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칸트인가

도서정보 : 김상환 | 2019-07-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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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철학은 왜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가?“





도서 소개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칸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이뤄낸 위대한 철학 혁명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강의를 책으로 만난다!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 출간됐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긴 서가명강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지식의 확장과 배움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왜 칸트인가』는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가 칸트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 인간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철학이 시대의 고민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그 의미를 세밀하게 되짚어보는 대중교양서다. 서양 사상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속하는 칸트는 근대인에게 제기되는 궁극의 물음들과 씨름하면서 사고의 대전환을 이루어낸 서양철학의 아이콘이다. 오늘날까지 철학사를 장식하는 주요 사조는 칸트가 발견한 ‘초월론적 차원’ 위에서 개진되어 왔던 만큼 칸트는 근대적 사유의 대륙을 발견한 철학의 콜럼버스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칸트 철학이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평

생각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한 권에 집약된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
『왜 칸트인가』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네이버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에서 자문을 담당하고 있는 김상환 교수의 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이다. 서울대에서 개설되고 김상환 교수가 강단에 선 철학 입문 강의에서 학생들은 칸트를 다루는 부분에서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칸트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현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칸트를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쳐온 저자는 이 책에서 칸트 철학과 그것이 이루어낸 혁신적 변화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 사고의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면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칸트를 조명하기 위해 칸트 철학을 다양한 도식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이에 대해 저자는 “생각한다는 것은 때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다이어그램을 만들어간다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즉 철학은 지식을 가르친다기보다 생각하기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철학은 왜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가?
인류 정신사를 뒤바꾼 칸트의 3대 비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여러 철학자 가운데서도 칸트의 위상은 특별하다. 특히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꼽으라면 칸트를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정신사를 뒤바꾼 혁명적 변화를 이루어낸 것이 칸트 철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 『왜 칸트인가』는 칸트가 남긴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칸트 철학의 근간을 소개하며,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는 무엇을 이루어냈기에 이처럼 특별한 것일까? 칸트 철학은 인식론, 윤리학, 미학, 자연관 각각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전회에 비유되곤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통해 이전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주장했듯이, 칸트는 초월론적 차원을 발견하고 규명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완전히 전도시켰다. 칸트 이전에는 인식의 출발점에 대상이 있고 주체는 그 대상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거울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칸트의 인식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불리는 것이다. 이 책 『왜 칸트인가』에서 저자는 칸트가 인식론의 혁신과 함께 3대 비판서 각각을 통해 어떠한 복수의 전회들을 일으켰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처럼 철학의 신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한 칸트를 저자는 ‘철학의 콜럼버스’에 비유한다. 칸트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를 수놓은 의미 있는 사상은 대부분 칸트가 발견한 대지 위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는 물론 칸트 이전에도 있었다. 데카르트가 먼저 사유하는 주체를 논했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론에 완결된 형식을 부여해 철학의 근대적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이다. 칸트가 서양철학사에서 차지하는 거대한 위상과 그가 일으킨 위대한 변화를 표현하는 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호수의 비유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라는 큰 호수로 들어오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에서 시작된 물줄기다.” 이후 칸트를 시작으로 발전한 독일관념론은 서양철학사의 주류 중 하나가 되어 여전히 현대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철학은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어떻게 답하는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 위대한 스승, 칸트
이 책 『왜 칸트인가』에서 칸트가 인식론, 윤리학, 미학, 자연관에서 가져온 각각의 전회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철학적 논쟁을 위함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오히려 칸트의 현대적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칸트를 철학의 근대적 정체성을 확립한 철학자로 설명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근대인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 위대한 스승으로 부각하고 있다.
칸트는 당시 서양철학이 다루는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 철학자다. 저자는 칸트가 근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들을 정확하게 정식화했고, 그 분석이나 결론을 ‘모범 답안’으로 제시했다고 말한다. 칸트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정답을 알려주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시대에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칸트는 적어도 그들이 참고할 가장 균형 잡힌 답안을 내놓은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사고의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면서 근대인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 칸트의 철학이 이루어낸 혁신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꼽으라면 칸트를 빼놓을 수 없다. 칸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헤겔과 더불어 서양철학사의 5대 천왕에 속한다. 이 5대 천왕 중에서 단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많은 경우 칸트는 플라톤과 경쟁하면서 정상을 다툴 것이다. 칸트는 그만큼 서양 사상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우리는 앞으로 칸트 사상의 근간을 소개하되 그가 서양 사상사에 가져온 혁명적 변화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서양철학사는 칸트에 의해 어떻게 달라졌는가? 칸트 이전의 철학과 칸트 이후의 철학은 어떠한 대조를 이루는가? 이것이 이번 강의 전반을 끌고 가는 주도 물음이다. 이것은 서양 사상사에서 칸트가 만들어놓은 근대성의 문턱 자체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글 : 11-12쪽】



