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영묘사 : 박잠 시조십

도서정보 : 박 잠 | 2019-06-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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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잠의 시는 소박하면서도 진실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시에는 어려운 시어나 기호가 하나도 없고 시적 기교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녀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진솔함은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켜 주고 오늘의 삶의 현실과 근저를 되돌아보게 한다. 바로 이 점이 박잠 시가 가진 힘이다. -손진은(시인․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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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도서정보 : 김경욱 | 2019-06-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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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5년 만의 신작 소설집
제4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천국의 문」 수록

김경욱의 여덟번째 소설집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이 출간되었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이다. 김경욱은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로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소설 영역을 구축해왔다. 일찍이 “진화하는 (소설) 기계”(문학평론가 서영채)라는 평을 들었을 만큼 한순간도 작가적 긴장을 놓치지 않고 삶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섬세한 발걸음으로 꾸준히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써온, 늘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가다. 이제 여덟번째 소설집을 펴내며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8번에게 풀 스윙은 언감생심”이라고 몸을 낮췄지만, 그의 여덟번째 타자가 풀어내는 아홉 편의 다채로운 소설들은 우리에게 ‘사이클링 히트’의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의뭉스러운 삶의 진실을 건져올리는 독보적 디테일

표제작인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은 김경욱표 소설쓰기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나’는 스물아홉번째 면접시험장에서 다섯 명의 중년 남성 면접관들과 마주하는 순간 옛 여자친구의 아버지들을 떠올린다. “만약 성전환수술을 받는다면 맨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라는 “별 거지 같은” 면접관의 질문에도 “여자가 되어서도 이 회사에 지원할 겁니다”라고 답하며 “똥구멍까지 핥아줬건만” 돌아오는 것은 “딱하다는 눈빛”과 “값싼 동정의 기색”뿐. 세번째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떠오른 것도 바로 이 질문을 들었을 때다. 여자친구의 집에서 여자친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던 ‘나’는 “동남아 골프 여행을 떠나 내일이나 귀국한다던”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되고, 뜻밖에 시작된 그와의 대작은 ‘나’의 사타구니께로 들어온 그의 손과 함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자존감을 버리고도 끝내 면접관의 눈에 들지 못하고,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도 부당한 추행을 당하며, 그러고도 도리어 여자친구에게까지 면박을 들을 수밖에 없는 ‘나’의 어쩔 수 없는 ‘찌질함’을, 속물근성과 허위로 가득한 우리 시대의 씁쓸한 풍경에 덧대어 김경욱만의 의뭉스럽고 풍자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김경욱 소설의 ‘의뭉스러움’은 「양들의 역사」에 이르러 더 뚜렷해진다. 무엇 때문인지 일본인으로 자주 오해받던 ‘나’는, 일본 출장에서 돌아와 타게 된 택시에서도 자신을 일본인이라 착각하는 기사에게 장난기가 발동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일본인 행세를 한다. 기사의 일본어 수준을 평가하기도 하고 그가 들려주는 아리송한 이야기, 그러니까 영종대교 97중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가까스로 비껴갔으며, 한국전쟁에서 형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를 자신이 즐겨 했던 거짓말, 즉 “가공의 삶을 진짜처럼 만드는 디테일”에 빗대어 사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해본다. 시종 흥미롭지만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사와, 그의 이야기를 끝내 의심하며 듣는 ‘나’의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통해 삶의 진실과 비밀이 결국 하나의 줄기에 들어 있음을 서늘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에 필요한 디테일임을 떠올려볼 때, 몰입해서 읽지 않을 수 없는 김경욱 소설의 디테일이 이제는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이 끝난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를 어느 쪽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열린 결말이 지금까지 김경욱 소설의 특징이었다면, 「고양이를 위한 만찬」은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서 더이상 무엇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오직 식탁을 차리고 있는 부부의 대화로만 진행되는 이 소설은, 부부가 쫓기듯 미국으로 이민을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아프게 드러낸다. 서로를 경멸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생사마저 상대방의 결정에 내맡길 정도로 부부는 헤아리기 힘든 고통을 함께 견뎌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애가 살아 있다면 그 또래겠구나. 현장체험학습만 안 갔어도, 컨테이너에서 자고 있지만 않았어도, 소방차만 제때 도착했어도, 탈출하라는 안내만 있었어도 저기 앉아서 내가 만들어준 잡채를 입안 가득 오물오물하고 있겠구나” 하는 아내의 말 앞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떼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오직 우리가 터무니없는 사고로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었다는 자명한 부끄러움만이 남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간의 김경욱 소설의 지적이고 건조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조금 더 직접적이고 밀도가 높지만, 그래서 한층 더 새롭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밤낚시」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 세 중년 남자가 하나의 사건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며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 그럼에도 그 기억들을 붙들고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지난함을 생생하고 손맛 좋은 문장들로 능청스럽게 풀어낸다.
노트북 수리 기사를 스토커로 의심하는 여자친구를 통해 여성에게만 손쉽게 가해지는 위협과 차별의 문제를 추리소설처럼 속도감 있는 이야기로 그려낸 「매우 그렇습니다」, 전직 소설가가 인공지능 컴퓨터의 의뢰를 받아 소설을 고쳐 써준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통해 소설의 의미를 되묻는 「수학과 불」, 그리고 1972년 어느 봄밤, 알 수 없는 장소에 감금되어 ‘VIP’에게 보고할 문서를 대필하게 된 ‘필경사 조풍년’의 이야기(「필경사 조풍년」)를 따라 읽다보면, 김경욱이라면 어떤 이야기라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자유자재로 써낼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이자 “한국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노인과 병과 죽음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해체 등, 여러 겹의 문제들을 한데 응축시켜놓고 그 현재와 미래를 응시”(‘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했다는 평을 들으며 제40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천국의 문」에 이르러서는 ‘소설 기계’라는 김경욱에 대한 찬사가 허사가 아님을 체감할 수 있다. 정교하고 치밀한 기존 김경욱 소설의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유연한 장난기까지 더해진, 좀더 진일보한 김경욱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이번 소설집은 줄곧 김경욱 소설을 따라 읽어온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김경욱을 몰랐던 독자들의 ‘김경욱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야구 중계 화면 속으로 팔딱팔딱 끌려들던 내 심장은 8번 타자가 헬멧을 집어들기 무섭게 자연 다큐 채널로 바뀐 듯 본래의 박자를 회복하곤 했다. 8번에게 풀 스윙은 언감생심, 번트라도 제대로 대면 감사할 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어떤 마음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일 밀리미터나마 가까워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번이 여덟번째 단편집이라는 우연과는 무관한 생각.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그저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남들처럼 직장이라는 곳에 다니고 싶었을 따름인데. 별 거지 같은 질문에도 눈 딱 감고 똥구멍까지 핥아줬건만. 다음 수험생으로 바로 넘어가버리던 면접관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전 여자친구가 남기고 간 바로 그 표정이었다. 딱하다는 눈빛. 값싼 동정의 기색. _「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마이너한 인생의 꽁무니에서 비상등처럼 깜박이는 불운에 흥미를 느끼는 별난 여자들이 걸리는 행운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다른 인생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나를 흥분시켰다. 특히 가공의 삶을 진짜처럼 만드는 디테일을 지어낼 때가 짜릿했다. _「양들의 역사」

