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문장 수업
도서정보 : 김동섭 | 2018-10-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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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이다!”
역사, 지혜, 영성, 문학, 철학, 예술, 사랑, 삶의 태도가
녹아 있는 라틴어 문장 수업
언어 속에서는 한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학습하는 것을 넘어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 세계관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만큼 우리의 교양과 지적 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언어가 있을까 싶다. 라틴어는 바로 로마 제국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어떤 나라인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천 년 제국을 이루며 전 유럽과 중동 그리고 이집트를 자신들의 언어와 제도로 개편한 국가이다. 서양의 정신세계와 학문, 종교, 법, 사회제도, 예술 등은 로마라는 저수지에서 라틴어를 통해 각 나라로 흘러들어 갔다. 따라서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서양 문명의 근간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할 수 있다.
하루 한 문장씩 따라가다 보면
라틴어 원문이 읽어진다
라틴어가 이토록 근사하고 지적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배우기에 어려운 언어’라는 편견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수원대학교에서 10년 넘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동섭 교수가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라틴어를 배우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 ⟪라틴어 문장 수업⟫을 펴냈다.
저자는 라틴어로 기록된 경구, 속담, 격언 등의 문장을 소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라틴어 원문을 직접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 문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문장들은 ‘천천히 서둘러라 Festina lente’,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하라 Si vis amari ama’ ‘생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네 Media vita in morte sumus’ 등 그 문장 자체로 울림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문장이라도 원문 자체를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온전히 와닿지 않는 법이다. 저자는 다소 복잡한 라틴어 문법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며, 한 단어 한 단어 독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책에 소개된 라틴어 문장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라틴어 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삶을 위한 라틴어 강의
세계사, 문학인류학, 철학, 신화에 정통한 저자는 라틴어 원문의 정확한 해석과 더불어 각 문장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다채롭게 펼쳐나간다. 위대한 철인 세네카가 전하고자 했던 말에는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지, 고대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어떤 맥락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 것인지, 시인 오비디우스가 비유하여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지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풀어준다. 또한 로마 신화, 성경, 문학 속에 남겨진 문장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해줌으로써 교양적 지식과 재미에 더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저자가 들려주는 라틴어 이야기와 함께하다 보면 역사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고대 로마인들의 문학, 신화, 종교에 대해 구석구석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등을 배움으로써 지혜가 깊어지고 자신의 가치관이 좀 더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라틴어 문장을 배울 때마다 독자들의 품격과 교양의 수준이 한 층 더 상승될 것이다.
하루에 한 문장씩 읽다보면 라틴어의 실체와 고대 로마인들의 역사, 지혜, 영성, 문학, 철학, 예술,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을 때 꼭 필요한 라틴어 좌우명을 하나 소개하며 들어가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_서문 중에서
구매가격 : 10,500 원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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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모시는 사무라이
그리고 메이지유신
일본의 ‘사무라이[侍]’는, 무언가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대체로 그 ‘모심’의 대상이 主君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상 사무라이가 모시는 대상은 칼이다. 칼이 곧 주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人類史에서, 古代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칼의 시대에, 칼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칼은 상징적인 권력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칼로써 베어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그러한 칼 자체를 神처럼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銃의 시대가 되면서, 칼은 권력을 상실했고, 사무라이도 精神性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케 된다.
따라서 尙武精神의 상징이었던 칼은, 物質精神의 상징인 총으로 대체된다. 칼이 主君을 의미했다면, 이제 총은 資本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 中世에, 이미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開港으로써 총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컨대, 일본의 근대를 이끈 ‘메이지유신’ 시기의 ‘세이난 전쟁’은, 철저히 총과 대포를 이용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시기까지, 일본사회는 분명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기존의 사무라이들은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며 정치적 자본가로서의 변모를 꾀했고, 대부분 근대적 자본가로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일본사회에서, ‘칼과 사무라이’의 시대가 ‘총과 자본가’의 시대로 변화하는 樣相이다.
