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전쟁, 문화 전쟁
도서정보 : 김인희 | 2021-1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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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문화’를 무기로 한국과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에서 문화는 과연 어떤 의미이길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중국이 한국과의 문화 전쟁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시진핑 정부 이후 더욱 공세적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한중 문화 전쟁의 실체를 살펴본다.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경계에 선 중국의 공세
2020년, 중국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은 문화인 김치와 한복이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해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 그런데 역사, 문화 분야에 걸친 중국의 억지 주장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시작해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라고 주장했고, 2004년에는 강릉 단오제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신청을 두고 한국이 단오를 훔쳐 갔다고 비난했다. 이후로도 ‘한국이 문화 도둑’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등장한다. 한국인이 중국 문화인 활자 인쇄술, 중추절, 한자 등을 한국 문화라 우긴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중국인의 조상인 공자, 굴원, 쑨중산도 한국인으로 생각한다며 우리를 비난했다.
최근에는 인터넷, 게임, 유튜브 등을 통해 한국 문화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한복이 명나라 복식에서 기원했으며, 김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한국 문화를 빼앗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움직임은 시진핑 정부 이후 더욱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중국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최근 우리 눈에 더 잘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아직껏 중국적 세계 질서를 꿈꾼다
중국 대중이 한국 문화를 오독하고 민족주의 정서를 형성한 데에는 중국 언론의 오보와 선동적인 인터넷 매체에 의한 적극적인 확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동북공정에 빗대 ‘문화 공정’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 말이 성립할 만큼 중국 정부가 한중 문화 갈등을 직접 주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 관영 매체의 태도와 네티즌의 공격 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분명하며, 이런 변화를 이끈 것은 바로 시진핑 정부의 문화 정책이다.
중국 내에서 문화 허무주의가 범람해 민주주의 사상이 싹트는 것을 막고, 이를 계기로 중국이 민주화되고 공산당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진핑 정부는 중국 전통문화를 강조한다. 정권 유지와 강화, 반대 세력 견제의 수단으로 문화를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중국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인 위계질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중국 인터넷 집단은 이에 동조해 스스로 애국주의 투사가 됐고, 인터넷 여론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한중 문화 전쟁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문화로 국가 혹은 민족의 우위를 판가름하는 중국 전통을 근거로 한국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번속국이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중국과 중국 애국주의에 관심을 두고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저자는 중국에서 한국 문화를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오독한 흐름을 분석하며, 직접 겪은 다양한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이를 통해 한중 문화 갈등의 원인을 설명하고, 문화의 전파와 교류, 수용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구매가격 : 8,000 원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도서정보 : 도니 글룩스타인 | 2021-1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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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2차 세계대전
야만, 압제, 독재, 파시즘,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
2차 세계대전은 과연 ‘좋은 전쟁’이었나?
민중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책이 출간됐다. 그간 2차 세계대전은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과 독일, 일본 등 추축국의 시각으로 바라본 게 대부분이었다. 즉 선한 연합국이 악한 추축국을 물리친 전쟁, 정의가 불의에, 민주주의가 독재 정권에, 자유가 파시즘에 승리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결과 지금도 2차 세계대전은 ‘좋은 전쟁’, ‘인류를 위해 승리한 전쟁’이었다는 신화에 갇혀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 도니 글룩스타인은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이 추축국과 벌인 단일한 전쟁이 아니라,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전쟁이 있었다고 말한다(평행 전쟁). 즉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즘, 야만, 압제, 독재 정권에 맞서 민중이, 민중을 위해 수행한 ‘민중의 전쟁’이다. 저자는 열강의 지배자들이 자기들만의 제국의 이익을 냉소적으로 추구하는 동안, 그 주민들의 다수는 매우 다른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준다.