과도한 구체성은 거짓을 감추려는 술책일 때가 많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지 않는가. _「양들의 역사」

“누군가 살려면 다른 누군가는 죽어야 했던 거야. 생존자들이란 어찌 보면 살인자들인 셈이지.”
_「양들의 역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땐 우는 게 가장 안전하니까. 우는 얼굴에는 침 못 뱉으니까. 세상의 모든 눈물은 결국 자신을 위한 거야.” _「경마학 개론」

몸의 균형? 걸음걸이? 말짱 헛소리. 혈통 좋은 놈이 이긴다. 석 달 치 학원비를 꼬라박고서야 깨우친 진리. 모두가 알지만 씨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_「경마학 개론」

“파이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투숙객 문에 도끼질하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면 우리 애는 죽지 않았겠구나.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겠구나.” _「고양이를 위한 만찬」

진짜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이 되지 못한 어떤 감정이었다. _「매우 그렇습니다」

편집이라는 작업의 생리를 모르지 않았다. 그냥 둬도 될 것도 일단 건드리고 볼 일. _「수학과 불」

몽둥이질이라면 혼절이라도 할 텐데. 막연한 두려움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 만큼 무시무시했다. _「필경사 조풍년」

“인간만이 웃을 수 있어요. 웃음이야말로 영혼이 있다는 증거죠. 그 영혼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혈이 있어요.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혈 깊숙이 침을 찔러넣으면 단잠에 빠져 미소를 지으며 저세상으로 가죠.” _「천국의 문」

구매가격 : 9,100 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문학동네시인선 120)

도서정보 : 송승환 | 2019-06-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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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어 속에 있고 언어 속에 없다”
우연히, 기어이, 마침내, 간신히, 그토록, 기꺼이
물결치는 밤, 백지라는 무덤에서 솟아나는 흐느낌

