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서정보 : 정희진, 권김현영, 루인,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성폭력 피해 고발을 어떻게 사회 변화로 이끌 것인가?
한국 사회 강간 문화를 낱낱이 해부하는 페미니즘의 언어
“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는 한 페미니스트 시인의 말은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특정 집단 내 성차별 · 성폭력을 고발하는 ‘○○계 내 여성혐오/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 ‘꽃뱀’이라는 비난과 무고죄와 명예 훼손의 협박에 시달리며 ‘무결한’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만 피해와 가해라는 말이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무엇이 성폭력인가? ‘2차 가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 판단하는가? 성폭력 문제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성 문화(性文化) 연구 모임 ‘도란스’의 세 번째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관한 주된 쟁점들을 ‘피해’와 ‘가해’ 개념을 중심에 두고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이상이다.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드러내는 것, 성폭력은 ‘누구’ 혹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목표이자 이 책의 목표이다.
피해자가 직접 나와 말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상사태이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직접행동주의는 매우 힘이 세지만, 그만큼 당사자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준다. 모든 피해가 공론장에서 잘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침묵도 더는 답이 아니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줄 각오를 하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진 정치인은 성희롱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었던,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은 정작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당시 한 기자는 나에게 대학생들이 기자를 지망하면서도 용감하게 나서지 않았다며 기자로서 이들의 자질을 의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비난하고 고립시키는 기제는 이토록 다양하다.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25쪽)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거듭 강조하건대, 피해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약자가 겪은 피해가 그대로 인정된다면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며 무엇이 피해인지, 이 문제에 관한 복잡한 논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남성들은 피해 의식마저 남성 문화의 일부로 ‘소유’하고 있다. 가해자의 피해 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210~211쪽)
들불처럼 일어난 피해 고발의 목소리가
혁명적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2018년 1월, 한 여성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이후 한국 사회에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문화예술계, 법조계, 정치계, 학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피해 고발이 이어졌다. 그런데 검찰 내 성추행 고발 직후 한 남성 시사평론가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일을 다루면서 “한국에는 미투 운동 같은 게 없었죠?”라고 말해 거센 비난이 일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고” “오만하다”며 분노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과 공론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2003년부터 매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2009년 배우 장자연 씨가 남긴 유서,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 2016년 10월 인터넷상에서 일어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7년 11월 한샘 사내 성폭행 피해자의 고발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되어 왔고 실제로 크고 작은 법적,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투’가 있었다.
그런데 성폭력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일이 이렇게 많았는데도 어째서 여전히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일까? 지금 이 폭발적인 ‘미투’ 운동을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2018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이 뜨겁고 민감한 사안을 더 깊이, 더 멀리 보려 한다. 이 책은 유례없는 페미니즘의 대중화 시대를 맞아 성차별 ․ 성폭력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상의 정치로 지속시키기 위해 “미투 운동 이후”를 생각한다.
특히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권김현영)와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여성 우선’을 외치는 페미니즘 일부의 ‘정체성의 정치’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를 성찰한다(정희진).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권김현영)는 성폭력 피해자의 직접행동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현실과, 피해자의 ‘말하기’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필자는 성폭력이 본질적으로 이성애 중심주의와 젠더 권력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성차별 ․ 성폭력 문제의 밑바탕에 뿌리 깊은 ‘강간 문화’가 있음을 여러 사례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나아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반(反)성폭력 운동을 돌아보며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더 사유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등장한 ‘2차 가해’라는 용어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이 오히려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연대자와 지지자들을 위축시키는 한계를 드러냈음을 지적한다.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자를 지지하고 연대해 온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이 쓴, 현재 진행 중인 고투의 기록이다. 이 글에는 피해 고발이 공론화된 이후 현실에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연대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증언과 지지의 말들을 모아 책을 출간하고, 펀딩을 통해 피해자들을 법률적 ․ 의료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연대자의 자격, 지지와 연대의 방식 등을 두고 숱한 논란이 벌어져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 글은 연대자의 위치를 끝까지 질문해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토론과 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다.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한채윤)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송하고 ‘아웃팅’을 끔찍한 범죄로 보는 시각에, 소수자를 ‘피해자’의 위치에 가두고 길들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밝힌다. 필자는 먼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커밍아웃’과 “ㅇㅇ는 동성애자다”라고 폭로하는 ‘아웃팅’이 사회에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피면서 두 개념에 관한 상식을 뒤집는다. ‘커밍아웃’을 당당함과 용기의 표식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아웃팅’이 범죄가 되고,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너무 드러내지 말고 살아가라는 사회적 압력(‘커버링’)의 요구에 저항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정작 동성애자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루인)는 한국 최초로 ‘패닉 방어’를 단행본에서 다룬다. 이 글은 ‘피해’와 ‘가해’라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패닉 방어’란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 정체성 혹은 성 정체성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므로 자신의 행위는 ‘패닉’의 결과로 일어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뒤섞는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혐오나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이다.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니까, 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성폭력이 일어난다.” “여성이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과도하게 권리만 주장해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같은 식이다.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밝히고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놀랄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피해 여성들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일명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불린다. 쉽게 말하면 트랜스젠더 여성(특히 mtf, 즉 남성에서 여성으로)을 배제한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우선순위는 사회 정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필자는 정체성의 근거가 피해에 머무르게 되면, 여성들은 고통을 경쟁하고 피해를 자원으로 삼는, 남성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 수행 주체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이 목소리가 되어 나올 때
-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일이 확실히 늘어났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물적 조건과 소셜네트워크(SNS)라는 뉴미디어를 기반 삼아, 인터넷 의사소통에 능숙한 여성 대중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직접행동에 나서면서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피해 경험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상황이 나아진 것일까? 하지만 “피해자의 용기 있는 직접행동으로 인해 겨우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도, 그 이후에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가해자들이 피해 사실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여론을 만드는 데 성공하거나, 연이은 폭로로 인해 피로감만 쌓이고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 권김현영은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폭력을 ‘피해자’와 ‘가해자’만 관련되는 ‘협의의 당사자성’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을 것인가?”