제국주의 전쟁 수행자들, 특히 지배계급들은 그들이 특권을 누리는 현재 상태를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에 반해 민중의 전쟁 수행자들은 모든 이를 아우르는 진정한 인간해방과 더 공정하고 민주적인 미래를 위해 분투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인명을 희생시켰지만(대표적으로 3만 5000명에서 7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드레스덴 폭격과 단기적으로 20만 명이 사망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을 들 수 있다), 빨치산과 게릴라들은 침략으로부터 현지 주민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행동이 민간인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에 대해 고뇌했다. 저자는 종래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민중의 시각으로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면서 이 ‘민중의 전쟁’이 지닌 가치를 오롯이 드러낸다. 은폐된 또 하나의 전쟁(민중의 전쟁)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선을 폭로하는 이러한 사례들은 2차 세계대전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8,900 원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
도서정보 : 전홍식 | 2021-11-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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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충주목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고 도시가 건설되었다. 읍성이 축성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4대문 밖 길을 따라 다양한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의해 읍성이 철거되는 등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단절 왜곡 굴절되었고 해방 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양적이고 획일적인 개발이 진행되면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의 발자취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한강의 물결을 따라 굽이쳐 흐른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을 찾아가 본다.
구매가격 : 10,200 원
삼국사기 바로알기 6
도서정보 : 김기홍 | 2021-11-12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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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바로알기 6]에 대하여
본 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산상왕과 동천왕 시절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설명한 책입니다. [삼국사기]에 대한 해석이나 해설은 시중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출간되어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쉽게 그 해석과 해설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줄 한줄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가 고대사를 마치 신화처럼 여긴다거나 확실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삼국사기] 자체가 많은 사건들을 삭제하고 그 앞뒤 설명을 생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여 본 서에서는 상식적인 [삼국사기]의 해석과 해설을 통하여 우리 고대사를 상식의 이해범위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대 지명들에 대한 오늘날의 위치 비정에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해석에 기초한 왜곡된 역사 지리는 명, 청 시절의 학자들이 마음대로 해석한 역사 지리로부터 시작되어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동북공정이나 여러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저들의 잘못된 논리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령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저들은 지금의 요녕성 요하 인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연나라의 수도였던 용성이 오늘날 요녕성 조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 용성의 위치를 증명하는 융흥사라는 유적은 오늘날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며, 명, 청 시절에의 주석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 역시 이곳이 연나라의 중심지인 용성이라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요녕성 요하를 기준으로 한 모든 역사는 새로이 쓰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기록들이 상세하지 못하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책입니다. 하여 그 전후 사정을 최대한 설명하여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을 발간하는 목적입니다.
구매가격 : 2,000 원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도서정보 : 호리에 히로키 | 2021-11-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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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엘리자베스 1세, 청 황제 건륭제…….인류가 영웅으로 칭송하고 위인으로 존경하던 인물들의 음흉하고 어리석고 위험천만한 속살을 들추다!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천사’였다. 충격적이게도 그가 ‘백의의 천사’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문제이긴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왜 ‘죽음의 천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을까?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 수보다 사망으로 이끈 환자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한 치료만 받았다면 충분히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근무한 이스탄불 근교 스쿠타리의 한 병원에서는 환자 2만 5,000명 중 사망자가 1만 8,000명에 달했다). 전기 작가 휴 스몰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이다.”이 책에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되어 지지자와 친척의 아내, 심지어 조카의 아내와도 동침한 간디,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한편으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풍습 전족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적으로 즐긴 청 황제 건륭제 등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에 사로잡힌 30여 명 역사적 인물들의 충격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구매가격 : 11,700 원
뭉우리돌의 바다
도서정보 : 김동우 | 2021-11-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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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67화 광복절 특집 감동의 출연자
★★★ 국가보훈처 보훈문화상, 다큐멘터리 온빛사진상 수상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인도에 간 한국광복군, 멕시코의 애니깽 농부들, 체 게바라의 동지, 한인 최초 백만장자, 우리 공군이 시작된 땅… 이제껏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바다 건너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자로 활동하다 여행자의 삶을 살던 김동우 작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그들의 흔적을 좇아 기록하기 시작한다.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 10개국에 이른 생생한 현장 취재기, 그리고 끝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에피소드를 110컷의 사진과 함께 이 책에 담아냈다. 또한 현장에 얽힌 깊고 내밀한 역사를 풀어내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단행본, 국내외 기사를 망라해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했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뭉우리돌.’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의 역사, 오늘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대한의 독립운동사가 우리 곁에 새롭게 다가온다.