『순수이성비판』의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을 가르는 과정, 의식을 해부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왜 가르고 해부하는가? 의식 안에 들어 있는 인식능력을 찾아내고 그 능력의 작동원리(선험적 형식)와 한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칸트는 인식과 관련된 모든 물음을 마음의 분석을 통해 해결해간다.
요즘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마음 이론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체가 오로지 마음 작용에 따른 이미지일 뿐이라는 불교의 유식(唯識) 이론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칸트의 의식 이론이다. 그만큼 칸트의 의식 이론은 오늘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부 칸트의 인지 혁명 - 마음 모델의 혁신 『순수이성비판』 : 38쪽】



칸트는 이런 선과 법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법을 윤리학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양의 자리에 놓고 선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이다. 칸트는 이처럼 선 중심의 윤리학을 법 중심의 윤리학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위치가 바뀌면서 법과 선 각각의 의미도 달라진다.
법은 이제 사회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편적 규칙이 된다. 그 규칙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규칙에 부합하는 행동은 ‘선하다’ ‘좋다’ ‘착하다’라고 말해지는 반면, 그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악하다’ ‘나쁘다’ ‘죄다’라고 말해진다. 선악은 이제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과의 일치 여부를 가리키는 술어에 불과하다.

【2부 | 칸트의 윤리 혁명 - 덕 윤리에서 의무의 윤리로 『실천이성비판』 : 100-101쪽】



숭고는 아름다움과 함께 고전 미학의 양대 범주를 이룬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숭고 또한 추구해왔다. 요즘의 예술가들은 예쁘게 조형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의 미학을 멀리 하고 오히려 ‘추醜의 미학’17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추의 미학을 뒷받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숭고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미학의 중심에는 아름다움이 있다기보다는 숭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숭고를 이야기할 때 칸트는 자연의 숭고가 우리 안의 숭고를 일깨우기 위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숭고 체험은 도덕법칙이 일으키는 숭고 체험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부 | 칸트의 미학 혁명 - 근대 예술의 정초 『판단력비판』 전반부 : 221-222쪽】



칸트는 생명체를 존재론적으로 절대화하는 데는 손사래를 치며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 이후 철학사를 장식하는 다양한 유기체 형이상학은 칸트가 이루어놓은 결정적인 전회가 없었다면 세상에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관념론 이후 20세기에는 베르그손, 화이트헤드,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생명의 존재론이나 유기체 형이상학을 펼친다.
물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성과들을 흡수한 이들은 저마다 19세기의 학자들과는 다른 생명 개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들이 칸트가 『판단력비판』 후반부에서 가져온 전회에 여전히 빚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전회를 불완전하게나마 코페르니쿠스적 도식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그려볼 수 있다.

【4부 | 칸트의 생태 혁명 -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 『판단력비판』 후반부 : 243

구매가격 : 14,400 원

데리다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라캉,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사상사, 해체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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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