‘2차 피해’란 무엇인가
성폭력 2차 피해는 성폭력 문제를 여타의 폭력과 구분해주는 핵심적인 문제다. ‘2차’라는 뜻의 ‘second’는 ‘social’과 혼용된다. 성폭력 2차 피해는 다른 말로 ‘사회적 강간(social rape)’이라고 불린다. …… 피해자가 의료 조치 과정에서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을 듣거나, 언론이 사실 관계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입장만을 전달해 피해자를 사실상 꽃뱀 취급 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사건 자체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 역시 모두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즉, 2차 피해란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31, 33쪽)
성폭력은 성별 권력의 문제다
성폭력은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이자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남자도 성폭력을 당한다거나, 성희롱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말로는 성폭력이 왜 성별 간 권력의 문제이며, 이성애 중심주의의 문제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남자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거나 여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남자와 남자 사이에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만했다.”고 비난하는 문화는 없다. 여자 직장 상사의 성적 괴롭힘을 고발한 남자 직원은 남성성에 대한 고투와 낙인이 있을지언정 “큰일 하는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는다. (33~34쪽)
왜 여전히 피해자는 말하기 어려운가?
성폭력을 당해도 그것이 성폭력인지 몰랐거나, 성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피해를 피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피해가 있었다’는 발견의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의 조건이 변화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말할 권리가 ‘민주화’되고, 말하는 주체가 필요에 따라 익명으로 감춰질 수 있는 조건의 변화는 말할 수 없었던 상황일 때보다 말하는 주체에게 ‘정당화의 의무’를 더욱 엄격하게 부과한다. 순결 신화의 규범적 힘은 약화된 반면, 남성 사회의 꽃뱀 공포는 더욱 강화되었다. 왜 지금 말하는지, 다른 목적은 없는지, 당시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경찰에 가지 않고 여론의 힘을 빌리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피해자의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인지 등을 가려내려는 여론의 검증은 예전보다 혹독하다. (49쪽)
“강간은 섹스가 아니다” -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
강간 문화란, 남성에게 성적 공격성을 장려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지지하여 성적 폭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일련의 신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년 문화에서 강간은 정상적인 소년이라면 흔히 겪는 성장담으로 격려되어 왔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시인사이드의 대학 갤러리에서는 “전쟁 나면 〇〇학과의 ××를 강간하고 싶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게시판 문화는 대학 내 익명 게시판과 단체 채팅방으로 이어졌다. ‘강간’이 남자끼리 즐기는 짜릿한 놀이 문화의 일종으로 ‘정상화’된 것이다. …… 강간 문화는 강간에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계속 퍼뜨리며, 섹스와 강간을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강간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남성들은 ‘강간 문화’라는 언급 자체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고 남성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항의한다. (58, 59쪽)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폭력 관련 법 제도를 제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해 있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술을 마셨거나, 밤늦게 다녔거나, 가해자와 아는 사이였거나, 사적 공간에 드나드는 것을 허용했다면 말이다.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내가 거기를 왜 갔을까, … 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상대의 말을 믿었을까.) 성폭력 피해를 고소하지 않는다. 당사자 간의 법적 분쟁을 넘어서, 무엇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27~28쪽)
‘2차 피해’라는 말과 ‘2차 가해’라는 말
‘2차 가해’는 점차 ‘2차 피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대신, “2차 가해자는 〇〇〇.”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전자는 2차 피해라는 용어에 내포된 개념과 사례에 집중하게 하고, 후자는 누가 가해자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 즉, 2차 가해라는 말은 가해를 저지른 행위자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앞서 설명한 대로 민주노총처럼 공동체의 규약에 대한 충성도(?)가 높거나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규제 효과가 있다. 토론을 하는 것보다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조직이라면 ‘2차 가해’라고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런 곳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그들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끈끈하게 하며 피해자를 고립시켰다. (42쪽)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사회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에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채무자의 독촉처럼 취급하면,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피해자는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말을 의무로 생각하자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 더는 무엇인가를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70쪽)
‘말하기’ 이후, 연대와 책임에 대하여
-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2016년 가을, SNS에서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한 사람의 피해 고발 글을 읽은 또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이 이어졌다. 10여 명의 남성 소설가, 시인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언론은 문단 내 성폭력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했고, 문예지들은 처음으로 이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말하기’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고발 직후 ‘자숙’을 말하던 가해자들은 곧 서로 연대했고 가해 사실 인정을 번복했다. 가해자들은 본격적인 ‘반격(backlash)’을 시작해 피해 고발자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불리며 비난받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위로받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피해를 알리고 나서 상상도 못했던 싸움을 해야 했다.
이 글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기록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비리가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고 은폐될 수 있는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 그런 사회에서 남성 권력이 폭력을 통해 실행되고 정당화되는 과정, 피해를 공론화한 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문단’이라는 가부장적 사회
회사나 학교 등의 조직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폭력 상담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온 것과 달리, 이러한 해결 기구가 없는 문단의 기괴한 구조가 그 민낯을 드러낸 것이 바로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신고할 곳이 문단 내부에 없으니, 피해자들은 매번 개인으로서 법적 투쟁을 했고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무사히 문단에 복귀해 왔다. 피해자는 문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삭제된 여성 문인들을 암암리 모르지 않기에, 피해자들은 더더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81쪽)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 발화, 싸움, 연대의 기록이자 피해 고발자를 지지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피해 고발자의 증언 글, 여성 작가들의 자기 성찰의 글을 한데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그 수익금을 피해 고발자들의 법률 비용과 의료비 지원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 펀딩을 시작한 지 2주 후, 프로젝트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SNS에서 ‘E’가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E는 5년 전 데이트 폭력 가해자로 출판사 봄알람(텀블벅 펀딩 진행과 단행본 제작 및 출간을 맡은 출판사)의 구성원을 지목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봄알람 구성원은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했고 피해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이행했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논란과 비난도 뜨거웠다. (87, 90쪽)
연대자의 자격
우리(준비팀)는 ‘무결’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이 운동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단이라는 네트워크 안에 함께 있었던 작가로서, 성찰을 하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여성 문인’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명단에 왜 저 사람의 이름이 있는지” 그 자격을 따지는 제보가 이어졌다. 준비팀은 명단 참여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 참여 여부는 자발성에 맡기겠다는 원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있는가, 저 사람은 왜 명단에 없는가. 한 치의 흠결도 없는 도덕적 순결함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 프로젝트 참여자에 대한 가혹한 도덕적 검열이 계속되었다. (97~98쪽)
연대와 책임
봄알람 구성원은 퀴어 담론의 피해와 가해에 대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고통받았다. 흡사 연좌제처럼 봄알람 출판사 전체가 가해자로 지목되었으며,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파트너였던 준비팀도 가해자라는 프레임에 함께 갇히게 되었다. 가해자 프레임 속에서 준비팀의 모든 조치와 행위와 입장은 반성 없는 폭력 행위이거나 자기 합리화, 혹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취급되었다. 연대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다. 우리는 ‘누가 가해자인가’보다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했어야 했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에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했어야 했다. (108~109쪽)
공론장으로서 SNS를 생각하다
트위터 공론장에는 누구에게나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반복적으로 발언하며 발화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부각되는 반면,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유령처럼 지워지고 말았다. 입장문과 사과문이 빠르게 오가는 공론장 특유의 속도 때문에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제되는 경우도 있으며 섬세한 논의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을 망각할 위험도 컸다. 성폭력 없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모두의 목적이 희미해지도록 모두가 방치한 셈이 되었다. (113~114쪽)
‘가련한’ 약자, ‘순결한’ 피해자이기를 거부한다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소수자는 사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약자이자 피해자인가? 왜 사회는 소수자가 당당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지배 규범에 거슬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자는 어떻게 세상에 맞서야 하는가?
