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아홉이 되어서야 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도서정보 : 한준식 | 2019-05-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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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천 사
이 책은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닌 우리나라를 지켜낸 선배 세대의 기록이자, 아픔의 기록이다. 태어났
을 때는 나라가 없었고, 광복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한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들이댈 수밖에 없
었던 서글픈 세대에 대한 회고록이라 할 수 있겠다.
- 5 -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쟁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차마 감당
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대한민국을 지켜내신 선배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의 저자인 한준식 님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셨고, 추천사를 적고 있는 나는 반공을 배우
며 자랐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대한민국 미래의 인재들은 반전을 배우며 자라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을 남겼다는 저자의 뜻에 깊이 공감하며, 이 책이 반공보다는 반전을, 분열과 반목보다는 화합과 번영을 그려나가는 시대의 첫 단추가 되길 응
원한다. - 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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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조선Corea or Cho-sen, by A (Arnold) Henry Savage-Landor

도서정보 : A Corea or Cho-sen, by A (Arnold) Henry Savage-Landor | 2019-04-26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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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근대사가 서양의 개신교를 타고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의 역사를 영어로 쓴 책입니다.

구매가격 : 25,000 원

Korea's Fight for Freedom 3.1운동 1919년 3.1운동 1919년

도서정보 : McKenzie 영작가 | 2019-04-2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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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 1920년에 한국의 역사를 영어로쓴 책입니다. 1919년도 3월1일에 일제시대에 삼일 운동을 영국의 입장에서 쓴 책입니다.

구매가격 : 26,000 원

서서울에 가면 우리는

도서정보 : 한종수, 김미경 | 2019-03-1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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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울"을 하나의 지역으로서 제시하는 최초의 책이다. 저자 한종수와 김미경은 은평-서대문-마포를 위시한 서울 서부를 지역의 개념으로 묶어 해당 공간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저자들은 과연 어떤 관점 아래 서서울이라는 공간을 포착해냈을까. 조선시대부터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서울은 그 내용은 다를지언정 늘 일관된 가치를 담아왔다. 그것은 바로 "변화"와 "혁신"이다.

서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서울의 관문으로서 중국 대륙의 문물을 가장 빨리 접한 지역이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목으로서 근대적 설비와 기관들이 집중된 곳이었다. 이런 지역의 분위기 아래, 변화를 꿈꾸는 이상가들이 속속 서서울에 터를 잡았다.

엄혹했던 독재 정권 시기에는 정치적 혁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도모했고, 밀레니엄을 즈음한 시기에는 문화적 몽상가들이 이곳에서 대안적이고 매력적인 삶을 실험했다. 요컨대 "변화"와 "혁신"이라는 관점으로 서울을 볼 때, 은평-서대문-마포, 즉 서서울이 자연스레 하나의 지역으로서 포착된다. 이 책은 서서울이라는 공간을 통해 변혁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러한 통찰을 통해 미래에 다가올 변화를 예비한다.

구매가격 : 11,900 원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도서정보 : 김형오 | 2018-06-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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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김구의 삶과 사상을 쉽고 깊게 읽을 것인가?”
‘보통사람(白凡)’이 묻고, 김구가 답하고, 뜻을 더하여 들려주는 문답식 《백범일지》

“여전히 어려운 시대, 백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지금,
《백범일지》에 담긴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우리의 삶에 적용할 용기와 지혜를 새롭게 만난다”





◎ 도서 소개

“어떻게 김구의 삶과 사상을 쉽고 깊게 읽을 것인가?”
‘보통사람’이 묻고, 김구가 답하고, 뜻을 더하여 들려주는 문답식 《백범일지》

쉽고 간결한 문체, 깊고 풍부한 이야기로 새롭게 만나는
혁명가 김구, 인간 김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백범일지》

- 2018년 서거 69주년, 다시 만나는 백범 김구의 삶과 시대
- 쉽고 간결한 문체, 깊고 풍부한 이야기로 풀어낸 ‘국민 애독서’
-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을 울리는 도전과 헌신의 태도
- 김구의 삶과 사람, 투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80여 장의 도판


