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힘
도서정보 : 존 델러리, 오빌 셸 | 2015-04-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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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것,
중국은 어떻게 "돈"과 "힘"을 움켜쥐었는가
저자 존 델러리와 오빌 셸은 중국 관련 이슈가 터졌을 때 미국의 언론사가 가장 먼저 찾는 미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근현대 중국의 주요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왕조의 붕괴, 지식인의 봉기, 외세의 침략과 점령, 내전, 혁명 등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중국은 어떻게 그토록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
이 책은 작가, 인권운동가, 정치지도자 등 오늘날의 중국을 창조하는 데 크게 공헌한 총 11인의 삶을 통해 이러한 의문에 해답을 던져준다. 풍계분(馮桂芬)같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상가로부터 서태후(西太后), 량치차오(梁啓超)를 거쳐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같은 세계적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유명인들의 이야기가 짧은 전기 형태로 실려 있다.
각기 다른 인물을 이렇게 한데 묶은 이유는 이들 모두 "부강"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서구 열강의 손아귀에서 1세기 동안 굴욕을 당했던 뼈아픈 경험 때문에 강성했던 중국의 옛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 이들의 지상명제가 됐다. 이러한 의지와 동력이야말로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열쇠다.
"전체로서의 중국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인생은 극적인 반전으로 가득차 있다.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극과 극을 달린다 싶을 정도로 각기 다른 생각과 사상을 지녔으면서도, 이들의 글과 말 속에서는 묘하게 공통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즉, 이들은 모두 중국이 "강대국"의 위치를 다시 찾기를 염원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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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고적(최남선 강연집2)
도서정보 : 최남선 | 2015-04-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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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고적』은 우리나라 문화를 세 가지로 나누어 기술한 저자의 역사·문화·기행문학 연설집의 최고봉으로 1권(조선의 산수), 2권(조선의 고적), 3권(조선의 문화)으로 각각 출간한 것이다. 본서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대 선사유적 문화와 삼국의 역사적 변천 과정, 발자취를 통해서 조선 고적의 존귀함과 당연성, 인식에 대한 책임론을 부각하며 기술한 것으로, 그의 문화에 대한 애착심과 구구절절이 애정 어린 감동으로 읍소하고 있다. 이것은 1947년 초판본 동명사 원본을 토대로 주해와 풀이를 하였으며 읽기 쉽도록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다.
또한 근간으로 2권 ‘조선의 고적’과, 3권 ‘조선의 문화’에서도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듯이 여정과 역사 순례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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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04-청춘지
도서정보 : 이중톈 | 2015-03-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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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인 사학자, 이중톈이 강의하는 알기 쉬운 중국사 제6권. 300년간의 백가쟁명은 사실상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 정상이다. 인성의 선악 같은 문제는 아마도 영원히 결론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인류 공동의 가치도 인류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화두다. 다만 문제는, 제자백가의 시대에 우리가 깊이 사유하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유와 평등을 예로 들어보자. 평등은 묵자와 한비, 둘 다 주장했다. 그리고 평등에 자유를 더한 것이 장자의 가치관이다. 소요유는 자유이며 제물론은 평등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자의 평등은 실현 불가능하다. 자유에 대한 그의 이해는 문제가 있다. 사실상 자유는 여태껏 천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자연계에 속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평등으로, 하늘이 정한 본성을 자유로 삼는다면 결국에는 자유도, 평등도 없을 수밖에 없다. 묵자와 한비는 더 참담해서 평등에서 전제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면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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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05-춘추에서 전국까지
도서정보 : 이중톈 | 2015-03-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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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인 사학자, 이중톈이 강의하는 알기 쉬운 중국사. 5권에서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인 제 환공의 패주 등극과 상앙의 변법, 춘추와 전국의 분수령에 해당하는 전진씨의 제나라 장악과 세 가문이 지씨를 멸한 것을 큰 틀로 삼았다. 이어 송 양공, 진 문공, 진 목공, 초 장왕, 합려, 부차, 구천의 연쇄적인 패주 등극 및 자산, 소진, 장의 등 명재상과 유세가들의 이야기로 살을 붙였다.
