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고전366 그림 형제의 스노드롭
도서정보 : 그림 형제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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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가 수집한 아이들과 가정의 민화(Children's and Household Tales, Grimm's Fairy Tales)(1812) : 그림 형제 동화집(Grimms' Fairy Tales by Jacob Grimm and Wilhelm Grimm)의 원제는 독일어로 Kinder- und Hausm?rchen, Grimms Elfenm?rchen, 즉 그림 형제가 수집한 아이들과 가정의 민화(Children's and Household Tales, Grimm's Fairy Tales)입니다. 1812년 최초로 86편을 모아 초판을 발행하였으며, 이후 이야기를 추가하며 증보판을 발행하였습니다. 1857년 출간한 일곱 번째 증보판은 211편의 이야기를 포괄하고 있으며,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개구리 왕자, 브레멘 음악대 등 수많은 유럽동화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동화책 자체도 워낙 유명하지만, 몇몇 작품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였습니다. 단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는 원작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림 형제 이전에도 독일 민담을 최초로 수집한 요한 카를 아우구스트 무샤우스(Johann Karl August Mus?us)의 Nachgelassene Schriften(1791), 아힘 폰 아르님(Achim von Arnim)과 클레멘스 브렌타노(Clemens Brentano)의 민요모음집 소년의 마적(Des Knaben Wunderhorn)(1805) 등이 출간된바 있습니다만, 언어학자인 그림 형제가 평생에 걸쳐 채록하였을 뿐 아니라 수차례의 증보판을 통해 끊임없이 가다듬은 ‘현존하는 최고의 유럽동화집’은 단연 그림 형제의 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형제 또한 동화를 본격적으로 집필한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대표작 - 빨간 두건,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푸른 수염, 엄지 동자, 다이아몬드와 두꺼비들, 당나귀 가죽, 어리석은 세가지 소원 등의 일부를 각색해, 자신의 동화집에 싣는 등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림형제의 동화집 출간 이후 그의 작업에 영감을 받아, 세계 각지에서 자국의 이야기를 수집한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IT was the middle of winter, and the snowflakes were falling from the sky like feathers. Now, a Queen sat sewing at a window framed in black ebony, and as she sewed she looked out upon the snow. Suddenly she pricked her finger and three drops of blood fell on to the snow. And the red looked so lovely on the white that she thought to herself: ‘If only I had a child as white as snow and as red as blood, and as black as the wood of the window frame!’ Soon after, she had a daughter, whose hair was black as ebony, while her cheeks were red as blood, and her skin as white as snow; so she was called Snowdrop. But when the child was born the Queen died. A year after the King took another wife. She was a handsome woman, but proud and overbearing, and could not endure that any one should surpass her in beauty. She had a magic looking-glass, and when she stood before it and looked at herself she used to say: Snowdrop.
한겨울이었고, 눈송이는 깃털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 여왕이 검은 흑단 액자로 된 창문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바느질을 하면서 눈 위를 내다봤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손가락을 찌르자 세 방울의 피가 눈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얀색 상의 빨간색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고,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만약 나에게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빨갛고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가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딸 하나를 낳았는데, 머리는 흑단같이 검고, 뺨은 피처럼 빨갛고, 피부는 눈처럼 하얗다고 하여 눈방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여왕은 죽었습니다. 왕이 다른 아내를 데려간 지 1년 후에요 그녀는 잘생긴 여성이었지만, 자랑스럽고 고압적이었고, 누구도 그녀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마법의 유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유리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스노우 드롭(Snowdrop).
THERE was once a poor man who had four sons, and when they were grown up, he said to them: ‘Dear children, you must go out into the world now, for I have nothing to give you. You must each learn a trade and make your own way in the world.’ So the four Brothers took their sticks in their hands, bid their father good-bye, and passed out of the town gate. When they had walked some distance, they came to four cross roads, which led into four different districts. Then the eldest one said: ‘We must part here, but this day four years, we will meet here again, having in the meantime done our best to make our fortunes.’ The Four Clever Brothers.
옛날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들이 자라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는 지금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은 각자 무역을 배우고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 형제들은 막대기를 손에 들고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고 성문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들이 좀 더 걸었을 때, 그들은 네 개의 다른 구역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교차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첫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4년 만에,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영리한 네 형제(The Four Clever Brothers).
She ran to the window to see if her Master was coming with the guest, but she saw nobody. Then she went back to the fowls again, and thought, ‘One wing is catching a little, better to eat it?and eat it I will.’ So she cut it off and ate it with much enjoyment. When it was finished, she thought, ‘The other must follow, or the Master will notice that something is wanting.’ When the wings were consumed she went back to the window again to look for her Master, but no one was in sight. Clever Grethel.
그녀는 주인이 손님과 함께 오는지 보기 위해 창문으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닭들에게로 가서, '날개 하나가 조금, 더 잘 잡아서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잘라서 매우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녀는 '다른 사람이 따라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스터는 무언가 부족한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날개가 다 먹혔을 때 그녀는 다시 창가로 가서 주인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리한 그레텔(Clever Grethel).
His father and mother came to the wedding, and they were full of joy, for they had long given up all hope of ever seeing their dear son again. As they were all sitting at the wedding feast, the music suddenly stopped, the doors flew open, and a proud King walked in at the head of a great following. He went up to the Bridegroom, embraced him, and said, ‘I am Iron Hans, who was bewitched and changed into a Wild Man; but you have broken the spell and set me free. All the treasure that I have is now your own.’ Iron Hans.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식에 오셨는데,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두 결혼식 잔치에 앉아 있을 때,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 문이 날아오르고, 자랑스러운 왕이 거대한 추종자의 선두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는 신랑으로 올라가서 그를 껴안고 말하였다. `나는 아이언 한스입니다. 그는 마법에 걸려 야만인으로 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법을 깨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보물은 이제 당신 것입니다.' 아이언 한스(Iron H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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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67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
도서정보 : 니콜로 마키아벨리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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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이탈리아는 종교 권력이 도시국가들과 끊임없이 힘싸움을 벌였으며,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의 주변국과 분쟁이 잦아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를 결국 힘없고 가난한 대다수의 민중들이 감내해야 했다는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결국 군주가 모든 악명을 감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더 나은 정치인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떡밥을 던진 군주론(The Prince)(1532)은 21세기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라도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는 고전 걸작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야심차게 집필한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1531)를 루첼라이(Rucellai)와 부온델몬티(Buondelmonti)에게, 군주론(The Prince)(1532)을 자신을 쫓아낸 메디치가의 로렌초 2세(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헌정함으로써 공직 복귀를 노렸습니다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꽤 유능한 공직자였으나, 그는 ‘개인으로써의 군주’보다 ‘공화정이란 국가’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을 발탁하려는 당대의 군주 입장에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인재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메디치가의 2번째 교황 클레멘스 7세(Papa Clemente VII)의 의뢰로 피렌체사(Istorie Fiorentine)(1532)를 집필하였으며, 이는 정치학자이자 사상가가 아닌 ‘피렌체인 마키아벨리’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힙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Niccolo Machiavelli, the first great Italian historian, and one of the most eminent political writers of any age or country, was born at Florence, May 3, 1469. He was of an old though not wealthy Tuscan family, his father, who was a jurist, dying when Niccolo was sixteen years old. We know nothing of Machiavelli's youth and little about his studies. He does not seem to have received the usual humanistic education of his time, as he knew no Greek.