우리나라 역사상 백범 김구만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치열하고 극적으로 살다 간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며 힘겨운 망명 생활을 견디고,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통일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다 흉탄에 맞아 생을 맞이한 민족의 지도자이자 영원한 투사. 《백범일지》는 이토록 힘겹게 살아낸 투쟁의 삶을 회고하는 김구 개인의 자서전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기록이요, 역경과 질곡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증언이다. 한편으로는 나라에 헌신하느라 떨어져 지냈던 가족에 남기는 유서를 대신해 쓴 글이자 민족에 바치는 당부의 말이기도 하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구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판본과 해설서를 통해 널리 읽히는 ‘국민 애독서’ 《백범일지》를 쉽고 간결한 문체와 깊고 풍부한 이야기, 문답식 구성을 통해 새롭게 풀어낸 책이다. 엮은이는 지난 3년간 효창원 백범 묘소와 백범 좌상을 거의 매일 같이 마주하며 김구의 삶과 사상, 시대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 고심하고 공을 들였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전문 연구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김구의 생애와 생각을 진솔하고 정직하게 바라보고 쉽고 간결한 문체로 담아냈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은 ‘평범한 백성’ 즉 ‘보통 사람’을 가리킨다. 이 책은 바로 이 ‘보통 사람’들의 질문에 김구가 직접 답하는 Q&A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 상황과 추가 설명 등 엮은이가 풀어쓴 글을 보탰다. 《백범일지》의 내용을 완전히 해부하다시피 한 다음 유형별로 묶은 뒤 총 60개의 질문(Q)과 답(A), 덧붙인 해설(+)을 9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이를 통해 《백범일지》에 담긴 비범한 혁명가이자 진솔한 인간이었던 김구의 삶을 보다 쉽게, 동시에 깊이 이해하고 그가 남긴 정신과 신념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백범은 더욱더 그리운 이름, 절실해지는 얼굴이다. 늘 푸르게 깨어 있고, 서늘하게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이다. 이 책은 그런 선생과 《백범일지》에 바치는 나의 헌사다. 백범을 존경하지만 교과서로만 접한 사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사람, 《백범일지》를 예전에 읽었지만 기억이 희미해져 다시 한 번 읽어보려는 사람, 최근에 읽고 평전이나 어록에도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의 손에 이 책이 들리기를 원한다. - 〈저자의 글〉 중에서



"백범 김구는 누구인가"
누구보다 비범하게,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살아낸 삶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그 외에도 수많은 변곡점을 거쳤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황해도 시골 ‘상놈 집안’에서 태어난 개구쟁이 소년의 일화부터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렸으나 결국 실패한 청년기의 좌절과 경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를 복수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뒤 이어진 옥살이와 탈옥 후의 유랑 시기,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온갖 궂은일을 맡아 처리해야 했던 긴 중국 망명 시절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김구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을 짚어준다. 이를 통해 혁명가, 독립운동가로서의 판단력과 문제해결력, 리더십을 키워간 과정과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도 함께 조명한다. 배고픔과 외로움 같은 본능적인 어려움은 물론 자신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실수와 생각까지도 숨김없이 고백하는 진솔하고 더없이 인간적인 김구의 매력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엮은이는 《백범일지》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오랫동안 널리 읽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담긴 김구의 모습이 너무나 진솔하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에서 엮은이는 《백범일지》에 담긴 김구의 간곡한 당부를 함께 밝힌다. 즉 김구를 무작정 존경하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워야 할 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을 찾아 귀감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김구가 겨레의 젊은이들에게 기대했듯 이 책의 독자들이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백범일지를 읽을 것인가"
백범이 묻고 김구가 답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민 애독서’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백범일지》의 내용을 풀어내 쉬운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일반 대중, 즉 ‘보통 사람’이 던지는 의문과 지적에 대해 김구 선생이 당시 왜 그렇게 했는지 직접 답하는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엮은이가 당시의 사건 정황과 시대 상황, 인물 정보 등을 덧붙여 읽는 이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백범일지》가 단순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구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어린 두 아들에게 말해주려고 상해에서 유서 대신 쓴 것이 상권이고, 일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알리기 위해 중경에서 집필한 것이 하권이다. 상권에는 주로 김구의 개인적인 삶과 활동 내용이 담겨 있고, 하권에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의 기록이 담겨 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던 시절이자 임시정부 활동 침체기로 고난과 역경을 겪던 시절 집필한 상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중년과 말년에 걸친 생애와 그 과정에서 연마하고 정립한 사상을 각 장의 주제에 맞게 풀어낸다.
김구는 피난 중에도 《백범일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만큼 김구의 삶과 뜻을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되는 책임이 분명하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구의 말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낸 동시에 원본에는 없는 설명과 해설을 덧붙여 한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왜 지금 다시 김구여야 하는가"
어려운 시대, 길을 찾는 이들에게 전하는 용기와 지혜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에게 청사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별호를 ‘보통 사람’이라는 뜻의 ‘백범’으로 고친 의미대로 낮은 자리에서 궂은일을 하고자 한 것이다. 김구는 감투에 욕심이 없었고 그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삶을 원했으나 격동의 시대, 폭풍 같은 환경이 그를 비범한 인간, 역경에 맞서 싸우는 전사로 키워냈다. 너무나 인간적인 김구가 많은 과정을 겪으며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엮은이는 책에서 스스로 어렵고 힘겨운 일에 부닥치면 ‘이럴 때 김구 선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으며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냈던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용기와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울림과 가르침을 준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를 통해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통하는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용기와 지혜를 전하고자 한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김구가 필생 염원했던 조국의 완전한 독립, 즉 통일 한국의 새날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나로 뭉쳐도 부족한 상황에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환상과 착각에 빠져 무책임한 주의 주장으로 자초했던 지난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의 중요한 특징이자 강점은 기존의 평전이나 해설서들과 달리 엮은이의 통찰력을 더해 김구의 말과 글을 풀어냈다는 점이다. 늘 깨어 있는,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인 김구의 말과 행동, 삶과 사상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하길 고대한다. 백범을 존경하지만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사람,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를 통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사람, 《백범일지》를 읽었지만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이자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책 속에서

