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2

도서정보 : 정도전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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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조선인朝鮮人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정도전鄭道傳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혁명가이며 사상가였다.
그러한 그가 혁명과업의 완수 이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수구守舊세력이 되었다. 이렇듯 진보進步는 동시적으로 보수保守다.
현실세계에서 진보나 보수가 가름되는 것은 다만 상황의 문제일 따름이다. 이는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막론하고서 현대에 이르도록 지극히 일상적인 역사의 법칙적 원리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서 곧잘 주周나라의 문화나 공자孔子의 발언을 인용한다.
주나라의 문화를 본받으려고 하는 점은 공자와 닮았다. 아마도 삼봉三峰은 스스로 조선의 공자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공자는 호학자好學者이며 철학자로서 성인聖人이었다. 그런데 삼봉은 사상가이며 혁명가로서 철저한 정치가였다.
그래서 조선경국전은 응당 논어論語이지 않다.

그리고 정도전은 주역周易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 또한 공자가 주역을 삼천 번이나 읽어서 주간竹簡의 가죽 끈이 닳을 정도였다고 하니 마땅히 공자가 주역에서 천지자연의 근본원리를 취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봉이 인식하는 주역철학은 어디까지나 동중서董仲舒의 ‘양은 존귀하고 음은 비천하다’[陽尊陰卑]는 식의 사유방식을 좇는 것이므로 본래의 주역철학이나 공자철학의 사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현실세계의 표면으로 양陽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서 음陰이 비동시적인 동시성으로서의 토대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음과 양은 어떤 본질적 실체로서 고정된 불변태不變態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생성’[相生]하며 동시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극복하는’[相剋]하는 교차적 변화로써 순환하는 변화태變化態다.
이는 동중서가 음양의 관계를 유가儒家 통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천명天命이나 천자天子 등을 작동시키기 의한 통치이데올로기적 구조에 유용하도록 ‘양陽인 군자君子(지배계급)는 존귀하고 음陰인 소인小人(피지배계급)은 비천하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갖는 사유방식이다.
따라서 동중서가 당시 집단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계급주의적인 통치이데올로기로써 주역철학의 음양의 사유방식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유가철학은 현재에 이르도록 여전히 주역철학의 음양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 동중서의 양존음비陽尊陰卑 식의 사유방식을 고집하며 추종한다.

이외에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이나 맹자孟子나 대명률大明律 등의 전거典據들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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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1

도서정보 : 정도전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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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조선인朝鮮人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1





역사歷史의 과정에는 어떠한 단절도 없다. 혹여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단절적 사건이라도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예컨대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이 논변하는 과학적 패러다임paradigm(틀)의 변화적 원리가 역사의 측면에서는 일견 단절의 현상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역사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개벽開闢이나 혁명革命에 가까운 극단적인 단절적 변화의 일면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 작동하거나 역사를 작동시키는 본래적인 원리 자체가 달라지는 현상인 것은 아니다.

현실세계의 온 인간존재가 동일한 종種으로서의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듯 역사는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 천지자연天地自然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普遍(universal)의 원리에 따라서 작동한다.
이러한 보편의 원리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여서 착각하고 있듯이 통합統合이나 통일統一 등에 기반을 두는 그림자권력적인 동일성同一性(identity)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의 원리는 현실세계의 온 존재와 온갖 것들이 본래적으로 서로 닮아있는 닮음의 유사성類似性(similarity)을 의미하며 외려 그러한 보편은 모든 차이差異의 바탕 위에서 작동한다.
여하튼 여기서 현실세계의 역사가 인간중심주의적人間中心主義的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존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인지 천지자연중심주의적天地自然中心主義的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존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인지를 논변코자 함은 아니다.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은 조선朝鮮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실질적인 설계도다. 따라서 조선경국전을 살피면 조선이라는 왕조국가王朝國家의 본래적인 모습 자체를 알 수 있다.
최초의 조선인들이 조선이라는 왕조국가를 어떠한 사유방식思惟方式으로써 구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왕조국가가 어떠한 이념理念으로써 작동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경국전은 애당초 굳이 이런저런 주석註釋이나 해설解說을 덧붙이지 않은 본문만으로도 그 의미와 의도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도록 기술記述된 텍스트text다.
다만 원전原典이 한자漢字로 기술되어 있고 그에 대한 번역어가 한문 투인 탓에 기존의 번역서가 현대인들에게 낯설 따름이다.
이에 역자譯者는 현대의 독자讀者들이 그 본문만을 독서하더라도 그 텍스트 자체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도록 현대적인 어투로써 번역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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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주자의 중용장구

