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1분 군주론
도서정보 : 마키아벨리 | 2019-08-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마키아벨리의 냉혹한 정치 전략의 핵심을 이해하자!
나라를 살리는 진정한 지도자란 과연 누구인가?
‘마키아벨리즘’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의 원천이라는 나쁜 이미지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기본 사상은 근대 정치학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명저 《군주론》과 《로마사 평론》에서 군주의 통치 기술과 인간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교훈적인 내용 300가지를 뽑아, 바쁜 현대인이 읽어도 알기 쉽도록 재구성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군주론》은 정치 외교와 국방, 군주의 통치 기술, 처세, 덕목 등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국가를 지혜롭고 현명한 통치를 위한 방법론이 담겨 있다. 이는 내분과 불안한 외세에 시달렸던 이탈리아를 강력한 군주를 통해 구하고자 한 애국심의 발로였으며,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용될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어, 근대 정치학을 개척한 획기적인 문헌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로마사 평론》은 군주론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 그의 간결한 문체, 상상력이 풍부한 내용 그리고 수많은 격언들이 솔직하고 대담하며, 냉혹한 비판과 질책을 했다. 이로 인해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의 가혹한 질책은 16세기 말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고, 자국의 힘을 강력하게 키우고, 강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와 ‘현실 정치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와 같이 진정한 지도자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단련되고 익숙해지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과 냉혹한 정치 전략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쉽고 간결하게 정리한 《군주론》과 《로마사 평론》의 핵심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길 바란다.
구매가격 : 5,000 원
미술치료 매체와 기법
도서정보 : Ellen G. Horovitz | 2019-08-20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미술치료분야에서 잘 알려진 저자이자 임상치료사가 쓴 이 책은 혁신적이고 알기 쉬운 책으로서 독자들에게 다양한 임상적 상황에서 기본적인 미술 재료나 고급 미술 재료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알려준다. 발달 단계와 평가라는 두 가지 렌즈를 통하여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재료들과 방법을 통합하여 치료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실용적인 단계별 지침을 제시한다. 그리기, 색칠하기, 파스텔, 점토와 같은 전형적인 미술 분야와 도구뿐만 아니라, 유리, 뜨개질, 퀼트, 우드버닝, 펠트, 디지털 앱, 사진치료, 부산물 등을 포함한 특별한 재료와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이전의 지침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각 재료와 기법들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사람들과 주의할 점을 알려주고 있다. 연구를 바탕으로 이 지침서는 미술 재료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학생, 숙련된 미술치료사, 정신건강 상담사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0,500 원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도서정보 : 김진영 | 2019-08-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아침의 피아노』 『이별의 푸가』 이후
또 한 번의 놀라움과 감동을 맛본 책”
―변광배(한국외대 미네르바 교양대학 교수)
“고독이 두려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덧없음이 두려워서,
심지어 미움이 커서 힘을 잃을 때 몇 번이고 펼쳐서 읽고 싶은 책”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감동을 주는 강의’ ‘인문학 강의의 정수’라는 찬사를 받았던
철학자 김진영의 세계문학 강의록
故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1주기를 맞아, 깊이 있는 독해와 풍부한 감성으로 문학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의 세계문학 강의록이 출간되었다. 수강생들로부터 ‘감동을 주는 강의’ ‘인문학 강의의 정수’라는 찬사를 얻었던 선생의 소설 강의는 2007년부터 2017년 투병 전까지 이어지며 100여 종이 넘는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대표작을 다루었다. 이 책은 선생이 가장 정력적으로 문학을 강의하던 2010년,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 「전복적 소설 읽기: 소설을 읽는 8개의 키워드」 강의를 녹취, 정리한 것이다.
선생은 생의 전반기, 소설 읽기를 통해 사유 능력과 상상력의 자양분을 얻었다고 말한다. 10여 년에 걸친 그의 소설 강의는 감성과 사유를 빚진 문학에 대한 사의의 표현이었을까. 잔잔한 강물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살처럼, 이 책은 그가 평생 간직했던 소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이다.
"오랫동안 소설을 읽었다. 그 사이에 소설들은 자꾸만 얼굴을 바꾸었다. 사춘기 시절 소설은 뗏목이었다. 대책 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게 만드는. 젊은 시절 소설은 미지의 여인이었다. 프루스트가 그랬듯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해 버린 어떤 여인. 나이 들고 환상 대신 환멸을 배우게 되었어도 소설 읽기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소설도 얼굴 바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때 소설은 카산드라의 운명이었다. 진실을 외치는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고독하고 참담한 예언. 또 어느 때 소설은 고르곤의 눈이었다. 결코 마주 볼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정면으로 응시하는 어떤 시선. 또 어느 때 소설은 화이트 노이즈였다. 사실은 들리지 않는 그러나 달팽이관 속의 무슨 벌레처럼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소리. 또 어느 때 소설은 심지어 신처럼 여겨졌다. 없음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마저 없으면 안 되므로 있어야 하는 어떤 것."
