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속 숨은 조연들

도서정보 : 노승대 | 2022-06-1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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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의 ‘신 스틸러(scene stealer)’,
그들의 진귀한 비밀을 캐내다!

- 웹툰 「신과 함께」에서 주인공 자홍을 심판하던 명부의 왕들
- 영화 〈사바하〉에서 악귀를 잡는 악신으로 소개된 네 명의 장군 신들
- 이들은 누구이고, 왜 우리 절집에 자리하고 있는가

자, 사찰을 하나의 무대라고 상상해 보자. 그 무대의 주인공은 단연 ‘부처님’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끄는 ‘황금 조연’들이 있으니…. 그들은 사찰에 들어오는 이들을 향하여 주먹을 날릴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여섯 개의 팔에 날 선 무기를 지닌 채 성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옆엔 이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천진한 미소를 지닌 동자들이 뛰놀고,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벌을 주면서도 한없이 바빠 보이는 존재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가?
전각과 불상, 탑 등을 이야기하는 여느 문화재 안내서와 달리 조각이나 그림으로 남아 절집에 모여 사는 동식물, 우리 전설 속 존재 등 뜻밖의 대상을 소개한 전작으로 주목을 받은 저자. 이번에는 가히 신(神)이라 할 수 있는 사찰 속 기묘한 존재들의 진기한 내력을 뒷조사한다. 그렇다면 40여 년 사찰 문화답사 경력의 전문가인 저자가 만난 ‘절집의 숨은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절집의 신비한 존재를 찾아 떠나는 모험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즉 명부(冥府)의 존재에 관한 내용이다. 지옥 중생의 구제를 대원(大願)으로 삼은 지장보살과 협시(夾侍)인 도명존자?무독귀왕, 그리고 열 명의 지옥 심판관인 시왕과 중생의 생전 선악(善惡) 행위를 빠짐없이 기록해 보고하는 선악동자 등이 그 주인공이다.
2부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를 보호한다고 하여 ‘호법신중(護法神衆)’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이야기이다. 사찰 입구에서 위협적인 모습으로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사천왕과 금강역사, 여덟 그룹의 신중 부대인 팔부신중, 신중들을 호령하는 젊은 장군 신 위태천 등이 거론된다.
마지막 3부는 부처님 가장 가까이에서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하는 협시, 그리고 괴팍한 성격을 가졌지만 중생의 소원을 잘 들어준다고 알려진 영험한 존재 나한을 다루었다.
저자는 이들 존재가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우리 사찰에 자리하게 된 경위까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추적한다. 그 근거는 종교와 역사의 오랜 문헌과 기록, 민간에 이어져 온 설화와 신화, 옛 인도 땅과 중국, 우리나라 등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이들을 종합하여 이제 미지의 존재, 미지의 공간이 되어버린 이 책의 주인공들과 그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걸 목표로 한다. 한 예로 망자가 경험하게 될 명부 여행의 과정을 한국판 「신곡」을 그리듯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우리 불교문화와 전통문화 속 진귀한 세계로 떠나는 모험에 기꺼이 가담케 한다.

한국형 판타지의 신 스틸러가 되다

사실 우리는 비단 사찰의 조각과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의외의 순간 이들을 만나왔다. 각 부에 소개되는 사찰의 신비한 존재들은 한국형 판타지의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를 꼽자면, 웹툰 원작의 영화 〈신과 함께〉에는 주인공인 망자(亡者) 자홍의 생전 선악(善惡)을 심판하는 명부의 존재로 염라대왕을 필두로 한 ‘시왕’이 등장한다. 영화 〈사바하〉에는 악귀를 잡는 악신으로 ‘사천왕’이 소개되고, 인기 만화 『극락왕생』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문수보살’을 비롯하여 주인공을 돕는 ‘도명존자’와 그의 라이벌 ‘무독귀왕’이 등장한다. 제목을 상징적인 의미로 차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화 〈아수라〉나 〈야차〉의 경우가 그렇다.
이렇듯 친숙하고도 낯선 존재들은 불교의 세계관을 응축한 공간 안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봉안되어 나름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타임라인 위에서 현실적인 고통으로 신음하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저마다의 임무와 역할을 수행한다.

신비함 이면에 새겨진 거대한 역사

놀라운 것은 이들 이면에 새겨진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볼 때 거대한 지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원전 인도에서 서역,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도래하였다. 더욱이 그 오랜 기간, 광대한 지역을 건너오며 각 지역의 문화와 습합?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그 문화권에서 숭앙된 타 종교나 민간신앙은 물론 전쟁이나 기근 등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사건 등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한 예로 신중 가운데는 비슈누, 시바 등 힌두교의 신이나 우물 신, 측신 등 우리나라 재래신도 포함된다. 한편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혼란 상황 속에서 조성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발 밑에는 왜군, 청나라 병사의 조각이 악귀 대신 자리한다.
중생의 삶에 더욱 가까운 존재로 민중에게 있어 자신들을 지켜줄 수호신이자 복, 장수 등을 빌 사복신(賜福神)이 된 불교의 신. 이들은 당시 사람들의 염원과 소망, 불안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역사적 증거로서 단순한 흥미만으로 읽어 넘기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과거부터 삶의 여러 순간 그들을 향해 기도해 온 흔적은 점점 사라지고 세대를 거듭하며 생경해졌으며 더욱 신비하기만 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한 흥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이들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절집에 자리한 이들의 오랜 역사에 한 번 놀라고, 신비함 이면의 진짜 의미에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 이제 저자의 안내에 따라 저승인 명부는 물론 불교의 신들이 사는 하늘세계와 부처님의 일가를 이룬 협시?나한의 세계를 함께 탐험해 보자.

구매가격 : 21,000 원

조선인의 미풍(美風)

도서정보 : 이마무라 토모(今村?) | 2022-06-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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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풍속집(朝鮮風俗集)(1914)(斯道館) 발행, 제1부 조선인의 미풍(美風)
1908년 여름에 조선에 건너와 지방경찰부장으로 보직되어 충청, 강원의 2개 도를 역임하였다. 이 시대는 서사(庶事) 창업의 시대로 아직 법령도 완비하지 않고 행정상 단지 적당히 처리하는 사무가 매우 많은데, 어떻게 하면 직무 집행과 민도(民度)와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고심하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나는 이때부터 조선의 풍속과 습관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몇 차례 조사에 착수해도 조선 풍속의 전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든 초보적인 시도라는 것을 깨닫고 방침을 바꾸어 자신의 직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 젊었을 때 자신이 흥미를 느꼈던 사항에 대해 간헐적으로 연구하고, 극히 분주한 사무의 여유를 내어 연구조사에 종사하고 그 소득분은 신문과 잡지에 게재하였다. 또한 강연을 통해 세상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선 연구의 취지를 사회에 고취시키고 자신의 견해를 참고로 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 같은 목적으로 오래된 원고를 개정하고 한국의 관습과 관습에 대한 새로운 개요를 추가하였고 《조선 풍속집》이라는 제목의 책을 편찬하였다.<자서自敍 중에서>

구매가격 : 2,500 원

알제리전쟁 1954-1962

도서정보 : 노서경 | 2022-06-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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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민중과 그에 동조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투쟁
부정의不正義에 항거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알제리전쟁사!

전쟁이 아닌 치안교란?

1954년 10월 31일 심야에 알제리 각지에서 FLN이라는 낯선 단체의 동시다발 테러로 시작된 전쟁, 법적으로 1840년부터 식민지였기에 많은 이가 당연시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등식을 과감히 거부한 전쟁, 영국에 버금가는 광대한 해외영토를 경영해온 제국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반식민주의 투쟁, 점점 격렬한 전투로 비화되고 7년여를 끌면서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터에 투입하고 숱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이길 수 없었던 전쟁, 그렇기 때문에 알제리 독립 이후로는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고 말하지 않았던 전쟁, 심지어 20세기가 다 저물 때(1999년)까지 정당하게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적떼의 반란’ ‘치안교란 사태’로 치부했던 전쟁, 이것이 알제리전쟁이다.

무엇이 이적행위인가?

군사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고 승리는 당연히 프랑스의 차지여야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제국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던 프랑스에 저항한 것은 알제리인들만이 아니었다. 양심 있고 양식 있는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 언론인들이 이미 제국주의의 폭압과 부정의, 그로부터 신음하는 식민지인의 고통을 고발했고, 여기에 사르트르와 아롱 같은 참여적인 지식인들이 가세해 알제리 독립을 공개 지지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깊어지면서 특히 프랑스 군인과 경찰에 의한 알제리 전투원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과 고문이 출판사들에 의해 여론화되자 많은 이가 이 전쟁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기에 이른다.