구매가격 : 15,000 원
세계사 속 중국사 도감
도서정보 : 오카모토 다카시 | 2021-11-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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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 지역과 습윤 지역이 인류의 삶을 양분했다”
“실체로서의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서양사관에서 벗어나 중국 역사의 축적과 마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중국인의 발상이나 언동도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서양의 입장과 그들의 역사관만 아는 것으로는 시각이 편향되어 세상을 오인할 수 있습니다.”
서양 중심의 세계사와 역사관을 줄곧 비판해온 일본의 저명한 중견 역사학자가 세계에는 유럽과 다르게 발전해온 중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책을 출간한 이유도 서양의 세계관과 고정관념을 재검토하고 중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 책은 ‘건조 지역과 습윤 지역이 인류의 삶을 양분했다’라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나라나 지역의 역사를 배울 때 무대 설정이라는 지정학적 관점과 시각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영위하게 만드는 자연조건이나 생태 환경이 생활 무대가 되고, 이것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중국사와는 달리 왕조 중심의 정치적 인물이나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유라시아의 동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지정학, 문명론, 경제 문제 등을 종합적인 시각으로 다루며 중국사의 흐름을 해설한다. 한랭화 등의 기후와 대규모 인구 이동, 해양술 등 기술적인 요인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유라시아의 양단인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횡축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역사분석은 탁월하다. 예를 들면, 실크로드를 축으로 고대 황하문명이 오리엔트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의 통일과 로마제국의 통일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3세기에 발생한 기후 한랭화에 따라 중국에서는 유목민족의 남하로 한 왕조의 멸망 이후 수백 년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고,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 유럽의 지도가 바뀌는 대변혁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매가격 : 8,500 원
신의 전쟁-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도서정보 : 카렌 암스트롱 | 2021-10-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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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죄를
종교라는 희생양의 등에 실어 정치적 광야로 내보낸다.”
9·11 테러가 커다란 상처를 남긴 후, 종교는 전 지구적 폭력, 불관용, 분열, 불화의 원인으로 지목받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며, 알카에다에서 갈라져 나와 위협적으로 세를 불린 ‘이슬람국가(IS)’ 지도자의 사망 소식은 우리를 안도하게 하는 동시에 “정말 끝인가?”라고 되묻게 했다. 종교는 이제 더는 영성을 일깨우지 못하고, 공동체적 감각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평화의 가치를 전하지 못하는 듯 보이며, 비합리성과 어리석음의 전형으로 조롱받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얼마나 정확한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종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인가? “오직 종교적 믿음만이 다른 때에는 멀쩡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테러 같은) 완전한 광기를 일으킬 힘이 있다.”라는 주장은 타당한가? “종교는 역사상 모든 주요한 전쟁의 원인이다.”라는 말은 사실인가?
신은 이교도의 피를 손에 묻히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카렌 암스트롱, ‘종교의 본질적 폭력성’이라는 신화를 깨부수다
“종교는 본래 호전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중세 십자군 원정, ‘이단’을 잔인하게 처리한 종교재판, 16~17세기 유럽의 종교전쟁, 21세기 이슬람 무장 단체의 테러 같은, 종교와 관련된 무수한 전쟁과 폭력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 카렌 암스트롱은 그러한 주장이 위험하고 과도한 단순화일 뿐임을 입증한다. 교회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벌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위협 앞에서 내부 단합을 위해 종교재판을 이용한 에스파냐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된 유대인 박해와 기독교 ‘이단’ 배척,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강압적 근대화가 낳은 이슬람의 폭력적 지하드까지, 암스트롱은 풍부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 삼아 “종교는 본래 호전적”이라는 주장을 명쾌하게 반박한다.