최초의 위대한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모든 연령과 나라의 가장 저명한 정치 작가 중 한 명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플로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래되었지만 부유하지는 않은 토스카나 가문 출신이었고, 법률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니콜로가 16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과 학업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당대의 일반적인 인문학적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The first notice of Machiavelli is in 1498 when we find him holding the office of Secretary in the second Chancery of the Signoria, which office he retained till the downfall of the Florentine Republic in 1512. His unusual ability was soon recognized, and in 1500 he was sent on a mission to Louis XII. of France, and afterward on an embassy to Cæsar Borgia, the lord of Romagna, at Urbino. Machiavelli's report and description of this and subsequent embassies to this prince, shows his undisguised admiration for the courage and cunning of Cæsar, who was a master in the application of the principles afterwards exposed in such a skillful and uncompromising manner by Machiavelli in his Prince.
마키아벨리의 첫 번째 통지는 1498년 그가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가 유지했던 두 번째 시뇨리아 공판에서 장관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의 비범한 능력은 곧 인정되었고, 1500년에 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로 파견되었고, 그 후 우르비노에 있는 로마냐의 영주 체사르 보르자로 사절단이 파견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이 왕자에게 보고하고 이후 사절단에 대한 설명을 보면, 후에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왕자 안에서 능숙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드러났던 세사르의 용기와 교활함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감탄이 엿보입니다.
The limits of this introduction will not permit us to follow with any detail the many important duties with which he was charged by his native state, all of which he fulfilled with the utmost fidelity and with consummate skill. When, after the battle of Ravenna in 1512 the holy league determined upon the downfall of Pier Soderini, Gonfaloniere of the Florentine Republic, and the restoration of the Medici, the efforts of Machiavelli, who was an ardent republican, were in vain; the troops he had helped to organize fled before the Spaniards and the Medici were returned to power. Machiavelli attempted to conciliate his new masters, but he was deprived of his office, and being accused in the following year of participation in the conspiracy of Boccoli and Capponi, he was imprisoned and tortured, though afterward set at liberty by Pope Leo X.
이 서론의 한계는 그가 모국에서 맡은 많은 중요한 임무들을 우리가 세세하게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 모든 임무들은 그가 최고의 충실함과 완벽한 기술로 완수했습니다. 1512년 라벤나 전투 후, 신성 동맹이 피에르 소데리니, 피렌체 공화국의 곤팔로니에르의 몰락과 메디치 가문의 복원에 대해 결정했을 때,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의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그가 도왔던 군대는 스페인과 메디치 가문보다 먼저 도망쳤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새로운 주인을 회유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관직을 박탈당했고, 이듬해 보콜리와 카포니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후에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금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Free Rome is the embodiment of his political idea of the state. Much that Machiavelli says in this treatise is as true to-day and holds as good as the day it was written. And to us there is much that is of especial importance. To select a chapter almost at random, let us take Book I., Chap. XV.: "Public affairs are easily managed in a city where the body of the people is not corrupt; and where equality exists, there no principality can be established; nor can a republic be established where there is no equality.“
자유 로마는 국가에 대한 그의 정치적 사상의 구체화입니다. 마키아벨리가 이 논문에서 말한 많은 것은 오늘날에도 사실이고 그것이 쓰여진 날만큼 유효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의 아무렇게나 한 장을 선택하자면, 제15장을 들어보자: "공직은 백성의 몸이 부패하지 않은 도시에서 쉽게 관리되며, 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공국이 성립될 수 없으며, 평등이 없는 공화국이 세워질 수도 없습니다."
No man has been more harshly judged than Machiavelli, especially in the two centuries following his death. But he has since found many able champions and the tide has turned. The Prince has been termed a manual for tyrants, the effect of which has been most pernicious. But were Machiavelli's doctrines really new? Did he discover them?
마키아벨리만큼 가혹한 심판을 받은 사람은 특히 그가 죽은 후 2세기 동안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많은 유능한 챔피언들을 찾았고, 대세는 바뀌었습니다. 왕자는 폭군들을 위한 매뉴얼이라고 불리는데, 그 효과는 가장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교리는 정말 새로운 것일까요? 그가 그것들을 발견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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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68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Ⅰ
도서정보 : 니콜로 마키아벨리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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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1531) : 원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Discourses on the First Ten Books of Titus Livy)로 마키아벨리가 1513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기존의 역사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설득하였는데, 군주론(The Prince)(1532)는 142장에 달하는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Tito Livio)의 로마사 혹은 로마 건국사(Ab Urbe Condita Libri)를 기반으로 각각의 정치체제와 이의 단점을 논하였습니다. 군주정부터 귀족정, 민중정, 참주정, 과두정(寡頭政), 그리고 중우정(衆愚政)의 여섯 가지 정치 체제(政治體制) 중에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왜 가장 뛰어난지, 당대의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하기 위해 집필한 작품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I send you a gift, which if it answers ill the obligations I owe you, is at any rate the greatest which Niccol? Machiavelli has it in his power to offer. For in it I have expressed whatever I have learned, or have observed for myself during a long experience and constant study of human affairs. And since neither you nor any other can expect more at my hands, you cannot complain if I have not given you more.
제가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진 빚이 나쁘게 대답된다면, 어쨌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안에서 저는 인간 문제에 대한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제가 배운 것, 혹은 스스로 관찰한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나 다른 누구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더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불평할 수 없습니다.
You may indeed lament the poverty of my wit, since what I have to say is but poorly said; and tax the weakness of my judgment, which on many points may have erred in its conclusions. But granting all this, I know not which of us is less beholden to the other: I to you, who have forced me to write what of myself I never should have written; or you to me, who have written what can give you no content.