―「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강좌 소개에서
죽음, 괴물, 기억, 광기, 동성애, 부조리, 고독, 정치
여덟 가지 키워드로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다
이 책에서 김진영 선생은 죽음, 괴물, 기억, 광기, 동성애, 부조리, 고독, 정치, 여덟 가지 키워드로 여덟 편의 소설을 읽는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빼앗긴 죽음과 죽음의 권리 찾기’를, 카프카의 『변신』에서 ‘괴물과 흡혈 행위’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감각과 이성, 그리고 기억 문제’를,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서 ‘어두운 낭만주의와 광기’를,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건강한 시민성과 동성애적 관능, 그리고 진리 문제’를, 카뮈의 『이방인』에서 ‘부조리한 삶에 대한 반항과 삶의 본질인 이동성을 되찾기 위한 태양 살인’을,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에서 ‘고독의 긍정적이고 혁명적인 측면’을, 볼랴뇨의 『칠레의 밤』에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자기를 유지하는 방법, 특히 정치 및 역사와 연결되었을 때 문학과 문학가가 어떤 기능을 맡는지에 대한 가열한 비판’을 이야기한다.
작가들이 숨겨놓은 메시지를 찾아 소설의 미로를 헤치고,
교훈과 전형에 갇힌 해석에서 소설을 해방시키는 능동적 독자
얼마나 많이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고, 어떻게 기억할지가 중요하다. 작가의 ‘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계문학의 대표작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진영 선생에게 소설 읽기는 “숨으려고 하는 글을 끝까지 세상의 제단 위에 올리려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내는”(80쪽) 작업이다. 그는 독자에게 읽히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작가들이 숨겨놓은 메시지를 찾아 소설의 미로를 헤치고, 교훈과 전형에 갇힌 작품 설명을 뛰어넘어 전복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으로 소설을 해방시키는 능동적 독서를 한다.
선생의 주관적이고 전복적인 텍스트 읽기 몇 가지를 살펴보자. 『변신』을 비극으로 읽는다는 점은 통상적으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소설을 갑충의 영역에서 다른 데로 빠져나가는 ‘성공적인 탈출’로 읽어 내고, 탈출의 전략을 ‘흡혈’로 해석한다. 죽어가던 갑충은 누이동생의 목에 키스(즉 목을 문다)를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아름답고 생기로 가득 찬 누이동생의 신체는 누구의 것일까?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아주 높은 지적 작업을 완성한 사람이 열정이나 도취라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우연히 빠지면서 스스로 명예를 실추하는 치욕적 이야기로 읽힌다. 이 몰락의 이야기를 선생은 토마스 만의 건강한 예술미가 완성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즉 주인공 아셴바흐가 죽어 가는 과정은, 타치오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타치오에게 들어 있는 썩는 치아를 대신 먹는 과정인 것이다. 이 밖에도 『이방인』의 뫼르소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을 ‘존재를 발견하는 축제’의 장면으로 읽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일치하는 서사로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한편 선생은 자의적 해석을 경계하기 위해 최근 문학 연구에서 활발한 역사와 철학 담론을 작품 해석에 폭넓게 적용하기도 한다.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사 연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운하임리히(unheimlich: 낯선 친숙함, 으스스함)’ 개념, 베르그송의 무의적(無意的) 기억, 벤야민의 프루스트 분석과 멜랑콜리 개념, 들뢰즈와 과타리의 카프카 분석 외에도 라캉, 아도르노, 마르크스, 푸코, 바르트 등의 철학과 문화 이론을 동원해 심층적인 읽기를 시도한다. 이는 작품 해석의 풍요로움에 직결되며 선생의 문학 강의가 ‘인문학 강의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매가격 : 11,500 원
과거 문학작품 현대적으로 다시읽기 시리즈 3 - 돌국
도서정보 : 성상우 | 2019-08-1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시간때우기로 읽기 위해 꺼내든 작은 단편소설에서 깜짝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학창시절에 접하기는 했지만 시험을 위한 독서였기 때문에 문법과 구체적 단어에 집착했을 때와는 달리 작품 전반을 관조하다보니 작가가 말하는 시대상과 인생에 대한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소재로 삼았던 이야기들이 현재 관점에서 생소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고민했던 일상이 지금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단 말입니다. 고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고전들을 제대로 다시 정독하게 하고 그 내용이 현대적으로는 어떻게 변주되어서 우리 옆에 다시금 나타나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지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구매가격 : 1,000 원
근현대 중국철학, 홍수전 손문 모택동 시진핑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近現代 中國哲學思想은 무엇인가
1. 中國을 알아야 韓國이 산다
近代에 이르도록, 中國哲學은 크게 3개의 기둥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흔히 儒佛道라고 지칭되는데, 儒家, 佛家, 道家는, 중국은 물론 漢字文化圈 國家인 韓國이나 日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朝鮮王朝는 철저히 儒家哲學에 의해 主導되는 사회였다.
근대 이후 중국은 社會主義 國家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主義와 마오쩌둥主義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에도 중국은 名實相符한 共産主義 國家이다.
淸나라 멸망 이후, 중국에는 마땅한 철학사상이 不在하다. 동아시아 漢字文化圈을 先導하던 中國哲學思想史를 思慮한다면, 다소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연스런 역사의 흐름이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중국을 主導하는 철학사상은 말할 나위 없이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사 안에서, 이미 실패한 哲學思想이다.
그러한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은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을 실행하였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資本主義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資本主義가 人間本性에 좀 더 符合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인류는 社會主義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摸索해야 한다. 현재에도 자본주의는 散在하여 解決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友邦에 대한 選別이 요구된다. 國際政治의 場에서 覇權國이 아니라면, 양다리를 걸치는 식의 國際關係는 不可하다. 반드시 어느 한 陣營을 선택하여 편가름해야만 한다.
