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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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이룬 거대한 승리,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4월 그날,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독재의 총구보다 강했다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4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4권의 주제는 ‘4월혁명’이다. 서중석 교수는 4월혁명을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며, ‘제2의 해방’으로 부르고 있다.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선거 부정, 악정, 폭정 등으로 숨이 턱턱 막히던 시기였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이런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1960년 드디어 민중이 일어섰다.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에서 4월 26일까지 이어진 4월혁명은 막힌 숨통을 틔운 사건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 결론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이었다. 이 책은 이런 4월혁명의 의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4월혁명 전후의 한국 사회를 반추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뉴라이트가 국부로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항쟁인가, 혁명인가, 4월혁명에 서린 민주주의 고투
4월혁명을 가리키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헌법에도 그냥 4·19라고만 돼 있는 것처럼 4·19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고, 또 4·19의거, 4·19학생혁명, 4·19학생운동, 4·19혁명, 4월혁명, 4월학생혁명, 3, 4월 항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용어가 정리되지 않은 까닭을 4월혁명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2월 28일 경북 지방의 고등학생 시위부터 3·15 제1차 마산의거와 4월 11~13일에 있었던 제2차 마산의거를 거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4월혁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월혁명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가 반드시 4월 19일과 4월 26일, ‘피의 화요일’과 ‘승리의 화요일’에서 다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승만을 하야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여러 가지 활동은 오히려 4월 26일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5·16쿠데타로 일단락된다고는 해도, 4월혁명 정신은 그 이후까지도 숨을 쉬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4월혁명’으로 불러야 적절하다는 것이다. 곧 4월 26일을 경계로 해서 그날까지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는 과정, 그 이후는 4월혁명 정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4월혁명 운동기 또는 4월혁명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좋으며, 그래서 4·19혁명보다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4월혁명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4·19 기념식이 열리는 곳에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5·18이 다가오면 5·18을 전후한 시기를 ‘5월 항쟁기’로 선포하고 ‘4월혁명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루자’고 소리 높이 외쳤다. 곧 4월혁명은 1987년 6월항쟁까지 가는 데 5·18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19는 난동”, 반성과 사죄는 이승만 사전에 없었다
“어제 일어난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0일 오후 5시가 돼서야 처음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도 미국이 압력을 가해서 겨우 발표한 것이었다. 자유당도 이날 처음 성명을 내고 “본당은 선량하고 순진한 학도를 선동하여 폭력 사건을 자행하게 한 장본인 및 그 도당의 악랄한 비국민적 만행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발포는 부득이했다고 강변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반성은커녕 시위한 사람들을 두고 ‘비국민’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에 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도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직을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유당과 국무위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위기에 빠진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대신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린 것이다.
25일, 4월혁명에 한 획을 그은 큰 규모의 시위가 전개됐다. 교수 300여 명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선 것.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 이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시위를 필두로 “이승만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등장했고, 그날 밤 10만 명이 넘은 군중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리의 화요일’이 온 것이다. 군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올렸다. 떠나갈 듯 함성이 울리는 세종로 일대에서 일부 군중이 중앙청 정문으로 밀려들어갔다. 10대 소년들은 이승만 동상을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녔다. 흰옷을 입은 한 노인네는 덩실덩실 춤췄다. 해방의 날이 따로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
4월혁명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우선 195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에 담긴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 통치를 받은 1910년대를 여러모로 떠올릴 수 있는 억압의 사회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초래한 공포 사회였다. 말을 못 하는, 입을 닫고 묵종해야 하는 사회 위에 건설된 반공 독재로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고 인간의 사고, 사상이 심하게 위축됐다.