메이지유신을 주제로, 대표적인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면서, 필자로서는 여전히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植民史觀이라는 幽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非但,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東北工程이나 半島史觀의 문제도 그러하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부터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일제’의 ‘朝鮮史編修會’에 재직하던 ‘申奭鎬’는, 解放 이후 ‘국사편찬회’의 회장이 된다. 이후 이러한 계통을 잇는 ‘植民史學派’는,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美軍政’, ‘左右對立’, ‘韓國戰爭’ 등의 이유로 인해, 친일파 處斷을 엄정하게 실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은,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인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중국’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다. 이러한 정책은, 우리 민족의 ‘古朝鮮史’, ‘高句麗史’, ‘渤海史’ 재정립 문제와 첨예하게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서 銳意注視해야 한다.(탁양현: 洪範九疇의 政治學)
-하략-
구매가격 : 2,500 원
이단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의 사문난적 윤휴 박세당 정약용, 불교학 노장학 양명학 천주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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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로서 ‘道具的 理性’과 斯文亂賊으로서 저항적 異端
현대사회에서 異端은 흔히 종교적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이단은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이단이라면, 응당 主體思想이나 北韓을 의미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 또한 포함된다. 다만, 역사 안에서 이단에 대한 분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좇아, 이단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이단이 되는 변화가, 자연스레 찾아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이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작동하는 원리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이나 정치제도는, 조선왕조 말기 대표적인 이단이었다. 그래서 天主學을 이단으로서 처단한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나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것이 바로 역사의 政治性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말기에 천주학이라는 이단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고통은, 결국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老莊哲學, 佛敎, 陽明學 등을 선택했던 상황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從北으로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을 추종한다거나, 親中이나 親美에 대한 선택 역시, 자기의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목적하는 절대 다수의 서민대중으로서는,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할 까닭은 없다. 설령 그것을 선택하여 추종한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갈 것이며, 그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이단은 이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外交的 레토릭 쯤으로나 인식되는, 人權, 平和, 幸福, 正義, 共存, 主體, 革命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반드시 어느 편이든 선택하고 싶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어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적 이해가 없는 섣부른 선택은, 너무도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탓이다. 부득이한 탓에, 필자는 전통적으로 이단으로서 분별되던 학문을 주로 공부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따른 갖은 배척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단에 대한 비판이나 배척이 極烈했으며, 그러한 흐름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性理學이나 朱子學 이외의 학문적 이데올로기를 異端으로서 배척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기득권층인 왕실과 양반사대부가 추종하는, 통치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학문 이외의 학문을, 斯文亂賊의 학문으로서 규정하고 탄압한 것이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非但 조선왕조만의 현상은 아니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유용한 動力 중 하나가 곧 異端論理이다. 이단의 개념이나 대상은, 시대와 상황을 좇아 변화되면 족하다. 그렇게 시의적절한 개념을 정립하고서, 그에 해당하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먼저 그 대상을 결정하고서, 그에 상응하는 개념을 정립하는 경우도 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이단의 문제가 종교적인 행위로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종교적 포용마저도 일단의 이단에 대한 배척이 전제됨을 반증한다.
흔히 異端(heresy)은, 어떤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正統敎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주장에 대하여, 正統主義者 側에서 부르는 배타적 호칭이다. 여기서 정통주의자는 時流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삼는다.
근대 서양문화에서 횡행하던 ‘도구적 이성’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道具的理性(instrumentelle Vernunft)은, Max Horkheimer가 사용한 용어로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던 理性이, 이론적인 계산을 토대로,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제시하여, 인간 및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도구화되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본래 서구문명에서 인간존재의 이성은, 神의 역량에 버금하는 르네상스를 실현케 한 의대한 역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갓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이데올로기는, 애당초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이 당최 그릇될 리 없다.
그런데 최초의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얻어 세월이 흐르다보면, 恣意的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본래의 순수한 진실은 오염되어버리고, 그저 시대의 권력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역시 인류사에서 非一非再하다. 따라서 그러한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대체로 異端으로서 분별된다.