◆ 김구 곁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숱하게 겪었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산더미를 이룬 시신도 보았다. 사람을 죽였고,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환경은 처절했고, 심경은 절박했다. 김구는 칠십 평생을 회고하며 “살려고 산 것이 아니다. 살아져서 살았으며,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살았던 한평생은 역설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역사로 남아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돌아보면 가족이 같이 산 날보다 헤어져 산 날이 훨씬 길었다. 또 피지도 못한 어린 것들, 고생만 한 아내, 효도 한 번 해드릴 겨를이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보내야 했다. 가족을 보살피기는커녕 관심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못했다. 지지리도 부족한 자식이며 못난 남편, 냉정한 애비였다. 그래도 내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겉으로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채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외롭고 쓰라린 세월이었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운명하실 때 왼손 약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태어났다. 할머니 기일이 내 생일이 된 것이다. 말년에 중병이 들어 열나흘 동안 내 무릎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는 경자년 12월 9일, 애써 잡으셨던 내 손을 놓으면서 먼 길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임종하실 때 그러셨듯이 자식 된 도리로 나도 손가락을 자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머니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싶어 당신 모르게 허벅지 살을 베어냈다. 왼쪽 허벅지에서 살 한 점을 떼어내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 속여 잡숫게 하고, 피는 입안으로 흘려 넣어드렸다. 그것만으로는 양이 모자란 듯해 다시 칼을 들어 이번엔 좀 더 크게 떼어내려고 백배 천배 용기를 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극심했다. 결국 다리 살을 베어만 놓았을 뿐 손톱만큼도 떼어내진 못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를 베는 일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거로구나, 나 같은 불효자는 시늉만 내다가 마는구나!”
- 〈2장 백범은 ‘백범’인가?〉 중에서

◆ 해가 바뀌자마자 전봉준을 필두로 하여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4월 전주성을 함락시킨다. 이를 빌미로 6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동학군은 해주성 공격에 실패한 데 이어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우국충정과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19세 소년은 깨닫게 된다. 역사의 주도권은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동학도의 세는 급격히 기울어진다.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리던 김창수는 선봉장으로 나섰던 해주성 전투의 실패를 자책하며 교훈을 얻는다. 훈련 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백전백패임을 절감하고 우선은 군사훈련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런 창수에게 찾아온 정덕현과 우종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 두 사람을 대하는 백범의 태도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련함과 친화력, 열린 의식 등 지도자의 자질을 읽을 수 있다.
- 〈3장 틀 속에 갇혀 틀을 깨려 하건만〉 중에서

◆ 김구의 아내 최준례가 10대 소녀 시절부터 자유 결혼을 꿈꾸었을 뿐 아니라 실천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선하다. 여성의 성향이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혼사에 전혀 반영이 안 되던 시대에, 그것도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다른 청년을 예비 사위로 못 박아 놓은 상황에서 말이다. 김구 또한 당시 조혼으로 인한 갖가지 폐해를 절감하고 있던 터라 이 신여성을 동정하고 그녀의 입장에 깊이 공감했다. 둘은 한마음이 되어 관습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러 차례 가슴 아픈 경험을 뒤로하고 마침내 천생연분, 필생의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 〈5장 고뇌와 갈등의 청년기〉 중에서

