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종교에서 사고론.Thoughts on Life and Religion, by Friedrich Max Muller
도서정보 : Friedrich Max Muller | 2019-09-30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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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인문교양
인생과 종교에서 사고론.Thoughts on Life and Religion, by Friedrich Max Muller
막스뮐러교수가 쓴 책으로, 인생 즉 인간의 생활에서 미 지식 성서 등등의 목차의 제목에서 인간의 생활과 각각의 종교들 즉 기독교 불교 그리고 인도의 고대종교중에서 브라만교에서 지혜를 정리한 글들입니다.
구매가격 : 15,000 원
시카고 플랜 : 위대한 고전
도서정보 : 디오니소스 | 2019-09-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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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지어 올린 시카고 대학의 신화,
현재진행형의 텍스트인 위대한 고전을 한 권으로 보다!
교육철학에서 ‘항존주의’ 개념이 등장할 때 아울러 다루어지는 사건이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이다. 냉전의 시대에 우주 산업을 소련이 먼저 선점한 충격으로 인해, 미국의 교육 풍토에는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진보주의라 불리던, 여전히 미국의 인문을 대변하기도 하는 실용주의 풍토에 순수 학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대표적인 사례가 시카고 대학에서 실시한 ‘The Great Books Program’이다. 법학도 출신인 로버트 허친스는 시카고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이후, 교육이론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교양교육을 받은 전문가 양성’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카고 대학 학생들 모두에게 고전을 읽히기 시작한다. 허친스는 교양교육이 선택의 영역이 아닌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 교육계의 풍토 상, 대학 내에서도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끝까지 그 신념을 관철시킨 결과, 당시만 해도 삼류의 브랜드였던 시카고 대학을?일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미담을 지니게 된 인문학 프로젝트.
“이 교육은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나 그들의 흥미나 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교양교육을 통하여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이 된 이후에 생계의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그들의 특수한 흥미와 적성을 계발할 수 있다.”
-시카고 대학교 총장, 로버트 허친스
물론 허친스의 취지가 일류로 도약하기 위한 효율성으로서의 고전은 아니었다. 그 결과가 일류로 올라선 시카고 대학이었을 뿐이다. 구글이나 애플이나 페이스북, 미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의 경영 이념과도 닿는 맥락 아닌가? 그들도 최초의 취지가 돈을 벌기 위함은 아니었다고 회고하지 않던가. 그 일을 좋아하다 보니 많은 돈을 벌게 된 결과일 뿐이지. 철학자 바슐라르의 어록을 빌리자면, 유용성 너머에 내밀한 꿈이 있다. 그 꿈이 목적지향의 효율론 바깥에 잠재하는 숱한 유용성이기도 하고….
고전을 읽으면 사고 작용이 활발해지고 고무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수 세기 이상을 살아남은 책을 쓴 위대한 정신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고전은 시간의 마모를 견디고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 현재진행형의 텍스트이다. 때문에 정신분석 같은 영역에서도 지나간 시대의 스토리텔링들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기나 여기나,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전제 안에서의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으로의 고찰이다.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은 늘 있으며, 햄릿과 돈키호테 같은 성향들도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읽어봐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식자들은 그 통분적 요소들을 인문학적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고전의 재해석들이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면을 받지 않는 이유 역시, 인문학적 보편성으로 증명된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가 정의처럼,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이 터, 오늘날의 독자들 중에 시간을 들여 괴테의 문학을 읽고 칸트의 철학을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요즘 대중들의 성향을 고려해 본다면, 고전의 문장들은 결코 무난한 가독성만은 아닌 당대의 화법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선뜻 집어 들게 되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되레 그것을 읽는 이들의 지평이 차별화의 전략일 수 있지 않을까? 남다른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는 콘텐츠의 시대이지만, 또한 진득하니 어느 문인과 철학자의 글을 탐독하는 작가지망생들도 드문 시절,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내할 수 있는 이들에게서나 가능한 경쟁력이 고전인지도 모르겠다.