흔히 世俗의 종교조직에서도, 정통적 信條에 대해, 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자기 편으로서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異端視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옳고 그름의 대립이 있을 때, 정통파에서 쓰는 말로, 다른 종교나 종파를 가리키는 異敎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宣敎者의 경우, 자기의 宗旨를 옳다고 하고, 다른 종교나 분파를 異端邪宗이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예외적인 용법이다.
중국에서는 論語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말로, 정확하지 않은 학설이라는 뜻이다. 韓愈가 불교나 도교를 이단으로서 배격한 이후, 新儒敎(朱子學)에서는 ‘聖人의 道’에서 벗어난 학설이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陽明學 左派에 철저했던 李卓吾(李贄)는, 대표적인 이단으로 몰려 옥중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李卓吾(1527~1602)는 明나라의 사상가이다. 이탁오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하였다. 금욕주의와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禮敎를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反儒敎的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다.
이탁오는, 1527년 10월, 명나라 泉州府 晉江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 하였는데, 元나라 때 선조들은 해상무역, 통역관 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원장은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아버렸다. 명분은 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고,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중국은 세계적인 조류에서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의 길이 막히자, 李贄(李卓吾)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못하게 되었다. 이지의 초명은 林載贄였으나, 장성하여 종가의 姓을 따라 李贄라고 개명했다. 별호로는 宏甫, 卓吾子, 李和尙, 禿翁, 百泉居士 등이 있다.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지역을 전전하다,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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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도서정보 : 강수희, 패트릭 라이든 | 2018-10-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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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는 원래 즐겁게 사는 거죠!
전 세계 친구들이 응원하고 지지한 자연농 프로젝트
다큐 작업은 지난한 여정이었다. 영상 제작에 있어서 아마추어인 두 사람에게 돈과 기술의 벽은 높았다. 그렇지만 보장된 직장과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나선 두 청년의 활동을 지지하는 친구들이 세계 각국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취재와 통역과 번역,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과 음악 작업까지 자청해 도맡아 주었다. 특히 4년 만에 완성된 다큐는 기존의 영화 배급업체나 상업적인 홍보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100여 회 이상 2,000여 명이 넘는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진솔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 상영회를 열었던 두 사람의 선택과 결심이 조그만 결실을 맺은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다큐 작업 중에도 자연농을 뿌리 삼아 ‘지구 위에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지혜를 꾸준히 나눴다. 일본 야마구치 시와 영국 에든버러 대학 등에서 자연농 전시와 토론회를 열어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만났고 자연물을 이용한 워크숍도 진행했다. 특히 2015년과 2016년 일본 오사카와 메기지마 섬에서 실시한 ‘세상에서 가장 느린 레스토랑’(몇 달 동안 주민들과 직접 작물을 키우고 그 작물을 재료로 메뉴를 만드는 일일 레스토랑) 프로젝트는 지역민의 큰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자연농 농부들의 삶을 따라 ‘자연과 사람이 가까이 이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저자들은 또다시 많은 친구들의 응원 속에 일본 오사카에 있는 오랜 집을 고치고 텃밭을 가꾸며 새로운 생태?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할 예정이다.
도시에서 살던 이들이 자연농을 선택한 이유
질문이 아닌 답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 책에 나오는 11명의 자연농 농부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이다. 하지만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 이대로라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더 이상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자각한다. 13년 동안 축산사료업체에서 일한 무라카미 켄지는 창문을 열 수 없는 빌딩에서 수입 사료로 닭을 키우고, 무분별하게 닭의 배설물을 태우는 일을 관리하다 점차 회의를 느껴 회사를 그만둔다. 미술교사였던 가가미야마 에츠코는 큰 아이가 6개월이던 당시 일어난 1986년 체르노빌 사고를 보며,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다 자연농을 선택했다.
