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일

도서정보 : 채만식 | 2020-12-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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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까지(어제 밤 여덟시부터 꼬바기) 앉아서 쓴 것이 장수로 넉 장, 실 스물일곱 줄을 얻고 말았다.
그 사이, 노싱을 한 봉 반씩 네 차례에 도합 여섯 봉을 먹었다.
간밤에 새로 뜯어논 스무 개 들이 가가아끼 한 곽이 빈탕이 되었다.
재털이가 손을 못 대게 낭자하다. 성냥 한 곽을 아마 죄다 그었나 보다.
하루 평균 치면 네 개피나 다섯 개피가 배급 표준이라는데, 그러니 조선도 성냥 전표 제도가 생겼다가는 큰 야단이 나겠다.
원고용지를 파지를 내기 백 매짜리로 거진 한 축. 픽픽하는 갱지가 되어서 더 헤프기도 하지만, 둘러보니 완연 휴지 속에 파묻혀 있는 형용이다.
원고용지 구하기가 원고 쓰기보다 더 힘이 드는 이판에, 이대도록은 너무 심하다.
골치가 멍멍, 언 살을 만지기 같다. 딱 시장은 하면서도 혀가 깔깔하고 밥 생각은 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얻은 그 넉 장에 스물일곱 줄이나마 제대로 성할 테냐 하면, 이따가 저녁이면 십상 또 작대기를 북북 주고서 번연히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할 것.
한숨이 후유 나온다. 내가 생각을 해도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다.
써야지건 말건, 일곱시 반의 전등이 꺼질 때까지는 붙잡고 느는 게 항용이지만, 부엌에서들 우세두세 새벽밥을 짓느라고 설레는 소리가 나서 가뜩이나 정신이 헛갈려, 웬만큼 걷어치운다. 네째형이 요새로 매일같이 서울을 들러 광나루의 공사장 현장엘 통래하느라고 첫차를 타기 때문에, 늘 새벽조반을 먹어야 하던 것이다.
다섯시 반이 조금 지난 걸 보고 건넌방으로 올라갔다. 형은 불빛이 아직도 밤중인 듯 휘황한 전등 밑에서 벌써 입맛 없는 밥술을 뜨고 있었다.
얼굴이 부석부석한 게, 과로와 소화기관에 장해가 생긴 징조인 것이 분명했다. 지난해 겨울에도, 지질한 그 노심초사와 극도의 피로 끝에 필경 몸져 누워서는 삼동 내내 중병을 앓던 일이 생각히면서, 더럭 마음이 무거웠다.
“국물이 뜨듯하니 한술 놔서, 먹구 자렴?”
형은 밥상머리로 가 쪼글트리고 앉는 나를 건너다보며 권을 하다가 그이면서 문득 얼굴이 어두워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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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이

도서정보 : 채만식 | 2020-12-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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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화산…… 아우성…… 비명…… 아우성…… 돌덩이…… 돌가루……도망질…… 혼잡 혼잡…… 피피피피…… 초산 냄새…… 신음소리……말굽소리…… 구보…… 철그럭철그럭…… 처벅처벅…… 줄 내린 모자……누런 각반……
의사…… 들것…… 호외…… 수배(手配)…… 수색 수색……호외……검거…… 긴장 긴장 긴장 긴장
─ 셋?
─ 넷…… 허구 부상이 일곱.
─ 묘허지?
─ 이(? 잡듯 헌다지?
긴장 긴장 긴장 긴장……
탕 탕…… 안동 아방궁(安東阿房宮)…… 피…… 포위, 일대 사백(一對四百)…… 탕탕탕탕탕탕탕탕
……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 피피피…… 호령…… 탕…… 피……
─ 아깝다.
─ 장쾌하다.
─ 도보로?
─ 하르빈에서.

호외
××××과 ××××××의 통일제휴…… 주소 씨명 원적 직업 전연 불명…… 연령 이십사오 세…… 소지품 전무…… 시체 화장……

사 년 전.
웬만큼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이었었다. 아침부터 구죽죽하게 내리는 비는 가을날의 싸늘한 기운을 한층 더 도와 추레하고 음산한 기분이 사람의 마음을 무단히 심란하고 궁금하게 하였다.

