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2

도서정보 : 박지원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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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 연암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 2





21세기 현재의 ‘지금 여기’에서, ‘연암’과 같은 시각으로서 중국 땅을 살필 수 있는 방편은 아무래도 없을 듯하다.
우선, ‘연암’의 시각은 철저히 몸의 체험에 의하고 있다. 예컨대, ‘연암’은 직접 말을 타고서 여정을 꾸렸다. 나아가 하인이나 마부들은 제 발로 걸어서 그 여정을 소화해 냈다.
그런데 현재에 이르러 도보로서 ‘열하일기’의 여정을 답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며, 또한 굳이 그러한 방식으로 여행하려는 자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비행기를 타고 ‘심양’이나 ‘대련’쯤으로 가서, 줄곧 자동차쯤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북경’이나 ‘천진’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여정을 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연암’과 현대인의 시각차를 엿보이는 사실만은 아니다. 모름지기 문명의 변화는, 그 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존재들의 마음까지도 결정지어버리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동차나 비행기가 상용화된 시대를 살아내는 자는, 결코 말이나 수레가 상용화되던 시대를 살아내던 자의 감성에 접근할 수는 없다. 물론 굳이 그러해야 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걷거나 말이나 수레를 타고서 그 땅의 풍취를 온 몸으로 체감하는 여행과,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식 이동수단 속에 몸을 감추고서 바깥의 대지와 차단된 채로 행해지는 여행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열하일기’와 ‘표해록’의 번역을 계획하면서, ‘타이베이’, ‘하노이’, ‘교토’ 등을 다녀왔다. 이는 모두 위의 원전들과 다소 연관이 있는 지역들이며, 번역작업에 보다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 여정들은 참으로 고독했고 지극히 여유로웠으며, 그럼으로써 ‘박지원’이나 ‘최부’의 감성에 좀 더 접근해보고자 했다.
이제 ‘열하일기’의 번역을 실제로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의 루트를 직접 여행해 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아마도 ‘열하일기’의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중국의 동북지역을 수차례에 걸쳐 여행하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다시 여행을 나설 생각을 하면, 이내 설렌다. 하지만 그 설렘은 한없이 고독하며 지극히 여유로운 설렘이다. 고독하면서 여유롭다니. 이는 아주 현묘(玄妙)한 감정상태임이 자명하다. 여행길을 나서지 않는다면, 당최 체험할 수 없는 현묘함인 것이다.
그러한 현묘함으로서, ‘열하일기’를 번역하는 동안 필자는 늘 그 여행길에 있다. 얼굴 한 번 본적 없으며,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는 ‘연암’과 동행하며, 항상 그 여행길에 있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다만 ‘지금 여기’의 상황일 따름이다. 물론 분명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나 미래는, 죄다 ‘지금 여기’의 현재에 포괄될 따름이다. 실상 어떠한 경우에도, 과거나 미래는 단지 인간존재의 인식 안에서만 작동하는 하나의 개념이거나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존재는 모름지기 항상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만 한다. 과거라는 것의 누적된 결과로서 현재가 작동하는 것이며, 그러한 현재가 누적되어 미래가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하나의 예측일 따름이며, 결코 실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예컨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인간존재의 현재가 제아무리 미래에 근접하더라도, 그 미래는 이미 현재보다는 나중일 것이므로, 결국 그 미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는 결코 궤변이 아니다.
더욱이 여기서 ‘웜-홀’이라거나 ‘다중 우주론’ 따위를 논변코자 함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쨌거나 인간존재로서 ‘지금 여기’의 현재에 집중하면 된다. 그렇게 현재의 ‘지금 여기’의 상황에 가장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집중하는 방편 중 대표적인 것이라면, 아무래도 여행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흔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여행을 미룬다. 그러한 핑계들은 나름대로 타당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자식을 양육해야 한다거나, 건강에 적잖은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데 그러한 핑계를 앞세우다 보면 결국 여행길은 나설 수 없는 법이며, 그렇게 하루하루 쫓기며 살아내다 보면, 시나브로 늙음과 죽음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여행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여행의 자리에 꿈이나 이상이나 목표 따위를 대체해도 무방하며, 그 외에 또 다른 실천적 가치 개념을 대입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만약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고 하자. 그런데 그 고백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결국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사랑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혹여 ‘이심전심(以心傳心)’이나 ‘심심상인(心心相印)’쯤을 말하고자 한다면, 다만 그런 말들은 당최 이러한 상황에 걸맞은 표현이 아니라고만 말해 두고 싶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어떠한 실현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충분한 심사숙고가 선행되어야 함은 실로 자명한 노릇이다.
어쨌거나 어떤 방식의 여행이 모범답안일 수는 없다. 게다가 21세기에 굳이 ‘연암’의 방식을 좇아 걷거나 말을 탄다고 해서, 그 당시를 체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역사나 문화를 살필 때에는, 반드시 부득이하거나 불가피한 시공간적 차이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반드시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다만 ‘연암’의 시대가 나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가 그 시대에 비해서 나은 것도 없다. 인간존재라면 누구라도 부득이하게 자기의 시대적 상황 안에서 살아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상황을 억지로 벗어날 수 있는 방편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속재필담’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나오는 학문이니, 지금 향교나 서당에서, 그저 글을 읽기에만 힘쓸 뿐, 그 의미를 강론하지는 않으므로, 귀로는 똑똑히 들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아득하기만 한 것입니다.[是所謂口耳之學, 現今黌塾之間, 慣是念書, 不曾講義, 故耳聞了了, 目視茫茫.]
그러니 입으로는 제자백가의 이론이 모두 술술 풀려 나오더라도, 손으로 글을 지어내려면 한 글자도 어려운 것입니다.[口宣則百家洋洋, 手寫則一字戛戛.]”

무릇 대부분의 학문 활동은 귀로 듣는 것이 주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입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열하일기’에 따르면, 그러한 과정은 눈의 활동과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학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나 입에만 치우치지 않는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귀와 입과 눈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체험을 통해서라야만 한다. 그러한 체험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말하라면, 필자는 응당 여행을 말할 것이다.
여행이야말로 귀와 입과 눈이 동시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나아가 몸과 마음이 유기적이며 종합적으로 작동해야만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같은 곳에는 이러한 기술도 있다.

“귀에는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이라는 ‘이유’의 동굴 속에 천권의 책을 간직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눈으로는 ‘고무래 정’자도 보지 못 한답니다.[耳藏二酉, 眼無一丁.]
하늘에 글 모르는 신선은 없으며, 속세에는 말 잘하는 앵무새가 있는 법이지요.[天上無不識字神仙, 世間還有能言之鸚鵡.]”

제아무리 많은 책을 간직하고서 그것을 독서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학문이 될 수 없다. 그저 독서하거나 암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는 한갓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부를 했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면, 쉴 새 없이 지어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듯한 작품을 지어낼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어내는 연습을 결코 멈추지 않을 때, 그 학문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늦은 나이에 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지어내는 연습을 결코 쉬지 않고 있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앵무새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무리 소질을 지녔더라도, 처음부터 걸작이나 명작을 지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플라톤’의 발언처럼, 반드시 ‘미메시스(mimesis: 模倣)’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인간존재가 지닌 본래성이다.
그런 탓에 필자의 작품들이 간혹, 다소 기존의 작품을 흉내 낼 경우, 아주 별스런 비난을 해대는 자들을 본다. 그런데 그런 자들의 저작을 찾아보려고 하면, 지어낸 것이 거의 없다. 자기는 전혀 지어내지 못 하면서, 다른 이의 저작에는 온갖 험담을 해대는 것이다.
그러한 비난이 혹여 어떤 개인적인 반감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부를 하려는 자라면, 그러한 비난을 일삼기보다는 스스로 지어내는 일에 매진하려는 마음이 요구된다.

예컨대, 필자는 대학원에 재학하는 동안, 그러한 캐릭터의 족속들을 참 많이 보았다. 그곳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려는 마음보다는, 잠시 허울 좋은 대학원이라는 시공간에서 삶의 고통을 피해보려는 자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치고 그럴 듯한 소논문 한 편 스스로 지어내는 자를 보지 못 했다. 그러면서 관점이 바뀌었다느니, 아직은 시기상조라느니, 갖은 핑계로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자들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제 명의로 된 텍스트는 결국 지어내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들 대부분은, 자기의 작품을 고뇌하며 지어내야 할 시간에, 무리지어 다니면서 이런저런 소문을 곱씹는 것으로 소일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자기의 관점이 생성될 수 있겠는가. 아니 한낱 앵무새 역할이라도 해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필자는, 대학원 시절에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하였다지만, 늘 어쩌다가 내가 그런 곳에 머물게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제 그곳을 떠나 이렇게 내 삶의 여행길에 있으니, 더없이 홀가분하다.

‘열하일기’의 시절은 말할 나위 없으며, 이는 지극히 고대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직접 저작이 없다.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가 모두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경지가 손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저 그렇다는 얘기다.
그만큼 자기의 작품을 스스로 지어내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공부하려는 자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작품을 스스로 지어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릴없는 무작자(無作者)들의 경우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작품을 지어내는 자들의 노력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시간에, 자잘한 습작이라도 지어내 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공부다운 공부일 것이다.
나아가 무언가를 흉내 내는 앵무새의 수준에라도 이르려고 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수년을 대학원에 재학하고서도 소논문 한 편 지어내지 못 한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그러한 행위를 학문이라고 판단하겠는가.

그리고 7월 15일의 여정에서는, ‘중국’의 산하를 본 ‘조선인’들의 반응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벼슬이 높은 자들은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쉬이 이렇게 말한다.[上士則愀然變色, 易容而言曰.]
“도무지 볼 것이 없더군.[都無可觀.]”
그래서 왜 아무런 볼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何謂都無可觀, 曰.]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장수와 재상과 대신들 모두가 머리를 깎았으며, 선비와 서민들까지도 모두 머리를 깎았다.[皇帝也薙髮, 將相大臣百執事也薙髮, 士庶人也薙髮.]
비록 그 공덕이 ‘은나라’나 ‘주나라’와 같고, 그 부강함이 ‘진나라’나 ‘한나라’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아직껏 머리를 깎은 천자는 없었다.[雖功德侔殷周, 富强邁秦漢, 自生民以來, 未有薙髮之天子也.]
또한 비록 ‘육롱기’나 ‘이광지’의 학문이 있고, ‘위희’나 ‘왕완’이나 ‘왕사진’의 문장이 있고, ‘고염무’나 ‘주이준’의 박식함이 있다고 한들, 한번 머리를 깎으면 곧 ‘되놈’이고, ‘되놈’이면 곧 개나 양 같은 짐승이니, 우리가 그런 짐승들에게서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雖有陸隴其李光地之學問, 魏禧汪琬王士徵之文章, 顧炎武朱彛尊之博識, 一薙髮則胡虜也, 胡虜則犬羊也, 吾於犬羊也何觀焉.]”
그러면서 이것이야말로 곧 으뜸가는 의리라고 주장하므로, 이야기하는 자도 잠잠하고, 듣는 자도 옷깃을 여민다.[此乃第一等義理也, 談者默然, 四座肅穆.]