1. 한물간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의 普遍과 合理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解體되었다. ‘모더니즘’ 보편과 합리의 主體가, ‘利益과 戰爭’에 의해 작동하는 ‘道具的 理性으로서 權力’이었던 탓이다.
現實世界가 죄다 해체된 이후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무런 代案도 제시하지 않는다. 애당초 ‘革命的 解體’만을 목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온갖 해체 이후 찾아드는 것은, 응당 또 다른 ‘이익과 전쟁’이다. 그런 것이 人類史의 작동원리다.
‘生成과 解體의 되돎’은 역사의 本源的인 작동원리다. 생성의 시기가 지나면, 해체의 시기다 도래한다. 이는, 자연스런 법칙이며 현상이다.
다만, 인간존재의 限時的 生을 놓고 본다면, ‘人間事的 생성과 해체’는 실현되지만, ‘人類史的 되돎’은 ‘佛家的 輪回’와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生成的이거나 解體的인 樣相을, 동시적으로 드러낼 수 없으며, 대체로 兩者擇一的이다.
때문에 人類史는 ‘생성과 해체의 되돎’으로써 작동함에도, 人間事는 ‘생성과 해체’로써 한정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존재가 ‘생성과 해체의 되돎’이라는 天地自然의 本來的인 작동방식을 體得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보다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지금 여기’에 이르도록, 그러한 가능성은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현실세계가 죄다 해체된 후, 人類史는 다시 ‘이익과 전쟁의 법칙’에 의해 조작될 것이다.
그러한 되돎으로써나 人間事와 人類史는 작동한다. 참으로 애석하지만, 고작 그런 것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代案’으로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postmodernism’ 또는 ‘後期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後(post)’의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解體運動을 일컫는다.
一言以蔽之하여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물간 철학사상이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별다른 代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解體된 모더니즘 이후에 대하여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사상이 아닌 탓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解體哲學이라고 불린다. 現實世界 ‘온 존재와 온갖 것’들을 해체함으로써, 세계 자체의 해체를 목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체를 목적할 뿐, 해체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한물간 철학사상이 되었다.
모더니즘의 理性中心主義에 대해 근본적인 懷疑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으로서, 2차 세계대전 및 女性運動, 學生運動, 黑人民權運動과 構造主義 이후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키워드로는 ‘데리다’가 주장한 ‘解體(deconstruction, 脫構築)’인데 脫中心的, 多元的, 脫理性的 思考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용어 자체가, 역사학적 구분에서 근현대에 스쳐간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학자, 지식인, 역사가 사이에서, 그 정의를 두고서 극한 논쟁이 일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적 생각이 철학, 예술, 비판 이론, 문학,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즈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시기의 사회·문화의 接變現象만을 가리킨다.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대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많은 모더니즘의 주요 개념으로부터 反撥과 借用을 통해 모더니즘을 확장하거나 대체시킨 사조로 본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은 合理性, 客觀性, 進步性과 같은 理想에 많은 의미를 두었다. 이것들 이외에도, 19세기 후반 實證主義, 實在主義, 啓蒙思想 등에 뿌리를 둔 여타 사상들을 중시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의 결과로써 도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이란, 後期資本主義와 미디어 매체의 성장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당시 사회를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진입하게 하였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와 저술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모더니즘의 확장일 뿐이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나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前期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우리 시대의 경제적·기술적인 상황들이, 소통과 의미의 항구적이고 객관적인 것, 즉 ‘實體(이데아)’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疏通, 製造, 交通의 혁신에서 비롯된 세계화는, 분립된 근대적 삶이나 문화적 다원론, 상호 연결되어 정치, 소통, 지식생산 등의 집중화된 중심을 잃고, 상호 연결된 세계사회의 한 원동력으로 종종 언급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와 같이 分立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거짓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나 혹은 ‘巨大敍事(meta-narrative)’와 ‘覇權(hegemony)’의 單一化와 같이, 포스트-모던으로 표현되는 應答, 認識을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단일화’란 전통적 장르, 구조와 문체의 틀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범주를 顚覆시킨 것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예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寫實主義(Realism)’와 모더니즘의 反撥作用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영역에서 서로 추구했던 점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胎動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작용이었다. 構造主義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多樣性을 강조하였으며, 理性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思辨도 ‘하나의 이야기(巨大敍事)’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
또한 칸트가 純粹理性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理念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철학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에 끼친 영향도 컸다. 예를 들어, 미술, 음악의 대중화와 미술에서 등장한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음악에서 등장한 랩과 같은 장르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장르는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는 장르의 벽이 느슨해지고, 全知的 시점보다는 다른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현실감을 증대시키고 독자의 상상력을 중시하게 된다.
소설 따위의 마지막에 약간의 여운을 남겨두고, 독자가 생각하게끔 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작가 위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독자가 능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는,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理性이 좀 더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이성이 도구로 변질된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박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前衛藝術, 그리고 ‘解體(Deconstruction)’ 혹은 後期構造主義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近代(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啓蒙主義로부터 시작된 理性中心主義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合理主義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코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써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崇嚴(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寫實主義(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前半 ‘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再現(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遠近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實在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줄거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 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적 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懷疑가 일어나면서 도전받는다.
對象은 보는 자의 主觀에 따라 다르다는 前提도, 미술에서는 印象主義로부터 시작되어, 立體派 등 具象보다 抽象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獨白(의식의 흐름)’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인해 대중과 遊離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理性과 普遍性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現代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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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도래인의 국가 일본 철학사상사, 일본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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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은 무엇인가