왜 이들은 자연농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일반 농사(관행농)와 달리 자연농이 땅을 갈지 않고, 풀이나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이기 때문이다. 저술과 ‘지구학교’ 운영으로 국내에 자연농을 알리고 있는 최성현은 농약으로 벌레나 잡초와 싸우는 현대농업의 문제를 지적한다. 과도한 비료와 농약으로 유지되는 괴로운 농사에 지친 농부들이 자연농을 통해 “나와 자연이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통해 자연농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농은 꼭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시골이든 도시든 우주와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잃는다면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며, 우리가 “도시가 아닌 우주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눈앞의 많은 문제와 불안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지혜를 전한다.
자연농은 무언가 계속 더하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현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또한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가는 활동이기도 하다. 두 저자를 비롯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답과 삶을 찾아 자연농 논밭으로 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매가격 : 11,900 원
세상을 읽다 시사이슈11 시즌 1
도서정보 : 오상도 등저 | 2018-10-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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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시사이슈 11가지2016년 연말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최순실 게이트’,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전대미문의 실험 ‘김영란법’, 갈수록 가혹하고 거침없어지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집단 ‘IS', 통합 유럽을 박차고 나와 독자 노선의 길을 선택한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간 논쟁을 넘어서서 국제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는 한국의 ’사드(THAAD) 배치 논쟁‘ 등 2016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시사이슈 11가지를 총 정리해 알기 쉽게 풀어낸 『세상을 읽다 - 시사이슈11 시즌1』(김승훈 외 10명, 동아엠앤비)이 발행된다. 대한민국 주요 언론 현장 기자 11명이 의기투합해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살아 있는‘ 시사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기획된 『세상을 읽다 - 시사이슈11』은 수차례의 회의 끝에 결정된 11가지 주제의 논란이 촉발된 계기와 논의 전개 과정,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등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풀어냈다. 저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엮어낸 글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를 알기 위한 ’제대로 된 시사 지식‘의 전달이다.
구매가격 : 10,500 원
문학의 다양성-영미 시학 <수정판>
도서정보 : 라종혁 | 2018-10-0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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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영미 시학을 형식의 시점에서 탐구하며, 르네상스와 빅토리아 시학 역시 형식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 외에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시학은 철학적 시점과 문화론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영미 전통 시학을 전체적 맥락에서 탐구하며 영시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0,000 원
문학과 섹슈얼리티
도서정보 : 오세은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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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섹슈얼리티의 얼굴들
《문학과 섹슈얼리티》는 문학 속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문학의 작품과 작가뿐만 아니라 외국문학의 작품과 작가들의 섹슈얼리티를 함께 논의하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이론적 토대가 외국작가의 작품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동시에 감상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학 속에서 성과 사랑 같은 개인의 사생활이 왜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보이고자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책의 목표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이해하고, 문학작품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해석을 이론과 병행해서 체계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선보인다.
최근 들어 섹슈얼리티가 문학,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문화적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적·사회적 이해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다소 난해한 구석이 있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론적 학습과 작품 감상을 모두 성취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성담론이 과거에 비하여 퇴보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성과 사랑의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학문적 기반이 되리라 믿는다.
구매가격 : 10,200 원
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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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開闢은 곧 革命이다. 개벽이든 혁명이든, 흔히 인위적인 激變인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天地自然 안에서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한 바는, 個人이든 集團이든 매한가지다. 다만, 개벽은 원만한 自然의 측면이 강하고, 혁명은 급격한 人爲의 측면이 강하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개벽은 종교적 개념이고, 혁명은 정치적 개념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것은 다소 便宜的인 분별일 따름이다. 그러한 detail이 不要한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개벽적 혁명이란, 천지자연 자체의 자연스런 변화라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세계에는 온갖 다양한 형식의 ‘開闢的 革命’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개벽적 혁명 중에서, 굳이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가장 巨大한 존재형식인 國家的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고, 가장 微小한 존재형식인 個人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生存의 利得’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집단공동체는 중국과 일본이다. 물론 북방의 여러 민족도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여건보다도 강력한 地政學的 여건을 좇는다면, 응당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여 거론치 않을 수 없다.
