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07 김구

도서정보 : 김구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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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선구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암흑과도 같은 일제 강점기,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겨레의 독립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의 삶은 어땠을까. 드높은 사상가이자 겨레의 참 스승으로서의 형형한 자취를 살펴봅니다.

저자소개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18세에 동학에 입문하여 접주가 되었으며, 해주에서 동학군을 거느리고 봉기했으나 관군에게 진압되자 만주로 도피했다. 이듬해 귀국,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육군 중위를 살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28년에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 적극적인 항일 무력활동을 전개하였다. 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한 후에는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 한반도 수복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8년 남한만의 단독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후 정부 수립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 통일의 원칙을 계속 주창하다가, 49년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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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08 김규식

도서정보 : 김규식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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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82년 6월 25일 고 백범 김구동지는 불의의 흉탄에 비참하게도 최후를 마치었다. 이 비보를 접한 김규식은 잔인무도한 폭력적 만행을 무한히 원망하며 우리 국가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를 볼 때 한없는 통분을 느끼었다.
이 참혹한 민족적 비애는 3천만 민족으로 하여금 하늘에 애소하고 땅에 발버둥치며 민족적 통곡으로 국토가 양단된 민족이 너 나 할 것 없이 스스로 일어난 통일적 공분을 억제치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직장까지도 포기케 하였다.
오호 동지여! 동지의 최후를 슬퍼서도 울고 우리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도 울고 또 여러 가지로 슬퍼하는 것을 아는가. (책 속에서)

저자소개
김규식(金奎植, 1881년 양력 2월 28일(음력 1월 27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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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28 남궁벽

도서정보 : 남궁벽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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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작가였던 남궁벽의 시 세계를 별의 압흠으로 조금이나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남궁벽(南宮璧, 1895년 ~ 1922년)은 조선의 시인이다. 호는 초몽, 본관은 함열이며, 강화도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에서 공부한 후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창조》·《폐허》 등의 문예 동인지에 인도주의적인 시를 발표하여 천재 시인이라 불리었으나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작품에 〈별의 아픔〉, 〈대지의 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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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30 노천명

도서정보 : 노천명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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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은 예민한 감성과 지성으로 고독과 애수가 깃든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 예민함은 결벽주의자와 같았다. 그 결벽주의가 자신의 감성에서 벗어난 현실을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고 결국 현실을 벗어난 삶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뜻과 다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현실을 떠나 사는 삶을 바란 노천명을 알면, 그녀 시의 특징인 비정치성과 초연함이 이해된다. 그 비정치성으로 인해 일제 말기에 친일 시를 쓰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에 부역한 죄로 옥고를 치렀으니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나 작품의 감각과 감성은 지금 읽어도 뒤처지지 않으며 그녀의 고고한 감성이 잘 절제되어 드러나 있다. 말년에는 그녀를 계속 따라다닌 고독과 비애감을 구원 의지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썼다.

저자소개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포구의 밤』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망향』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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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32 박목월

도서정보 : 박목월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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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선생께서 타계하신지 어느덧 38주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르 형상화?으로써 시어로서의 한국어의 가능 지평을 활짝 펼쳐보여주신 분이 박목월 선생이시다. 그런의미에서 박목월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족시인이시다. 선생께서 가신지 30년 동안 우리는 격변의 사회 속에서 시가 이념의 도구나 수단으로 폄하되는 현상들을 도처에서 보아왔다. 이제, "민족주의 시"를 "민족시"라고 강변하던 이들이 스스로 오류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듯이 보이니 다행스런 일이다. 선생의 시에 대한 연구와 객관적 평가도 보다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저자소개
1940년을 전후한 시대로부터 탁월한 모국어로 한국인의 느낌과 생각을 노래해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준 대표적 민족시인 박목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사춘기 시절의 감성을 잔잔하게 울려주는 그의 본명은 박영종으로 191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33년 대구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지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지에 당선되었으며, 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16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정지용의 추천에 의해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양대 문리대학장, 《심상》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아시아 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예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연작시 〈어머니〉, 〈구름에 달 가듯이〉, 〈무순〉, 수필집 《밤에 쓴 인생론》, 《친구여 시와 사랑을 이야기하자》, 《그대와 차 한 잔을 나누며》, 《달빛에 목선 가듯》,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등이 있다. 1978년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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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33 박용철

도서정보 : 박용철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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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박용철. ‘고처’에 자리한 ‘서정시의 고고한 길’을 걸어가겠다던 그는 “압 대일 어덕” 하나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나 두 야 가련다”라는 시구만 남긴 채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영영 떠났다. 대표작 <떠나가는 배>를 비롯한 11수의 시를 엄선하여 수록했다.

