위를 필두로 “이승만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등장했고, 그날 밤 10만 명이 넘은 군중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리의 화요일’이 온 것이다. 군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올렸다. 떠나갈 듯 함성이 울리는 세종로 일대에서 일부 군중이 중앙청 정문으로 밀려들어갔다. 10대 소년들은 이승만 동상을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녔다. 흰옷을 입은 한 노인네는 덩실덩실 춤췄다. 해방의 날이 따로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
4월혁명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우선 195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에 담긴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 통치를 받은 1910년대를 여러모로 떠올릴 수 있는 억압의 사회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초래한 공포 사회였다. 말을 못 하는, 입을 닫고 묵종해야 하는 사회 위에 건설된 반공 독재로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고 인간의 사고, 사상이 심하게 위축됐다.
4월혁명은 이런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이었다. 4월혁명으로 정말 꿈에도 그리던,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자 문화인, 지식인, 학생들이 앞질러 만끽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조차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석 달이 지난 1961년 8월,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는 민정 이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그 발표에는 미국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와 함께 4월혁명의 큰 힘 때문에 그것을 배신할 수 없는 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또 4월혁명은 민족 자주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통일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교원 노조 운동과 같은 노동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공무원 공채를 실시하고 공무원 임용령 등을 공포해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도 했다. 또 법치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4월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신호로 해서, 제주 4·3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이 재조명된 것이었다. 이처럼 4월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고, 우리 사회를 변모시키고 사회에 신선한 바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4월혁명은 헌법 전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큼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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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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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가 만든 테러·감시·가위질의 시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제약을 받았다
혁명? 5·16은 반혁명 쿠데타일 뿐!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박정희 성찰하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권의 주제는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4월혁명 이후의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가 일어난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일까? 왜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일까?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던 것일까? 당시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박정희’라는 이름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논란거리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낯 뜨거운 말로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 세력이 끼친 폐해를 직시해야 한다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런 평가가 과연 올바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까?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그 당시 한국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의 집권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성찰하면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를 과도하게 떠받드는 세력들에 의해 그의 우상화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7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부터 혈세를 쏟아부어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구미시는 당장 28억 원가량을 들여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비판과 성찰은 없이 일방적인 미화와 우상화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등장,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조봉암이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혁신 세력이 진보정당을 꾸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승만 집권기 때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집단 학살 문제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진상 규명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구 암살 사건도 재조명됐다. 김구는 부활해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통일의 상징이 됐다. 교원 노조가 결성되는 등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에 반대하는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또한 통일 운동과 더불어 반미 운동도 일어났다. 이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그 유명한 구호가 나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런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4월혁명의 과실을 대부분 차지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이었고, 분단·반공 세력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민주당 정권은 부정 선거 원흉이나 발포 책임자, 부정 축재자, 반민주 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한 특별법인 혁명 입법을 만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서중석 교수는 장면 정부가 비록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9개월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경제 정책을 세우고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점, 경찰을 대폭 숙정해 물갈이한 점, 국군 숫자를 대폭 줄여 국방비를 경제 발전에 돌려쓰려고 했던 점은 뛰어난 성과라고 말한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는 점차 안정되지만 곧 쿠데타가 일어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이나 집권했기 때문에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 언론계나 지식인층도 잘 몰랐다. 국회의원들도 ‘박정희가 누구야?’ 하고 서로 얘기했다고 그런다.”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 박정희는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를 만큼 무명의 군인이었다. 사실 군인 시절에도 박정희는 눈에 띄게 활동한 게 없었다. 한국전쟁 때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 다카키 마사오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졌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두 번째 응모하면서 했던 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도 2009년에서야 밝혀졌을 만큼 박정희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했다. 1961년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어보면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았고, 쿠데타 당일 병력 동원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쿠데타군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한 나라를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전엔 안 그랬는데 요 근래 박정희 정권에 관해 강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게 있다. ‘박정희는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한다. 쿠데타에 성공할 때도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정말 운이 좋았고, 경제 발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내외 조건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화를 할 때에도 선진국에서 사양 산업이 된 일부 중화학 공업을 넘겨주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또 정부에서는 중화학 공업에 매진했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꺼렸던 1970년대 후반에 중동 건설 경기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쿠데타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를 가능케 한 배경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당시 한국군이 굉장히 비대했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 숫자를 늘리는 게 국방력을 갖추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53년에 벌써 60만이 넘었고, 나중에는 72만 명까지 늘어났다. 또 하나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군인들이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는 것. 당시 어지간한 장교는 모두 미국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박정희,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유학이란 큰 부자, 특권층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을 다녀온 군인들은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고 정권을 넘볼 힘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1959년 미국 콜론 연구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서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우선 쿠데타 모의는 김종필, 김형욱 등 육사 8기들에서 시작된다. 왜 육사 8기가 쿠데타를 도모했나? 이들은 군 상층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고 이를 거세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군 상층부를 바로잡자고 정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극소수만 대령 진급을 했고, 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 정도가 중령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장면 정부의 부패, 군의 부패 등을 들었지만, 서중석 교수는 권력욕과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등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이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박정희를 끌어들였고,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5·16쿠데타, 막을 수는 없었을까
쿠데타 세력이 꿈꾼 나라는?