◆ 백범은 신문을 받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했다. 매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뒤에야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목청껏 외치곤 했다. “내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내 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간수들이 제지하고 윽박질렀지만, 김구의 부르짖음은 감옥을 우렁차게 울리며 좌절한 동지들의 신념을 다시 일으키는 지렛대가 돼주었다. 그런 김구도 고깃국 냄새엔 코가 먼저 반응했다. 온유한 낯빛과 공손한 말투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꾸짖고 마음을 다잡았다.
- 〈6장 세상 밖의 감옥, 감옥 안의 세상〉 중에서

◆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나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나를 청사 문지기로 써달라고 청원했다. 이유는 연전 본국에서 교육 사업을 할 때 내 실력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알아보려고 순사 채용 과목을 혼자 시험쳐본 결과 내 점수론 합격이 어려움을 절감했고, 또 문지기보다 높은 자리는 허영을 탐해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별호를 백범으로 고친 연유까지 설명하며 설득하자 안 동지는 흔쾌히 국무회의에 올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하룻밤 사이에 내용이 바뀌었다. 도산이 홀연 내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내민 것이다. 그때는 각 부서 차장이 총장 직권을 대리했는데, 청년 차장들이 연장자인 내가 여닫는 문을 드나들기가 아무래도 겸연쩍고 거북스럽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하기야 도산보다도 내가 두 살 많긴 했지만, 나로선 생각지도 않은 문제였다.
“뜻은 고맙지만 나는 일개 순사 자격에도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경무국장 자리는 감당하기 벅찹니다.”
“겸손의 말씀, 자격은 충분합니다. 지금 같은 혁명기엔 정신을 보고 인재를 쓰는 법입니다. 오랜 감옥 생활로 왜놈들 실정을 잘 아는 백범만한 적임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 〈7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1)〉 중에서

◆ 백범은 결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으며, 나이, 지역,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사람을 끄는 힘도 출중했다. 이봉창과는 상해의 뒷골목을 함께 누비고 좁은 여관방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우국담론을 토로한다. 김구의 열린 마음과 애국 열정 그리고 삿됨이 없는 정의감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한 길로 가게 한다. 엄혹한 임시정부 시절,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에서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김구와 더불어 모진 풍파를 무릅쓴 수많은 애국자와 투사는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 그들은 기꺼이 싸우고 또 죽었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임시정부는 월세도 못 낼 만큼 가난에 쪼들렸지만, 김구 몸엔 60만 원이란 천문학적 현상금이 붙었다. 임정 청사의 월세나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던 시대였다. 60만 원이면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을 거액이었다. 잡기만 하면 일확천금할 기회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인 밀정뿐만 아니라 중국인, 심지어는 서양인들까지 김구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으며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범은 ‘움직이는 복권’이 되어 동가식서가숙하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도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도와주는 이들, 눈감아주는 이들이 많았다.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한인 노동자와 주부들로선 평생 팔자를 고칠 현상금이었지만, 김구의 실체를 아는 동포 중 어느 누구도 밀고한 이가 없었다. 오히려 숨겨주고 따뜻한 밥을 제공했다. 그들에게 백범은 현상금 60만 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백범 역시 누구보다 애타게 고대했을 ‘그날’이 왔다. 조국 광복의 날이 밝았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았을까? 일제의 무조건 항복은 김구에게 복음이 아닌 비보였다. 일지에서도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김구 말고 이런 위험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백범일지》가 얼마나 솔직한 고백록인가를 또 한 번 웅변한다. 김구는 우선 수십 년간 준비하고 열망한 보람도 없이, 독립된 조국에 광복군이 ‘해방군’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되어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향후 전개될 통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외세의 영향력은 커지고 우리 정부의 발언권은 약화될 것을 걱정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

◆ 나는 상해에서 18일을 머문 다음 1945년 11월 23일, 1진으로 선발된 열네 명과 함께 서울행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선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보인다!”란 외침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침통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손바닥만 한 비행기 창 아래로 푸른 바다에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곧 합창으로 번졌다가 울음소리로 흐려졌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떠난 지 26년 7개월여 만의 귀환이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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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선생과 동락전투 : 6 25전쟁 처녀 호국영웅

도서정보 : 박정학 | 2018-04-2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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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처녀 호국영웅 『김재옥 선생과 동락전투』. 김재옥 선생의 일생과 공훈을 다룬 책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김재옥 선생을 우리의 역할모델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동락전투가 단순한 6.25 최대의 승전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가 세계 모든 나라에게 유엔군 파병의 가치를 알게 하는 모델이 되게 하자고 강조한다.