4월혁명은 이런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이었다. 4월혁명으로 정말 꿈에도 그리던,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자 문화인, 지식인, 학생들이 앞질러 만끽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조차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석 달이 지난 1961년 8월,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는 민정 이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그 발표에는 미국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와 함께 4월혁명의 큰 힘 때문에 그것을 배신할 수 없는 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또 4월혁명은 민족 자주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통일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교원 노조 운동과 같은 노동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공무원 공채를 실시하고 공무원 임용령 등을 공포해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도 했다. 또 법치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4월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신호로 해서, 제주 4·3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이 재조명된 것이었다. 이처럼 4월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고, 우리 사회를 변모시키고 사회에 신선한 바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4월혁명은 헌법 전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큼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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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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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가 만든 테러·감시·가위질의 시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제약을 받았다
혁명? 5·16은 반혁명 쿠데타일 뿐!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박정희 성찰하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권의 주제는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4월혁명 이후의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가 일어난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일까? 왜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일까?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던 것일까? 당시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박정희’라는 이름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논란거리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낯 뜨거운 말로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 세력이 끼친 폐해를 직시해야 한다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런 평가가 과연 올바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까?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그 당시 한국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의 집권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성찰하면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를 과도하게 떠받드는 세력들에 의해 그의 우상화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7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부터 혈세를 쏟아부어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구미시는 당장 28억 원가량을 들여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비판과 성찰은 없이 일방적인 미화와 우상화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등장,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조봉암이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혁신 세력이 진보정당을 꾸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승만 집권기 때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집단 학살 문제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진상 규명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구 암살 사건도 재조명됐다. 김구는 부활해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통일의 상징이 됐다. 교원 노조가 결성되는 등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에 반대하는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또한 통일 운동과 더불어 반미 운동도 일어났다. 이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그 유명한 구호가 나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런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4월혁명의 과실을 대부분 차지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이었고, 분단·반공 세력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민주당 정권은 부정 선거 원흉이나 발포 책임자, 부정 축재자, 반민주 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한 특별법인 혁명 입법을 만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서중석 교수는 장면 정부가 비록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9개월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경제 정책을 세우고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점, 경찰을 대폭 숙정해 물갈이한 점, 국군 숫자를 대폭 줄여 국방비를 경제 발전에 돌려쓰려고 했던 점은 뛰어난 성과라고 말한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는 점차 안정되지만 곧 쿠데타가 일어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이나 집권했기 때문에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 언론계나 지식인층도 잘 몰랐다. 국회의원들도 ‘박정희가 누구야?’ 하고 서로 얘기했다고 그런다.”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 박정희는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를 만큼 무명의 군인이었다. 사실 군인 시절에도 박정희는 눈에 띄게 활동한 게 없었다. 한국전쟁 때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 다카키 마사오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졌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두 번째 응모하면서 했던 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도 2009년에서야 밝혀졌을 만큼 박정희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했다. 1961년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어보면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았고, 쿠데타 당일 병력 동원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쿠데타군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한 나라를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전엔 안 그랬는데 요 근래 박정희 정권에 관해 강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게 있다. ‘박정희는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한다. 쿠데타에 성공할 때도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정말 운이 좋았고, 경제 발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내외 조건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화를 할 때에도 선진국에서 사양 산업이 된 일부 중화학 공업을 넘겨주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또 정부에서는 중화학 공업에 매진했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꺼렸던 1970년대 후반에 중동 건설 경기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쿠데타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를 가능케 한 배경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당시 한국군이 굉장히 비대했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 숫자를 늘리는 게 국방력을 갖추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53년에 벌써 60만이 넘었고, 나중에는 72만 명까지 늘어났다. 또 하나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군인들이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는 것. 당시 어지간한 장교는 모두 미국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박정희,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유학이란 큰 부자, 특권층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을 다녀온 군인들은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고 정권을 넘볼 힘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1959년 미국 콜론 연구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서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우선 쿠데타 모의는 김종필, 김형욱 등 육사 8기들에서 시작된다. 왜 육사 8기가 쿠데타를 도모했나? 이들은 군 상층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고 이를 거세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군 상층부를 바로잡자고 정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극소수만 대령 진급을 했고, 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 정도가 중령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장면 정부의 부패, 군의 부패 등을 들었지만, 서중석 교수는 권력욕과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등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이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박정희를 끌어들였고,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5·16쿠데타, 막을 수는 없었을까
쿠데타 세력이 꿈꾼 나라는?
