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클라우드-푸치니

도서정보 : 유윤종 | 2018-09-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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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음악은 죄의식을 부르는
달콤한 유혹이다”

오페라의 절정을 찬란하게 물들인 감상주의 마법사의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의 근원을 찾아서

푸치니의 선율이 흐르는 이탈리아의 새벽을 걷다

- 명작의 탄생지로 떠나는 음악기행
-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거장과 명작의 인사이트
-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오페라의 제왕. 푸치니에게 이보다 더 적확한 수식어는 없다. 오페라가 오늘날의 영화만큼이나 대중적인 여흥이었던 시절, 푸치니는 살아생전 명성을 떨치며 백만장자의 삶을 영위한 대작곡가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푸치니의 작품은 지난 세기 오페라의 마지막 절정기를 장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도 끊임없이 향유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오페라 극장들이 내놓은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목록’에 푸치니의 3대 흥행작 〈라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은 언제나 6위 안에 들며, 북미 오페라 공연 일수의 4분의 1이 이 세 작품으로 채워진다는 통계도 있다. 휴대전화 판매원 출신의 테너 폴 포츠는 오디션장에서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를 불렀고, 콜드플레이는 내한 공연 당시 첫 곡으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를 연주했다. 각각 〈투란도트〉와 〈잔니 스키키〉 속 아리아다. 오페라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어느 오페라 작곡가도, 어느 아리아도 이런 환대를 받은 적 없다.
『푸치니: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제왕』은 푸치니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오페라의 고향 이탈리아를 거닐며 그의 삶과 작품의 발자취를 좇는 특별한 여행기다. 여러 매체에 클래식 관련 칼럼을 기고하고 강의를 해온 유윤종 음악 전문 기자는 이 책에서 푸치니의 마력을 가감 없이 풀어냈다. 유윤종 기자는 푸치니가 영감을 받고 성장했던 장소로 직접 찾아가서 푸치니 작품에 응축되어 있는 푸치니의 경험을 추적한다. 루카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데뷔한 후 잇따른 대작으로 성공하기까지, 그는 두 도시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거장으로 발돋움한다. 반평생의 거주 공간이자 〈라 보엠〉과 〈나비 부인〉의 탄생지 토레델라고를 거치면, 〈잔니 스키키〉와 〈토스카〉의 영광이 고스란히 남은 피렌체와 로마에 도착한다. 푸치니가 그곳에서 느끼고 사랑했던 것은 그의 오페라에 ‘멜랑콜리’와 ‘새벽’이라는 구체적인 감정과 시간으로 남아 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다운 음악으로 응답할 것이다”
격정의 드라마로 전 세계를 매혹한 작곡가의 열정을 만나다

푸치니는 어떻게 자신만의 거대한 제국을 세울 수 있었나? 저자는 19~20세기 전환기 시대정신과 오페라 장르의 교차점을 대표하는 총아로 푸치니를 지목한다. 당시는 개인의 열정과 욕망, 환희와 슬픔을 정밀하게 표현하는 데 가치를 둔 시기였으며, 오페라는 개인의 음색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장르다.
유년 시절의 푸치니는 주의가 산만했으며(“푸치니는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바지를 닳아 없애기 위해서만 학교에 오는 것 같습니다”) 일탈로 점철된 폭풍의 사춘기를 보내고(담배를 사기 위해 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의 파이프를 고물상에 팔았다) 성인이 된 후에는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가 하면(“마님이 집을 나갔어요, 푸치니 선생과 함께 도망갔다고요”) 결혼을 하고도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가엾은 소녀, 그렇게 착하고 따뜻했던 아이가 이렇게 죽다니. 견딜 수 없다”) 원하는 스토리가 나올 때까지 대본작가를 들볶아서 그들의 사퇴 파동을 자초하기도 했다(“전 세계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을 내놓으시오. 투란도트의 운명을 생각하면 잠이 온단 말이요?”).
그럼에도 푸치니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이 뻔뻔한 인물을 사랑해줄 마음이 좀처럼 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희와 슬픔을 마음껏 표현했다.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와 노력뿐이다. 비평계와 대중 양극단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경쟁자와 후배의 장기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한편 자신의 장기를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동시대 예술계의 기류를 연구하고 파악하는 데 누구보다 빨랐고 오페라의 정묘한 디자인과 완결성에 대한 집념은 투철했다. 푸치니는 그렇게 자신의 국경을 넓혀나갔으며, 재능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 유럽 전역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과 우루과이에서 열린 ‘푸치니 전작 페스티벌’을 푸치니는 목격했다.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린 인생이었다.

음악으로 가득 찬 마사추콜리 호수에서 새벽을 듣다
〈라 보엠〉과 〈나비 부인〉의 탄생지와 〈잔니 스키키〉와 〈토스카〉의 배경지를 걸으며

예술가에겐 결핍이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궁핍하거나, 죽을 때까지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해를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평생 지병에 시달려야 한다. 실연의 상처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푸치니는 아니었다. 푸치니는 명랑하고 친절하다가도 순간 먼 곳을 쳐다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곤 했다. 푸치니 자신도 “나는 멜랑콜리의 거대한 짐을 지고 태어났다”고 말했다. 결핍이라곤 없이 성장해서 오페라계의 새로운 황제로 부상하여 남부러울 것 없는 백만장자의 삶을 살았던 푸치니의, 그만의 서글프며 감미로운 선율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선천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고, 아들의 성공이 눈에 보이는 순간 눈을 감았던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푸치니가 사랑했던 장소가 그의 멜랑콜리를 심화시켰음을, 그곳의 새벽을 직접 보면 비로소 알아챌 수 있다.
견고한 음악 전통을 이어가는 고향 루카,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유학지 밀라노, 풍요롭고 세련된 문화가 꿈틀거리는 오페라 탄생지 피렌체 모두 푸치니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도시였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장소는 토레델라고 마을이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하고 ‘귀신처럼’ 방황하던 때 발견한 평화로운 이곳을 푸치니는 터전으로 삼았다. 이곳은 그저 생활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푸치니는 급속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지상의 낙원. 상아탑’ 토레델라고와 사랑에 빠졌다. 오감이 가장 생생하게 깨어 있는 새벽에는 물새 사냥에 나섰다. 그리하여 토레델라고 마을의 호숫가 정경은 그의 대표 흥행작인 〈라 보엠〉 〈나비 부인〉 속에 깊숙이 침윤된다. 푸치니에게 멜랑콜리는 짐이 아니라 동력이었다. 내면 깊이 자리 잡은 노스탤지어는 그의 손에서 선율과 화음으로 소환되어 작품 주인공들의 슬픔으로 세련되게 표현되었고 세계를 매혹했다.
푸치니가 반평생을 머물렀던 토레델라고, 그곳의 마사추콜리 호수를 여행한 후에라면, 푸치니를 듣는 독자의 마음속 무대가 조금은 넓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곧 그를 만나러 갈 독자에게 이 책의 저자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푸치니가 사랑한 토레델라고 새벽 정경을 느끼기 위해서는 밤이 늦도록 절대 ‘잠들지 말라.’