<본문 중에서>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은 서양사에서 고대 그리스가 지니는 철학사적 의의와 함께 살필 주제이다. 당대 그리스인들은 합리의 담론에 취해 있었다.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제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한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흘러가는 서사도 아니지 않던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이어 《안티고네》에서도 인간의 지나친 합리성을 비판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성 집단의 오만, 그 합리의 신념으로 추락하는 인간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또한 신탁적 성격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먼 훗날 철학사에서 이성의 지위를 끌어내린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오이디푸스’이기도 하다. -p.35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등장인물들의 결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시인 새뮤얼 존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지닌 결함이 우리 삶을 이루는 주요 함수인지도 모르겠다. 그 결함이 잠재한 비극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빈도수가 날로 증가하는 오늘날에,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보다 적나라하게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델로의 열등감과 맥베스의 야욕, 리어왕의 오만, 그리고 햄릿의 숙부와 어머니가 품었던 욕정. 그들은 곧 우리의 분열증인 경우는 아닐까? 때문에 그 비극들에 더욱 격하게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95
해학과 풍자는 민중들이 지닌 삶의 생명력을 일깨우면서도 기득권의 권위를 해체하는 문법이기도 하다. 어디 중세에만 한정되는 경우이겠느냐만, 힘겹고 고된 시절을 살아가던 중세의 민중들은 당대 기독교의 위선적 권력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라블레가 그려 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탐닉과 방종은 민중들이 바라보는 권력집단의 부조리인 동시에,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추구했던 자유로운 삶은 민중들의 열망이기도 했다. 그 열망이 가닿은 판타지에 밀려난 성서의 판매부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던 현상은 아니었을까? -p.137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서 진정성 있는 위로를 건넨 이는, 그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 게라심뿐이었다. 게라심은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 정도는 염두에 두고 사는 인물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경구, 이미 삶 속에 자리하고 있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죽음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이 지닌 뒷모습이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 시한부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절실한 성찰이 다가온다. 죽음은 삶에 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그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 말로 대리할 수 있지 않을까? -p.165
성경을 인용하자면 신이 보기에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에게까지 모두 보기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차등한 세상의 미학이었다. 더 정확히는 유럽인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이 善을 선점한다. 하얀 피부를 순결성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유색의 피부가 저열의 속성이었다. 유럽의 귀족 부인들은 흑인 남자 노예가 지키고 서 있는 가운데 나체로 목욕을 했다. 그것이 노예의 불경일 수 없었던 이유, 흑인 노예는 아직 인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유럽은 아직 자연이었다. 자연을 극복하는 위대한 ‘인류’의 역사는 비유럽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한다. 그에 대한 반발은 모두 악이다. 이슬람도 악이었고, 인디언도 악이었다. -p.314
유럽의 정신문화를 이루는 두 근간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이스라엘과 가장 변별되는 그리스의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존재는,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현상에 투영된 인간의 지평이다. 즉 미지와 우연의 두려움을 가지(可知)의 필연으로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인간 스스로의 대답을 인격화한 경우이다. 때문에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에 관한 대답으로서의 신들까지 존재하며, 신들 역시 사랑하고 질투하며 분노하고 좌절하는 존재이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는 조력자이기도 한 동시에 훼방꾼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영예가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든 과오 역시 신의 탓이다. 헤브라이즘이 원죄를 인간에게 짊어지게 했다면, 헬레니즘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죄이다. -p.326
《고리오 영감》이 그리고 있는 파리는 시종일관 속되고 치사하다. 속세를 딛고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속물근성은 어쩌면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 추잡한 본연에 대한 고민으로 쌓아 온 인문의 역사는 실상 그 본연을 겉돌고 있는 공허한 치장은 아닐까? 발자크의 소설을 아우르고 있는 ‘인간 희극’이라는 제목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그러할 것이다. 참으로 웃긴 세상에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의 우스운 이야기, 차라리 그런 민낯이 보다 진정성 있는 인문인지도…. -p.345
구매가격 : 13,000 원
일본 역사 고대, 조몬 야요이 고훈 야마토 아스카 하쿠호 나라 헤이안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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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고대
1. 구석기 일본 선사시대 시작되다(플라이스토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유독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
이러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日帝强占期에 불러일으켜진 反日主義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역사에 대한 무지의 폐해는, 과거 李氏朝鮮이 중국의 屬國으로서 지배당하던 역사적 폐해 못지않은 不條理를 惹起한다.