식민지 보존에 위해 전쟁에 강제 징집된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은 프랑스 본국을 뒤흔들었고, 이것이 알제리가 독립을 이루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한다. 알제리의 투쟁을 도운 사람들 중에는 철학자이자 편집자였던 장송처럼 FLN을 직접 지원한 지하조직 사람들도 있었고,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파농처럼 아예 그 일원으로 활약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크다 해도 어떻게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이 날선 질문 앞에 이들은 자신의 행동은 ‘배신’이 아니며 ‘정의’를 위한 것이라 했다. 부정의에 맞서는 것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탈식민주의의 다양한 입장

반식민주의 논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이 사상적 흐름을 살찌웠으며 그로써 다음 세대의 지적 성장을 보장해주었다. 이 책은 그런 반식민주의의 역사적 사건으로 1956년 1월 27일 파리에서 열렸던 ‘바그람 대회’를 꼽는다. 알제리와의 전쟁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이 대회에는 파리의 프랑스 지식인은 물론 식민지의 지식인들까지 다양한 인사가 참여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식민주의는 체계다’라는 간명한 명제가 나왔다. 이와 같이 식민주의와 식민지전쟁에 반대한 것은 좌파만이 아니었다. 소르본느의 사회학 교수 레몽 아롱도 결국 이 싸움에서 알제리는 독립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알제리 출신의 카뮈는 이들과 입장과 달랐다. 그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알제리의 독립은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립이 아닌 공존으로 문제를 풀려 했던 그의 주장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결국 침묵으로 일관한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알제리전쟁 기간에 알제리 현지에는 많은 프랑스인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 정부의 지원을 많아 알제리 현지를 조사한 인류학자 제르멘 틸리옹의 입장은 카뮈의 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녀는 프랑스-알제리의 동맹을 중심으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면 알제리가 북아프리카의 중요 국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다른 견해를 지닌 인류학자(사회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현대 사회학에 큰 영향을 준 부르디외 사회학은 알제리 연구가 그 시작이었음을 이 책은 강조한다. 알제리전쟁 초기였던 1955년 알제리 땅을 밟고 종전 무렵은 1961년까지 부르디외에게 알제리는 가장 큰 학문적 연구대상이었다.

『알제리 사회학』이나 압델말렉 사야드와의 공저 『뿌리 뽑힘』은 알제리의 식민지 현실, 그리고 프랑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살아가는 하층프롤레타리아의 처지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탐구한 명저로 꼽힌다. 이렇게 식민지의 현실과 알제리 독립의 정당성을 지지한 학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선구적 입장들은 출판을 통해 대중으로 퍼져나갔다.

출판사들의 저항, 장송망 사건, 그리고 법적 투쟁

피식민지인들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고 투쟁에 나선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가?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저항정신에서 유래한다고 밝힌다. 이 책 역시 그런 입장에 동조한다. 특히 출판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알리고 제국주의의 사멸을 주장했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가톨릭 계열의 출판사 쇠유, 레지스탕스 지하출판사의 전통을 갖고 있던 미뉘, 판매 금지된 미뉘의 책들을 펴냈던 스위스의 시테 출판사, 세3세계라는 거시적 주제 안에서 알제리 문제에 집중했던 마스페로 출판사 등이다.

이들은 인권의 나라 프랑스가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고 있음을 시민들에게 고발했고,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이렇듯 반대의 여론을 형성해가던 알제리전쟁에서 특히 충격적인 사건은 ‘장송망 검거사건’이었다. 프랑스인이 알제리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었다. 심정적인 동조에서 언론이나 출판을 통한 참여까지.

그러나 프랑스의 적에 해당하는 알제리 무장단체를 직접 돕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들은 배우에서 일반 시민까지 출신도 매우 다양했다. 국가에 대한 저항권은 그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를 질문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 지하조직의 중심적 인물은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철학도로, 유명한 시사지 『레탕모데른』과 쇠유 출판사의 편집자이기도 한 프랑시스 장송이었다. 장송망 조직원들의 행동이 저항의 극한을 보여준다면, 프랑스 변호사들의 식민지인 변호는 프랑스 법적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알제리전쟁 전부터 식민지인들에 대한 공동변호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7년 알제 도심에서 폭탄테러를 가한 혐의로 법정에 선 자밀라 부히레드를 변호한 자크 베르제스의 경우이다.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분열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반식민주의 투쟁, 식민지 독립, 냉전과 제3세계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빨려드는 두 나라의 정치사회적, 역사적 측면을 조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인물 군상 하나하나의 존재를 세밀하게 부각시켜 질문하고 성찰한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이 제2부로,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알제리인 자신의 투쟁과정을 자세히 소개한다.

포괄적인 북아프리카 지역사 연구가 아닌 심화된 알제리 역사, 그중에서도 현대의 분기점이 된 알제리전쟁사에 대한 본격 연구로는 국내 최초의 연구서일 것이다. 독립투쟁에 헌신한 알제리 여러 정파 간의 이견과 충돌, 내적 분열은 독립 이후 세계의 모든 신생국가가 처해야 했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990년대 알제리 내전의 재연, 최근의 파리 테러 등은 알제리전쟁을 모르고선 이야기할 수 없다.

민중당 - 민족해방전선 - 학생운동 - 임시정부

FLN은 단순한 테러 무장조직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체 파악이 어려웠던 것은 이들이 민중당에서 파생된 비밀 지하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당은 메살리 하즈라는 민족지도자가 주축이 된 정통성 있는 정치조직이었다.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수형의 상징인 메살리 하즈는 알제리인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또 ‘북아프리카의별’이라는 정치조직의 역할도 대단히 컸다. 이런 단체들과 또다른 지도자 페르하트 압바스에 공명해, 알제리 민중은 세계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이미 알제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세티프 진압사건 같은 무자비한 프랑스의 탄압은 민중을 산악으로 내몰았다. 마키로 불리는 산악무장대의 출현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은 1954년 11월의 공식적인 전쟁선언이 있기 전까지 투쟁정신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곧 FLN의 출현으로 대프랑스 투쟁은 더 조직적이고 치열해졌다. 그러나 이 알제리인들은 무장투쟁만으로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지 않았다. 숨맘 계곡에서 개최된 범민족 대회, 이른바 숨맘 대회에서 몇몇 중요한 강령들을 채택한다. 강령의 핵심 중 핵심은 “정치가 군사에 앞선다”라는 선언이었다.
이 숨맘의 강령에 따라 알제리의 독립은 이제 국제 여론전의 양상을 띤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 모두 익명으로 기사를 썼던 『엘무자히드』가 한몫을 하며, 프랑스와 알제리의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에 나서고, 페르하트 압바스를 수반으로 추대한 임시정부가 서방을 상대로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분투한 끝에, 유엔총회에서 알제리 문제가 공식 의제로 상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을 겪고 마침내 1962년 프랑스 에비앙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다.

참다운 지성이란 무엇인가?

메살리 하즈의 민중당, 무장투쟁의 FLN, 이들을 계승하여 군사활동이 아닌 정치활동, 즉 외교로써 유엔의 승인을 얻으려 분투했던 국제 감각의 임시정부 수반 페르하트 압바스 외에도 또 이 책은 총파업으로 민중저항을 주도하다 감옥에서 생을 마친 매력적인 정치범 라르비 벤 미히디, 도심의 여성 전투원들, 카빌리의 산악무장대, 대학생 단체에 집중하여, 많이 아는 것이 지성이 아니라 깨어 있는 정신의 성장이 지성이라는 성찰을 주며 무엇이 참된 지성(지식인)인가를 되묻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어렵게 독립했던 우리에게 알제리전쟁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강자에 맞선 약자의 싸움, 그 저항과 분열의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냉정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구매가격 : 26,300 원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도서정보 : 우스이 류이치로 | 2022-06-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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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마시던 검은 음료’ 커피가 역설적으로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세계를 제패하다키 150센티미터의 커피나무 한 그루가 프랑스와 유럽사를 바꾸었다. ‘루이 14세의 커피나무’로, 171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루이 14세의 커피나무’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이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 근무 경험이 있는 해군대위 출신 가브리엘 드 클리외였다. 어렵게 커피나무 한 그루를 구한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그 나무를 마르티니크로 가져가 심게 했고,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하며 몇십 년 후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나폴레옹은 커피를 군대에 맨 처음 보급한 인물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 애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발명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의 혁신은 그 열매인 셈이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음료’ 커피는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18세기 이후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커피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을까? 이 책은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서 커피가 홍차에게 밀려난 원인이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일혁명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 커피였다는데?’ 등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로 마시던 ‘검은 음료’가 역설적으로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검은 욕망’을 자극하며 아라비아와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제패한 이야기를 다룬다.

구매가격 : 11,700 원

아시아가 세계를 제패하는 시대는 다시 오는가?

도서정보 : 다마키 도시아키 | 2022-06-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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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부터 유럽으로 넘어간 세계사의 패권과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아시아는 5,000여 년 인류 역사의 상당 기간 경제적으로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 ‘세계 6대 문명’(저자는 이른바 ‘4대 문명론’에 반대하며 양자강 문명,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더한 ‘6대 문명론’으로 파악한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린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이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반량전(半兩錢)’이라는 화폐로 거대한 중국의 경제통합을 이루어냈다. 이는 유로화를 매개로 대륙의 경제 통일을 달성한 유럽 연합 모델보다 무려 2,000년 이상 앞선 위대한 도전이자 눈부신 성취였다. 경제적 패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포르투갈?에스파냐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이 뱃길을 통해 전 세계에 진출하며 부를 축적하는 동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안주하고 있었다. 유럽은 구텐베르크 활자혁명?종교개혁?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세계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패권은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는데……. 15~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서방 세계의 패권은 21세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로 다시 넘어올 것인가? 풍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정교하고 치밀한 역사 해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무장한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류 5,000년사의 도도한 흐름과 판도가 장기판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로써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1,700 원

내일도 만날래?