中國 近代 역사에서, 그러한 開闢的 革命을 실현한 인물은 홍슈취안, 쑨원, 마오쩌둥 등이다. 이 외에도 개혁적인 변화를 추구한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근대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중국대륙은, 항상 혁명적 개벽의 변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반도는, 高麗王朝로부터 朝鮮王朝에 이르는 1,000여년 동안, 마치 ‘고인 물’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이 정체된, 王朝 獨裁의 역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21세기의 한반도는, 개벽적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만큼 개벽적 혁명의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미 ‘6․25, 4․19, 5․16, 5․18’ 등의 개벽적 혁명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체험했다고 해서, 이제 개벽적 혁명의 動力이 정지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체험 탓에, 더욱 새로운 개벽적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러한 개벽적 혁명은 어떤 것일까.
21세기 大韓民國이야말로, 開闢的 革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철저히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人民民主主義와 共産主義’ 주변의 개벽적 혁명들이, 죄다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리는 것을, 이미 여실히 目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것들을 죄다 삭제해버고서 나아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면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개벽적 혁명은, 철저한 現實主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예컨대 낭만적 혁명가 ‘Che Guevara’와 같은 理想主義的 想像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한갓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음이,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예컨대, 근대 중국에서, ‘홍수전’의 太平天國이라는 개벽적 혁명의 경우를 살피면, 지금으로부터 150~160여 년 전에, 基督敎的 신화를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열정이, 無知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怪異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첨단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예컨대 ‘허경영’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현상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니, 그다지 괴이할 것은 없다. 하물며 서민대중의 대부분이 ‘文盲으로서의 지적 궁핍’과 ‘奴隸로서의 물질적 빈곤’에 허덕이던 과거에는 어떠 했을지,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상세계에 진정 Utopia는 작동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유토피아는, 인간존재의 認識的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결코 나쁜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권력과 자본을 탐내어 표에 아부하는 ‘정치꾼’ 수천 명 보다는, ‘홍수전’이나 ‘허경영’ 같은 ‘유토피아적 이미지’가 더욱 소중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당최 가진 게 없는 서민대중으로서는, 험난한 亂世가 닥쳤을 때, 그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낼 마땅한 방편이 도무지 없으며, 기득권층은 본래 그랬듯이 국가나 국민에게는 관심 없으며 그저 제 몫에나 집념할 때, 그래도 그나마 힘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것이, ‘미륵’과 같은 유토피아라는 개벽적 혁명의 理想鄕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작동한 시기는, 동아시아는 물론이며, 전 세계가 집단적 난세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彌勒, 鄭鑑錄, 東學, 甑山 등, 다양한 혁명적 영웅과 개벽적 이상향이 등장했다. 그러니 설령 그것이 惑世誣民의 似而非에 불과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각별하다. 그러한 난세에는, 외려 합법하고 적법하다는, 집단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暴壓이야말로, 더욱 잔혹하며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日帝强占 시기에, 그 主體勢力인 일본은 말할 나위 없으며, 그러한 일본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末期 朝鮮王朝는 또 어떠한가. 과연 그들에게서, 서민대중들이 一抹의 희망이라도 모색할 수 있었겠는가.
고통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면, 稀少하게도 ‘빠삐용’처럼 불굴의 의지로써 이상향을 추구하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시나브로 매몰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할 때, 영웅과 이상향은 참으로 소중한 대상으로서 작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한다. 이는 실로 현실세계의 不得已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아주 잘 알려진 두 가지 캐릭터를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향후, 21세기 韓民族의 개벽적 혁명을 모색함에 있어, 아주 강렬한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작 ‘체 게바라’는 ‘빠삐용’의 同一的 그림자였음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한다.