1. 고대 신토철학

日本哲學은, 外來哲學과 ‘일본 고유의 요소(神道)’와 융합된 철학사상이다. 일찍이 中國哲學과 印度哲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西洋哲學의 영향도 받고 있다.
일본철학은 韓國哲學과 유사한 思想史를 체험한다. 고대사회로부터 근대사회에 이르도록, 일본철학의 중심에서는 늘 韓半島 渡來人 세력의 역할이 至大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古代에는, 북방 유목문화의 샤머니즘이 한반도를 통해 전파되어 神道哲學을 형성했고, 中世에는 중국 불교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전파되어 佛敎哲學을 형성했으며, 近代에는 중국 유교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전파되어 朱子哲學을 형성했다.
그러다가 근대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동안, 西洋哲學이 전파되어 일본철학을 주도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일본이 서양철학을 철저히 수용하면서도, 일본철학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탓에, 일본은 현대적 강대국으로서 현재적으로 존속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한다면, 대한민국은 近代的 국제정치의 難局에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는데, 그러한 분단의 결정적 원인이, 남북한 철학사상의 이데올로기的 分離에 있다고 해도 그릇되지 않는다.
철학사상이 먼저 분단되어버린 탓에, 列强들이 각축하는 그레이트 게임 속 국제정세에 의한 분단 상황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한반도로부터 철학사상을 전해받은 일본은, 현재에 이르도록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 존속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처럼, 역사적으로 식민지나 분단의 상황을 체험하지 않은 것은, 단지 地政學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동서양이 분리되어 있던 시대에, 일본은 地政學的으로 外勢로부터 다소 안전할 수 있었다. 항상 滿洲와 韓半島가 완충지역으로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大航海時代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본이 외세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현재에 이르도록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바탕은, 일본의 철학사상에 있다. 곧 일본의 精神性과 精神文明에 그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현재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의 경우처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 이는, 日帝强占이라는 歷史的 痛恨을 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는 까닭은, 그 역사의 포로가 되거나 노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그러한 역사를 통해 現在와 未來를 보다 잘 살아내기 위해서다.
日帝强占 36년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難堪케 한다면, 明나라의 屬國으로서 植民地에 가까운 상태로 살아낸 歷史가 조선왕조 500여 년이었음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植民主義가 문제된다면, 중국과의 事大主義 역시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에선지 중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그러한 감정적 대응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는, 응당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國益에 도움이 되는 역사여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 것이야말로 참된 역사인 탓이다.
일본철학을 알아야 하는 까닭 역시 그러하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韓半島 渡來人 勢力에 의해 형성된 國家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것들을 철저히 自己化하였다.
예컨대, 上古時代부터 전승되어 현재까지도 일본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신토철학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신토철학은 天皇이라는 정치철학적 이미지와 連動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이라는 국가공동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正體性을 잘 알아야만, ‘隣接國은 결코 친할 수 없다’는 ‘隣接國의 悲劇’ 속에서, 대한민국의 存續을 보장받을 수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대만 등의 인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접국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적 不得已다. 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인접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면, 中國의 侵略戰爭,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전쟁, 일본의 침략전쟁 등과 같은 전쟁상황을 피할 수 없음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예컨대, 현대 일본의 政治哲學的 설계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3월 16일자 時事新報(산케이신문 前身) 사설에서, 이렇게 記述한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차라리 그 대열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隣接國이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나쁜 친구를 가까이하는 자는, 함께 惡名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東方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접국일지라도 문명국으로 발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국가나 민족이라면 철저하게 버리고, 일본만이라도 開化의 대열에 들어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철저히 ‘이익과 전쟁’의 법칙을 좇는 사유방식이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일본은 강대한 帝國으로 성장했고, 주변 인접국들은 대부분 식민지 상태로 내몰렸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은, 21세기라고 해서 별다를 것 없으며, 그 主體가 또 다시 일본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현재로서는 머지않아 중국이, 과거의 일본과 같은 행태를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때문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무역 등을 통한 覇權戰爭이 勃發한 것이다.
모름지기 국제정치적 상황은, ‘利益과 戰爭’의 법칙으로써 작동한다. 따라서 國家의 利益을 지켜내지 못하면, 이내 전쟁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21세기라고 해서 별다를 것 없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을 비롯하여, 북한, 베네수엘라, 이란 등에서 발생하는 戰爭的 상황은, 죄다 ‘이익과 전쟁’의 법칙에 의해 유발되고 있다.
이러한 ‘이익과 전쟁’의 법칙이, 가장 尖銳하게 激動하는 현장이 바로 인접국의 ‘사이(間)’다. 필자는 이를, ‘隣接國의 悲劇’이라고 규정한다. ‘인접국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접국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일본의 고대철학으로서 ‘신토(神道)’는, 古代 韓半島 渡來人 세력에 의해 전래된, 북방 유목문화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형성된 일본의 민속신앙 체계로서, 일본 고유의 多神敎 종교체계이다.
샤머니즘의 전래 이후,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전통적인 민속신앙 및 자연신앙으로서 자리매김 되었고, 豪族層이 다스리던 중앙 및 지방 정치체제와 관련되면서 서서히 성립되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도록 일본의 정신문화와 철학사상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토’는 다른 종교사상과 달리 특정한 敎理나 經典이 없으며,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 ‘고고슈이(古語拾遺)’, ‘센묘(宣命)’ 등에서 ‘神典’이라 불리는 고전들을 그 규범으로 삼는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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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과 행복을 다투다