최초의 전쟁 영웅 길가메시부터 ‘이슬람 테러리즘’까지
수천 년 인간 폭력의 역사와 종교의 관계를 추적하다
이 책의 1부와 2부에서는 고대 중동, 중국, 인도에서 탄생한 주요 종교의 기원을 확인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폭력과 문명과 국가의 관계를 살핀다. 세계 주요 종교 전통은 모두 ‘피로 물든 땅’, 폭력이 만연한 곳에서 태어났다. 문명의 조건인 ‘폭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가 종교 탄생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종교는 국가와 손을 맞잡으면서 폭력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근대 이후를 다루는 마지막 3부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이 된 ‘민족 국가’의 문제, 종교 근본주의와 폭력의 관계를 살펴본다.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옹호한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 마르틴 루터,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가 찾은 종교 폭력의 해법, 독실한 신앙인들이 세운 최초의 세속 국가 미국,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각 종교와 ‘민족주의’가 만나 빚어진 폭력적 변화, ‘이슬람 테러리즘’을 둘러싼 오해에 관한 이야기가 저자 특유의 깊은 인문학적 통찰이 담긴 유려하고도 명료한 문장으로 펼쳐진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3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예수 탄생 이전까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레반트 지역을 무대로 삼아 문명의 탄생과 종교의 기원을 다룬다. 《길가메시 서사시》《일리아스》《아트라하시스》《마하바라타》를 비롯한 고대의 신화적 서사시와 《논어》《묵자》《한비자》《사기》를 비롯한 중국 고전 문헌과 구약 성서 등 다양하고도 방대한 문헌을 통해 문명과 폭력의 딜레마, 종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2부에서는 로마 제국부터 근대 이전 13세기까지 제국 시대에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의 전통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자세히 살펴본다. 특히 로마의 속주 팔레스티나에서 예수가 펼친 비폭력 저항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까지 과정과 622년 메카에서 쫓겨난 무함마드가 10년도 안 되어 메카를 정복하고 이슬람 제국을 이룬 역사가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2부 마지막 8장에서는 십자군 원정 동안 두 종교가 충돌하며 두 종교의 영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주목한다.
3부에서는 15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후의 중요한 종교적 사건들을 빠짐없이 다룬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16~17세기 종교전쟁,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 국가, 식민주의 시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과 이란 혁명,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 9?11테러와 이슬람 테러리즘, 그리고 신앙이 개인화되고 힘을 잃어 가는 우리 시대에 종교의 가치와 역할을 숙고할 수 있는 암스트롱의 제언이 담겨 있다.
서양에서 종교가 본래 폭력적이라는 생각은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자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종교가 얼마나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며, 이런 생각은 괴상하게도 거의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종교는 역사상 모든 주요한 전쟁의 원인이었다.” 나는 미국의 시사평론가와 정신치료사, 런던의 택시 기사와 옥스퍼드대 교수가 이 문장을 주문처럼 읊조리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한 말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종교 때문에 벌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이유에는 수많은 사회적, 물질적, 이념적 요인이 관련되며 그 가운데서도 주요한 것은 빈약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임을 인정한다. 정치적 폭력이나 테러리즘 전문가들도 사람들이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잔혹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속적 의식에서 종교적 믿음의 공격적 이미지는 지울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현대의 폭력적인 죄를 ‘종교’의 등에 실어 정치적 광야로 내몰곤 한다. _ 머리말, 11∼12쪽
본문 내용 소개
문명의 딜레마, 종교의 두 갈래 길
암스트롱은 인간 사회가 원시 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 ‘폭력’이라고 말한다. 《길가메시 서사시》《일리아스》《아트라하시스》 중국의 신농씨와 황제 신화는 최초의 정착자들이 전쟁하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농경 국가는 그 체제의 한계로 영토 정복 전쟁을 벌이거나 약탈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고, 평화시에도 주민 대부분을 수탈함으로써 유지되었다. 사람들은 국가 건설로 유랑하는 부족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국가의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체제 폭력은 모든 농경 문명을 지배했다. 경제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던 중동, 중국, 인도, 유럽의 여러 제국에서는 인구의 2퍼센트가 되지 않는 엘리트 집단이 소수의 가신 무리의 도움을 얻어 대중이 재배한 농산물을 체계적으로 강탈함으로써 귀족적 생활 방식을 지탱했다. 그러나 사회사가들은 이런 부당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아마 절대 생존 수준을 넘어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문명화된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킬 여유가 있는 특권 계급을 만들어냈고, 그런 예술과 과학 덕분에 진보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_ 머리말, 28쪽
암스트롱은 ‘평화는 폭력에 의존한다’는 문명의 딜레마 속에서 공동체적 윤리를 강조하는 위대한 종교 전통이 탄생했음을 환기한다. 기원전 5세기말 붓다는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비로운 비폭력의 정신을 주장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우라고 했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는 제후들의 난립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보며 인(仁)을 설파했는데, 인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바라지 않는” 개인의 윤리이면서 동시에 통치 원리이기도 했다. 성경과 쿠란 모두 가난한 이웃을 못 본 체하는 것은 불의라고 단정했으며, 타인을 향한 공감과 연민을 강조했다.
