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췌연화편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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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이날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에 싸이셨다.
넓은 침전 화려한 침구 잠자리가 편찮음도 아니다. 짧은 여름의 밤이니 물론 지루하실 리도 없었다. 바로 곁에는 오늘 한 밤 특히 왕을 모시게 된 명예의 미희가 아름다운 쌍겹눈을 반쯤 내려 감고 왕의 입에서 어떤 분부가 내리기만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벌써 몇 달을 두고두고 이렇듯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왕에게는 즐거운 침실도 아름다운 시비도 모두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면 왕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는 것일가?
원 나라에 남겨 두고 오신 정인!
왕이 석달 전 귀국하시기까지 원 나라에 계시는 오랜 동안에 그렇듯 서로 아끼고 사모하던 그 여인을 못 잊어 하심이었다.
고려로 돌아오시던 그 전야, 원나라 궁성 고전(高殿) 뒤꼍에서 떨어지는 달그림자를 바라보며 이별을 설어하던 그 날 밤은 삼월달이었지만 북국의 밤바람은 퍽 쌀쌀하였다.
『어디든지 따라 가겠나이다.』
하며 왕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울던 애인을 생각하자, 왕은 이미 고려 궁실 지존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더욱 잠을 못 이루시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데리고 올걸!』
하고 왕은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반쯤 눈을 감고 어슴푸레 가수상태(假睡狀態)에 잠겼던 미희가 놀라 일어나 머리를 읍하였다.
『염려 말고 저리로 누워 자라.』
왕은 부드럽게 한편 자리를 가리키고는 드륵 창을 열어 젖히었다.
보름 지난 달은 파란 빛을 왕의 얼굴과 몸에 던지며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져갔다.
『허 그날도 달은 밝았지!』
왕의 머리 속에는 또 그리운 추억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잇대어 퍼져갔다. 백 번 천 번 하여도 또 잊을 수 없는 회상의 가지가지, 왕은 달을 쳐다보며 한숨만 지었다.
『자기도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것을 데리고 올걸.』
왕은 다시 한 번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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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전기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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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표사(奉表使)의 일행은 오늘도 조선 나라 이(里)수로 해서는 오십리 길 밖에는 더 가지 못하였다.
날이 워낙 폭양인데다가 바람이 모래를 날리어 일행은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 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맞닿은 듯한 평원광야에 유록이란 간혹 있을 뿐 눈에 보인다는 것은 오직 누르고 붉은 흙빛과 모래뿐이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단조한 길에 일행은 멀미가 났다.
호지에 무화초(胡地無花草)하니 춘래 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글귀는 독히 왕소군의 슬픔뿐이 아니었다.
봉표사의 말고삐를 잡는 김의동(金義童)이도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은근히 후회를 마지않았다.
『그냥 신대감(愼大監) 댁에 고생이 돼두 있을 것을, 제에기 이놈의 고생이 무슨 놈의 고생이야. 대국 들어가면 참 별유천지 비인간이라더니, 별유천지가 아닌 건 아니라두 사람 죽일 별유천지로구나.』
김의동은 본시 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집 노복으로 있다가 열아홉 먹던 해에 대문 밖에서 고누를 두다가 주인 대감의 행차가 환택하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는 죄로 물볼기를 맞고 나니,
『빌어먹을 놈의 것 이집에 밖에 햇볕이 들지 않더냐.』
하고 주인집을 도망해 나와 가지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필경은 역마의 마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재간이 있는 위인이라, 마부가 된지 얼마 아니 돼서 마부로서는 더 없는 마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 중원으로 봉표사 사신이 타고 가는 말의 마부로 뽑힌 것이었다. 의동이는 원일견지하던 대국 구경을 하게 되었다고 춤을 덩실덩실 추다시피 기뻐하며 길을 떠났다. 과연 그의 기쁨은 맞아, 옛 서울 개성이며, 산천도 곱거니와 인물 고은 평양이며, 의주(義州)와 통군정(統軍亭)에 묵은 여진(旅塵)을 떨고서 한번 압록강을 건너서고 보니 듣던 말과는 판이하여 무미하고 삭막한 벌판뿐이었다. 홍진은 용서 없이 일어부처 아침에 갈아입은 옷이 저녁때면 간장에 담갔다가 쥐어짜 입은 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이 중원이야, 빌어먹을 중원이야.』
하고 투덜대기를 몇 번이나 해 왔다.