도서정보 : 장국현 | 2019-07-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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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왔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신의 형벌을 다하기까지. 원하는 일의 창조가 아닌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세월을.

이 글은, 지고(至高)의 행복을 찾아 나선 자의 정신적 여정의 기록이다. 또한 행복, 삶, 죽음, 섭리, 자유, 자아, 종교 등에 대한 사색의 정리이기도 하다.

독자들께 부탁하는 바, 주제를 벗어난 중간중간의 잡설들은 쉽게 소화되지 않는 글의 소화제로 여겨 주시기 바란다. 일부 주제에 대해서는 중복되는 서술도 있으나 본(本)은 같아도 말(末)이 상이하여 굳이 생략하지 않았다. 교향악의 변주곡처럼 중요 주제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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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겨울.Winter, by Dallas Lore Sharp

도서정보 : Dallas Lore Sharp | 2019-07-09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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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패권국 아메리카 철학사상사, 미국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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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미국철학’의 기원

1. 美國을 알아야 韓國이 산다

美國哲學은 美國人의 철학적 활동 또는 성취를 의미한다. 그러한 정신문명의 바탕 위에서, 미국은 名實相符 세계 최강의 覇權國으로 성장했다. 現在的 상황에서, 미국의 패권은 향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미국은 대한민국과 同盟關係에 있다. 세계 최강의 패권국을 동맹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國際政治的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어쨌거나 국제정치의 현장은 弱肉强食의 정글이며, 그러한 戰場에서 살아남기 위해 强者를 자기편으로 삼아야 함은, 국제정치적 법칙이다.
물론 국제정치는 철저히 ‘利益과 戰爭’에 의해 작동하므로,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응당 國益을 모색하는 변화를 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 역시 매한가지다.
여하튼, 미국을 알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21세기 현재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과연 미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현대에 이르러 미국은 아주 친숙한 國家가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미국 그 자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너무 익숙하거나 가까워지면, 이내 흥미를 잃거나 무관심해지는 탓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存續과 國益을 위해, 미국에 대해서는 항상 銳意注視하며 明瞭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 세계 최강의 覇權國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일 따름이다. 그러니 우선은 미국에 대해 좀 더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美國哲學을 정립하는 哲學思想史的 旅程에서, 우리는 재미난 에피소드를 만나게 된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精神性을 定礎한 대표적 政治家이며 政治哲學者인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역사적 사례는 ‘理想과 現實’이라는 不得已한 不條理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퍼슨은 지극히 理想主義的인 民主主義者이며 人權主義者였지만, 그도 시대적인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수백 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한평생 안락하고도 고상한 생활을 영위한 버지니아의 大農場主였다. 제퍼슨 이외의 초기 미국의 정치가와 정치철학자들 역시 그러하다.
물론 제퍼슨처럼 明敏한 지성의 소유자가, 노예제의 문제점을 모를 리는 없다. 하다못해 黑人을 노예로 부리다 보면, 白人의 정신이 타락하게 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그는 노예제가 언젠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고 記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나 理想에 불과했고 現實은 별개였으며, 제퍼슨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 역사의 가장 큰 죄악인 奴隷制는, 제퍼슨 死後 수십 년 뒤에야, 그리고 그 副産物인 인종차별의 폐지는, 그로부터 100여 년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나아가 우리는 흔히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제 폐지’와 직접적 연관을 갖는 것으로 판단한다. 或者는 ‘노예제 폐지’를 위해 남북전쟁을 벌였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남북전쟁은 노예제와 별다른 연관을 갖지 않는다. 남북전쟁은 미국 내 南方과 北方의 利益이 相衝하자, 각자의 이익을 摸索키 위해 勃發한 전쟁이며, 그러한 이익충돌의 긴장 상황에서, 전쟁의 불씨가 된 사건일 따름이다.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과 관련하여 ‘벤저민 프랭클린’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이 강력하게 독립을 갈망했을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일은, ‘利益과 損害’ 사이의 저울질이었다.
예컨대, ‘프랭클린’은 처음부터 아메리카 식민지의 代辯者이며, 혁명의 주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질서와 실용을 좋아했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溫情的 保守主義者에 해당되었다.
원래 ‘프랭클린’은, 아메리카가 계속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바랐다. 그의 적수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식민지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기득권 독점 세력뿐이었다.
그러나 기득권 독점 세력의 횡포를 다스려 달라는 호소에, 영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이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독립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처럼, 國際政治는 물론이며 國內政治의 경우에도, ‘이익과 이익’이나 ‘이익과 손해’가 서로 충돌케 되면, 결국 그 解決策은 戰爭이다. 곧 ‘이익과 전쟁’의 작동원리에 따른 역사의 진행인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역시, 그러한 역사의 작동원리가 여실히 검증되는 명확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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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철학사상 헬레니즘, 그리스비극 철학사상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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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그리스 비극’을 찾아서