도서정보 : 전기현 | 2022-06-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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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019년 하반기부터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하기 직전인 2020년 3월까지,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9개국 10명만을 선택하여 책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대학생부터 건설업자, 교사, 종교인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은 코로나19로 인하여 거의 2년간 중단되었다. 멈춰 버린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을 버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낙관주의와 희망을 담아 ?내일도 만날래??라는 제목을 택한 것도 이 책이 그간 잃어버린 것보다 이제 다가올 것들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뜻한다.

구매가격 : 5,400 원

사진과 사료로 보는 청와대의 모든 것

도서정보 : 백승렬 | 2022-06-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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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현장에서 문화 예술적 공간으로

2022년 5월 10일 청와대가 국민에게 전면 개방됐다. 이전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이 거주하면서 일을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의미가 달라졌다.
몇백 년 전의 과거에는 왕이 기거하는 궁궐이 그 나라 정치, 문화, 역사의 중심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기능이 다양하게 분산됐지만, 과거의 궁궐과 가장 비슷한 공간을 꼽으라면 청와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운영의 핵심 공간이며 현대사의 굴곡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청와대다. 하지만 이제 대통령이 떠나고 집무실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청와대는 또 한 번 변화의 시간을 맞았다.
청와대는 고려시대 때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당시 수도 밖의 별궁 터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이후 경복궁의 후원이 되면서 조선의 건국과 일제의 침략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서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1960년에 붙여졌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통령 관저와 춘추관 등이 신축되고,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때부터 쭉 정부 기관 역할을 하며 현대 정치사의 희로애락을 몸소 겪은 청와대가 이제 국민 앞에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치적 시각을 걷어 내고 청와대를 바라보면, 우리의 전통이 현대적인 실용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문화 예술적 공간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미 한참 전에 청와대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탐구를 시작했던 한 사진기자의 성실한 기록물이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보고 느끼고 공부한 모든 것

2006년에 처음 청와대 출입기자가 된 저자는 보도용으로 청와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청와대가 점점 익숙해지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건물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을 꾸민 요소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지고, 평범한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고 싶어졌다.
단정한 푸른 기와를 얹은 청와대 본관의 전경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그 모습이 친근해지기는 했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청와대의 많은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저자 또한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청와대 곳곳에 호기심이 생겼다. 지붕에는 왜 하필 청기와를 올렸을까? 그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지붕 위에 올라앉은 괴상한 모양의 형상은 무엇일까? 건물 내부는 왜 이렇게 꾸몄을까? 가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된 것일까?
청와대는 현대의 궁궐이자 문화재의 보고다. 하지만 그 외피는 고궁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도 하늘빛 청기와, 주춧돌, 잡상, 해태, 드므, 지붕, 그림, 가구, 건축, 정원 등 곳곳에 우리 문화의 정취가 듬뿍 배어 있다. 저자는 ‘단아하다’는 표현이 이처럼 어울리는 공간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전통 양식과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눈에 띈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고 실용성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두고 내부를 구성한 점도 색달랐다.
저자는 청와대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그것의 유래를 찾아 공부하면서 점점 더 청와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청와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탁월한 길잡이이자 안내서가 탄생했다.


알아 두면 흥미로운 청와대 TMI

이 책은 청와대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풀어내는 재미로 충만하다. 저자가 직접 청와대 안팎을 누비며 담아낸 수백 장의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긴다. 눈에 띄는 건물과 유명한 작품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구조물이나 장식품까지 일일이 사진으로 담고 그 의미를 추적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상상의 동물인 해태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거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 해태상이 있는 곳은 과거에 말에서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그 뜻을 이어받아 현대에 와서는 외국 정상을 태운 차가 도착하면 해태상 앞에서 내렸다고 한다. 또한 청와대 안에는 물을 떠 놓은 커다란 물동이인 ‘드므’라는 것이 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마주했다면 그저 수초를 띄워 놓은 그릇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물속에 자신을 비춰 보고 반성하라는 의미로 존재했던 것이라고 하니 그 모습이 새삼스럽다.
본관 2층 접견실에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능행도>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 누렁이 7마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출입기자들이 누렁이를 찾기 위해 그림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큰 재미를 준다. 저자는 무려 10여 년에 걸쳐 7마리의 누렁이를 모두 찾았다.
그 밖에도 청와대의 일상적인 모습을 엿보는 즐거움이 의외로 쏠쏠하다. 청와대 안에 기자들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목욕탕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이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공무의 목적 아래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온 생활 현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매일매일 청와대를 드나들던 기자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으로 곳곳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던 관리인들, 안전과 보안을 위해 시종일관 긴장을 놓지 않던 경호관들의 일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주는 뜻밖의 감동이다.

구매가격 : 13,300 원

베르됭 전투

도서정보 : 앨리스터 혼 | 2022-06-0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을 보라! ……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_ 1916년 6월 베르됭에서 전사한 알프레드 주베르의 마지막 일기에서

10개월 동안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303일의 기록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최소 7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투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소모시킨 후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장소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이 선택되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도 바뀌었다. 베르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베르됭 전투는 ‘참호전’의 전형이었다. 기관총과 대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깊숙이 참호를 파고 들어갔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지에서 얼음물을 퍼내며 적진으로 진격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극심한 허기와 갈증, 잠든 얼굴 위로 뛰어다니는 쥐와 벼룩, 이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말했다. “이곳은 지옥이다.”
베르됭 전투에서는 인간이 대포와 싸웠다. 돌파를 위해 달려 나간 보병들은 적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쏟아지는 포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때로 아군 포대에서 쏜 포탄에 맞아 죽기도 했다. 급조된 참호 벽에 죽은 동료의 머리와 팔다리가 박혀 있었고, 포탄 구덩이에는 시체들이 떠다녔다.
베르됭 전투는 지휘관의 냉혹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양측 지휘관 모두 병사들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의 전략은 ‘말려 죽이기’였고,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신조는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전략의 전부였다. 한 뼘의 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병사들을 지배했다. 결국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무수한 죽음을 양산했고 베르됭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박살난 무기, 희게 변한 유골이 쌓인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밝힌 전쟁사의 고전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인 베르됭 전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 전체를 살펴보는 통찰력 있는 역사서다. “베르됭 전투를 다룬 책 중 가장 중요한 책”,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에서 저자 앨리스터 혼은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사료 등 관련 문헌은 물론이고 생존한 참전 군인들에게 직접 들은 증언까지, 다방면의 수많은 자료를 바탕 삼아 1916년의 베르됭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만연한 죽음과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병사들의 굳은 의지, 야전 지휘관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일기 변화, 병사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양국 군 지도부의 무능과 내부 갈등까지 전투의 성패를 가른 모든 요인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이 뚜렷이 우세했는데도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는 ‘인계에 펼쳐진 지옥’이라는 10개월의 전투 속에서 어떻게 베르됭을 지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라 불리는지,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1916년, 베르됭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

1915년 말,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착 상태를 풀고 승기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베르됭을 공격 지점으로 삼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군은, 자발적으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피를 남김없이 흘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여러 차례 베르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특히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독일에 함락된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를 ‘심판’하라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포격으로 기세등등하게 선공했다. 몇 시간 동안 폭우처럼 쏟아진 포탄 세례에 프랑스군의 철로는 모두 망가졌고 숲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독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돌격부대를 보냈다. 전장을 지키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상부의 지휘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밀려드는 독일군을 대적해야 했다.