구매가격 : 9,000 원
이중톈 중국사 06-백가쟁명
도서정보 : 이중톈 | 2015-03-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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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인 사학자, 이중톈이 강의하는 알기 쉬운 중국사. 춘추 시대까지는 중국 민족의 ´소년기´였다. 그때 사람들은 진실한 성정과 열정으로 과감히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알았다. 그래서 살신성인의 자객, 진실한 사랑을 좇은 연인, 정의로운 전사, 충성스러운 신하, 위기를 극복한 사신, 인간미 넘치는 귀신이 있을 수 있었다. 4권에서 저자는 바로 그 ´기운´을 보여주고 있다.
구매가격 : 9,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5-03-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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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주년, 왜 다시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책머리에’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웅숭깊은 역사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와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가 함께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가 그것.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1차분으로 두 권이 선보였다. 1권에는 ‘해방과 분단, 친일파’, 2권에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바로잡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에게도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야만 이 어두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보통 역사책은 연대기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연대기적 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 방식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야기 마당’ 형식을 취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학자들은 사실 관계 규명에만 주력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중석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면서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의 진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극우 반공 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교육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자료에 접근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 극우 반공 세력은 초지일관, 현대사에 관심을 못 갖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근현대사가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아주 부정적인 게 돼버렸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도 얼마나 역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나. 아 그걸 ‘박정희 혼자 다 했다’는 식으로 하니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나. 그런 역사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겠나.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건 다면적이어야 한다.”(1권)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부르고 있다. 소위 뉴라이트들은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신성화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전쟁’을 부추기고,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성과들을 지우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친일파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극우 반공 세력이 기득권을 잡았다. 그들은 반대파를 너나없이 ‘빨갱이’로 몰아대며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사회가 만들어졌다. 극우 반공 세력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진실은 곧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중석 교수는 역사, 특히 지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발분하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권)
“한국의 뉴라이트나 수구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 그것도 매국 활동, 황국 신민화 운동,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행위를 한 사람들로 거슬러 올라간다.”(1권)
어느 날 갑자기 온 해방?
우리는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1권 ‘해방과 분단, 친일파’ 편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공간에서부터 한반도가 분단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끊임없이 항일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 ‘정의로운 바보’들이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것과 관련해 ‘우리한테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가지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 난 모든 독립 운동자에 대해 단재의 이야기가 맞다고 본다. 당장에 성공하길 바랐다면, 강력한 일본에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바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재산을 전부 탕진해가면서, 자식들을 가르치기는커녕 굶주리게 하면서 독립 운동에 그야말로 몸을 던져 그 많은 고초를 겪고 죽음에 이르고 한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의, 그것 때문 아닌가.”
서중석 교수는 ‘해방’을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으로 꼽는다. “해방은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획기적인 대변화를 가져왔다.” 해방이 되면서 모두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혁명이 이루어졌고, 농지 개혁 등이 시행되면서 경제적 혁명도 이루어졌다. 더불어 문화적 혁명, 사회적 혁명도 이루어졌다.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한꺼번에 맞이한 순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뉴라이트는 해방을 몹시 폄하한다.”
역사를 바꾼 신탁 통치 논쟁
좌우익은 왜 그토록 싸웠는가
해방 공간의 결정적 국면 하나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친탁’ 대 ‘반탁’ 논쟁이다. 서중석 교수는 “친탁 대 반탁은 적절한 규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반탁은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을 중심에 놓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찬탁, 반탁’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곧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탁 통치를 하고 임시정부를 세운다’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고 신탁 통치는 나중 문제’라는 것이다.(모스크바3상회의 제1항 임시정부 수립, 제2항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제3항 신탁 통치) 그러니까 신탁 통치 문제로 이렇게까지 좌우익이 싸울 문제가 아니었는데, 나중에 분단까지 가는 명분으로 작용해서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넉 달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가 모스크바3상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문제가 커져갔다. 싸움에 기름을 부은 건 동아일보의 왜곡 기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출처도 없이 보도한 것이다. 우익은 “반탁에 협력하지 않으면 민족 반역자”라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반탁 투쟁을 시작했다. 여기에 친일파까지 가담했다. 마치 자신들이 애국 세력인 양 신분 세탁을 하고 우익과 함께 반탁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에 반해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 투쟁을 전개했는데 방법이 서툴렀다. 대중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연합국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결정한 것이니 좋은 거다’는 식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러면서 좌우익은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정의로운 바보’들이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한반도는 왜 분단이 되었는가
“좌우 합작, 남북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활동을 통일 독립 운동이라고 했다. 독립 운동의 연장이라고 이야기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합작만이 민족의 살길임을 아주 강한 신념으로, 쉬지 않고 역설했다.”