쿠데타는 분명 막을 수 있었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사 실책과 윤보선의 묵인 때문에 결국 막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우선 장면은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서 내리고 현석호를 새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신임 육군 참모총장에 장도영을 앉혔다. 장면은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을 몇 차례 들었지만, 그때마다 장도영은 ‘염려할 것 없다’면서 박정희를 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장도영만큼이나 쿠데타에 기여한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장면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보선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 일부에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하자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곧 쿠데타를 묵인하고 만 것이다.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행.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서중석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쿠데타를 성공시켰지만 이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상은 없었다.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게 혁명 공약 1번이었을 뿐 어떤 정치적 이념도 보이지 않았다. 반공을 제외하면 무(無)이데올로기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겐 사상이 있었는가. 서중석 교수는 박정희의 생각은 일제 식민 사관에 기반을 둔 저열한 민족성론, 식민지 노예근성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극단적인 반공 노선 같은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란과 무질서를 물리력으로 뿌리 뽑겠다는 파시즘적 질서관, 그리고 일제 시기의 청년 장교들이 가졌던 군국주의, 국수주의나 군인 정신 같은 것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낡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아주 강렬하고 과격하게,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비민주적·파쇼적 사고나 행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적이거나 개혁적인 느낌을 갖거나 그것을 신선하고 민족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파시즘 이념이나 행동이 유럽에서 일부 층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또 일제 군국주의 청년 장교들의 정치 이념이 상당수의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그럴 수 있었다. 어쨌건 구부러진, 기이한 ‘민족의식’이 당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곧 쿠데타 세력의 사상이란 식민 사관과 극단적인 반공 노선, 군인 정신이 결합된 것일 뿐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나
5·16쿠데타 때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나중에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쿠데타를 지지했다’고까지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 오래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 지지로 나선 건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은 민간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와 자유를 어느 정도 지키는 민주주의 정부가 과연 한국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 후 진보 세력이 등장해 통일 운동과 전후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을 강하게 하자, 미국은 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 대신 자기들이 정말 믿는, 탄탄한 반공 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쿠데타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쿠데타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곧 미국은 처음부터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주한 미군과 미국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박정희를 잘 알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박정희가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 정책을 철저히 수행할 것임을 확신했다고 본다. 남로당 프락치로서 한 박정희의 배신적 행위, 기회주의자로서 면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거기 다시 안 붙는다는 걸 하우스만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측에서 그간 보니 공산당을 배신한 자들이 공산당에 다시 가는 건 못 봤다’, 이런 점을 강조하더라.”
5·16쿠데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의 평가는 “쿠데타 세력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가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5·16 반혁명 쿠데타”로 부르는 게 제일 정확한 용어라고 말한다. 서중석 교수는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문제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 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을 과연 하려고 했는가. 분단 고착화인가, 통일 지향인가. 이 질문을 놓고 보았을 때 쿠데타 권력은 확실히 반혁명 세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 이후 자유와 민주주의는 억압되었다. 정기 간행물 1,200종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의 자유도 퇴행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제약받았다. 반공법이 통과되면서 내면의 자유까지 짓눌렸다. 예술가들도 가위질의 공포에 항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혁신계의 통일 운동을 반국가 행위로 철저히 처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 자치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 노동조합이 해산되고 많은 노조 간부가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노조는 권력에 종속되고 노동 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는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반혁명 쿠데타일 뿐이라고 말한다. “5·16쿠데타는 중남미 쿠데타처럼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고, 현상 변화나 현상 타파 즉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5·16쿠데타의 의도는 전 세계적 규모의 냉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세력, 진보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 역사의 정상적인 진행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박정희는 정말 무서운 사람”
권력 앞에선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다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
혁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권의 주제는 ‘박정희와 배신의 정치’이다. ‘배신의 정치’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유포한 표현이다. 이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정치인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친 박정희의 집권 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1961년 5·16쿠데타에서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박정희가 보인 모습은 개인적 신의와도, 민주주의 원리와 역사의 흐름을 준거로 한 대의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목숨을 걸고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 중 상당수를 내쳤다. 그것도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은 채. 그런 식으로 밀려난 이들 중에는 박정희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여러 차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은인 장도영도 포함돼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던 셈이다. 일제 시대에 만주군 장교였다가 해방 후에는 남로당 프락치로 변신하고, 그 후에는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만은 살아났던 박정희로서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모습이다.