1. ‘그리스 비극’은 제정일치 농경제사에서 기원한다

고대 ‘그리스 神話’에서 最高의 神으로서 배치되는 것은 모름지기 ‘제우스’다. 그러다보니 ‘제우스’에 관한 신화적 스토리가 늘 主導的이다. 그런데 ‘제우스’에 관한 이야기들의 중심 테마는 대체로 ‘사랑과 섹스’다.
이로부터 ‘그리스 비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우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제우스 비극’의 ‘사랑과 섹스’라는 비극적 요소와 더불어, ‘狂氣와 陶醉’라는 비극적 요소가 附加된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를 접하다보면, 왜 ‘니체’가 ‘그리스 신화’를 비극으로 인식했는지를 쉬이 알 수 있다.
‘제우스’는 女神들과의 섹스는 물론이며, 人間女性들과의 섹스도 不辭한다. 심지어 자기의 딸인 ‘페르세포네’와도 섹스를 한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이다.
‘제우스’는 자신의 딸에게 뱀의 모습으로 접근해 섹스를 하고서, ‘디오니소스’ 곧 ‘자그레우스(위대한 사냥꾼)’를 낳는다.
이러한 ‘제우스’의 行態는, 그야말로 온 우주의 萬人을 平等하게 사랑하며 섹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萬人平等은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을 지극히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게 된다.
왜냐하면 ‘제우스’의 그 대상은 늘 아름다운 美女들이기 때문이다. 못생긴 女神이나 女性은, 眞實과 光明의 神 ‘제우스’의 ‘사랑과 섹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게 ‘제우스’의 ‘사랑과 섹스’로부터 외면받고 소외된 女子族屬들은, 男性中心主義的 人類史 안에서 늘 배척되고 소외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페미니즘’이나 ‘同性愛’ 따위를 주장하는 PC左派들처럼, 겨우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한다.
‘그리스 神話’에서 ‘제우스’의 사랑과 섹스 이야기를 빼면, 음식에 소금을 안 넣은 것처럼 신화가 재미없어진다. ‘제우스’는, 여신들은 물론 아름다운 인간 여인과 끊임없이 사랑하고 섹스하며, 그 결과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알피온’, ‘아이오코스’ 같은 영웅이 탄생한다.
특히 狂氣와 陶醉의 神 ‘디오니소스’는, ‘니체’ 이후 현대에 이르도록 ‘그리스’的 美學 思惟의 핵심주제로서 전승되고 있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의 어머니로서 ‘데메테르’, ‘이오’, ‘페르세포네’, ‘레테’ 및 인간 여인인 ‘세멜레’가 언급된다.
美學이나 藝術哲學的 측면에서 ‘디오니소스’의 탄생을 가장 극적으로 만든 어머니는, 그 중 人間女人인 ‘세멜레’이다. 신들 중의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인간 여인의 사랑과 섹스는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제우스’의 正室인 ‘헤라 여신’은 가정과 결혼의 여신답게 남편이 한눈을 파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보복은 ‘제우스’에게 향하지 않고 ‘제우스’의 연인에게 분출된다.
‘제우스’는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여신’의 딸인 ‘세멜레’를 사랑하고, ‘세멜레’는 ‘디오니소스’를 孕胎한다. ‘헤라’는 뒤늦게 그들의 관계를 눈치 챈다. ‘헤라 여신’은 ‘세멜레’를 응징하기 위해 출동한다.
그녀는 ‘세멜레’의 어린 시절 乳母인 ‘베로에’로 변신하여 세멜레를 찾아간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유모를 만난 ‘세멜레’는, 반가움에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세멜레’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유모에게 고백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는 바로 ‘제우스 신’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헤라 여신’은 순진하게도 자신에게 ‘제우스’와의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는 ‘세멜레’에게 속이 부글부글 끊는다. 여신은 ‘세멜레’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그가 ‘제우스’인지 아니면 ‘제우스’를 사칭한 사기꾼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며, 서서히 不信의 마음을 불어넣는다.
‘세멜레’는 ‘헤라’의 부추김에 귀가 솔깃해진다. ‘프시케’처럼 ‘세멜레’ 역시 자신의 사랑이 어떤 파국을 맞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제우스’의 말만 믿고 그가 ‘제우스 신’이라 생각했지, 실제 ‘제우스 신’의 본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제우스’는 왜 항상 변장한 모습으로 ‘세멜레’를 찾아올까. ‘헤라’의 질투가 두려워서일까.