서중석 교수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의 활약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여운형은 대중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해방 후 실시된 첫 여론 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 항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여운형을 뉴라이트와 반공 세력은 친일파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사되도록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극좌와 극우가 협조를 해주지 않았고 미국 측도 소극적이어서 미소공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한반도는 급격히 분단으로 치달았다.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 협상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다. 김구는 ‘분단이 된다는 건 우리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똑같다’고 신체에 비유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는 곧 암살되었고, 남한에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대거 등용한 미군정의 힘을 얻어 노골적인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고, 결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무엇보다 미국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키운 것이 분단으로 가게 하는 큰 문제를 불렀다고 서중석 교수는 지적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
뉴라이트가 ‘국부’라고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은 해방 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 진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했을까?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이 권력을 잡기 위해 친일 세력과 손을 잡았으며, 한반도가 분단이 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도 않았다. 1948년 4·3사건 때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고, 여순사건 때도 이른바 빨갱이 사냥을 했다. 그 결과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 피의자라든가 사상범으로 감옥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1949년 6월에는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일으키고 김구가 암살되는 사건도 일어난다. 또한 선거 때마다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으며 극단적인 반공 국가를 만든 초대 대통령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단적으로 독재자라고 하고 있고,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얼마나 심한 부정 선거가 자행됐나. 선거는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기본이다. 이런 부정 선거의 노하우가 쌓이고 이승만의 권력 의지가 작동해 3·15 부정 선거가 일어나고 결국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았나. 이 점에서도 건국의 아버지라고 볼 수 없다. 어떻게 이런 분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나. 초대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면 된다.”
친일파 세상,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나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 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등용시킨 건 미군정이었다. 미군은 좌익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파를 중용했다. 하도 친일 경찰과 관리들이 미군정에서 다시 큰소리를 치니 해방의 감격이 점점 약화되고 혼란도 심해졌다. 1946년에는 이런 친일파들 때문에 10월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이 항쟁은 친일 경찰의 횡포, 권력 남용 등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4·3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난 것도 친일파 문제가 대단히 중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런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심해졌고, 서민을 억압했다. 이러니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3·1절이나 광복절에 친일파가 단상에 딱 버티고 앉아 있고, 서민들은 억압당하고,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고달프게 살고 핍박받으며 피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겠나.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고문관’ 취급밖에 못 받는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자,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 정상배 같은 자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성공한 자들로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었다.”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분단을 초래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분단을 심화시키고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위해 뭔가 한 게 있다’는 식의 논리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산 대상이어야 할 친일파가 오히려 권력을 잡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으니 한국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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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5-03-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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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주년, 왜 다시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책머리에’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웅숭깊은 역사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와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가 함께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가 그것.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1차분으로 두 권이 선보였다. 1권에는 ‘해방과 분단, 친일파’, 2권에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바로잡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에게도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야만 이 어두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보통 역사책은 연대기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연대기적 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 방식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야기 마당’ 형식을 취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학자들은 사실 관계 규명에만 주력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중석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면서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의 진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극우 반공 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교육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자료에 접근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 극우 반공 세력은 초지일관, 현대사에 관심을 못 갖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근현대사가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아주 부정적인 게 돼버렸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도 얼마나 역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나. 아 그걸 ‘박정희 혼자 다 했다’는 식으로 하니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나. 그런 역사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겠나.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건 다면적이어야 한다.”(1권 306~307쪽)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부르고 있다. 소위 뉴라이트들은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신성화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전쟁’을 부추기고,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성과들을 지우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친일파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극우 반공 세력이 기득권을 잡았다. 그들은 반대파를 너나없이 ‘빨갱이’로 몰아대며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사회가 만들어졌다. 극우 반공 세력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진실은 곧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중석 교수는 역사, 특히 지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발분하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권 233쪽)
“한국의 뉴라이트나 수구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 그것도 매국 활동, 황국 신민화 운동,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행위를 한 사람들로 거슬러 올라간다.”(1권 308쪽)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
한국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2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은 참으로 내용이 어둡다. 민간인 집단 학살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 뒤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에는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이 한국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보다는 국제전의 성격이 강했다. 민족 내적인 이유, 곧 분단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지만, 곧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태였고, 한국도 16개국의 전투 지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에 동의했다. 단 중국의 동의 없이는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고 6월 25일 38선을 넘었다. 북한은 7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남한에 있는 혁명 세력들이 봉기를 해 전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남한에는 이미 그런 세력이 파괴되어 있어서 북한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곧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고, 이어서 중국도 뛰어들었다.