‘커밍아웃’을 개인의 용감한 결단으로 만들수록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기회를 놓치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자임이 폭로되는 ‘아웃팅’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이런 ‘아웃팅’을 방지하려고 애쓸수록 동성애자의 존재는 더 ‘위험’해진다. 동성애자라고 너무 유난 떨지만 않는다면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커버링’은 교묘하게 동성애자를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길들인다. 한채윤은 이 글에서 ‘커밍아웃’, ‘아웃팅’, ‘커버링’ 문제를 통해 동성애자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순적 상황을 분석해보려 한다. 또 낙인찍힌 자들에게 더 빨리 솔직하게 말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말하면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사회적 성찰을 요구한다.
벽장 속에 누가 살고 있는가
커밍아웃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비밀을 밝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커밍아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 그 숨겨진 구조를 밝히는 단어다. ……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에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 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 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놓았기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129, 132쪽)
커밍아웃에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다
내가 커밍아웃 후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그들이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지, 나의 커밍아웃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할 때 우리는 개인이 감당할 몫과 나를 포함하여 사회가 감당할 몫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각각의 몫의 경계를 구분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나거나 주변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거나 해고나 사퇴 권유와 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개인이 겪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실패다. 피해를 입은 이들 곁에 서서 함께 싸워 나갈 이들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공동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135~136쪽)
‘아웃팅은 범죄’라는 인식
커밍아웃이든 아웃팅이든 드러나는 것은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커밍아웃이 우리 존재를 억누르는 벽장의 차별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 숨겨야만 한다고 강요받는 낙인을 오히려 드러내어 자유를 얻는 전략임을 상기할 때 아웃팅 역시 마찬가지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커밍아웃을 원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아웃팅 역시 원하지 않을 것이다. …… 아웃팅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를 막아야 하는데 ‘아웃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은 아웃팅 자체를 범죄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웃팅을 ‘당했다’는 말은 곧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 되었고, 아웃팅을 ‘시켰다’는 말은 가해자를 지목하는 일이 되었다. (138, 139쪽)
커버링, 티 내지 말라는 가장 교묘한 억압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노출이 심하다는) 비난은 성적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사회를 잘 설득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참가자들 때문에 성적소수자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비난한다. 건전한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동성애자가 아무리 단정한 옷차림을 한다고 해도 건전한 존재로 칭송받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건전이라는 잣대가 이미 이성 간의 사랑, 결혼, 성생활로 짜여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인 채로는 건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이 동성애자에게 ‘건전’을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자와 유사해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152쪽)
‘순결한’ 피해자의 위치를 거부하며
이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성애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이성애자 중심의 질서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동성애자의 자리를 만들자고 하는 모든 요청들을 거부해야 한다. 같아지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무리 없이 섞이고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남들과 ‘다른’ 나로서 살아야 한다. 다르다는 ‘티’를 일부러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티’가 저절로 나는 것이다. 우리는 순응하라고, 적당히 넘어가라고, 너무 유난 떨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한 점 부끄럼 없고 당당하고 무결해야만 인정받는 피해자, 상처받아 웅크린 가련한 약자, 주류의 배려와 관용을 기다리는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거부해야 한다. (155쪽)
어떤 폭력의 이유
-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2010년 5월 말, 대구에서 트랜스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언론은 가해자가 “(4년여 전 알게 된) 자신의 교제 상대가 트렌스젠더인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격분해 살해”했으며 “성별을 알 수 있는 접촉은 갖지 않아 상대방이 여장 남성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며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가해자가 내세운 논리는 전형적인 ‘트랜스 패닉 방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루인은 이 글에서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한 가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전략인 ‘패닉 방어’를 다룬다. ‘패닉 방어’는 혐오 폭력과 혐오가 발생하는 구조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사람이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라고 먼저 밝히지 않은 것이 상대에게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구타, 감금 혹은 살해를 유발할 정도의 ‘잘못’인 것일까? 피해자가 사라지면 혐오도 사라지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특정한 속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혐오가 발생하지 않을까? 한편, ‘패닉 방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인 ‘피해자 유발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교묘하게 뒤섞는다.