오늘도 하도 기가 막혀서 중얼거리는 것을 봉표사가 귓결에 듣고,
『너 무얼 아까부터 혼자 중얼대느냐?』
하고 파적겸하여 물었다.
『아뢰기는 황송하오나, 길을 떠나기 전에는 대국이라면 굉장한 줄 여기고 좋아했더니 들어와 보니 어디 사람이 살만한 곳이오니까, 그래서 씨부린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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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방기현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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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온지 다섯달, 상동(尙童)은 인제 겨우 서울 길 골목 골목을 대충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행길에 나가서 제기도 차고 택견도 하고 동네 양반의 댁 수청방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제법 둘만큼 되었다.
충청도에서 처음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거치장스런 머리꽁뎅이를 수건삼아 머리에 틀어얹고 숭례문을 들어선 때는 나이도 열네살에 어린 총각이었지마는 처음보는 서울에 얼이 빠지고 겁이 나서, 회동(會同) 정한림(鄭翰林)의 상노로 들어 간 후로는 상전의 심부름이 아니고는 큰 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어리배기었다.
이름 좋은 한 울타리로 명색은 상노지마는 상전의 요강망태기를 들고 보교 뒤를 따라가는 구실도 못하였다. 그래서 안으로 사랑으로 드나들며 군불 때기나 하고 물이나 길어대는 불목한이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년이 지나 열다섯 살이 되고 보니 어제 올챙이가 오늘 개구리란 셈으로 어느 결에 서울물에 젖어서 탈골치 메투리도 제법 엎어 신을 줄도 알게 되고 가마채를 붙들고 한 손으로 바람을 차고 가는 남의 집 계집애 종의 맵시 평도 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한 가지 여느 상노들과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을 제법 아는 점이었다.
상동이는 시골서 홀어머니의 덕으로 글방에를 다녔다 가난하게 지나기는 했어도 뼈가 상언이 아니어서 글방에 다녀도 비실거릴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정신이 일남촉기라서 한번 배운 글은 다시 공부를 아니해도 이튿날 강에는 막혀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면 언제든지 관주 투성이었다.
천자, 동몽선습, 소학, 맹자, 그리고 통감 이렇게 다 떼고 논어를 읽기 시작할 때 집안의 형편은 상동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누구라 있지 말라는 것은 아니로되 어머니는 어린 상동이를 앞에 앉히고
『너를 슬하에 두고 키우자고 하였더니 집안의 형편이 말이 못되서 어머니는 창피하지마는 남의 집 침모라도 들어갈 터이니 너는 서울 가서 어떻게 굴든지 출세를 해 보아라.』
하고 눈물 섞인 훈유를 하였다.
『어머니 왜 집안이 이렇게 되었소?』
하고 묻는 말에 어머니는 쾌한 대답을 아니 해주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의 말을 들건대 모자가 연명해 오던 땅을 외삼촌 되는 이가 속여 팔아 가지고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의 수입으로 지내오던 집안이 별안간 몰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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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낙랑공주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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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었던 봄빛도 차차 사라지고 꽃 아래서 돋아나는 푸르른 새 움이 온 벌을 장식하는 첫 여름이었다.
옥저(沃沮)땅 넓은 벌에도 첫 여름의 빛은 완연히 이르렀다. 날아드는 나비, 노래하는 벌레……
── 만물은 장차 오려는 성하(盛夏)를 맞기에 분주하였다.