붓다의 깨달음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 인간 사회에서 물러난 다른 출가자들과는 달리 불교 수도승은 세상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찾는 것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 불교는 그냥 폭력을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고 행복을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_ 2장, 104쪽
그러나 평화를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문명의 딜레마에서 종교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암스트롱은 사실상 모든 주요한 종교 전통이 자신이 생겨난 국가의 뒤를 쫓았으며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자신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는 국가의 폭력에 어느 정도나 기여했을까? 인간 폭력의 역사에 대하여 종교 자체의 책임을 얼마나 물어야 할까? 이 책은 이 오래된 질문에 답을 찾는 지적이고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근대 이전) 종교는 국가 건설과 통치를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에 스며들어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근대 이전의 정치는 종교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배 엘리트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윤리적 전통을 받아들이면, 성직자들은 대개 국가의 구조적 폭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개편했다. _ 머리말, 28쪽
십자군 원정과 공격적 지하드의 각성
오늘날 종교적 폭력의 상징이 된 ‘십자군’은 1095년 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소집을 주도하면서 처음 결성되었다. 우르바누스는 동방의 기독교인을 무슬림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했지만, 그의 진짜 속셈은 당시 기독교 세계의 군사적 방어를 이유로 삼아 세를 넓히던 왕과 제후를 견제하고 교회 권력을 동방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원정에 응한 왕과 기사 계급의 목적은 더 복잡했는데, 전사로서의 명예욕과 더불어 재산을 불리고 소유지를 넓히고 싶은 경제적 요인이 컸다. 십자군의 동기는 대단히 세속적이었으나 그 결과는 대규모 살상이었다.
우르바누스는 …… 형제, 즉 동방의 기독교인을 “무슬림의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라”고 촉구했다. …… 십자군 원정은 동방의 형제들을 위해 고상하게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행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세상을 버린 수사들과 똑같이 천상의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원정은 교회의 리베르타스[특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우르바누스의 정치적 공작에도 필수적이었다. _ 8장, 319쪽
3세기 가까이 소아시아와 예루살렘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의 이 광기는 이슬람교 전통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암스트롱은 십자군 원정 동안 오래전 무슬림에게 잊힌 폭력적 투쟁으로서의 ‘지하드’가 깨어났다고 설명한다. 본래 지하드는 주로 무슬림에게 내적 이기심에 맞선 ‘싸움’을 의미했고, 무함마드는 무슬림이 전쟁 후에 정신적 개혁인 ‘더 큰 지하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슬람 성직자의 마음속에서는 ‘더 큰 지하드’에 군사적 지하드가 새겨졌으며, 무슬림이 서방의 공격을 받을 때면 이 영성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게 된다.
거의 죽었던 지하드는 이 지역에서 살아 있는 힘이 되어 갔다. 지하드는 이슬람에 내재하는 폭력적 본성이 아니라 서방의 지속적인 공격 때문에 부활했다. 훗날 서방의 중동 개입은 모두, 아무리 그 동기가 세속적이라 해도,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광적인 폭력의 기억을 불러내게 된다. _ 8장, 332∼333쪽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에스파냐 종교재판과 30년전쟁
무자비하고 광적인 종교적 폭력의 대명사로 흔히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와 ‘30년전쟁’이 거론된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두 사건 모두 신앙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주된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1480년 에스파냐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세운 ‘종교재판소’는 에스파냐 제국을 둘러싼 내외부의 위협, 곧 계속된 내전과 점점 세력을 넓혀 가던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내부 단속을 위해 만든 임시방편이었다.