여러분은 제 지혜의 빈곤을 한탄하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는 말은 형편없이 하는 말이고, 제 판단력의 약함에 대해 비난할 것입니다. 많은 점에서 그 결론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인정한다면, 저는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덜 신세를 졌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쓰도록 강요한 여러분에게, 또는 여러분에게 아무 내용도 줄 수 없는 글을 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Take this, however, in the spirit in which all that comes from a friend should be taken, in respect whereof we always look more to the intention of the giver than to the quality of the gift. And, believe me, that in one thing only I find satisfaction, namely, in knowing that while in many matters I may have made mistakes, at least I have not been mistaken in choosing you before all others as the persons to whom I dedicate these Discourses; both because I seem to myself, in doing so, to have shown a little gratitude for kindness received, and at the same time to have departed from the hackneyed custom which leads many authors to inscribe their works to some Prince, and blinded by hopes of favour or reward, to praise him as possessed of every virtue; whereas with more reason they might reproach him as contaminated with every shameful vice.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선물의 질보다 주는 사람의 의도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친구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나를 믿으십시오. 한 가지, 즉 많은 문제에서 내가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지만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먼저 당신을 내가 이 책을 바칠 사람으로 선택하는 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담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받은 친절에 약간의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어떤 왕자에게 새기게 하고, 호의 또는 보상, 모든 미덕을 소유한 그를 칭찬하기 위해;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그들은 그를 모든 부끄러운 악덕으로 더럽힌 것으로 비난할 수 있습니다.
To avoid which error I have chosen, not those who are but those who from their infinite merits deserve to be Princes; not such persons as have it in their power to load me with honours, wealth, and preferment, but such as though they lack the power, have all the will to do so. For men, if they would judge justly, should esteem those who are, and not those whose means enable them to be generous; and in like manner those who know how to govern kingdoms, rather than those who possess the government without such knowledge. For Historians award higher praise to Hiero of Syracuse when in a private station than to Perseus the Macedonian when a King affirming that while the former lacked nothing that a Prince should have save the name, the latter had nothing of the King but the kingdom.
내가 어떤 잘못을 택하였는지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아닌 그들의 무한한 공덕으로 왕자가 될 자격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권능으로 나에게 명예와 재물과 특혜를 줄 수 있는 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권능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하려면, 그들이 가진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재산이 그들을 관대하게 하는 자들을 존경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왕국을 통치할 줄 아는 자들보다는, 그런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역사가들은 시라쿠사의 히에로(Hiero of Syracuse)가 사적인 신분에 있을 때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보다 더 높은 찬사를 보내는데, 왕이 왕자가 그 이름을 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할 때, 시라쿠사의 히에로는 왕국에 대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Make the most, therefore, of this good or this evil, as you may esteem it, which you have brought upon yourselves; and should you persist in the mistake of thinking my opinions worthy your attention, I shall not fail to proceed with the rest of the History in the manner promised in my Preface. Farewell.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자초한 이 선과 악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제 의견을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계속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 서문에서 약속한 방식으로 역사의 나머지를 진행하겠습니다. 안녕.
구매가격 : 8,910 원
영어고전369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Ⅱ
도서정보 : 니콜로 마키아벨리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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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1531) : 원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Discourses on the First Ten Books of Titus Livy)로 마키아벨리가 1513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기존의 역사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설득하였는데, 군주론(The Prince)(1532)는 142장에 달하는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Tito Livio)의 로마사 혹은 로마 건국사(Ab Urbe Condita Libri)를 기반으로 각각의 정치체제와 이의 단점을 논하였습니다. 군주정부터 귀족정, 민중정, 참주정, 과두정(寡頭政), 그리고 중우정(衆愚政)의 여섯 가지 정치 체제(政治體制) 중에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왜 가장 뛰어난지, 당대의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하기 위해 집필한 작품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I send you a gift, which if it answers ill the obligations I owe you, is at any rate the greatest which Niccol? Machiavelli has it in his power to offer. For in it I have expressed whatever I have learned, or have observed for myself during a long experience and constant study of human affairs. And since neither you nor any other can expect more at my hands, you cannot complain if I have not given you more.
제가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진 빚이 나쁘게 대답된다면, 어쨌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안에서 저는 인간 문제에 대한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제가 배운 것, 혹은 스스로 관찰한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나 다른 누구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더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불평할 수 없습니다.
You may indeed lament the poverty of my wit, since what I have to say is but poorly said; and tax the weakness of my judgment, which on many points may have erred in its conclusions. But granting all this, I know not which of us is less beholden to the other: I to you, who have forced me to write what of myself I never should have written; or you to me, who have written what can give you no content.
여러분은 제 지혜의 빈곤을 한탄하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는 말은 형편없이 하는 말이고, 제 판단력의 약함에 대해 비난할 것입니다. 많은 점에서 그 결론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인정한다면, 저는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덜 신세를 졌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쓰도록 강요한 여러분에게, 또는 여러분에게 아무 내용도 줄 수 없는 글을 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Take this, however, in the spirit in which all that comes from a friend should be taken, in respect whereof we always look more to the intention of the giver than to the quality of the gift. And, believe me, that in one thing only I find satisfaction, namely, in knowing that while in many matters I may have made mistakes, at least I have not been mistaken in choosing you before all others as the persons to whom I dedicate these Discourses; both because I seem to myself, in doing so, to have shown a little gratitude for kindness received, and at the same time to have departed from the hackneyed custom which leads many authors to inscribe their works to some Prince, and blinded by hopes of favour or reward, to praise him as possessed of every virtue; whereas with more reason they might reproach him as contaminated with every shameful vice.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선물의 질보다 주는 사람의 의도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친구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나를 믿으십시오. 한 가지, 즉 많은 문제에서 내가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지만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먼저 당신을 내가 이 책을 바칠 사람으로 선택하는 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담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받은 친절에 약간의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어떤 왕자에게 새기게 하고, 호의 또는 보상, 모든 미덕을 소유한 그를 칭찬하기 위해;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그들은 그를 모든 부끄러운 악덕으로 더럽힌 것으로 비난할 수 있습니다.
To avoid which error I have chosen, not those who are but those who from their infinite merits deserve to be Princes; not such persons as have it in their power to load me with honours, wealth, and preferment, but such as though they lack the power, have all the will to do so. For men, if they would judge justly, should esteem those who are, and not those whose means enable them to be generous; and in like manner those who know how to govern kingdoms, rather than those who possess the government without such knowledge. For Historians award higher praise to Hiero of Syracuse when in a private station than to Perseus the Macedonian when a King affirming that while the former lacked nothing that a Prince should have save the name, the latter had nothing of the King but the kingdom.
내가 어떤 잘못을 택하였는지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아닌 그들의 무한한 공덕으로 왕자가 될 자격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권능으로 나에게 명예와 재물과 특혜를 줄 수 있는 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권능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하려면, 그들이 가진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재산이 그들을 관대하게 하는 자들을 존경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왕국을 통치할 줄 아는 자들보다는, 그런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역사가들은 시라쿠사의 히에로(Hiero of Syracuse)가 사적인 신분에 있을 때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보다 더 높은 찬사를 보내는데, 왕이 왕자가 그 이름을 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할 때, 시라쿠사의 히에로는 왕국에 대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Make the most, therefore, of this good or this evil, as you may esteem it, which you have brought upon yourselves; and should you persist in the mistake of thinking my opinions worthy your attention, I shall not fail to proceed with the rest of the History in the manner promised in my Preface. Farewell.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자초한 이 선과 악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제 의견을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계속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 서문에서 약속한 방식으로 역사의 나머지를 진행하겠습니다. 안녕.