◎ 클래식 클라우드를 펴내며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로 초대합니다

‘클래식 클라우드’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하며 ‘클래식’으로 남은 세계적 명작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가 지금 여기, 우리의 눈으로 공감하며 체험할 수는 없을까.

‘클래식 클라우드’는 명작의 명성보다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위대한 작품 너머 한 인간이 삶을 걸었던 문제를 먼저 생각하고자 합니다. 명작의 가치를 알아보는 일은 한 창작자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각,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배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클래식 클라우드’는 100%의 독서를 지향합니다. 우리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거장의 삶과 명작이 탄생한 곳으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수업에 믿음직한 안내자가 함께한다면? 작품에 숨겨진 의도와 시대적 맥락까지 이해할 수 있는 완전한 독서! 기획에서 개발까지 5년, 우리 시대 대표작가 100인이 ‘클래식 클라우드’를 위해 내 인생의 거장을 찾아 12개국 154개 도시로 여행을 떠납니다.

‘클래식 클라우드’는 우리 시대 새로운 거장들을 기다립니다. 누구보다 뛰어났던 거장들의 놀라운 작품들을 만나고, 삶을 뒤바꾼 질문과 모험을 경험하며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 우리의 고민을 다시 바라보게 할 실마리들을 찾아봅니다. 천재들의 영감을 ‘나의 여행’으로 만나는 시간들이 우리 일상 가까이 작은 거장들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문학, 예술, 철학,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국내 최대 인문기행 프로젝트 ‘클래식 클라우드’가 ‘한 사람’을 깊이 여행하는 즐거움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책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시대와 장르의 음악을 마음껏 찾아 들을 수 있었던 내게, 푸치니의 음악은 가장 매혹적인 날줄과 씨줄의 교차점이었다. 푸치니가 활약한 19~20세기 전환기는 음악에 있어 개인의 열정, 욕망, 두려움, 환희, 슬픔을 정밀하게 표현하는 데 특별한 가치를 둔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정신’이 내게 하나의 날줄이었다면, 어떤 악기보다도 연주자 각각의 음색과 표현양식을 뚜렷이 드러내어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 ‘성악’ 또는 ‘오페라’라는 장르는 그 날줄과 만나는 씨줄이었다. 그 교차점을 대표하는 총아이면서 그 만남을 가장 빛나게 구현한 주인공이 바로 푸치니였고,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 “프롤로그. 꿈꾸는 자의 세계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 중에서

푸치니의 특별함은 그러나, 말썽 많았던 인생 초반기 그의 내면에 이미 그 싹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풍향에 늘 충실했으며 그 바람에 거역하는 일에는 본능적으로 일절 타협하지 않았다. 게을렀던 학생 시절에도 동시대 예술계의 기류를 연구하고 파악하는 데 그는 누구보다 빨랐다. 인정받는 작곡가가 된 뒤엔 그와 절친했던 대본작가들이 두 손을 들고 ‘일 못 하겠다’며 거듭 ‘사퇴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오페라의 정묘한 디자인과 완결성에 대한 푸치니의 집념은 투철했다.
- “프롤로그. 꿈꾸는 자의 세계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 중에서

푸치니가 상기된 채로 도착했던 그곳으로, 나 역시 상기된 채로 달려간다. 창밖에는 토스카나의 8월 태양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전원은 푸치니의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의 처연한 간주곡을 떠올리게 한다. 내 의식 아득한 곳에 자리 잡은 노스탤지어가 그 아련한 현의 선율에 동반된다.
- “1장. 음표로 삶의 설계도를 그리다: 루카의 푸치니” 중에서

일탈로 점철된 폭풍의 사춘기에 의미 있는 일도 있었다. 안젤로니 선생의 권유로 친구들과 함께 피사에 오페라를 보러 간 것이다. 이탈리아의 영웅 베르디가 이집트 수에즈 운하 개통 기념작으로 의뢰받아 1년 반 전에 발표한 신작 오페라 〈아이다〉였다. 기록에 따르면 푸치니와 친구들은 피사까지 여덟 시간을 걸어갔다. 그는 훗날 종종 기념할 만한 ‘순례’로 이 사건을 언급했다. 오늘날 인터넷 지도 사이트에서 도보 옵션을 적용해보면 대략 네 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다. (…) 푸치니는 이 경험을 회상하며 “〈아이다〉를 피사에서 들었을 때 음악의 창문이 내 앞에 열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 “1장. 음표로 삶의 설계도를 그리다: 루카의 푸치니” 중에서

어머니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마감을 불과 몇 주 앞둔 동안 서둘러 완성됐다. 악보 일부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난필이었고 콩쿠르 측에 제출된 것 이외의 사본조차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마감 직전에 작품을 제출할 수 있었다. (…)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세상은 이 젊은이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예 콩쿠르에 도전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경쟁에서 떨어진 작품’을 누가 애써 극장에 올리려고 할 것인가.
- “2장. 오페라의 별에 닿다: 데뷔작 〈빌리〉” 중에서

〈빌리〉 연주가 끝나고 푸치니는 반쯤 얼이 빠진 상태로 조명 아래를 걸어 나왔다. 꽃다발이 쏟아졌다. 마르코 살라의 빌라에서 만난 후원자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젊은 작곡가의 목에 월계관을 걸어주었다. 작곡가는 무대 위에 열여덟 번이나 거듭 불려 나왔다. 다음 날 신문에는 스카필리아투라의 막강한 이론가 필리포 필리피가 쓴 리뷰가 실렸다. 제목은 ‘푸치니 별에 닿다’였다.
-“2장. 오페라의 별에 닿다: 데뷔작 〈빌리〉” 중에서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빌리〉는 오늘날 공연되는 횟수가 적다. (…)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면 푸치니가 이후 완숙기에 자신의 흥행작에서 선보일 ‘정형’들이 이 작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줄거리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다. 이후 다시 만나지만 예전처럼 행복한 상태에서의 만남이 아니다. 눈물과 후회 속의 비극적인 만남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 상황 속에서도 작품 초반 행복하던 시절의 선율과 모티프가 다시 등장한다. 이 선율과 동기들은 행복했던 작품 초반의 상황들을 상기시키기에, 비극적인 작품 후반의 상황과 대비되어 비애를 더한다. ‘악의는 없지만 무책임한 남자 주인공과, 그 때문에 희생되는 여자 주인공’의 대비도 전성기 푸치니 오페라의 주인공과 공통된다.
-“2장. 오페라의 별에 닿다: 데뷔작 〈빌리〉” 중에서