事大主義的 小中華主義의 꼴사나운 歷史的 慣性이, 여전히 韓民族의 民族精神的 遺傳子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때문에 시나브로 중국 역사에 대한 妄想을 갖는다.
일본 역사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다만 그 상황이 정반대다. 중국 역사를 羨望하는 탓에, 중국 역사를 알게 된 것처럼, 일본 역사를 蔑視하는 탓에, 일본 역사를 알지 못한다.
중국 역사든, 일본 역사든, 그것은 그저 역사일 따름이다. 그러한 各 역사에 대한 理解는, 偏向되거나 歪曲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대한민국의 國益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중국 역사와 일본 역사 중에서, 어떤 역사가 더 중요시되어야 하는가의 여부는, 철저히 國益의 尺度에 따라 가름되면 족하다. 굳이 이런저런 잡다한 논변을 떠들어댈 것 없다.
忠誠이니 愛國이니 民族이니, 허울 좋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프로파간다 선동질이나 조작질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유독 그런 것을 떠들어대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음흉한 속내를 지니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례로써 익히 검증된다.
그런 선동질이나 조작질에 놀아나게 되면, 그야말로 ‘개돼지 群衆’의 低劣한 상태를 당최 탈피할 수 없다.
그러니 何時라도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感情이나 感性 따위에 의한 치우침이 없어야 하며, 각 個人의 가장 근본적 생존 토대인 國益의 척도를 좇아야 한다.
日本歷史는, 일본과 일본인이 현재까지 걸어온, 모든 역사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개념이다.
최초에 ‘플라이스토세’의 일본은, 대륙과 이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동아시아대륙의 동단의 반도를 이루고 있었고, 대륙과 같은 舊石器文化가 전개되고 있었다.
-하략-
구매가격 : 3,500 원
디지털 정신분석 연구
도서정보 : 박진우 | 2019-09-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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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에 시달리는 B양
"언니는...인성이 쓰레기에요..."
말더듬에 시달리는 S군
"초...초...등하...학교...때,,,마...말을..마...많이..아..안 해서요..."
자해 하던 K양
"어릴 때 엄마가 "니 잘못이 아니야"라고만 해줬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에요!"
공황장애로 진단받은 D군
"사람이 자라지면 성장하지 않고 이대로 멈출 수 있어요!!!"
편집증에 시달리던 G군
"모든 것은...나의 지시 하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분석시간에 직접 했던 말로 각각의 말은 그에 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면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도움도 없었고 의료적 조치가 상관없었던 사람들과 함께한 임상기록을 공개한다. 정신병원에 입원치료까지 받아도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채팅을 통해 회복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은 어떻게 정신과 약물을 쓰지 않아도 치료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약물도 증상을 개선하는 것이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회복을 이끌어 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직도 정신의학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는 신경증을 설명하여 그 효과가 발생하는 과정. 어떻게 정신분석은 온라인에서도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례들은 곧잘 접하게 되는 내용들이다. 불면증이나 말더듬, 자해, 물을 쉴새없이 마시는 물중독, 흔히 알려져있는 공황장애, 강박증, 조현병 진단을 받는 편집증까지 다양한 증상들을 소개하며 그것을 프로이트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설명하고 정신과 약물이 어떤 방식으로 증상을 진정시키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한다.
정신분석가의 일은 병을 설명하는 것이고, 치료는 자아가 스스로 그 병을 방어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런 방식이 가능하다고 추정해도 실제 임상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정신분석 임상의 실제 사례집.
이 책을 묘사하는 한 문장을 생각해본적이 있다. 생각도 못한 일이 실제로 가능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구매가격 : 12,000 원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도서정보 : 유창선 | 2019-09-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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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삶의 기쁨
저자는 시사평론가로, 인문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올해 초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수술 이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후유증이 심해 6개월 넘게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동안 앉기만 해도 실신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앓았다. 앉지도 못할 때는 누워서 휴대폰 앱에, 앉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침대 밥상에 노트북을 펴놓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다. 힘겨운 투병 중에도 저자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힘들수록 글쓰기가 더 간절했다.