구매가격 : 5,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7-08-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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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불구로 만든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박정희는 청렴하고 경제에 헌신했다?
오히려 경제를 죽여서라도 권력 잡기에 혈안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풍미한 천민 자본주의, 성장 만능주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권의 주제는 ‘경제 성장’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 성장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성장과 발전이 박정희의 업적은 아니라고 서중석 교수는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오해이고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허리띠 졸라매고 죽도록 고생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라를 일으킨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을 주목하고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은 어떠했는지, 성장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였는지, 성장의 과실을 공평하게 나눴는지 등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물신숭배 분위기, 즉 성장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가 이른바 조국 근대화 논리와 얽혀 한국 사회를 풍미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배제되었다. 적나라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었고, 한마디로 정의, 성실, 근면, 정직 같은 것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가 못 된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청산을 못한 것이 한국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이런 천민 자본주의, 성장 제일주의, 성장 만능주의도 한국 사회를 불구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적 결함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는데, 그 결함이 크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체질처럼 돼서 수정할 방법을 찾기가 힘들게 됐다. 예컨대 과도한 해외 의존이라든가 내수 시장 빈약, 경제력이 소수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재벌 중심 경제, 부동산 투기 등에서 볼 수 있는 투기성 경제, 타율적 금융, 노동 통제 같은 것들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경제에서 수십 년 동안 살다보니까 잘못된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많아졌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경제 발전은 없었을까?
한국 경제가 성장한 여러 요인은 무엇인가

박정희 집권 18년간 한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했고, 배고픔도 해결됐다. 또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 국가로 바뀌었다. 1971년에 37.5퍼센트였던 중화학 공업 비중이 1981년엔 51.1퍼센트가 되면서 고도 산업 국가가 됐다. 이 시기에 포항종합제철과 거대한 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도 뚫렸다.
또 대단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2~1966년에는 연평균 7.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그다음 시기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1971년에는 연평균 9.7퍼센트라는 아주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제조업 성장률이 연평균 21.5퍼센트나 됐다.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1976년에도 9.2퍼센트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성장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이뤄진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를 두고 ‘박정희가 대단한 경제 발전을 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에 의해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심지어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견해는 문제가 많고,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발전에서 박정희가 맡은 역할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이 시기에 경제가 발전하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기와 많은 부분 겹쳐서 한국도 경제가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과 성취욕도 경제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쟁 특수, 중동 건설 특수도 큰 작용을 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여러 요인이 작용해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이지 박정희 개인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전태일 분신케 한 참혹한 노동 조건,
권력은 노동 통제에만 관심 있었다

이 시기 한국 경제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정부가 노동자를 통제하고 노동조합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그런 정부에 의존해서 노동자를 압박하고 노조를 어용화해 이윤을 높이려는 쪽으로만 신경을 썼다.
당시 노동자 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산업 사회로 가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걸맞은 노동 정책이 있어야 했고 적절한 노동 운동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기업도 살고 노동자도 사는 건강한 사회로 한국이 가야 했다. 그런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그 길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열악한 일터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이런 노동 문제를 고발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있었던 엄청난 물가 상승은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을 크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에 의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부동산 투기 등 각종 투기가 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성장 잠재력을 억압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웠다. 그러다가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부마항쟁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박정희 유신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18년간의 경제를 평가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게 18년 동안 관행처럼 돼 있다 보니까 그 뒤의 정권이 그걸 이어받지 않으면 경제가 운용이 안되는 식으로까지 한국 사회가 돼버렸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처럼 된 것이 있다. 너무 심각해서 그 병이 고질병이라는 사실은 물론 무슨 병인지도 나중에 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망각증 상황까지 갔다.”