구매가격 : 8,910 원
영어고전370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Ⅲ
도서정보 : 니콜로 마키아벨리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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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1531) : 원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Discourses on the First Ten Books of Titus Livy)로 마키아벨리가 1513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기존의 역사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설득하였는데, 군주론(The Prince)(1532)는 142장에 달하는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Tito Livio)의 로마사 혹은 로마 건국사(Ab Urbe Condita Libri)를 기반으로 각각의 정치체제와 이의 단점을 논하였습니다. 군주정부터 귀족정, 민중정, 참주정, 과두정(寡頭政), 그리고 중우정(衆愚政)의 여섯 가지 정치 체제(政治體制) 중에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왜 가장 뛰어난지, 당대의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하기 위해 집필한 작품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I send you a gift, which if it answers ill the obligations I owe you, is at any rate the greatest which Niccol? Machiavelli has it in his power to offer. For in it I have expressed whatever I have learned, or have observed for myself during a long experience and constant study of human affairs. And since neither you nor any other can expect more at my hands, you cannot complain if I have not given you more.
제가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진 빚이 나쁘게 대답된다면, 어쨌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안에서 저는 인간 문제에 대한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제가 배운 것, 혹은 스스로 관찰한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나 다른 누구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더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불평할 수 없습니다.
You may indeed lament the poverty of my wit, since what I have to say is but poorly said; and tax the weakness of my judgment, which on many points may have erred in its conclusions. But granting all this, I know not which of us is less beholden to the other: I to you, who have forced me to write what of myself I never should have written; or you to me, who have written what can give you no content.
여러분은 제 지혜의 빈곤을 한탄하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는 말은 형편없이 하는 말이고, 제 판단력의 약함에 대해 비난할 것입니다. 많은 점에서 그 결론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인정한다면, 저는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덜 신세를 졌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쓰도록 강요한 여러분에게, 또는 여러분에게 아무 내용도 줄 수 없는 글을 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Take this, however, in the spirit in which all that comes from a friend should be taken, in respect whereof we always look more to the intention of the giver than to the quality of the gift. And, believe me, that in one thing only I find satisfaction, namely, in knowing that while in many matters I may have made mistakes, at least I have not been mistaken in choosing you before all others as the persons to whom I dedicate these Discourses; both because I seem to myself, in doing so, to have shown a little gratitude for kindness received, and at the same time to have departed from the hackneyed custom which leads many authors to inscribe their works to some Prince, and blinded by hopes of favour or reward, to praise him as possessed of every virtue; whereas with more reason they might reproach him as contaminated with every shameful vice.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선물의 질보다 주는 사람의 의도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친구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나를 믿으십시오. 한 가지, 즉 많은 문제에서 내가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지만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먼저 당신을 내가 이 책을 바칠 사람으로 선택하는 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담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받은 친절에 약간의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어떤 왕자에게 새기게 하고, 호의 또는 보상, 모든 미덕을 소유한 그를 칭찬하기 위해;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그들은 그를 모든 부끄러운 악덕으로 더럽힌 것으로 비난할 수 있습니다.
To avoid which error I have chosen, not those who are but those who from their infinite merits deserve to be Princes; not such persons as have it in their power to load me with honours, wealth, and preferment, but such as though they lack the power, have all the will to do so. For men, if they would judge justly, should esteem those who are, and not those whose means enable them to be generous; and in like manner those who know how to govern kingdoms, rather than those who possess the government without such knowledge. For Historians award higher praise to Hiero of Syracuse when in a private station than to Perseus the Macedonian when a King affirming that while the former lacked nothing that a Prince should have save the name, the latter had nothing of the King but the kingdom.
내가 어떤 잘못을 택하였는지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아닌 그들의 무한한 공덕으로 왕자가 될 자격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권능으로 나에게 명예와 재물과 특혜를 줄 수 있는 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권능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하려면, 그들이 가진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재산이 그들을 관대하게 하는 자들을 존경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왕국을 통치할 줄 아는 자들보다는, 그런 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역사가들은 시라쿠사의 히에로(Hiero of Syracuse)가 사적인 신분에 있을 때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보다 더 높은 찬사를 보내는데, 왕이 왕자가 그 이름을 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할 때, 시라쿠사의 히에로는 왕국에 대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Make the most, therefore, of this good or this evil, as you may esteem it, which you have brought upon yourselves; and should you persist in the mistake of thinking my opinions worthy your attention, I shall not fail to proceed with the rest of the History in the manner promised in my Preface. Farewell.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자초한 이 선과 악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제 의견을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계속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 서문에서 약속한 방식으로 역사의 나머지를 진행하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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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71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전술론
도서정보 : 니콜로 마키아벨리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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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론(Art of War)(1521) : 전술론(Art of War)(1521)에 등장하는 루첼라이(Rucellai)는 메디치(Medici), 파치(Pazzi), 스트로치(Strozzi) 등과 함께 당대 피렌체의 대가문 중 하나로, 마키아벨리는 1518년 베르나르도 루첼라이(Bernardo Rucellai)가 후원하는 모임을 통해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습니다. 메디치가에서 최초로 시행한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토론’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모방한 것으로, 라벤나 전투(Battle of Ravenna)(1512)의 명장 파브리치오 콜론나(Fabrizio Colonna)을 초빙하여 빈객들과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전술론(Art of War)(1521)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차노비 부온델몬티(Zanobi Buondelmonti), 루이지 알라만니(Luigi Alamanni), 바티스타 델라 팔라(Battista della Palla)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 정치가, 빈객들이 대거 참가하였으며, 마키아벨리는 이를 대화록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루첼라이 정원(Orti Oricellari)은 현재 Mission Laique Francaise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This brings me to dinner-time, when I join my family and eat the poor produce of my farm. After dinner I go back to the inn, where I generally find the host and a butcher, a miller, and a pair of bakers. With these companions I play the fool all day at cards or backgammon: a thousand squabbles, a thousand insults and abusive dialogues take place, while we haggle over a farthing, and shout loud enough to be heard from San Casciano.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들과 함께 농장의 가난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나는 여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보통 주인, 정육점 주인, 방앗간 주인, 그리고 제빵사를 발견합니다. 저는 카드나 백가몬에서 하루 종일 바보 놀이를 합니다: 천 번의 말다툼, 천 번의 모욕과 욕설적인 대화가 일어나는 동안, 우리가 먼 것에 대해 흥정하고 산 카시아노에게서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소리칩니다.