그런데 ‘체 게바라’와 ‘빠삐용’의 ‘이미지 중첩’과 유사한 역사적 상황으로서 모티브가 된 것은, 근대 중화민국과 조선왕조에서 등장한다. 중국군벌 ‘차오루린’은, 조선왕조의 ‘이완용’과 상호 유사한 캐릭터다. ‘차오루린’은 ‘5․4운동’의 비난의 대상이고, ‘이완용’은 庚戌國恥의 비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문제가 되는 외교문서에 결정적으로 직접 서명을 하였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서명한 것은, 비단 개인의 결정에 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처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니 일견 ‘역사적 희생양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중들은 時流를 좇아, 대다수가 비난을 하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며, 집단의 관성에 떠밀려 多數의 무리에 편승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집단대중에게는, 어떤 집단적 인식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완용’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韓民族의 대표적인 민족반역자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규정되어 비난받는다. 그래서 단지 ‘이완용’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極右나 極左에 의해 비난받는 상황까지도 연출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이완용’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極右的인 衛正斥邪主義者’나 ‘極左的인 獨立主義者’처럼, 적극적인 폭력행사도 不辭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집단대중은 ‘이완용’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존재의 행동방식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비난한다. 비난을 표하지 않으면, 자칫 자기가 ‘희생양 이미지’가 되어버릴 수 있는 탓이다. 게다가 자기 편의 숫자가 多數이면, 이제 비난의 정도는 가혹할 지경에 이른다. 이는, 어떻게든 ‘희생양 이미지’를 제작하고야 마는, ‘권력의 가혹한 本性’이다.
그리고 정작 대표적 민족반역자로서,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응당 그 시절에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高宗에게 묻는 것이 합당하다. 어쨌거나 ‘차오루린’이나 ‘이완용’은 ‘역사의 희생양 이미지’로서, 아주 오래도록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차오루린’과 ‘이완용’이 상호 유사하게 ‘이미지 조작’되었다면, 정반대의 위치에 배치되어 ‘이미지 조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동시대에 발생한 상황이므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을 思慮함에 있어, 재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중국이나 대만을 가보면, 소위 ‘中山公園’이나 ‘中山路’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매한가지다. 이는, ‘손문(쑨원)’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쑨원’은 그야말로, 현대의 중화민국을 제작해 낸 國父로서, 굳건히 자리매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近代史를 살핀다면, 실상 ‘쑨원’의 역할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니 아무래도 과장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물론 ‘쑨원’이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에 主演으로서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餘他 인물에 비해 별로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에 동시대에 대한민국에서, 대체로 ‘이승만’은, ‘쑨원’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이승만’ 역시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 ‘쑨원’처럼 國父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을 거론할 때면, ‘정읍 선언’에 의한 남북분단의 元兇이며, 고집센 高齡의 독재자로서 규정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일부 보수적 세력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 이 또한, ‘쑨원’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듯이, ‘이승만’은 지나치게 축소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누구 못잖게 나름대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日帝强占과 같은 지옥으로 매몰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이미지 조작’의 片鱗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 바로 역사이다. 그러니 역사를 대할 때,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서, 항상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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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 존 로크 장자크 루소 알렉시스 드 토크빌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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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民主主義의 資本’과 ‘人民民主主義의 Kitsch’
周知하는 바와 같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체제원리는, 응당 自由民主主義다. 자유민주주의는 근대 서양문화의 정치철학적 산물이다. 대한민국은 여러 이유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과연 그럴 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人類史에 등장하는 어떤 체제원리보다도,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을 가장 인간답도록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통치철학들이 존재한다. 그 이론만으로 치자면, 자유민주주의를 능가하는 철학사상은 적지 않다. 동양의 정치철학의 경우에도, 孔孟이나 老莊의 帝王學的 통치철학은, 만약 그 이론대로만 실현될 수 있다면,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쉬이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이다. 諸子百家의 다양한 통치철학은 물론이며, 近代에 世界史를 搖動시켰던 맑스의 통치철학은 또 어떠한가.