문학동네 시인선 120번째 시집으로 송승환 시인의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을 펴낸다.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에 평론이 당선되면서 시문학의 신실한 연구자이자, 끊임없는 자기 갱신으로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온 시인 송승환. 그가 두번째 시집 『클로로포름』 이후 팔 년 만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을 내어놓는다. 시인이 가까스로 부려놓은 투명하고도 긴장감 가득한 시편들은 우리들의 오감을, 아니 차라리 육감(六感)이거나 감각할 수 없는 감각들을 일깨우고, 빈틈없는 무의미와 빼곡한 여백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간 시인이 펼쳐낸 책의 ‘시인의 말’을 엮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바라본다(『드라이아이스』)―들린다(『클로로포름』)―나는 있는다(『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각기 수년간의 시차를 두고 다가온 문장이지만, 이는 시를 감각하는 시인의 지금을 설명해줄 단 한 문장 같기도 하다. 바라본다, 들린다, 나는 있는다. 시의 시작은 시(視)에 있고, 애써 듣는 것이 아닌 ‘들린다’는 무한한 열림, 그리하여 문학의 공간에 있는 나. 휘발성 강하고 지워지는 글쓰기를 떠오르게 하는 전작의 제목들과 같고도 다르게, 그의 이번 시집은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이라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맞이한다.
시집의 전체 구성은 ‘만약-어쩌면-아마도’로 이어져 있다. ‘나뉘어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은 이유는 이 한 권의 시집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감히 분절할 수 없는 한 편의 시이기 때문일 터. 우리가 백지의 앞면과 뒷면을 구별할 수 없듯, 시인의 체에 걸러진 순결하고 깨끗한 언어는 시작과 끝, 앞과 뒤, 입구와 출구가 모두 무의미해지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있는다’의 삼위일체 ‘만약-어쩌면-아마도’에서 뭔가 윽박지르는 듯했던 시집 제목이, 말이 제대로 되는 한 최대로 길어지는 문장의 대미를 당당하게 장식하는 차원에 가까스로 달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이야기의 장식 아니라 원인이고 문법인 시(詩)다.
(…)
그뒤의 모든 시들이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겨우겨우 가능한 표현들이지만 또한 그렇게 자유자재할 수가 없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마침내 기를 쓰고 새롭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무도 가지 않았거나 못했거나 가고 싶지 않았던 길로 들어섰다. 시를 다시 읽고 다시 목차를 읽으면 미궁인 원인-문법들의 잘 짜인 장시로 읽힐 만하다.
_김정환(시인), 해설 「론 없는 서-본-결」부분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다”
투명한 눈물색 잉크로 쓰인 빛나는 시편

맑고도 순정한 눈으로 지어낸 시편들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말하기인 읊조림, 속삭임을 떠오르게 하고 이는 ‘흐느낌’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송승환의 이번 시집에 넓고도 옅게 깔린 슬픔과 애도의 기운은 때로는 ‘무덤’으로 때로는 ‘욕조’로 형상화된다. 롤랑 바르트가 낙담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쓴 단어 마리나드(Marinade)―푹 잠기고 절여진 상태―를 상상해보자면 욕조에 서서히 가라앉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애도 일기』를 시로 썼다면 마치 「병풍」과 「욕조」와 같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내가 욕조 속으로 누울 때
욕실 주위로 검은 옷들이 흩어져 끌려나온다

내가 바라보지 않을 때
어머니는 드러나지 않고 나타난다


핏물이 번져간다

(…)

욕조

빨려들어가는 물소리에 내맡겨진 욕조

속에 나는 가라앉는다 뭍이 멀어진다 또다른 뭍이 다가온다 섬과 섬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푸르고 검은 바다 바닥에 부딪힌다 구멍을 치고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부서지는 포말 속에 손가락을 담근다 욕조는 방향을 바꾼다 나는 어디에 있다 잊는다
_「욕조」 부분

사라지고 나타나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있고 없고, 빼곡하고 비어 있고. 이런 가변성과 운동성 속에서 송승환식 메타포와 탈바꿈(metamorphosis)의 공간이 탄생한다.

나는 남성이면서 시인이고 시인이면서 여성이다

나는 바이올린이고 클라리넷이고 심벌즈이고

나는 나비이고 새이고 풀이고 사슴이다
(…)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다
_「플라스틱」 부분

그의 이번 시집을 투명한 눈물색 잉크로 쓰인 시편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제목이 몹시 슬픈 기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계의 밤에 내던져진’(「B102」) 것만 같은 나날에 쓰인 시. 흐르고 흘러들 뿐인 세계에 대한 깊은 슬픔이 소금처럼 흩어져 있는 시. ‘빙하의 밤 심해의 쇄빙선 안에 갇혀’(「검은 돌 흰 돌」) 쓰인 것만 같은 시. 그럼에도 그 세계에서 ‘그러나 조금 굉장히 가까스로’(「이화장」) 지그시 바라보고―들리고―있음으로 쓴 시. ‘밤의 미광’(「검은 돌 흰 돌」)과 ‘돌연 빛이 나를 비추’(「있다」) 는 것을 감각하는 시. 그 빛은 백지를 닮아 고요한 아침의 모습으로 다가옴을 예감하게 하는 시.
‘시’라는 한 글자로 말해지는 지극함,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시라는 정수, 언어 예술의 극한을 독자들은 이번 그의 시집에서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하고도 빼곡한 여백, 칠흑으로 뒤덮인 텅 빈 밤이 데려다놓는 무한이자 문학의 공간. 그리하여 그곳에, 돌연―너는―나는, 만약―어쩌면―아마도,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 시인의 말