쿠데타는 분명 막을 수 있었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사 실책과 윤보선의 묵인 때문에 결국 막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우선 장면은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서 내리고 현석호를 새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신임 육군 참모총장에 장도영을 앉혔다. 장면은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을 몇 차례 들었지만, 그때마다 장도영은 ‘염려할 것 없다’면서 박정희를 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장도영만큼이나 쿠데타에 기여한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장면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보선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 일부에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하자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곧 쿠데타를 묵인하고 만 것이다.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행.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서중석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쿠데타를 성공시켰지만 이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상은 없었다.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게 혁명 공약 1번이었을 뿐 어떤 정치적 이념도 보이지 않았다. 반공을 제외하면 무(無)이데올로기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겐 사상이 있었는가. 서중석 교수는 박정희의 생각은 일제 식민 사관에 기반을 둔 저열한 민족성론, 식민지 노예근성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극단적인 반공 노선 같은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란과 무질서를 물리력으로 뿌리 뽑겠다는 파시즘적 질서관, 그리고 일제 시기의 청년 장교들이 가졌던 군국주의, 국수주의나 군인 정신 같은 것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낡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아주 강렬하고 과격하게,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비민주적·파쇼적 사고나 행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적이거나 개혁적인 느낌을 갖거나 그것을 신선하고 민족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파시즘 이념이나 행동이 유럽에서 일부 층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또 일제 군국주의 청년 장교들의 정치 이념이 상당수의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그럴 수 있었다. 어쨌건 구부러진, 기이한 ‘민족의식’이 당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곧 쿠데타 세력의 사상이란 식민 사관과 극단적인 반공 노선, 군인 정신이 결합된 것일 뿐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나
5·16쿠데타 때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나중에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쿠데타를 지지했다’고까지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 오래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 지지로 나선 건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은 민간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와 자유를 어느 정도 지키는 민주주의 정부가 과연 한국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 후 진보 세력이 등장해 통일 운동과 전후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을 강하게 하자, 미국은 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 대신 자기들이 정말 믿는, 탄탄한 반공 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쿠데타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쿠데타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곧 미국은 처음부터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주한 미군과 미국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박정희를 잘 알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박정희가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 정책을 철저히 수행할 것임을 확신했다고 본다. 남로당 프락치로서 한 박정희의 배신적 행위, 기회주의자로서 면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거기 다시 안 붙는다는 걸 하우스만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측에서 그간 보니 공산당을 배신한 자들이 공산당에 다시 가는 건 못 봤다’, 이런 점을 강조하더라.”
5·16쿠데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의 평가는 “쿠데타 세력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가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5·16 반혁명 쿠데타”로 부르는 게 제일 정확한 용어라고 말한다. 서중석 교수는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문제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 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을 과연 하려고 했는가. 분단 고착화인가, 통일 지향인가. 이 질문을 놓고 보았을 때 쿠데타 권력은 확실히 반혁명 세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 이후 자유와 민주주의는 억압되었다. 정기 간행물 1,200종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의 자유도 퇴행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제약받았다. 반공법이 통과되면서 내면의 자유까지 짓눌렸다. 예술가들도 가위질의 공포에 항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혁신계의 통일 운동을 반국가 행위로 철저히 처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 자치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 노동조합이 해산되고 많은 노조 간부가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노조는 권력에 종속되고 노동 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는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반혁명 쿠데타일 뿐이라고 말한다. “5·16쿠데타는 중남미 쿠데타처럼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고, 현상 변화나 현상 타파 즉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5·16쿠데타의 의도는 전 세계적 규모의 냉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세력, 진보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 역사의 정상적인 진행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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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정말 무서운 사람”
권력 앞에선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다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
혁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권의 주제는 ‘박정희와 배신의 정치’이다. ‘배신의 정치’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유포한 표현이다. 이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정치인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친 박정희의 집권 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1961년 5·16쿠데타에서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박정희가 보인 모습은 개인적 신의와도, 민주주의 원리와 역사의 흐름을 준거로 한 대의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목숨을 걸고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 중 상당수를 내쳤다. 그것도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은 채. 그런 식으로 밀려난 이들 중에는 박정희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여러 차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은인 장도영도 포함돼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던 셈이다. 일제 시대에 만주군 장교였다가 해방 후에는 남로당 프락치로 변신하고, 그 후에는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만은 살아났던 박정희로서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모습이다.