'But when evening falls I go home and enter my writing-room. On the threshold I put off my country habits, filthy with mud and mire, and array myself in royal courtly garments. Thus worthily attired, I make my entrance into the ancient courts of the men of old, where they receive me with love, and where I feed upon that food which only is my own and for which I was born. I feel no shame in conversing with them and asking them the reason of their actions.
'하지만 저녁이 되면 집에 가서 글방에 들어갑니다' 문턱에서 저는 진흙과 수렁으로 더러워진 제 시골 습관을 버리고 왕실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값진 옷을 입고 옛 사람들의 궁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맞이하고, 내가 태어난 음식을 먹고 삽니다. 저는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At the beginning of the sixteenth century Italy was rotten to the core. In the close competition of great wickedness the Vicar of Christ easily carried off the palm, and the Court of Alexander VI. was probably the wickedest meeting-place of men that has ever existed upon earth. No virtue, Christian or Pagan, was there to be found; little art that was not sensuous or sensual. It seemed as if Bacchus and Venus and Priapus had come to their own again, and yet Rome had not ceased to call herself Christian.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속까지 썩었습니다. 크나큰 악의 경쟁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은 쉽게 손을 뗐고, 알렉산데르 6세의 궁전은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 가장 사악한 만남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든 이교도든 미덕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감각적이거나 관능적이지 않은 예술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카스와 비너스, 프리아푸스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로마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The slender volume of The Prince has probably produced wider discussion, more bitter controversy, more varied interpretations and a deeper influence than any book save Holy Writ. Kings and statesmen, philosophers and theologians, monarchists and republicans have all and always used or abused it for their purposes. Written in 1513, the first year of Machiavelli's disgrace, concurrently with part of the Discorsi, which contain the germs of it, the book represents the fulness of its author's thought and experience. It was not till after Machiavelli's death, that it was published in 1532, by order of Clement VII. Meanwhile, however, in manuscript it had been widely read and favourably received.
얇은 군주론(The Prince)은 아마도 성서를 구하는 어떤 책보다 더 넓은 토론, 더 쓰라린 논쟁, 더 다양한 해석, 그리고 더 깊은 영향력을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왕과 정치가, 철학자와 신학자들, 군주론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항상 그것을 사용하거나 남용해 왔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치욕의 첫 해인 1513년에 쓰여진 이 책은 디스코르시의 일부와 동시에 그것의 병균이 들어 있는 그 책의 저자의 사고와 경험의 충실함을 나타냅니다. 마키아벨리가 죽은 후에야 클레멘스 7세의 명령으로 153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원고에서는 널리 읽혀졌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The chapters on military organisation may be more conveniently considered in conjunction with The Art of War. It is enough at present to point out two or three observations of Machiavelli which touch politics from the military side. To his generation they were entirely novel, though mere commonplace to-day. National strength means national stability and national greatness; and this can be achieved, and can only be achieved, by a national army. The Condottiere system, born of sloth and luxury, has proved its rottenness. Your hired general is either a tyrant or a traitor, a bully or a coward. 'In a word the armour of others is too wide or too strait for us: it falls off us, or it weighs us down.' And in a fine illustration he compares auxiliary troops to the armour of Saul which David refused, preferring to fight Goliath with his sling and stone.
군사조직에 관한 장들은 전술론(The Art of War)과 함께 더 편리하게 고려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마키아벨리의 두세 가지 관찰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의 세대에게 그것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국력은 국가의 안정과 위대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군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고 오직 성취될 수 있습니다. 게으름뱅이와 사치스러움으로 태어난 콩도티에르 시스템은 그 부패함을 증명했습니다. 당신이 고용한 장군은 폭군이나 반역자, 불량배, 겁쟁이 둘 중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갑옷은 우리에게 너무 넓거나 너무 좁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떨어지거나, 우리를 짓누르거나.' 그리고 좋은 삽화에서 그는 보조군을 사울의 갑옷에 비유했습니다. 다윗은 이를 거절하고, 골리앗과 그의 투석과 돌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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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72 조너선 스위프트의 책들의 전쟁
도서정보 : 조너선 스위프트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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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대 영국의 정치, 종교, 식민지 정책, 차별 등을 신랄하게 비꼰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1726)는 ‘세계 최고의 풍자 소설’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18세기의 걸작입니다. 아일랜드 추밀원(Irish Privy Council)이 그가 신분을 숨기고 발표한 7편의 드레피어의 편지(Drapier's Letters)(1724~1725)에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소설’이자 ‘가장 유명한 금서(禁書)’가 된 걸리버 여행기는 출판업자 또한 투옥을 피하기 위해 적지 않은 부분을 고치고 삭제하였을 정도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문제작인 동시에 그만큼의 인기를 확신할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작품은 단연 걸리버 여행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스위프트 특유의 ? 스위프트인(Swiftian)다운 풍자와 해학이 넘실댑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풍자 축제 스위프트 풍자 축제(Swift Satire Festival, Trim)가 존재하는 세계 최고의 풍자 문학가(Satirist) 조너선 스위프트의 문학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Swift was born in Dublin seven months after his father’s death. His mother after a time returned to her own family, in Leicester, and the child was added to the household of his uncle, Godwin Swift, who, by his four wives, became father to ten sons of his own and four daughters. Godwin Swift sent his nephew to Kilkenny School, where he had William Congreve among his schoolfellows.
스위프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개월 만에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얼마 후 그의 어머니는 레스터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왔고, 아이는 4명의 아내에 의해 10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둔 아버지가 된 삼촌 고드윈 스위프트의 집에 추가되었습니다. Godwin Swift는 그의 조카를 Kilkenny School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교 동료들 중 윌리엄 콩그리브를 만났습니다.
But Sir William Temple had missed Jonathan Swift from Moor Park. Differences were forgotten, and Swift, at his wish, went back. This was in 1696, when his little pupil, Esther Johnson, was fifteen. Swift said of her, “I knew her from six years old, and had some share in her education, by directing what books she should read, and perpetually instructing her in the principles of honour and virtue, from which she never swerved in any one action or moment of her life. She was sickly from her childhood until about the age of fifteen; but then grew into perfect health, and was then looked upon as one of the most beautiful, graceful, and agreeable young women in London, only a little too fat. Her hair was blacker than a raven, and every feature of her face in perfection.”