이 벌판 곱게 돋은 잔디 밭에 한 소년이 딩굴고 있다. 그 옷 차림으로 보든지 또는 얼굴 모양으로 보든지 고귀한 집 도령이 분명한데 한 사람의 하인도 데리지 않고 홀로히 이 벌판에서 딩굴고 있다.
일없는 한가한 시간을 벌판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보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때때로 벌떡 일어나서는 동편쪽 행길을 멀리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가는 다시 누워 딩굴고 하는 품이 동쪽 행길에 장차 나타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기를 한나절, 첫 여름의 긴 해도 좀 서쪽으로 기운 듯한 때에 이 소년은 또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비로소 빙긋 웃었다. 그리고 빨리 일어나서 좀 이편 쪽에 있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거기는 이 소년의 승마(乘馬)인 듯한 수안장의 백마가 한 마리 소년을 가다리고 있었다.
이 소년이 들풀에 몸을 숨기자 저편 행길에서는 완연히 인마의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차차 커지면서 행길에는 한 행차가 나타났다.
낙랑(樂浪) 추장 최리(崔理)란 노부였다. 문무대신의 시위를 받으며 최리의 수레가 지금 대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잠시 그 수레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동안 소년의 얼굴에는 차차 긴장미가 돌았다. 소년은 문득 허리를 굽혀서 한개 돌맹이를 집었다. 다음 순간 그 돌맹이는 소리를 내며 날았다 소년의 겨냥은 틀리지 않았다. 소년의 손을 떠난 돌은 낙랑 추장 최리의 수레를 끌던 말의 뒷다리에 가 맞았다.
다리에 날쌘 돌을 맞은 말은 한번 껑충 뛰었다가 전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장의 권력으로 구하여 들였던 명마가 힘을 다하여 달아나는지라 그 속력은 놀라웠다. 이 의외의 사변에 시위하였던 문무대신들이 놀라서 추장의 수레를 붙들고자 뒤를 따랐으나 그들의 말이 수레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옥저 넓은 벌 동쪽 끝에서 돌을 맞은 말은 그 넓은 벌을 무방향하여 막 달아났다. 수레 위의 최리는 비명을 올리며 구원을 청했으나 각 일각 대신들의 말과의 거리는 더 멀어갈 뿐이었다.
소년은 잠시 미소하면서 이 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최리의 수레가 꽤 멀리 간 뒤에야 비로소 거기에 매어 두었던 자기 말의 고삐를 풀고 말등에 올라 앉았다.
『백룡(白龍)아 어디 네 발을 시험해 볼가?』
말등에 올라앉아서 갈기를 한번 두들기고 소년은 숲에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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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도서정보 : 이승우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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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작가인생 40년, 그 시간 속 궁극적 물음들
이승우 「창세기」 모티프 연작소설집

사십 년 가까운 작가인생을 갈망 너머의 구원에 대한 천착으로 채우며 독보적인 성취를 거두어온 소설가 이승우. 그는 ‘관념의 토르소’(김윤식),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르 클레지오), ‘조용하고 진지한 영혼에서 분출된, 감동적이면서 묵직한 소설’(르몽드), ‘갈리마르 폴리오 시리즈에 오른 최초의 한국소설’ 등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수식과 상찬이 전혀 과한 것이 아님을 소설로 인생에 복무함으로써 증명해가고 있다. 한국소설로는 흔치 않은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통찰로 ‘생의 이면’을 파고든 그가 신작 소설집에서 「창세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궁극적 물음들을 마주 세운다. ‘신’이 아니라 ‘인간’의 텍스트로 「창세기」를 다시 읽고 다시 쓴 밀도 높은 작업, 그 가운데 키워드가 되어준 단어 ‘사랑’, 그러므로 이 책은 이승우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이 총동원되었다 할 수 있겠다. 열한번째 소설집이자 첫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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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색깔

도서정보 : 꿈꾸는 담쟁이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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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색깔은 조대여고 책쓰기 동아리 ‘꿈꾸는 담쟁이’ 8명의 학생들이
10대 고등학생 소녀들의 일상과 상념을 담은 감성 넘치는 글모음집입니다.