나는 있는다


2019년 5월
송승환


■ 책 속에서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그친다면 당신이 드러난다면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이름은 부서져서 이름들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적어도 이른바 이제껏 허투루 이토록 한층 한달음에 함께 여름에 겨울에 남으로 북으로 좀처럼 자주 바닥으로 창공으로 바람으로 눈으로 영원히 절대로 가령 깊숙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를테면 솟구치듯 불쑥 마치 오히려 한결같이 완전히 헛되이 가까이 아니면 이윽고 그것뿐인 양 마치 아무것도 어떤 것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송두리째 봐란듯이 숫제 똑같이 아니 여기에 거기에 이미 살며시 밤마다 온전히 언제나 그러나 전혀 어쩌면 예외로 대부분 아마도 그처럼 그토록 텅 텅 그토록 그처럼 아마도 대부분 텅 텅 당신이 걸어나간다면 끝까지 예외로 어쩌면 전혀 그러나 언제나 온전히 밤마다 살며시 이미 거기에 여기에 아니 똑같이 덜하지도 더하지도 어떤 것도 아무것도 마치 그것뿐인 양 이윽고 아니면 가까이 완전히 한결같이 오히려 마치 불쑥 솟구치듯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_「심우장尋牛莊」 전문


1

이름

빈 무덤

어머니가 없다

2

솜으로 귀와 코를 막는다 눈을 감기고 턱을 받치고 입을 닫는다 머리를 높이 괸다 손발을 주무르고 몸을 눕힌다 백지로 얼굴을 덮는다 배 위에 왼손 오른손 올려놓는다 받침대로 옮기고 홑이불로 덮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향나무 삶은 물로 씻긴다 머리 빗질을 한다 자른 머리카락 깎은 손톱 발톱 주머니에 넣는다 이불에 넣는다 물 수건빗 마당에 묻는다 몸을 관에 눕힌다 몸과 관 사이 메운다 문을 닫는다 나무못을 박는다 관을 묶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묘지 네 모서리 말뚝 아래 관이 내려간다

어머니가 있다

3

어머니가 없다 부를 것인가

어머니가 있다 부를 것인가
_「병풍」 전문


나는 팽창하면서 수축하고 폭발하면서 압축하고 펼쳐졌다 뭉개지고 쓰러졌다 일어서고

나는 물이고 불이고 흙이고 공기고 물이면서 불이고 불이면서 흙이고 흙이면서 공기다

나는 세계의 핵과 전자다

나는 늙고 젊으며 젊고 슬기로우며 슬기롭고 어리석다

나는 이주 노동자 여성이고 비정규직 남성 노동자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 갇힌 소년이고 탄창을 손에 쥔 사무원이고 전단지 뿌리는 학생이고 곡괭이 든 의사이고 펜을 든 농민이고 크레인 운전하는 교수이고 갱도 끝 광부다
_「플라스틱」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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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확률 (문학동네시인선 121)

도서정보 : 박세미 | 2019-06-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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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확률-당신이 당신일 확률
우리의 호흡이 일치하게 되었을 때
너와 내가 만날 가장 달콤한 각도

문학동네 시인선 121번째 시집으로 박세미 시인의 『내가 나일 확률』을 펴낸다.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간결한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증폭시켜내는 특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음을, “비극적 인식을 경쾌한 어조로 노래하며 시적 대상의 슬픔과 고통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안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등단한 시인 박세미. 자신만의 보폭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로 쌓아올린 51편의 시를 데뷔 5년 만에 묶어 첫 시집으로 내어놓는다.
건축과 건축이론을 공부한 시인의 독특한 이력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는 그의 첫 시집이 귀하고도 드문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장이 되리라는 예감을 하게 되고, 정교하고도 정직한 시편들을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기대와 예감을 초월하는 ‘시의 집’에 당도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모든 곳에 있겠다”(「먼지 운동」)는 나직하고도 믿음직한 문장처럼 이번 시집에는 부서지고 작아진 나-부서지고 작아진 마음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박세미의 시는 우리 주변에 꼭 한 명은 있을 법한 ‘친구’를 떠오르게 한다. 나의 장점과 단점을 기분 나쁘지 않게 가장 정확한 말로 조율하여 조곤조곤 직언을 해주는 친구. “모든 게 엉망진창”(「잠옷」)인 것 같은 날 잠시 쉬어가고도 싶은 집이 되어주는 친구. 혹여 우리가 싸우게 되더라도 “남겨진 온기만 기억”(「인간 세 명」)해줄 따듯한 친구. 그래서일까? 나 이하도 나 이상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염결함으로 쓰인 시는 ‘내가 나일 확률’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되돌아보고 기도하고는 당신에게까지 나아간다.