구매가격 : 500 원

불효자식

도서정보 : 채만식 | 2020-12-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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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위에 벌여놓인 (大地) 모든 물건들을 꿰뚫을 듯이 더운 불볕이 내려쪼이는 삼복 여름 어느 오후였었다. 나는 학교에서 하학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오다가 마침 주인집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서 칠복(七福)의 어머니 최씨부인을 문득 만났다.
나는 그이를 보자 곧 ‘칠복의 소식을 듣고 올라온 것이다’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칠복의 얼굴과 그 다리를 걷어치고 앉아 아편주사를 하던 모양이며, 까치 뱃바닥 같은 흰 손이 다시 서대문 감옥의 우중충한 붉은 담과 그 안에서 누렁 옷 입고 쇠사슬 차고 노역(勞役)을 하고 있을 그의 죽어가는 듯할 형상이며-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주마등과 같이 연상하였다.
그이(칠복의 어머니)는 몇 해 전에 칠복을 찾으러 서울까지 한번 올라와본 일은 있었으나 결코 다른 무슨 볼일을 본다든지 혹은 구경을 하려고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올 그럴 팔자는 못되었었다. 그때에 내 앞에 서 있는 그이의 행색도 과연 세상의 가난과 고생은 혼자서 다 짊어지고 있는 듯이 야속하게도 초라하고 곤궁하게 보였다. 그이의 몸에 걸친 옷-땟물이나 빨아 입었는지 뚫어지고 해어지고 때묻고 땀에 녹아 몸에 칭칭 감기는 낡은 삼베치마와 적삼은 옷이라 하기는 너무도 걸레조각만도 못하였다. 희끗희끗 반백이나 된 머리털은 화투 바구리같이 부풀어 뜨고, 먼지가 소복히 앉은 버선발에는 뒤축 없는 짚신 한 짝과 다 찢어진 고무신 한 짝을 짝맞춰 끌었었다.
이 차림차리로 얼룩덜룩한 보퉁이 하나를 옆에 끼고 불붙여 지지는 듯한 칠월 노양(老陽)에 사라질 듯이 낡은 참대 지팡이를 의지하고 서서 무엇을 찾는 듯이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듯이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을 맥없이 바라보는 총기 없는 눈동자며,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이는 햇빛에 그을은 그 얼굴의 추렷이 슬픈 듯한 표정이며, 모두가 일부러 그처럼 차리고 꾸미려 하여도 할 수 없을 만큼 지긋지긋한 빈궁의 특수한 기분이 그 주위에 떠돌았었다.
누구나 깊은 느낌이 있어 옛날 박진사(朴進士: 칠복의 선친) 집의 호화롭던 부귀와 삼십 년이 채 못 간 오늘날 그 유족의 모진 영락(零落)과의 기수로운 대조(對照)를 볼 때에 성쇠의 무상함을 안타까와하는 비애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구매가격 : 500 원

맹순사

도서정보 : 채만식 | 2020-12-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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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순사가 동양의 대현이라는 맹자님과 어떤 혈통의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또 우리 나라 명재상 맹고불이 맹정승과는 제 몇대손이나 되는지, 혹은 아무것도 안되는지, 그런 것은 상고하여 보지 못하였다.

“칼자루 십 년에, 집안 여편네 유똥치마 하나 못해 준 주변에, 헐 말이 무슨 헐 말이우?”
증왕의 순사 아낙에 세 가지 특색이 있으니, 가로되 언변 좋은 것, 가로되 건방진 것, 가로되 옷 호사 잘하는 것이라고. 실로 이 계집의 허영으로 인하여, 순사들이 얼마나 더 악착히 ‘순사질’을 하였음인고. 맹순사의 아낙 서분이도 미상불 언변 좋고, 똑똑하고(즉 객관적으로 바꾸어 치면 건방지고) 하기로는 좀처럼 남에게 질 생각이 없으나, 오직 옷 호사 한가지만은 어엿이 고개를 들 자신이 와락 없었다. 천하에 순사의 아낙 되어 옷 호사를 못하다니, 유감이 깊을지매. 자못 동정스런 노릇이었다.
그러나, 서분이가 순사의 아낙으로 옷 호사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 결단코 서분이 스스로의 무능한 소치거나 과실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소위 칼자루 십년에?실상은 팔 년이었다?팔 년 순사에, 집안 여편네 유똥치마 한 벌도 해주지 못할 지경으로, 남편 맹순사란 위인이 지지리 주변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8?15 바로 후에 칼을 풀어놓았고, 그래서 시방은 순사 적이라는 것이 이미 옛말 같이 된 터이었지만, 그러니 놓친 찬스를 두고두고, 심하여는 임종하는 자리에까지 내내 미련겨워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것이 항용 아녀자의 넓지 못한 속…… 해서 오늘 아침만 하여도 하찮은 일로 시초가 되어, 쫑쫑대고 생동거리고 하던 끝에 필경은 나오는 것이 그 유똥치마의 푸념이요 주변 없음의 공박이요 하였던 것이었었다.
“거, 옷은 그대지 많이씩 장만해 무얼 하는구? 입구 벗을 꺼면 고만 아냐? 난 참, 여자들 그러는 속 모르겠드라.”
부드럽고 조용한 말씨다. 이와 정반대로 서분이의 음성은 높고 가시같다.
“입구 벗을 옷이 어딨어? 날 언제 옷 해줬길래, 옷 많이씩이냐는 건구?”
“아니, 해필 임자가 옷이 많다는 게 아니라, 보통 여자들이 말야,”
“넉살두 좋으이. 날 같으믄 입이 꽝우리 구멍이래두 헐 말 없겠네. 바보, 빈충이, 천치.”
“못난 남편 싫여?”