구매가격 : 0 원

들메

도서정보 : 이무영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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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 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 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집 벽장 속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맨주먹으로라도 떠날 작정이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오십전 한 푼을 주시면서,
“음성 가서 며칠 있다가 오너라. 끼니 거르지 말구 떡을 사먹는지 밥을 사먹든지 해.”
이렇게 일러주신다. 아버지 성미를 아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겁이 나시는 눈치시었다. 처음 만져보는 닷 냥짜리다. 그때는 어린 생각에는 이 닷 냥만 가지면 조선땅이라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내게는 큰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해 설날 양직 분홍 두루마기를 새로 해입었었다. 양직이 우리 시골에 처음으로 들어왔었다. 값이 비싸서 아무도 엄두도 못 내는데 어머니가 막내아들이라고 끊어주셨던 것이다. 그것을 입고 이화(모표)없는 마래기(모자)를 쓰고 나선 것이다.
집에서 이천까지는 백사십리나 된다. 장원까지는 지름길을 왔으니까 백이십리 폭이지만 열세 살 난 소년한테는 벅찬 길이었다. 그래도 그날로 이천까지 왔었다. 두 끼 먹고 하루 숙박에 한 냥(십전)이었다. 음성 외가댁에 가서 며칠 묵은 일은 있었지만, 집을 떠나서 객지에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저녁을 먹고 앉았으려니까 설움이 복받친다.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말았었다. 울다가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니 먼동이 튼다. 나는 아침도 안 먹고 또 길을 떠났었다. 보행 객줏집 할머니가 신통하다고 하시면서 닷 돈(5전)을 되거슬러 주신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백오십리였다. 경안까지 겨우 와서 자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니 왕십리다. 서울에는 같이 졸업한 화석이가 먼저 와서 있었다. 화석이는 용산에 고모님이 계시기도 했지만, 집안도 넉넉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고학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실은 이 화석이 때문이었다. 화석이한테 지기가 싫었다. 화석이가 일번 내가 이번으로 졸업은 했지만 사뭇 일번을 번갈아 다투던 화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석이는 반가워했다. 보름턱이나 먼저 올라온 화석이는 전차도 탈 줄 알았고, 학교도 혼자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얘, 저 육중한 것이 어떻게 저렇게 좁다란 쇠길 위로 달리면서도 쓰러지지를 않는다지?”
하고 내가 희한해했을 때도 화석이는,
“에이, 밥통, 그게 왜 쓰러져! 안 쓰러져.”
기실 저도 똑똑히는 모르는 눈치였는데도 이렇게 핀잔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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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도서정보 : 이무영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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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사망 따위의 허섭쓰레기나마 여남은 장을 써야만 그날 하루의 생활이 유지되는 셈인데 세시가 지나도록 개미새끼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쥐꼬리만하다는 겨울 해가 세시를 지났으니 장도 파장이 다 되어갈 무렵이다.
“빌어먹을 자식들… 밥 처먹군 뭘하길래 애새끼들두 못 맨드누… 뭬 또 그리 재미가 깨 쏟아지듯 한다구 다 뒈질 생각은 않으며…”
헌 신문지쪽에다 사법 대서 김달영이란 똑같은 글자를 몇 십 몇 백으로 쓰고만 있노라니 부아가 슬며시 돋는다. 무슨 날에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 황차 오늘은 장날이 아니냐. 그것도 명색이 읍으로 승격을 한 첫 장이란 게 이 꼬락서니다.
“읍 ─ 경을 치래라!”