하지만 윌리엄 템플 경은 무어 공원에서 온 조나단 스위프트를 놓쳤어요. 차이점은 잊혀졌고, 스위프트는 그의 바람대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그의 어린 제자 에스더 존슨이 15살이었던 1696년의 일입니다. 스위프트는 그녀에 대해 "저는 그녀를 6살 때부터 알았고, 그녀가 읽어야 할 책을 지시하고,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행동이나 순간에서도 절대 벗어나지 않았던 명예와 덕의 원칙을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그녀의 교육에 어느 정도 기여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약 15살까지 아팠지만, 그 후 완벽한 건강으로 성장했고, 런던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상냥한 젊은 여성들 중 한 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까마귀보다 더 까맣고 얼굴의 모든 특징이 완벽합니다.“
This was the Stella of Swift’s after-life, the one woman to whom his whole love was given. But side by side with the slow growth of his knowledge of all she was for him, was the slow growth of his conviction that attacks of giddiness and deafness, which first came when he was twenty, and recurred at times throughout his life, were signs to be associated with that which he regarded as the curse upon his life. His end would be like his uncle Godwin’s. It was a curse transmissible to children, but if he desired to keep the influence his genius gave him, he could not tell the world why he refused to marry. INTRODUCTION.
이것은 스위프트의 사후 삶의 스텔라였습니다. 그의 모든 사랑을 받은 유일한 여자였죠. 하지만 그에 대한 그의 지식의 느린 성장과 함께, 그가 스무 살 때 처음 찾아왔고, 때때로 그의 삶 전체에 걸쳐 재발하는 현기증과 청각장애의 발작은 그가 그의 삶에 저주로 여기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의 느린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끝은 그의 삼촌 고드윈의 끝일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전염되는 저주였지만, 천재성이 준 영향력을 지키고 싶다면 결혼을 거부한 이유를 세상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서두(INTRODUCTION).
Satire is a sort of glass wherein beholders do generally discover everybody’s face but their own; which is the chief reason for that kind reception it meets with in the world, and that so very few are offended with it. But, if it should happen otherwise, the danger is not great; and I have learned from long experience never to apprehend mischief from those understandings I have been able to provoke: for anger and fury, though they add strength to the sinews of the body, yet are found to relax those of the mind, and to render all its efforts feeble and impotent.
풍자는 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종의 유리입니다; 이것이 풍자가 세상에서 만나는 친절한 환영의 주된 이유이고, 매우 적은 사람들만이 풍자로 인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위험은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랜 경험을 통해 분노와 분노는 몸의 힘줄에 힘을 더해주지만, 마음의 힘줄을 풀어주고, 모든 노력을 미약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것은 결코 제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해로부터 장난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There is a brain that will endure but one scumming; let the owner gather it with discretion, and manage his little stock with husbandry; but, of all things, let him beware of bringing it under the lash of his betters, because that will make it all bubble up into impertinence, and he will find no new supply. Wit without knowledge being a sort of cream, which gathers in a night to the top, and by a skilful hand may be soon whipped into froth; but once scummed away, what appears underneath will be fit for nothing but to be thrown to the hogs. THE PREFACE OF THE AUTHOR.
오직 한 쓰레기로만 버티는 두뇌가 있다. 주인에게는 신중히 모아 놓고, 그 작은 재고를 집안일로 관리하게 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인에게는 그것을 윗사람의 매질 속에 넣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거품이 일게 되고, 그는 새로운 공급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지식이 없는 재치는 크림의 일종으로, 하룻밤에 꼭대기에 모이고, 숙련된 손에 의해 곧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쓰레기를 치우고 나면, 그 아래에 나타난 것은 돼지에게 던져지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저자의 서문(THE PREFACE OF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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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73 조너선 스위프트의 통 이야기와 마틴의 역사
도서정보 : 조너선 스위프트 | 2022-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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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이야기와 마틴의 역사(The Tale of a Tub and The History of Martin)(1704) : 스위프트는 종교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당시 영국의 현실을 풍자한 통 이야기(1704)를 출간하였습니다. 통 이야기(The Tale of a Tub)(1704)에 등장하는 3형제 ? 피터, 마틴, 잭은 각각 카톨릭, 영국 국교회, 청교도를 은유하며, 제목 ‘통(Tub)’은 바다에서 고래를 만났을 때 고래가 배와 부딪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바다에 던지는 미끼(통)를 의미합니다. 3형제는 아버지가 물려준 외투를 어떻게 수선하느냐, 단추를 다느냐, 어떤 단추를 다느냐 등 사소하다 못해 큰 의미도 없는 꺼리를 가지고 서로 안달복달하는데요,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으나, 정권에서는 ? 특히 앤 여왕(Queen Anne)은 그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결국 앤 여왕은 1713년 영국의 대성당 주교를 갈망하던 스위프트를 바다 건너 더블린 성 패트릭 대성당으로 임명해, 영국 밖으로 치워 버립니다. 당시의 사건으로 스위프트는 정권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복수 ? 펜을 들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1726)에서 궁전의 불을 끄는 공로에도 불구하고, 오줌을 싸면 사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법에 따라 사형 위기에 처하는 소인국 에피소드의 모티브는 앤 여왕과의 알력을 풍자한 것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My Lord, Though the author has written a large Dedication, yet that being addressed to a Prince whom I am never likely to have the honour of being known to; a person, besides, as far as I can observe, not at all regarded or thought on by any of our present writers; and I being wholly free from that slavery which booksellers usually lie under to the caprices of authors, I think it a wise piece of presumption to inscribe these papers to your Lordship, and to implore your Lordship’s protection of them. God and your Lordship know their faults and their merits; for as to my own particular, I am altogether a stranger to the matter; and though everybody else should be equally ignorant, I do not fear the sale of the book at all the worse upon that score. Your Lordship’s name on the front in capital letters will at any time get off one edition: neither would I desire any other help to grow an alderman than a patent for the sole privilege of dedicating to your Lordship.
나의 왕 이시여, 비록 저자가 많은 헌정서를 썼지만,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영예를 가진 왕자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내가 관찰할 수 있는 한, 우리의 현재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전혀 고려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저는 서점들이 보통 작가들의 변덕에 속아 넘어가는 노예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에, 이 서류들을 당신의 주권에 새기고 주권의 보호를 간청하는 것은 현명한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주되심은 그들의 잘못과 공로를 아십니다. 나 자신의 특별한 점에 관해서는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무지해야 하지만, 나는 그 점수에 대해 책이 더 나빠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문자로 앞면에 있는 당신의 영주의 이름은 언제든지 한 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영주에게 헌정하는 유일한 특권에 대한 특허 외에는 앨더맨을 성장시키는 데 다른 어떤 도움도 원하지 않습니다.
If by altering the title I could make the same materials serve for another dedication (as my betters have done), it would help to make up my loss; but I have made several persons dip here and there in those papers, and before they read three lines they have all assured me plainly that they cannot possibly be applied to any person besides your Lordship.
제목을 변경하여 동일한 자료를 다른 헌납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나보다 나은 사람이 한 것처럼) 손실을 만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사람을 그 서류에 여기 저기 담그게 했고 그들이 세 줄을 읽기 전에 그들은 모두 당신의 주권 외에는 아무에게도 적용할 수 없다고 분명히 나에게 확신시켰습니다.