“장소가 어디든,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 혹은 앞으로의 삶을 위한 다짐이 필요했고,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힘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병상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인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고, 앞날에 대한 계획이 빼곡했던 저자에게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중대한 질병은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저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나의 본성을 억압한 채 살아왔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힘겹게 얻은 두 번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 생텍쥐페리가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라고 말했듯이 저자 역시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며 이러한 질문에 천착하게 된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나답게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들려준다. 살다보면 느닷없이 닥치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시련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소한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신체가 달라졌어도, 그래서 내가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어도, 정작 나의 내면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만의 행복 만들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병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나만의 행복이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 불 꺼진 병실에서도.”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나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책!
저자는 깊고 넓은 사유를 통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는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새롭게 얻은 삶, 이전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 혹은 대의명분에 짓눌려 본성을 억압한 채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인생의 가치라고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나는, 남은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하는 삶, 페르소나를 벗고 내 얼굴 그대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삶이 아니라 작은 삶, 무거운 삶이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돌보고, 나를 배려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두가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면 세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저자는 각자가 나를 위해, 나를 돌보는 삶을 살 때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고 강조한다. 저마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찾을 때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고 타인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획일화된 우리의 삶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본시 지성은 집단의 열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두가 집단이 되어 하나로 획일화될 때 역사는 다시 뒤로 후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삶은 정당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다.”“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삶의 기쁨
저자는 시사평론가로, 인문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올해 초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수술 이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후유증이 심해 6개월 넘게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동안 앉기만 해도 실신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앓았다. 앉지도 못할 때는 누워서 휴대폰 앱에, 앉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침대 밥상에 노트북을 펴놓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다. 힘겨운 투병 중에도 저자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힘들수록 글쓰기가 더 간절했다.
“장소가 어디든,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 혹은 앞으로의 삶을 위한 다짐이 필요했고,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힘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병상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인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고, 앞날에 대한 계획이 빼곡했던 저자에게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중대한 질병은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저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나의 본성을 억압한 채 살아왔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힘겹게 얻은 두 번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 생텍쥐페리가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라고 말했듯이 저자 역시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며 이러한 질문에 천착하게 된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나답게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들려준다. 살다보면 느닷없이 닥치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시련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소한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신체가 달라졌어도, 그래서 내가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어도, 정작 나의 내면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만의 행복 만들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병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나만의 행복이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 불 꺼진 병실에서도.”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나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책!
저자는 깊고 넓은 사유를 통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는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새롭게 얻은 삶, 이전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 혹은 대의명분에 짓눌려 본성을 억압한 채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인생의 가치라고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나는, 남은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하는 삶, 페르소나를 벗고 내 얼굴 그대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삶이 아니라 작은 삶, 무거운 삶이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돌보고, 나를 배려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두가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면 세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저자는 각자가 나를 위해, 나를 돌보는 삶을 살 때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고 강조한다. 저마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찾을 때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고 타인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획일화된 우리의 삶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본시 지성은 집단의 열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두가 집단이 되어 하나로 획일화될 때 역사는 다시 뒤로 후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삶은 정당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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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공동체와 현대과학적사고.The Churches and Modern Thought, by Philip Vivian
도서정보 : Philip Vivian | 2019-09-24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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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인문학일반
교회공동체와 현대과학적사고.The Churches and Modern Thought, by Philip Vivian
교회공동체의 생각과 신화및 현대 과학적 사고에의한 증거들의 사고에 의한 진화등의 학문적인 증거들에 대해서 쓴책.
Title: The Churches and Modern Thought
An inquiry into the grounds of unbelief and an
appeal for candour
구매가격 : 27,000 원
이씨조선 당파싸움 조선왕조 붕당정치, 동인 서인 남인 북인 사색당파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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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 당파싸움, 조선왕조 붕당정치
1. 양반, 이씨조선 기득권층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旣得權層은, 말할 나위 없이 李氏朝鮮의 兩班士大夫이다. 그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지금 이 순간까지도, 李氏朝鮮의 역사적?정치적 관성이 지속되고 있는 탓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朋黨은 李氏朝鮮 中期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兩班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적 떼거리 집단이다.
양반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性理學(朱子學)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킨다. 그래서 그것에 반동적인 인간존재는 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서, 철저히 소외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권력의 작동방식은,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것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시대에도, 자기들의 떼거리 이념에 반동적이면 異端으로서 배척의 대상일 따름이다.