혐오 폭력,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피해자 유발론’
‘피해자 유발론’은 여성 혐오나 성폭력을 둘러싼 의제에서 특히 많이 거론된다. 예를 들면 “여학생의 학교 성적이 좋아 남학생의 손해가 크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식이다. 이것은 가해자 자신의 범죄 사실, 혹은 특정 집단의 무능력 따위를 그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타인으로 인해 ‘내’가 부당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인식이다. …… 페미니즘의 오랜 반(反)성폭력 운동은 피해자 유발론이 가해자를 옹호함으로써 사회의 통치 체제(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161, 162쪽)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 - 이성애-남성성과 ‘게이 패닉 방어’
재판정에서 게이 패닉 방어 논리를 펼치는 가해자들 역시 바로 지배 규범적 남성성을 중시하고 강요하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호모포비아를 동원해 자신을 방어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이 남성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은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자신이 게이로 오해받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이기에 가해자 중 한 명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나는 게이와 섹스를 할 수 없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 이성애자 남성성을 남성의 유일한 남성성 실천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가 없다면 패닉 방어 전략은 재판 과정에서 수용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애당초 전략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168, 169쪽)
“나야말로 진짜 피해자” - ‘트랜스 패닉 방어’와 기만의 논리
트랜스 패닉 방어는 가해자 남성이 연애나 성관계의 대상으로 ‘여성’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성이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았으며 음경 형태의 외부 성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패닉 상태에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 트랜스 패닉 방어 전략은 외모를 통해 타인의 섹스(혹은 외부 성기 형태)와 젠더(혹은 겉으로 인지되는 이원 젠더 범주)를 즉시 그리고 어떤 실수 없이 파악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언제나 등치한다는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 바로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 여기서 mtf/트랜스여성을 살해한 많은 가해자가 사실은 “나야말로 기만당하고 사기당한 진짜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 (174, 177, 178쪽)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
패닉 방어 혹은 피해자 유발론은 피해자를 처벌하고 가해자를 구제하며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특히 패닉 방어와 피해자 유발론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살인 사건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섞는다. 무엇이 가해이고 무엇이 피해일까? 사회적 인식에 따라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무고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와 피해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역학 관계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해와 피해를 뒤섞는 작업이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혹은 지능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지배 규범,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비난과 부정적 인식이 공모해 철저하게 규범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다는 점이다. (199~200쪽)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생각하다
-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언제나 연대의 정치였다. 그런데 이 연대의 정치를 부정하는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이들은 피해 여성의 현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며 “여성 우선”의 정치를 주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서 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으며 ‘나중’으로 미뤄졌다. 정희진은 “여성 우선”을 주장하며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나중에”를 외치는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정한’ 여성인가? 가장 심각한 ‘피해’는 누가 정하는가? 여성의 정체성을 ‘피해자’로 한정하는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희진은 이 글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피해’,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개념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모든 여성은 피해자”라고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성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성주의에 불리한 전략임을 밝힌다. 나아가, ‘여성 우선’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감과 연대에 토대를 둔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피해’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인류 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 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208, 211쪽)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
정체성의 정치로서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에 차이를 제기함으로써, ‘인간=남성’이 아님을 주장한 급진적인 정치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여성이 여성에게 동일시하는 문화가 없었을 때,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성의 정치는 억압받는 개인이 억압받는 약자의 집단에 자신을 ‘소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종의 정치적 귀향으로서 ‘노예’에게도 집이 있다는 (잠시지만) ‘안도의 정치’인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이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나 가부장제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은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민주화하는 과정을 낳는다. (216쪽)
‘피해’를 여성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는 것
삶도, 투쟁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과의 차이를 깨달은 ‘다음 날’ 여성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차이와 이로 인한 문제를 남성적인 방식으로 봉합하기 시작하면, 정체성의 정치는 타락하기 시작한다.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 걸려든다면, 즉 피해는 여성의 본질이며 여성은 피해자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또다시 보편성(uni-versal)으로 묶이게 된다. 이것이 페미니즘 사상사에서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이 그토록 비판받았던 이유이다. (218쪽)
모든 여성은 ‘여성’으로서 동일한가?
여성들은 당연히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여성인 동시에 인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기보다는 흑인이거나 노인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젠더 시스템은 1) 개인을 남녀로 분리하고 2)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며 3) 같은 성별끼리는 같은 속성(남성성, 여성성)을 공유한다는 규범을 전제한다. 이것은 차별을 위해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가부장제가 인간을 필사적으로 남녀로 구별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논의한다. “차별은 나쁘다. 하지만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라는 평등주의는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차별이라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215쪽)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된다. 여성은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과 유혹을 느낀다. ‘피해자다움’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중요한 성 역할이다. 물론, 피해자화는 여성의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은 피해자성을 자원으로 삼거나 그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성이 타자화, 피해자화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온존한 생존이 가능했을까. …… 그렇지만 피해자성을 중심에 둔 페미니즘은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보고, 나의 고통을 타인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권리’를, 여성은 ‘고통’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사회적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이다. 타자와 연대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 세력이 원하는 피해자가 될 것인가. (224~225쪽)
구매가격 : 8,780 원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서정보 : 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 2023-07-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에 쫓기며
여성 혐오로 불안을 달래는
한국적 남성성에 대한 전방위적 탐구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보편’이자 유일한 ‘인간’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을 비하함으로써 성립된다. “계집애 같다” “너 게이냐?” 같은 말이 남자들 사이에서 욕으로 쓰이는 것은 여성이나 퀴어가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로 인정받으려면 남자다운 몸, 남자다운 성격, 남자다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 남자다움의 신화가 깨지고 있다.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가부장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젊은 남자들이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일베’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사이버 마초로 변신해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은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지만 전통적인 지위는 유지해야겠다는 비합리적 사고. 이런 어긋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주의에 필요한 새로운 전략은 무엇인가?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의 두 번째 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는 각기 다양한 지적 배경에서 당대 한국 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필자들은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남성다운 몸 ․ 심리 ․ 문화는 현실이 아닌 규범이자 신화임을 밝힌다. 일제 강점기 이광수와 김유정과 이상 같은 남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식민지 남성성’의 기원을 확인하고, 그동안 남성성의 목록에서 지워졌던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female-to-male)의 남성성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고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남성성의 위기와 가부장제의 쇠퇴에 관한 담론은 페미니즘의 주요 관심사이다.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심화된 결과, 근대적 남성성의 핵심인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의 역할은 불가능해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 경제는 외벌이로 지탱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들들은 이제 더는 여자를 먹여 살리는 것을 남자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남성으로서 성 역할이 점점 불가능해졌는데도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련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 <들어가는 글>(권김현영) 중에서
‘한국 남자’는 어쩌다 욕설이 되었나?