‘혁명재판’의 반혁명성, 쿠데타 권력의 발가벗은 모습
1961년 6월 22일, 최고회의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걸 소급 입법했다. 이 특별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조항이 바로 제6조다.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 법으로 혁신계 인사,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한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 등을 잡아들이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몰아붙여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형하고 처단한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 반혁명 사건이라고 말한다.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일주일도 안 돼 2,014명을 검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숫자는 3,500명으로 늘어났다.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도 이때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통일 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처단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던 이들도 가혹하게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희생자들의 묘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3·15 부정 선거 원흉과 4월혁명 발포 사건 핵심 인물들은 대거 석방된다.
쿠데타에 반대한 세력, 쿠데타 관련 정보를 누설한 자들,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한 사람들도 모두 반혁명 사건으로 처단되었다. 그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반혁명 사건은 장도영 사건이다. 장도영은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고,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에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군 복귀 공약,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박정희의 ‘배신의 정치’는 공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거듭 반칙을 했다. 곧 민정 이양 문제를 두고 줄기차게 말을 바꾼 것이다. 이른바 군 복귀와 민정 이양을 이야기한 ‘혁명 공약’을 지킬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세력은 겉으로는 민정 이양을 표명하면서도 야당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손발을 계엄으로 다 묶어놓고 중앙정보부라는 초거대 조직을 이용해 신당 조직에 착수하여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승리를 가능하게 할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압력에 못 이겨 2·18 성명을 통해 민정 불참 선언을 했다가 얼마 안 가 이를 다시 뒤집는다. 1963년 3월 16일 그 유명한 3·16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정권 인수의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국가 장래가 염려되고 일방 우리 스스로 혁명 당국의 무책임성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약 4년간 군정 기간의 연장에 대하여 그 가부를 국민 투표에 부쳐 국민 의사를 묻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른바 또 하나의 ‘배신의 정치’를 한 셈이다. 얼마 뒤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사상 논쟁 불붙은 1963년 대선, 그리고 제3공화국의 탄생
박정희의 공약은 별다른 게 없었다. “정당 정치 구현, 지방 자치 제도 실시, 중농 정책도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유권자를 헷갈리게 하는 공약이었다. 박 후보와 정당 정치 구현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지방 자치를 실시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이 당시에는 중농 정책과 정반대되는 정책을 펴고 있지 않았나.”
이 선거에서 사상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먼저 논쟁을 건 사람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 외에 외국의 주의, 사상, 정치 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는 듯하다”는 중대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들은 민주공화당은 윤보선을 허위 사실 유포, 후보자 비방 금지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사실 윤보선의 공격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이긴 했지만 여순 반란 가담자는 아니었다. 그만큼 윤보선에겐 박정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일국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 대해서조차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박정희 일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만 표 차이였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근소한 표 차이였다. “이 선거는 박정희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당 간부들도 얼마나 가슴이 탔겠나. 정말 아슬아슬한 맛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는 서구적 정치,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정치, 정당 정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한국 사회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런 박정희가 이 선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게 있었다고 본다.” 이렇게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이 군사 문화는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 정치, 문화,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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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1
도서정보 : 강헌 | 2016-12-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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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방의 르네상스인, 강헌
그가 한국의 대중문화사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2015년 음악사를 매개로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문화사를 종횡무진 설파한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뒤이어 생사의 경계에서 독학한 명리학을 한 권의 책 『명리』를 통해 단숨에 골방에서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거침없이 열어젖힌 저자 강헌이 이제 그가 온 생애에 걸쳐 섭렵한 온갖 경험과 학습의 총합을 장착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처럼 그는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뿐인가. 그는 뮤지컬을 기획하고, 온갖 공연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며, 곁가지로 와인, 축구, 음식 등 관심의 촉수가 닿는 거의 전 분야에 걸친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하며 살았다. 심지어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생사의 경계선에서조차 그는 "명리"라는, 이전의 그의 족적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의 지평을 넓혔고, 그로 인해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넓은 관심사"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얇은 전문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즉, 하나의 분야에 관한 충성심 높은 몰입 대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이기는 하나, 하나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겠다는 어떤 다짐과 노력 없이, 취미인지 관심인지 모를 애매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다양한 분야의 섭렵의 뒤에는, 그런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아마추어리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어떤 분야에 꽂히는 순간 그에 관한 놀라울 정도의 지적 자산을 축적하고, 그것에 대한 통찰을 얹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뭔가를 작정하지 않고 살아온 이의 족적으로 치기에 그가 이룬 독보적인 관점은 그야말로 눈부시며 그야말로 총합적이고, 그것의 결정체를 담아 내놓은 것이 바로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전 4권 예정, 1~2권 우선 출간)이다.