‘혁명재판’의 반혁명성, 쿠데타 권력의 발가벗은 모습
1961년 6월 22일, 최고회의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걸 소급 입법했다. 이 특별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조항이 바로 제6조다.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 법으로 혁신계 인사,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한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 등을 잡아들이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몰아붙여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형하고 처단한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 반혁명 사건이라고 말한다.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일주일도 안 돼 2,014명을 검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숫자는 3,500명으로 늘어났다.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도 이때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통일 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처단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던 이들도 가혹하게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희생자들의 묘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3·15 부정 선거 원흉과 4월혁명 발포 사건 핵심 인물들은 대거 석방된다.
쿠데타에 반대한 세력, 쿠데타 관련 정보를 누설한 자들,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한 사람들도 모두 반혁명 사건으로 처단되었다. 그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반혁명 사건은 장도영 사건이다. 장도영은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고,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에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군 복귀 공약,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박정희의 ‘배신의 정치’는 공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거듭 반칙을 했다. 곧 민정 이양 문제를 두고 줄기차게 말을 바꾼 것이다. 이른바 군 복귀와 민정 이양을 이야기한 ‘혁명 공약’을 지킬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세력은 겉으로는 민정 이양을 표명하면서도 야당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손발을 계엄으로 다 묶어놓고 중앙정보부라는 초거대 조직을 이용해 신당 조직에 착수하여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승리를 가능하게 할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압력에 못 이겨 2·18 성명을 통해 민정 불참 선언을 했다가 얼마 안 가 이를 다시 뒤집는다. 1963년 3월 16일 그 유명한 3·16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정권 인수의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국가 장래가 염려되고 일방 우리 스스로 혁명 당국의 무책임성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약 4년간 군정 기간의 연장에 대하여 그 가부를 국민 투표에 부쳐 국민 의사를 묻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른바 또 하나의 ‘배신의 정치’를 한 셈이다. 얼마 뒤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사상 논쟁 불붙은 1963년 대선, 그리고 제3공화국의 탄생
박정희의 공약은 별다른 게 없었다. “정당 정치 구현, 지방 자치 제도 실시, 중농 정책도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유권자를 헷갈리게 하는 공약이었다. 박 후보와 정당 정치 구현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지방 자치를 실시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이 당시에는 중농 정책과 정반대되는 정책을 펴고 있지 않았나.”
이 선거에서 사상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먼저 논쟁을 건 사람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 외에 외국의 주의, 사상, 정치 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는 듯하다”는 중대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들은 민주공화당은 윤보선을 허위 사실 유포, 후보자 비방 금지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사실 윤보선의 공격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이긴 했지만 여순 반란 가담자는 아니었다. 그만큼 윤보선에겐 박정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일국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 대해서조차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박정희 일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만 표 차이였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근소한 표 차이였다. “이 선거는 박정희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당 간부들도 얼마나 가슴이 탔겠나. 정말 아슬아슬한 맛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는 서구적 정치,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정치, 정당 정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한국 사회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런 박정희가 이 선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게 있었다고 본다.” 이렇게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이 군사 문화는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 정치, 문화,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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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 15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춘추전국, 인간의 도리와 세상의 의리를 찾아서
도서정보 : 공원국 | 2016-12-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1. 책 소개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대가 묻다
“흘러간 역사나 옛사람의 말이 오늘날 쓸모가 있을까요?”
공원국이 답하다
“정신의 근육도 매일 단련해야 필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역사와 고전은 단련의 장소를 제공하지요.
옛 거울에 나를 비춰 보고, 옳은 길을 가는 힘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각계 명사에게 ‘다음 세대에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한 응답을 담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의 열다섯 번째 주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살펴보는 인간의 ‘도리(道理)와 의리(義理)’이다.