프랑스군 제165연대가 곧바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포격에 참호 여럿이 완전히 사라졌고 소총의 총열은 먼지로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수류탄과 탄창이 담긴 상자들은 잔해에 파묻혔다. 폭이 거의 800미터나 되는 전선의 한 구역에서 2개 소대가 전우들을 파내느라 녹초가 되었다. 이들이 독일군의 첫 번째 정찰대를 발견했을 때, 그 독일군 병사들은 겨우 약 9미터 밖에 있었다. …… 진지 두 곳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점령되었고, 부아도몽 숲의 제1선 참호 전체가 곧 무너졌다. 동행한 독일군 기관총 분대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노획한 무기를 차지했고, 산소 아세틸렌 토치를 든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남은 가시철조망을 잘랐다. …… 지휘관 들라플라스 대위는 정신이 나가 여단장 볼레 대령에게 이런 통신문을 보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6장 첫날(141쪽)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소모전은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군의 전투력을 소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인명으로 인명을 소모해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이었다. 연합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를 따져볼 때 연합군이 우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 방법을 쓰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계산했다. 동맹군도 같은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어느 독일 작가는 “마지막에 남은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가 주머니칼이나 이빨, 손톱으로 서로 죽이려고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참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단위 면적당 사망자 수가 가장 높은 전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베르됭 전투의 전체 사상자 수는 다양하게 추산되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의 생명은 결코 꼼꼼하게 집계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공식 전쟁사(1936년 출간)는 1916년 10개월 동안 베르됭에서 입은 손실을 37만 7,231명으로 잡는데 그중 16만 2,308명이 전사나 행방 불명이다. 반면 처칠의 《세계 위기(World Crisis)》(1929)를 바탕으로 한 계산은 46만 9천 명까지 높게 잡는다. 같은 기간 동안 독일군이 입은 손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수치에 따르면 대략 33만 7천 명이며(처칠은 37만 3천 명에 가깝다고 계산했다), 당대 독일군 명부에 따르면 사망과 행방 불명만 10만 명이 넘는다. 어떤 수치를 받아들이든 프랑스와 독일 양측 사상자를 합치면 7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가 된다. …… 유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19~520쪽)

참호, 병사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1916년 2월 혹독한 겨울, 전투를 기다리며 병사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정신적 공포에 더해 참호의 열악한 환경이 병사들을 한 번 더 괴롭혔다. 참호는 지옥이었다. 병사들은 물이 차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끈적끈적한 진창이 된 참호에서 질병에 시달렸고 모래 같은 비스킷을 먹으며 쥐떼와 공생했다.

참호는 보통 10여 센티미터, 때로는 30센티미터 높이로 물이 차올랐고, 결코 완전히 마르는 법이 없었다. 병사들은 악취 나는 진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근무 교대 후 짧은 시간 동안만 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대피호는 거대한 쥐들과 나누어 썼다. 참호의 쥐들은 …… 전쟁 덕분에 번성한 유일한 생명체로 보였다. 쥐는 잠든 병사들의 얼굴 위로 뛰어다녔고, 배낭 속 음식을 갉아먹었으며, 아직 매장되지 않은 사망자의 살로 포식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을 제외하면 두 종의 생활은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17~118쪽)

베르됭의 좁은 전장에서 병사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참호를 파거나 포격에 죽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적군이 방어선 뒤에서 끊임없이 쏘아대는 포탄은 진격을 저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의 피난처도 완전히 뭉개버렸다.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 가면서 베르됭에는 교착 상태가 계속됐다.

독일군이 진격해 점령한 것은 대부분 여기저기 널린 포탄 구덩이였다. 구덩이 안을 보면 고립된 병사들이 수류탄과 곡괭이 자루로 자신들의 ‘진지’를 지키며 살아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었다. 이번에는 독일군의 상황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프랑스군 대포가 쉴 틈을 주었더라도, 독일군이 소중히 여긴 지하 진지를 만들 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숲의 대포들이 친 치명적인 탄막 때문에 독일군의 힘이 소진되면, 그 뒤엔 반드시 프랑스군의 반격이 이어져(24시간 이내에 반격했다) 생존자들을 다시 밀어냈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70쪽)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가 점령되다
저자는 실제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가 “실제 참전한 이만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눈으로 직접 보듯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투 현장을 묘사한다. 특히 베르됭 방어의 주춧돌이자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두오몽 요새에 소수의 독일군이 잠입해 총성 한 발 없이 점령하는 과정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쿤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칠흑같이 어두운 긴 터널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깥에서 귀를 찢을 듯한 포격 소리가 들린 후 숨 막힐 듯 섬뜩한 고요가 이어졌다. 쿤체는 계속 전진했다. …… 쿤체는 곧 방출된 탄피가 내는 덜커덕 소리를 들을 만큼 접근했다. 이 대담무쌍한 중사는 권총을 손에 쥔 채 문을 박차고 들어가 독일어로 고함을 질렀다. “손 들어!” 화약으로 얼굴이 검게 그은 프랑스군 포병 네 명이 크게 놀라 멈춰 섰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포탑 밖으로 거칠게 떠밀렸다. 쿤체는 한 손으로 그 요새에서 가장 큰 대포인 155밀리미터 포의 발포를 멈추었다. - 9장 난공불락 두오몽 요새 점령(191쪽)

2월에 일어난 두오몽 요새 점령 못지않게 6월의 보 요새 점령도 상세하게 다룬다.

레날은 신호기로 다시 전갈을 보내 호소했다. “완전히 지치기 전에 개입하라. …… 프랑스 만세!” 그렇지만 수빌로부터 추가 응답은 없었다. 보 요새가 굴복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늦게 거대한 포탄 한 발이 요새에 떨어져 중앙 통로의 둥근 천장 일부가 함몰되었고, 질식과 갈증에 대한 우려에 생매장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해졌다. …… 6월의 지난 사흘 동안 수비대 병사는 각자 전부 합해서 반 잔의 더러운 물을 받았다. 절망에 빠진 병사들은 요새 벽면의 습기와 점액을 핥았다. …… 일부 병사들은 통로에 기절해 있었고 다른 이들은 자신의 오줌을 마시고 심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 21장 보 요새의 마지막 일주일(421쪽)

화염방사기에서 독가스까지,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베르됭은 신무기의 시험장이었다. 독일군은 거대 대포, 화염방사기, 포스겐 가스 등으로 무장하고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독일군 화염방사기는 숨어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독일군이 쏘아올린 포스겐 가스탄은 프랑스군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독일군은 쓰러지는 적군 병사들 위로 곧바로 포탄을 쏟아부었다.

왼편에 뚫린 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온 회녹색 물결이 젊은 사관후보생 베르통의 소대가 지키는, 거의 온전하고 잘 방비된 진지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잠시 멈춰 의논했다. 그리고 베르통의 병사들이 사격을 가할 유효 표적을 찾기 전에 먼저 맹렬한 불기둥이 그들을 덮쳤다. …… 곧 화염방사기가 욋가지를 엮어 만든 참호의 외벽에도 불을 질렀다. 방어군은 의복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채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어지럽게 도망쳤다. 독일군은 연기를 내뿜는 진지를 신속히 점령한 뒤 기관총을 설치해 공포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등에 총탄을 퍼부었다. - 6장 첫날(145~146쪽)

500문이 넘는 독일군 중포가 겨우 약 1.6킬로미터가 약간 넘는 전선을 따라 포격을 시작했다. …… 지상의 병사들은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여 없애려는 듯 독일군은 우리 한 사람마다 대포 한 문씩 지정한 것 같다”고 느꼈다. …… 어느 장교는 자신이 어느 하루 동안 참호에서 어떻게 세 번이나 파묻혔는지, 또 그때마다 병사들이 어떻게 자신을 꺼내주었는지 묘사했다. …… 어느 대대에서는 겨우 세 명만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포격 때문에 산 채로 땅에 파묻혔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83~284쪽)

포스겐?독일군은 그 가스탄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녹십자 가스’라고 불렀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스는 전쟁에서 사용된 가장 치명적인 가스에 속한다. …… ‘녹십자 가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시들었고 달팽이까지 죽었다. 한 가지 좋은 일이라면, 시체로 넘치는 전장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 떼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수빌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섬뜩하게 뒤틀린 채 쓰러졌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 24장 독가스 공격과 죽음의 카니발(456~457쪽)

“이곳은 지옥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사들의 목숨은 죽음으로 상대의 전력에 손실을 입힐 때만 의미가 있었다. 상급 지휘관들과는 자주 연락이 끊겼고, 병사들은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며 목숨을 지켜야 했다. 병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전투력이 없는 부상병들은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과로한 군의관들은 즉시 부상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어쨌든 죽을 것이므로 수술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 십중팔구 살아나겠지만 전쟁 수행에 더는 쓸모가 없을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군무에 복귀할 수 있을 사람들. 의사들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부상자들에게 아낌없이 관심을 쏟았는데, 이를 ‘유효 병력의 보존’이라고 했다. 두 번째 범주는 시간이 허락하면 대충 봉합해놓았다. 그 결과는 종종 끔찍했는데, 뒤아멜은 이렇게 소름끼치는 문장으로 묘사했다. “산드라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구리에 뚫린 구멍으로 변을 보았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25쪽)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리면, 엄청나게 강력한 폭발 진동을 견디기 위해 온몸을 움츠린다. 그 일이 되풀이될 때마다 새로운 공격, 새로운 피로, 새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고 열기에 몸이 타버릴 것만 같고 진이 빠져 대처할 수 없게 된다. …… 마침내 우리는 단념하고 상황에 몸을 맡긴다. 파편을 막으려고 배낭으로 몸을 엄폐할 힘조차 없다. 신에게 기도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은 별일 아니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멀쩡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지가 잘리고 찢어져 과육처럼 으깨지는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공포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포격이 주는 고통이다. - 15장 포탄 구덩이와 시체들의 땅(294쪽)

왜 독일군이 패배했나?
베르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전투 초기, 독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세,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선공해 승기를 잡았다. 독일군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프랑스의 두오몽 요새 등을 점령했지만 길어지는 전투로 인한 인적?물적 자원 부족, 지도부 간의 갈등으로 병력이 약화되었다. 1916년 말, 독일군이 10개월간 3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얻은 것은 런던의 왕립 공원을 합친 것보다 약간 더 큰 땅이 전부였다. 반대로 프랑스는 10개월의 전투를 끈질기게 버티면서 끊임없이 병력을 충원하고 무기를 보강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솜강 전투를 발판 삼아 흐름을 반전시켰다. 팔켄하인의 ‘말려 죽이기’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는 분명해졌다.