도서정보 : 자사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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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 치우침 없는 일상





‘중용’은, 모름지기 명실상부 중국문명 최상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예컨대, 대학원에서 도가철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자연스레 유가철학의 텍스트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중용’이나 ‘논어’의 경우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외려 ‘노자도덕경’이나 ‘장자’를 독서하는 듯한 감명을 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가장 대립적인 철학사상을 공부하는 자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는 텍스트는, 결코 흔하지 않다. 아니 너무도 희귀하다. 그런 것이 바로 ‘중용’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중용’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중용’편을 송나라 때에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주된 내용은, ‘주자’의 주석에서 여러 차례 거론되듯이, ‘논어(論語)’나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가르침을 ‘자사’가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사’의 조부(祖父)이면서 동시에 멘토(mentor)였던 ‘공자’는,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를 실현했다. 이는, 자기의 의지나 욕망을 좇아서 행동하더라도, 결코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세상은 쉬이 ‘종심소욕’ 자체가 애당초 그릇된 것인 양 규정해둔다. 그리고서는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을 아예 ‘종심소욕’ 자체가 불가하도록 훈육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정작 자기의 마음이 무얼 욕구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21세기의 현대인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으며, 인간존재로서 참으로 비극적인 내몰림이라고 할 것이다.
‘종심소욕’은 ‘공자’와 같은 성인마저도 추구한 바이다. 그래야만 삶이 풍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불유구’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 하다면, ‘종심소욕’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참극을 초래하고 만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각자 자기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버린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도 그러하다면, 인류문명은 금세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불유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삶 안에서 ‘중용’을 잘 실현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불유구’한다는 것은, 나와 너, 개인과 공동체 따위의 사이에서, 치우침 없는 일상으로서의 ‘중용’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공자’와 같은 삶을 살아낼 수는 없으며, 또 굳이 그러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각 인간존재의 삶은 각자의 몫이며, 각자의 것일 따름이다. 어쨌거나 ‘공자’ 이후로 ‘공자’와 같은 삶을 살아낸 자는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종심소욕불유구’는 이르기 어려운 경지인 탓이다. 어쩌면 그래서 ‘자사’는 ‘중용’을 찬술하였던 것이다.