― ‘남자의 위기’ 담론과 ‘남자다운 남자’의 허상을 넘어,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를 분석하는 새로운 인식론과 방법론
인류 역사상 남성은 언제나 인간 보편이자 ‘일반’이었고 여성은 항상 보편의 ‘특수’로 존재해 왔다. 여성은 ‘여비서’ ‘여교사’ ‘여기자’처럼 ‘여성’이라는 특수의 위치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남성은 노동자, 시민, 유권자, 청년으로 불리며 보편을 대표해 왔다. 보편이 아니기 때문에 잊히고 묻힌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여성성 연구의 한 방식이라면, 남성성 연구는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바로 그러한 남성성 연구, 특히 한국 남성성 연구의 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6명의 필자들은 역사와 문화를 넘나들고, 문학과 철학, 인류학을 바탕 삼아, 한국적 남성성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 전통적 남성성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분열하는 남성들의 모습까지 한국 남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나아가 보편이 아닌 차이로서 ‘남성성들’의 목록을 다시 설정하고자 한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정희진)은 이른바 ‘남자답지 못한 남자’가 여성을 더욱 억압하는 종속적(주변적)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시론이다. 여기서 정희진은 먼저 근대 자유주의부터 후기 구조주의까지 ‘남성성’을 분석하는 기존 여성주의 이론들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이론으로는 한국적 남성성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이자 문화 권력으로서 ‘식민지 남성성’에 주목한다.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의 성격을 ‘식민지 남성성’으로 규정하는 정희진의 글에 이어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에서 바로 그 ‘식민지 남성성’의 역사적 기원과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별 이분법적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식민지 남성의 위치를 고찰한다.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루인)은 세계사와 20세기 한국사를 넘나들며 ‘남자다운 몸’, 즉 음경을 중심으로 한 신체적 ‘남성성’의 규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 ‘근대 남성 신체 발명기’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산업 발전과 군국주의 기획의 일환으로서 ‘남성성’이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것은 징병 신체 검사의 항목들과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억압에서 잘 드러난다.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엄기호)은 신자유주의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한국적 남성성의 양상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분석한다. 성차별적 현실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남자도 피해자라며 항변하고 스스로 ‘찌질함’을 내세우는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고, 그러자 이들을 비판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성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한채윤)과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준우)는 흔히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는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남성성’의 실체를 거꾸로 재구성하게 도와준다. 한채윤은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거나 선망해서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핵심에 남성성은 남자만 소유한다는 관념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한다. 한채윤의 글이 ‘여자의 남성성’을 설명한다면, 준우의 글은 ‘평범한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남성의 욕망을 분석한다. 특히, 준우의 글은 다섯 명의 트랜스남성들과 심층 면접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의 언어를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과 한국의 남성성에 대하여
남자는 어떻게 ‘남자다움’이라는 속성, ‘남성성’을 체화할까? 한국 남성과 미국 남성의 ‘남성성’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왜, 어떻게 다를까?
이 글에서 정희진은 권력 관계이자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의 의미를 살피고 서구 여성주의 이론의 남성성 연구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여성주의 이론으로는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의 남성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자신을 ‘강대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동시에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로 여기는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고찰 없이는, 성 평등을 두고 한국 남성들이 보이는 전반적인 문화 지체 현상과 온라인의 혐오 문화를 제대로 분석하고 논의할 수 없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말할 것도 없이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속성(‘합리적인’, ‘감성적인’…)은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성별을 불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성다움/여성다움이라는 표현을 수시로 사용하지만, 그런 현실은 없다. 실재냐 부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임의적이라는 의미다. …… 여성주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위계와 차별을 주로 비판하지만 이는 비장애인, 성인, 이성애자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성별성은 정상성을 향한 욕망일 수 있다. 최근에는 분리 설치된 경우가 많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 많았다. 이는 성별 구분을 전제로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인간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43~44쪽)
‘남성의 위기’와 ‘여성 상위’라는 거짓말
어느 시대나 지배적 남성성의 핵심 요소는 앞 시대의 남성성과 겹치거나 재구성되고 재결합된 인용의 결과들이다. 남성 권력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를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boundary setting)을 의미한다. 각각의 남성성들은 상호 배반하거나 불일치하고 양립하지 못하는 것들이 모순적인 짝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남성성의 변화나 대체가 남성 권력의 쇠퇴나 변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시대에나 출몰하는 ‘남성의 위기’ 담론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남성성 중 하나가 다른 남성성으로 교체될 때 나타나는 남성 문화의 반응인데, 젠더 이분법에서는 이를 ‘여성 지위 향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남성 내부의 차이로 ‘대세’ 남성성의 이미지가 바뀐 것인데, 남성 사회는 이를 ‘여성 상위’라고 주장한다. (48쪽)
남성도 피해자일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한 남성은 ‘조작된 이미지’이므로 남성도 피해자일까? 요점은 피해자냐 피해자가 아니냐가 아니다. 남성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변명과 해결의 논리가 있다. 괴로운 일상의 원인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 때문인데, 여성들에게 문제를 전가한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는 남성 연대를 활용한다. …… 남성은 자신도 남성성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스스로 남성 문화를 바꾸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구의 경우 극소수이고 한국에는 없다. (55, 56쪽)
식민지 남성성 – 강대국 콤플렉스와 자국 여성 착취
한국 남성은 역사상 한 번도 외세와의 관계에서 한국 여성을 보호한 적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소유한 여자를 적에게 빼앗긴 자존심의 상처를 다시 한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나 구타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혹은 한국 여성에게 이러한 자신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강요한다.(많은 ‘군 위안부’ 여성들이 일제의 만행‘보다’ 해방 후 귀국하여 당한 가족 내 따돌림과 남편의 구타가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한다.) …… 식민지 남성성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성별과 정체성 등 존재의 모든 이슈를 강대국과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논리다. 미국을 대타자(the Other)로 설정하고 자신의 모든 문제는 그들 때문이라는 전가와 투사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다. (63, 64쪽)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 제국주의 남성성과 식민지 남성성의 위치
권김현영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남성의 ‘남성성’은 근대 전환기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에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남자다움이란 결국 ‘어떤 남자와 동일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에게는 동일시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국’이 사라졌으므로 본받을 ‘아버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스스로 새로운 근대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남성들은 피지배 상황에 놓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제국 일본의 남성성에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거나, 식민 지배 상황을 안정화하려는 제국 남성들과 공모해 일본 여성과 혼인을 꿈꾸거나, 식민지 조선 여성에게 기생해 살아가면서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권김현영은 이광수 · 채만식 · 이상 · 김유정 등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본다.