이는 특히 벼슬이 다소 높은 자들의 반응인데, 그저 ‘청나라인’들의 변발 풍습을 무작정 억지스럽게 비하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논리는 참으로 천박하다. 머리를 깎으면 무조건 ‘되놈[胡虜]’이고, ‘되놈’이면 무작정 짐승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여러 해 전, 최상위의 교육기관에 부속된 어느 연구소에 재직하는 동안, 이와 동일한 용어로써 교묘히 필자의 주장을 비난하는 논문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논문을 기술한 저자는 필자와 일면식은커녕 이름조차도 알지 못 하는 자였으며, 지금 역시도 그 이름 따위는 기억되지 않는다. 때문에 당시 필자로서는 당최 그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당시 여러 이유로 은둔 중이던 필자의 행동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유발했던, 무조건적인 집단적 반감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쯤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그저 자기의 비위를 건드렸으며, 그러니 ‘되놈’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필자 역시, 그러한 짓을 하는 논문의 저자를 그저 한갓 ‘되놈’보다도 못 한 놈이라고만 치부해버렸으며,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 저자의 논문이 학술지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니, 그 저자의 죽음 이후에도 그 기록은 남겨질 것이다.
다만 그 비난의 대상이 왜 ‘되놈’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대학원의 연구소나 학계를 떠나버렸으며, 오래지 않아 필자의 기억에서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므로, 사실대로 밝혀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다. 이에,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이 지니는 부득이한 편면성을 늘 유념해야 한다는 생각도 아울러 되새기게 된다.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번역하면서, 왜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연암’의 시대나 21세기나, 나름대로 학식이나 지위를 지녔다는 자들의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쉬이 부화뇌동하는 작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후문에 의하면, 그 자가 ‘중국’의 어느 명문대학에서 수학하였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그 기억이 더욱 허망하게만 여겨진다. 고작 시류를 좇아 이득이 될 만 한 일이라면, 그것이 한갓 소문에 불과할지라도 핏발을 세우며 무작정 비난하고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사리 공부한 결과인 것일까?
현재에 이르도록 필자의 주장들이 다소 파격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와 유사한 부류들은 여전히 익명의 무리를 지어 온갖 수단으로써 그러한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21세기의 ‘한국인’들이 ‘조선인’들의 후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같은 곳에서 ‘연암’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은 하류의 선비들은, ‘장자(莊子)’처럼 ‘중국’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다고 말하며, 또한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余下士也, 曰壯觀在瓦礫, 曰壯觀在糞壤.]”

어쩌면 이것이, 정작 ‘연암’이 시대 안에서 외치고 싶었던 참소리일 것이다. 물론 ‘연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의한다고 할 수 있는 측면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청나라’에서일망정 배울 것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기와 조각이나 똥 부스러기에 불과하더라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쉬이 주장하기 어려운 지극히 실용주의적이며 실리주의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연암’은,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 ‘장자’의 ‘지북유(知北遊)’편을 인용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인 사유방식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모름지기 ‘한나라’ 독존유술(獨存儒術)의 전통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를 가장 잘 신봉한 국가공동체가 바로 ‘조선’이다. 그럼에도 ‘연암’은 보란 듯이 ‘장자’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악독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또한 사람의 마음처럼 선량한 것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총욕약경(寵辱若驚)’을 말했던 것이다. ‘총욕약경’은 사랑받거나 모욕당하거나 죄다 놀란 듯이 반응하라는 뜻이다.
인간존재는 쉬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상대에 대해서는 호의를 갖으며, 자기를 모욕하는 상대에게는 악의를 갖는다. 이는 비단 인간존재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온갖 만물이 지닌 일종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차원의 보편성일 따름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좋아하고, 자기에게 해악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일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지라도, 그것이 무조건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아가 적어도 인간존재로서 동물의 차원을 극복하였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응당 이득이 되거나 해악이 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로서는, 그렇게 ‘총욕약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행이 배려하는 고독과 여유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필자는 늘, 풍족한 관광이 아닌 긴박한 여행을 다니는 탓에, 그 과정은 실로 쪼들리며 고달프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나선 여행은, 아주 고독하며 또한 아주 묘하게도 한없이 여유롭다.

여하튼, 학문이 귀와 입과 눈과, 나아가 몸과 마음의 동시적인 작용으로서 작동했을 때, 그것은 참된 학문일 수 있다.
예컨대, 동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존재일지라도, 그의 공부가 참되지 못 하다면, 그 결과는 국가나 민족은 물론이며, 인류의 거대한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한 예로서, ‘최제우(崔濟愚: 1824~1864)’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경우를 거론할 수 있다. 거의 동시대를 살아낸 두 사람은, 모두 시대의 거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된 공부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최제우’는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儒彿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을 종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동학은 서학(西學)에 저항하기 위해 태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후대 ‘최시형’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시천(人是天)’이나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그리고 ‘손병희’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런데 ‘요시다 쇼인’은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존왕파(尊王派)로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인 사상가이다. 그는 ‘유수록(幽囚錄)’을 저술하여서 정한론(征韓論)이나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을 주창하였는데, 그것은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주장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홋카이도’의 개척, ‘오키나와’의 일본 영토화, ‘조선’의 식민지화, ‘만주’, ‘타이완’, ‘필리핀’ 등의 점령을 주장하였고, 현재에 이르도록 일본 우익의 교조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동시대에 노도처럼 밀려드는 서양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생존하기 위하여 고뇌했던 두 사상가는, 많은 차이를 지닌 사상적 결과물을 생산한 것이다.
‘최제우’의 사상은 그 토대를 하늘이라는 천지자연에 둠으로써, 민족이나 국가는 물론이며, 나아가 항상 인류 그 자체와 우주까지도 사려(思慮)한다. 그런데 ‘요시다 쇼인’의 철저히 일본이라는 국가에만 몰두하며, 그 국가공동체를 위해 주변의 국가공동체들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 점령하고자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과거에 전쟁에 미쳐 날뛰던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에 의한 인류의 고통은 말할 나위 없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면서, 그들의 자리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었다. 현실세계의 서민대중으로서는, 단지 그 대체세력들이 과거의 전쟁광(戰爭狂)들처럼 미쳐 날뛰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나마 다소 안도할 따름이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우선 ‘미국’과 ‘중국’이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한 민족이면서도 분단되어 있는 ‘북한’의 문제도 있다. 게다가 여전히 과거 전쟁광의 시대를 은밀히 회고하는 ‘일본’도 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라도, 부득이하게 생존해야만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삶이며,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삶이다. 그러한 삶의 지향을 모색할 때, 지난날 시대로부터 앞서 간 사유방식을 지니고서 살아낸 한 여행자의 삶은, 현대의 우리에게 적잖은 지침이 되어준다.
어쨌거나 기껏해야 몇 십 년을 살아내는 인간존재로서, 아주 다양한 삶의 체험을 갖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한 번 몸과 마음에 익숙해져버린 것들을 변화시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더욱이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굳이 그러한 변화를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삶이 머뭇거릴 때, 여행은 새로운 열정을 유발시켜 준다는 사실만큼은 인식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열하일기’를 독서해 보면 익히 알 수 있겠지만, ‘연암’ 역시도 필자와 유사한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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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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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문체계는 과학이다. 그러다보니 어떠한 학문일지라도, 결코 과학적인 사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문학 역시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 고유의 특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다만, 무작정 인문학의 고유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사유방식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어떠한 가치부여에도 초연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가치중립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과학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그것은 대체로 가장 합리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판단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이러한 과학의 특성을 닮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과학과 동일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더라도 가치중립성은 어떠한 학문이든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지향점인 것으로 여겨진다.
삶의 과정 안에서, 인간존재라면 누구라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언행하게 된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대목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이 육체가 지닌 본래성이지만, 그것은 어떤 정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팔이 안으로만 굽은 상태에서 정지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장애이며, 온전한 팔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안으로 굽는 팔은, 이미 바깥으로 펴질 것을 동시적으로 예상하고서 작동하는 것이, 몸의 본래성이다. 나아가 그런 것이 곧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움[無爲自然]’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연스러움 안에서, 한 가지쯤의 일을 평생 동안 줄곧 해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내 새로운 일을 찾아 다양한 삶을 꾸려내는 사람도 있다. 어떠한 삶의 방식이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삶의 모양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라면, 필자는 후자에 속하는 부류다. 어릴 적부터 필자는 늘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는 타입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연배에 비한다면, 아주 다양한 삶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시나브로 여행자의 삶을 살게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여행하는 삶이 익숙해진 이후에는, 이제 굳이 목적지마저도 정하지 않는다. 실로 떠도는 나그네로서의 여행방식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누군가 이끌어주는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철저히 홀로 떠도는 홀가분한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여행자의 본색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차피 인생은 홀로 가는 여행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느 시대든, 상대적으로 소유하지 못 한 자들의 삶은 버겁기 마련이다. 그것은 첨단의 21세기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필자의 생활 역시, 사회적으로 최하층인 계층에 소속되어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가난의 상황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다. 어제도 그러하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그러할 듯하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 내던져진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필자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여행이다.
그러한 삶의 여정 중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체험을 한다. 오늘도 아주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는 늘 적잖은 선택의 순간에 세워진다. 그런데 그 선택은 늘 생존을 지향한다. 그것이 인간존재로서 죽음의 순간까지 지닐 수밖에 없는 본성의 명령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매순간의 선택이라는 근심을 해소해 가는 일, 아마도 그런 것이 인생이리라.