한국전쟁은 피스톤 전쟁, 대패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북한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고, 이번에는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다가 또 중국군한테 한강 이남까지 밀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고 국토가 파괴되는 등 굉장히 큰 희생이 일어났다.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을 가기 바빴고, 미국은 전쟁 초기 북한의 이동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가 확립되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끝이 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양반·노비·쌍놈을 따지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원조 물자를 받으면서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마련되었고, 여성의 지위도 급격히 상승했다.
그러나 사회는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 체제가 내면화된 것이다. 사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는 않았다. 1950년 5·30선거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그런데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간인 집단 학살 때문. 도처에서 학살이 일어나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돼버렸다. 그렇게 비판을 하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연좌제도 아주 심해서 부역자 가족은 감시를 받았고 취직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버리고 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게 서중석 교수의 평가다.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으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전쟁 직전 장교들을 잇달아 인사 이동시켜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더군다나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렇다면 전쟁이 터졌을 때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보호하고 적절한 지휘를 했을까?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부터 갔다. 그는 전쟁이 터지고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에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 서울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대전에 도착해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몇 차례 내보낸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있으라는 것. 이 거짓말 방송이 나간 직후 28일에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이때 도강파와 잔류파가 생겼는데, 피란을 가지 못했던 잔류파는 석 달 동안 굶주리면서 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7월 1일에 또다시 대전을 떠나 목포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전쟁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국민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며 피신만 하고 다닌 것이다. 더군다나 6월 28일 부역자들을 증거 없이 처벌할 수 있는 비상조치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국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곧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고창, 함평 등지에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승만은 부산에서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으면서 영구 집권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난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뭔가 한 것처럼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문제가 심각했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컸다.”(45쪽)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실
“우리가 해방을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분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참혹한 학살은 인간 사회에서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 극우는 신생 국가에서는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141쪽)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민간인 집단 학살은 1948년 11월(제주 4·3사건 당시 학살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부터 1951년 봄까지 일어난다. 전쟁 때에는 주로 1951년 1~2월(거창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때가 1951년 2월이다)까지 일어난다. 100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0만에서 50만 명 사이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많이 학살당한 사람은 국민보도연맹원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 인민위원회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청년총동맹(전총), 조선부녀총동맹 등 좌파로 분류되는 단체나 각종 문화 예술 단체, 조선공산당, 남로당, 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지역별로 보도연맹 가입 할당 인원 같은 게 작용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일종의 관제 빨갱이 비슷한 식으로 됐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호해준다’, ‘여러 편익을 준다’ 이런 얘기 때문에 가입한 경우도 있다. 이 양민 학살은 1988년 월간 《말》에 보도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학살이 일어났는데, 사람에겐 양심이란 게 있는 건데, 학살처럼 무섭고 잘못된 게 없는 건데, 그런 큰 학살이 일어났는데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153쪽)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우 반공 세력의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군인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
‘빨갱이는 씨를 말려 죽여야 한다’
대부분 규모가 큰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일어났다. 4·3사건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가 주도하기도 했다. 미군도 학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노근리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전국 각지에 폭격을 가해 피란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었으므로 학살에 대한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큰 학살을 미국이 방조했다는 건 미국 스스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라이 마을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자,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분노하지 않았나. 그런 미라이 마을 학살의 수백 배 규모의 학살이 한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에 분노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거다. 이건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을 막은 것과는 구분해서 봐야 하는 문제다.”(186쪽)