구매가격 : 11,2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7-08-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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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으로 모시겠소”
일본 극우들에게 고개 숙인 박정희
미숙성, 굴욕·저자세, 졸속 처리로 한일협정 체결

과거사에 대한 일본 측 사과 받아내기는커녕
망언 덮어준 박정희 정권

박정희와 일본 우익, 그리고 한일 회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권의 주제는 ‘한일 회담 한일협정’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 정권이 미숙성, 굴욕·저자세, 졸속 처리로 한일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과 일본 극우들에게 “형님으로 모시겠소”라며 머리를 숙이고, 검은돈을 받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한일협정을 맺었는지 자세히 살피고, 박정희 정권이 맺은 한일협정이 왜 문제가 되는지, 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 동안 반대 시위가 일어난 까닭도 살피고 있다.
“박정희는 만주 인맥에 의존해 한일 회담을 타결하려 했고 한일 관계를 심화시키려 했으며 경제 건설을 하고자 했다. 이것은 1964년, 1965년에 엄청난 규모로 시위가 일어나게 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울러 박정희 집권기에 널리 사용된 ‘친한파’, ‘반한파’도 박정희 정권 때 한일 관계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의 만주 인맥과 그 뒤를 이은 군국주의자들은 유신 체제 지지·지원에 멈추지 않고 전두환·신군부 체제의 출현과 존속을 적극 지원하고 지지했다.”

군사 정권의 미숙함, 무경험, 경솔함, 독단, 독선

한일 관계는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해방 후 한일 관계의 분수령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한일협정으로 불리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한일협정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도 차분히 되짚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한?미?일 3각 안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했고, 정통성의 취약점을 경제 개발로 만회하려는 박정희 정권은 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런데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권 때도, 장면 정권 때도 있었는데 왜 박정희 정권 때 대규모 시위 또는 반대 활동이 전개됐을까?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특히 시위가 많이 일어났던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에 걸쳐 전개됐고, 1979년 부마항쟁을 제외하면 그 규모도 대단히 컸던 시위·반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큰 시위, 반대 운동이 2년에 걸쳐 벌어졌다.
이처럼 큰 저항에 직면한 이유는 군사 정권의 미숙함, 무경험, 경솔함, 독단, 독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취한 태도와도 관련돼 있었다. 일본에 보인 굴욕적 저자세, 졸속 처리하려는 태도 같은 것이 학생과 국민들에게 큰 반감을 샀던 것이다.

과거사 사과 받아내기는커녕 망언 덮어준 박정희 정권

전 국민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고, 6월 22일 일본에서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가장 중요한 일본의 사죄는 어물쩍 넘어갔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한일 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이다”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박정의 정권이 가장 매달렸던 청구권 자금도 문제가 참 많다.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는 두고두고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와 관련해 하나 더 생각할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이 옛 소련 땅이 되면서 돌아올 길이 막막해진 이들의 문제는 한일 회담 과정에서 논의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한테서 받은 이 돈은 일본이 1950년대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지불한 것보다도 더 적은 것이었다. 청구권 자금을 받은 방식과 그 사용처도 논란이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금액을 일본으로부터 일괄 수령하는 방안을 관철했고, 그렇게 받은 금액을 피해자들에게 온전히 전하는 대신 기간 시설 건설 등에 상당 부분 사용했다. 경제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고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몫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무엇보다 문제는 박정희가 만주 인맥에 의존해 한일 회담을 타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쓰사부로, 고다마 요시오, 야쓰기 가즈오, 이시이 미쓰지로 등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거나 대륙 침략 과정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만주 인맥은 박정희 군사 정권의 출현을 적극 환영했다. 5·16쿠데타 이후에 기시 노부스케는 이렇게 얘기했다. “다행히 한국은 군사 정권이기 때문에 박정희 등 소수 지도자들의 나름대로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 의장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저쪽에는 국회도 없는 것이고, 만일 신문이 이것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박 의장이 그들을 봉쇄해버릴 수 있으니까 되는 것이다.” 민정 이양기에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일본 극우 세력은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해 30시간을 머문다. 거기서 그는 만주군관학교 교장 같은 사람을 일본 정부에 요청해 만나고, ‘깍듯이’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교장은 군국주의 파시즘이 골수까지 박힌 사람이었다. 박정희한테는 일본 패전 이전의 군인 시절에 대한 상당한 향수 같은 것들이 있었고, 첫 일본 방문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 등을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일본 도착 다음 날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같은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이야기해서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이 놀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 자신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일본식 교육이 가장 좋다”며 자꾸 일본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1965년 한일 회담 조인을 한 당사자인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이 쓴 《대통령을 그리며》에 이런 말이 나온다. 1961년 11월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쓰여 있다.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이렇게 졸속으로 맺은 한일협정은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일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에 들어서고 한국이 자주적으로, 대등하게, 자신감을 갖고 일본을 대하게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로 나아간 1987년 6월항쟁 이후였고, 정부 차원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였다. 그 긴 세월 동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지극히 비정상적이었던 건 박정희 정권 때 맺은 한일협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불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주 인맥의 대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가 이끄는 정권이 저런 극단적인 짓을 계속하고 있고 박정희 유신 체제와 ‘친연성親緣性’이 강한 박근혜 정권이 그것에 야합하면서 그 불행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경성의 건축가들