구매가격 : 500 원

처자

도서정보 : 채만식 | 2020-12-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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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강변으로 장작이든 무얼 좀 살까 하고 나갔다가 허행을 하였다.
강에는 많은 뗏목이 내려와 밀렸고, 일변 뜯어 올려다 쌓고 하였다. 강언덕은 온통 뗏목 뜯어 쌓은 걸로 묻히다시피 하였다.
장작도 마침 큰 배로 두 배나 들어와서 한편으로 푸면서, 한편으로 달구지에다 바리바리 실으면서 하고 있었다.
뱃장작을 도거리로 산 당자인 듯, 자가사리수염에 마고자짜리가 이럭저럭 분주히 납뛰고 있어
“장작 좀 살 수 있을까요?”
하였더니, 선뜻
“네, 몇 차나 쓰시렵쇼?”
하면서 굽실한다.
시재라야 이십 원밖에 없었다. 그중 십 원은 가용을 써야 하고, 십 원으로 장작이면 한 오십 관, 솔가지 같으면 한 삼십 단 살 요량이었는데, 더럭 몇 ‘차’냔 소리에 그만 오갈이 들어, 오십 관 말은 차마 못 내고 “한, 백 관만……”
하기를, 그나마도 무서무서히 하였다.
“배액 관입쇼?”
자가사리수염은 아니나다를까, 잔뜩 그렇게 시뻐하면서, 이 근친스런 나그네를 위아래로 한 번 씻어보더니
“그런 장거린 드릴 수 없음다……”
하는, 말보다 먼저 저리로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다. 공으로 나무를 얻으러왔다가 거절이나 당한 것처럼, 얼굴이 화틋 달고 무렴하였다.
뗏목은, 뜯어쌓은 지가 오랜 걸로, 잘 말라서, 켜가지고 빠개기만 하면 곧 땜즉한 것도 무더기 무더기 많이 쌓여있었으나, 장작을 백 관 따위는 잔거리라서 팔지 않는다는데, 황차 뗏목이리요. 물어보기조차 부질없는 노릇, 이내 발길을 돌이키고 말았다. - 그러고서 돌아와 하릴없이, 헌 궤짝을 쭈그리고 않아 부서뜨리고 있자니, 심사 자못 울적치 아니치 못하였다.
이사할 때 잔 세간을 넣어가지고 온 희연 궤짝 두개다. 두 개를 죄다 부서뜨렸자 하루 뗄 나무가 될까말까한 것이 소리만 동네가 떠나가게 요란타.

구매가격 : 500 원

토우의 집(개정판)

도서정보 : 권여선 | 2020-12-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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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토우의 집은 깜깜한 무덤

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
제18회 동리문학상 수상작품

『토우의 집』은 권여선 소설가가 이룬 가장 의미 있는 문학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장독 뒤에 숨어서’라는 제목으로 계간 『자음과모음』을 통해 2014년 봄부터 가을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우리가 정면으로 응시해야 할 고통과 상실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토우의 집』의 주 배경은 큰 길 곁으로 골목마다 채국채국 집을 지어 머리를 치켜든 다족류 벌레처럼 보이는 삼벌레고개이다. 소설은 ‘어린아이들의 눈을 통해’ 이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펼쳐낸다. 주인공 ‘안 원’에게는 언니 ‘영’과 동생 ‘희’가 있다. 이 세 자매는 주인집에 세들어 살고 있으며, 주인집 아들 ‘은철’과 마을의 비밀을 조사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원이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남긴 채, 세 아이들의 이름처럼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인혁당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은 ‘토우가 되어 묻힌’ 사람들의 자리, ‘토우의 집’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공간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그것을 상실하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들이 겪는 상처에는 무한한 사과와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집필 동기가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삼벌레고개 어린 스파이들의 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이다.