루카에서 서쪽으로 바다를 향해 30킬로미터쯤 걸어가면 넓은 마사추콜리 호수가 나온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루카 시내를 네 개쯤 집어넣을 수 있는 꽤 큰 호수다. (…) 뱃사공 노포리는 어느 가을날 한 젊은이가 호숫가를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마치 “귀신같이 보였다”고 사공은 회상했다. “나는 작곡을 해요.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엔 송장이 되었어요.” 흐린 눈동자의 이 청년은 하룻밤 자고 가고 싶다며 잘 곳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평화로운 정경을 유지하고 있다. 7년 뒤인 1891년, 갈 곳 잃은 마음을 달래던 이곳 토레델라고를 푸치니는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터전으로 삼는다. 단지 생활의 장소였다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호숫가의 정경은 그의 대표 흥행작인 〈라 보엠〉 〈나비 부인〉 속에 깊숙이 침윤될 터였다.
-“2장. 오페라의 별에 닿다: 데뷔작 〈빌리〉” 중에서

오늘날 거의 잊힌 〈에드가〉를 소개하는 데 긴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3막 초반의 장송 장면(레퀴엠)과 이어지는 피델리아의 애도의 노래 ‘안녕, 내 친절한 사랑Addio, mio dolce amor’은 꼭 들어보길 권한다. 푸치니의 다른 작품에서 찾기 힘든, 감각적이라기에 앞서 영적인 클라이맥스를 맛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푸치니를사로잡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 밀라노 두오모에서 열리는 푸치니의 장례식에서 이 장면의 음악이 연주된다.
-“2장. 오페라의 별에 닿다: 데뷔작 〈빌리〉” 중에서

푸치니는 1924년 후두암으로 투병 중에 리브레토(오페라의 각본) 작가 포르차노에게 “나중에 야외에서 내 오페라가 공연되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죽고 6년 뒤 포르차노의 주도로 푸치니가 생애 대부분을 살며 〈라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등 걸작 오페라를 쏟아냈던 호숫가에서 〈라 보엠〉 공연이 열렸고, 1949년부터는 야외 오페라 축제가 매년 개최되었다.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왼쪽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면 마을의 중심 도로인 ‘자코모 푸치니 길’로 접어든다. 이 길로 죽 걸어가면 호반의 푸치니 빌라에 닿을 것이다. 왼쪽으로 골목 표지판이 시선을 잡아끈다. ‘루이지 일리카 길.’ 루이지 일리카는 〈라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탄생에 핵심적 역할을 한 대본작가다. ‘재미있군.’ 이어 오른쪽은 ‘3부작 길’이다. 푸치니 만년의 오페라 ‘3부작’을 뜻하는 말이다. 계속해서 왼쪽, 오른쪽으로 라 보엠 길, 토스카 길, 투란도트 길, 라 론디네 길, 잔니 스키키 길, 외투 길, 나비 길이 이어진다. 모두가 푸치니의 오페라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다.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푸치니는 농담을 하고 장난을 주고받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조용히 말이 없어지곤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좀 심심해서”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갑자기 눈물로 그렁그렁해질 때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수수께끼의 멜랑콜리를 가지고 있었다. 편지에서 “나는 멜랑콜리의 거대한 짐을 지고 태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멜랑콜리는 우리가 오늘날 잘 알고 있듯이 그의 작품 속에 투사되어 매혹적인 색채로 작용한다.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푸치니는 1892년 10월에 〈마농 레스코〉를 완성했다. 작품은 토리노의 레지오 극장에서 초연하기로 결정되었다. (…) 30회나 커튼콜이 나왔고, 객석에서는 손수건을 든 여인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테너와 소프라노 주연마저 무대 위에서 눈물을 보였다. 거의 모든 신문이 “강력하고 빛나는 작품”, 심지어 “국가적 자부심을 보낼 만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대본작가들은 푸치니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작업 중인 대본에 이 작곡가가 거듭해서 퇴짜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 말고 ‘뭔가’를 좀 내놓으세요. 내가 말하는 ‘뭔가’가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 푸치니가 대본작가에게 내놓는 주문은 한도 끝도 없었지만 정작 자신의 작업 속도는 느렸다. 일리카는 문인답게 “푸치니는 감아놓으면 금방 다 풀려버리는 시계 같다”고 멋진 비유를 날렸다.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여름 호숫가의 공기는 뭉근하고 후텁지근하다. 무르익은 봄, 온갖 꽃들이 피어 있을 때 다시 이곳을 찾고 싶다. 그리고 새벽에 이 호숫가를 걷고 싶다. 정적을 깨는 모터보트의 소음과 함께 엽총과 사냥한 새 꾸러미를 둘러멘 작곡가의 환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피를 묻힌 새들의 모습은 잔혹하겠지만, 푸치니 극의 결말 역시 흔히 잔혹하지 않던가.
-“3장.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다: 〈마농 레스코〉와 〈라 보엠〉” 중에서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 3막이다. 호른 솔로에 이어지는 피콜로와 현의 소슬한 합주부터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천년 고도의 새벽. 이 오페라의 배경이 된 1800년만 하더라도 성 베드로 성당의 영화로운 모습 주변에는 고대 로마의 폐허와 휑한 공터가 공존했다. 잡초가 자라난 구릉에는 양치기들이 양을 풀어놓았다. 어린 양치기가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소박한 노래를 부른다. 고음현에서 저음현으로, 하프와 방울소리가 출렁거리는 관현악은 순식간에 귀로 전해지는 공간감을 광대한 야외로 확대한다. 새벽바람이 귓전을 거쳐 옷깃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4장. 무대에 담긴 영원의 도시들: 〈토스카〉와 〈잔니 스키키〉” 중에서

푸치니의 여성 아리아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고 널리 불리는 〈잔니 스키키〉 중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다. 피렌체가 무대인 영화 〈전망 좋은 방〉에도 삽입되어 널리 알려진 아리아지만 정작 이 노래의 가사를 알면 대뜸 놀라게 된다. (…) 그러나 이 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노래에 등장하는 ‘베키오 다리’와 ‘아르노 강’이다. 토스카나의 주도 피렌체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과 그 남북을 연결하는 오래된 다리다. 푸치니는 60세 때인 1918년에 발표한 〈잔니 스키키〉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인 토스카나를 무대 위에 등장시켰다.
-“4장. 무대에 담긴 영원의 도시들: 〈토스카〉와 〈잔니 스키키〉” 중에서

〈나비 부인〉이 우리를 매료하는 숨은 요인 중 하나는 ‘긴장’이다. 〈나비 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의 무의미함에서 벗어난, 극도로 긴장된 시간들의 이야기다. 1막에서 주인공은 결혼이라는 긴장된 행복을 겪고, 2막에서는 남편의 귀환이 임박했음을 알아채고는 긴장 속에 환희하고 절망하다가 죽는다. 이 긴장된 시간을 푸치니는 꽃내음 같은 감미로운 관현악으로 엮어낸다. 이 작품 속에서 대기는 향기로 충만하고, 감미로운 선율과 기다림으로 채워져, 마침내는 긴장과 감미로움이 구분할 수 없이 섞여버린다.
-“5장. 폭풍의 시대에 날아오른 나비: 〈나비 부인〉” 중에서