맑스의 공산주의 통치철학은 실로 아름다운 정치적 이상향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주의적 상상일 따름임이, 역사로써 검증되었다. 朝鮮王朝를 주도했던 孔孟 전통의 朱子學的 통치철학 역시 그러했다. 공산주의 통치철학은 이상주의로써는 결코 현실세계를 나아지게 할 수 없음을 증명했고, 주자학적 통치철학은 그것보다 나은 통치철학이 작동하기까지 꼼짝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不條理의 엄청난 고통을 증명했다.
물론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서 萬病通治藥일 리는 전혀 없다.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도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인류사를 고찰할 때,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만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정치철학은 不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은, 근대 이후 널리 회자되는 대표적인 청소년 교육론이다. ‘에밀’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소년의 이름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지속적으로 自然主義 교육론을 주장한다. 어린이에게는 ‘자연적 완전함’이 내재하므로, 그것이 발현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압적인 훈육을 부정하며 거부한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루소’는, 자기의 자녀 5명을 죄다 고아원에 보내버린 냉혹한 아버지이다. 혈연마저도 자기의 생존을 위해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청소년 교육론을 집필했으며, 自然主義的 교육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실로 irony다. 그러나 자기의 罪過에 대한 自己處罰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납득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루소’는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적 교육을 부정한다. 그것이 지닌 폭력성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훈육의 폭력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으로서, 북한의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을 연상할 수 있다. 一絲不亂하게 기계처럼 작동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러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가혹한 강압적 훈육을 받았을지, 당최 상상이 되질 않는다.
‘루소’의 견해를 좇는다면, 북한의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이야말로, 强壓主義 교육의 典型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비판하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이 人權主義 차원에서 지극히 타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당초 ‘루소의 에밀’이, 자기 자식을 내버린 原罪를 지니고 있음 또한 묵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원죄는,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援用한다면,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야만 하는 不得已한 不條理와 닮아 있다. 現在的으로 자본주의는 분명 원죄처럼, 市場이라는 것에 본래 惡魔性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하여 작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항상 견제와 균형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북한의 主體思想 교육론은, 자기 어린이들을 집단적 강제 속으로 내던져, 예컨대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이데올로기 작품을 제작해낸다. 나아가 그러한 원리가 작동하여 표현되는 體制理論이나 國家共同體라는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Kitsch라고 할 것이다. ‘키치’는 一見 ‘醜의 美學’이다.
辭典에서 ‘키치(Kitsch)’를 찾아보면, ‘저속한 작품’ 혹은 ‘공예품’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형용사 ‘키치的’은 ‘천박한, 야한, 대중취미의’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되어 있다.
一言以蔽之하여 키치란, 겉으로 봐서는 예술품인 듯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천박한 싸구려 상품으로서, 당최 예술품일 수 없는 것이 바로 키치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무수한 저작들 역시, 이러한 키치의 분별로부터 당최 자유로울 수 없음이 필자에게 깊은 아픔과 설움으로 다가서는 건, 또 무슨 까닭일까.
여하튼 키치라는 용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처럼 매우 근대적인 것이다. 키치는,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화가와 畫商의 俗語로 사용되었으며, 하찮은 예술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이르면, 느슨하고 널리 유통되는 호칭으로서, 국제적인 용어가 된다.