이씨조선의 당파싸움이라는 현상은, 그러한 기득권을 先占하고 持續하기 위한 정치적 싸움질이었다. 그야말로 利益에 복무하는 정치투쟁이었다. 그러한 양상은 현대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현대의 대한민국은 資本主義와 市場經濟를 체제이론으로 삼는다. 그러하니 이익에 복무함은 더욱 공고해지고 정당해졌다.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기존에 국내정치적 事案으로서 政爭이 발생하면, 그나마 그 피해는 내부적 권력투쟁으로 마감된다. 그런데 국제정치적 사안으로 인한 당파싸움일 때는, 국가의 토대가 흔들리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壬辰倭亂, 丙子胡亂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한 전란을 유발시킨 과정이 당파싸움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란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 대부분의 세력은 당파가 아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우도 그러하다. 좌파와 우파, 여당과 야당, 각 政派와 黨派들이, 離合集散하며 갖은 선동질과 조작질로써, 서민대중들을 ‘개돼지 群衆’으로 만들어버리지만, 정작 그들이 목적하는 것은 자기들의 利益일뿐이다. 기득권층으로서의 利權을 지켜내려는 工作일 따름이다.
이씨조선에서 나름대로 지식인으로 행세하던 세력들마저도, 서양문물 수용 문제에 대해, 攻西派와 信西派로 분열되어 당파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결국, 기득권층의 이권을 목적하는 공서파 세력이, 신서파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서 내몰아버리는 것으로 一段落된다. 하지만 국제정치는 그런 식으로 마감될 수 없다.
李氏朝鮮의 奴婢制를 지속하여, 양반의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해, 주자학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며, 서양문물을 배척했고, 그러한 선동질로써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했지만, 그 결과는, 국가 자체를 일본의 식민지로 빼앗기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喪服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의 문제는, 국내정치적 상황으로 한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그 피해가 국가공동체를 넘어서서 확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양문물을 수용하느냐, 배척하느냐의 문제는, 국제정치적인 것이라서, 국가의 命運을 가르는 상황으로 확대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의 대한민국의 경우도 별다르지 않다. ‘세월호 사건’을 빌미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국내정치적 상황은, 정권이 이양되면서 마감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反日 民族主義를 조장하며, 위안부 문제, 징용 문제, 지소미아 파기, 불매운동 등을 벌이는 정치공작은, 그 부작용이 국가의 安保를 뒤흔들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親美, 親中, 反美, 反中 등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기득권층은, 국가적 大事를 결정함에 있어, 결국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속하기 위할 따름이다. 그것은 이씨조선의 당파싸움의 경우처럼,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그런데 국제정치는, 그러한 결정에 의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日帝强占이나 韓國戰爭 등이, 그 現代史的 事例이다.
흔히 이씨조선의 당파싸움에 대해, 植民史觀을 좇아 해석하는 경향이 익숙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확한 분석이기도 하다. 그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卑下하고, 자기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해석만은 아닌 것이다.
외려 숲 바깥에서 숲을 보도록 하며, ‘우물 안 개구리’의 한정된 시야를 벗어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팔을 안으로 굽는 법이라서, 한국인이라면 응당, 이씨조선의 당파싸움에 대해서도, 되도록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며 美化하려는 것이 人之常情이다. 어쨌거나 우리 先祖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역사 해석은, 비판적인 관점에 의한 것이다. 그래야만 과거의 試行錯誤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兩班은, 이씨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서, 士農工商 중에서 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이씨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家門, 그리고 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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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정치철학, 프루동 바쿠닌 고드윈 슈티르너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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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정치철학
1. 최초의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는, 지극히 政治的이다. 一言以蔽之하여 ‘인간존재의 삶은 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실정치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하고, 나아가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예술적이며 재미있다.
그런 ‘정치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다.
물론, 고도의 知的 行爲에 의해 조작되는 정치적 상황을, 서민대중으로서 쉬이 이해되고 분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놀아나는 ‘개돼지 群衆’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죽음의 순간까지 國際政治와 國內政治라는, 현실정치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공부를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東西古今의 역사적 사례를 회고할 때, 아나키즘은 실현불가능한 철학사상이다. 그래서인지 아나키즘이야말로, 현실세계의 인간존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그러한 정치적 상태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권력관계가 구조되고, 그러한 권력관계를 작동시키는 억압적 위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은, 그런 원초적 억압 자체를 부정한다. 때문에 억압적 지배자를 형성하는 所有라는 행위 자체도 부정한다.