‘중용’의 치우침 없는 일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곧 ‘종심소욕불유구’를 실천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컨대, 그렇게 ‘종심소욕불유구’에 근접하는 ‘중용’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으로서,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 사이의 ‘중용’을 말할 수 있다. 서양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이를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사이의 중화(中和)라고 했다.
자기보존적인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이, 곧 에로스다. 그리고 공격적인 본능들로서 구성된 죽음의 본능이, 곧 타나토스다.
삶의 본능에서 성격발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 본능이고, 이것에 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바로 리비도(libodo)다. 이러한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고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도록 한다.
반면에,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이는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파괴적 에너지가 바로 모르티도(mortido)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쉼 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마저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한다. 대표적인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전쟁일 것이다.
삶의 과정 안에서, 이러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서로 중화를 이루기도 하고, 서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할 때, 서로 중화를 이룬다는 것은, 곧 ‘중용’을 실현한다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쉬이 삶은 무작정 좋은 것이고, 죽음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단정해버리고는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에서 인간존재가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궁극한 ‘중용’은, 모름지기 삶과 죽음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삶도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며, 죽음도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삶은 더욱 삶다워지고, 죽음은 더욱 죽음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무작정 좋다고 하기엔 너무나 예술적이고, 죽음이란 무조건 나쁘다고 하기엔 지극히 미학적이다. 그래서 ‘중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중용’ 말이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제아무리 제 멋에 겨워 떠들어대며 으스댄들, 유학자이면서도 ‘공자’와 ‘맹자’를 조롱하며 비판했던 이지(李贄, 卓吾, 1527~1602)의 표현처럼, 결국은 고작 ‘한 마리 길들여진 개’의 신세에 불과한 듯하다.
‘이탁오(李卓吾)’는 자기가 쓴 책의 제목을, ‘불살라버려야 할 책(焚書)’이라고 지은 인물이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서’에서 ‘이탁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다. 그리고 ‘공자’를 존경하지만, 정작 ‘공자’의 어떤 면이 존경할 만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는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 섞여 연극을 구경하면서, 앞의 사람들이 잘 한다며 소리를 지르면 덩달아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또 이런 말도 한다.
“그림자를 보고서 개가 짖어대기 시작하니, 곁에 있는 개들도 아무런 전후사정을 알지 못 한 채 무작정 짖어대기 시작한다. 그림자에 놀라서 짖어대는 개를 따라 짖어대는 개들과 나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중국문명 안에서 ‘이탁오’는, 유학자로서 ‘공자’를 조롱하고 또한 ‘맹자’를 공격하고 나아가 ‘주자’마저도 철저히 비판했던, 거의 유일한 사상가이다.
그런데 그런 ‘이탁오’야말로, ‘공자’ 이후 독존유술(獨存儒術)쯤을 내세우며, 유가철학을 한갓 통치적 이데올로기로서나 이용하려는 집단권력에 의해 줄곧 왜곡되고 오염되어 가는, 유학(儒學) 자체의 ‘중용’을 처절하게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철학을 통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서 독재하게 될 때, 서민대중들의 고통은 실로 극심한 것이다. 예컨대, 그러한 방식으로 500여 년을 통치했던 역사가 바로 ‘조선왕조’다.
그런데 엄밀히 말한다면, ‘조선왕조’의 왕정(王政)은 대체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주도하는 권력체제였다. 대표적인 사대부 세력으로서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부각되기 시작한 ‘노론(老論)’을 특별히 거론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물론이며, 현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특히,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李完用)’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왕조 말기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그 세력의 당수였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라는 세력집단의 정체성을 엿보게 하는 지극히 자극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물론 사대부들 전부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순간에, 지역에서 의병항쟁을 하거나, 먼 이국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대부도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민주정(民主政)의 시대를 살아내는 현대인인 탓에, ‘조선왕조’라는 체제 내에서 서민대중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잘 감각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현재에 이르도록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대식 세습왕조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다소 근접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굳이 필자가, ‘조선왕조’를 북한과 비유하는 까닭은, 현재 북한의 국호가 ‘조선 인민 민주주의공화국(朝鮮 人民 民主主義共和國)’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의 국호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대한’은 과거의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취했고, ‘민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취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것처럼, 북한은 국호를 ‘조선왕조’에서 취한 것이다.
그런데 남한이나 북한의 국호 모두 그다지 그럴 듯한 것은 되지 못 한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말할 나위 없으며, ‘대한’이나 ‘민국’이라는 것도 그 이면에 얽힌 역사는, 우리 것이므로 무작정 자랑스럽다고만 하기엔 너무도 깊은 치욕과 회한이 서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탁오’는 그렇게 한갓 통치적 이데올로기로나 일그러져버린 유학사상을 비판했던 것이다.
‘종심소욕불유구’는 물론이며 ‘중용’ 또한, ‘이탁오’처럼 자기의 원초적인 생존적 토대마저도 부정하고 거부해버리는 치열함이 없고서는, 결코 그 실제적인 실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설령 ‘공자’나 ‘자사’처럼 살아 내거나 ‘이탁오’처럼 살아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삶의 끝 날까지 ‘중용’을 지향하며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세계의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이룰 수 있는 참으로 진솔하고 소중한 ‘중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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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정보 : 니체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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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이렇게 말했다