붓장난하던 연필로 신문지를 벅 그어대니 찍 찢어진다. 지금 심사 같아서는 뭣이고 눈에 뜨이는 대로 모조리 바수어대고 싶다. 책상이고 서류궤고 사진들, 꽃병 ─ 아니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서 한길에 개구리처럼 태기를 치고 싶어진다. 울화 치미는 대로 하면 문 첩첩이 닫아치우고 어디 가서 술이나 고주망태가 되게 들부어대고, 심사 틀린 놈들하고 염병을 한번 부렸으면 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으나 권세와 세도가 한꺼번에 뚝 떨어졌고 보니 어느 시러베아들놈이 자기한테 술턱을 낼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 돈 들여서 술을 먹기도 싫다. 홧김에 서방질두 한다는데 뭐 번듯이 자빠져서 이런 생각을 하고 주머니 속 돈과 자기 주량을 견주어보기도 하다가는 성난다고 돌부리를 차면 나만 앵하지 하고 고개를 흔들어댄다.
“더러운 놈의 자식!”
터질 구멍을 찾지 못한 울분은 또 딴 데로 튄다.
“주었던 것 도로 달라면 똥구멍에 종기 난다는데 그 자식 나이 사십이 다된 자식이 한번 준 것을 도로 내래? 더러운 자식 같으니. 줄 땐 무슨 맘이구 이제 와 또 도루 달라는 건 다 뭐야.”
왜정 때 순사를 다니던 강창복의 말이다.
“세상인심이 다 그렇다군 하지만서두 사내자식이 체통이 있어야잖아? 그놈이나 고년이나…”
울분은 또 딴데로 튄다. 놈이란 강창복이지만 년이란 것도 강가와 좋아지내는 삼일병원 간호부 조경애다.
“쥐길 년놈들! 년놈들끼리 또 뭬라구들 했기에 그 자식이 사람을 보냈겠지!”
온종일 출생신고 한 장 못 쓰고 있는 판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양곡조합 사환아이가 강창복이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해방 직후 순사도 그만두고 해서 쓸모도 없고 하니 가지라고 제 손으로 갖다준 가죽장화를 도로 보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제 것도 아니고 사법주임으로 있던 일인 경부보가 주고 간 것이라고 하며 자기한테는 인제 개발에 편자나 진배없다고 떠맡기듯 한 것인데 도로 내란 것은 도시 말이 되지 않는다. 인제 언제 한번 신어볼지도 모르는 ─ 아니 어쩌면 영영 그런 것을 신고 뽐낼 계제가 다시 와볼 것 같지도 않은 가죽장화니 자기야말로 인제 정말 개발에 편자 격인지라 아까운 생각은 손톱 반푼어치도 없지마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하는 강가의 소행머리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지금 어디 처박혔는지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그 강가놈한테 또 한번 진 것 같아서 도시 비위가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다. 그 자식이 가죽장화 하날 무슨 큰 보물인 줄 알구서 안 내놓지 ─ 이렇게 놈과 년이 주고받을 생각을 하면 더욱 역심이 난다.
“더러운 놈의 세상 또 한번 뒤집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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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촌기

도서정보 : 이무영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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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일
아침 여섯시에 기상. 제법 산산하다. 일어나는 길로 우물로 가다. 우물을 친 지가 여러 날 되어서 파란 이끼가 서리어 있다.
얀정없이 샛노란 감나무잎이 두 잎새 물 위에 동동. 헤식은 밤나무 단풍 한 잎이 저도 단풍이로라 감나무잎 사이로 매식매식 돌아다닌다.
우물 둥천 이맛돌에 놓인 바가지 조각으로 물을 휘휘 저어 한 모금 마시다. 잔입이라 그런지 물맛이 곧 달다. 되거퍼 한 모금. 웬일인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고추밭머리를 돌아서 방울방울 열린 이슬을 차고 골짜기를 건너막은 밤나무 다리를 건너 산기슭에 오르다. 안개낀 때처럼 목안이 칼칼하다.