국제정치는 영원한 敵도 영원한 同志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자기 편은 늘 流動的이다. 국제정치에서 ‘隣接國의 悲劇’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은 아주 결정적인 事例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徹天之怨?인 국가들이다. 근현대사를 살필 때, 일본은 壬辰倭亂이나 日帝强占의 역사로써 철천지원수다. 중국은 저 먼 古代로부터 무수한 侵略戰爭을 恣行했고, 조선왕조를 屬國으로 삼았으며, 다시 6.25전쟁으로써 침략을 해왔으므로 철천지원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두 隣接國에 대해, 이제는 어느 나라가 대한민국의 友邦國家인가를 판가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自由民主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 중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共産社會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複合的인 情況을 思慮해야겠지만, 선택에 대해 적잖은 指針과 尺度를 제공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현재 ‘문재인 정권’에서 떵떵거리며 勢道를 휘두르는 ‘曺國’은, 現職 서울대 敎授로서 休職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철밥통’인 교수자리가 위태해지자, 슬그머니 復職을 했다가 다시 휴직하면서, 교수자리를 保傳하고 있다.
과거에 그는, 敎授와 政治人을 병행해서는 안 된다면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런데 ‘내로남불’ 식으로, 제 밥그릇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실로 그런 것이 빨갱이 從北主義者들의 良心의 眞面目이다.
주둥이로는 革命, 解放, 民族, 平等, 平和, 人權, 分配, 正義, 正常, 理性 따위를 떠들어대며 ‘개돼지 群衆’을 선동하면서, 정작 제 욕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 빨갱이들의 本性이며, 나아가 인간존재의 본성이다.
積弊淸算을 외치며 執權을 한 빨갱이 左派들은, 집권 이후 제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개혁세력의 집권은 不可하다는 것이다. 막상 권력을 얻게 되면, 금세 인간존재들의 野鄙한 本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갱이 左派들 首腦部 대부분이, 富者이며 資本家라는 아이러니는, 쉬이 解明된다. 북한의 이너써클 1%만이 好衣好食하는 것처럼, 남한의 빨갱이들도 나름대로 이름깨나 날리면, 죄다 자본가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런 빨갱이 族屬 대부분이, 자기 子息들은 어떻게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지 않는가.
그러니 欲望과 慾心에 솔직한 資本主義體制가 좀 더 그럴듯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개돼지 군중’들만이, 그저 그들이 떠들어대는 虛無孟浪한 프로파간다에 놀아날 따름이다.
그렇다면 保守右派라는 者들은 또 어떠한가. 오죽 제 욕심을 채우며 不正腐敗를 일삼았으면, 현직 대통령이 彈劾당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겠는가. 그야말로 五十步百步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左右 進退兩難 속에서, 隣接强大國들의 四面楚歌에 휩싸여 바람잘 날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인접강대국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면한다면 朝鮮王朝 末期처럼, 그레이트 게임의 혼돈 속에서 나라를 팔아먹고 빼앗기는 難局에 처하고 말 것이다.
政治는 인간존재의 삶의 根幹이다.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를 運用하는 天地自然의 원리가, 현실세계에서 顯現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한 정치를 살핌에 있어, 흔히 國內政治와 國際政治를 가름한다.
그런데 대체로 국내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십상이다. 아무래도 자기의 삶의 時空間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탓이다.
하지만 어떠한 국내정치일지라도, 결국은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제아무리 국내정치적으로 執權하였더라도 국제정치의 外患이 발생하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韓國戰爭으로부터 日帝强占이나 丙子胡亂 등, 그 사례는 굳이 열거할 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左派와 右派의 대립이 尖銳하다. 그러한 현상을 국내정치적 관점에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는 물론이며 현대에서는 어떠한 국내정치적 현상도, 그 動力이 국제정치의 時流에 의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실세계의 어떠한 정치적 현상도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利益과 戰爭’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은, 古代로부터 掠奪, 征服, 植民, 冷戰, 覇權 등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그 裏面에서 작동하는 근원적 작동원리는 ‘利益과 戰爭’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정치적 관점의 根底에는, 歷史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역사가 바탕이 될 때, 국제정치적 판단은 正統性과 正當性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역사가 ‘自國에 이익이 되는 역사’여야 함은 明若觀火다.
그리고 마땅한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역사를 歪曲하게 된다. 그런데 왜곡할 만한 역사조차 없는 경우에는, 이제 온갖 道德主義的 名分을 내세운다.
예컨대, 21세기에는 人權이라는 명분만큼 그럴듯한 명분은 없다. 물론 인권은 참으로 소중한 보편적 가치 개념이지만, 이렇게 한갓 명분으로써 악용되는 도덕은, Nietzsche가 비판한 ‘奴隷道德’ 部類쯤으로나 분별될 따름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國家의 구성원으로서 살아내는 인간존재의 삶은, 아무리 微細한 상황일지라도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에 의한다.
마치 ‘Butterfly effect’처럼,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이,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 理致다.
그러니 한 인간존재의 미세한 행위가, 거대한 국제정치적 사건으로 飛火될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국제정치의 作動原理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대적 사건으로서, 에너지 戰場인 一帶一路를 제시한다.
흔히 一帶一路를, ‘시진핑’이라는 중국의 현대판 皇帝 個人이 도출해 낸 執權政策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一帶一路의 中國夢은, 결코 ‘시진핑’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夢想은 중국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를 搖動케 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이를 살핌으로써, 현대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역시 赤裸裸하게 분석할 수 있다.