1월, 도리아는 눈물로 가족에게 편지를 적었다. “나는 엘비라 부인이 말하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푸치니 주인님은 제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농약상에 가서 해골 표시가 있는 염화수은 약을 샀다. 세 알을 삼켰다. 삶의 고뇌가 바로 멈추지는 않았다. 도리아는 닷새 동안이나 배를 쥐어뜯으며 고통 속에 죽어갔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언론이 이 흥미로운 사건에 달려들었다. 로마에 머무르고 있는 푸치니에게 베를린에서까지 사실 여부를 묻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푸치니는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철저히 파괴되었다”라고 시빌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썼다. “가엾은 소녀, 그렇게 착하고 따뜻했던 아이가 이렇게 죽다니. 견딜 수 없다.” 로마의 호텔, 그의 서랍에는 권총이 있었다. 푸치니는 한참이나 총을 만지작거렸다고, 훗날 회고했다. 가엾은 도리아는 이후 돌아온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푸치니의 오페라 속에.
-“5장. 폭풍의 시대에 날아오른 나비: 〈나비 부인〉” 중에서

당초 푸치니가 “투란도트가 스스로 사랑에 눈을 뜨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실로 중요했다. 하지만 그 이상에 비해 대본작가들이 공급하는 텍스트는 성에 영 차지 않았다. 애써 공들여 수정하면 상세한 설명 없이 퇴짜 놓는 예전의 패턴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 세계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을 내놓으시오. 투란도트의 운명을 생각하면 잠이 온단 말이요?” 실제 이 작곡가의 욕심이자 야망이었다. 혹시 이 편지에서 대본작가들이 영감을 얻어 테너 아리아 ‘잠들지 말라’를 창안한 것은 아닐까.
-“6장. 얼음이 빛나는 마지막 순간: 〈투란도트〉” 중에서

〈투란도트〉가 초연된 지 100년 가까이 흘렀다. 푸치니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3막 후반부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중기 3대작에 필적하거나 어떤 면에서는 이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획득했다. ‘드라마틱하고 선 굵은 영웅 오페라’에 도전해 성공하겠다는 푸치니의 의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6장. 얼음이 빛나는 마지막 순간: 〈투란도트〉” 중에서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토레델라고여 안녕. 가까운 거리임에도 기차를 갈아타야만 닿는 루카의 숙소로 나는 이 밤에 돌아갈 것이다. 사진 파일을 정리한 뒤 짐을 꾸릴 것이다. 그리고 내일 떠날 것이다. 푸치니의 자취가 짙게 배어든 도시들과 장소들과는 이별이지만, 내가 그의 선율과 노스탤지어에 처음 젖어들었던 지상 저편의 도시가 대신 나를 맞이할 것이다. 호숫가에 어둑하니 땅거미가 진다. 오늘은 사람의 자취조차 찾기 힘들다. 푸치니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1880년대에 온 것 같다. 소슬한 바람과 그윽한 물비린내, 그리고 어디선가 사랑을 구하는 물새가 내는 것일 첨벙 소리뿐.
-“6장. 얼음이 빛나는 마지막 순간: 〈투란도트〉” 중에서

이렇게 푸치니를 만난 이 중 제법 많은 사람이 오페라 극장을 찾아갈 것이다. 나 역시 그가 의도한 대로의 오페라 세계에 입문했던 것은 아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 테발디와 서덜랜드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의 유명 아리아 모음집 레코드판을 들으며, 푸치니의 설계와 다른 ‘조각난’ 장면들로, 무대를 상상으로만 머릿속에 그려보며 죽은 지 오래된 작곡가가 던져놓은 감각의 그물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 그물이 이끄는 대로 세계의 공연장을 쫓아다녔고, 그가 남긴 창작의 현장과 사랑의 장소까지 찾아갔다. 그 매혹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에필로그. 꿈을 포획하는 자에게 국경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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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사회

도서정보 : 에릭 클라이넨버그 | 2018-09-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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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폭염
우리는 그러나 목숨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은 정치적·구조적 실패를 의미한다
·폭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극복할 정치적 의지가 있느냐다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회비극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정치적 실패의 문제

1995년 시카고에서는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이 일주일간 지속돼 7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구급차는 모자랐고, 병원은 자리가 없어 환자를 거부했으며, 시민들은 갑자기 죽은 이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 무더위는 사회적 문제로 취급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폭염이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는 것도 아니고 홍수나 폭설처럼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희생자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 노인, 빈곤층, 1인 가구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현지 조사는 폭염 사망자들이 실려온 한 부검소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검시관들이 의학적 부검을 실시하는 동안, 그는 희생자들이 생전에 살았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 이들의 생을 앗아간 단서가 돼줄 사회학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희생자들의 거주지는 하나같이 사회 취약계층이 모여 사는 아파트나 싸구려 호텔들이었다. 저자는 이들 지역에 머물며 수시로 현지 조사를 나갔고 차츰 안면을 트게 된 이웃들은 클라이넨버그와의 인터뷰에 응한다. 한편 그는 경찰 보고서를 분석하고, 시체안치소의 기록들을 파헤치며, 통계 분석을 하는 방법으로 이 사안을 깊숙이 파고든다.
이 조사는 오랜 기간 차분히, 여러 스펙트럼을 따라 이뤄졌고, 기존 사회학이 간과해 우리 시선에 붙잡히지 않았던 이들을 분석의 망으로 끌어들인다.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폭염에 의한 사망이 "사회 불평등" 문제라고 진단 내린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결과만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공공재화를 잘못 다룬 정부의 문제이며, 기후변화에 대한 공학기술적 대처의 실패일뿐더러, 시민사회가 서로를 보살피지 못한 공동체 부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염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전적으로 몸이 약하고, 나이가 많고, 쓸쓸한, 혼자서 더위를 견뎌야 했던 이들이다. 이 점이 바로 사회학자가 기후 문제를 파고들게 된 계기다.
그러므로 폭염은 일종의 사회극이다. 그것은 미처 우리가 살고 죽는 조건을 드러낸다. 폭염으로 인해 공동체의 누군가가 사망했다면, 이런 사회적 조건을 조성하고 더위가 지나가기만 하면 이들의 죽음을 쉽게 잊히도록 만든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당연시하고 숨기려 했던 사회적 기반에 생긴 균열을 조사해야만 향후 이런 참사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6,500 원

번역의 정석

도서정보 : 이정서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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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오역을 지적하는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으며 학계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이정서의 번역 에세이. 이후 그는 『어린 왕자』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를 차례로 번역 발표했는데, 네 작품 모두 평소 그가 주장하는 ‘직역’의 원칙, 즉 ‘원래 작가가 쓴 서술구조를 반드시 지켜줘야 오역이 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번역서를 낼 때마다 번역계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실제 번역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라는 비난을 쏟아냈지만, 실상 번역된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실제로 저자가 쓴 쉼표 하나까지 살려내는 직역으로 작가의 ‘숨소리’마저 복원해 냈다”는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번역서는 다른 어떤 번역서보다 유장하게 ‘잘’ 읽힌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목적으로, 수많은 시간을 고뇌하며 ‘잘 읽힐’, ‘좋은 문장’을 써낸 것인데, 그것을 오히려 번역자가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해체시킨다면, 그게 과연 원래보다 잘 읽히는 좋은 문장일 근거가 어디에 있단 말일까요.
어떤 이는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원작보다 ‘훌륭하다’라고 치켜세우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원래보다 좋은 문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면 그건 다른 창작물이지 번역이 아닌 것입니다.”