키치의 발생 배경은, 美學的으로는 낭만주의 예술에서, 사회적 배경으로는,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과 예술의 상업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이미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파급 속도도 빨라, 중산층도 그림과 같은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 듯한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은, 共産主義나 人民民主主義가 중산층 대중문화에 習合되어가는 상황과 유사성을 갖는다. 비록 귀족적 ‘금수저’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知的 역량을 지닌 文化大衆에게, ‘도덕적 인권주의’나 ‘이상적 평등주의’ 등은 분명 매력 있으며, 구매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美的 논의의 대상으로서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현대에 이르면서, 고급문화나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까지 개념이 확대되어, 현대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본래 키치가 가리키는 구체적 대상은, 古美術品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이나 유사품, 통속미술작품 등이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와 같은 걸작품을, 석고나 플라스틱으로 복사한 ‘가정용품’에서, 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粗惡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미술품과, 저속한 대중적 취향의 대중문화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상황은, ‘맑스’의 공산주의 작품을 모방하여 제작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본래의 共産主義는 실로 아름다운 정치사상적 예술작품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작품화되었을 때는, 고작 ‘러시아’나 ‘중국’의 社會主義體制쯤의 작품밖에는 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북한의 ‘주체사상’에 의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란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분명 그 原作으로서 원용된, ‘맑스의 공산주의’나 ‘조선왕조의 성리학’에 의한 정치철학적 작품들은,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북한 땅에서 실현되었을 때는, 결국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작품들처럼, 천박한 키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이 키치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키치도 분명 類似예술작품이기 때문이며, 키치가 지니는 기괴한 매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탓이다.
키치에 대한 평가는,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표현하는, 특정 철학적 미학적 범주라는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개념이 확대되면서, 키치가 가진 사회적 기능과 성격에 주목하게 되었다.
키치는, 본래의 기능을 거부하는 특성, 충동이나 수집의 특성, 값이 싸야 하며 축적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낭만적 요소를 포함하며 상투성과 쾌적함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여러 요소들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중층성의 특성 등을 가진다.
키치가 가진 이러한 사용기능에 사회적 기능이 부과되어 키치가 존재하므로, 키치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키치는, 처음에는 ‘이발소그림’과 동의어였다.
허름한 이발소의 벽면을 차지한 싸구려 액자 속에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돼지나, 가을 추수가 끝난 전원풍경, 밥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뿜어나오는 해질녘 시골집의 풍경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염원하는 행복의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이발소그림과 같은 키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서나 내용을 담고 있는, 미적 수준에서는 한없이 저급한 그림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제 키치는, 단지 이발소그림과 같이 미적으로 저급하거나 조악한,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특수한 장르화뿐 아니라, 자본주의 문화 일반, 나아가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리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그것이 마치 자본적 시장이 지니는 惡魔性처럼, 키치가 지니는 악마성이다. 심지어 키치는, 미학적인 퀄리티를 갖는 데 실패한 저급한 예술품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우수한’ 특정 작품들의 어떤 경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고급예술의 맥락 안에서, 이제 ‘키치的’이라는 의미는, 어떤 작품들의 성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미적 개념이다. 키치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팝아트 이후 고급예술 전반을 장악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지배적인 경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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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 당한 기억 사이로
도서정보 : 김상훈 | 2018-10-0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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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날마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사유의 빛 점들이
내 안의 옹벽을 쌓는 흙으로 정착하기보다
하릴없이 저물다가는 낮과 밤처럼 종종 아프다
그것들은 며칠 혹은, 몇 달씩 닻을 내리고
내 사유의 굽은 등성이에 따개비처럼 증식하며
게으른 자아의 입자들을 무한정 휘젓는다
그럴 때마다 터무니없이 갈변하는 시구의 방점들
이제 갓 피어난 사유의 물꽃 위로
겹겹 떨어지는 기호의 빗방울들은 몸 버릴 곳 몰라
“벌목 당한 기억 사이로”
발신자 불명의 글 한 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혁명을 기대했던 햇살이 냉정하게 제 갈 길 가듯
몸 버리고 갈 줄 알았더니 몸 데리고 간다
한 시절의 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이 때로는
까실한 생의 사포질에 뼈까지 갉아먹히는 듯하여
수면 위에 눈물 한 잎 새기는 일처럼 아득하다
“벌목당한 기억들이 먼훗날 누구의 잎새가 되든”
고뇌에 동참했던 팬들, 김상훈의 뜨락 식구에게 감사드리고
이 시간에도 연탄불에 얼굴 디밀고 있을 아내 이숙자 씨에게
이 책으로 발생하는 기쁜 일이 있다면 아낌없이 모두 바치며
시음사 편집실과 김락호 대표님께 감사의 염(念)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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