당신 옆을 지나칠 때 우연히
내 걸음이 놓친 것들 나를 통과한 말들
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
내가 나일 확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낮과 밤의 경계에서
누군가는 동물이 된다는데
몸속을 뒤집어 가장 순결한 보호색을 띤다는데
당신이 당신일 확률
_「몇 퍼센트입니까」 부분


작아져서 선명한, 사소해서 단단한
‘부서지고 작아진 마음 전문가’의 혼자서의 낭독회

박세미의 시는 조심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이는 부서지고 작아진 마음들과 사람들을 가만가만 지켜보아온 자의 염려에서 비롯한 윤리일 터.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귀한 존재는 되지 않아야겠다.”(「피규어」)는 마음가짐과 “가벼운 것을 가장 무서워”(「화이트아웃」)할 줄 아는 마음, “다시는 결심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아무것도 하기 싫어」)는 화자들은 모두 한 번쯤은 “굼벵이의 자세, 굼벵이의 속도, 굼벵이의 마음, 굼벵이의 식욕, 굼벵이의 일상”(「물성」)이 되어본 사람들일 것이다. “기어서 기어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늘도/ 실패라서”(「물성」) 쓸쓸하기까지 한 나날을 보내고, 무생물-사물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시간들을 통과한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가끔 박세미의 시가, 목소리가 거침-없이 파고드는 이유는 “왈칵 쏟아진 오늘 같은”(「아무것도 하기 싫어」) 것에 미리감치 “곧 아플 겁니다.// 슬픔이 오기 전에 아플 거예요. (…) 아프고 나면, 정말 아플 겁니다./ 스스로를 믿는 힘으로”(「꾀병」) 우리의 아픔까지 끌어안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모두 소진하면 웃음이 나”(「전구의 형식」)듯, 진정으로 아프고, 앓고 나면 비 온 뒤의 날씨처럼 선명해지는 감각이 찾아오듯, 그 마음은 ‘이제 내가 모르는 것들’(「블랭크」)을 향해 혼자서의 낭독회를 준비한다.

기도의 형식은
맞댄 두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포갠 발바닥에 있습니다
거기엔 빛나는 돌이 놓여 있죠

하지만
누군가 내게 와서
서로의 발바닥을 맞댐으로 사랑에 빠지자,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졸도할 것입니다
두 발바닥을 활짝 펴고서
_「빛나는 나의 돌」 부분

작아져서 더욱 선명해지고, 사소해서 더욱 단단한 나와 마음과 시. 박세미는 그 어떤 포즈나 허언 없이, 때로는 관찰자의 마음으로 때로는 취재의 시선으로 시를 지어 건넨다. 갈라지고 때묻은 마음의 벽에 새하얀 젯소를 덧칠해 시를 건네는 마음. 굼벵이의 속도이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연한 몸짓으로 다가드는 시.

박세미의 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우리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부서지고 작아진 우리. 실패하는 굼벵이 같고 먼지 같은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슬픔에 빠져 있는 우리. 그럴지라도 나는 끝까지 나로 남아 나를 지키면서 살아갈게.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게. 너도 너로 남아, 너를 잘 지키면서 살 수 있기를.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겠지만 “스스로에게 속는 힘으로” 또 “우아한 몸짓”(「꾀병」)으로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다가 우리 다시 만나. 열렬하게 꼭 만나.
_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해설 「부서지고 작아진 마음 전문가」부분

드디어 커튼이 걷히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시인이 첫 낭독회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박세미의 첫 시집을 마치 ‘처음 보게 될 아이의 눈동자를/ 그리워해’온 것처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이 아이는 나일 것이다.’(「will」)


■ 시인의 말

나와 나 사이에 흐르는 의심의 강이 있고
건너갈 수 있는 날과
건너갈 수 없는 날이 있었다

2019년 5월
박세미

■ 책 속에서

곧 아플 겁니다.
슬픔이 오기 전에 아플 거예요.

물에 빠진 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 나는 차가워졌고
조금 늦게 감기에 걸렸습니다.