황태자는 이렇게 인정했다. “뫼즈강의 맷돌은 군대의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완전히 갈아버렸다.” 지휘관들에 대한 군대의 신뢰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렸으며 사기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전선에서나 후방에서나 전쟁 피로증이 나타났으며, 베르됭 전투가 끝난 직후 독일의 첫 번째 강화 제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암시하는 바가 컸다. 1917년 독일은 한동안 팔켄하인의 프랑스군 ‘말려 죽이기’ 전략을 이용할 힘이 없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25쪽)

저자 앨리스터 혼은 베르됭 전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베르됭 전투의 끔찍한 점 가운데 하나는 발발 후 첫 세 달이 지나면서 어찌된 일인지 전투가 인간의 지휘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 베르됭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상징에 사로잡혀 두 나라 모두 전술적으로 후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독일이 최종적으로 베르됭에서 몸을 빼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손실은 거의 비슷했으며, 전투 시작과 비교해 전선의 이동도 거의 없었다. 베르됭은 프랑스에는 신성한 상징이 되었으나 내적으로 군대의 정신은 체념에 물들었으며, 1940년 독일군은 끔찍한 패배를 극복하겠다며 다시 한번 베르됭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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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민족

도서정보 : 맥스 I. 디몬트 | 2022-06-0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뛰어난 유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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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세계사의 주역이 된 20세기까지
‘책의 민족’ 유대인의 경이로운 4천 년 역사 이야기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문명이 쇠퇴하고 소멸하는 동안 나라도 없이 떠돌던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미국과 이스라엘까지, 네 대륙으로 흩어지고 여섯 문명을 거치면서도 유대인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중세 이슬람 문명과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혁명기 유럽과 미국에서 수백 년 동안 꽃을 피운 유대인의 놀라운 창조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수, 바울,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을 배출하고 노벨상 수상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한 유대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슬람 제국 시절 유대인은 아랍인으로부터 ‘책의 민족(People of the Book)’이라는 존경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번영했다. 수천 년간 나라 없이 살아가야 했던 유대인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법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 바로 ‘토라’와 《탈무드》를 비롯한, 그들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을 담은 책들이 있었다. 디몬트는 유대 전통과 역사 속에서 일구어낸 유대인의 지적 성취를 총체적으로 살핀다. 유대 철학을 그리스와 로마에 전파한 《70인역 성경》부터 유대인의 지혜를 집대성한 《탈무드》와 19세기 유대 민족주의의 원형 《쿠자리》까지, 유대인은 민족의 책을 통해 정체성을 지키며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창조성을 키웠다. 유대인에게 책은 지혜의 뿌리이자 생존의 도구였고 창조의 원천이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관통한 영적·지적 성취의 숨은 주역
유대인은 수천 년간 수많은 역경과 도전을 이겨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 가나안의 방랑기, 바빌론의 포로 생활을 거쳐 헬레니즘 세계에 융화되었고, 로마 제국의 흥망을 지켜본 후 이슬람 문명권과 르네상스기 유럽에서 번성했으며, 중세 암흑기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수많은 문명과 종교와 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흡수되었을 때 유대인은 어떻게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유대인이 문화를 창조하는 공동체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즉 유대인 특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 역사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유대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유대 사상을 이웃 민족과 구별하게 해준 ‘모세 율법’부터, 유대교의 바탕이 된 ‘토라’, 포로 생활에서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신 개념을 만들어낸 예언자들, 그리스 문학과 과학 저술을 아랍에 전한 번역가들, 유대 사상을 지식 체계로 구체화한 《탈무드》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념과 사상을 가슴에 품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책은 한 민족이 소멸의 위험에 맞서 전진과 후퇴, 도전과 응전을 거듭해 온 기나긴 투쟁의 서사시이자, 유대인이 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며 인류의 영적·지적 성취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고 매혹적인 이야기다.
세계사의 주인공인 적은 없었으나 세상을 정복한 민족, 유대인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2퍼센트(15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 과학, 경제, 철학, 문학, 음악, 미술, 상업, 산업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유대인은 주변국을 정복해 제국을 이루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 뒤에는 늘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 짓게 해준 ‘유일신 사상’은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탄생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에 능통했던 유대인 언어 천재들은 책을 활발히 저술하고 번역하여 유럽과 아랍 문명의 번영을 주도했다. 근대 유대인 혁명가들은 1848년 이탈리아의 통일에 참여했고, 프랑스인·독일인·영국인·러시아인으로서 싸우며 19~20세기 유럽의 변혁을 이끌었다.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
《책의 민족》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대 역사서이다. 미국 역사가이자 작가인 맥스 I. 디몬트는 유대 역사를 학자들만의 것으로 남기지 않고, 4천 년 유대 민족의 일대기를 유머가 깃든 대중적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책의 민족》에는 유대 역사와 세계사에 박학다식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인물인 모세의 정체에 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드러내준 <사해 문서>의 발견에 얽힌 이야기, 나폴레옹이 제국 내에 살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천8백 년 만에 유대 최고 회의를 소집한 일화까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과 유대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라는 평을 받았다.

전 세계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유대 민족의 놀라운 모험
유대인은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책의 민족》은 유대인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세계 각국의 역사를 개괄하고, 네 개의 대륙과 여섯 개의 문명에서 꽃피운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를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유대의 신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만남에서부터 수천 년간 이어진 유랑 생활, 헬레니즘 문화의 도전, 아랍과 유럽에서 맞이한 부흥기, 유럽에 퍼진 반유대주의, 시온주의의 탄생과 이스라엘 건국까지 4천 년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마치 모험 소설을 읽는 듯하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겪어내며 살아남은 유대인의 생명력과 끈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의 관심 밖에 있던 유대인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다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유대 역사를 전혀 다루지 않았고,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유대인의 역사를 ‘각주’로만 다루었다. 이처럼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남긴 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같은 시기에 역사에 등장했던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은 민족의 영광을 증언해주는 유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신 유대인에게는 사상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유물만 남긴 민족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상을 남긴 유대인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책의 민족》은 유대 사상의 핵심을 이룬 ‘모세 율법’, ‘토라’, 《탈무드》의 탄생 배경과 발전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역사의 뒷면에 존재했던 유대인을 역사의 무대 앞으로 끌어낸다.

유대인과 유대 사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기원전 2000년경 유대인은 중근동 민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출현했다. 유대 역사는 최초의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만나 언약을 맺은 그날로부터 시작한다. 신은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계명을 내렸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가나안 땅에서 방랑하던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유일신 사상, 할례, 인신 제사 금지였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 풍요 제의를 올리던 근동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었고 어디에서나 회당을 세워 사제 없이 신과 직접 소통했다. ‘하나뿐인 신’과 ‘보이지 않는 신’ 개념은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확연히 구분되게 해주었고, 각 문명을 넘나들며 지적 성취를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유일신 사상과 보이지 않는 신 때문에 유대인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움직이는 성막’이 유대인들을 특정한 장소에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따라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옮겨 다닐 수 있었다. …… 그리스인의 전통 의상인 튜닉, 아랍의 무슬림 랍비 무프티, 미국의 아이비리그처럼 디아스포라 문화가 어떻게 포장되었든 그 안에는 언제나 여호와 유일신교가 있었다. - 171~179쪽

유대 정체성을 세운 ‘모세 율법’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가 유대인을 해방시키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홍해를 지나 시나이 사막으로 유대인을 이끌었고 그곳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정치·문화·종교 등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신의 명령이었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국가의 관계, 개인과 신의 관계를 규정했다. 모세 율법은 가나안에서 방랑하는 유대인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약 3천 년 전에 작성된 모세 율법에는 오늘날 미국 헌법의 철학과 유사한 자치주의와 휴머니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미국 헌법의 철학과 모세 율법의 철학 사이에는 신기한 유사성이 있다. 연방 정부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만 지니는 반면에 개별 주정부들은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도 모세 율법이 금지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유대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허락한다. 그들은 율법에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60쪽

그리스 문명은 유대 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기원전 3세기경, 근동 지역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왔다. 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통치를 받으며 헬레니즘 문화와 맞닥뜨렸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했던 그리스인과 달리 유대인은 금욕적인 유일신 신앙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다. 이렇게 달랐던 두 민족의 사상은 어떻게 한 지점에서 만났을까?
유대인 대부분은 헬레니즘 자체는 거부했지만 그리스 철학은 철저히 연구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제공한 모든 지적 유산을 흡수하여 유대인의 감각을 더해 자신들만의 탁월하고 수준 높은 지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런 사상적 융합의 분위기 속에서 기원전 3세기에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구약 성경》을 플라톤 철학으로 해석했다. 플라톤에 심취했던 필론은 유대 신앙을 그리스 철학과 융합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근동 지역 언어인 아람어로 쓰인 <다니엘>, <에스라>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의 내용이 언어보다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70인역 성경》은 유대인이 이방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심 어린 전략에서 탄생했다. 이 책은 외국의 이방 문화에서 성장한 유대인을 유대교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70인역 성경》은 그리스, 로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0인역 성경》은)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그리스어 저작이며,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더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유대의 휴머니즘과 철학을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파한 것도 이 책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도하러 왔을 때 그의 교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했다. - 171, 172쪽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은 어떻게 유대 정체성을 지켰나?