근대 전환기 식민지 남자들의 처지
식민지 조선의 소년, 청년, 혹은 ‘모던보이’들에게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모던보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식민지 조선 남자라는 위치는 조선의 아버지들과의 단절과 함께 근대 문물을 가져온 제국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각되고 각인되었다. 귀족의 기사도를 승계하면서도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규범 속에 다시 새겨 넣는 과정을 거쳐 아버지-아들 간의 적대적 동일시와 승화를 이루어냈던 서구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의 남성성은 어떤 것도 승계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78쪽)
1920년대 식민지 남자에게서 2017년 ‘한국 남자’를 보다
김유정은 1928년 일개 학생 신분으로 당대의 스타였던 박녹주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기행을 일삼는다. 해방 후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던 박녹주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유정의 구애 사건이 이상스러우리만큼 자세하게 장안에 요란히 퍼졌다며 의아해하는데, 그가 밝힌 김유정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 내내 섹스를 졸라대다가 끝내 거절하면 저주를 퍼붓고야 마는 ‘한국 남자’에 대한 ‘고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이다. (88, 89쪽)
“아아 님은 갔습니다” - 제국의 남성 앞에서 ‘여성’의 위치에 선 남자들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의 위치를 타자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여성의 위치를 점유하여 자신의 위치를 피해자로 정한 후, 피식민지 여자들을 피식민지 남자들을 위한 ‘자원’으로 만든다.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은 피해자이자 약자로서 위치를 점유하며 자신을 ‘여자만도 못한 존재’라고 자기 비하를 일삼는 습관이 있다. 여자에게 기생한다며 처지를 비관하는 피식민지 남자는 남자가 아닌 자, 즉 여자가 된다. 이때 이중으로 비하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자이다.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 “아아 님은 갔습니다.”라고 노래하면서 식민 상황에 놓인 남성들의 곤경을 숨기는 모습은 식민지 남성성의 핵심적 표상이다. 식민지 남성성은 자신을 여성화함으로써 식민주의자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점을 부인하고,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95, 96쪽)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 외과 의학과 군대를 통한 ‘남성’ 몸 만들기
루인의 글은 근대적 남성 신체가 발명되어 온 과정을 세계사와 한국적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두루 살핀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 유럽에서 외과 의료 기술을 통해 ‘남성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음경과 ‘남성 몸 되기’의 관계를 인터섹스의 경험을 중심으로 탐구한다. 인터섹스는 의료 규범상 여자의 몸이나 남자의 몸에 부합하지 않거나, ‘여성의 생물학적 특질’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질’이 섞여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병역을 위한 신체 검사가 ‘남성 몸 만들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것이 ‘남성성’을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인한다.
보편이 된 백인 남성의 몸과 열등한 몸의 발명
(젠더화된) 인종 발명과 인종 간 해부학적 차이의 발명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아프리카 부시족 여성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흑인을 비롯한 비(非)백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비백인이나 장애인과 같이 백인 남성과 ‘다른’ 몸을 쇼 무대에 올려 전시하던 그 시기에, 부시족 여성은 현생 인류로 진화하기 이전 단계의 인류로 전시되었다. 유럽인은 이 여성을 비유럽 지역의 ‘기이함’, ‘낯섦’, ‘미개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 차이를 발명하고 증명하기 위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의료 사기는 인종 차이를 해부학적 ․ 과학적 사실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기준과 규범은 백인 남성의 몸이(었으)며, 그 외의 몸은 과학적으로 ‘다른’, 열등한 몸이 되었다. (119쪽)
외부 성기로 증명하는 ‘남성의 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의료 기술, 의학의 기준을 통과한다. 흔히 진짜 여성 혹은 남성이라 불리는 젠더 범주 역시 출생 당시 의사의 승인을 거쳐 여성이나 남성으로 지정된다. 때로 인터섹스로 인지된다고 해도 서둘러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지정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해진다. 그러니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로 가공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내’가 외과 기술을 거치지 않은 ‘남성’이라면 이 말은 신생아일 때 의사가 ‘나’의 외부 성기 형태를 힐끗 본 다음 적절한 크기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남성’(혹은 젠더)이란 의학이 보증하는 남성인 동시에 생물학이나 의학을 통해 제대로 확인/검사하지 않은 남성/몸이다. (134, 135쪽)
군사 정권의 ‘국민’ 관리, 그리고 남성성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의 또 다른 주요 목적은 남성성 관리였다. 군인인 남성을 만들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주민 등록 제도를 시행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몸을 군인으로 승인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즉 어떤 몸이 국민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근대적 남성성을 재현할 수 있는지 가려야 했다. 주민 등록상 남성으로 분류되는 이들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제한된 이들만 군대에 간다. 즉 남성 내에선 특권층에서 배제되지만 남성/비남성 위계에선 특권적 지위에 있는 남성이 군대에 간다. 군 입대는 특권층은 아니지만 비남성도 아닌 위치의 남성을 표지하는 방식이다. (140~141쪽)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 ‘루저’와 ‘남성 페미니스트’의 탄생
2016년,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여성 혐오에 맞서 20~30대 여성들이 공론의 장에 나서자, 남자도 피해자라고 항변하는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찌질하다’고 고백하면서 이제 남자는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 남성들을 비판하는 또 다른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인권이라는 보편의 언어로 ‘찌질한 남성들’을 비판했다. 엄기호는 ‘찌질한 남성’과 ‘페미니스트 남성’ 둘 다 이전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라는 데 주목하고 두 남성성의 등장 배경과 의미를 탐구한다.