[에스파냐 군주들은] 그저 나라가 평화롭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나라는 내전으로 흔들리고 이제 오스만의 위협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안정을 얻으려는 시도로는 너무 결함이 컸다. 나라가 외부 세력의 위협과 마주하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내부의 적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가 생겨났고, 이 경우 공포의 대상은 국가 안보를 해치기 위해 은밀히 활동하는 타락한 개종자들로 이루어진 ‘제5열’이 되었다.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 광적인 ‘종교적’ 편협성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 폭력의 원인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고려였다. _ 9장, 364쪽
16~17세기 종교전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30년전쟁’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으로 ‘종교적’이지 않았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편에서 싸우는 일이 왕왕 벌어졌기 때문이다. 가톨릭을 수호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제후 다수의 지원을 받으며 교황과 프랑스 가톨릭 왕들과 싸웠다. 그들의 싸움은 신앙이 아니라 균열이 일던 봉건 사회에서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의 신학적 다툼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너무 자극하는 바람에 분별없는 전쟁을 벌여 서로를 학살하다 마침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자유 국가가 창조되면서 폭력이 억제되었다. 흔히 그런 식으로 이야기된다. …… 하지만 어떤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 오스만 제국처럼 유럽 전역에서 헤게모니를 쥐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갈망은 주권 민족 국가로 나아가려던 유럽의 더 다원적인 힘과 맞서게 되었다. 독일 제후들은 당연히 카를의 야망에 저항하고 지역 권력과 전통적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_ 9장, 379, 380쪽
종교의 폭력을 제어하는 두 방법, 홉스와 로크
16~17세기 종교전쟁은 종교 개혁 이후 유럽 사회에서 벌어진 가톨릭계와 프로테스탄트계의 세력 다툼이었다. 슈말칼덴전쟁, 위그노전쟁, 30년전쟁 등 유럽의 지형을 바꾼 이 싸움들은 지식인 사회에 종교적 폭력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것인가를 시급한 화두로 던졌다. 근대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절대군주제를 신봉했는데, 강력한 군주가 마치 “하느님이 질서 잡힌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혼돈의 괴물 리바이어던을 제압하듯이” 종교의 분열을 제어하고 종교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의 해법은 절대국가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 국가는 인간이 자신의 믿음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바람에 쉼 없이 전쟁의 운명으로 빠지는 경향을 누를 것이다. 인간은 인간성이 진리를 파악하는 데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계약을 맺고 절대군주를 선출하여 그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통치자는 성직자들을 통제하여 종파적 갈등의 가능성까지 예방할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역사는 홉스의 해법이 지나치게 단순함을 보여주었다. 유럽 국가들은 종파적 다툼이 있든 없든 계속 야만적으로 서로 싸우게 된다. _ 9장, 395쪽
반면 존 로크는 종교적 폭력의 원인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 태도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 자유’가 평화의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로크는 종교란 사적인 것이며, “종교와 정치를 섞는 것은 심각하고 위험하고 실존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암스트롱은 로크가 주장한 종교의 ‘개인화’는 당대 매우 급진적인 혁신이었으며, 전근대적 신앙과 전혀 다른 새로운 믿음 체계가 서양에서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설명한다.
로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사물의 본성 자체에 새겨져 있다고 가정했다. 물론 이 생각은 급진적 혁신으로서 같은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로크의 생각이 특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대의 종교는 전에 있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로크는 종교가 격한 감정을 분출할 수도 있다고 보고, 종교를 정부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평화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로크에게서 우리는 서양의 에토스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종교적 폭력 신화’의 탄생을 본다. _ 9장, 396쪽
새로운 신앙이 된 ‘민족주의’
19세기 유럽에서는 산업화와 함께 ‘민족’ 개념이 등장했다. ‘민족’은 국가가 떼어내버린 종교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는데, 종교가 일으키는 감정과 분위기까지 대신하며 사실상 유사 종교로서 역할을 했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통일된 독일 민족 국가를 염원하면서 민족의 신성성과 영원성을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국가들은 모든 시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 신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와 달리 민족주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계발되지 않았기에 폐쇄적 경향을 보였으며, 특히 소수 민족에 대한 폭력을 막는 윤리적 태도를 담지 못했다.