도서정보 : 김소연 | 2017-04-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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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에서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만나다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같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바로 근대건축이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이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경성의 근대건축은 한국전쟁과 개발 논리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 시내를 걷다 보면 고층건물 사이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은 아직 만날 수 있다. 경교장, 명동예술극장, 딜쿠샤, 중명전, 간송미술관, 덕수궁 현대미술관, 서울도서관 같은 건물이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간 ‘역사적 의미’가 깃든 근대건축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 관심에 걸맞게 건물 보존에 관한 대중의 의식도 높아져 자칫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근대건축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는가 하면, 원래 형태를 일부 보존하는 형식으로 리모델링해 공공건물로 사용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근대건축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근대건축의 ‘역사성’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건물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그 자체다. 이 책 《경성의 건축가들》은 우리가 재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후자의 이야기, 곧 그 ‘건물’을 설계하거나 시공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총독부에서 근무한, 당시 건축계의 실세이자 주류였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아닌, 조선인 건축가와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웠던 조선인 건축가들, 또는 꿈을 좇아 조선으로 온 외국인 건축가들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실력을 쌓아나갔다. 결국 일제강점기 후반 민족자본가의 등장으로 백화점, 공장, 학교, 주택, 병원, 극장 같은 건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설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라는 또다른 벽을 마주한다. 건축이라는 이상과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이들은 어떻게 줄여나갔을까?

친일 논란에서도 배제된 건축가들, 그들은 단지 ‘짝퉁’을 만드는 ‘B급’ 기술자들이었을까?
일제가 세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온 조선인 건축가들이 취직한 곳은 대부분 총독부나 경성부청 같은 관청이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했던 일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했던 설계도 건축주가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회부된 사람들의 것이 많았다. 이쯤 되면 친일 논란이 일어날 만하다. 그런데도 건축주만 논란의 대상이었을 뿐 건축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건축가는 단지 기술자로 인식된 탓이다. 기술자는 가치중립적 존재라는 단순한 도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일 뿐 그 시대 건축가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식민지라는 현실과 마주했다. 잠시 건축을 내려놓고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있었고,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건축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으며, 현실을 뒤로 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나 미국 혹은 일본으로 떠돈 이들도 있었다.
그들 작품의 색깔도 다양했다.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만을 지향했던 사람,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려 했던 사람, 전통의 정통성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사람…. 친일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꼭짓점이 아닌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지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그 시대 건축가들도 타협과 저항, 동경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 일제가 급하게 모방했던 서구건축을 흉내만 내는 이른바 ‘짝퉁의 짝퉁’을 만든 ‘B급’ 기술자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따라서
조선인 최초로 총독부 건축기사가 되었고, 역시 조선인 최초로 종로구에 건축사무소를 연 박길룡, 3?1운동에 연루되어 만주를 떠돌다 돌아와 이후 고려대학교 여러 건물군을 남긴 박동진,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 일원으로 교회, 학교, 병원, YMCA, 복지시설 같은 선교 관련 건축을 주로 맡아 진행했던 강윤,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박인준, 최고의 구조계산 전문가로서 미쓰코시백화점, 화신백화점, 조지아백화점, 경성제국대학 본관 들을 구조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김세연, 해방과 전쟁이라는 공백기에 후배 건축가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을 세우는 등 보다 큰 틀에서 역할을 수행한 김윤기, 만주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해 일본인과 함께 다롄역사, 신징역사, 투먼철도공장 들의 설계와 감독에 참여한 이천승,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문학에 눈을 뜬 이상,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평생을 바친 장기인,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연 나카무라 요시헤이, 다마타 기쓰지, 오스미 야지로, 개신교 건축선교사 윌리엄 보리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자료가 있어 이야깃거리를 남긴 사람들이다. 자료가 없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많다. 지은이 김소연은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물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이제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그리고 언젠가 역사가 될 이 시대 건축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