특히 김종원이 이끄는 11사단은 악명이 높았다. 거창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뒤 거의 같은 시기에 산청, 함양, 영덕, 거제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산청, 함양에서 500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는데, 반수가 여자였고 노인네와 아이들이 많았다. 또 거창 양민 학살 때 잡혀온 이들 중 대다수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여순사건 때 김종원은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치다가 지치면 총으로 처형하기도 했던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큰 책임이 있다. 학살에 이승만 정권이 직접 관여한 측면도 있으며, 대부분 군경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특히 비판 세력, 반대 세력을 ‘빨갱이’와 연관시켰다.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엄벌주의로 대응했다. 거창사건으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은 김종원을 곧 풀어주기도 하면서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한 세력은 철저한 극우 반공 체제를 만들었다. 정부를 비판하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비판을 하지 못했고, 국가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극우 반공 세력의 큰 부분은 친일파다. 이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게 아니라 일제 유산을 답습한 거다. 일제 것을 이어받아 구舊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정말 못된 자들이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3·15 부정 선거도 이자들이 저지르는 것 아닌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33쪽) 그리고 이 체제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뉴라이트나 극우들이 얘기하는 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극우 반공 세력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 아닌가. 뉴라이트는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상당히 있지 않나.”(229쪽)
구매가격 : 10,500 원
세계사를 품은 영어이야기
도서정보 : 필립 구든 | 2015-03-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세상을 정복한 언어 ENGLISH! 영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영어 단어는 어떤 과정으로 생겨났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바뀌었을까? 셰익스피어가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문법과 맞춤법은 어떻게 해서 정해졌을까? 영어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역사서에서 중심으로 다루어야 했을 ‘영어의 역사’를 우리는 왜 간과해 왔는가? 필립 구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곳곳을 누볐던 영어의 역사를 유려한 솜씨로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그려낸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지구에 존재하는 수천 개의 언어 중 왜 ‘영어’가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는 역사서를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고, 영어를 그저 학습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독자들에게도 큰 반전으로 다가갈 것이다. _이어령(전 문화부 장관, 현 중앙일보 고문) 필립 구든은 단연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한 역사를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가 보여주는 영어의 역사는 사라진 인류가 남긴 흔적이자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며 세계사를 관통하는 열쇠다. 영어가 태어나고 자라나 지금의 거대한 세계 언어가 되기까지, 그 성장의 비밀을 이 한 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_고종훈(메가스터디 역사 대표 강사 ‘고사부’) 영어, 싹을 틔워 나무가 되기까지 영어는 중세 초기에 앵글로색슨인이 들여온 게르만계 언어에서 시작되어 11세기 이후에는 노르만 프랑스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 마침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제 영어는 언어계의 ‘초강대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언어가 되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약 3억 8,000만 명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제2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도 6억 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10억 명이나 되는 사람이 영어를 배우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어는 통신, 과학, 경영, 항공, 연예, 외교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며 인터넷에서 또한 사용 빈도가 높다. 국제연합(UN)은 1945년 설립 이후 영어를 공식 언어 가운데 하나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영어가 세계 최초의 만국 공통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영어는 이제 디지털 시대를 거쳐 어떠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는 영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두루 살펴보고 영어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과거로부터 탐색한다. 때로는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때로는 진지한 고찰을 통해 영어의 언어학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 더 이상 ‘외우고 따라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영어를 외우고 익힌다. 하지만 이제 영어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우리는 영어를 단순히 따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고 ‘배워야’ 한다. 영어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영어라는 언어 속에 어떠한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저자 필립 구든은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 영어에 관한 이야기들을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와 함께 풀어나간다. OK, beserk, curfew, cabal, pow-wow와 같은 일반 단어의 흥미로운 어원을 파헤치는 동시에 어떻게 뜻이 변화했는지 설명하고, 앵글로색슨인의 상륙과 노르만인의 정복을 거치면서 영어의 단어와 문법에 얼마만큼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다룬다. 구든은 또한 「베어울프」, 「캔터베리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 영어가 거둔 승리를 재미있게 전달하면서도 유행어, 금기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등 21세기 영어가 가져야 하는 속성들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하고 있다.