구매가격 : 9,500 원

건청궁일기

도서정보 : 박영규 | 2020-12-1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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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아집 속에 가려진 인물 명성황후를 되살려내다!

거칠고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
여인으로, 아내로, 어미로, 왕비로, 권력자로 본 명성황후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300만 베스트셀러 박영규 작가의 회심작!

“그날 밤 건청궁 뜨락에서 살해된 여인은 정말 조선의 왕비였을까? (…)
여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책을 품에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죽는 순간에도 이렇듯 소중하게 품고 있었을까.”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대중역사가 박영규의 장편 역사소설. 기획부터 탈고까지 무려 8년의 시간이 걸린 이 책은, 명성황후를 화자로 하여 어지럽고 위태로웠던 조선 사회와 세계 열강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한 나라의 국모로서 자신의 인생을 편견의 눈으로 풀어낸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력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치밀하다. 암울하고 위태롭던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 급박하게 돌아갔던 궁궐 안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읽는 재미와 함께 역사에 대한 지적 흥미를 자극한다.
작가는 일인칭 시점으로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리며 그의 삶을 대변한다. 명성황후에 고착되어 있는 편견을 흔들어놓음으로써 명성황후를 거칠고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으로, 여인으로, 아내로, 어미로, 왕비로, 권력자로 다각화하여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왕비는 그저 아내로, 어미로, 며느리로 살 수 없는 자리였다.
중궁의 자리는 그저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였고
주변의 모든 물건이 나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이었다.
그들의 걸음 하나, 말 한 마디, 눈짓 하나가 모두 비수였다.
그들은 아무도 그저 웃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우는 사람도 없었다.
먹고, 자고, 숨쉬고, 기침하는 모든 것에 의도가 숨어 있었다.
궁궐은 단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 되는 전쟁터였다.”

구매가격 : 9,800 원

홍윤성과 절부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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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에는 신숙주(申叔舟).
무(武)에는 홍윤성(洪允成).
이렇듯 그 영명을 당시에 번뜩이던 세조조(世祖朝)의 명신 수옹(守翁) 홍윤성이 과거에 응시코자 도보(徒步)로 그 고향 회인(懷仁 )을 떠난 것은 경 태삼년(景泰三年) 임신(壬申) 호서(湖西)일대에도 봄소식 무르익는 삼월 하 순이었다.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가난한 그 숙부집에 붙쳐 있으며 밭갈기 논매기 심지어는 그 숫한 식구가 때야 할 나무까지 해 대느라고 밤낮을 주접 속에 묻혀 지나던 그였으나 그동안에도 잠시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벼슬자리를 얻어 사람 구실을 해보자.』
하는 간절한 뜻이었다.
더욱이 기운이 장사라 열세 살 때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산돼지를 맨주먹으로 잡은 일이 있으매 스스로 자기 기운에 대하여 자만하는 마음이 있던 그 는 이때부터 어린 마음에라도 더욱 굳게 뜻을 세우고 서울편을 향하여 희망에 타는 눈살을 부라리었다. 그러나 동리사람 사이에서 받는바 평판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너무 자기 힘을 믿는 만큼 자연 횡폭한 행동 이 잦은 까닭이오. 또 한 가지는 영웅호색이라니 그처럼 용맹한 성미의 사람이라 마음까지 호방해지어서 드디어 마을의 처녀나 유부녀를 막론하고 심상히 보아 넘기는 일이 없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숙부되는 사람이 원체 착하고 어진, 요사이 말하자면 동리의 신망가(信望家)였기 때문에 아무도 맞대해서는 무어라 탓하는 일이 없었지만 돌아서면 곧
『천하잡놈 윤성이.』
『그놈 끝까지 그 성미로 망신하리.』
하고 저주하였다.
따라서 이번 윤성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수중에 한푼 없으면서 감히 서울을 향하여 떠날 뜻을 낸 것도 첫째로는 물론 항상 그리던 청춘의 꿈을 어떻게라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소원이었겠지만 둘째로는 역시 마을 어떤 유부녀를 후려내려다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다시 동리에 붙어 있을 면목이 없을 만큼 사태가 난망해진 까닭이었다.