흔히 여행자의 삶을 유목민의 삶에 빗대며,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실로 유목민의 삶은, 그 자체가 여행이며 이동이므로 마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은 철저히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것이며, 여행자처럼 노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목민의 이동’과 ‘여행자의 노닒’이라는 차이를 인식할 필요는 있다. 곧, ‘생존을 위한 이동’과 ‘노닒을 위한 이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차이는 ‘열하일기’ 안에서도 쉬이 드러난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유목민의 경우처럼 생존이나 생계를 위해 이동하는 부류다.
마부나 하인들의 경우는 물론이며, 사신 일행에 벼슬아치로서 참여한 자들 역시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에게 부여된 업무이며, 그러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암’의 경우는 다르다. ‘연암’은 굳이 그 여정에 참여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이 양반사대부로서의 특권을 지닌 자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양반사대부라고 해서 죄다 ‘연암’과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연암’이 지닌 여행자로서의 기질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런 탓에, 필자는 노니는 자로서의 ‘연암’의 미학적인 삶에 대한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미학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다분히 예술가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지닌 자들이다. ‘연암’ 역시 그러하다고 판단된다.

지금 가만히 회상해 보면 필자의 지난 삶은, 그 과정이 자의반타의반이었을망정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학문적 활동을 할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30대 초반에서야 어렵사리 대학원에 진학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대학원에서의 체험이 필자의 여행자로서의 삶을 이끈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석사와 박사과정 동안 늘 연구의 주제가 되었던 ‘장자미학(莊子美學)’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자철학’이 논변하는 ‘소요유(逍遙遊)’야말로 두 말할 나위 없는 여행자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매순간 배회하며 고뇌하는 존재다. 그래서 여행자에게는 유별난 과거도 없고, 별다른 미래도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여행자로서 노닐 따름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를 노닐며 살아 낸다는 것은, 곧 ‘장자’가 논변하는 ‘소요유’와 다름 아니다.

또한 여행자의 노닒으로서의 여행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극히 상식적인 여론을 좇는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예컨대, 예로부터 민의(民意)를 외면하면서 지속될 수 있었던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흔히 권력이라고 하면, 아주 거창한 정치학적 개념쯤을 상상하지만, 굳이 권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에서 각 인간존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자격이나 역량 그 자체가 곧 권력이다. 그러니 필자의 삶 역시, 늘 권력 그 자체의 유지이며 지속이었을 따름이다. 그러한 권력 안에서 살아냄에 있어, 주변의 여론을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자연스런 권력의 지속을 가장 선명하게 천명한 철학자가 바로 ‘노자(老子)’다. ‘노자’의 철학사상을 대변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야말로, 민의를 거슬러 억지로 하지 않으며, 다만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흐름을 좇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물며 ‘노자’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로서, 억지스런 삶을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름지기 민의나 여론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지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될 뿐이다.
때문에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삶의 상황 안에서 아주 민감하게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죄다 깨어 있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이 무언가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주변인들의 여론에 적극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고심이다. 그렇게 고심이 거듭되다가, 필자는 늘 동일한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여행길이다.

필자의 판단으로서는, 주변의 여론을 거스르지 않으며, 타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십 수 년 동안이나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게 여행길을 계획하거나, 여행길에 나설 때면, 여행은 늘 필자로 하여금, 주변인들의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사려토록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늘 죄스런 마음이 앞선다.
물론, 필자가 어떤 특별한 범죄행위를 자행해서가 아니다. 그저 천지자연과 인류의 자연스런 배려를 인식하지 못 하고서, 잠시잠깐 이기적이거나 극단적인 외곬의 마음을 지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인간은, 어쨌거나 홀로이면서도 결코 홀로일 수 없는 탓에, 항상 ‘이중적 동시성’을 사려해야만 하는 존재인 탓이다.
역사 안에서 민의의 여론을 거스르는 경우, 그 결말은 늘 비극적이기 마련이었다. 이를 잘 아는 필자로서, 여하튼 여론을 거스르는 언행을 자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것이 지금껏 노장(老莊)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한 필자로서는, 비록 필자가 한없이 가난하고 더없이 고독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순간까지 어겨서는 안 될 신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한 인식마저도 지니지 못 한다면, 지난 시절의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필자보다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던 ‘연암’의 삶을 회고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고단함을 잠시 잊어볼 따름이다.

필자는 ‘열하일기’를 번역하면서, 아주 재미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암’의 학문 수준이,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중국인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별반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분명히 ‘연암’은 조선인이다. 그리고 한자는 분명히 ‘중국’의 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한자 실력은 물론이며, ‘중국’의 학문에 대한 이해 역시 여느 중국인을 능가하고 있다.
비록 한자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문자로서 사용되고 있다지만, 어쨌거나 중국인들에게는 모국어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외국어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이해가 가능할 텐데, 필자로서는 외국의 문자를 현지인들보다 더 능란하게 사용하는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어쩌면 참으로 지독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조선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 그나마 대접을 받았던 시대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지금의 21세기는, 말할 나위 없이 또 다시 영어라는 외국어가 득세하는 시절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한글이 세계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지 못 하는 한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한자로 된 선조의 텍스트를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작업이 다소 씁쓸함을 갖도록 한다.
다만 필자의 작업은, 한자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한글을 위한 작업임을 밝혀두고 싶다. 필자로 하여금, 동양학을 공부하는 동안 늘 불만 섞인 한숨이 새어나오도록 했던 일은, 기존의 번역서들 대부분이 한글을 위한 번역이 아니라 한자를 위한 번역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작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한자 투인 탓에 당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허다했다. 때문에 그런 것을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따라서 앞으로도, 필자의 번역작업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 아주 결정적인 기회인데도 결국 그 기회를 점수로 만들어 내지 못 하거나, 설상가상으로 병살타를 쳐버리는 선수들이 있다. 그럴 때면, 관중들 대부분은 그 선수를 비난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선수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어쨌거나 정작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득점타를 치고 싶은, 가장 강렬한 열망을 지닌 사람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바로 그 선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비단 프로야구 경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을 살아내는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늘 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면서 자기의 삶을 꾸리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고, 때론 당최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는 탓에, 결국 일정한 성취에 이르지 못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의 노력 자체가 문제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금 여기’에서 생계를 꾸려내고 있는 거의 모든 서민대중들은,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치열할 만큼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세계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저 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천지자연 안에서, 공짜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필자의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코지를 하려는 자들이 적잖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며, 일면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필자의 텍스트들을 검색하고서는 무작정 해코지를 해대니, 당최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그러려니 할 따름이다. 아마도 필자가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기로 결정하고서,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면서부터는, 늘 그러했던 것 같다.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일들이, 결코 제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며,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필자의 언행이 몇몇의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지만,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편이 없으며, 굳이 반응할 까닭도 없다. 필자의 삶이 그런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자들 대부분은, 인터넷 바다의 허망하고 천박한 일군의 누리꾼들처럼, 어떠한 빌미로든 꺼리를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지 않은가.
그런 자들의 면면이 다소 추측되기는 하지만, 그저 그럴 시간에 제 나름의 삶의 공부에 진력하라는 당부쯤을 해볼 수 있을 뿐, 필자로서는 그들의 삶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없으며, 실상 관심을 가질만한 자격 또한 없다.
다만, 당장이라도 그 악연의 끈을 홀가분하게 싹둑 잘라버리고 싶지만, 살아내는 동안이라면 그런 자들과 부득이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존재의 삶에 내재된 본래적인 업(karma)일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업은 인간존재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테지만, 실천적 현실주의자인 필자로서는 그러한 이론을 그다지 수긍하진 않는다.

어느 뇌 과학자는, 아주 고도의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그 순간이 곧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아주 고도로 발달되어서,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어떤 지능적 존재가 탄생된다면, 이내 이 지구별 안에서 인간존재가 설 자리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최초에 지구별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점유하기 시작한 계기라면, 흔히 언어나 도구의 사용을 거론한다. 맞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인류는 의식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노동의 결과로서, 21세기에 이르도록 대단한 인류의 문명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러한 노동을 대체하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주 속편한 누군가는, 그렇게 인공지능존재에게 노동의 영역을 전가시키고서, 인류는 더욱 고상하고 아름다운 작업을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들에 의해 인류의 노동에 대한 대체는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공상과학영화의 흔한 스토리처럼, 그런 인공지능 기계들은 결국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서는, 어쩌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될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실상 이 천지자연은 인류에게 별다른 애정을 갖지 않는다. ‘노자’의 주장처럼, ‘천지자연은 결코 인자하지 않은 존재[天地不仁]’일 따름인 것이다.
인류가 제아무리 어떤 신적인 존재적 이미지를 창조하여서, 억지로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강변하더라도, 그런 것은 결국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주장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실상 지극히 수더분한 상식에 의하더라도, 도대체 하늘이나 땅이 무슨 까닭으로, 아주 특별히 인간만을 사랑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유아적(幼兒的/唯我的) 착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 역시 인간인 까닭에, 이 천지자연이 지구별 안에서 가장 특별한 역량을 지닌 인간존재만을 각별히 사랑해 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바람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그저 인간존재만의 바람일 따름이다. 제아무리 인류가 억지를 부려도, 천지자연은 늘 그러하게 만물을 대할 따름이다. 그래서 천지자연은 굳이 인자한 척 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을 버리는 법도 없다. 그런 것이 천지자연의 실상 그 자체인 것이다.