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이르는 고대 중국의 변혁 시대를 뜻한다. 춘추시대에는 다섯 개의 패권 국가가 등장했고 전국시대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힘을 겨뤘다. 끝없는 약육강식의 전쟁이 일어난 시대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이 시기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시대가 혼란스러웠던 만큼 정신적 지향점을 찾고자 하는 시도도 많았고 공자를 비롯한 걸출한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군사, 행정, 경제, 철학, 과학기술, 외교 등 20세기 공화혁명과 공산주의혁명 이전의 중국의 뼈대는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닌 춘추전국 이야기를 ‘도리’와 ‘의리’라는 주제로 나누어 소개한다. 1장 ‘도리를 찾아서’에는 주로 자아성찰이나 자기수양 등 개인(私)의 성장,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해당하는 내용을, 2장 ‘의리를 찾아서’에는 주로 인간관계나 사회정치 등 공동체(公)의 발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았다.
흔히들 극심한 분열과 경쟁 상황을 가리켜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쓴다.
난세에 처한 사람들에게 현명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으로, 마치 힘겹고 혼란한 지금 우리에게 보내는 듯한 놀라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사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인간성
변하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인간성을 읽다
춘추전국의 역사는 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무엇보다 도리와 의리, 즉 ‘인간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한다. 사람의 역사는 반복되고, 더구나 춘추전국 시대는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미담, 악행, 덕행, 비화, 애사, 기담 등이 집약적으로 기록된 시기라 후대에도 충분히 모범이나 경계가 될 만하다고 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 세상이 바뀌어도 결국 일이 되게 하는 것도, 일이 되지 않게 하는 것도 모두 인간성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즉 ‘사람이 그러면 못쓰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하는 그 마음이 역사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성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이토록 중요하며 이토록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춘추전국시대는 불후(不朽)의 거울
오늘날에도 흔히들 극심한 분열과 경쟁 상황을 가리켜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쓴다. 격동의 시기, 전쟁과 생산에 동원된 인민들의 고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중국 송나라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면서 전국시대에 “인민들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싸웠다고 한탄했다. 특히 전국 중기부터 진(秦)이 자행한 대량 살육전으로 인해 한 번의 전투에서 수만 혹은 십만 이상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낸다.
음모가들이 판을 쳤지만 여전히 이상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고군분투했고, 위기에 처하면 자기 몸만 챙기는 자가 있는 반면 창칼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지사가 있었다. 남을 해치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 자와 인(仁)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도 희생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는 시대를 끌고 가고 어떤 이는 시대에 영합하고 어떤 이는 시대를 외면했다. 하지만 기록된 모든 인물과 사건이 싫든 좋든 모두 명징한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 서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는 인류와 함께 영원히 지속된 소위 불후(不朽)의 화두이며, 그 시절은 이 화두를 비추는 불후의 거울이다.
정신의 근육에도 단련이 필요하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되고, 어느 시대나 도(道)와 의(義)를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어쩌다 도와 의는 이토록 우리와 멀어진 것일까? 혹시 우리가 도의를 너무 고상한 것, 우리와는 먼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두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도의는 팔다리나 장기의 기능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가까이 두고 쓸수록 더욱 민첩하고 강해지지만 내버려두면 정작 필요할 때 쓸 수 없는 것. 가까이 두고 쓰면, 어느 순간 숨을 쉬고 길을 걷듯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모두 들어맞게 되는 것이 도의다.
왜 사람들은 도와 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행동이 옳다는 것을 몰라서 그럴까?
사람들에게 갑자기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하면 신체의 근육이 부족해서 포기하듯이, 옳은 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는 것은 정신의 근육이 부족해서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일 당장 높은 산을 오를 신체의 근육이 생기지 않듯 옳은 일을 실천하는 정신의 근육이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생길 리 없다. 도의라는 정신의 근육도 매일 단련해야 정말로 필요한 때에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2700여 년 전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것은, 역사와 고전이 바로 우리에게 정신의 근육을 단련하는 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뛰어넘는 춘추전국 이야기의 감동과 지혜를 맛보는 것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와 관련한 배경 지식을 쌓고 싶은 독자를 위해 그 시대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주요 인물, 열국들의 지리적 위치, 주요 전투와 전략, 춘추전국 이야기의 출전 등을 ‘춘추전국 시간 여행 안내서’라는 부록으로 엮어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각 글의 말미에 글 속에 등장한 고사성어, 역사 용어, 관련 지식 등을 상세하게 풀이한 팁을 달아 앞선 내용을 한 번 더 음미해볼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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