그러한 否定이 가능한 것은, 현실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所有를 부정하는 無所有的 共有가 실현가능 하겠는가. 지난 역사를 思慮할 때, 애석하게도 그러한 상태는 실현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無用하며 不必要한 정치철학에 불과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的 解體가 전혀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是認한다면, 아나키즘 類의 철학사상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검증된다.
현실세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아나키즘的 思惟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제안할 수 없으며, 현실세계는 결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도 별다르지 않다. 右派가 집권하든, 左派가 집권하든, 흔한 기득권 세력의 ‘내로남불’ 식의 致富는 당최 개선되지 않는다.
그렇게, ‘多數의 어리석음’에 대한 ‘小數 기득권층’의 착취는,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한 악순환은, 인류의 역사가, 늘 기존의 ‘억압적인 정치적 틀’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탓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開闢과 같은 ‘코페르니쿠스的 轉回’ 요구된다.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철학적 방법론이, 바로 아나키즘的 사유방식이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체제적 토대는 모름지기 國家다. 그러한 국가를 보호의 주체로 인식하는가, 억압의 주체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각 인간존재의 이념적 판단은 가름된다.
국가를 보호의 주체로 인식하는 세력은 ‘부르주아’이고, 국가를 억압의 주체로 인식하는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이기 십상이다.
이는, 단지 근대적인 정치철학적 개념으로써 분별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고대적인 개념으로서, 현실세계의 역사적 작동원리이다. 단지 근대적인 정치철학적 이론과 논리에 의해 새로이 규정되었을 따름이다.
그야말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 ‘주인과 노예’의 대립, ‘군주와 백성’의 대립,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 등, 그 체제방식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근본적 작동원리는 彼此一般이다.
그러한 역사 안에서, 인간존재들은 혁명적 변화를 摸索하고 圖謀했다. 하지만 성공한 역사적 사례는 不在하다. 다만, 근현대에 이르러, ‘러시아’와 ‘중국’을 爲始한 ‘共産主義(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世界史的 開闢은, 경제적 실패로 인해, 어느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資本主義體制를 도입하여 改革開放을 진행하는, 중국이 근근이 명맥을 지키고 있으나, 미중 패권전쟁의 상황을 思慮할 때, 그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人類史의 근원적인 不條理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왜 이렇게 실패하고 마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존재 本性에 대한 이해가 不在하거나, 外面하는 탓이다.
기존의 억압적인 계급체제는, 분명 인간존재의 意識的 理性에 부합되지 못한다. 심각하게 일그러진, 不公正하며 不平等한 체제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재의 無意識的 感性에는 참으로 的確하게 符合된다.
이러한 상황이 명료히 인식되지 못하는 탓에, 인류의 혁명적 변화는 늘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다.
아나키즘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思惟方式은 수천 년 전 老子로부터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아나키즘이 제시되도록, 人類史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그것은 인간존재 본성에 대한 오해 탓이다. 인간존재의 본성 영역에 웅크리고 있는 本能的(陰的) 차원을 是認하지 않는다면, 향후에도 별다른 변화적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東西古今이 매한가지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을 살핀다면, 누구라도 쉬이 인식할 수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집권 이후 지금껏 진행되는 상황을 思慮하면, 당최 鼓舞的일 따름이며, 煽動的일 따름이다.
그저 권력의 유지에나 집착하던, 러시아, 중국, 북한 따위의 前轍을 밟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左派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右派들의 집권 당시를 회상컨대, 그야말로 五十步百步였다.
그러니 庶民大衆들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당최 暗鬱하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개돼지 群衆’의 次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역사의 근본적인 작동원리에 대한 理解가 不備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의 경우도 그러하다. 아나키즘이 좌파적 정치철학사상인 탓에, 우파들은 이를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 그런데 좌파들 역시,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나 아는 정도다.
그래서는 좌파든 우파든, 기득권층의 ‘개돼지’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有數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했듯이, 인간존재 스스로가, 오롯하게 자유로운 個人으로서 思惟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人類史를 관통하는 억압적 지배구조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조국’의 법무부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조국’은 다양한 정치경제적 위법행위를 자행한 인물이다.