필자로서는, 굳이 천지자연에게 사랑을 애걸하지 않을 만큼 홀가분해 질 수 있을 때, 인공지능의 고도화에 대한 문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의 지능적인 마음이, 천지자연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제작하는 인공지능 역시 그러한 마음을 닮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류가, 인류의 멸망 이전에 그러한 마음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실현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인류의 마음이 본연의 본래성으로 회귀된 상태를,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천명했다.
‘무위자연’은 말 그대로, 어떠한 억지스러움도 없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현대의 인류가 불안해하는 미래적 재앙은 다소나마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위자연’의 상태에 다가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론으로서, 필자는 여행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여행은, 홀로인 서로들이 동시적 이중성의 시공간 안에서 복합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하는 여행일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으로서는 쉬이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 지구별의 모든 것들이 죄다 파괴되는 미래를 이미 예견하면서도, 망연히 손 놓고 있다거나, 지난 역사 동안 지나치게 일그러져버린 온갖 가치체계들이 무조건 옳다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필자로서는, 인류의 미래가 그다지 희망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군의 페미니스트나 니힐리스트들의 주장처럼, 그저 암담하기만 한 것으로 판단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늘 어떤 사이[間]에나 머무는 존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일신수필’의 ‘장대기’에서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대개 ‘장대’에 오를 때에는, 그저 앞만 보고서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가므로, 그 위험함을 알지 못 하다가,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게 되니, 그 허물은 죄다 눈에 있는 것이다.[蓋上臺時, 拾級而登, 故不知其危, 欲還下則一擧目而臨不測, 所以生眩, 其崇在目也.]
벼슬살이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에는, 한 계단의 절반이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두려운 나머지, 간혹 남을 밀어젖히면서까지 앞서려고 다툰다.[仕宦者, 亦若是也, 方其推遷也, 一階半級, 恐後於人, 或擠排爭先.]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及致身崇高, 懾心孤危.]
하지만 이미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進無一步, 退有千仞, 望絶攀援, 欲下不能.]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서 모두 그러하다.[千古皆然.]”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서, 높이 오른 자들은 불안한 법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떠한 짓을 자행했으며, 자기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 역시,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짓이라도 자행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을 강점하고서 수십 년간 높은 지위에 군림하던 ‘일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선인’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항세력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이나 심지어 ‘일제’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던 친일파에 대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응당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판단을 해볼 수 있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항상 불안했을 것이므로, 설령 그가 친일파일지라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잘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 뻗고 자기 위해, 맞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굳이 때릴 일도 아닐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로 인해 극단적인 폭력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남을 때리는 일이 어찌 맘 편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되풀이되곤 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은 늘 선진국이며 강대국의 지위에 있었고, ‘한국’이나 ‘일본’은 후진국이며 약소국의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항상 ‘한국’보다도 뒤처지는 입장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게 있어, ‘중국’은 천자의 나라라고 하여 받들어 섬기는 사대(事大)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왜구(倭寇)쯤으로 불리며 오랑캐 중에서도 오랑캐인 족속으로 비하되었다.
그러던 상황이 근대에 이르며 서구 제국주의와 얽히면서 반전되었고, 그래서 ‘한국’은 물론이며 ‘중국’도 침략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양차대전이 끝난 후, 패망했던 ‘일본’은 이내 경제대국이 되었고, ‘남한’ 역시 경제부국이 되었다. 이제는 ‘중국’도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하는 시절이다.

여하튼, 전통적으로 ‘중국’은 늘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게 크게 한 방 맞고 말았다. 크게 한 방을 휘두른 후, ‘일본’은 이제 어떻게든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맞는 놈’의 지위에만 있으며, 어쨌거나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따름이다.
이러한 국가 간의 역학관계는 개인들의 관계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때리는 놈’과 ‘맞는 놈’이라는 두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노니는 놈’도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말할 나위 없이 대표적인 ‘노니는 놈’이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출생 이후 줄곧 ‘때리는 놈’과 ‘맞는 놈’밖에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식으로 훈육 받는다. 그런데 오롯한 필자의 체험에 따른다면, ‘노니는 놈’으로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으며, 그 삶이 다른 놈들에 비해서 더욱 충만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도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세 부류 이외에도, 어떤 놈이든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놈으로서 주변인들에게 해코지 않으며 살아내고 있다면, 또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연암’의 여정을 좇아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며칠 동안 소나기가 마음을 심란케 하더니, 오늘은 모처럼 맑게 개었다. 말 그대로 가을 초입의 하늘이다. 파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여행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꼼짝없이 매인 몸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여비도 마련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필자의 여행길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한들, 대부분 타국 땅에서의 여행인 탓에, 그 최소한의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는 모양이다. 지금으로서는 ‘열하일기’의 번역을 마치고서, 조속한 시일 내에 직접 그 루트를 답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21세기 방식으로 새로이 기록될 것이다. 그야말로 ‘21세기 열하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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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1

도서정보 : 신채호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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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제1편. 총론

제1장. 역사의 ‘올바른 도리[正義]’와 ‘조선사’의 범위 13
1. 역사란 무엇인가
2. ‘아(我)’와 ‘비아(非我)’
3. 시간적 상속성과 공간적 보편성
4. ‘김석문’과 ‘부르노’ 혹은 ‘정여립’과 ‘루소’
5. 정신의 확립과 환경에의 순응
6. ‘조선상고사’를 기술하며 중점을 둔 사항들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옛 역사[舊史]’의 결점 19
1. ‘조선’에는 마땅한 역사서가 없다
2. ‘조선’의 역사는, 오히려 ‘조선’의 역사가에 의해 훼손된다
3. ‘신라’는 ‘신라’일 따름이다
4. 이데올로기를 좇아 역사를 악용하는 역사가들
5. ‘유가’ 이데올로기 탓에 ‘조선사’는 왜곡되었다
6. 아쉬운 대로 전하는 자료를 참고하여 ‘조선상고사’를 기술한다

제3장. ‘옛 역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에 대한 ‘간략한 평가[略 評]’ 25
1. ‘신지(神誌)’와 ‘단군(檀君)’
2. 유학(儒學) 이외의 것을 이단시하여 불태워버린 ‘태종’
3. ‘북부여(北扶餘)’와 ‘삼한(三韓)’의 역사서는 유실되었다
4. ‘신라’와 ‘백제’와 ‘고려’
5. ‘유교도(儒敎徒)’ ‘김부식’의 사대주의에 의해 기술된 ‘삼국사 기’는 역사적 가치가 거의 없다
6. ‘고려’와 ‘조선’의 역사서에 대한 비판
7. ‘한백겸’의 ‘동국지리설’이 최초로 ‘조선사학계’의 실마리를 열 었다
8.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유득공’의 ‘발해고’와 ‘이종휘’의 ‘수산 집’에 관하여
9.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관하여
10. ‘이씨조선’의 역사관에 대한 4가지 비판
11. 우리 역사학에 관한 비판적 사례
12. 역사서를 사사로이 짓지 못 하도록 하였다
13. 이전 왕조의 역사를 파괴해버렸다
14. 한문으로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어려움
15. 이전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승되지 못 하였다
16. ‘조선사학계’의 올바른 표준을 세워야 한다

제4장. 사료(史料)의 수집과 선택 39
1. ‘독사신론’과 ‘대동사천년사’를 중단하다
2.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한 일에 관하여
3. 인재와 경제력의 중요성
4. 한 번의 답사가 만 번의 독서보다 낫다
5. ‘고려’의 ‘승군(僧軍)’에 관하여
6. 사실(史實)을 규명하는 어려움
7. ‘중국인’의 역사 왜곡 습성에 대한 비판
8. ‘당태종’이 실명한 사건을 규명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9.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내재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10. ‘이두문(吏讀文)’을 사용했던 탓에 초래되는 혼란
11. 자잘한 고증으로써 ‘압록강’의 위치를 규명하다
12. 자잘한 고증이 역사상 큰 발견의 단초이기도 하다
13. 위서(僞書)가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
14. ‘단군’과 ‘요임금’의 연대를 비교하는 것은 오류다
15. ‘공안국’이 기술한 ‘상서전’은 위서다
16. 사람에 의한 가짜 역사와 진짜 역사
17. 상황에 의한 가짜 역사와 진짜 역사
18. 논리에 의한 가짜 역사와 진짜 역사
19. 후세 사람에 의한 역사 왜곡
20. ‘김부식’의 모화주의에 대한 비판
21. 역사적 억측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22.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의 역사학 연구에 대한 한탄

제5장. 역사의 개조(改造)에 대한 우견(愚見) 59
1. 현재의 역사학은 한국식을 서양식으로 겉표지만 바꾼 것에 불 과하다
2. 역사적 계통을 정립해야 한다
3. ‘단군’은 ‘신라’ ‘국선’의 근원이다
4. 역사적 회통을 추구해야 한다
5. ‘고려사’ ‘묘청전’을 예로 들다
6. 타인은 물론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7. 역사가는 시대의 본색을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8. ‘유교’의 춘추필법은 시대의 본색을 담아내지 못 한다
9. 역사를 왜곡한 ‘이성계’
10. 역사를 왜곡한 ‘왕건’
11.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12. 사회에 의해 개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13. 역사는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다
14. 민족과 개인은 모두 ‘지속성’과 ‘변화성’이 조화되어야 한다
15. 안정된 시국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어렵다
16. 불안한 시국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쉽다
17. 안정된 시국의 인물과 불안한 시국의 인물

제2편. ‘수두’ 시대

제1장. 고대 총론 79
1. ‘조선’ 민족의 구별
2. ‘조선족’이 동방으로 오다
3. ‘조선족’이 터를 잡은 ‘아리라’
4. 고대 ‘조선족’의 발원지는 ‘하얼빈’ 부근이다

제2장. ‘단군왕검’의 건국 83
1. ‘수두’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다
2. ‘수두’에서 점치는 방식은 ‘주역(周易)’의 기원이 되었다
3. ‘단군’은 ‘수두’의 숭배 대상이다
4. ‘단군왕검’의 출생에 관하여
5. ‘단군’의 역사는 후대의 유교나 불교에 의해 왜곡되었다
6. ‘삼신’이나 ‘오제’는 ‘왕검’이 만들어 낸 전설이다
7. ‘대(大)단군왕검’은 ‘3경(京)’과 ‘5부(部)’와 ‘5군(軍)’으로써 국가를 통치했다
8. ‘5군’의 존재는 현재의 ‘윷놀이’에서도 볼 수 있다

제3장. ‘수두’의 ‘너른 포교[弘布]’와 문화의 발달 89
1.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 ‘우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왔다
2. 역사적 사실을 신성시하여 신화화하였다

제4장.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도망 오다 91
1. ‘조선’의 ‘신서’는 ‘상서’ ‘홍범’의 연원이다
2. ‘신서’의 본문과 ‘기자’의 부연 설명
3. ‘홍범’의 연원에 관한 논거(論據)

제5장. ‘흉노’의 ‘휴도(休屠)’ 95
1. ‘동이족’의 ‘수두교’가 ‘중국’과 ‘흉노’에 전파되었다
2. 고대에는 종교의 전파가 곧 영토의 확장이었다

제6장. ‘한자(漢字)’의 수입과 ‘이두문’의 창작 97
1. ‘동이족’이 최초에 사용한 문자는 ‘한자’다
2. ‘이두문’은 지금부터 최소 3,000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3. ‘이두문’은 후세의 ‘거란문’이나 ‘여진문’에 영향을 주었다
4. ‘이두문’의 미비함에 대한 비판
5. 한 나라 안에서도 정치적 이유로 ‘이두문’은 서로 소통되지 않 았다