It is true I should be very loth the bright example of your Lordship’s virtues should be lost to after-ages, both for their sake and your own; but chiefly because they will be so very necessary to adorn the history of a late reign; and that is another reason why I would forbear to make a recital of them here; because I have been told by wise men that as dedications have run for some years past, a good historian will not be apt to have recourse thither in search of characters.
나는 당신의 주님의 미덕에 대한 밝은 모범이 그들과 당신 자신을 위해 후세들에게 사라져야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로 후기 통치의 역사를 장식하는 데 매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낭독을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나는 현자들로부터 지난 몇 년 동안 헌납이 진행되었으므로 훌륭한 역사가는 인물을 찾기 위해 거기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There is one point wherein I think we dedicators would do well to change our measures; I mean, instead of running on so far upon the praise of our patron’s liberality, to spend a word or two in admiring their patience. I can put no greater compliment on your Lordship’s than by giving you so ample an occasion to exercise it at present. Though perhaps I shall not be apt to reckon much merit to your Lordship upon that score, who having been formerly used to tedious harangues, and sometimes to as little purpose, will be the readier to pardon this, especially when it is offered by one who is, with all respect and veneration, My Lord,
우리의 헌신자들이 우리의 조치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내 말은, 우리 후원자의 너그러움에 대한 칭찬에 계속 달려가는 대신 그들의 인내심에 감탄하는 데 한두 단어를 할애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현재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보다 당신의 주권에 대해 더 큰 찬사를 보낼 수 없습니다. 비록 이전에 지루한 하랑게에 익숙했고 때로는 목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 점수로 당신의 주권에 대해 많은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존경과 존경을 가지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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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74 조너선 스위프트의 스텔라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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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wift began to write the letters known as the Journal to Stella, he was forty-two years of age, and Esther Johnson twenty-nine. Perhaps the most useful introduction to the correspondence will be a brief setting forth of what is known of their friendship from Stella’s childhood, the more specially as the question has been obscured by many assertions and theories resting on a very slender basis of fact.
스위프트가 스텔라에게 저널로 알려진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고 Esther Johnson은 29세였습니다. 아마도 서신에 대한 가장 유용한 소개는 스텔라의 어린 시절부터 알려진 우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일 것입니다. 특히 사실에 근거한 많은 주장과 이론에 의해 질문이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Jonathan Swift, born in 1667 after his father’s death, was educated by his uncle Godwin, and after a not very successful career at Trinity College, Dublin, went to stay with his mother, Abigail Erick, at Leicester. Mrs. Swift feared that her son would fall in love with a girl named Betty Jones, but, as Swift told a friend, he had had experience enough “not to think of marriage till I settle my fortune in the world, which I am sure will not be in some years; and even then, I am so hard to please that I suppose I shall put it off to the other world.” Soon afterwards an opening for Swift presented itself. Sir William Temple, now living in retirement at Moor Park, near Farnham, had been, like his father, Master of the Irish Rolls, and had thus become acquainted with Swift’s uncle Godwin.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667년에 태어난 조나단 스위프트는 삼촌 고드윈에게 교육을 받았고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경력을 쌓지 못한 후 어머니 아비게일 에릭과 함께 레스터에 머물렀습니다. 스위프트 부인은 아들이 베티 존스라는 이름의 소녀와 사랑에 빠질까 봐 두려워했지만, 스위프트가 친구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세상에서 제 재산을 정리할 때까지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몇 년 안에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리고 나서도, 저는 그것을 다른 세상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곧 스위프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판햄 근처의 무어 파크에 은퇴하여 살고 있는 윌리엄 템플 경은 그의 아버지처럼 아일랜드 롤스의 마스터였고, 그래서 스위프트의 삼촌 고드윈과 알게 되었습니다.
Moreover, Lady Temple was related to Mrs. Swift, as Lord Orrery tells us. Thanks to these facts, the application to Sir William Temple was successful, and Swift went to live at Moor Park before the end of 1689. There he read to Temple, wrote for him, and kept his accounts, and growing into confidence with his employer, “was often trusted with matters of great importance.” The story?afterwards improved upon by Lord Macaulay?that Swift received only ?20 and his board, and was not allowed to sit at table with his master, is wholly untrustworthy. Within three years of their first intercourse, Temple had introduced his secretary to William the Third, and sent him to London to urge the King to consent to a bill for triennial Parliaments.
게다가, 레이디 템플은 레이디 템플과 친척 관계였습니다. 오레리 경이 말한 대로 신속합니다 이러한 사실들 덕분에, 윌리엄 템플 경에 대한 신청은 성공적이었고, 스위프트는 1689년 말 이전에 무어 공원에 살기 위해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전에게 글을 읽어주고, 글을 써주고, 그의 기록을 보관했고, 고용주에게 "종종 매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신뢰받았다"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위프트가 20파운드와 그의 이사회를 받았고, 그의 주인과 식탁에 앉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맥컬레이 경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교제로부터 3년 이내에 템플은 윌리엄 3세에게 그의 비서를 소개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에 대한 왕의 동의를 촉구하기 위해 그를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When Swift took up his residence at Moor Park he found there a little girl of eight, daughter of a merchant named Edward Johnson, who had died young. Swift says that Esther Johnson was born on March 18, 1681; in the parish register of Richmond, [0a] which shows that she was baptized on March 20, 1680?81, her name is given as Hester; but she signed her will “Esther,” the name by which she was always known. Swift says, “Her father was a younger brother of a good family in Nottinghamshire, her mother of a lower degree; and indeed she had little to boast in her birth.” Mrs. Johnson had two children, Esther and Ann, and lived at Moor Park as companion to Lady Giffard, Temple’s widowed sister. Another member of the household, afterwards to be Esther’s constant companion, was Rebecca Dingley, a relative of the Temple family. She was a year or two older than Swift.
스위프트가 무어 공원에 그의 집을 마련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에드워드 존슨이라는 상인의 딸인 여덟 살의 어린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스위프트는 에스더 존슨이 1681년 3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리치먼드의 교구 등록부에는 1680-81년 3월 20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위프트는 "그녀의 아버지는 노팅엄셔에 있는 좋은 가족의 남동생이었고, 그녀의 낮은 수준의 어머니였고, 실제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자랑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존슨 부인은 에스더와 앤이라는 두 아이를 가졌고, 템플의 미망인 여동생 기파드의 동반자로서 무어 공원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에 에스더의 영원한 동반자가 된 가족의 또 다른 구성원은 템플 가족의 친척인 레베카 딩리였습니다. 그녀는 스위프트보다 한두 살 많았습니다.
If the Journal shows us some of Swift’s less attractive qualities, it shows still more how great a store of humour, tenderness, and affection there was in him. In these letters we see his very soul; in his literary work we are seldom moved to anything but admiration of his wit and genius. Such daily outpourings could never have been written for publication, they were meant only for one who understood him perfectly; and everything that we know of Stella?her kindliness, her wit, her vivacity, her loyalty?shows that she was worthy of the confidence. INTRODUCTION.