구매가격 : 10,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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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이룬 거대한 승리,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4월 그날,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독재의 총구보다 강했다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4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4권의 주제는 ‘4월혁명’이다. 서중석 교수는 4월혁명을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며, ‘제2의 해방’으로 부르고 있다.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선거 부정, 악정, 폭정 등으로 숨이 턱턱 막히던 시기였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이런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1960년 드디어 민중이 일어섰다.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에서 4월 26일까지 이어진 4월혁명은 막힌 숨통을 틔운 사건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 결론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이었다. 이 책은 이런 4월혁명의 의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4월혁명 전후의 한국 사회를 반추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뉴라이트가 국부로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항쟁인가, 혁명인가, 4월혁명에 서린 민주주의 고투

4월혁명을 가리키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헌법에도 그냥 4·19라고만 돼 있는 것처럼 4·19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고, 또 4·19의거, 4·19학생혁명, 4·19학생운동, 4·19혁명, 4월혁명, 4월학생혁명, 3, 4월 항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용어가 정리되지 않은 까닭을 4월혁명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2월 28일 경북 지방의 고등학생 시위부터 3·15 제1차 마산의거와 4월 11~13일에 있었던 제2차 마산의거를 거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4월혁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월혁명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가 반드시 4월 19일과 4월 26일, ‘피의 화요일’과 ‘승리의 화요일’에서 다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승만을 하야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여러 가지 활동은 오히려 4월 26일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5·16쿠데타로 일단락된다고는 해도, 4월혁명 정신은 그 이후까지도 숨을 쉬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4월혁명’으로 불러야 적절하다는 것이다. 곧 4월 26일을 경계로 해서 그날까지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는 과정, 그 이후는 4월혁명 정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4월혁명 운동기 또는 4월혁명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좋으며, 그래서 4·19혁명보다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4월혁명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4·19 기념식이 열리는 곳에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5·18이 다가오면 5·18을 전후한 시기를 ‘5월 항쟁기’로 선포하고 ‘4월혁명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루자’고 소리 높이 외쳤다. 곧 4월혁명은 1987년 6월항쟁까지 가는 데 5·18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19는 난동”, 반성과 사죄는 이승만 사전에 없었다

“어제 일어난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0일 오후 5시가 돼서야 처음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도 미국이 압력을 가해서 겨우 발표한 것이었다. 자유당도 이날 처음 성명을 내고 “본당은 선량하고 순진한 학도를 선동하여 폭력 사건을 자행하게 한 장본인 및 그 도당의 악랄한 비국민적 만행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발포는 부득이했다고 강변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반성은커녕 시위한 사람들을 두고 ‘비국민’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에 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도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직을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유당과 국무위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위기에 빠진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대신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린 것이다.
25일, 4월혁명에 한 획을 그은 큰 규모의 시위가 전개됐다. 교수 300여 명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선 것.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 이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시위를 필두로 “이승만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등장했고, 그날 밤 10만 명이 넘은 군중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리의 화요일’이 온 것이다. 군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올렸다. 떠나갈 듯 함성이 울리는 세종로 일대에서 일부 군중이 중앙청 정문으로 밀려들어갔다. 10대 소년들은 이승만 동상을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녔다. 흰옷을 입은 한 노인네는 덩실덩실 춤췄다. 해방의 날이 따로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

4월혁명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우선 195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에 담긴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 통치를 받은 1910년대를 여러모로 떠올릴 수 있는 억압의 사회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초래한 공포 사회였다. 말을 못 하는, 입을 닫고 묵종해야 하는 사회 위에 건설된 반공 독재로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고 인간의 사고, 사상이 심하게 위축됐다.
4월혁명은 이런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이었다. 4월혁명으로 정말 꿈에도 그리던,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자 문화인, 지식인, 학생들이 앞질러 만끽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조차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석 달이 지난 1961년 8월,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는 민정 이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그 발표에는 미국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와 함께 4월혁명의 큰 힘 때문에 그것을 배신할 수 없는 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또 4월혁명은 민족 자주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통일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교원 노조 운동과 같은 노동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공무원 공채를 실시하고 공무원 임용령 등을 공포해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도 했다. 또 법치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4월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신호로 해서, 제주 4·3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이 재조명된 것이었다. 이처럼 4월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고, 우리 사회를 변모시키고 사회에 신선한 바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4월혁명은 헌법 전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큼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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