제7장. ‘신지(神誌)’의 역사 101
1. ‘신지’는 벼슬 이름이다
2. ‘고려’의 ‘삼경’과 ‘조선’의 ‘삼경’은 다르다
3. 겨우 전해지던 ‘신지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제8장. ‘조선’의 전성시대 103
1. ‘고죽국’은 ‘동이족’의 나라다
2. ‘중국’의 ‘강회’ 지역에는 고대 ‘조선인’이 세운 소왕국들이 많 았다
3. ‘불리지국’에 관하여

제9장. ‘조선’의 쇠약 105
1. ‘조선’ 연합군이 ‘제’나라에게 패하다
2. 전쟁의 패배로 인해 ‘조선’이 쇠약해지다

제10장. ‘단군’ 연대의 고증 107
1. ‘기자조선’은 삭제되어야 한다
2. ‘단군’ 시대의 서울은 세 곳이었다
3. ‘단군’의 나이가 1,000세를 넘는다는 것은 허황된 말이다
4. ‘단군’ 원년은 ‘고구려’ 건국보다 2천 년 이전이다

구매가격 : 3,000 원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2

도서정보 : 신채호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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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제3편. ‘3조선’ 분립시대

제1장. ‘3조선’ 총론 15
1. ‘3조선’은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다
2. ‘한자’와 ‘이두문’에 의한 혼동으로써 ‘3조선’은 잘못 알려졌다

제2장. ‘3조선’의 위치와 범위 17
1. ‘한(韓)’은 왕이란 뜻이다
2.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국경은 없는 법이다

제3장. 기록상 ‘3조선’을 구별할 조건 19
1. ‘3조선’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2. ‘중국’의 ‘역사서’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3. 각종 사료를 종합하여 ‘3조선’의 역사를 구성하다

제4장. ‘3조선’ 분립의 시초 23
1. 기원전 4세기경에 ‘3조선’이 분립했다
2. ‘3조선’의 후손들
3. ‘3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제5장. ‘3조선’ 분립 후의 ‘신조선’ 27
1. ‘신조선’의 왕 ‘모갑’이 ‘불리지’의 옛 땅을 회복하다
2.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다
3. ‘진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4. ‘연’나라의 장성과 ‘진’나라의 장성
5. ‘장량’이 ‘조선’에 구원을 청하다
6. ‘조선’과 ‘진시황’과 ‘만리장성’
7. ‘조선’과 ‘흉노’
8. ‘흉노’가 ‘조선’을 침략하다

제6장. ‘3조선’ 분립 후의 ‘불조선’ 33
1. ‘불조선’과 ‘신조선’이 잃어버린 영토
2. ‘진’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헌우란)’다
3. ‘대단군’의 ‘왕검성’은 세 곳이었다

제7장. ‘3조선’ 분립 뒤의 ‘말조선’ 37
1. ‘말조선’의 국호를 ‘말한’으로 고치다
2. ‘마한’은 ‘백제’가 아니다
3. ‘신라’의 ‘마립간’은 ‘말한’을 왕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4. ‘북삼한’과 ‘남삼한’을 분별되어야 한다
5. ‘낙랑 25국’은 ‘낙랑군 25현’이 아니다
6. ‘삼한’의 여러 나라들

제8장. ‘3조선’ 붕괴의 원인과 결과 45
1. ‘3조선’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까닭
2. ‘3조선’의 파탄 이후 ‘쟁웅(爭雄)’ 시대가 되다


제4편. 열국(列國)의 쟁웅(爭雄) 시대

제1장. 열국의 연대 49
1. ‘고구려’의 연대
2. ‘신라’가 ‘고구려’의 연대를 축소했다
3. 연대뿐만 아니라 국경도 축소했다
4. 연대만이 아니라 국경도 축소했다
5. ‘부여’의 국경
6. ‘한’나라 ‘4군’의 국경
7. ‘낙랑국’의 국경

제2장. 열국의 분립 55
1.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우다
2.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다
3. ‘옥저’는 ‘동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4. ‘북부여’의 역사
5. ‘해모수’의 아들 ‘추모(주몽)’가 ‘고구려’를 건국하다
6. ‘추모’가 태어난 사연
7. ‘주몽’이 아니라 ‘추모’라고 읽어야 한다
8. ‘추모’가 ‘졸본부여’로 가서 ‘소서노’와 결혼하고 ‘고구려’를 세 우다
9. ‘동부여’를 두려워 한 ‘추모왕’의 아들 ‘유류왕’
10. ‘동부여’의 침략을 물리친 왕자 ‘주류’
11. ‘동부여’를 무력으로 평정한 ‘대주류왕(주류)’
12. ‘대주류왕’이 ‘낙랑국’을 멸망시키다
13.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하다
14. ‘소서노’가 죽은 후 ‘백제’가 ‘동’과 ‘서’로 나뉘다
15. ‘비류’가 죽자 두 ‘백제’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16. ‘백제’의 ‘온조’가 ‘마한’을 점령하다

제3장. ‘한무제(漢武帝)’의 침략 75
1. 야심만만한 ‘한무제’
2. ‘한무제’가 침략한 ‘조선’은 둘이다
3. ‘한무제’가 침략한 ‘조선’은 ‘동부여’다
4. ‘동부여’는 ‘강릉’이 아니다
5. 9년의 혈전 이후 ‘한무제’가 패배하다
6. ‘한무제’의 패배를 ‘사기’에 기록하지 않은 ‘사마천’
7. ‘한무제’가 뇌물로써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한4군’을 설치하 다
8. ‘한무제’가 재물로써 매수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9. ‘한4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찾아야 한다
10. 지명의 같고 다름을 구별하지 못 하는 탓에, ‘한4군’의 위치 에 대해 온갖 주장이 분분하다
11. 역사적 기록의 진위를 분별하지 못 하는 탓에, ‘한4군’의 위 치에 대해 온갖 주장이 분분하다

제4장.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두 새 나라 91
1. ‘계립령’ 이남은 지금의 ‘경상남북도’의 총칭이다
2. ‘김수로’의 6형제가 여섯 ‘가라’를 건국하다
3. ‘신라’가 건국되다
4. ‘박혁거세’와 ‘석탈해’와 ‘김알지’
5. 마땅한 ‘고대사’의 원본이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6. ‘고구려사’나 ‘백제사’처럼 ‘신라사’도 완벽하지 못 하다
7. ‘사량부’의 ‘박혁거세’가 여섯 곳의 자치부를 통일하여 ‘신라’를 건국했다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제1장. 1세기 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103
1. 1세기 이후 ‘고구려’와 ‘북부여’ 이외의 열국들은 쇠미해졌다
2. ‘중국’의 ‘정전제’는 ‘고구려’의 ‘균전제’를 모방한 것이다
3. ‘균전제’와 ‘정전제’의 차이
4.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다
5. ‘왕망’에게 ‘흉노’가 대항하다
6. ‘고구려현’과 ‘왕망’의 패망
7. 사대주의자 ‘김부식’에 대하여
8. ‘왕망’이 패망한 까닭
9. ‘고구려’와 ‘한’나라 사이에 위치한 ‘선비족’
10. ‘선비족’의 상황

제2장. ‘태조왕(太祖王)’과 ‘차대왕(次大王)’의 ‘문화적 정치[文治]’ 115
1. ‘태조왕’의 계보
2. ‘차대왕’의 계보
3. ‘고구려’의 ‘선인’ 제도
4. ‘고구려’의 관료제도
5. ‘중국’의 ‘고대서’에는 ‘고구려’의 관직에 대하여 잘못 번역한 것들이 있다

제3장. ‘태조왕’과 ‘차대왕’이 ‘한족’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다 123
1. ‘한’나라가 부강하여 주변국들을 침략하다
2.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패하다
3. ‘고구려’가 ‘요동’ 땅을 회복하고서 ‘환도성’을 쌓다

제4장. ‘차대왕’이 왕위를 차지하다 127
1. 서자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 해 불만을 갖다
2. ‘태조왕’이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3.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에 대한 비판

제5장. ‘차대왕’이 피살되고 ‘명림답부’가 전권을 휘두르다 133
1. ‘차대왕’이 ‘선인’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하다
2. ‘차대왕’이 피살된 까닭
3. ‘명림답부’와 ‘차대왕’에 관한 사실(史實)을 각 역사서들이 다 르게 기술하고 있다

제6장. ‘고국천왕’과 ‘을파소’ 141
1.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다
2. ‘을파소’가 어진 정치를 하다
3. ‘고국천왕’에 관한 ‘삼국사기’의 두 가지 오류


제6편. ‘고구려’의 쇠퇴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가 ‘중국’에게 패배하다 147
1. ‘고국천왕’이 죽고 둘째 아우 ‘연우’가 즉위하다
2. ‘한’나라의 ‘공손도’에게 ‘요동’을 빼앗기다
3. ‘고구려’와 ‘중국’의 ‘위촉오’ ‘3국’ 시대
4. ‘삼국사기’가 ‘중국’의 역사서를 베끼면서 내용을 변조하는 까 닭
5.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다
6. ‘중국’의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역사 서술 방식
7. ‘고구려’ ‘동천왕’의 ‘평양 천도’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157
1. ‘가비능’이 암살된 후 ‘선비’가 쇠약해지다
2. ‘선비’의 ‘모용외’가 ‘창려’에서 웅거하다
3. ‘북부여’의 전성시대를 이끈 ‘위구태왕’
4. ‘선비’의 ‘모용외’가 침략하자 ‘북부여’의 ‘의려왕’이 자결했다
5. ‘예’의 반란을 진압한 ‘안국군’이 사형당하다
6. ‘모용외’의 침략을 ‘고노자’가 막아내다
7. 교만한 ‘봉상왕’을 ‘신가’ ‘창조리’ 등이 탄핵하다
8. ‘봉상왕’이 탄핵되고 ‘미천왕’ ‘을불’이 왕위에 오르다
9. ‘미천왕’에 관한 역사
10.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잇다
11. ‘선비’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하다
12. ‘고구려’가 가장 쇠퇴해진 시기를 맞다


제7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1장. ‘고구려’와 ‘백제’의 유래 173
1. ‘고구려’의 ‘고추모’와 ‘백제’의 ‘소서노’
2. ‘고구려’가 쇠퇴하자 각 나라들이 독립을 시도했다
3. ‘백제’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다
4. ‘고구려’의 남진(南進) 정책에 따라 ‘백제’와 충돌하게 되다