적잖은 시간 동안, 나의 청춘을 온통 지배했던, 고뇌와 비탄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를 여전히 추억한다. 지금껏 여러 이유로, 너무나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온갖 사상들을 알고서는 이미 망각해버렸지만, 아마도 내 죽음의 순간까지도, 니체의 추억만큼은 망각되지 않을 듯하다.
니체를 추억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제목에 드러나 있는 바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정작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려고 했던 최후의 발언은 ‘위대한 침묵’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지금 이 텍스트를 지어내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많은 이들은, 니체에 관해 이런 말들을 한다.
“비록 깊은 밤 숨죽인 도둑처럼, 니체의 고뇌와 비탄을 슬쩍 훔쳤을지라도, 니체를 읽지 않은 자와의 만남과 대화는 너무나 소모적이다.”
“결국 부득이한 생존을 핑계 삼으며, 니체의 본의本意를 짐짓 모른 체하고 외면해야만 하더라도, 니체를 알지 못 하는 자와 철학이나 문학을 논변論辯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아가 인문학 자체에 대해서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 니체를 기억하거나 추억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21세기는 이미, 굳이 니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뇌와 비탄에 찬 시대인 탓이다.
이제 내게도, 청춘의 시절처럼 니체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집은 물론이며, 독일어판 원서까지 무작정 뒤적여대던, 무모할 정도의 열정은 이제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강렬하던 열정이 식어버린 후, 외려 니체는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참으로 묘한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니체를 고뇌했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삶 자체에 대해서 참으로 절실히 고뇌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일견 니체는 곧, 고뇌 자체다. 무릇 고뇌 자체로서의 니체다.
니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서, 스스로의 고뇌를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으로써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니체의 고뇌는,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마감의 순간에, 정작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줄곧 계속 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발언과 차라투스트라의 침묵, 발언하는 차라투스트라와 침묵하는 차라투스트라.
이러한 차이를 안다면,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이에 21세기는, 차라투스트라의 가혹한 발언 이후의 위대한 침묵을 새로이 고뇌해야 할 시절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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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1

도서정보 : 공자(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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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 에세이







‘논어’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아우르는 불멸의 고전이 된 것은,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을 참으로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난해한 논술의 형식이 아니라, 일상세계의 체험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에세이 형식으로써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근대 이후 한동안 단지 ‘학술을 위한 학술’을 추구했던 서양사회의 인문학적 관성을 좇아, 마치 논문은 아주 고상하며 고급한 글쓰기이고, 반면에 에세이는 아주 유치하고 저급한 것인 양 인식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
이는 특히, ‘장자’가 들려주는 ‘우물 안 개구리’ 우화에 등장하는 개구리처럼, 상아탑에 틀어박힌 채로 강단학술쯤이나 주도해보려는 자들에게서 곧잘 볼 수 있는 행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과도한 전문용어나 학술용어 따위를 남발하는 글쓰기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여타의 글쓰기에 비해 보다 우월한 위치에 배치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 ‘논어’는 시대를 관통하는 가르침을 안겨줄 것으로 여겨진다. ‘논어’는, 언어를 통한 가장 위대한 소통은 그것이 지닌 진솔함과 소박함에서 기인한다는 본래적인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장자’에는, 제나라 ‘환공’의 책읽기를 비판하는 ‘수레바퀴 장인’의 예화가 기술되어 있다.
이야기 속에서 ‘수레바퀴 장인’은, 애당초 인간의 언어는 그 소통에 있어 본래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언어가 개별자로서의 각 인간존재들 사이에서 작동함으로써 인해 기인하는 한계다.
인류의 다양한 글쓰기 형태 중에서, ‘수레바퀴 장인’이 추구하는 참된 소통의 가능성을 실현해 주는 것은, ‘논어’의 경우처럼 에세이 형식으로써 기술된 텍스트들이며, 어쩌면 논문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수레바퀴 장인’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가장 대표적인 ‘찌꺼기[糟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필자는 십여 년 동안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난다 긴다 하는 석학들의 무수한 논문들을 독서했고, 또한 필자 역시 자의반타의반으로 적잖은 논문을 기술했다.
그런데 그런 무수한 논문들이, ‘논어’처럼 인간 본연의 감성을 담아내는 소박한 에세이에 비해서, 과연 어떤 측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인지 당최 의문이다. 나아가, 시나 소설 형식의 글쓰기의 경우도 그러하다.
물론, 논문이라는 학술적 글쓰기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게 아니며, 어지간한 논문이나마 짜깁기해 내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필자 역시 오롯한 체험으로써 잘 알고 있다. 다만, 그저 논문에만 치우쳐버리는 편중된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구나 논문이라는 형식 그 자체에만 매몰되다보면, 논문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논리성을 갖추기보다는, 그 사유가 한없이 경직되어버리고, 메마른 감성과 핏발선 이성쯤으로나 경도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선학(先學)들의 찌꺼기를 짜깁기해서 치졸한 논문 쪼가리나마 지어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들이라면, ‘논어’를 통해 인간 본연의 인문학적 텍스트가 전해주는 감동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인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좋은 인연[善緣]’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살다보면, 선연보다는 악연이 좀 더 많은 것만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악연을 풀어보려는 의도 자체는 가상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악연이 선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서양의 어느 왕처럼 엉킨 매듭을 과감히 절단해버리는 것만이, 부득이한 악연을 대하는 유일한 해결책인지 모른다.
필자 역시, 삶의 부득이한 악연들의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보려는 시도를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체험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공자와 제자들의 혈연을 넘어서는 애틋함과 끈끈함이, 지금 여기에서 더욱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듯하다.