특히 이슈가 된, ‘조국’의 딸 ‘조민’에 관한 입시부정 사건은, 그 의도가 未畢的 故意일지라도, 그 일련의 작태는 엄중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입바른 소리 잘 하던 ‘유시민’, ‘김두관’, ‘정의당’ 등은, 그토록 부르짖던 正義나 良心을 외면한 채, 그저 ‘내로남불’ 식의 제 식구 감싸기를 자행하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그토록 公正과 平等의 民主化를 부르짖던 세력들이, 결국 기득권층이 되고서는, 기존의 保守右派 기득권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보수우파가 進步左派를 뒤집어엎어야 할 시점이다. 그야말로 進步右派의 탄생이 절실한 시대이다.
기존의 보수우파나 진보좌파 따위는 이미 不在하다. 그저 권력의 破廉恥한 寄生蟲이 되어버린 ‘문재인 정권 집단’이라는 保守左派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것은 이미 진보좌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우파도 아니다. 아주 기괴한 보수좌파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제, 새로운 革新을 이끌 進步右派가 탄생하지 못한다면,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야말로, 진보우파가 탄생할 수 있는 適期라고 할 수 있다.
‘anarchism(anarchisme)’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는 ‘主人과 君主의 不在’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Pierre-Joseph Proudhon(1809~1865)’은, 프랑스의 相互主義 철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anarchiste’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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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중국 붕괴, 중국몽 21세기 중국의 헛된 몽상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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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소련 붕괴
1. 소련,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
一言以蔽之한다면, 소련이 붕괴되었듯이, 중국도 붕괴될 것이다. 21세기 國際情勢는, 매순간 숨 막히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향후 국제사회에 극단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中國夢을 내세우며, 세계 覇權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中共이 바라는 대로, ‘중국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역사적 사례를 참조할 때, 중국은 과거 소련의 붕괴를 재현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시진핑 正權은 中國夢을 철회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현재의 권력이 박탈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박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재 중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進退兩難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소련의 붕괴 과정을 통해, 향후 실현될 중국의 붕괴를 예측해 보는 일은 重且大하다.
인접국으로서 대한민국은, 중국 붕괴의 과정에서 나름의 생존을 도모해야 하고, 나아가 南北統一이나 故土收復 등의, 韓國夢을 실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國際政治의 현장에서는, 영원한 敵도, 영원한 同志도 없는 법이다. 국제정치는 철저히 ‘國益과 戰爭’에 의해 작동하는 탓이다. 특히 인접국 간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럴듯한 名分이나 理念은, 그저 외교적 차원에서나 요구될 따름이다. 상호 국익이 충돌하여 결정적인 상황이 도래하면, 결국 전쟁에 의해 상황은 결정될 따름이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近現代史만 회고해 보더라도 쉬이 알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게, 共産主義나 社會主義와 연관된 이데올로기 문제는, 지정학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지극히 尖銳한 정치적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내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 妄想을 꿈꾸는 자들이 大多數 존재하며, 현재의 집권세력이 그러한 망상에 세뇌된 세력인 탓이다.
歷史上 실제로 등장한 현실 社會主義國家 거의 대부분은, 혁명적 공산당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一黨獨裁의 성격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구성코자 했다.
그런데 냉전이 한창이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스탈린, 마오쩌둥, 호치민, 김일성의 경우처럼, 죄다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一人獨裁로 변질되어 버린다.
더욱이 일부의 경우에는, 일인독재를 하다 보면, 후손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는 욕심이 생기고, 결국엔 封建主義 독재가 된다.
그러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같은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선, 김일성의 권력을, 사실상 아들 김정일과 손자 김정은이 물려받았다. 가장 기괴하고 기형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인 것이다.
實狀 이것이야말로, 역사 안에서 실현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귀결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헛된 妄想은, 참으로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現實共産主義(프롤레타리아 독재)’ 國家가, 마르크스의 개념과는 다르게, 나중엔 봉건주의 독재국가로 변질된 것이다. 評議會主義者들은 이러한 현실공산주의 국가를 ‘변질된 勞動者國家’라고 정의했다.
지금 이 순간, 국제정세를 思慮할 때, 결국 中國夢은, 21세기 중국의 헛된 夢想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피할 수 없다.