신성한 것을 사람이 그것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민족은 틀림없이 성스러움의 구현체, 지고의 가치였다. 따라서 민족 신화는 민족이라는 테두리 안의 단결 연대 충성을 장려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직 종교와 연결된 다수의 영적 전통에서 중요한 이상이었던 ‘만인에 대한 관심’이 계발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보편적 감정 이입이 전사 귀족의 폭력에 영향을 끼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대안을 제시하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종교가 개인화하면서 힘없는 민족은 증대하는 구조적, 군사적 폭력에 점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폭력에 맞설 ‘국제적’ 에토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_ 10장, 444쪽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과 평등의 이상
암스트롱은 18세기 전반 미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인 ‘대각성운동’이 종교가 근대화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미국 식민지를 이끈 지도자들은 교육을 받은 신사 계급으로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정신에 매료되었지만, 그런 사상은 문맹이었던 대다수 청교도 민중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대각성운동’은 미국 사회 주변부로부터 터져 나와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등주의의 이상을 설명하며, 교육받지 못한 계층에까지 종교적 계몽을 선사했다. 즉 미국인을 계몽하게 한 것은 인권 철학이나 인본주의 사상이 아닌 바로 ‘종교’였던 것이다. 또한 대각성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은 개개인의 신앙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기성 귀족 체제에 속박당하지 않는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가 태동할 수 있었다.
‘건국의 선조’는 신사 계급에 속했으며 그들의 사상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칼뱅주의자였던 미국인은 건국자들의 이 합리주의적 에토스에서는 자신과 연결되는 관련성을 찾지 못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처음에는 영국과 결별하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에 모두 투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참여한 사람들은 건국자들의 이상만큼이나 기독교의 천년 왕국 신화에서도 동기를 찾았다. 독립전쟁 기간에 세속주의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종교적 갈망과 창조적으로 섞이면서 아주 다양한 신앙을 가진 미국인들이 잉글랜드의 힘에 맞서 한데 뭉칠 수 있었다. _ 10장, 411쪽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오해와 진실
20세기에 유행처럼 번진 ‘종교적 근본주의’는 근대화와 함께 개인의 영역으로 추방당한 종교를 복원하려는 저항 운동이었다. 암스트롱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기독교 근본주의보다 더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이유는, 이슬람 자체의 호전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무슬림이 겪은 폭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근대화는 서양에서는 토착적으로 자라나 서서히 무르익었지만 무슬림 세계에서는 식민주의라는 혼란과 분열 속에서 군사적인 강요로 가혹하게 이식되었다. 암스트롱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자신의 신앙을 파괴한다는 공포에 빠질 때 발흥하며, 외부의 공격은 그 폐쇄성을 강화한다.