‘논어’의 저자는 쉬이 ‘공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논어’를 실제로 기술한 것은 그의 후학들이며, ‘공자’ 자신이 아니다.
이는, 마치 ‘신약’의 4대 복음서들이 모두 그 저자가 다르지만, 죄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기술인 바와 흡사하다. ‘논어’ 역시 철저히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기술이며, 다만 그 저자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어’의 저자의 문제에 있어,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를 존중하여서 명확히 저자를 밝혔듯이, ‘논어’의 저자들 역시 ‘공자’를 존중하여서 실제의 저자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므로, 이는 단지 서양사회와 동양사회의 문화적 차이인 것으로 이해하면 족하다.
이에 대해서도 한가로운 호사가들은 온갖 사태가 유발되도록 갖은 말들을 지어내지만, 그런 것은 한없이 소모적인 한갓 허망한 지적 유희일 따름이다.

모름지기 ‘논어’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전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텍스트다. 그러다보니 ‘논어’는, 그것이 저술된 이후 가장 많은 주석과 해설이 덧붙여진 텍스트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학문과 정치를 시도해볼 수 있는 천부적인 특혜를 보장받은 양반사대부로서, ‘논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더욱이 ‘논어’에 대한 ‘주자(朱子)’ 등의 유력한 주석이나 해설에 대한 이해 없이 과거시험에 급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런 탓에 ‘논어’는, 그 어느 텍스트보다도 본래의 원전이 지니고 있는 본의가 그만큼 더 많이 훼손되고 왜곡되어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하물며 21세기에 이르러서라면, 기존의 무수한 주석이나 해설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논어’ 본래의 담담한 언어를 접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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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2

도서정보 : 공자(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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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 에세이







‘공자’의 삶을 대변하는 말은 ‘주유천하(周遊天下)’다. ‘주유천하’는 말 그대로 천하를 두루 여행했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여행자로서의 ‘공자’인 것이다.
필자도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하면서, 중국의 전역을 몇 년에 걸쳐 다녀보았는데, 천하를 주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소나마 체감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다. 바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다. 이는 ‘공자’가 70세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경지였다.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철학사상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 전체를 집약하는 한 마디 역시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할 것이다.
‘종심소욕(從心所慾)’은 자기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유구(不踰矩)’는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대로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지가 자칫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 하거나, 자기의 마음을 억지로 억제하거나 억압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잘 알지 못 하므로, 애당초 ‘종심소욕’에 해당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인간존재의 마음 안에는 온갖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서양의 심리학에 의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상태에서의 욕망을 지칭한다. 그러하다면 과연 그러한 욕망 자체가 죄다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불유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를 성인이라면서 숭앙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기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종심소욕불유구’를 논할 만한 나이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청춘의 시절을 이미 살아낸 필자로서는, 이제 자꾸 중년의 삶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 40에는 자기의 중심이 서서 현혹되지 않았고, 나이 50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그리고 ‘논어’ 양화(陽貨)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40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공자’에 따른다면, 필자의 나이쯤에는 이미 자기 삶의 중심을 갖고서 세상사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이내 하늘이 나에게 명령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여전히 온갖 세상사에 온통 휘둘리고만 있으며, 당최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천명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들만큼 잘 살아내지 못 하는 탓에, 늘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니, 아무래도 끝장난 인생인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만이, ‘공자’의 소중한 가르침에 그나마 다소라도 부응하는 일이리라.