구매가격 : 500 원

후백제비화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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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경문왕 말년.
곳은 상주 가은현(尙州 加恩縣)의 어느 한적한 촌락이다.
그 촌락을 뒤로 장식하고 있는 작다란 언덕에 드문드문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 틈틈이로는 이끼 낀 바위가 비죽이 보이고 있다.
그 어떤 바위에 한 농군(農軍)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농군의 곁에는 그의 아들인 듯한 열아믄살쯤 난 소년이 앉아 있다.
『그래서요.』
지금껏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중도에 끊었던지 소년은 자기의 아버지를 향하여 이야기의 뒤를 채근한다. 이 채근을 받은 아버지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다시 말을 꺼내인다.
『그래서 말이로다.』

그래서 신라는 우리 백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구나. 너무도 백제가 강하고 그 위에 연방 신라 각 고을이며 성을 빼앗으니까 잔뜩 백제에게 원한을 품었구나.
그렇지만 신라는 우리 백제보다 힘이 약하니까 아무리 원한을 품었지만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원수를 갑자기 원수를 갚을 만한 힘이 있어야지. 그래서 속이 끓는 것을 그냥 참았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우리나라 임금이 되시는 의자왕(義慈王)께서는 ─.
이러한 실머리로써 그 농군이 자기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백제 망국의 이야기였다.
백제의 최후의 임금인 의자왕이 차차 나라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만 잠기기 때문에 한때 강성하였던 백제가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라에서는 백제에 대한 옛날 원한을 풀기 위하여 극력으로 양병을 하고 또한 당나라에 빌붙기까지 하여 당나라의 세력까지 매수하였다.
이리하여 의자왕의 난정 때문에 백제는 나날이 약하여지고 신라는 그 반대로 차차 강하게 되어 나당(羅唐)연합군의 백제 정벌이 벌어지게 되고 백제라는 七[칠]백년 사직은 나당 연합군에 깨어져 나가고, 백제의 수천 궁녀는 낙화암에서 강으로 떨어져 죽고 의지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잡혀서 당나라 서울로 가서 거기서 외로운 최후를 보았다는 백제 망국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구매가격 : 500 원

집념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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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향 평양의 봄은 유자의 심사를 어질게 하매 넉넉하거니와 봄이 지나 여름이 되었다고 이 평양은 버릴 수는 더욱 없다.
보라, 기자능의 욱은 유록과 능라도의 가랑버들, 월하의 화방이며, 만일 한발 더 나아가서 모란봉 저편 강변에 꽃 같은 젊은 여자의 빨래하는 무리들이 흥에 겨워 부르는 요요한 노래를 들으며는 그것은 납량객들의 몽매 간에도 잊지 못할 명승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무심히 흘러 가는 대동강 물에 발을 잠그고 버들 그늘에 누워 얼굴에 실바람을 들일진댄 무력에 젖은 창자도 바야흐로 씻기어 내릴 향락의 하나일 것이니 대자연의 거룩한 조화를 맛보는 자는 봄보다도 오히려 평양의 여름을 탐낼 것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 즉위 사년 유월 열나흘날 저녁이었다.
만월에 가까운 둥근 달이 중천에 높이 솟아 있어 대동강변 일대와 청루벽 부근 일대에는 월광을 그리어 나온 사람 시원한 바람을 쏘이러 나온 사람으로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지 아니한데 강물을 흘러내려오는 유선 중에 가장 큰 배 한 척에는 오색빛 초롱 불이 월광과 빛을 다투어 있고 풍류소리 유랑한 가운데에 아릿다운 기생들의 부르는 노래소리 바람에 실리어 강 언덕 납량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저 누구의 노릿 밴지 돈 냥이나 없애네그려.』
하는 자도 있고
『여보게 오늘 밤 같이 달 밝은 밤에는 미상불 한잔 먹고 놀아야지 우리같이 빼빼 말라서야 달님이 욕하시겠네.』
하고 부러워하는 자도 있다.
『관가 노린가 보네.』
『이 사람 누구 노린 줄도 모르고 있나.』
『알 턱이 있나 빌어먹을 팔자가 왼 종일 탕건깨나 뜨는 녀석이 저게 뉘밴지 알 재주 있나. 자네 같이 발이나 재고 이목이 빨면 모르거니와.』
『기생이 한턱 내는 거라네.』
『어느 놈 삿갓을 씨우고 말이지.』
『아니.』
『그럼 무슨 턱.』
『두옥이란 기생이 있지 않은가, 행수 기생이지.』
『그래.』
『그 기생이 이번 도임한 김 감사한테 수청을 들게 돼서 제 출물로 동무들에게 한 턱을 내는 거라네.』
『아따 자넨 참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들어 오나 아마도 자네 그 두옥이 속에서 나왔나 보이.』
『옛기 ─ 미친녀석.』
납량객들은 이렇게 농담 짓거리를 하며 웃고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노릿배는 기생 두옥이가 주인이었다.

구매가격 : 5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