美中 貿易戰爭이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도 一帶一路이며, 北韓의 핵무기와 무역제제에 관련된 문제들 역시, 一帶一路와 첨예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슈로서, 一帶一路는 가장 時宜適切하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主唱하는 것은, 모름지기 中國夢이다. 과연 중국이 꿈꾸는 ‘중국의 꿈’은 실현될 것인가.
그런데 中國夢이 실현되든 실현되지 안든,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죄다 불안스럽고 불편하다는 점을 인식케 된다.
특히 一帶一路 式의 中國夢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게는 惡夢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역사적 사례로써 익히 검증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이 강력한 帝國으로서 정립되었을 때, 인접해 있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는 늘 정복의 一順位였다. 그래야만 名實相符한 天子의 제국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一帶一路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장기적인 인프라 프로젝트는, 그 계획대로만 실현된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현재 100여 개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으며, 30여 연선국가와 일대일로 공동 건설 관련 협약을 맺었다. 2017년 5월, ‘2017 일대일로 국제협력 고위급 포럼’에서는, 총 270여 개의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覇權國 미국은, 이러한 계획을 坐視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자칫 覇權을 중국에게 넘겨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과거에 소련이나 일본을 坐礁시켰듯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며 중국의 몰락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정학적으로 부득이하여 배척될 수 없는 중국이, 다시 中國夢을 꿈꾸기 시작한다는 일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당최 불안한 미래에 대해 銳意注視해야만 하는 사안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중국이 모색하는 中國夢은, 과거 주변국들을 君臣關係로써 屈從시키던 짓을 꿈꾸는 것일까.
현대적인 自由民主主義 체제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서, 과거 獨尊儒術하던 儒敎文化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식의 재현을 꿈꾸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인 온갖 것들을 죄다 獨裁하던 天子의 帝國을 부활시키려는 것일까.
그래서 그러한 과정에 걸림돌이라 인식했던 檀君朝鮮, 高句麗, 高麗, 渤海, 統一新羅, 朝鮮 등의 경우처럼, 주변국들이 자기들의 中國夢體制에 순응하고 굴종할 때까지, 침략과 정복을 자행하겠다는 것인가.
이러하니 가장 근접해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으로서는, 도무지 불안과 공포를 숨길 수 없다.
그러다보니 중국 자본을 受惠하는 親中主義者들도 多數 발생하는 상황이며, 그러한 자들은 과거 大東亞共營圈을 主唱하던 日本帝國을 좇아, 韓日合邦(庚戌國恥)을 주도했던 親日派들과 유사하게, 中國夢의 실현에 어떻게든 기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存續시키는 체제이론이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라는 점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그것을 견고히 유지할 때, 다소 나아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상유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是認해야만 한다.
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위한 不得已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解體하고서, 보다 나은 사회를 정립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면, 응당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현재 暗?的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人民民主主義, 社會主義, 共産主義, 主體思想 따위가, 과연 그러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만 주의할 대목은, 人情的으로나 人道的으로 北韓의 同胞들에게 한 겨레로서의 민족적 共通感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國際社會라는 弱肉强食의 현장에서, 그러한 感性的 판단이 시의적절한 대안으로서 작동한 역사적 사례는 거의 不在함을 유념해야 한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로서 국제정치적 관점을 갖게 되면, 적잖은 인생의 의문이 해소된다.
혁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는 근원적인 사회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현실세계의 온갖 不合理와 갖은 不條理에 대해서도 理解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인간존재는 외부의 바람에 煽動당하지 않으며, 오롯한 자기의 삶에 충실할 수도 있게 된다. 世間의 인간존재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자기에게 찾아든 苦難의 원인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서 나름의 대안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近代 이전에는 국제정치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위대한 先知者로서 숭앙되는 인물들의 텍스트였다.
예컨대, 老子, 論語, 大藏經, Bible, Quran, 그리스哲學書 등이 그러하다. 그런 先覺者들의 텍스트를 공부하면, 현실세계라는 ‘우물 안 개구리’ 상태를 극복하고서, 天地自然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곧 天地自然의 ‘그레이트 게임’을 인식하게 되는 탓이다. 그래서 그들의 著作이 현재까지도 인류의 古典으로서 숭앙받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직접적으로 天地自然의 상황을 살피는 시대이다. 예컨대, NASA에서 운영하는 인공위성 화면은 실시간으로 地球라는 行星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구촌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관점을 지니지 못한다면, 각 개인의 삶의 문제 역시 마땅한 해답을 갖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미세한 상황일지라도 그 결정적인 원인은, 결국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에 의한 逆나비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제정치적 관점의 培養과 思慮는 실로 중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것이다.
제아무리 小乘的 깨달음을 얻어 解脫한다고 해도, 결국 현실세계에서 생존하는 한,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은 실로 不得已다.
이러한 본래적 사실을 是認하지 않는다면, 결코 삶의 現象은 죽음의 순간까지 나아지지 못한다.
‘中國哲學(Chinese philosophies)’ 중국에서 전개된 철학사상을 가리킨다. 중국철학은 主流思想의 변천에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7단계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百家爭鳴時期(기원전550~기원전110), 文獻經學時期(기원전110~기원후220), 老莊學·玄學時期(220~404), 佛敎主流時期(405~819), 新儒學·性理學時期(820~1644), 實學考證學時期(1645~1911), 社會主義·全體主義時期(1912~현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략-
구매가격 : 3,500 원
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헤겔, 법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법철학은 무엇인가
1. ‘法學’과 ‘法哲學’
法學은 實定法에 대한 학문체계이고, 法哲學은 自然法에 대한 학문체계이다.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실정법에 비해, 다소 荒唐無稽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歷史的 始作과 동시적으로 고뇌되어온 자연법에 대한 穿鑿이 없었다면,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실정법이 정립되었을 리 萬無하다.