기득권자 대 피해자
과거라면 자신이 찌질하다는 것을 감추려 하거나 찌질함마저 남성다움(manliness)의 일부로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찌질함을 남성다움의 일부로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이 시대의 보편적 남성성(masculinity)이라고 정의하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 이들이 남성은 이제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의 남자라면 자기가 여자에 비해 손해를 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남성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라 감추겠지만 자신들은 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들은 과거의 남성 기득권자 마초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다. (157~159쪽)
평등의 문 앞에서 엎어지다 - ‘찌질이’라는 속물
연애든 결혼이든, 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이미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다. 나누지 않는다면 관계는 유지될 수 없으며,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한 그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배분하고 함께 짊어지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약하고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인정이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성의 거세, 혹은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머뭇거리고 웅얼거리고 투덜거리거나 ‘거래’를 요구 ― 내가 모든 여행 경비를 제공했으니 당일에 올라가자고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경제와 섹스를 교환할 것을 요구하는, 지루할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 말이다. ― 하는 것으로 만회하려다가 찌질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171쪽)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묻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키려 한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 정희진과 권김현영에 따르면 여성주의는 남성들이 독점한 보편성의 언어에 저항하며 지식의 맥락성과 국지성을 강조한다.(물론 이때의 맥락성과 국지성은 국민국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여성주의는 보편과 쉽게 화해할 수 없다. 보편의 헤게모니와 당파성을 질문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183, 184쪽)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 레즈비언의 ‘남성성’은 가능한가
한채윤의 글은 레즈비언의 남성성에 주목하여 남성성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남성 혐오증이 있어서 남자 대신 여자를 사귀는 여성이거나, 남자를 강하게 선망하여 남자 흉내를 내며 다른 여자와 사귀는 여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정상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이성애를 하는데, 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고 선망하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인해 본능을 거스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채윤은 레즈비언의 남성성 분석을 통해 이성애 성 규범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남성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선망이라는 착각
레즈비언이 남성성을 모방하거나 혐오한다는 분석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첫째, 원래 여자에게 남성성은 없다. 남성성은 남자만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성성이 없는 여성은 바로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끌린다. …… 그런데 선입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질문해보면 비논리적인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자에게는 남성성이 정말 없을까? 아니면 없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여자에게 남자만큼의 남성성이 있다면 그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여자는 왜 굳이 남성성의 결핍을 메꾸려고 하는가? (188~189쪽)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남성성은 생물학적 성별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거나, 자신의 성별을 남성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남성성이 저절로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부치(butch)와 트랜스남성은 남성성이 얼마나 쉽게 복제 가능하고, 변용 가능한지, 그래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며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어도 남성성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섹스와 젠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199쪽)
여자와 남자, 동성애와 이성애… 모든 이분법을 넘어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도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성애를 일컬어 동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도 정상임을 설명하려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순간, 이성애는 아무런 검토나 증명 과정 없이 ‘정상’이 된다. 그래서 동성애와 이성애의 유사함이 강조될수록 오히려 동성애자의 실체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 차별은 차이로 인해 자연 발생 하는 것이 아니며, 평등은 그 차이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209, 210쪽)
적정량의 남성성은 얼마만큼인가?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렇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난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까? (212쪽)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 트랜스남성의 ‘보통 남자’ 되기
준우의 글은 트랜스 남성 다섯 명을 직접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트랜스남성의 남성성을 고찰한 것이다. 필자는,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가진 트랜스남성들 중에 한국 보통 남성들의 남성성, 이른바 ‘한남’의 남성성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마초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 것에 의문을 품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트랜스남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특별함, 즉 차이를 지우고 ‘보통 남자’로서 확인받고자 한다. 그렇다면, 트랜스남성들이 지향하는 ‘평범한 남자’란 대체 누구인가? 트랜스남성들의 욕망과 남성성의 수행 과정을 통해 ‘평범한 한국 남자’, 보편을 대표하고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간주되는 남성성의 정체가 드러난다.
‘남성 되기’의 전제 조건 - ‘여성’의 흔적 지우기
트랜스남성은 남에게서든 자기 자신에게서든 끊임없이 “너 여자 아냐?”라고 의심하는 질문에 그렇지 않음을 입증해야 하는 삶을 산다. 트랜스남성은 여성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자신을 더욱 엄격히 검열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 여성으로 양육된 경험이나 여학교에 다닌 경험 등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전부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 경험은 완전히 버리고 싶더라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무언가로 남는다. 여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간직한 채, 현재의 자신을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평범하게 보일 남성으로 정체화하기 위해 애쓰는 점이 트랜스남성성의 큰 특징이다.
(218~219쪽)
남성 간 유대 관계에서 ‘남성 되기’
인철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공동 생활을 한다. 그에게 회사 기숙사는 남성성을 재사회화하기 좋은 공간이다. …… 자위 경험 공유, 성적 능력 과시, 여성의 대상화 등은 남성 집단을 끈끈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남성끼리 나누는 ‘몇 명과 자봤다’, ‘하룻밤에 몇 번을 사정했다’, ‘내 물건은 크고 굵어서 상대 여자가 힘들어 죽는다’ 따위의 말 상당수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다. …… 트랜스남성들은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집단 내 위계에 소속됨으로써 보상받는다. 위계 서열에 소속되는 것은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생존 수단이 됨과 동시에,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일원의 자격, 즉 평범한 성인 남성의 위치라는 사회적 남근인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223, 224쪽)
낭만이자 권력인 남성의 ‘몸’
이상적인 남성성은 정치적 맥락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사회적 담론이 변하면서 계속 바뀐다. 그래서 남성성은 그 누구도 100퍼센트 이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열등한 위치에 있는 남성 집단일수록 더 강하게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실천하기를 열망한다. 이때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몸이 규범에 적합한지, 즉 얼마나 남자다운 몸을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다수의 트랜스남성은 몸의 상태가 규범적 남성의 이미지, 즉 보통 남성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남성 되기의 척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은 의료적 조치(호르몬 투여, 가슴 제거 수술, 생식 능력 제거, 페니스와 고환의 외형을 만드는 수술 등)를 통한 트랜지션(transition) 과정을 선택한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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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전쟁
도서정보 : 김한수 | 2023-06-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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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전쟁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큰 도전입니다.
이 책은 그 현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며, 독자들에게 질병과 전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대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질병과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안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질병과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안도하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비와 대처를 고민해보기를 제안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미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질병과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넓히고,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작품과 그림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를 희망합니다.