그 이유는 ‘제우스’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제우스’는 밝음과 光明과 光彩를 관장하고 번개를 사용하는 神이다. 그런 신을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직접 볼 수가 없다. 아니 보아서는 안 된다. ‘제우스’를 직접 보는 순간 熱氣에 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라 여신’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멜레’가 사랑하는 이의 손에 직접 죽도록 하는 잔인한 복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 속에서, 인간의 호기심으로 인해 禁忌를 깨는 者는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신들은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인간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작은 움직임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호기심은 신화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지 못한다. 어쨌든 ‘세멜레’의 절박한 호기심 역시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다.
‘헤라’가 돌아간 후 생각에 잠겨있던 ‘세멜레’는, ‘제우스’가 오자 그에게 부탁 한 가지만 들어달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제우스’는 호기롭게, 아니 경솔하게도 ‘스틱스 강’에 걸고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런데 그 부탁은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제우스’는 신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세멜레’의 말에 신음을 뱉어난다. 그러나 이미 ‘스틱스 강’에 맹세까지 했으니, ‘세멜레’가 어떻게 죽게 될 지 명백하지만, 다시 물릴 수도 없었다.
결국 ‘제우스’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니 보아서는 안 될 영광스런 신의 모습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세멜레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한 바로 그 순간, 그의 광채에 불타 죽고 만다.
그런데 누가 ‘세멜레’에게 不信의 마음 때문에 죽음을 자초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세멜레’에게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過度한 소원이 되어버렸을 따름이다.
‘세멜레’의 경우처럼, 인간존재로서 가장 인간적인 行態는 眞實에 대한 끝없는 추구다. 인류문명은 그러한 진실에 대한 갈망으로써 神의 시대를 이어받아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존재가 진실 그 자체를 알려고 하는 순간,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의 경우처럼,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죽음의 종말을 맞게 될는지 모른다. 나아가 진실 그 자체가 實在하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런 탓에 인류문명이 存續하는 동안, 인간존재들은 결코 진실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 그러니 진실 그 자체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조차 불확실하지만, 생존을 위해 진실을 추구해야만 하는 不得已한 不條理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존재들이 신을 敬拜케 되었던 까닭이다.
물론 이러한 思惟方式이 非但 고대 ‘그리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고대 ‘그리스’의 祭政一致的 사유방식에 의한 神의 경배는,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목문화의 샤머니즘 전통으로부터 확산되어 전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古代 ‘그리스’에서의 喜劇 및 悲劇 등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에 ‘크레타 섬’이나 ‘미케네’ 등을 중심으로 開化한, ‘에게海’ 문화의 農耕祭祀로 거슬러 올라간다.
봄이면 풍요를 기원하고, 가을에는 결실을 감사하는, 해마다의 연중행사에서 연극적인 시도가 생겨났음은, 東西古今의 다른 모든 문화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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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도서정보 : 송해나 | 2019-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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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출산에 관한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트위터 '임신일기(@pregdiary_ND)' 계정주 송해나의 첫 에세이로, 임신한 여성의 일상이자 실상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2018년 철저히 계획해 임신을 한다. 하지만 막상 임신기를 겪으며 저자는 자신이 임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그동안 많은 임신.출산 경험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 또한 여성의 재생산권이 여성에게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음을 깨닫고 임신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다.