그리고 法律이라는 것은, 明文化된 法條文만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解釋과 適用이 요구된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법률을 제정해 두었더라도, 그러한 법률을 이해하지 못하고, 준수하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한갓 ‘빛 좋은 개살구’로서 無用之物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한 법률의 해석과 적용의 과정에서, 법철학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법학과 법철학에 내재된 관계 방식은, 非但 법률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諸般狀況에서도 작동한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 裏面의 철학적 상황인식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흔히 ‘自己의 哲學’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허접한 개똥철학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존재는 자기만의 철학을 지니고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록 거렁뱅이의 貧困한 삶일지라도, 오롯한 自由人的 個人으로서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旣得權的 支配權力은, 각 인간존재들이 자기의 철학을 지니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각 인간존재들이 자유롭게 ‘자기의 철학’을 지니게 되면, 마음대로 선동하여 조작할 수 없게 되는 탓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온갖 프로파간다로써 각 인간존재들의 ‘自己의 哲學’을 조작해대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문명이 高度化될수록 더욱 惡化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개돼지 群衆’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깨어나서 공부하여 ‘자기의 철학’을 保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존재들은 출생 이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결코 ‘개돼지 군중’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중국과 미국 사에에서 覇權競爭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후손들에게 韜光養晦를 강조하였다. 도광양회는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기른다’는 의미다.
만약 ‘덩샤오핑’의 遺言처럼, 중국이 섣부른 패권경쟁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歷史는 무수한 變數에 의해 조작되기 마련이다.
‘시진핑(習近平)’이 등장하여, 이렇게 성급한 패권경쟁을 시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다보니 중국은, 오랜 세월 끝에 찾아온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상황에 있다. 아무래도 중국의 미래는, 과거 蘇聯의 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접국의 상황은, 대한민국이나 북한 그리고 일본 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昨今에 벌어지고 있는, 韓日 무역전쟁이 그러하다. 물론 이는, 역사적 배경을 갖는 현상이다. 日帝强占 역사에 대한 怨恨이, 反日 種族主義를 부추기는 것이다.
여기서 怨恨이라는 감정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원한 감정은, ‘니체’의 주장처럼, 고작 奴隷道德으로서나 작동한다.
現下 빨갱이 정치권력의 프로파간다에 휩쓸리는 ‘개돼지 群衆’의 감정상태는 여실히 怨恨이다.
이러한 怨恨의 集團意識과 集團無意識에 의해 발현되는 도덕은 奴隷道德이며, 그러한 ‘떼거리 윤리도덕’이 실현하는 法體系는, 無法的 妄想에 의해 작동하는 虛張聲勢이기 십상이다. 당최 哲學이 없는 法體系의 作動인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발생하는 道德的 法律的 상황들은, 妄想的 奴隷道德이 아니라, 嚴正한 法律道德에 의해 인식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의 선동질이나 조작질에 놀아나는 ‘개돼지’로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實存하는 個人’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法哲學的 理想이 현실세계에서 정립된 대상은 憲法이다. 구체적인 각 法律들은 법철학적 측면보다는, 현실세계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법학적 측면이 강조된다. 따라서 國家의 國民으로서 마땅히 헌법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憲法은 추상적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最高一般法이기 때문에, 헌법이 직접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며, 憲法精神을 위배하는 하위 법규를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입법부가 새로운 법규를 제정하도록 하고 있다. 憲法精神에 위배되는 법규는, 일반적으로 법원에 따라 효력이 상실된다.
그러나 憲法裁判所가 있는 국가에서는, 법원이 헌법재판소에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심사할 것을 청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이에 대해 심사하고 있다. 헌법의 제·개정 절차는, 일반 법률의 제·개정 절차보다 까다롭다.
이러한 憲法精神을 정립해내는 학문체계가 곧 法哲學이다. 그런데 법철학적 전통이 日淺한 대한민국의 경우,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경험했다. 이는 헌법적 사건으로서, 지극히 법철학적 판단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그 憲法的 判決에 대한 國論은 분열되었고,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도 헌법정신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旣得權勢力의 프로파간다에 煽動당하는 ‘개돼지 群衆精神’이 작동할 따름이다.
‘法哲學(philosophy of law)’이란, 법의 本質과 淵源 등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과 이론을 만드는 철학적 연구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哲學이 취하고 있는 기초이론에 입각하여, 법의 개념, 본질, 이념, 효력 등을 비롯하여, 법과 사회, 법과 국가의 관계의 근본문제를 다룬다. 즉, 올바른 法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모색하는 法哲學은 법과 관련된 철학이다.
이는 自然法과 實定法 등의 ‘法學(science of law)’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성찰하며, 現行法律이나 外國法律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법의 근본 원리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2. 자연법
‘自然法(natural law)’은, 人爲的이 아닌 自然的 성질에 바탕을 둔, 普遍的이고 恒久的인 법률 및 규범을 의미한다.
實定法에 대비되는 법 개념으로서, 실정법이 민족이나 사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에 비해, 民族·社會·時代를 초월해 永久不變의 普遍妥當性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실정법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異見이 있었다.
