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대 소설 수호전 • 금병매 • 홍루몽 편
도서정보 : 이나미 리쓰코 | 2019-11-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중국 5대 소설의 방대한 세계를 간결하면서 깊이 있게 안내하다!
협의 정신으로 긴밀한 서사 세계를 구축한 「수호전」, 그 수호전의 한 에피소드에서 기본 구상을 가져와 음서에서 중국 최초 근대적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찬사까지 받는 「금병매」, 중심인물 묘사 방법에서 금병매가 남겼던 과제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며 중국 문학사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홍루몽」. 이 세 작품이 지니는 상호 불가분의 인과관계에 주목하면서, 서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찰해본다.
구매가격 : 10,800 원
신곡
도서정보 : 단테 알리기에리 | 2019-10-3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 선정한 명작의 명작
더 새롭게 정리하고 편집된 ‘단테의 신곡’
신과 함께 떠나는 지옥과 연옥과 천국여행의 대서사시
35살 되던 해 단테는 성(聖)금요일 전날 밤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번민의 하룻밤을 보낸 뒤,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3마리의 야수가 길을 가로막으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고 길을 인도한다. 그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하고는 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앞길을 맡긴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지고천에까지 이르고, 그 곳에서 한순간 신(神)의 모습을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이 전체의 줄거리이다.
현실은 지옥에 가깝고, 꿈은 천국에 가깝다.
만약 당신이 지옥을 통과중이라면, 멈추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악이 승리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관이나 중립, 그리고 기권이나 침묵은 가해자에게나 이로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있는 것이다.
연옥을 빠져나가 지상낙원에서 천국으로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대지의 중심에서 빠져나와 다시 햇살을 받으며 연옥(煉獄)의 불을 저장한 산에 이른다. "연옥"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속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깊이 통찰함으로써 정화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이다.
연옥은 정죄(淨罪)와 희망의 왕국으로 영적 구원을 받을 만한 여망이 있는 망령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수양을 하는 곳이다. 천사들은 이곳에서 칼로 단테의 이마 위에 P자를 새겨주는데, 이는 연옥에서 자기가 참회해야 할 죄(Peccata), 곧 오만·질투·분노·태만·탐욕·폭식·애욕의 일곱 가지로 이러한 죄들은 벼랑을 차례로 지나면서 하나씩 씻어진다.
이 모든 죄를 씻고 나면 영혼들은 구원을 받게 되고 이어 지상낙원으로 오를 수 있다.
구매가격 : 3,960 원
한중록 (한국고전문학전집 003)
도서정보 : 혜경궁 홍씨 | 2019-10-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반세기 만에 새로 번역한 완전한 『한중록』
가람 이병기 선생과 나손 김동욱 선생이 주석한 민중서관본 『한중록』의 기념비적 업적이 나온 지 50년 만에 나온, 그것을 넘어서는 『한중록』이 탄생했다. 정병설 교수가 역주한 『한중록』은 실로 오랜 시간을 기다린 역작이다. 이는 기존 『한중록』에서 간과되곤 했던 『보장』과 「병인추록」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다. 『한중록』은 사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된 책이다. 그렇기에 저본 선정과 이본 비교는 작업에서 매우 중요했다. 정병설 교수는 『한중록』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이본으로 인정받는 버클리 대학 소장 「보장」을 저본으로 삼아 종전 대부분의 역주본이 포괄하지 않은 자료인 「병인추록」까지 모두 포괄해 ‘완전한’ 『한중록』을 엮어냈다.
◆ 조선 시대 가장 유려한 산문 문학의 정수
혜경궁 홍씨는 뒤주에 갇혀 죽은 남편 사도세자를 가슴에 묻고 『한중록』을 썼다. 그 첩첩한 아픔이 배어 있음에도 『한중록』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녔다. 『한중록』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조선 산문의 정수다. 그래서 이태준은 이런 말을 남겼다. “오직 한중록 같은 것이 조선의 산문고전일 따름이다”. 정병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한중록』을 열 번 스무 번 거듭 읽어나가면서 연방 감탄하였고 또 빠져들었다. 『한중록』은 조선시대 어떤 문학도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깊은 곳에 닿아 있었고, 세계문학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도도한 물결을 그려냈다. 『한중록』은 역사와 문학을 뛰어넘는 인간 내면의 기록이다. 이런 소중한 유산을 남긴 혜경궁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 공식 사료를 뛰어넘는 또 한 편의 내밀한 궁중 역사
또한 『한중록』은 빼어난 문학작품인 동시에 공식 사료인 실록이 전해줄 수 없었던 궁중의 내밀한 역사의 이면을 전달하는 또하나의 역사서다. 특히 정병설 교수는 52개 꼭지에 달하는 ‘한중록 깊이 읽기’ 코너에서 『한중록』을 『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가며 하나의 사료로써 꼼꼼히 읽어냈다. 이는 기존의 『한중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이기도 하다. ‘한중록 깊이 읽기’를 통해 독자들은 혜경궁 홍씨가 얼마나 치밀한 기억력을 가지고 당시 역사를 재구성해냈는지는 물론 사도세자가 죽던 날의 진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뒤주가 등장하게된 배경은 물론 노년에 병마로 고생하던 영조가 먹었던 산삼값과 궁녀들이 궁중에서 행했던 역할, 사도세자가 몰두했던 옥추경의 벼락신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한 조선 시대 역사와 대면하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0,500 원
보신각종 이야기
도서정보 : 차상찬 | 2019-09-17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나는 서울에도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 동편 모퉁이에 있는 ‘인경(人磬)’이다.
‘조선이 천명을 받은 지 3년이 되든 해 한양의 국도를 정하고 그다음에 비로소 궁궐을 짓게 되며, 그해 여름에 또 관원에게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고 그것은 성공한 것을 새겨서 큰 경사스러움을 전하고자 함이다.(惟朝鮮受命之三年(甲戌) 定都于漢水之陽, 越明年始營宮寢, 其夏命攸司鑄大鍾, 旣成建閣于大市街以懸之, 所以勒成新功垂鴻休也.)<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2,500 원
보신각종 이야기
도서정보 : 차상찬 | 2019-09-1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나는 서울에도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 동편 모퉁이에 있는 ‘인경(人磬)’이다.
‘조선이 천명을 받은 지 3년이 되든 해 한양의 국도를 정하고 그다음에 비로소 궁궐을 짓게 되며, 그해 여름에 또 관원에게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고 그것은 성공한 것을 새겨서 큰 경사스러움을 전하고자 함이다.(惟朝鮮受命之三年(甲戌) 定都于漢水之陽, 越明年始營宮寢, 其夏命攸司鑄大鍾, 旣成建閣于大市街以懸之, 所以勒成新功垂鴻休也.)<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2,500 원
삼국지 1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6,100 원
삼국지 2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3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4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5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