아프고 나면, 정말 아플 겁니다.
스스로를 믿는 힘으로
_「꾀병」 부분

커튼은 고백하기 좋다
눈썹과 코끝을 스치며, 커튼은 자꾸만 바닥으로 늘어지고
등에는 투명한 창이 매달려 있지
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커튼을 빌려 나타나는 입술의 형상
목소리는 입술의 모양보다 늦게 온다

그러니까 혼자는, 후회를 기다려
(…)
그러니까 혼자는, 죽기 좋은 곳을 확인해

난간은 고백하기 좋다
햇빛을 반사시키며,
옥상은 혼자를 튕겨내고 싶어하지
목소리는 공중에 내민 발보다 늦게 온다

낭독을 마치고 나면,
반가운 택배를 기다리고
우리는 친구처럼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해
그러니까 모두는, 혼자가 되어서야
낭독을 한다
_「혼자서의 낭독회」 부분

거울을 깬 적이 있지
누군가 불길한 징조라고 말해주었고
그날 이후 나는 그릇도 깨고 화병도 깨고
날카롭게 조각난 것들을 주우며
우연이라고 믿으며

긴 장마가 끝났어
숲의 입구에서 나는 나의 발을 한 번 보았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만 가자
깊고 연약해 보이는 땅만 밟자
진흙 속으로 오른발이 쑥 빠질 때
내버려두자
더 깊이 빠뜨리며
기다리자
머리 위로 새똥이 떨어질 때까지
멀리서 거울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무릎까지 차오른 진흙이
온몸을 뒤덮을 때까지

내게 가장 재수없는 일은
당신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일까
당신이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는 것일까
_「뜻밖의 먼」 전문

구매가격 : 7,000 원

누구나 누구가 그립다

도서정보 : 문무학 | 2019-06-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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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오늘을 산다는 건
내일의
그리움을 만드는 일

내일, 나는
그 어떤 일이 아니라
그 누구를
그리워하고 싶다

구매가격 : 8,000 원

사랑니 : 이극로 시선집

도서정보 : 이극로 | 2019-05-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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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는 곳의 맛집을 찾듯 이번 시집에서 그가 드러내지 않았던 향기로운 마음 꽃길을 산책하는 즐거움이 있으리라 믿는다. (허홍구 / 시인,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로 활동했음)
이극로 시인의 시는 노래입니다. 부르다 부르다 목이 쉴 노래 그래서 삶이 어깨를 두드리는 이야기, 이것이 저의 시론이자 이극로 시인의 시입니다. (황수현 / 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
낮에는 한의원에서 환자를 만나면서, 저녁에는 조용한 가운데 명상하면서, 때로는 소주잔을 앞에 두고 떠오른 시상들을 기록한 것이 우리 앞에서 시로 탄생한 것입니다. (박상규 / 꽃동네대학교 상담심리 전공 교수)

구매가격 : 7,000 원

꽃 한송이 잊는데 평생이 걸린다

도서정보 : 서정윤 | 2019-05-20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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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운 삶과 아픈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 『꽃 한 송이 잊는데 평생이 걸린다』
-300만 독자가 선택한 『홀로 서기』 서정윤 시인 등단 35주년 연인M&B 특별기획!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어조, 담담(淡淡)하면서도 진솔함이 묻어나는 시대를 뛰어넘는 서정!

시집 『꽃 한 송이 잊는데 평생이 걸린다』는 『홀로 서기』 서정윤 시인의 10번째 시집으로, 1984년 『현대문학』에 「서녘 바다」, 「성」 등이 김춘수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서정윤 시인의 등단 35주년을 기념하는 시집입니다. “1부 그린다, 너를, 3부 꽃 지면서 사랑도 데려갔다”에서는 진솔하게 드러나는 서정으로, “2부 노을 묻은 낙엽, 4부 경계의 유리 조각”에서는 보다 세밀한 묘사를 통한 신서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시대의 대표 서정시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기다림은 별이 된다.
사막의 지평선 그 너머에서 별이 떠오르면
기다림은 꽃으로 피어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어디에선가 별이 나를 기다리는 걸 알기 때문이다.
별이 혼자 눈물 흘리는 걸 본 적이 있다.
참 어설픈 삶이지만
마음에 등불 하나 켜고 살기로 했다.”는 <시인의 말>에서처럼

시인은 우리의 겨운 삶과 아픈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정윤 시인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어조, 담담(淡淡)하면서도 진솔함이 묻어나는 시대를 뛰어넘는 서정이 별처럼 다가와 우리를 다시 꿈꾸게 한다. 위로와 치유로 달래 주려 손 내미는 시집입니다.