-하략-
구매가격 : 4,000 원
니코마코스 실천이성비판 도덕의 계보, 윤리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윤리학은 무엇인가
1. ‘윤리학’과 ‘노예도덕’
대한민국의 倫理學은, 朝鮮王朝 시절의 歷史的 慣性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500여 년 넘도록 朝鮮民衆을 抑壓했던 그 윤리학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
朝鮮王朝의 윤리학은 철저히 실패하였고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韓民族에게 윤리학다운 윤리학은 없다.
日帝强占期의 倫理나 道德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左右 이데올로기 ‘쌈질’을 하던 시절은 어떠하며, 6.25 전쟁, 4.3 사건, 5.18 사건, 세월호 사건, 대통령 탄핵 사건 등의 상황에서는 어떠했는가.
21세기 지금 이 순간까지도, 倫理道德은 ‘利益과 戰爭’의 侍女일 따름이었다. 非但 우리나라의 역사만이 아니라, 人類史에서 倫理道德은 늘 그러했다.
그래서 ‘近代的 個人’으로서 인간존재들은 법률에 좀 더 의지케 되었다. 고작 奴隷道德쯤으로나 작동하던 道德主義의 역사적 弊害를 익히 체험한 탓에, 차라리 法律主義에 의지코자 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어쩐지 도덕주의를 법률주의보다 선호한다. 적어도 法律的 强制에 의해 統制당하는 것보다는, 道德的 良心에 의한 抑制가 좀 더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탓이다.
예컨대 서양세계에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주장하는 ‘德(arete)’을 목적한다든지, ‘실천이성비판’에서 주장하는 인간존재 내부의 絶對命令을 좇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自律의 상태를 추구한다. 때문에 자율적 양심은 더욱 여러모로 具色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실천이성비판’은, 啓蒙主義의 완성자로서의 칸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도덕의 원천은 ‘自律(Autonomie)’, 즉 意志의 自己立法性에 있다.
자율은 곧 ‘自由(Freihei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近代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핵심 개념인 自由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으며, 그 점에서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근대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本性은, 당최 윤리도덕으로써 良心的으로 통제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倫理道德的 抑制’가, ‘法律的 統制’보다 인간존재에게 적합했다면, 이미 인류는 지극히 윤리적인 문명을 실현했을 것이다.
더욱이 國內政治의 場에서는, 윤리도덕이 그나마 억제력을 가질 수 있지만, 國際政治의 jungle에서는, 윤리도덕은 고사하고, 國際法마저도 별다른 통제력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國家 間에 國益의 衝突이 발생하였을 때, 결국은 軍事的 暴力에 의한 戰爭으로써 勝敗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전혀 달라진 바 없다.
우리나라의 서양윤리학 도입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 윤리학과의 성립과, 1938년 金斗憲의 ‘윤리학개론’ 출판이 嚆矢이지만, 한국윤리학의 역사와 전통은 儒佛仙의 思想史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의 윤리사상은, 근본적으로 儒佛道의 經典에 뿌리박고 있으며, 서양 윤리학의 이론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교세확장에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윤리학은 실상 有名無實하다. 기존의 윤리학은 죄다 실패했고 해체되어버렸으며, 정작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은 法律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기의 旣得權的 利得을 목적하며, 윤리도덕을 법률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현혹함으로써, 旣往의 법률마저도 훼손하는 실정이다.
종래의 윤리학이 개인적이며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면, 현대윤리학의 괄목할만한 중요한 특징은 ‘實踐的 倫理學(practical ethics)’ 내지 應用倫理學의 擡頭라고 말할 수 있다.
1990년대 윤리학의 새로운 동향은, 이론적인 規範倫理學에서는, 담론적 방법을 중시하는 構成主義的 倫理學(Schwemmer), 言語話用論的 윤리학(Apel) 및 意思疏通윤리학(Habermas)이 활발히 논의되고, 發生윤리학(Krings), 契約論的 윤리학(Rawls), 합의에 의한 도덕론(Gauthier) 등이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최근의 理論倫理學의 연구동향에서 특기할 것은, 권리와 의무에 중점을 두는 논의보다, 책임에 중점을 두는 논의가 활발하다는 것과, 他者를 중시하는 現象學的 倫理學(Levinas)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應用倫理學에서는, 특히 생명공학 및 유전공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파생하는 생명윤리의 문제들, 가령 인간복제, 인간과 동물의 교잡배, 유전자조작식품의 부작용, 인간게놈연구 등을 다루는 生命倫理學에 관한 연구가, 학계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전자매체기술의 발달에 의해 파생되는 사이버테러, 사이버 명예훼손과 사생활보호 등은 크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생태학적 윤리학과 과학 및 기술윤리학에 관한 논의도, 자연 및 인간의 위기문제를 폭넓고 심도있게 다룸으로써, 윤리학의 관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시키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시도가 있으나, 지금 이 순간에 이르도록 별다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윤리학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존재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것은 ‘法律主義 倫理學’이라고 할 것이다.
순수한 윤리학의 무수한 시도가, 죄다 별다른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윤리도덕에 어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무모하다. 차라리 感性이 철저히 배제된 ‘법률주의 윤리학’이 여러모로 타당하다.
人類史의 거대한 체험을 思慮한다면, 이제는 憂鬱한 ‘도덕의 계보’를 극복하고서, ‘위버멘쉬의 윤리학’이 작동할 수 있는 시공간을 실현하여, 영원한 회귀를 모색하여도 妥當하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그러한 시공간은 실현된 바 없으며, 향후에도 그러한 실현가능성은 당최 五里霧中이다. 그러니 차라리 ‘윤리도덕의 虛無孟浪함’보다는 ‘법률의 明白함’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우, ‘법률의 명백함’마저도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조작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돼지 群衆’들은 여전히 허망한 윤리도덕을 渴求한다. 참으로 蒙昧한 노릇이다.