질병과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진지하게 다루고자 하는 이 책과 함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취시키고,
향후 도전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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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황 평전 : 시를 사랑하고 늘 봄볕 같았던 한 청년의 기록
도서정보 : 홍기원 | 2023-06-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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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에 대처하는 실제적 방법론
도서정보 : 김희권 | 2023-06-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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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유명인들의 악플 삭제 및 소송의 전 과정을 지원했던 저자의 경험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악플을 삭제하기 위해서는 고소가 불가피한데, 해당 표현이 범죄라는 판결문이 있어야 악플 삭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악플을 수집하여 고소 대상자를 선별하고, 고소장을 작성해서 확정판결을 받을 때까지 전 과정을 치밀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렇게 힘들게 얻은 판결문을 제출해도 악플을 삭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야 악플을 하나라도 더 삭제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그 실제적인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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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케어
도서정보 : 조희정 외 5명 | 2023-06-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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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가치를 연결하고 교육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여 함께 성장하는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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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도서정보 : 김지은 | 2023-06-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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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필요한 건 학대가 아니다!
사각지대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책
우리 사회에는 매일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동학대사건은 접할 때마다 침통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학대의 내용은 날로 심각해지지만, 법과 제도는 피해아동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사각지대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더 이상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더불어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가 해야 할 노력을 담은 책이다.
1장에서는 ‘칠곡계모사건’, ‘정인이사건’ 등을 포함해 여러 아동학대사건을 사례로 들어 현대 우리나라의 아동학대의 현주소를 알려준다. 훈육과 학대는 엄연히 다름을 강조하며, 이에 따른 전 국민의 인식 개선이 필요함을 말한다. 2장에서는 저자의 개인 경험으로, 아동학대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가족으로서의 심정을 담았다.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했던 일이 저자에게 일어남으로써 생긴 변화들과 깨우친 경각심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상황에 따른 바른 훈육 방법에 대해 담았고, 4장에서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가정에 대해 한탄하며 학대가 의심되는 상황 속에서의 신고와 보호 조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관리 부처가 통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저자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멈추기 위해서는 갈 길이 너무나도 멀지만,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이 사각지대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지는 않은지 주변의 소리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양육자 또는 교사들은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가져야 할 인식을 개선하는 데에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구매가격 : 15,000 원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
도서정보 : 비벡 슈라야 저/현아율 역 | 2023-05-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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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젠더를 다시 상상해야 할까? 남성에 대한 족쇄이자 여성을 향한 위협이 되고 마는 남성성의 형식은 달라질 수 없을까? 유색인 트랜스 여성으로서 경험해온 삶과 세계를 음악, 문학, 시각예술, 영화 등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작품 활동에 거침없이 투영하는 캐나다의 예술가 비벡 슈라야는 자신의 삶을 여성혐오,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의 교차점으로 엮어낸다. 두려움을 화두 삼은 이 압축적인 에세이는 단숨에 읽히며 남성성의 해악과 젠더 이분법에 대한 성찰을 촉발한다. 그는 남자들을 두려워하고, 남자들은(그리고 사람들은) 모호하며 비순응적인 그를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구매가격 : 9,100 원
친밀한 감시자
도서정보 : 탕페이링 저/서지우 역 | 2023-05-14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법에는 죄 지은 사람을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수감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며 전문 지식을 갖춘 누군가의 감독과 지도를 받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 이를 보호관찰제도라고 한다. 대상자의 실태를 ‘관찰’하고 사회의 안전을 ‘보호’하며,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이들, 보호관찰관은 어떻게 일할까? 이 책은 타이완의 여성 보호관찰관 탕페이링이 현장에서 경험한 보호관찰 대상자들의 삶과 자신의 일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 보호관찰이라는 생소한 일에 대한 취지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일상, 태도, 생각 등을 따뜻하게 그린다.
구매가격 : 11,900 원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도서정보 : 희정 글/정택용 사진/반올림 기획 | 2023-05-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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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어?”
반도체 산업의 2세 질환 직업병 문제
그동안 문제가 되지 못했던 문제,
“이제 그 답을 하려 합니다”
문제가 되지 못한 문제들
우리는 스물셋의 나이로 사망한 황유미씨를 기억하고 있다. 2007년, 황유미씨는 택시 뒷좌석에서 숨을 거뒀다. 택시 운전사인 그의 아버지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병명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1년 8개월간 생산직 오퍼레이터(삼성은 반도체 공장의 생산직 여성 노동자를 ‘오퍼레이터’라고 부른다)로 일하다 병에 걸렸고 2007년 스물셋의 나이로 사망했다. 황유미씨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었다. 그 뒤 지난한 투쟁이 이어졌다. 2014년 서울고법에서 황유미씨가 산재로 사망했다는 걸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황유미씨가 사망한 지 7년 만이었다.
반올림은 2015년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직업병 인정과 보상을 요구하며 1,023일 동안 농성을 했다. 그리고 2018년 드디어 삼성으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약속받았다. 반도체 직업병 인정 싸움의 큰 성과였다. 그 뒤 반도체 전·현직 근무자를 대상으로 한 질환 보상 제도가 마련되었고, 2022년 2월 현재까지 87명의 반도체 전·현직 근무자가 직업병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걸로 끝일까? 직업병임을 인정받았고, 보상도 받았으니 끝난 것일까? 이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로 직업병의 피해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자녀들에게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녀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됐다. 이들이 수정란, 정자, 태아와 같은 상태로 존재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8쪽) 선천성 식도폐쇄, 콩팥무발생증, 방광요관역류, IgA신증…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얻은 질병 목록이다. 대장을 다 들어낸 아이도 있었다. 왜 아이들은 아프게 태어났을까? 그때는 다른 현안 때문에 ‘문제’가 되지 못했던 ‘문제’들. ‘문제’였지만 ‘문제’로 만들지 못했던 ‘문제’들. 바로 반도체 산업의 생식독성과 2세 질환 직업병 문제다. 이 책은 이 문제를 지금 이 세상에 드러낸다. “더는 뒤늦지 않기 위해 ‘문제가 되지 못했던 문제’들을 되짚으려 한다.”(13쪽) “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어?”라는 아이의 질문에 이제 답을 하려 한다.
구매가격 : 13,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