유럽인이 그려놓은 국경이 워낙 자의적이었기 때문에 [무슬림은] 민족적인 ‘상상의 공동체’를 창조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 레바논은 인구의 50퍼센트가 무슬림이라 당연히 아랍 이웃들과 긴밀한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원했지만, 프랑스가 선택한 기독교 정부는 유럽과 더 강한 유대를 선호했다. 1948년 국제연합(UN)의 팔레스타인 분할과 이스라엘 유대 국가 건설도 이에 못지않게 유해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일은 아랍계 팔레스타인 주민 75만 명의 강제 이주를 낳았으며, 남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국가 안에서 살게 되었다. _ 11장, 464쪽
우리 시대에 필요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종교의 본질적 폭력성’에 대한 역사적 규명을 시도하는 이 책은, 역사상 ‘종교적’ 전쟁, ‘종교적’ 폭력으로 불린 참상들이 실제로는 정치 투쟁의 결과에 가깝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진실은 이 책에서 종교가 폭력의 문제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암스트롱은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인류가 겪고 있는 분열, 불화, 분쟁에 종교가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공동체를 향한 공감, 연민, 배려를 증진할 수 있는 종교 본연의 영성 계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암스트롱이 안내하는 종교와 폭력에 관한 이 광활하고도 지적인 역사 여행을 통해, 독자들은 종교가 개인적이고 의례적인 신앙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위한 적극적인 헌신에 힘쓸 때, 비로소 오래전 ‘피로 물든 땅’에서 탄생한 위대한 종교 전통(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유교)이 지금껏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힘, 곧 종교의 존재 이유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내 탓이 아니더라도 내 이웃이 겪는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동정과 사랑의 감각을 키우는 것. 이것이 기원전 6~2세기에 형성된 힌두교의 위대한 경전 우파니샤드의 정신이자, 붓다가 설파한 자비의 본의이며, 중국 춘추시대 천하를 돌아다니며 덕치(德治)를 주장한 공자의 핵심 사상이자, 로마 속주 팔레스티나에서 예수가 설교한 하느님의 왕국의 본 모습이며, 이슬람 공동체가 상업화된 메카의 불의 속에서 지키고자 했던 정의와 다르지 않음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날 과거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사람들이 현재의 ‘경제적, 역사적 상황’의 다루기 힘든 딜레마와 마주하도록 도와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제는 농경 제국의 억압적 불의와 싸우지 않지만 여전히 큰 불평등과 권력의 불공정한 불균형이 있다. 그러나 이제 소외된 사람들은 무력한 농민이 아니다. 오늘날 소외된 사람들은 맞서 싸울 방법을 찾았다.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의 자기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서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종교의 역사에서 십자군과 지하드만큼이나 중요한 ‘내어줌’, 이타심, 동정심을 요구한다. _ 후기, 606~6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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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황제의 업적을 기린 기념건축물 글. The Book of Monumentum Ancyranum,The Deeds of Augustus, by Emperor Augustus
도서정보 : Emperor Augustus | 2021-10-28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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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풍속/신화 > 서양사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업적을 기린 기념건축물 글. The Book of Monumentum Ancyranum,The Deeds of Augustus, by Emperor Augustus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업적을 기린 기념건축물 글 로서,
로마황제인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업적을 기린 글로 사원의 제사글로 지금의 앙카라지방에서 발견된 도시에서 발굴된 글로서 , 로마 라틴어 그리크어 영어로서 이책에 기술되고 ,미국의 펜실바니아 대학교에서 출간된 책자.
Temple of Augustus and Rome . Monumentum Ancyranum
Besides being one of the most important Roman period ruins in the city, it is also known for Monumentum Ancyranum . This is an inscription about the works of Augustus, who was considered the first Roman emperor, throughout his life. It is the most complete copy of Res Gestae Divi Augusti that has survived to the present . Temple of Augustus and Rome is an augusteum located in Altında? district of Ankara. It is thought to have been built around 25-20 AD. Besides being one of the most important Roman period ruins in the city, it is also known for Monumentum Ancyranum. This is an inscription about the works of Augustus, who was considered the first Roman emperor, throughout his life. It is the most complete copy of Res Gestae Divi Augusti that has survived to the present day, as the original in Rome had disappe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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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로마 초대 황제. The Book of Augustus, by E. S. Shuckburgh
도서정보 : E. S. Shuckburgh | 2021-10-27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역사/풍속/신화 > 서양사
아우구스투스,로마 초대 황제. The Book of Augustus, by E. S. Shuckburgh
Title: Augustus
The Life and Times of the Founder of the Roman Empire Author: E. S. Shuckburgh
Language: English
이책의 자세한 내용은 목차를 따라서 본문에서 확인. 로마제국의 창시자의 시대와 인생 삶을 기술함.
Augustus. 아우구스투스.BC63.9.23 - AD14.8.19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 카이사르의 유병遺兵을 장악하여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시작.
BC 42년에는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3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부터는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BC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패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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