구매가격 : 6,000 원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시인선 119)

도서정보 : 유계영 | 2019-05-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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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선정 「미래는 공처럼」 수록

“내가 나를 지나가버린 것을 끝까지 모른다”
―‘나’에게 잘 도착하는 길은 ‘나’를 잃는 과정 중에 있는지 모른다

2010년 등단 이래 깊고도 낯선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 유계영. 첫 시집 『온갖 것들의 낮』(민음사, 2015)과 현대문학 핀시리즈에 포함된 시집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2018)에 이어 세번째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를 펴낸다. 첫 시집에서 우리가 만났던 “스타카토풍의 불안과 공포를, 시간과 공간이 어긋나는 건조한 밤을, 입체파 회화처럼 단절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 몸과 얼굴”(이장욱)에 더해 시인 유계영의 더 깊숙한 곳이 침착히 꺼내 보여진 시집이 되겠다.
시인은 “왜 과거의 어떤 나로부터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살던 시간 같지 않을까. (…) 오늘의 나는 오늘 태어난 나”(『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서랍의날씨, 2016, 공저)라고 말한 바 있다. 조연정 평론가가 쓴 이번 시집 해설 가운데 “유계영 시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죽은 나’의 ‘미래일기’(「미래일기」)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대목 또한 맥이 통할 터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이 말처럼 당연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과거를 떠올렸을 때 거기 남은 내가 낯설고 그 시간이 내 것 같지 않다면, 오늘의 나는 오늘 태어난 나이자 죽은 나의 미래라는 감각이, 그 사이에서 ‘나’가 느끼는 곤란함과 혼란함, 상실감을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손목이라는 벼랑에 앉아 젖은 날개를 말리는
캄캄한 메추라기

미래를 쥐여주면 반드시 미래로 던져버리는
오늘을 쪼고 있다

울고 있는 눈사람에게 옥수수수프를 내어주는 여름의 진심
죽음의 무더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겠지
얼음에서 태어나 불구덩이 속으로
주룩주룩 걸어가는

경쾌하고 즐거운 자, 그는 미래를 공처럼 굴린다
침대 밑에 처박혀 잊혀질 때까지

미래는 잘 마른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한때 코의 목적을 꿈꾸었던
당근 꽁지만을 남기고
―「미래는 공처럼」 부분

100명의 시인?문학평론가?출판편집인의 추천으로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선정된 시 「미래는 공처럼」의 일부다. 선정 당시 ‘비가시적인 속성을 가시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 ‘공의 탄성과 역동성을 미래의 시간성으로 표현하고 삶의 태도와 내밀한 관계성의 문제를 철학적 시간성에 실어 흥미롭게 노래한 시편’이라는 평을 받았다. 눈물로 녹아내리는 눈사람과 뜨거운 여름의 이미지, 공처럼 굴리고 구르는 미래, 녹아 사라진 자리에 남은 당근 꽁지. 유계영 특유의 기묘한 시간성이 잘 드러난 시다.
“오늘의 나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미래일기」), “너 자신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훌쩍 자라게 되는 거란다”(「반드시 한쪽만 유실되는 장갑에 대하여」), “나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 온다”(「환상통」)라는 감각 또한 그러하다. 오래전 살았던 나들을 상실감 속에서 확인하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간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인하다보면, 매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낮과 밤, 그 반복이 꾸려가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 역시 ‘나’가 제시간에 ‘현재’에 도달할 수 없음을 되새기게 된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입니다”
―만날 수도, 그렇다고 이별할 수도 없는 이를 잃는 일에 대하여

유계영의 시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어떤 안온함, 다정함, 따뜻함 등의 긍정적 감정들보다는 언제나 얼마간의 서늘함, 먹먹함, 슬픔 등의 부정적 감정들을 동반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며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 삶에 내재한 보편적 상실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살 수 없음”이라는 사태로 인해 과거의 특정 시간 속에 갇혀 현재라는 미래에는 결코 당도할 수 없게 된, 수많은 “죽은 애”들에 대한 어떤 윤리적 책임감이 그녀에게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럴 것이다. _조연정, 해설 「‘못다 한 이야기’」에서

과거의 ‘나’에 대한 생경함을 의식하고, 과거로 사라진 ‘나’에 대한 애도 불가능에 집중하는 유계영의 ‘나’들. 한낮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난 살아 있지, 살아 있구나/ 외워놓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지(「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을 대신해」)” 주문처럼 외우고, 잠들지 못하는 밤에 일어나는 ‘밤의 이야기들’에 대해 말하는 그의 ‘나’들은, 이렇듯 밤을 품은 채 낮을, 죽음을 품은 채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나아가 ‘살 수 없음’으로 가버려 스스로를 애도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바, 죽은 애가 참석한 동창회의 풍경을 따라가보면 좋겠다.

죽은 애도 온 것 같다 죽은 애가 와서
자신이 죽었다고 귓속말을 흘리는 것 같다
(……)

죽은 애가 죽은 것은 모두가 아는 얘기
들어줄 수 없는 얘기

(……)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고도 다시 만났습니다
산 사람처럼 어울려 떠들고 마신다.