유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흩뜨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팔레스타인 땅 밖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 역사는 유대인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때부터 19세기 유럽의 게토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주변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유대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

《탈무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만들어 디아스포라라는 위기에 맞섰다. 《탈무드》는 완성되기까지 2백 년이 넘게 걸렸다. 1100년경 법전화된 《탈무드》의 편찬자들은 구전으로 전해 오던 율법을 구체적인 윤리 체계로 정리했다. 도덕과 신앙에 관한 철학적 담론뿐 아니라 위생, 천문, 경제 등 일상적 문제까지 담은 《탈무드》는 유대인의 생존 도구였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적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탈무드》는 변화된 삶의 조건에 맞게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고, 동시에 흩어진 유대인을 영적 공동체로 결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탈무드》 연구자들은 하느님을 일상적인 활동에 받아들여, 유대인의 행동이 하느님의 성품으로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라가 종교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관심을 과학과 이론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성경이 민족주의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다. - 238쪽

유대 학문의 구심점 ‘예시바’
《탈무드》의 산실은 유대인 고등교육기관인 ‘예시바’이다. 이 학교들에서 유대 사상이 《탈무드》 또는 ‘지혜’라고 불리는 지식 체계로 구체화되었다. 예시바의 역사적 역할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면서 급속도로 변화할 유대인의 운명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에 융통성을 부여한 데 있다. 최초의 예시바는 3세기에 로마의 보복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탈출한 랍비들에 의해 바빌론에 세워졌다. 9세기 이후에는 유럽에 최초로 예시바가 세워졌고, 13세기 이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예시바는 유대 문화에서 지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2세기에 최초로 세워진 유럽 대학의 원형이 되었다.

유대 사회에서 학자는 점점 더 큰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학자들은 오늘날 기업 총수나 스타 영화 배우보다 더 크게 존경받았다. 유대 전설에서 영웅은 칼로 난폭한 괴물을 죽이는 기사가 아니라, 지식으로 무지의 용을 죽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무식하면 경멸의 대상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학식 있는 평민이 배우지 못한 귀족 자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여자들은 배 속의 아이가 학자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며 예시바에 모여들었다. - 245쪽

아랍인은 왜 유대인을 존경했을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은 첨예하게 갈등하는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두 민족은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1세기 말부터 15세기 무렵까지 평화롭게 공존했다. 아랍인은 유대인을 ‘책의 민족’이라 부르며 존경했고, 유대인은 아랍인의 관용에 힘입어 유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6세기 아랍인은 사막 유목민이었고, 7세기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의 정복자였으며, 8세기 아랍인은 비잔틴을 제패한 제국의 주인이었고, 9세기 아랍인은 눈부신 문명과 예술·건축·과학의 선도자였다. 이슬람 제국의 번영 뒤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들어오면서 상업과 산업이 부흥하고, 메카가 국제 도시로 탈바꿈되고, 학문이 꽃피기 시작했다. 이 시대 유대인 가운데 철학, 의학, 과학, 수학, 언어학 분야에서 위대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유대인을 존경한 이슬람교의 메시아
아랍인은 유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약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하나인 무함마드는 유대교를 향한 열정과 존경심이 가득했던 아랍인이었다. 《코란》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할지 고민하던 무함마드 앞에 아브라함, 모세, 예수가 겪었던 것처럼 신이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준 토판에는 하느님(알라)이 무함마드를 ‘전달자’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의 탄생에는 유대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영웅이 나타나 아랍인의 자연 숭배, 기독교도의 구원 교리,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을 새로운 신 개념으로 통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영웅이 바로 무함마드였고, 그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 무함마드는 대상들에 의해 시리아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접한다. 만남 이후 그는 평생 유대인의 ‘그 책(The Book, 《구약 성경》)’을 존경했다. 유대 족장들은 그의 영웅이 되었고, 이후에 이슬람교의 성경인 《코란》에도 그 영웅들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다. - 274, 275쪽

이슬람과 유럽을 연결한 문화 전도사
이슬람 제국이 번성한 8세기 무렵이면 그리스어로 쓰인 책 대부분이 사라졌고 그리스어는 잊혔다. 아랍인은 시리아어 번역본을 통해 전해지거나 유대인과 로마인의 도서관에 보존돼 있던 그리스어 서적을 유대인에게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했다. 당시 여러 문화를 경험한 유대인은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에 능통했다. 유럽의 군주들도 유대인의 능력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리스·아랍의 저술과 히브리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대 학자들을 나폴리로 초청해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 유대 번역가들은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을 소개했고,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플라톤의 철학과 소포클레스의 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현대의 학자 모지스 해더스(Moses Hadas)가 그리스 과학과 인문주의를 유럽에 전달하는 일을 가리켜 이른 ‘유럽으로 통하는 터널’이 8세기 유대인에 의해 재개통되었고, 그 터널은 1400년까지 유지되었다. 최초의 번역서들은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었지만 곧 그리스어와 아랍어 저술들도 히브리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히브리 문학과 철학도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즉 쌍방향의 문화 소통이 발생한 것이다. - 284, 285쪽

근대 유럽 문명의 감춰진 창조자

중세 유대인의 역사는 영국에서는 1300년경에, 프랑스에서는 1400년경에, 에스파냐에서는 1500년경에 끝났다. 각 나라에서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게토로 쫓겨난 것이다. 근대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기술이 필요해진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다시 유대인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역사의 무대가 근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십자군 운동이 끝난 14세기에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 부흥 운동 르네상스가 온 유럽에 퍼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는 유대인을 지적인 민족으로 인정했고, 일찍부터 이탈리아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이탈리아 유대인은 의사, 시인, 천문학자, 금 수공업자, 약사, 선원, 조각가 등 당시 존재했던 거의 모든 전문직에 종사했다. 이탈리아인은 철학과 과학, 의학과 수학을 유대인으로부터 배웠다.

르네상스가 유대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분야에서 꽃피운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가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은 그곳에서 유대인이 3백 년 동안 그리스, 아랍, 히브리 고전들을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나폴리로 프리드리히 2세가 유대인을 초청해 그리스 책들을 번역하게 했고, 기독교 학자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 322쪽

프랑스 혁명과 유대인의 해방
유대인을 프랑스 시민으로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와 이후 나폴레옹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쟁이었다. 교회는 혁명의 적이었으므로 유대인도 혁명 공화국의 적이 되었다. 18세기 유대 계몽주의자 모제스 멘델스존을 통해 유대 문화에 감화를 받은 귀족 출신 혁명 지도자 미라보 백작은 자신이 시민의 보편적 권리라 여긴 것들을 유대인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결국 유대인 시민권 문제는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 파리의 60개 구 가운데 53개 구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찬성했다. 1791년에 프랑스 유대인 7만 명이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이 되었다. 그 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해방이 뒤따랐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독립 집단이자 거의 완전한 자치 국가를 이루고 살던 유대인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12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유대인은 자기들만의 국가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 유대인은 조국인 프랑스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카드를 펼쳐 보였다. 그는 거의 1천8백 년 만에 최초의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했다. 대산헤드린 의회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기원후 70년 이래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유대인이 특별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자신들의 대답을 재천명함으로써, 그 대답이 모든 유대인에게 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제야 나폴레옹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대산헤드린이라는 유서 깊은 의회가 다시 한번 유대인의 삶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유대인 세계에 급속도로 퍼졌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모든 유대인에게 알려졌고, 전 유럽과 미국의 회당에서 그를 위한 특별 예배가 진행되기도 했다. - 450쪽

유대인은 왜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나?