구매가격 : 10,000 원

15세기 신숙주의 일본 여행기, 해동제국기

도서정보 : 신숙주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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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申叔舟의 일본여행기



지금껏 필자는 10여 차례 일본의 각지를 여행했다. 횟수나 기간으로 따지자면, 중국 다음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한 국가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일본에 대한 필자의 관점이 적잖이 변화되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변화 중에 있다.
地政學的으로 韓中日 3국은, 예컨대 히말라야 산맥이 대륙 간의 충돌에 의해 솟아오르는 식의 거대한 격변이 도래하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3국의 國籍人들이 모여 결성된 ‘트와이스(TWICE)’라는 걸그룹을 볼 때면, 결코 지정학적으로 離隔될 수 없는 한중일 3국의 상황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트와이스’는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국적인으로서 인간존재들의 모임이므로, 여러 이유로 離合集散될 수 있다. 다만 ‘원스’의 한 사람으로서, ‘트와이스’가 당최 변할 수 없는 3국의 지정학적인 配置처럼, 아주 오래도록 ‘나정모사지미다채쯔’ 9명 모두가 함께 하면서 활동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유년시절의 필자에게 일본은, 公的 역사교육을 좇아, 조선왕조를 몰락시키고서 식민지로 삼았던 강도나 도둑 같은 이미지의 제국주의적 국가공동체였다.
그런데 실상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역사 안에서 일본은, 식민주의적 팽창주의를 강행하는 강대국이라기보다는, 늘 후진적이며 빈곤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 동안에는 응당 일본이라는 통일된 형태의 국가공동체는 실재하지 않았다. 그저 변방의 오랑캐나 해적 집단으로서 倭寇쯤으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일본이라는 통일된 국가 형태의 공동체가, 오랜 戰國時代를 마감하고 동아시아 역사에 실제적으로 등장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이다.
1590년 8월 ‘오다와라(小田原)’ 城이 끝내 항복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는 申叔舟가 王命에 따라 1471년에 일본을 여행한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한때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숭이’라는 깔보는 듯한 별명으로 불렸던 농민 보병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뒤를 이었을 뿐 아니라, 1582년 주군이 암살당하며 미완으로 남긴 일본 통일이라는 과제를 이룩했다.
앞서 ‘히데요시’는 거의 모든 ‘다이묘’를 상대로 연이어 신속한 전투를 벌여 자신의 封臣으로 삼은 바 있다. ‘쇼군’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천황의 축복을 받아 실질적인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본토 북쪽의 영주들은 여전히 위협의 대상이었다. ‘호조’ 일족이 계속해서 ‘히데요시’를 비천한 신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1590년까지 ‘교토’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며 기회를 보다가, ‘호조’ 일족의 요새화된 城인 ‘오다와라’ 공격을 감행했다. 10만 명 이상의 엄청난 군대가 성을 포위했다. ‘히데요시’는 전면 공격을 개시하지 않고, 적군의 식량이 부족해질 때까지 기다려 복종을 받아내었으므로, 실제로 전투는 거의 없었다.
항복을 기다리는 동안, 군사들을 위해 매춘부며 가수를 부르고, 서커스 같은 공연을 열어 여흥을 벌여, 포위전은 마치 시장 같은 광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히데요시’는 중국 공격의 관문으로서 조선 땅을 확보하기 위해 壬辰倭亂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궁지에 빠진다. 이 일로 ‘히데요시’는 신경쇠약까지 겪었다고 한다.
한때는 능란한 무장이었지만, 조선의 자연환경과 해군력, 아직 남아 있던 명나라 세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강력한 무신들 손에 나약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죽었으며, 그의 업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 번째로 일본 대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1603년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쇼군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1868년까지 일본을 다스리는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다. 그런데 그가 실질적 통치자로서 ‘쇼군’이 되기까지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본 列島의 동쪽 ‘혼슈’ 지방에서 작은 씨족의 영주로 태어난 ‘이에야스’는, 1568년 일본을 통일하기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군으로서 세력을 얻는다. 1568년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뒤를 이었고,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그에게 반대했으나, 1584년 입장을 바꿔 그의 편에 붙었다.
1590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에 마지막으로 남은 독립 영주인 ‘호조 우지마사’를 정벌한다. ‘히데요시’는 중부 가까이 위치한 ‘이에야스’ 가문 소유의 영지를 받는 대신, 그에게 ‘호조’ 가문 영지를 내려 주었다.
이후 ‘도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성곽 도시 ‘에도’에 자리를 잡은 ‘이에야스’는 경제 개혁을 통해 지역 주민의 충성심을 얻었으며, ‘에도’가 ‘교토’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98년 사망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지목하여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대신하는 섭정 의회의 우두머리를 맡겼다. 그런데 1599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거주하는 ‘오사카 城’을 점령하여 섭정 의회를 분열하고 내전을 일으킨다.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정적들을 확실히 제거하여 누구도 대적할 바 없는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 40년간 비어 있던 ‘쇼군’ 자리에 ‘이에야스’가 임명된 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쥐고 있던 권력에 대한 최종 승인이자 합법적인 인정이었다.

구매가격 : 3,000 원

서계 박세당의 유교철학 비판, 사변록 1, 제1장 대학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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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世堂의 儒家哲學 비판, 思辨錄