(……)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너무 많은 말이 필요하니까지금껏 그래왔듯이 죽은듯이 살아가자산 사람처럼 또 만나자
창밖의 사거리에는 급정거하는 소나타, 클랙슨 소리 위로 미끄러지는 중학생들이 또
횡단보도를 지우고
내가 나인 것이 치욕스러웠던 날들과 떳떳했던 날들을
마구 흘리며
달아난다

그러나 쇠고랑 끝에 매달린 금속 추처럼
죽은 애의 죽음을 끌고 간다 우리는
후렴구를 연거푸 반복하면서
―「동창생」 부분

평범한 일상이 전혀 평범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 장례식장에서 신고 온 구두가 아무래도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밤의 이야기」), 자나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다 느껴지는 순간(「은둔형 오후」)이 있다면, 언어와 세계의 흔들림 없는 경직성을 깨고, 생경하고 불가해한 순간을 생경하고 불가해하게,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해 가능한/사회가 공유한 언어체계로 그려내려 애쓰지 않는, 요컨대 ‘시적으로’, ‘시답게’ 밀고 나간 이 시들을 즐길 수 있으리라.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무심한 듯 차분한 얼굴로 말하며 그가 내민 이 시집을 받아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구매가격 : 8,400 원

홀로 서기

도서정보 : 서정윤 | 2019-05-15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외로움과 사랑, 투명한 눈물의 서정시, 『홀로 서기』
-300만 독자가 선택한 『홀로 서기』 서정윤 시인 등단 35주년 연인M&B 특별기획!


사랑에 대한 정신적 가치와 삶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대를 뛰어넘는 서정!

시집 『홀로 서기』는 1984년 『현대문학』에 「서녘 바다」, 「성」 등이 김춘수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서정윤 시인의 시집입니다. 올해로 등단 35주년을 기념하며 다시 펴낸 그의 시편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이 시대의 대표 서정시라 할 수 있습니다. “1부 홀로 서기, 2부 소망의 시, 3부 슬픈 시, 4부 목동”으로 재구성된 시집으로, 1987년 첫 출간 후 300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사랑, 그리움 등 삶의 일면을 투명한 눈물의 언어로 노래한 서정시로 사랑의 세계를 평이한 시어로 풀어내면서 결과적으로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가 어떤 깨달음, 일종의 인식과 각성을 전달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눈물이 이룩한 순수한 홀로 있음의 자리에서 진정한 홀로 서기가 가능한 것을 이 시집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 감성의 반짝임이 아니라, 웬만한 극기와 인고를 거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사랑의 지고지순함이라는 사실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로 시작하는 「홀로 서기」를 비롯해 「사랑한다는 것으로」, 「눈 오는 날엔」, 「소망의 시」, 「나의 어둠을 위한 시」, 「겨울 해변에서」, 「목동」, 「가을 저녁에」 등은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고 독자들의 가슴에 애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한다는 것으로」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사랑 따윈 필요없어 2.0」에 인용되어 젊은 세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는 시이기도 합니다.

구매가격 : 6,000 원

태어난 김에 잘 살아

도서정보 : 청년괴짜 | 2019-05-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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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시형식으로 쓴 자신을 찾아가는 글.

창영이는 수학을 잘했다.
혜인이는 항상 일어를 만점 받아서 내가 일만이라 불렀다.
연제는 컴퓨터를 잘 만져서 홀로그램 기술자로 미래를 그렸다.
누구는 글을 잘 썼고, 다른 누구는 운동을 잘 했다.
또 누구는 무엇이든 뚝딱 고치고 만들 줄 알고
또 다른 누구는 자신의 키만 한 악기로도 우리의 마음을 갈대밭 억새동산에 눕혀 노래하게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교과서에 없었다.
주입식이니 암기식이니 우리나라 교육을 비판하면서도
그 많은 과목 중에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게 있기를 원했고
학생을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나눈다며 선생님을 비난하면서도
누군가 나에게도 태어난 이유와 쓰임새를 찾아주기를 바랐다.

그 칼자루의 끝에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내가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늦게 알았지만
나는 태어난 이유가 애초부터 없었다.

연필은 태어난 이유가 있다.
스마트폰 거치대도 태어난 이유가 있다.
천장에 붙인 야광스티커도 태어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누가 태어난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누가 내 인생에 끝이 있는 쓰임새를 정해놓을 수 있을까?
그러니 태어난 김에 덤으로 살지 말고
바람처럼 왔다고 바람처럼 사라지지 말고
태어난 김에 잘 살아
마음껏
나답게
나처럼

좋은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서툴러 넘어져도
포기하는 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내 인생이니까

부끄럽지만
이런 자신감이 소소하게 쌓여가는 글 속에서도
나는 가끔 움츠려 있거나 후퇴할 때가 있다.
인생은 자기주도라며 외치는 중에도
세상의 기준과 시선이 벗어날 수 없는 숨을 막고 있을 때가 있다.
나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점점 빛바래져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졸저가
가끔은 그 가운데 항상 서 있는 당신을 찾을 수 있기를
뜨겁게 안아 지쳐있는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태어나길 잘 했어
태어난 김에 잘 살자

구매가격 : 3,9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