구매가격 : 11,300 원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2
도서정보 : 강헌 | 2016-12-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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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방의 르네상스인, 강헌
그가 한국의 대중문화사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2015년 음악사를 매개로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문화사를 종횡무진 설파한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뒤이어 생사의 경계에서 독학한 명리학을 한 권의 책 『명리』를 통해 단숨에 골방에서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거침없이 열어젖힌 저자 강헌이 이제 그가 온 생애에 걸쳐 섭렵한 온갖 경험과 학습의 총합을 장착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처럼 그는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뿐인가. 그는 뮤지컬을 기획하고, 온갖 공연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며, 곁가지로 와인, 축구, 음식 등 관심의 촉수가 닿는 거의 전 분야에 걸친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하며 살았다. 심지어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생사의 경계선에서조차 그는 "명리"라는, 이전의 그의 족적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의 지평을 넓혔고, 그로 인해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넓은 관심사"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얇은 전문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즉, 하나의 분야에 관한 충성심 높은 몰입 대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이기는 하나, 하나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겠다는 어떤 다짐과 노력 없이, 취미인지 관심인지 모를 애매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다양한 분야의 섭렵의 뒤에는, 그런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아마추어리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어떤 분야에 꽂히는 순간 그에 관한 놀라울 정도의 지적 자산을 축적하고, 그것에 대한 통찰을 얹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뭔가를 작정하지 않고 살아온 이의 족적으로 치기에 그가 이룬 독보적인 관점은 그야말로 눈부시며 그야말로 총합적이고, 그것의 결정체를 담아 내놓은 것이 바로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전 4권 예정, 1~2권 우선 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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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도서정보 : 로저 에커치 | 2016-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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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의 절반은 전반적으로 무시되어왔다."
그 무시된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문학과 사회사, 심리학과 사상사를
넘나드는 밤의 모든 것!
2005년 『옵서버』 올해의 책
2005년 『디스커버』 최고의 과학책
인간 경험의 잊혀버린 절반을 복원하다
이 책은 인간 역사의 절반을 차지함에도 역사가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산업혁명 이전의 밤에 대하여 로저 에커치가 일기나 여행기 등 개인의 기록부터 잡지, 그리고 철학, 인류학 관련 학술연구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20년 넘게 집필한 역작이다. 밤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과 그것에 대한 방비책, 밤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망상이나 악몽, 밤에 하던 사교행위와 놀이, 불면증 등 밤의 역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서술과 풍부한 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동서양의 저명한 학자와 언론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고, 영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옛 사람들의 잠의 패턴을 분석하여 현대인의 숙면 건강과 잠의 미래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구매가격 : 22,000 원
3·1 운동사
도서정보 : 삼일정신선양회 | 2016-04-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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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사』는 우리 민족정신의 역사적 발로로 시작된 조선의 일대 독립운동으로 운동 시작에서부터 활동했던 모든 독립선언서 기초와 동지들의 활약상, 학생 등 대표 민족지도자들이 이에 참여하기까지 실제적이고 상세한 배경과 내용, 과정 등을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이 결국 체포되어 법정에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기까지 세밀한 재판과정과 판결내용을 담고 있으며, 우리 자주성과 국권회복을 표명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위해 조선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삼천리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휘날리고 외쳤던 당시 실상을 다시금 고무시켜준다.