구매가격 : 12,640 원
중국기담
도서정보 : 이한 | 2015-03-0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통쾌하고, 즐겁고, 잔혹한 역사의 한 장면
중국은 오랜 역사와 넓은 땅덩이, 수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로, 아시아 국가들에게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우리에 대한 기록이 중국에 남아 있기도 하며, 중국에 대한 기록이 우리 역사서에 남아 오늘날 전해지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해 비교적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혼란기를 평정하고 질서를 바로 세운 패자 제나라 환공이 사치를 즐기고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사실, 중국 민담이나 드라마에 곧잘 등장하는 이묘환태자 전설의 주인공이 북송의 최대 전성기를 연 인종이라는 것, 명나라 황제 가정제의 목을 조른 궁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 중종이 직접 한 말, 상해사변을 연출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탈출시킨 것이 일본의 스파이가 된 청나라 황녀의 짓이라는 것 등등은 어디선가 봤거나 막연히 들었으면서도 정확히는 알지는 못했던 역사 속의 기묘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또한 나라를 뒤흔든 화장법의 유행이나 정교한 과학수사로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 준 탐정 이야기 등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한다.
이에 《중국기담》에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 역사 중 기이한 인물과 사건들을 모아 한 권에 담았다. 특히 지금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흥미로운 15편의 이야기들을 인물기담과 사회기담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부터 때론 눈살이 찌푸려지는 잔혹한 이야기까지 중국 역사상 기묘한 이야기들을 만나 보자.
역사 속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국기담》은 《조선기담》(이한, 2007), 《일본기담》(박지선, 이노우에 히로미, 2013)을 잇는 청아출판사의 기담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조선과 일본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 역사 속 기묘한 일화들을 골라 모은 것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야사나 구전설화 속의 이야기까지 두루 살펴보되, 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역사서까지 확인해 출처와 내용을 검증하여 보다 신빙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는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이 허황된,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사기》나 《명사》 같은 중국 25사를 비롯해 《수신기》와 《태평광기》, 《철경록》 같은 구전설화집이나 개인문집은 물론, 우리나라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각종 역사서를 아우르며 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교차 검증 과정을 거쳐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하고 소개함으로써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의 진실과 무게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구매가격 : 6,000 원
징비록
도서정보 : 유성룡 | 2015-02-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징비록》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이다. 이 책은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다.
책 이름에서 “징비”라는 말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유성룡이 쓴 서문 가운데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라는 문장과 맥이 닿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성룡이 후대에 남긴 글이다. 위정자들의 무책임하고 안이한 대처로 수많은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상국이자 대국인 명나라에 맡겨진 사이에 나라의 체모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절절히 이야기한다. 당시 조선은 군사작전권마저 명나라에 사실상 넘긴 상황에서 침략자를 마음 놓고 응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한강을 기점으로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구원병을 보낸 또다른 전쟁 당사자인 명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조선을 완전히 식민통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백성은 “차마 제 자식을 잡아먹지 못해,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절감한 유성룡은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크게 절망했다. 정유재란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고향인 경상도 의성에 들어앉은 채 지난 7년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정리해 생생하게 되살린다. 정직한 태도로 조선 조정의 분란과 무능을 기록했고,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싸운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에 온당한 존경을 보냈다. 또한 굴욕적인 외교의 실상을 고백하고, 백성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다.
임진년에 시작돼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실상은 이렇게 유성룡의 손을 통해 다큐멘터리 겸 르포르타주 《징비록》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성룡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을 통해 조선은 다시 한 번 짓밟힌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 일어난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사건을 통해 또다시 반복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역시 그때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징비록》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봐야 할 때다.
“징懲-지난 일을 뉘우치고, 비毖-후세를 위해 앞으로의 교훈을 찾는, 록錄-뼈아픈 역사의 기록”이라는, 고전 속의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은 함의로 《징비록》을 찬찬히 톺아봐야 할 것이다.