제2장. ‘백제’의 융성과 ‘고구려’의 쇠퇴 177
1.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침략하자 ‘백제’의 ‘근구수왕’이 나아가 싸웠다
2. ‘백제’의 ‘근구수왕’이 승리하여 ‘대동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다
3. ‘백제’에게 패배하여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환도(還都)하다
4.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다
5. ‘백제’가 ‘중국’ 대륙 동부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다
6. ‘중국’ 역사가들이 ‘백제’ ‘근구수왕’의 ‘중국’ 점령 사실을 대부 분 삭제해버렸다
7. ‘일본사’는 거의 ‘근구수왕’의 ‘백제사’를 흉내 낸 것이다

제3장. ‘광개토대왕’의 북진정책과 ‘선비’ 정복 185
1. ‘근구수왕’ 이후 ‘백제’가 점차 쇠약해졌다
2.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옛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다
3. ‘삼국사기’의 연대가 불명확하므로 잘 분별하여야 한다
4. ‘광개토대왕’이 ‘중국’의 ‘감숙성’ 서부까지 원정하다
5. ‘백제’의 속국이던 ‘왜’가 ‘백제’를 침범하다
6. ‘고구려’와 ‘신라’가 한편이 되고, ‘백제’와 ‘왜’가 한편이 되다
7. ‘광개토왕’은 늘 북쪽의 영토 확장을 목적하였다
8. ‘진서’ 이외에 ‘광개토대왕’에 관한 기록이 없는 까닭
9. ‘광개토대왕’ 비문에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없는 까닭

제4장. ‘장수태왕’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193
1. ‘장수태왕’의 ‘북수남진주의’
2. ‘장수왕’이 여러 나라를 이용하여 ‘위’나라를 견제하다
3. ‘장수왕’은 전략가가 아니라 음모가였다
4.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점령하다


제8편. 남방 여러 나라와 ‘고구려’의 공수동맹

제1장. 네 나라의 연합군과 ‘고구려’의 퇴각 201
1. ‘백제’와 ‘신라’의 관계
2.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다
3. ‘신라’, ‘백제’, ‘임나’, ‘아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에 항거하다
4. 남방 네 나라의 동맹이 40년 동안 지속되다

제2장. ‘백제’의 ‘위’나라 격퇴와 해외 식민지 획득 207
1. ‘백제’의 ‘동성대왕’이 즉위하다
2. ‘위’나라가 ‘백제’를 침략하다
3. ‘백제’ ‘동성왕’이 해외 식민지의 터를 닦다
4. ‘동성왕’ 때의 해외 식민지를 ‘성왕’ 때에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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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3

도서정보 : 신채호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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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1장. ‘신라’의 발흥
1. ‘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동력이다
2. ‘화랑’에 관한 ‘삼국사기’ 본문
3.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화랑’에 관한 대부분을 삭제해버렸 다
4. ‘화랑’에 관한 ‘삼국유사’ 본문
5. ‘신라’의 ‘화랑’은 ‘고구려’의 ‘선배’를 모방한 것이다
6. ‘화랑’은 ‘신선’을 숭상하는 ‘선도’가 아니다
7. ‘화랑도’는 곧 ‘풍류도’로서 음악과 시에 전념했다
8. ‘신가라’의 멸망
9. ‘안라가라’의 멸망
10. ‘밈라가라’의 멸망
11. ‘구지’, ‘별뫼’, ‘고링’, 세 ‘가라’의 멸망

제2장. 두 령(嶺) 이북 10 고을의 쟁투
1. ‘무령왕’의 ‘백제’ 황금시대
2. ‘고구려’ ‘안장왕’과 ‘개백현’의 미녀 ‘한주’
3. ‘신라’의 정략가 ‘김이사부’
4. ‘신라’의 정략가 ‘김거칠부’
5. ‘고구려’ ‘양원왕’이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기다
6. ‘장안성’은 지금 ‘요녕성’의 ‘봉황성’이다
7.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미워했다
8. ‘철령’과 ‘죽령’ 이북의 10 고을
9. ‘진흥왕’ 때 ‘신라’ 영토가 가장 넓어지다
10. ‘진흥왕’과 ‘우륵’
11. ‘고구려’ ‘평원왕’과 바보 ‘온달’
12. ‘주’나라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다
13. ‘온달전’의 의미

제3장. 동서(同壻) 간의 전쟁
1.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
2. ‘서동’과 ‘선화’가 결혼할 수 없는 까닭
3. ‘백제’ ‘위덕왕’과 ‘신라’ ‘진평왕’이 결혼을 허락하다
4. 두 사람의 결혼 뒤에, 두 나라는 매우 친밀했다
5. ‘백제’의 ‘무왕’ ‘서동’이 ‘신라’를 침략한 까닭
6.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문명’의 남편 ‘김용춘’
7. ‘동서전쟁’ 당시 인민들의 상황
8. 두 개인의 이기주의에 의해 발생한 ‘동서전쟁’


제10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제1장. ‘임유관(臨渝關)’ 싸움
1. ‘동아시아’의 양 대 세력 ‘조선’과 ‘지나(중국)’
2.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원인
3. ‘수’나라에 응원을 청한 ‘백제’와 ‘신라’의 한심스러움
4. ‘수’나라 ‘문제’가 보낸 선전포고문
5. 전쟁이 시작되다
6.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하다

제2장. ‘살수’ 싸움
1. ‘수’나라 ‘양제’가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하다
2.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다
3.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로 침략해 들어가다
4. ‘고구려’의 ‘을지문덕’
5. ‘건무’의 전공이 ‘을지문덕’보다 크다
6.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서 크게 패하다
7. ‘살수대첩’은 세 번의 전쟁을 통칭한다

제3장. ‘오열홀(烏列忽)’, ‘회원진(懷遠縝)’ 싸움과 ‘수’의 멸망
1. ‘양제’가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다
2. ‘을지문덕’이 ‘중국’을 점령하자고 주장하다


제11편.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유람과 혁명
1. ‘연개소문’이 ‘중국’ 정벌을 계획하다
2. ‘갓쉰동’의 이야기
3. ‘연개소문’과 ‘당태종’
4.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
5. ‘연개소문’의 ‘북진남수’와 ‘건무’의 ‘북수남진’
6. ‘연개소문’이 ‘당’나라 정벌을 주장하다
7. ‘연개소문’이 ‘살이’의 직위에 오르다
8. ‘삼불제국’의 밀정이 ‘고구려’를 염탐하다
9. ‘연개소문’을 체포하기로 하다
10.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11.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옹립하고서 전권을 장악하다
12.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나 연합할 만한 주변국 이 없었다

제2장. ‘요수(遼水)’ 싸움
1. ‘중국’의 역사서는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삭제하는 ‘춘추필법’ 에 의하여 기술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제3장. ‘안시성’ 싸움
1. ‘수서’와 ‘당서’의 진위에 관하여
2. 거짓으로 판단되는 기록들
3. ‘중국’의 춘추필법적 기록과 ‘조선’의 노예근성적 편집
4. ‘당태종’의 전략
5. ‘연개소문’의 전략
6. ‘당태종’이 출정하다
7.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다
8.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
9. ‘당태종’이 도망가다
10. ‘당’나라 역사서의 사리에 맞지 않는 기록들
11. 기록이 모순되는 까닭
12. ‘사대주의’와 ‘춘추필법’
13. ‘당태종’에 관한 ‘중국’ 역사책의 기록은 허위뿐이다
14. ‘연개소문’이 외국 정벌에 성공한 근거
15. ‘연개소문’에 관한 ‘삼국유사’ 본문
16.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했다 는 것은 거짓이다
17. ‘연개소문’에 관한 ‘고려고기’의 기록도 거짓이다
18. ‘연개소문’에 관한 ‘노상운’의 증언
19. ‘연개소문’이 죽은 해
20. ‘연개소문’의 맏아들 ‘천남생’의 족보를 기록한 ‘묘지(墓誌)’
21. ‘연개소문’에 관한 거짓 기록이 작성된 까닭
22. ‘연개소문’은 혁명가였다
23. 후대의 용렬한 사대주의 역사가들


제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1장. ‘백제’의 ‘부여성충’과 ‘척야’
1. ‘백제’의 왕족 ‘부여성충’
2. ‘의자왕’이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하다
3. ‘신라’의 ‘김유신’이 ‘가잠성’을 공격하자,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주’를 공격했다
4. ‘의자왕’이 ‘성충’을 동맹을 위한 사신으로 ‘고구려’에 보내다
5. ‘신라’의 ‘김춘추’가 끼어들었지만, ‘성충’이 ‘연개소문’과 동맹 을 맺다
6. ‘성충’이 ‘임자’의 참소로 ‘의자왕’으로부터 박대당하다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1. ‘백제’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김춘추’
2.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알려준 ‘거북과 토끼 이야기’
3. ‘김춘추’가 ‘당’나라와 동맹한 까닭
4. ‘김유신’의 출생에 관하여
5.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6. 과장된 ‘삼국사기 김유신전’의 기록
7. ‘김유신’에 대한 평가
8. ‘조미곤’과 ‘임자’의 정치공작

제3장. ‘부여성충’의 자살
1. ‘금화’와 ‘임자’의 참소
2. ‘성충’에 대한 ‘임자’의 평가
3. ‘윤충’의 자살
4. ‘성충’의 자살
5. ‘탄현’과 ‘백강’에 관하여

제4장. ‘신라’와 ‘당’ 두 나라 군사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
1.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입
2. ‘김인문’과 ‘소정방’과 ‘김유신’
3. ‘부여흥수’에게 계책을 묻는 ‘의자왕’
4. ‘흥수’의 계책을 부정하는 ‘임자’
5. ‘부여계백’이 ‘신라’ 군사에 대적하다
6. ‘반굴’과 ‘관창’의 전사
7. ‘의직’의 전사
8. ‘조룡대’와 ‘백마강’
9. ‘김유신’과 ‘소정방’의 주도권 경쟁
10. 왕자 ‘융’의 항복과 ‘낙화암’
11. 포로가 된 ‘의자왕’과 왕자 ‘융’
12. ‘백제’ 정벌 후 ‘신라’까지 정벌하려고 하는 ‘소정방’
13. 유교의 명분주의에 대한 비판

제5장. ‘백제’ 의병의 봉기
1. ‘의자왕’이 붙잡힌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2. 의병이 흥기한 지역
3. 각 지역 의병의 활동 상황
4. ‘백제’ 의병 ‘자진’과 ‘복신’
5. ‘부여복신’의 연전연승