朴世堂(1629~1703)의 삶의 歷程을 살피다 보면, 어쩐지 前代 李卓吾(1527~1602)나 後代 丁若鏞(1762~1836)의 삶이 overlap된다. 그들은 모두 시대와 不和한 流配旅行者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當代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가철학에 대한 否定에서 기인한다.
獨尊儒術이라는 표현처럼, 유가철학은 사상적 부정이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그저 斯文亂賊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은 人類史에서 작동하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철학사상에 공통한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주의, 친미, 친중, 친일, 반미, 반중, 반일, 종북, 보수, 진보 따위의 온갖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이 뒤어켜 泥田鬪狗하고 있다.
그러한 이전투구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生存의 利得’이다. 인간존재로서 생존을 위해 전쟁마저도 不辭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러한 생존을 넘어서는 이득을 목적케 되면, 이제 그 가혹함과 집요함은 상상을 초월케 된다. 그러한 사례는 인류의 역사가 ‘생존의 이득’을 위한 전쟁의 역사라는 史實로써 쉬이 검증된다.
박세당의 시대는 國內政治의 시대였다. 그러다보니 ‘생존의 이득’의 명분이라는 게 기껏해야, 예컨대 上服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의 문제 따위를 빌미 삼아 상대편을 處斷키도 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당최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자학적 禮治를 이데올로기 삼는 당시에는 마땅히 문제될 수 있다. 더욱이 그 裏面에는 조선왕조의 政權을 左之右之하는 黨派의 문제가 얽혀 있다. 1년을 택하느냐 3년을 택하느냐에 따라 목숨의 與奪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적 올바름’은 현대사회의 ‘정치적 올바람’에 비견될 수 있다. 흔히 PC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의미한다.
PC운동의 ‘Political Correctness’는 흔히 ‘정치적 匡正’, ‘정치적 공정성’, ‘정치적 올바름’ 등으로 번역된다.
문화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인종, 성, 성적 지향, 종교, 직업 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더불어 차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곧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주창하면서,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근거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으려는 운동이다.
미국 중산층의 언어 사용에 주목해, 차별이나 편견에 바탕을 둔 언어적 표현이나, ‘마이너리티’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시정케 하는 PC운동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PC 운동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 온 ‘위대한 책들’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PC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이 그릇될 리 없다. 응당 어느 누구라도 차별당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월 안에서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은 또 하나의 새로운 권력으로서 가혹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 것이 인류사회의 권력이 지닌 기묘함이다.
그러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불화한 탓에,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은 죄다 자의든 타의든 유배적 은둔의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그런 박세당의 시대에 비한다면, 21세기는 國際政治의 시대다. 국제정치를 조작하는 ‘Great Game’의 양상은 실로 복잡하며 복합적이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는 당최 은둔할 수 있는 시공간마저도 不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내정치의 경우에도, 21세기 한국사회의 상황을 볼 때, 박세당의 시대에 비해 별반 나아진 게 없다. 保守는 이미 낡아버렸고, 進步는 이미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보수세력이 유가철학 흉내를 내더니, 진보세력이 執權하고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 진보세력 역시 유가철학 흉내를 내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며, 곪은 종기는 결국 터지기 마련이다. 보수가 그러했듯 진보 역시 이내 고이고 곪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인 탓에 역사의 本性的 日常이다. 다만, 그런 시대 이데올로기와 불화하여 비판하는 자는, 결국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과 유사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구매가격 : 3,000 원

서계 박세당의 유교철학 비판, 사변록 2, 제2장 중용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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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李完用 · 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해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 대신 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 · 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되어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 · 이윤용 · 朴定陽 · 趙秉稷 · 尹用求 · 李在正 · 安駉壽 · 權在衡 · 尹致昊 · 李商在 · 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 · 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 23府였던 지방 제도를 漢城府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으로 대신 초청하였으며,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협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상대리 ‘사이온지(四園寺公望)’와 러시아 공사 ‘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4일자로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Alexiev,K.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閔泳煥 비밀회담’에서, 러시아측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에게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 · 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 · 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무능 · 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敵도 없고 同志도 없는 법이다. 다만 자기가 소속된 집단공동체의 이익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개인관계에서도 名分이나 義理가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無法律의 국제정치에서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니 국제정치에서는 國益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한 中庸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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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3, 제3장 논어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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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遊天下의 여행자 孔子의 論語와 思辨錄



孔子는, 흔히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석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석가’나 ‘예수’가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인 데 비해, 孔子는 동아시아 문명을 대표하는 人文學者다. 후대에 그의 철학사상이 儒敎로서 종교적 형태로 정립되지만, 그는 오래도록 政治家로서의 立身揚名을 도모하였고, 직접 정치를 행한 시절도 있다. 하지만 결국 공자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대체로 공자가 현대 중국의 先祖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별다른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실상 공자는 東夷族의 문화권인 魯나라 사람이다. 노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는 지금의 ‘취푸’市에 위치한 나라로서, 周나라 ‘武王’이 아우인 周公 ‘旦’에게 내린 봉토를, 그의 아들인 ‘伯禽’에게 다스리게 하던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혈족국가이다.
春秋時代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서, 은공, 환공 시대(기원전 722~기원전 694)에 여러 번 齊나라, 宋나라 등과 싸워서 이겼고, 또 杞나라, 莒나라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했다. 춘추시대 중기에 사회가 변혁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三家라 했다. 혹은 저희가 모두 노환공의 후예이므로, 三桓이라 했다. 곧 소위 ‘정재대부’다.
노나라는 西周의 예법과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한 나라 중 하나로, 다만 당시 형세의 영향으로, 일련의 변혁활동을 전개했다. 춘추 말기, 노소공이 삼가에게 쫓겨나, 객사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삼가의 가신 ‘양호’ 등이 국정을 전제하여, 한때 ‘배신이 국명을 쥐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노정공 시대(기원전 509~기원전 495), ‘양호’ 등은 실패하여 출분하고, ‘삼환’이 다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여, 후의 ‘애공’(기원전 494~기원전 468 재위)은 군권 회복을 도모하여, 삼가 대신들과 충돌이 극해져 마침내 월나라로 망명해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약 원공 시대(기원전 436~기원전 416), 삼환은 점차 세력을 잃고 쫓겨나, 목공(기원전 415~ 기원전 383) 이후, 정권은 다시 국군의 손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전국시대 힘이 이미 쇠약해, 자주 제나라의 작전에 함께했다. 전국 말년, 초나라가 진나라의 핍박을 받아 동천하면서, 노나라를 공벌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노나라를 병탄하고 경공을 폐출하자, 노나라는 멸망했다. 한 평제 시기에는, 경공의 8세손 공자 관을 포로후로 봉하고, 주공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 관이 죽자 시호를 ‘절’이라 하고, 그 아들 공손상여가 습작하게 했다. 왕망이 신 왕조를 세우고, 또 공손상여의 후예 희취를 포로자로 봉했다.

東夷는 중국 동북부지방과 한국 · 일본에 분포한 종족을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이다. 은나라 때는 人方이라는 夷族 집단이 있었고, 竹書紀年을 비롯한 先秦時代의 문헌과 금석문에서 ‘동이’를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발견된다. 여기에 표현된 이족과 동이족은 산둥성 · 장쑤성 북부 일대에 거주한 족속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異民族이 아니라, 뒤에 중국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箕子나 孔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漢나라 이후 쓰여진 史書에 나오는 東夷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東夷 · 西戎 · 南蠻 · 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동방을 夷라 한다고 하는데, 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淮泗 유역에 분포된 민족 집단이 한족과 접촉하는 殷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그후 중국인들에게 여러 종족 개념과 방위개념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서융(戎), 남만(蠻), 북적(狄) 등의 명칭이 나타났다. 東夷란 특정한 민족 개념이 아니라, 방위개념이 첨가된 한족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동방 이민족의 범칭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한다.
한편, 과거에 상고시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한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줄기는 산둥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랴오둥과 한반도지역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에 근거하여, 箕子朝鮮의 실체를,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건국한 나라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많다.
또한 東夷는, 秦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황하,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부와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 역사에 흡수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한, 예맥 등을 동이로 지칭하였다. 즉 동이족의 범위가 상당히 동쪽으로 축소 이동한 것이다.