‘倫理學(ethics)’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와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道德哲學(moral philosophy)이라고도 불린다. 영어의 ‘ethics’는 ‘ethos’, ‘moral’은 ‘mores’라는 희랍어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리학에 관한 이론은, 처음에 종교적인 敎說의 형식에서 나타났다.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종교의 모든 경전 가운데에는, 神 또는 聖人의 교훈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규범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윤리학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고대 중국의 儒學은 오히려 倫理學이었으며, 이것들에 대표된 사상은, 그 후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로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어, 독자적인 倫理學史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서, 기존의 도덕은 대체로 인간존재 스스로를 主人의 상태로 陶冶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奴?의 수준으로 一貫하는 상태이다. 그러한 윤리학의 수준을 극복코자 한 것이, ‘니체’의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論辨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現實世界의 道德을 主人道德과 奴隷道德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주인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自發的 肯定에서 성장하고, 자기 스스로 價値를 설정하며, 스스로 善과 惡을 결정하는 자의 도덕이다. 따라서 주인도덕에서 ‘좋음(gut)’과 ‘나쁨(schlecht)’의 대립은, ‘高貴함(vornehm)’과 ‘輕蔑함(veracht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奴隷道德은 復讐心, 怨恨勘定, 즉 反動的 集團本能에서 성장한다. 가치를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것 전부에 대해 죄다 否定하고 解體할 뿐인 자들의 도덕이다.
따라서 奴隷道德에서 ‘善(gut)’과 ‘惡(bose)’의 대립은 ‘위험하지 않음(ungefahrlich)’과 ‘위험함(gefahr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同情이나 憐愍에 대한 勸告 등은, 노예도덕의 표식이다. 이 두 가지 도덕은, 고도로 혼합된 문화체계 안에서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 속에서도 공존하고 침투하며 중재되고 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유대인의 복수심이 고안해내었던 奴隷道德의 지반 위에서 성장했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도덕적 가치라는 좀더 작은 영역에서는, 주인도덕과 그리스도교적 가치개념을 가진 도덕과의 대립보다 더 큰 대립은 찾아낼 수 없다.
후자는 徹頭徹尾 병든 토양에서 자란다. 복음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생리적 유형들과 똑같은 유형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반대로 로마적이고, 이교적이고, 고전적이며, 르네상스적인 주인도덕은, 제대로 잘 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표현, 상승하는 삶에 대한 표현, 삶의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이 본능적인 부정을 하듯이, 神, 彼岸, 脫我 등의 개념은, 한갓 否定일 뿐이다.
반면에 주인도덕은 본능적으로 肯定한다. 주인도덕은 자기의 충만함을 사물들에게 나누어준다, 그것은 世界像을 神聖化하고 아름답게 만들며 合理的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사물의 가치를 빈곤하게 하고, 창백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들어버리며, 세상을 부정한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욕지거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反響인 근대의 가치체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존경 없이, 단지 시장터 같은 사회적 삶에만 가치를 두는 반동적 힘을 발견한다.
니체는 근대세계를 노예도덕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근대세계를 허무적 세계로, 近代人은 終末人으로 이해된다.
니체는, 주인도덕을 통해서, 삶을 자기극복을 통해 조형시키는 강한 의지, 많은 욕구들의 긴장적 대립들을 제어하는 능력, 긍정적 자기긍정과 자기가치의 느낌을 새로운 善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善한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의식 속에서, 자기극복의 덕을 갖고 있는 자가 된다.
이런 인간은 곧 고귀한 인간, 귀족적 인간, 귀족적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곧 ‘차라투스트라’가 찾던 강한 자이며, ‘위버멘쉬’的 존재이다.
-하략-
구매가격 : 3,500 원
(동서양 핵심개념만 간결하게 정리한) 하늘의 역사
도서정보 : 박석재 | 2019-08-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동서양 핵심개념만 간결하게 정리한
유니버스와 코스모스의 빅 히스토리!
『하늘의 역사』는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원칙 아래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한다. 첫째, 동양과 서양을 같은 비중으로 다뤘다. 지금까지 우주의 역사는 대부분 서양의 관점에서 기술됐다. 그러다 보니 서양 것은 과학적이고 옳은 반면 동양 것은 비과학적이고 그르다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편견은 막연한 서양 사대주의를 낳고 그 결과 모든 분야에 악영향을 미친다. 가장 좋은 예가 교육과정에서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 4원소는 가르치면서 동양의 태호복희 5원소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학창시절 태극기의 원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자기 나라 국기도 모르고 살다니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유니버스와 코스모스를 조화롭게 다뤘다. 우주는 흔히 영어로 universe 또는 cosmos로 표현된다. 유니버스는 별과 은하로 채워진 거대한 우주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의 제목이 ‘유니버스’라면 그 책은 천문학 교과서라고 보면 된다. 코스모스는 한마디로 ‘유니버스+알파’다. 여기서 ‘알파’는 인간의 주관적 요구사항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둑 두는 사람들이 바둑판은 하나의 우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코스모스인 것이다. 코스모스는 경우에 따라 유니버스보다 우리 인생에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우주의 역사’가 아니라 ‘하늘의 역사’인 까닭은 유니버스는 물론 코스모스의 역사도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책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어린이 과학동아’에 인기리에 연재된 ‘우주신령과 제자들’을 도우미로 고용했다. '과학기술의 신’이 있다면 꼭 서양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영어로 말할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저자는 이 만화를 통해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신령들이 우주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하여 과학이 우리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설명과 유쾌한 세 신령이 나오는 재미있는 만화를 통해 현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명쾌하게 제시해줄 것이다.