만약 저널이 우리에게 스위프트의 덜 매력적인 자질들 중 일부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그의 안에 얼마나 유머, 부드러움, 애정이 있는 저장소가 있었는지 훨씬 더 잘 보여줍니다. 이 편지들에서 우리는 그의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문학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재치와 천재성에 대한 감탄 외에는 거의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상적 외설은 결코 출판을 위해 쓰여질 수 없었고, 그것은 그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가 스텔라에 대해 아는 모든 것 - 그녀의 친절함, 재치, 발랄함, 충성심-은 그녀가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개(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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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고전375 조너선 스위프트의 비커스태프-파트리지 페이퍼
도서정보 : 조너선 스위프트 | 2022-01-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아이작 비커스타프(Isaac Bickerstaff)(1708) : 아이작 비커스타프(Isaac Bickerstaff)란 필명으로 발표한 편지와 추도사는 당대 명성을 날리던 점성술사 존 파트리지(John Partridge)(1644~1714)를 비아냥 대기 위해 쓴 것으로, 무려 그의 죽음을 예언하였습니다!! 졸지에 손님이 아니라, 문상객을 맞이하게 된 파트리지는 이에 대한 반박문을 쓰는데, 스위프트는 그마저도 ‘죽은 사람의 글을 믿지 말라’며 비꼽니다. They were sure no man alive ever to writ such damned stuff as this.(이딴 글을 쓸 사람은 없어!) 당시의 충격으로 존 파트리지가 사망했다는 썰이 있으나, 그는 70세로 장수한 편입니다. 다만 죽기 전까지 그의 추도사에 괴로워 한 것은 분명합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I have long consider'd the gross abuse of astrology in this kingdom, and upon debating the matter with myself, I could not possibly lay the fault upon the art, but upon those gross impostors, who set up to be the artists. I know several learned men have contended that the whole is a cheat; that it is absurd and ridiculous to imagine, the stars can have any influence at all upon human actions, thoughts, or inclinations: And whoever has not bent his studies that way, may be excused for thinking so, when he sees in how wretched a manner that noble art is treated by a few mean illiterate traders between us and the stars; who import a yearly stock of nonsense, lyes, folly, and impertinence, which they offer to the world as genuine from the planets, tho' they descend from no greater a height than their own brains.
저는 이 왕국에서 점성술의 엄청난 남용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과 그 문제를 논의하면서, 저는 아마도 그 잘못을 예술에 돌리지 않고 예술가들을 꾸민 역겨운 사기꾼들에게 돌렸습니다. 저는 몇몇 학자들이 전체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상상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지만, 스타들은 인간의 행동, 생각, 성향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와 별들 사이에 있는 몇몇 문맹 무역상들이 고귀한 예술이 얼마나 비참한 취급을 받는지 알게 되면, 그렇게 생각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년 헛소리, 눈깔, 어리석음, 불손함을 수입하여, 행성으로부터 세상에 진실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뇌보다 더 높은 높이에서 말이죠.
I intend in a short time to publish a large and rational defence of this art, and therefore shall say no more in its justification at present, than that it hath been in all ages defended by many learned men, and among the rest by Socrates himself, whom I look upon as undoubtedly the wisest of uninspir'd mortals: To which if we add, that those who have condemned this art, though otherwise learned, having been such as either did not apply their studies this way, or at least did not succeed in their applications; their testimony will not be of much weight to its disadvantage, since they are liable to the common objection of condemning what they did not understand.
저는 이 예술에 대한 크고 합리적인 변호를 출판할 작정이며,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 정당성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과 소크라테스 자신이 옹호해왔던 것 이상으로요. 소크라테스 자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비록 다른 방법으로 배웠지만, 이 기술을 비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연구를 이런 식으로 적용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들의 응용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공통적인 반대를 하기 때문에, 그것의 불이익에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Nor am I at all offended, or think it an injury to the art, when I see the common dealers in it, the students in astrology, the philomaths, and the rest of that tribe, treated by wise men with the utmost scorn and contempt; but rather wonder, when I observe gentlemen in the country, rich enough to serve the nation in parliament, poring in Partridge's almanack, to find out the events of the year at home and abroad; not daring to propose a hunting-match, till Gadbury or he have fixed the weather.
또한 나는 전혀 불쾌하지 않고 예술에 대한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점성술의 학생들, 필로마트, 그리고 그 부족의 나머지를 볼 때, 최고의 경멸과 경멸을 받는 현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의회에서 봉사할 만큼 충분히 부유한 사람들을 볼 때, 궁금해집니다."올해의 국내외 사건들을 알아내기 위해 개드버리(Gadbury)나 그가 날씨를 고치기 전까지 사냥 시합을 제안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Having long observed and lamented these, and a hundred other abuses of this art, too tedious to repeat, I resolved to proceed in a new way, which I doubt not will be to the general satisfaction of the kingdom: I can this year produce but a specimen of what I design for the future; having employ'd most part of my time in adjusting and correcting the calculations I made some years past, because I would offer nothing to the world of which I am not as fully satisfied, as that I am now alive. For these two last years I have not failed in above one or two particulars, and those of no very great moment.
오랫동안 관찰하고 애통해한 나머지 이 기술의 100가지 폐단을 반복하기엔 너무 지루해서 저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왕국의 전반적인 만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올해 제가 설계한 미래를 위한 견본만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의 계산을 조정하고 수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살아 있는 세상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세상에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저는 한두 가지 이상의 사항,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I exactly foretold the miscarriage at Toulon, with all its particulars; and the loss of Admiral Shovel, tho' I was mistaken as to the day, placing that accident about thirty-six hours sooner than it happen'd; but upon reviewing my schemes, I quickly found the cause of that error. I likewise foretold the Battle of Almanza to the very day and hour, with the loss on both sides, and the consequences thereof. All which I shewed to some friends many months before they happened, that is, I gave them papers sealed up, to open at such a time, after which they were at liberty to read them; and there they found my predictions true in every article, except one or two, very minute. Predictions For The Year 1708.
저는 툴롱에서의 유산을 정확히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Savel 제독의 사망을 그날로 착각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보다 36시간이나 더 빨리 일어났죠. 하지만 제 계획을 재검토해보니, 그 오류의 원인을 금방 알아냈습니다. 저도 알만자 전투를 바로 그날, 시간까지 예언했습니다 양측의 손실과 그 결과물이요 제가 몇 달 전에 친구들에게 부탁한 모든 것들은, 즉, 제가 봉인된 종이를 그 때 열어보라고 해줬고, 그 후 그들은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예측이 모든 기사에서 들어맞았다는 것을 발견했죠. 단, 한두 분을 제외하고요. 1708년에 대한 예측(Predictions For The Year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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