현대 중국은 물론이며, 현대의 중국인으로서 분별되는 漢族의 역사는 근대 文化革命 이후에나 실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中國歷史는 북방 외래민족의 역사이다. 그러한 역사의 桎梏을 인식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혁명으로써 일부러라도 아주 가혹하게 기존의 전통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名實相符 한족의 국가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아주 중요시하는 사회적 변화 단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특히 문화혁명이 중시되는 것은, 종래의 혁명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에서는 전 민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종래 문화와 그 창조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이고, 민중은 그것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민중이 문화와 그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경제, 사회, 정치를 스스로 움직인다.
그로부터 교육제도의 대규모 개조에 의한 인민대중의 교육수준의 향상, 사회주의적 인텔리겐차의 육성, 인류가 형성하여 온 적극적인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부정적인 문화유산의 가능한 한 신속한 청산, 그것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확립, 이러한 것이 계급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완수되어야 할 객관적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이 문화혁명을 수행함으로써 공산주의적 인간이 형성되고,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주체적 조건이 이루어지게 된다.
文化大革命은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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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4, 제4장 맹자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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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的 理想主義者 孟子와 思辨錄



현대사회의 戰爭은 모름지기 금융이나 에너지에 얽힌 資本的 전쟁이며, 그러한 자본을 조작하는 情報的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과 중국의 전쟁 역시 자본전쟁이며 정보전쟁이다. 美中戰爭의 핵심은 중국의 자본의 기틀이 될 中國夢的 一帶一路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결코 坐視할 수 없으며, 나아가 반드시 擊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제1의 覇權國이라는 位相에 異常이 招來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여 이러한 자본전쟁이 과거처럼 武力的 暴力에 의하지 않으므로 다소 人間主義的이라는 착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차라리 폭력에 의한 전쟁이라면, 폭력에 저항하다가 당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항복하면 된다.
그러나 자본전쟁은 애당초 마땅히 항복할 만한 꺼리나 대상 자체가 不在하다. 그래서 외려 더 가혹하다. 예컨대, 사무라이 식으로 敵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된 빨대를 꽂아두고서 말라죽지 않을 만큼 생존시키며 그 津液을 쪽쪽 빨아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美中 자본전쟁 혹은 패권전쟁에 온통 銳意注視해야만 한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南韓이나 北韓의 입장은 참으로 尖銳하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강대국의 곁에 있는 약소국은 금세 작살나버릴 수 있는 탓이다.
혁명 역시 자본적 혁명이며 정보적 혁명이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자본과 정보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사회에서 武力과 宗敎를 지니지 못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세력은 결코 권력을 쟁취할 수 없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없음은 곧 ‘생존 자체의 불안’을 惹起한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혁명은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의 산하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革命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등을 의미한다.
혁명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變革, 義擧, 쿠데타 등을 말할 수 있다. 변혁은 급격하게 바꾸어 아주 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쿠데타(coup d’État)는 武力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이며,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변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王權이 天皇에게 부여되었을 뿐, 그 裏面의 작업들은 변혁보다는 혁명에 근접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혁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明治維新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王政復古를 통한 중앙 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상 명칭이며,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지만, 종료 시기는 1871년 廢藩置縣, 1873년 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지 않고 있다.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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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유배 여행기, 면암집

도서정보 : 최익현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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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配旅行者 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의 시대는 중세국가인 조선왕조가 근대국가인 서구세력이나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支離滅裂해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君臣의 동맹을 맺고서 의지하는 淸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러한 시대에 면암 최익현의 삶은, 不得已 나라의 붕괴를 감내해야 하는 士大夫로서, 온갖 旣得權을 박탈당한 流配의 형태로서 점철된다.
면암은 ‘梁大集 在成의 書室에 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記述한다.

“西洋은 하나의 禽獸이다. 그들은 父子ㆍ君臣ㆍ夫婦ㆍ長幼의 질서와, 禮樂ㆍ文物ㆍ節烈ㆍ衣冠의 융성함을, 등에 난 가시나 눈에 생긴 못처럼 여길 뿐만 아니다.
기필코 더럽히고 욕보일 것을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가 쇠약해진 것을 편승하고, 우리가 욕심대로 방종하는 것을 엿보더니, 방자하게 우리에게 호령하기를, 어찌 너희의 黻冕(슬갑과 면류관 즉 제복)과 珪璋(옥으로 만든 예물)을 없애 버리고, 너희의 남녀와 상하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간편함을 따르지 않느냐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예의에 구속함을 싫어하고, 저들의 개방된 행동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끝내는 노골적으로 그들과 합류한다. 그리하여 돼지로 길러 去勢하여도 성낼 줄 모르고, 소로 길러 코를 뚫어도 심상하게 여기다가, 급기야 國母를 시해하고 머리를 깎는 변이 천지를 뒤흔들어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지 않는다.
이리하여 天性이 바뀌고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온 천하가 금수로 변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면암의 서양 인식은 當代 엘리트 지식인의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말기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를 傍證한다.
또 면암은, ‘魯城 闕里祠에서 講會할 때 誓告한 條約’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中華와 오랑캐의 큰 경계와 사람과 짐승의 큰 한계는, 진실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므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중화의 중화가 된 까닭은 예의와 문물이 있기 때문이다.
문물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衣冠만한 것이 없는데, 옷은 반드시 옷깃과 소매를 중히 여기고, 冠은 반드시 비녀와 상투가 있으니, 혹시라도 형체와 의복을 毁傷하여, 머리를 깎거나 검은 옷을 입는다면, 비록 짐승이 되는 것을 숨기고 싶어도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일본놈들이 오니, 여러 역적들이 저들의 일등공신이 되고 싶어, 멋대로 호령하여 먼저 우리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시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가령 저들의 명령하는 것이, 간혹 옛 성인의 制作을 모방하여 의리에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금을 협박하여 멋대로 호령하는 처지에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중화가 되고 오랑캐가 되며,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는 판가름이 여기에 있음에랴.”