제6장. ‘고구려’의 ‘당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흥기
1.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국내정치
2.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와 ‘당’의 관계
3. ‘백제’의 멸망에 따른 ‘고구려’의 멸망
4. ‘평양’의 ‘당나라군’과 ‘웅진’의 ‘신라군’의 패전
5. ‘백제’ ‘태산성’과 ‘우술성’의 함락
6. ‘백제’의 다물운동

제7장. ‘부여복신’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1. 회군하려는 ‘당’나라 군대
2. 배신자 ‘자진’을 처형함
3. ‘복신’을 숙청하기로 모의함
4. ‘복신’ 숙청사건에 관한 역사적 기술
5. ‘복신’의 죽음 이후 ‘풍왕’도 멸망함
6.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배신
7. ‘풍왕’의 ‘서백제’와 왕자 ‘융’의 ‘남백제’로 나뉘다
8. ‘서백제’마저 멸망하다








구매가격 : 3,000 원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도서정보 : 빅터 프랭클 | 2018-06-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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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인간의 영혼을 향하는 심리치료가 필요한 시대
변화와 경쟁 속에서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잊을 때가 많다.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물질만능 풍조가 만연하고 점차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소외감을 느끼고 저마다의 고민과 불안을 안고 산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울해하기도 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던 주중의 템포가 무너지는 일요일이 되면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기도 한다.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내면의 공허함과 황량함에서 벗어나고자 술이나 도박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일중독에 빠지기도 하며, 심할 경우엔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트라우마, 콤플렉스, 염려증, 강박증, 우울증, 히스테리 등등 신경증적 불안의 배후에는 실존적 불안이 있다. 이들은 의미 상실과 의욕 상실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심리치료는 이런 의미 상실감을 무의식적인 정신역학의 단순한 표현이나, 신경증의 단순한 증상으로 치부했다. 그처럼 질병 뒤에 있는 인격을 보지 않고, 정신을 기계처럼 다룬다면 인간은 사물화되거나 조작 대상이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적 고통 뒤에 있는 진정한 병인인 영적인 몸부림을 돌보고 치유해야 한다. 바야흐로 심리치료가 신체적, 정신적 차원에서 인간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기존의 심리치료가 간과하고 있는 이러한 부분을 보완하는 대안으로 로고테라피(의미 치료)와 실존분석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는 우선 기존의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후에 그 보완책인 로고테라피와 실존분석의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실제 치료에 적용한 사례를 제시하여 그 효용성과 필요성을 입증한다. 이 책은 8개 언어로 번역되어 총 43판 이상 출간된 스테디셀러이며,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_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인간 존재
유대인이었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생사가 엇갈리는 비참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어떤 이는 좌절한 채 일찌감치 스스로를 포기해 버렸지만, 어떤 이는 그 안에서도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을 보고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을 빼앗아도 인간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할지 결정할 자유만큼은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 결정할 마지막 자유가 남았던 것이다.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살아야 하는 이유, 존재의 의미, 고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힘겨운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전 세계인에게 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그 중요성을 일관되게 전파해 왔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질병이나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의미’라는 영적 지지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내적, 외적 제약은 결코 삶을 무의미하게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질병과 고통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보일지, 어떻게 대처할지에 달려 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책임성을 의식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과제로 나아가고 자신의 유일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바로 이런 점에서 의미는 존재의 인도자라고 말하며,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은 의미 발견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전한다.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나, 처한 현실 앞에 좌절했거나, 희망을 잃은 사람, 힘차게 살아갈 용기와 의욕을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 탐독하기를 권한다.

구매가격 : 8,000 원

심리학 언어

도서정보 : 장윤철 | 2018-06-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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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인간관계의 유쾌한 인문학 수업
생활 속에서 더욱 빛나는 심리학의 지혜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할 마음의 메커니즘


모든 인간관계의 심리학 언어들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심리현상들을 연구 분석하여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였다. 또한 심리적 문제점으로 돌출된 것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해결책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사랑, 동지, 범죄, 경제행위, 인간관계, 이상심리, 몸과 마음의 관계 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심리학이 다루는 범위이자 이 책이 다루는 범위이며, 저자는 심리학 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생활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심리학 언어들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였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현상들을 연구, 분석하여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였다. 또한 그러한 심리적 문제점으로 돌출된 것들의 적절한 해결책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대중심리를 읽어라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이유는 사람에겐 사고와 이성, 심리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현상은 복잡하면서 다양하고 또 심오하다.
심리현상은 우리 모두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우리도 이것에 익숙하지만 어떤 이유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확실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심리현상을 연구, 인간의 심리 활동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여러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개개인이 자신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심리학의 응용범위는 매우 넓다. 사랑, 동기, 범죄, 경제행위, 인간관계, 이상심리, 몸과 마음의 관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연구 결과를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다. 이처럼 심리학은 여러 학문과 연관되고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중요한 학문이다.

구매가격 : 9,000 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 그립다

도서정보 : 이현주, 노주선 | 2018-06-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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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는 법
우리의 관계는 지치고 힘들며, 심지어는 미치도록 괴롭기까지 하다. 어른이 되어 관계의 폭이 넓어지면 이전에는 만나지 못했던 특성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이전에 관계를 맺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어떤 관계에서는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표정 관리가 필요하기도 하다. 심리학자로서 약 20년간 대인관계, 스트레스 관리 등 성인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상담·코칭을 해온 저자들은 상담실을 찾아오는 이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도 역시 관계와 관련된 주제들이라며, 이 책에서 관계의 꼬인 실타래를 푸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문제 및 갈등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편안하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곁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해가는 데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직장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들다고 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 인간관계가 힘들면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떠나고 싶어진다. 관계가 주는 스트레스가 그만큼 우리 마음을 너무나도 힘들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관계는 스트레스의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치고 힘들 때 위로받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그들로부터 이해받고 지지받는다면 우리는 고된 일상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 책에는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고 마음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속깊은 현실적 처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덜 상처받고,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이해받고, 사람들과 더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심리학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다름에 대한 이해, 성격유형에 따른 이해, 역할에 따른 이해, 그리고 소통의 방법에 대해서 담았다. 우선 1장 ‘서로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에서는 ‘다름’을 즐거움과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매개체로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갈등과 대립으로 이끌어가는 수단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과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라 행복과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고, 갈등과 대립에 이를 수도 있다. 2장 ‘성격을 읽으면 관계의 해법이 보인다’에서는 성격에 따른 관계의 해법을 소개한다. 언뜻 보면 괴팍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라고 하더라도, 좀더 들여다보면 일관된 특성, 즉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격을 이해하면 여러 행동에 숨어 있는 공통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다음 행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비가 내릴 것을 알고 있으면 우산을 준비하는 것처럼,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긴장을 한결 덜어준다.
3장 ‘내 마음 다치지 않는 관계의 기술’에서는 모든 사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음을 전제로 불편한 사람들과 공존하는 지혜를 소개한다. 혹시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피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불편해도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들에 놓인다.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마음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4장 ‘인간관계를 열어주는 소통의 힘’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만들려면 소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소통은 양방향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마음이 우세하면 소통의 흐름은 막히고, 관계도 발전되기 어렵다. 은연중에 소통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는지 돌이켜보고, 경청과 공감을 통해 신뢰와 이해를 보여주고,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피드백과 조언을 전달한다면 마음으로 열어가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 책 속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상황이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는 과정을 ‘귀인’이라고 합니다. ‘귀인을 어떻게 하는가’라는 패턴 차이 하나로 삶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하는 방법은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집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행동의 원인이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같은 내적인 특성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내부귀인과,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외부귀인이 있습니다. 그다음이 ‘변화성’ 차원으로 잘 변하지 않는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안정 요인과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불안정 요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를 쏟은 동료의 행동을 보고 ‘칠칠치 못한 성격 때문이군.’ 하고 생각한다면 ‘내부 안정 귀인’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동료가 앞으로도 쭉 덤벙댈 거라고 예상합니다.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보군.’ 하고 생각하는 경우는 ‘내부 불안정 귀인’을 한 것이고, ‘컵이 미끄러워서’라고 생각한다면 이번에만 외부 상황 때문에 그랬다고 판단하는 ‘외부 불안정 귀인’을 한 것입니다. _ pp.21~22

세상에 대한 신뢰감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세상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곳이며, 나는 이 곳에서 환영받는다. 나는 가치 있고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는 느낌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가진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좌절을 겪어도 딛고 일어서는 법을 압니다. 세상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냉소적인 경향을 보이는 반면, 세상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경향을 보이며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잘합니다. 세상이 자신을 환영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할 줄 알고 호기심을 가지고 도전하기를 좋아합니다. 돌보는 이가 아이의 욕구에 일관되고 신뢰감 있게 반응해준다면, 아이는 세상을 믿을 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착 이론은 발달심리학에 큰 기여를 했는데, 출생 후 1년 내에 아이와 돌봐주는 사람 간에 맺어진 관계의 질이 이후의 성격발달과 대인관계의 주요한 기초가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_ pp.32~33

사람들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 때, 미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 등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답을 알고 싶어 점술가를 찾곤 합니다. 사람들은 점술가를 만나 자신에 대해 이해하며 고민에 대한 답을 얻기도 하고 앞날과 관련된 조언을 얻기도 합니다. 점술가들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리학의 바넘효과는 우리에 대해 꿰뚫어보는 듯한 점술가의 능력을 신통력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애매한 이야기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신에게 맞추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점술가들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심리학이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혀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애매한 이야기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이제 바넘효과를 알게 되었으니 함부로 당신을 평가하려는 이야기에 대해 한 번쯤 의심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_ pp.40~41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달시키고 완성할 수 있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 동기의 원천인 욕구에 단계가 있다고 보고 욕구위계설을 제안했습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며 직업을 찾는 것일까요? 어째서 연인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친구를 만나 위안을 구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무엇을 하게끔 힘을 불어넣는 타고난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욕구’로 설명한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그 욕구는 5가지로 구분되며, 인간의 행동에 얼마나 폭넓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위계를 가집니다. 5가지 욕구에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 존중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아래 단계에 있는 욕구일수록 생존을 위해 기본적이며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_ pp.48~49

수십 차례 오디션에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향해 열정을 바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특별한 내적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잇따른 시련 속에서도 연습을 통해 유명 연예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자신이 도전한 분야에서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판단과 신념은 힘든 연습생 생활에 매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이처럼 특정 분야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다는 판단과 신념을 심리학에서는 ‘자기효능감’이라고 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과 신념을 뜻합니다. 수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들이 높은 동기를 가지며 어려운 과제에 대해서도 잘 인내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자기효능감이 높으면 성취지향적인 활동을 지속하고 어려운 과제에도 꾸준히 도전하며 실패해도 크게 낙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삶의 과제에 맞닥뜨렸을 때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들은 대개 적극적이고 활력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결국 높은 성과와 성공 경험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_ pp.64~65