중국인들에게 ‘공자’는 무한한 민족적 자긍심을 주는 존재다.
예컨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야구선수들을 활약상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적인 자긍심을 느낄 것이다.
박찬호,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 이런 이름들을 들을 때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실질적인 이득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공자’를 프로야구선수와 비유한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공자’의 존재는, 마치 현실세계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문명에 가장 잘 적응하면서도 동시적으로 가장 잘 맞서는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처럼,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를 독서하고 ‘공자’의 삶을 공부한다고 해서, 어떤 실제적인 이득이 발생할 리는 없다. 더욱이 현대처럼 첨예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목적하는 자본적 이익의 발생은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논어’를 읽는 일은, 삶의 무한한 자긍심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논어’가 인류의 고전이 지닌 미학적 본질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현실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의 형태는 경비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경비(警備)는 말 그대로 ‘경계를 갖춘다’는 의미이며, 경계(警戒)라는 것은 무언가를 주의하여 살피며 돌보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경비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저 그 대상이 다양할 따름이다.
예컨대, 부모는 자식을 경비한다. 선생은 학생을 경비한다. 경찰은 시민을 경비한다. 군인은 영토를 경비한다. 자본가는 자본을 경비한다. 사업가는 사업을 경비한다. 금융가는 금융을 경비한다. 정치가는 정치를 경비한다.
비단 직업적인 활동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삶의 활동이라는 것이, 실상은 살피며 돌보는 일이 아닌 바가 없다.
그렇게 ‘공자’는 천하를 경비한 것이다. 다만, ‘공자’가 경비하는 대상이 일반적인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이 세계 자체였던 것이다.
인류사에 위인이나 성인으로서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공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등, 인류의 영원한 리더로서 자리매김 된 인물들은, 대체로 천하로서의 세계 그 자체를 경비한 인물들이다.

필자는, 살아온 날들을 회상할 때면, 필자보다 먼저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처럼, 지나온 삶에 대한 온갖 회한이 먼저 찾아든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회한으로나 기억되는 과거의 시절로, 굳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별로 없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하튼 삶이란,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 교리적 바탕으로 삼는, 온갖 상상과 갖은 이론으로써 꾸며 둔 죽음 이후가 아니라, 다만 ‘지금 여기’의 일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 일이 어떠한 일이든,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 곧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죽음에 대해서 묻는 ‘계로(季路)’에게, “삶도 미처 알지 못 하는데,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대답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 삶의 청춘보다는 삶의 황혼이 좀 더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세월이 그만큼 흘러버린 것이다.
어지간히 살아낸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다. 시나브로 세월이 금세 흘러버렸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좋은 인연[善緣]’은 선연으로, ‘나쁜 인연[惡緣]’은 악연으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게도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자잘한 삶을 살아내는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자잘한 ‘종심소욕불유구’를 실현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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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여행 (장편소설)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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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소한의 것 7
2. 크눌프Knulp와 시시포스Sisyphus 41
3. 중독(몰입)의 시대 69
4. 바람으로 지은 집 93
5. 여행자의 기운생동氣韻生動 111
6. 감정이입empathy 149
7. 검은 겨울 203
8. 홀로 가는 길 233
9. 추락하는 것들 257
10. 산울림이고 싶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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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여행자의 동아시아 여행기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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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느린 여행길





인생은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는 여행길이라는 말들을 쉬이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홀로 가는 이는 드물다. 혼자서 가는 인생길은 어울려서 가는 인생길보다 몇 갑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홀로 떠나는 코뿔소의 외뿔과 같은 인생길을 애써 외면한다. 애당초 그러한 인생길은 실현될 수 없으며,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 양 지레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길은, 고통스러운 고립의 소외가 아니라, 여유로운 고독의 동반이다. 막상 그러한 길을 걸어본 자는 안다.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여행하는 자는 여행자다. 떼로 무리지어 다니며 여행하는 자는 관광객이다. 여행자는 결코 관광객의 틈에 끼일 수 없다. 그리고 관광객은 결코 여행자일 수 없다.
그나마 관광객으로서 관광여행이나마 떠나볼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인 축에 든다. 관광여행마저도 훌쩍 떠나볼 수 없는 것이 서민대중의 삶이다. 실로 그런 것이 인생이다.