그러한 과정에서, 隣接國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중국 붕괴의 상황을 이용하여, 南北統一과 故土收復을 실현해야 한다.
조만간 벌어질 중국 붕괴의 기회를 놓친다면, 이씨조선 500여년의 停滯期처럼, 한민족은 다시 역사의 뒤안으로 내몰리고 말 것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약칭 소비에트 연방(Сове?тский Сою?з) 또는 蘇聯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共産主義 國家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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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김일성,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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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이승만
1. ‘대한민국’의 독재자
현대 南北韓의 정치철학 사상가로서 대표적 인물은, 말할 나위 없이 南韓의 李承晩과 北韓의 金日成이다.
그런데 남한의 右派는 이승만에게 집착하고, 左派는 김일성에게 집착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온전한 정치철학적 관점을 갖기 어렵다. 하물며 남한에서 김일성을 추종한다거나, 북한에서 이승만을 추종한다면, 더욱 혼돈 속으로 빠져들 따름이다.
나아가 이승만이나 김일성을, 남북한 대표 정치사상가로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남북한의 現代政治史를 傍證한다.
실상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란 인간존재 자체는, 별달리 모범으로 삼을만한 행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이외에, 현대 정치사상가로서 내세워질 만한 인물은 정말 없는가. 애석하게도 없다. 金九, 朴憲永, 朴正熙, 金正日 등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그렇게 남북한에 마땅한 偉人이 不在한대도, 남한의 대한민국이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일구었다는 것은, 참으로 異彩로운 사실이다. 물론 북한은 이미 몰락한 상태에 있다.
이승만의 정치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同時的으로 김일성의 정치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이에 대해 편파적이며 편향적인 지식만을 지니게 되면, 그의 관점은 어김없이 일그러져버린다.
현실세계에서는 흔히 ‘내로남불’ 식의 思惟方式이 일상적이다. 내가 하면 아름다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추잡스런 불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사유방식에 얽매이면, 결코 ‘개돼지 群衆’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기득권 세력은, 온갖 프로파간다로써 외려 그러한 상황을 부추긴다. 그래야만 자기들의 방식대로, 서민대중을 선동질하고 조작질하여 利權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파의 입장에서라면, 이승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어려운 노릇인데, 별 관심도 없는 김일성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좌파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결국 ‘개돼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길지도 않은 인생이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그런 소중한 삶을 살아내면서, 기껏 ‘개돼지’ 노릇이나 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니 다소 버겁더라도, 어떻게든 숲 속을 벗어나 숲 전체를 보고, 우물 속을 벗어나 우물 밖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구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첨예한 선택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진영을 상징하고, 김일성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사회주의 진영을 상징한다.
지금 한국인들은, 이 두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상황에 逢着해 있다. 이 선택에 따라, 향후 대한민국의 向背는 갈릴 것이다.
그러니 두 진영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국가의 미래가 달린 선택이 그릇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重且大한 선택을 하기 위해, 먼저 그 正體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대 政治史에서, ‘박근혜’는 이미 지난 歷史다. ‘문재인’ 역시 금세 지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는 여전히 ‘박근혜’의 亡靈에 浮沈하며, ‘문재인’의 妄想에 不安하다.
본래 역사는, 항상 이미 지나버린 것들에 집착한다. 그런 것이 역사의 本性이다. 하지만 現實은 未來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역사의 前轍을 되밟게 된다.
그렇게 지난 역사에 얽매이는 탓에,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죽음의 순간까지 ‘개돼지 군중’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국내정치의 온갖 紛亂으로 인해, 한시도 편안치 못하다. 그렇다면 국제정치의 상황은 안정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국제정치에 비한다면, 국내정치야말로 평온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서민대중들은 국내정치의 권력싸움에만 온통 눈이 팔려 있다.
그런 탓에, 그러한 국내정치적 상황을 유발하는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한다. 이래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나’의 삶은 一回的이며 限時的이어서, 이번 生에서 마감되지만, ‘나’의 後世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그들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그러니 삶의 한순간도 결코 허투루 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의 토대가 되는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현장 역시 그러하다.
‘李承晩(1875~1965)’은, 李氏朝鮮과 大韓帝國 및 大韓民國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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