심리학 이론을 몰라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방 안에서 문을 꼭 닫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공부할 때 더 효율이 오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의 차분한 분위기와 다른 이들이 뿜어내는 공부의 열기 속에서 능률이 더 오르는 현상을 경험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수행을 촉진시킨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헬스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 최신형 러닝머신을 사두고도 굳이 헬스장을 찾아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혼자 운동하려 하면 작심삼일로 끝난다면서 말입니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타인의 시선을 일부러 찾아나서 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바로 타인의 존재가 수행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곁에 있으면 혼자 할 때보다 능률이 오르는 현상,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서 수행이 촉진되는 현상을 ‘사회적 촉진’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_ pp.86~87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하며 불평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겠습니까? 이럴 때 사람들은 부조화 상태를 조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행동은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기에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태도를 바꾸는 것이 더 쉽습니다. 따라서 ‘후회된다 → 나는 성장했다. 좋았다. 다시 시간을 돌려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던 인지가 조화를 이루게 되고 사람들은 다시 평정을 되찾습니다. 이것이 인지부조화 이론이 말하는 태도의 변화입니다. 기본적으로 인지부조화 상태를 싫어하는 인간은 이 부조화의 상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동료가 “담배가 몸에 주는 유익이 훨씬 많아!”라고 우기나요? 무언가 억지스러워 보여도 그 사람 입장에서 이는 필연적인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인지부조화는 인간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마음 편해지기 위해 이미 엎지른 물에 대한 적당한 합리화도 필요한 법입니다. _ pp.108~110

사람들은 어떻게 친해지는 것일까요? 누군가와 친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좋은 친구와 연인, 배우자를 곁에 두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돈독한 대인관계는 행복의 가장 큰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서, 거절당할까봐 두려워서, 왠지 나대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사회심리학자들의 지혜를 빌려와, 친해지기 위한 비법을 알아두었다가 가까워지고 싶은 이에게 다가가보면 어떨까요. 자신에 대해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면 상대가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지 않으면 상대가 매력을 느끼기도 어렵고, 서로 공유할 지점이 없기 때문에 친밀감을 쌓기도 힘듭니다. 도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베일에 쌓인 사람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의할 점은 상대의 호응을 살피며 적절한 페이스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_ pp.122~123

우리는 무슨 이유로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심리학 이론을 잘 활용한다면 상대의 마음을 홀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심리학자들이 그간 밝혀낸 매력의 조건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매력의 첫 번째 조건은, 가까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근접성’입니다. 일단 상대와 가까운 곳에 살거나 가까운 위치에 있어야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속담이 말하듯,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자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효과를 설명하는 이론이 ‘단순노출효과’입니다. 자꾸 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 대한 호감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왜 저 대상이 좋지?’ 하며 인지적인 수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친숙해지기에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논리적 이유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곳에서 자주 모습을 비추어보기 바랍니다. _ pp.154~155

심리학자들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폭 빠지는 단순한 열정, 뜨거운 감정 그이상의 것으로 정의합니다. 누구나 열정적인 로맨티스트의 환상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꿈꿉니다. 현대 유행가의 가사도 하나같이 사랑을 말하며, 드라마와 영화는 사랑에 울고 웃는 인간사를 그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을 목놓아 부르며 갈망합니다. 이렇듯 사랑이란 주제는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단연 심리학자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사랑 연구로 가장 유명한 로버트 스턴버그는 사랑이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설명하며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스턴버그에 따르면 사랑은 짜릿한 열정, 절절한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사랑에는 심장박동수를 높이고 감각을 흥분시키는 생리적인 요소,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인지적인 요소, 상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행동적인 요소도 포함됩니다. _ pp.163~164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그저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누고 싶은 욕구, 우리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울고 웃으며 비로소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깨닫습니다. 대상관계 이론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타자는 단지 일방적으로 젖을 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존재를 넘어서서 자신과 함께 상호작용을 하며 관계하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가 전통적인 정신분석 이론에서 말한 ‘대상’은 꼭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대상관계 이론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와 관계 맺는 인간을 뜻합니다. 우리는 생애 초기 주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과 타인, 관계에 대한 표상을 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주양육자와의 관계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평생에 걸친 자기개념과 성격, 대인관계가 달라집니다. 즉 생애 초기의 인간관계가 앞으로의 생애 및 모든 관계들을 형성한다고 본 것입니다. _ pp.184~185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귀찮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장기 경제 불황에 이태백 신조어를 만들어낸 취업난, 전 국민을 우울하게 만드는 중국발 미세먼지, 살인적인 물가와 부동산 폭등까지, 요즘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대화속에는 스트레스가 빼놓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스트레스의 어원은 ‘strictus’라는 라틴어입니다. ‘팽팽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느끼는 답답함, 압박감, 긴장된 상태를 잘 드러내줍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느낄 때 몸과 마음이 이완되지 못하고 팽팽하게 긴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트레스를 삶에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삶에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합니다. _ pp.188~189

한때 웃음치료가 한창 유행했었으며 지금도 평생 교육원이나 민간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웃음치료자격증 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왜 ‘웃음치료’라고 하는 걸까요? 어떻게 웃는 것이 치료가 되는 걸까요? ‘제임스-랑게 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나쁠 때 마냥 웃는 것도 치료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덴마크의 생리학자인 칼 랑게가 감정에 대한 학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감정이 먼저며, 신체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은 그에 뒤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슬프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무섭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당연해보입니다. 하지만 제임스와 랑게는 비슷한 시기에 논문을 발표해 “자극에 따라 신체적 변화가 있을 때, 그 신체적·생리적 변화를 자각한 것이 정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등산을 하다 곰이 나타났을 때 곰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고 근육이 긴장되며 입이 타들어가는 등 신체적 변화가 생기는데, 이 반응들을 지각하면 ‘두려움’이라는 정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_ pp.207~208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우울증에 시달리곤 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우울할 때도 있고 무기력해질 때도 있지만,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가 되면 심각성이 달라집니다. 우울증은 삶을 피폐하게 하며, 심할 경우 자살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간과해서는 안 될,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마음의 병
입니다.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 중 누군가가 우울한 낌새를 보인다면 민감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우울증 치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요즘엔 과거에 쓰였던 것보다 부작용이 적은 우울증 치료약이 개발되어 흔히 쓰입니다. 약물치료는 뇌의 생화학적 작용이 우울감에 기여한다고 보고, 생물학적인 접근을 통해 우울감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안입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은 “약물치료만으로는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입니다. 따라서 약물치료 못지않게 근원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치료를 함께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_ pp.210~211

우리나라의 명품 열풍은 거셉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모두들 똑같은 로고가 새겨진 값비싼 가방을 들고 다녀, 어떤 브랜드의 핸드백은 ‘국민백’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혹은 길거리에서 그 핸드백을 맨 사람을 3초 만에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해서 ‘3초백’이라고도 불린다니, 저 국민백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심리가 있습니다. 한 달치 월급 혹은 몇 달치 월급을 빠듯하게 아끼며 모아서 단지 가죽을 재단해놓았을 뿐인 핸드백에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비쌀수록 열광하고, 쉽게 살 수 없기에 더 갖고 싶어하는 걸까요? 현실적인 상황이나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명품에 유난히 집착하는 심리는 낮은 자존감과 연관됩니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거나 결함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마릅니다. 자격지심 때문에 타인의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고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_ pp.220~221

구매가격 : 9,000 원

위험한 심리학(최신 개정증보판)

도서정보 : 송형석 | 2018-06-2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나는 왜 네가 이유 없이 싫을까?”
이상한 사람과는 슬며시 거리 두기
오래갈 사람과는 편안한 거리 찾기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데 그 사람을 하필 매일 마주쳐야 할 때.
나랑 정말 안 맞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데 그 사람과 무언가를 함께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과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
《위험한 심리학》의 저자 송형석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려면 타인을 이해하고(이 말은 많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이게 어렵다).”
2009년 출간 이후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사람은 무조건 피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 읽는 법을 알려준다. 나아가 그 근간이 되는 심리학 이론, ‘문제 인간’ 유형 및 대응법을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관계의 본질을 고민해보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이다. 새롭게 출시된 개정증보판에서는 바뀐 상황에 맞춰 내용을 수정했으며, 10여 년의 내공이 더 쌓인 저자가 당시 제시할 수 없었던 해결책을 대폭 보강했다.

구매가격 : 13,160 원

팟캐스트 이드치연구소 제2집

도서정보 : 지경주 | 2018-06-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팟캐스트 이드치연구소는 이드치(이야기&드라마치료) 연구소를 운영하는 지경주가 만든 방송입니다.

연구하지 않는 이름뿐인 연구소가 되지 않기 원하고, 연구소의 산물을 공식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2016년 6월 25일 첫 방송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2018년 5월 1일 제50회 방송을 올렸습니다.

평균 30분 분량의 녹음 방송을 위해, 원고를 작성하고 녹음하고 편집하면서, 팟캐스트 이드치연구소는 저의 경험과 생각과 지식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내용을 문서화하면 좋겠다는 일부 요청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문서화 된 연구소 산물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팟캐스트 대본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제2집은 제11회부터 제20회까지 방송대본과 2016년 상반기에 한시적으로 진행했던 ‘이드치연구소 글모음’ 원고 일부를 추가했습니다. 지경주가 작성한 글 중에는 이번 출판을 위해 삭제, 보완, 수정한 것도 있습니다.

저는 사이코드라마 창시자 모레노 부부와 드라마치료를 계속 알아가고 배우는 중입니다. 드라마치료와 정신건강에 관심 있는 분들께 대본집이 도움 되기를 희망하고, 대본집이 드라마치료와 예술치료의 활성화에 도움 되기를 희망합니다.

팟캐스트 이드치연구소 제2집 출판을 위해, 원고를 기부해주신 이드치연구소 활동가 원제연, 권명숙, 김태현 선생님 고맙습니다.

연구소 홈페이지(idchi.or.kr)나 이메일(idchi@idchi.or.kr)로 여러분의 귀한 소감, 생각, 의견을 보내주시면 감사히 잘 읽고 반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8년 6월 1일 지경주 -

구매가격 : 10,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