시인 김기택이 오늘의 한국어로 새롭게 다듬어 쓰다
“일본군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탓하기는 쉬워도 그 침략에서 드러난 우리의 치부를 꼼꼼하게 되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잘못과 부끄러움을 빨리 잊으려고 한다. 자기의 실수나 못난 모습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고 곱씹어보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자기의 잘못을 통해 큰 것을 배울 수 있다. 잊는 것은 편안하지만 망각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징비록》은 그 고통을 기억하고 다시 체험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용기에서 나온 것이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중견 시인 김기택은 《징비록》을 새롭게 다듬어 쓰면서 위와 같이 밝혔다.
김기택은 한국의 고전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는 작업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첫 작업 역시 역사 기록인 《홍경래》(알마)였다. 이 작업에서도 김기택은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럴듯하게 잘된 일, 모두들 성공했다고 여기는 일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홍경래처럼 자신의 삶을 희생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힘 있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진 사람처럼 억울하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건강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정도로라도 살 수 있는 것은, 홍경래 같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훌륭한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과 태도는 《징비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저 침략자를 욕하고, 우리 편 안에서 억지 영웅을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진정한 반성을 통해 정말 소중한 역사의 교훈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김기택은 실패의 기록 안에서도 거기에 깃든 역사의 교훈을 조명하려고 노력했다. 《징비록》에서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원작자의 마음을 오롯이 되살린 것이다. 김기택은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징비록》 안에 담긴 못난 역사, 슬픈 역사, 상처 깊은 역사의 의미를 다시 살려 드러낸다. 그래서 역사 앞에서 정직한 기록의 참 의미를 독자 앞에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전문가의 해설, 완성도 높은 미술 작업이 긴밀히 어우러진 새로운 《징비록》
일평생 전쟁사 연구에 몸을 바친 임홍빈 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선임연구원의 해설도 본문과 긴밀히 맞물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해설은 전쟁의 중요한 일지와 연대기 그리고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전력과 무장의 실제를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통해 풀어냈다. 일본군의 전력과 무장 그리고 작전의 실제를 해설을 통해 들여다보자.
“전투부대가 3~4줄의 전열로 대기하면 제1진 기병대가 적진을 돌파하여 두 도막으로 쪼개 포위하고, 조총으로 무장한 제2진 철포조鐵砲組가 집중 사격을 퍼부어 무너뜨린다. 그런 다음에는 재래식 활로 무장한 제3진 궁병조弓兵組가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어 전열을 혼란에 빠뜨린다. 마지막에는 창칼로 무장된 제4진의 창검조槍劍組 밀집 부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여 압도한다. 이런 짜임새와 전술을 갖춘 군대가 곧 근세 일본 특유의 경무장 보병 ‘아시카루足輕’다.”
이와 같은 전문적인 해설은 탄금대 전투, 서울 함락 및 수복, 평양성 함락 및 수복, 행주 전투, 1차 및 2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해전, 일본군의 경남 농성전 등 전체에 걸쳐 전쟁사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돕는다. 그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동아시아 역사가 어떤 변화를 맞았는지, 또한 임진왜란의 전범이었던 일본 장수와 정치인들이 임진왜란 뒤에 이어진 일본 내부의 새로운 내전 끝에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까지 상세히 소개한다.
미술 작업 또한 남다르다. 이제까지 임진왜란 관련한 한국 출판물의 미술은 전통 시대의 판에 박힌 자료를 답습하기 일쑤였다. 전문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미술의 재구성 또한 식상한 형상을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다.
김기택의 글 작업에 발맞춘 이부록의 미술 작업은 김기택이 섭렵한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 오사카박물관의 전문 자료를 섭렵한 결과다. 두 박물관은 각각 한국과 일본의 임진왜란 전문 전사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임진왜란과 관련한 일본 측 군기물(반다큐멘터리, 반소설류)에 등장한 미술 형상을 널리 참고했다. 또한 동시대 및 후대가 묘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주요 인물의 초상화까지 확인해 《징비록》에 전혀 새로운 미술 형상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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