유대인이 해방된 뒤 19세기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유대인은 속물스러운 민족이라 경멸당했고, 대량 학살되고, 고문당하고, 추방되었다. 디몬트는 과거 유대인에게 자행된 폭력은 ‘반유대적(anti-Jewish)’ 행위라고 지칭하며 반유대주의와 구분한다.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적 행위에는 서로 다른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전에는 많은 민족이 유대인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중세에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폭력을 가한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개종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반유대적 행위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의식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범죄’로 만드는 것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유럽에 혁명이 전염병처럼 돌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탄생한 19세기는 ‘해진 화이트칼라 계층(frayed-white-collar class)’과 유대인이 갑자기 정치인들에게 중요해진 시기였다. 우익 정치인들은 좌익 정치인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몰락 계층(d?class?)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들은 몰락 계층의 불안정한 삶을 당시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의 악행 탓으로 돌렸다. …… 우익 정치가들은 ‘유대인만 없다면 몰락 계층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중요한 기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반유대주의의 시작이었다. - 474, 475쪽

현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의 탄생
나치 암흑기에 절멸의 위기를 겪은 유대인은 다시 세력을 결집해 새로운 유대 국가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반유대주의의 탄압 속에서 유대인으로서 생존하겠다는 새로운 의지는 시온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불타올랐다. 19세기에 싹을 틔운 ‘시온주의’는 ‘시온으로의 복귀’, 즉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옛 고향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모았다. 시온주의 운동이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 세계 각지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여들었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유대 국가가 탄생했다. 건국 직후 이스라엘과 원래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던 아랍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다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에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공식 출범했다. 그곳에서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는 벤구리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대 민족의 타고난 권리와 역사적 권리에 의해,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 국가가 설립되었음을 선포한다.” 선포 직후 벤구리온은 신생 유대 국가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협조를 구하면서 이스라엘은 “중동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집트는 이 신생 국가를 없애기 위해 곧 침략할 것임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다른 세 아랍 국가?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도 형식적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이집트와 같이 행동하겠다고 발표했다. - 6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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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도서정보 :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 2022-06-0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본격적인 홉스 전기!

인민 주권과 절대주의의 뿌리,《리바이어던》
모순으로 가득 찬 책을 쓴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

근대 인민 주권과 국민 국가 이론에 혁명을 일으킨 정치철학자, 기하학이라는 도구로 세계를 설명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수학자, 인민을 국가 형성의 주체로 세운 사회 계약론의 설계자, 물리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독실한’ 유물론자, 모순으로 가득 찬 주장이 담긴 책을 써서 유럽 지식인 사회를 들끓게 한 인기 작가, 르네 데카르트, 로버트 보일, 존 월리스 같은 당대의 천재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지식 세계의 악동, 토머스 홉스.
홉스는 90여 년에 이르는 길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홉스의 어머니는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침략 소식에 공포에 질려 일곱 달 만에 아기를 조산했고, 홉스는 자신이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홉스의 삶은 전쟁과 혁명으로 가득 찼고, 공포가 늘 그를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청교도 혁명으로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641년에 찰스 1세에 반대하는 의회 세력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이곳에서 대작 《리바이어던》을 집필했다.
망명 생활 10년 후, 프랑스 가톨릭 세력의 위협이 두려워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5년 동안 영국 국교회 주교들은 홉스를 무신론자로 여겨 화형에 처하려 했다. 그를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었다. 《리바이어던》과 《시민론》은 옥스퍼드대학 금서 목록에 올라 불태워졌다.

찬사와 비난, 오해와 경탄의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린 문제적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논쟁적인 삶을 살았다. ‘홉스’라는 이름에는 지극한 찬사와 함께 격렬한 비판이 따라붙었다.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찾은 콜럼버스, 위대한 철학자, 초인적 지성”과 “맘스베리의 괴물, 형편없는 교리의 전도사, 방탕한 무신론자”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았다. 홉스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자연 상태를 만인의 자발적인 사회 계약으로 극복한다는 이념을 통해 근대 인민 주권과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 동시에 인민 전체의 동의에 기반해 절대주의 국가, 곧 리바이어던을 세운다는 기획을 제시함으로써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 같은 근대 전체주의 체제의 원형을 제공했다.
미국 텍사스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홉스 철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저자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는 이 책에서 홉스의 일생을 유례없이 완벽하게 되살려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출간 자료와 미출간 자료들을 동원하여 홉스 시대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그려내고, 홉스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에 명쾌하게 답한다. 대표작인 《리바이어던》을 포함해 《법의 원리》, 《시민론》, 《물체론》, 《인간론》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들에 담긴 사상도 깊이 있게 다룬다. 나아가 정치철학뿐 아니라 과학적 탐구, 수학·기하학 논증, 언어철학까지 드넓은 지적 관심과 학문 세계를 상세히 살핀다.

근대인의 바이블,《리바이어던》

홉스는 존 로크, 장 자크 루소와 함께 사회 계약론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정치철학자이다. 대표작 《리바이어던》(1651년)은 사회 계약론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근대 국민 국가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자연, 인간, 정치, 종교에 관해 독창적인 이론을 펼친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정치철학을 완결하는 작품이다.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살았던 17세기의 산물이지만, ‘근대인의 경전’이라 불리며 오늘날에도 수없이 인용되고 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비참하다는 데 있다. 자연 상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며,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절대 권력을 지닌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절대적 주권자로서 왕의 권리를 주장한 사람은 홉스가 최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존에는 왕의 절대적 권한이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향식’ 관점이 지배적이었다면, 홉스는 인민 주권의 양도와 승인을 통해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적인 ‘상향식’ 관점을 취했다. 이것이 홉스가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배척당한 이유였다.
개인의 동의가 정치적 복종의 ‘유일한 근거’이며, 정부가 합법성을 지니려면 주권자가 인민 개인을 보호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은 개인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합리적 사고와 판단을 존중하는 근대적 사고의 표본을 드러낸다.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혹은 당대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근대인의 정신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근대 국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개인의 승인에 기반한 국가의 탄생을 예견했던 토머스 홉스. 그가 남긴 역작 《리바이어던》을 ‘근대인의 바이블’이라 부르는 이유다.

“홉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준점이 될 전기” _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은 저자 마티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Hobbes: A Biography》를 완역한 책이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홉스 관련 저서는 《리바이어던》의 번역서와 해설서가 대부분이었다.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본격적인 홉스 전기이다. 《리바이어던》(나남출판, 2008년)을 번역한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진석용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는 홉스가 남긴 두 편의 자서전과 홉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존 오브리(John Aubrey)가 쓴 최초의 홉스 전기(1681년 출간)를 바탕 삼아 홉스에 관해 잘못 알려져 있던 사실을 바로잡고, 그동안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 있던 청년 홉스의 삶을 꼼꼼하게 추적해 나간다. 홉스가 젊은 시절에 쓴 수필부터 《리바이어던》을 거쳐 노년에 완성한 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작에 해박한 저자는 홉스의 사상이 절대 왕정에서 의회 정치로 급변하던 영국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발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보여준다.
홉스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그런 통념을 뒤집는다. 지지자만큼 적대자도 많았고 숱한 비판을 받으며 수년간 망명 생활을 했지만, 홉스가 늘 고독한 사상가였던 것은 아니다. 홉스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인으로 꼽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찰스 2세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논리학·물리학·기하학·신학·문학·번역 등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분야에서 활약하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절대 왕정과 의회 정치의 대결, 영국 내전, 청교도 혁명과 공화국 수립, 찰스 1세 처형,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학 논쟁까지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근대적 정신이 태동하던 17세기 유럽에서 홉스는 자신의 사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 책은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모순적인 정치철학자 홉스를 소심하고 병약한, 때로는 오만하고 건방진, 그러나 가슴은 따뜻하고 이성은 냉철했던 매력적인 인간으로 되살려낸다.

주요 내용

“어머니는 나와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다.”

홉스는 1588년 4월 5일 영국 윌트셔의 맘스베리 외곽에 위치한 웨스트포트의 중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홉스의 어머니는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으로 출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 산통을 시작했고, 홉스를 임신한 지 7개월 만에 조산했다. 홉스는 어머니가 자신과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홉스의 삶에는 공포가 운명처럼 뒤따랐다. 출생부터 드리워 있던 공포는 훗날 홉스의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러한 출생에서 홉스가 입은 정신적 상처는 일생 동안 아물지 않았다. “조국의 원수에 대한 증오”는 바로 그 출생 환경 때문이라고 홉스는 말했다. 84년 후에 쓴 운문 자서전에 홉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함대가 들이닥쳐 곧 조국이 종말의 날을 맞을 거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있었다.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쌍둥이를, 즉 나와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 1장 공포의 쌍둥이·20쪽

홉스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 부목사였으나 교회당 앞에서 다른 목사와 난투를 벌이고 도망친 후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 홉스는 다행히도 장갑 장사로 돈을 많이 번 삼촌 덕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1602년(혹은 1603년) 옥스퍼드대학 모들린 홀에 입학한다.