저자 송해나는 한국의 30대 여성이다. 그는 남편과 의논 후, 계획 임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임신 테스트기에 붉은 두 줄의 선이 뜬 순간부터, 그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드라마에서처럼 입덧 몇 번과 배가 불러 뒤뚱거리는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아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저자는 생각했다. 유전자가위로 난치병도 고치는 21세기 현대의학이 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은 줄여주지 못하는 걸까. 왜 아직도 세상의 모든 여성이 오래전 인류와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고통스러워야만 엄마가 될 수 있는 걸까. 왜 임신한 이후로 나는 외딴섬에 홀로 있는 것 같았을까.

그리고 저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임신 경험은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그동안 임신과 출산의 세세한 고통과 비참을 모두들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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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인지적 구두쇠다

도서정보 : 정계섭 | 2019-07-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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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한 인간은 생각을 그치지 않는다.


하루에 54,000가지 생각이 밀물처럼 떠올랐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고 한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오르는 것이다. 위대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내가 생각한다(I think)’가 아니라 ‘그것이 생각한다(It thinks)’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주 일리 있는 말이다.
숙고함이 없이 그냥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은 본질적으로 불건전하며 나를 속이기 쉽다. 이렇게 제멋대로 일어나는 생각을 감독할 줄 모르면 결국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 갇히고 만다. 아인슈타인은 두 가지 무한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한 가지는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이다. 이 책이 이에 대한 소박한 주석서(註釋書) 중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구매가격 : 9,000 원

선물처럼

도서정보 : 채송화 외 | 2019-07-0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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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완벽한 휴식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적었습니다. 도전하라고 다그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쉼이란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넘어 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에게 주는 휴식이야 말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주는 완벽한 휴식이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매가격 : 8,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