저자소개
박용철은 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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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36 변영로

도서정보 : 변영로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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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시인은 우리나라 신시에서 기교파의 선구적인 시인으로 기교에 중점을 두고 시어의 선택과 수사, 연마에 빼어난 시인적 재능을 보였으며, 민족의 정서를 섬세하고도 세련된 기법으로 시화시켰다.
변영로 시인은 작품에서 조선의 마음을 ‘님’이라는 실체로 호칭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머잖아 상봉할 님을 위하여 고통과 수난을 참고 견디는 순교자적 소명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소개
변영로(卞榮魯. 1898∼1961)

* 시인. 영문학자. 수필가. 호 수주(樹州). 서울 가회동 출생.
* 1909년 중앙 학교 입학.
* 1918년 중앙 고보 영어 교사.
* 1920년 문학동인지 《폐허》 동인 활동. 문단에 데뷔.
* 1927년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
*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대학에서 수학.
*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신가정(新家庭)》 편집장.
*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 1953년 서울신문사 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 1961년 사망.
* 시집 《조선의 마음》(1924) 영시집(英詩集) 《진달래》(1947)
* 시문집 《수주 시문선(詩文選)》(1959)
* 수필집 《명정(酩酊) 40년》(1953) 《수주수상록(樹州隨想錄)》(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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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42 오일도

도서정보 : 오일도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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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시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바탕 위에 애상과 영탄이 서로 얽혀 있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 이성적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애상과 영탄은 그로 하여금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를 주로 노래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소개
오일도(吳一島. 1901∼1946)

* 시인. 본명 희병(熙秉). 일도(一島)는 아명. 경북 영양(英陽) 출생.
*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
* 1922년 서울 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
* 1923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철학과 졸업.
* 1925년 《조선문단》에 시 〈한(漢)가람 백사장(白沙場)에서〉를 발표하여 등단.
* 1929년 근화학교(槿花學校)에서 교편생활.
* 1934년 문예지 《시원(詩苑)》을 창간.
* 1942년 낙향, 〈과정기(瓜亭記)〉 등의 수필을 쓰면서 칩거.
* 1946년 간경화증으로 여의전병원(女醫專病院)에서 사망.
* 유고시집 《지하실의 달》
* 대표 시(詩)작품 〈내 창이 바다에 향했기에〉 〈가을하늘〉 〈코스모스꽃〉 〈지하실의 달〉 〈봄아침〉 〈송원(松園)의 밤〉 〈도요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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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43 오장환

도서정보 : 오장환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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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를 통해 현대 서정시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세 천재’로 주목받았고 모더니즘 시인과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모두가 극찬했다. 그러나 그는 북을 택했고, 한국 문학사에서 방치되었다. ‘자신의 노래가 끝나는 날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라는 그의 시구처럼, 이제 그의 노래가 암담한 무덤을 딛고 아름답게 꽃필 때다.

저자소개
오장환(吳章煥. 1918∼1951)

* 시인. 충북 보은군(報恩郡) 회북면 중앙리 출생.
* 1930년 안성공립보통학교 졸업.
* 1935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중퇴.
*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낭만》 동인.
*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
* 1938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문예과 중퇴.
* 1938년 《남만서방(南蠻書房)》 경영.
*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참여.
* 1946년 이태준, 임화 등과 함께 월북.
* 시집 《성벽(城壁)》(1937) 《헌사(獻詞)》(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 평론 《자아(自我)의 형벌》 《문단의 파괴와 참다운 신문학》(1937)

구매가격 : 6,900 원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44 윤곤강

도서정보 : 윤곤강 | 2016-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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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곤강(1911~1950)은 『나비』,『해바라기』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이다. 그리고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우리 문학사에서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을 펴낸 비평가이기도 하다. 그는 카프시절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민족적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시와 비평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윤곤강에 대한 논의는 그의 문학적 유산의 풍부성에 비해,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 김기림, 박용철 등에 비해 매우 소략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연구가 좀더 활발하고 심도있게 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 그의 작품집과 누락된 그의 시를 모았다.

저자소개
윤곤강(1911∼1950)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인으로 김남천, 노천명, 정비석, 안수길, 박영준, 윤석중, 이원수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윤곤강은 이들과 더불어 척박한 한국의 근현대문학을 일군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올해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 주관으로 개최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서 그의 시 <별과 새에게>가 낭송된 것도 그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시 <나비>와 <해바라기> 등이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점과 그의 시론집 ≪시와 진실≫(1948)이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우리 문학사에서 두 번째로 발간된 점도 한국의 근현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적잖은 비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듯 윤곤강은 우리의 근현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윤곤강은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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