“나는 윌리엄을 20년간 충실히 모셨다. 그는 나의 고용주였지만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쾌활한 시절이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가난한 시골 청년 홉스에게 모들린 홀의 총장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를 명문가인 캐번디시가에 가정교사로 소개한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홉스와 캐번디시가의 인연은 몇 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홉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홉스는 캐번디시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변변치 못한 출신으로서는 감히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특히 뉴캐슬 공작과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영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의 모임을 후원하기도 했다. 뉴캐슬 공작 덕분에 홉스는 17세기 정치계와 과학계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1614년경에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2대 데번셔 백작 윌리엄과 첫 번째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홉스는 고대 역사가에 큰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한 일이었다. 홉스가 투키디데스에게 호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군주정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16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영국은 절대 왕권을 확립하려는 찰스 1세와 입헌 군주제를 관철하려 했던 의회의 불화 때문에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홉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영국 국민이 대중 수사학의 위험을 직시하길 원했다. 즉,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요란한 말로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과거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찰스 1세의 편을 들어 왕의 주장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홉스가 투키디데스에게 호감을 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군주정을 선호했다는 점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통치 기간에 아테네는 외형은 민주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주정이었다. …… 홉스는 투키디데스의 역사가 당대에 주는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왕에 대적하는 자들이 수사를 써서 나라의 안정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 3장 정치적 인문주의자·141~143쪽

“물질 세계는 우주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왜곡되기는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영역본이 출판되기 1년 전인 1628년, 홉스의 고용주이자 20년 지기였던 2대 데번셔 백작 윌리엄이 세상을 떠난다. 윌리엄이 죽자 홉스는 캐번디시가를 잠시 떠나 당시 왕당파의 일원이었던 갑부 거버스 클리프턴에게 고용되어 그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된다. 1630년경에 그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아들 클리프턴과 함께 두 번째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오르는데, 이 여행 중에 우연히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읽고 기하학의 ‘연역 체계’에 감탄했다고 한다. 홉스는 기하학이 공리, 정리, 증명을 통해 하나의 진리로 다른 진리를 낳는 과정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홉스는 기하학의 연역적 원리를 자신의 정치철학의 근본 원리로 삼아 사유를 전개한다.

홉스의 철학에서 기하학은 매우 중요하다. 이 중요성을 잘 모르는 학자들도 있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기하학의 증명 형태를 따라야 한다. 정의(定義)의 형태로 공리(公理)를 제시한 다음, 이로부터 필연적인 추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과학이 확실하고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된다. …… 홉스가 감탄한 것은 기하학의 공리와 정리와 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을 의심의 여지없이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기하학 그 자체가 아니라 기하학의 방법이 그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 4장 신을 믿는 유물론자·154~155쪽

1630년 홉스는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캐번디시가로 돌아갔다. 그는 훗날 3대 데번셔 백작이 될 윌리엄의 아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1634년 제자와 함께 다시 세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난다. 홉스는 이 여행길에 당시 종교 재판소에 의해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 그의 사유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갈릴레이의 물리 법칙은 이후 홉스의 20년 과학 탐구의 결산인 《물체론》(1655년) 등에서 수용된다. 또한 홉스는 여행 중에 마랭 메르센을 만나 당대 유럽의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누리는데, 당시 메르센의 모임에서는 유물론자로 유명했던 피에르 가상디를 비롯해 홉스와 여러 차례 대립한 르네 데카르트 등이 활동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프랑스 학자들과 홉스의 교류는 계속되었으며 홉스의 지적 자양분이 되었다.
홉스는 세 번째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오십 세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홉스는 두 모임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교류를 이어 갔다. 하나는 뉴캐슬 공작이 주도한 과학자 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레이트 튜’라는 지식인 모임이었다. 전자의 주요 관심사는 과학, 특히 광학이었고 후자의 주요 관심사는 종교였다. 홉스는 이미 1630년대에 광학 분야에서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철학자나 종교철학자로서 명성은 그보다 뒤에 얻게 된다. 1640년에 홉스가 저술한 《법의 원리, 자연법과 정치법》은 정치 이론가로서 홉스를 널리 알린 책이며, 군주정에 대한 홉스의 강한 선호와 신념을 담고 있어 의회주의자들의 비난을 사게 된 책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는 10여 년 뒤 출간된 《리바이어던》의 주요 내용이 거의 다 들어 있었다.

“제가 갑자기 떠나게 된 이유는 왕의 특권을 늘리려던 저의 발언이 의회의 조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640년 가을 장기의회가 소집되자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되었다. 군주정을 옹호하는 인사들이 의회로부터 공격받고 고발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고 홉스는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으며, 영국 내전이 끝난 1652년이 돼서야 돌아온다. 홉스는 고국의 정세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과학적 탐구에 쏟았다. 1630년대 후반에 계획한 《철학의 원리》 3부작 《물체론》, 《인간론》, 《시민론》을 집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탐구에 몰입했고, 1642년 《시민론》을 먼저 완성했다. 또한 홉스는 동시에 당대 여러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열심히 교류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르네 데카르트, 존 브럼홀과의 논쟁이 인상적이다.
홉스와 데카르트는 둘 다 수학의 명증성이 모든 학문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하고 기계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명성을 추구하고 자기 도취적인 성격도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이 각각 다른 실체라고 여기는 유심론적 이원론자였던 반면, 홉스는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 인정한 유물론적 일원론자였다. 동시에 홉스는 신도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유물론적 유신론자였다. 데카르트는 홉스가 정신과 물질이 같은 종류라고 주장하는 것에 경악했지만, 홉스는 데카르트가 정신이 비물질적인 실체라고 말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확실한 전제를 세우고 싶었지만 홉스는 ‘약정적 정의’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둘은 서로에게 독설을 퍼부었고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홉스는 데카르트 같은 지식인이 철학에 무지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홉스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는 데카르트가 “홉스는 논리적 증명이 뭔지 모른다.”고 언급한 데 대해 이렇게 응답했다. “이것은 반론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홉스의 태도는 온건했다. 홉스는 메르센에게 데카르트가 자신의 수학책을 좀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므로, 내가 쓴 책을 좀 더 자세히 읽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6장 논쟁하는 망명자·276쪽

1645년 홉스와 존 브럼홀은 파리에서 만났고, ‘자유 의지’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국교회 주교였던 브럼홀은 필연성이 부재하는 자유를 긍정했으나, 홉스는 자유와 필연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홉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실제로 그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결과는 잇따른 선행 사건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브럼홀은 홉스가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며, 행동을 결정하는 선행 사건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자유 의지에 관한 논쟁은 ‘죄’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된다. 죄의 결과가 자유로운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죄를 범한 행위자를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브럼홀과 홉스는 이 문제를 두고도 대립한다. 브럼홀은 죄의 원인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홉스는 죄의 근본 원인이 신이지만 죄의 당사자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신은 공의와 불의의 개념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단언했다.

“리바이어던, 즉 주권자는 영원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다.”

1651년 5월 무렵 홉스는 망명지에서 그의 대작 《리바이어던》을 출간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전체에 걸쳐 로마가톨릭이 진정한 종교와 안정된 정부를 위협하는 해악이라 주장했기 때문에, 이 책이 출간된 후에는 가톨릭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홉스는 프랑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에게 분노를 사고 있었다. 프랑스도 이제 그에게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1652년 홉스는 10여 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홉스는 19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이 권력을 잡은 영국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홉스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리바이어던’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공포가 만연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인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국가의 권력자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맺고, 권력자는 계약에 의해 승인된 절대 권력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바이어던》의 출간은 왕당파와 의회파, 국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에게 파장을 일으켰다. 의회파는 절대 왕정을 옹호하는 홉스의 주장을 곱게 볼 리 없었고, 왕당파는 주권자가 인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방식과 인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을 경우 교체될 수 있다는 내용이 신성한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국교회는 홉스에게 이단과 무신론 혐의를 씌웠고, 로마가톨릭은 1654년 홉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리바이어던》은 ‘근대인의 경전’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자신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혹은 당대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근대인의 정신을 강력하게, 웅변적으로, 포괄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도덕학, 정치학, 비판 신학이 들어 있다. - 8장 《리바이어던》의 탄생·373~374쪽

“나는 내 저작들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다. 정의를 가르쳤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1650년대 홉스는 정치, 종교, 형이상학, 교육, 기하학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주요한 책들을 여러 권 출간했다. 특히 《철학의 원리》 3부작에 해당하는 《물체론》과 《인간론》을 각각 1655년과 1658년에 발표한다. 《인간론》의 주제는 시학, 웅변술, 윤리학, 논리학 등으로 기존의 홉스의 주장을 재론한 것에 불과했지만, 《물체론》은 홉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종합하는 저술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비타협적인 유물론적·기계론적·결정론적인 관점을 옹호했다. 당시 홉스의 책들은 《리바이어던》과 더불어 옥스퍼드대학을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홉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최초의 반론은 로마가톨릭에서 나왔지만, 대부분의 비판은 동지였던 프로테스탄트에게서 나왔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민주적 전제들은 급진적이었고, 그의 절대주의적 결론은 반동적이었다. 홉스가 정의한 여러 개념이 모호한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의 가정적 정의를 실제 사실로 오해하거나 유물론적인 종교적 견해를 무신론적으로 해석하는 적들도 많았다.
특히 무신론자라는 오해는 언제든 종교적 처형을 받을 수 있는 위협적인 혐의였다. 그러나 홉스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노년의 나이였던 1660년대까지 활발히 자신의 사유를 책으로 저술하고 비판자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1670년대에 들어서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를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친분이 있는 학자들과 정치와 종교에 관한 서신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는 지난 30년간 주장해 왔던 물리학 이론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책 《자연철학 10화》(1678년)을 출간했다.
홉스는 자신의 마지막 10년을 더비셔에서 한가롭게 보냈다. 1679년 10월 중순 홉스는 극심한 소변 장애를 앓았고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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