먼 옛날 노자老子는, 삶의 여행을 마치고 함곡관函谷關을 넘어서며, 인류의 지혜서인 도덕경道德經을 남기고서는 홀연히 영원한 여행길에 올랐다. 공자孔子는, 평생을 혼탁한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상갓집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여행길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탐사여행이나,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의 음유吟遊여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Jesus와 사도 바울Paul의 전도傳道여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여행은 전 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일생 동안을 여행길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 안에는 숱한 여행자들이 등장한다. 그런 여행자들의 여행길을 역사는 기억한다. 그것은 그들의 여행이 누구나 쉬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년. 한 젊은이의 여행이 시작된다. 현재에 이르도록 무수한 인류를 아주 느린 여행자로서의 사색과 고뇌 속으로 이끌어 가는 싯다르타Siddhārtha의 여행이다.
붓다인 싯다르타의 여행은 참으로 웅건하며 현묘한 여정이었다. 그래서 여행길의 끝자락에서 싯다르타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buddha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래의 붓다들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길에 나선 여행자로서의 삶은 그들을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자가 그러한 궁극의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여행길을 두려워한다. 여행자로서 살아내는 일을 꺼린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모른 척 여행의 불안으로부터 정착의 안정 속으로 도피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늘 여행에의 동경을 지닌다. 그러한 동경은 인간인 탓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본성이다.

많은 이들은 삶이야말로 가장 빠른 여행길이라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이 글을 적어내고 있는 여행자 역시 여전히 유년의 데미안Demian을 추억하고는 있지만, 이미 청춘의 시절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군가는 감옥으로 가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간다. 누군가는 삶으로 가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간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여행길을 나선다. 새 날을 맞으며 새로이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행자는 늘 여행길을 나선다. 매 순간 여행길은 여행자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실현된다.

찰나를 담아내는 사진처럼 여행하는 일은 순간의 미학이다.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여행자가 될 수 없다. 매 순간 여행길에 나서는 자는 매 순간을 체험한다.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다. 이러한 사유思惟와 체험體驗의 차이는 사진의 비유로써 쉬이 설명될 수 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사유는 잘 찍은 사진이고 체험은 좋은 사진이다. 그러다보니 잘 찍은 사진과 좋은 사진의 차이를 아는 자는 시나브로 여행자가 된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홀로 떠도는 여행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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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예술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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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장자의 예술철학에 관한 이해 9
1. ‘장자’에 관한 일반적 이해 13
2. ‘장자’에 관한 예술철학적 이해 31

2장. ‘부득이(不得已)’에 관하여 49
1. ‘부득이’의 사회적 원인 55
1) 언어와 지식 59
2) 외물(外物)과 욕망 69
3) 생사(生死)와 감정 81
2. ‘부득이’의 문화적 원인 91
1) 상대성과 도덕성 93
2) 유용성과 무용성 103
3. ‘부득이’의 상황 113
1) 빈곤과 불행 117
2) 질병과 장애 129
3) 경쟁과 전쟁 137

3장. ‘소요유(逍遙遊)’에 관하여 149
1. 미학적 ‘소요유’ 153
1) ‘마음의 정갈함[心齋]’과 ‘모두 잊음[坐忘]’ 157
2) ‘만물의 변화[物化]’와 ‘생명을 기름[養生]’ 169
3) ‘만물의 시초에서 노니는 마음[遊心於物之初]’과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즐거움[至美至樂]’ 181
4) ‘울타리 바깥에서 노닒[遊外]’과 ‘조짐조차도 없는 노닒[遊 无朕]’ 193
2. 예술적 ‘소요유’ 205
1) ‘칼의 노닒[遊刃]’과 ‘스스로 체득함[自得]’ 207
2)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음[無待]’과 ‘순박함으로 돌아감[復 歸於朴]’ 215
3) ‘신의 경지[疑神]’와 ‘늘 그러한 자연스러움[常然]’ 223

4장. ‘부득이’와 ‘소요유’의 ‘동시적 변화성’ 233
1. ‘동시적 변화성’의 철학적 기원 241
2. 예술적 사유방식으로서 ‘동시적 변화성’ 251
3. ‘장자’가 추구하는 ‘동시적 변화성’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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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되지만

도서정보 : 김문성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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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한다

공감하고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습관이 있고 습관은 말이나 몸짓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상대의 언어나 표정에 나타나는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되는 커뮤니케이션은 심리학이라는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되어 왔다.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는 말뿐만 아니라 표정, 몸짓, 눈짓 등이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소지품까지 당자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이 핵은 말, 몸동작, 소지품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걸쳐 상대방의 심리를 분석하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지침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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