구매가격 : 8,000 원
기미년 학생운동의 전모
도서정보 : 소석학인(素石學人) | 2016-04-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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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학생운동 전모』는 1945년《조선독립운동비사(朝鮮獨立運動秘史)》1집에 이어진 2집 초판본으로 1919(己未年)년 3·1 운동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기술한 책이다.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전문과 3·1 운동 학생단의 활동,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까지 학생들의 저항 및 숨 가쁜 여정, 계획, 운동의 역사 사건기록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구매가격 : 5,000 원
대한민국을 읽다
도서정보 : 김영모 | 2015-07-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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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부터 1991년까지의 대한민국!
도서와 문서를 통해 ‘한 독서인의 투명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대한민국 현대사’
문명의 시작은 문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할 문자의 등장으로 인류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생활의 체계를 확립하고 이기利器를 발명 및 진화시키는 문자의 힘에 의해 문명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책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한 권의 책은 한 인간의 삶을, 나아가 한 나라의 국운을 뒤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독서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물론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그 매력은 많이 퇴색한 모양새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기록을 남길 만한 매개와 매체가 수없이 등장하였고, 스마트폰 하나면 기록의 탐색자이자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매력을 넘어선 마력에 빠져 책이 만든 집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독서인들은 삶이 이따금씩 세인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주요 인사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모 포털 사이트의 한 코너는 책을 향한 이 세상의 관심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디지털 혁명 이전의 삶의 기록은 철저히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유일한 창이 바로 책이다.
『대한민국을 읽다』는 1934년부터 1991년까지의 대한민국, 그 생생한 역사의 주요 현장을 도서와 문서 자료를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25년 가까이 국회도서관에서 근무를 했고 출판사의 대표직을 맡으며 평생 책과 함께해 온, 지금도 산더미처럼 쌓인 책의 틈바구니에 간신히 몸을 밀어 넣어 책과 씨름하고 있는 한 독서인의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평소 가장 관심을 두던 현대사 분야의 책과 문서 중 중요한 것만을 골라 섬세한 손길로 직조해 내고 있다. 정사를 담은 정통 역사서는 아니지만 유려하면서고 힘 있는 필치로 써 내려간 문장들과 소중한 사진자료들로 인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포인트 곳곳을 목격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또한 “디지털인터넷 문명 도구들이 쏟아내는, 채 검증-정제되지 않은 조잡한 대중문화 수준의 정보 거리들의 범람 속에, (중략) 출판-지식산업과 독서문화가 그 설자리를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중략)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독서이야기’ 운운하는 이 소책자가 얼마만큼 이 땅의 지식시장의 구매인들의 지적 호기심과 독서욕구를 자극하고 유발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소책자의 출판을 계기로, 독자들과 함께 비정상적인 출판문화와 독서문화의 정상화를 위한 싸움에의 힘찬 행보를 내딛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라는 저자의 바람은 요즘 세상의 출판에서 있어 가장 필요한 작가정신과 태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책은 누군가에게는 한낱 종잇조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두운 미래를 환히 밝히는 등불일 수도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책을 스승으로 모셔 삶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함이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그렇듯 『대한민국을 읽다』의 첫 페이지와 함께 삶의 위대한 여정, 그 힘찬 걸음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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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순국열사전
도서정보 : 박태원 | 2015-04-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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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순국열사전』은 조선 말기에서 대한 제국 시기까지 우리민족 독립에 대한 비운의 역사적 사건과 세태를 되도록 간략하나마 기술한 것으로 역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약소국으로 짓밟힌 민족정기 굴욕을 자주성의 몸부림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단호히 지킨 독립운동사와 그들에 대한 발자취를 따라 과거의 역사인식을 돌이켜보는 기회가 될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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