孔子로부터 이어지는 수백 년의 禮治 전통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勤幹이었다. 면암은, 그러한 것을 포기함은, 국가공동체를 팔아넘기는 賣國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衛正斥邪의 이념을 고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올바름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고, 사악함은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외부세력이 막강하더라도, 그들의 문명 수준은 한갓 禽獸나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高宗은 그저 왕실만이라도 다소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만을 바랐고, 開化派들은 개혁을 선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면암은, 결국 乙巳條約이 체결되고서 조선왕조가 붕괴하자, ‘魯城 闕里祠에서 先聖에게 고한 글’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崇禎(明毅宗의 연호) 287년, 을사(1905, 광무 9) 12월 초하루, 기해 26일 갑자에 후학 崔益鉉은 통곡하며 先聖 孔夫子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인민도 오래되었고, 순박한 풍속도 오래되었으며, 三皇ㆍ五帝ㆍ三王 같은 표준을 세운 성인도 가신지 오래되었으니, 세대의 치란과 道의 흥망이 氣數의 성쇠로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周의 말엽에 하늘은 집대성한 성인을 내어 春秋의 권한을 빌려, 亂臣賊子를 죄주고 王道를 바르게 했으니, 이것이 곧 우리 夫子의 道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어, 堯舜보다 더 어질게 된 것입니다.
그후 다시 覇道에서 떨어져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에서 다시 떨어져 짐승이 되었으며, 楊墨(楊朱와 墨翟)은 변하여 老佛(道敎와 佛敎)이 되고, 노불이 다시 변하여 陸王(陸象山과 王陽明)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변역한 것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亞聖ㆍ大賢들이 전후에 번갈아 나서, 道를 호위하고 邪說을 막는 책임을 지고, 尊周攘夷의 공을 세운 때문에, 道學이 다 떨어지지 않고 衣裳도 다 찢어지지 않아 중화의 전통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陽秋(春秋의 별칭)의 한 가닥 맥이 線같이 海東의 한 지방에 오히려 존재해 있었으니, 이는 곧 碩果不食으로 천하의 志士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요사이 서양의 鬼物들이 날뛰어, 利瑪竇 같은 예수[耶蘇]들의 邪說이 점점 물들어 고질이 되었고, 끝내는 동쪽 오랑캐가 몰아 잡아먹어, 인류가 거의 다했습니다.
우리를 비린내 나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臣妾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鬱鬯酒를 맡던 종주국이 위태로워 종묘ㆍ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부자의 말씀을 외고 본받던 선비들이 스스로 금지하여, 선비의 복장이 깨끗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道는 전수할 데가 없게 되었고, 聖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는 실상 저희들이 우매하고 용렬하여서, 禍의 기틀이 싹터 움직일 적에 대책을 세워 막지 못하고, 惡의 불꽃이 치열할 때 성토하고 멸망시키지 못하여, 春秋의 법을 끝내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천지의 죄인인 동시에 부자의 죄인입니다.
경건하게 뵈옵는 마당에,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떨려서, 통곡하고 죽고 싶을 뿐이기에 삼가 고하옵니다.”

上記에서 드러나듯, 면암의 삶은 痛恨으로 점철된다. 그 근본적 원인은 王朝와 文明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勉菴으로서는, 오랑캐에 불과한 일본과 금수에 불과한 서양세력에 의해 박탈되었음이 더욱 견딜 수 없는 羞恥였다.
일본과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도, 斯文亂賊으로서 楊墨(楊朱와 墨翟), 老佛(道敎와 佛敎), 陸王(陸象山과 王陽明) 등은 존재했다. 그러한 온갖 걸림돌을 죄다 제거하면서 지탱해 온 왕조였다.
그런데 ‘Matteo Ricci(利瑪竇)’의 예수[耶蘇]를 앞세우며 새로이 등장한 서양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문난적들과는 그 樣相이 전혀 달랐다. 어차피 철학사상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인류문명의 始原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므로, 살펴보면 공통점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세력이 지닌 과학기술이나 군사력은, 당시 朝鮮王朝로서는 당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이념을 지녔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실제적인 物理力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최익현의 시대 이후 이어지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검증된다.
人類史에서 共産主義者들이야말로 종교적 신앙심에 버금하는 강력한 이념을 지녔다. 실로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은 조선왕조 衛正斥邪主義者들 못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經濟力이라는 물리력을 상실하면서 죄 몰락해버렸다.
물론 그 결과는 20세기 末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므로, 최익현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면암의 삶은, 굳이 실제적인 流配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리적인 유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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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특명전권대신 박영효의 일본 여행기, 사화기략

도서정보 : 박영효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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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메이지유신 실패한 갑오개혁 그리고 박영효



‘大朝鮮 特命全權大臣兼修信使’은 朴泳孝가 일본 訪問時에 사용한 공식 公職名이다. 使和記略은 박영효가 1882년(고종 19) 8월~11월까지 일본을 여행한 기록이다. 여행의 성격은 응당 外交 여행이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1868)’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시절이다. 때문에 이 시대를 연상케 하는, 최익현, 유대치, 김옥균, 홍영식, 서정범, 서재필,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裏面에는 이런 이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Thomas Blake Glover(1838~1911)’를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19세기 후반에 일본 ‘나가사키’ 市에 체류한 스코틀랜드 상인이다.
그는 사실상의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Glover Garden’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내에서 가장 번성하던 ‘사쓰마 번(가고시마현)’에 신식 무기들을 판매하였으며, 그 무기는 1864년의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우리는 메이지유신이 세계 列强의 거대한 ‘Great Game’의 결과물 중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나마 일본은 이러한 Big Picture를 이해하였기에 일련의 近代化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예컨대, 勉菴 崔益鉉은 결단코 상투를 자를 수 없음을 端初로 衛正斥邪 義兵運動을 벌이다가, 對馬島로 유배되어 斷食으로써 殉國한다. 그리고 박영효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다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규정된다.

使和記略의 使行은, 같은 해 6월에 일어났던 壬午軍亂으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성사된 修信의 의미와, 한편으로는 金玉均이 사행의 일원으로서, 임금의 은밀한 교지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것이었다.
이 기록은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의 기록으로 주요 사건이 있는 날만 썼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비교적 자세히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은 원문을 그대로 소개했는가 하면, 외국사신들과 만난 기사도 주요 내용은 물론 앉은 배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 기록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사용했는데, 그 제조 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둘째, 일본과의 修好面에서 앞서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손해배상금 상환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기하도록 고친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경상도 歲收諸稅 중에서 순금·은으로 교환해 일본의 은화폐든지 금화폐의 量目에 비추어 해마다 5만원을 지불하며, 그 방법은 두 차례로 나누어 조선 元山港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수송시키기로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이들 일행 가운데는 2년 뒤 갑신정변을 주도한 開化黨의 김옥균·徐光範과 그 반대파인 守舊黨의 거두 閔泳翊도 수행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일본의 여러 발전상이, 우리 나라의 정치 변혁에 여러 가지로 작용했으리라는 면을 추측하는 자료를 담고 있다.
한편, 2개의 續約을 訂定한 내용도 담고 있는데, 제1관은 원산·부산·인천 항구의 里程을 조선의 이정법에 의해 사방 각각 50리씩으로 하고, 2년 뒤 다시 각각 100리씩으로 한다. 제2관은 일본의 영사·공사와 그 수행원의 가족이 우리 나라 內地의 각 곳에 유람하는 것을 허가하는데, 유람하는 지방을 지정해서 예조로부터 증명서를 주고 지방관은 증명서를 조사해 호송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학생도 약간 명을 인솔해 가서 입학시키고 이전에 가 있던 유학생을 데리고 왔다. 유학은 주로 語學校와 士官學校가 주였는데, 尹致昊도 이 때 유학했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일왕의 생일을 맞아 여러 외국 특사들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사화기략은 대일 관계의 기본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초기의 관세 문제, 일본의 水路 및 풍속과 國旗의 제정 경위 등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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