■ 출판사 리뷰
‘우리 배달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
하늘의 섭리를 공부하고 실천하자!
대한민국은 ‘하늘의 나라’다.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은 하늘을 숭앙하는 우리 전통을 말해 주고 있다. 오죽하면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공휴일까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늘의 자손은 하늘을 잊은 것이다.
최근 세계화의 물결 속에 민족정신이 더욱 흐려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다민족국가로 변해가는 과정에 있어 민족정신을 거론하기가 점점 더 어색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평화를 사랑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먼저 우리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족정신이 흔들리면 세계화는 의미가 없다. 천손이란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알아야 따를 것 아닌가? 하늘의 뜻을 따르려면 천손은 공부를 해야 한다. 즉 천손이란 하늘의 섭리를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정신을 가진 민족을 말한다.
역사광복을 추진하는 사단법인 대한사랑의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박석재 박사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의 이치를 알기 위해 애쓴 민족이며 우리는 하늘의 자손임을 통시적 관점을 통해 설명한다. 또한 현재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며 누구나 알아야 할 지식을 동서양의 핵심개념만 간결하게 정리해서 전달한다. 풍성한 사진과 재미있는 만화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쉽고 간결한 저자의 설명은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친밀감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달의 책력을 음력 또는 태음력, 해의 책력을 양력 또는 태양력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해는 태양이라고 부르면서 달은 태음이라고 부르지 않아 어색하다. ‘태양과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인 맞는 것이다. _p. 13
해와 달은 동양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음양 우주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은 상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가 양이라면 여자가 음이고, 하늘이 양이라면 땅이 음이고, 낮이 양이라면 밤이 음이고…… 이런 식으로 우주를 보는 것이다. 이 우주관은 서양에는 없는 동양의 특성으로 자리매김했다. _p. 19
지구가 해를 한 바퀴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해, 달이 지구를 한 바퀴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달이 됐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한 해는 약 360일이요 한 달은 약 30일이 됐다. 그래서 사람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10개씩인데도 불구하고 1년은 12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_p. 27
동양에서는 동·서·남·북 각 방향마다 7개씩의 별자리가 자리를 잡게 됐다. 모두 합치면 28개가 되는데 이를 이십팔수라고 한다. _p. 42
하늘의 자손, 천손인 우리 민족은 신화가 아니라 글로 적힌 우주론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천부경’으로 태곳적부터 전해진 것이다. _p. 59
‘단군세기’에서 발견된 고조선시대의 오성결집 기록이다. 여기서 ‘무진오십년’은 BC 1733년을 말하고 ‘오성’은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을 말한다. ‘취’는 ‘취합한다’는 뜻이고 ‘루’는 동양 별자리 이십팔수의 하나다. _p. 95
첨성대는 우리 조상님들이 처음부터 정확하게 ‘우주의 암호’를 토대로 만든 ‘우주의 상징’이다. 이처럼 하늘을 아는 눈으로 보면 조상님들의 통찰력도 깨닫게 된다. _p. 125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 서양의 우주관은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우주 중앙의 월하권은 인간의 세계이자 죄악의 세계였고 월상권은 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천동설 우주관을 부정하는 일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_p. 146
근세에 이르러 서양의 허셜(Herschel)은 지름 50cm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우주를 관측해 여섯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천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오행성의 수천 년 도그마가 드디어 무너진 것이다. _p. 169
아인슈타인(Einstein)의 상대성이론에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 두 가지가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쉬운 이론이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어려운 이론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_p. 195
조선 말 기우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시도했던 고종황제의 노력만큼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덕분에 후손들은 ‘제’를 ‘민’으로 바꿔 ‘대한민국’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운 것이다. _p. 247
나는 대한민국이 컴퓨터라면 다시 포맷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개천혁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위대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_p. 260
구매가격 : 11,900 원
논증의 기술
도서정보 : 앤서니 웨스턴 | 2019-08-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생각을 논리적으로 하고 그 생각을 설득력 있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고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난해하게 쓰인 다른 논리학 서적이나 요령만 전달하는 다른 글쓰기 서적과 달리 이 책은 논증의 핵심 규칙들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규칙에 예문과 함께 명쾌한 설명을 붙여놓아 누구나 쉽게 논증의 기술을 이해하고 익힐 수 있게 해준다. 대입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각종 적성시험(PSAT, LEET, DEET, MEET) 응시자,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기획안을 작성하는 회사원, 글쓰기가 직업인 저술가나 언론인, 남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인이나 기업의 영업사원 등이 실용적인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이다.
구매가격 : 8,500 원
춘원과 '사랑'
도서정보 : 김동인 | 2019-08-1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제는 명예도 부족함이 없었다. 목숨도 근 50이니 과히 부족치는 안았다. 고생, 사랑, 존경, 역시 그다지 부족 없이 받았겠다 생물로서의 후계자도 있겠다, 이제 남은 것은 늙음과 쇠퇴와 혹은 잘못하면 전에 얻었던 명성에 트집이 갈 일이 생길는지도 알 수 없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1,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