동산에 오르니 펀한 들. 모닥모닥 한줌씩 집어다 놓은 것 같은 조그만 산들이 잔솔을 덮고 요기도 하나, 조기도 하나. 으레 그 산밑에는 초가가 네다섯 집. 어쩌다 많은 곳이라야 여남은 채. 그러나 한 집, 두 집, 산당처럼 선 곳도 또한 여러 군데다.
산 아래 뫼. 뫼 앞에 농가. 농가 둘레로는 빠알갛게 불붙는 감나무가 그 이글이글한 횃불을 아직 이슬에 촉촉히 젖은 대공을 향하여 쏘고 있다. 나직한 산기슭에 불덩이 같은 단풍인가…
삐―ㄱ!
기다란 흰 연기가 널따란 들판을 가로지른다. 여섯시 봉천행인가. 누이가 나간 지 십오분. 오늘은 지각이 아닐까?
스스로 창안한 아침 체조를 한 십분. 하얀 사기 대야에 세숫물을 찰찰 넘게 떠놓고, 언제 보아도 고운 감나무잎에 소금을 한줌 갖다놓고, 세숫물 속에 얼른거리는 야윈 얼굴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려니, 우물터 위 동산 망주석에 까치 한 마리가‘깍깍깍’손을 부른다. 전하는 말에, 까치는 손이 옴을 알린다고―누가 이 산속을 찾아오려나?… 아무라도 좋으니 오기만 한다면… 소식 채갱이나마 다정히 마주앉아 하루를 즐기련만…
오후에 고개 너머 서 군이 찾아오다. 이십대 청년에게 장죽이 격에 안 맞는다. 그런 말을 하니 서 군은 오직 웃을 뿐.
“허허, 모르는 소리니, 짚단을 깔고 앉아서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뻑뻑 빠는 맛이야 말로 신선 부럽지 않으니…”
모를러라.―된 현실 앞에 눈을 감음이 그 신선이 될지…
서, 흡, 나― 이렇게 셋이 수수밭과 콩밭 샛길을 타고 산기슭에 허리를 폈다. 우물 오른편 쪽 동백나무와 대추나무 사이로 쑥 들여다보이는 도독하고도 편편한 지점을 장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자네도 여기다 집이나 한 칸 세우게.”
하고 서가 권하는 말이다. 조그마한 여유가 있대도 초가삼간라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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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과 도승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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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실정과 횡포로 민심(民心)을 잃고 있던 광해조(光海朝)에 있어서는 어른 아이 할것없이 기가 죽고 풀이 삭아 이르는 곳마다 침체한 기운이 음산하게 떠도는데 저평(砥平)읍 백아곡(白?谷)에 있는 이식(李植)의 집 넓은 바깥 마당에는 여덟살로부터 열아믄 살 쯤 되어 보이는 울망졸망한 아이들의 한떼가 싸움장난에 열중하고 있다.
돌을 모아다 성을 쌓고 홍백군으로 갈리인 두패가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나무 막대기로 된 칼들을 휘두르며 와 ─ 몰려 갔다가 또다시 우 ─ 몰려오고 어린 목이 찢어져라고 고함들을 지르며 놀이하는 모양은 비록 어린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입에 침을 삼키게 해주었다.
이때 얼굴이 맑고 눈이 영특한 한 소년이 옆에 책을 끼고 들어오다가 아이들의 왁자하고 떠드는 것을 보자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그냥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럼 이 소년은 누구인가. 곧 이 집의 어린 주인 이식(李植) 그 사람이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남의 집 마당에다 돌을 쌓고 금을 긋고 한 것이 어린 것들의 마음에도 미안하였던지 장난하던 아이들은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흘글흘금 식이를 쳐다보며 흥이 깨어진 모양인데 그 중에도 똑똑해 보이는 한 아이가 앞으로 나서며
『이얘 너도 용문산(龍門山) 스님에게 글 배우러 갔었나 보구나』
하고 아첨하듯 웃었다. 식이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어 긍정하는 뜻을 표하니 그 아이는 역시 웃으며
『너도 책 두고 나온. 우리 하고 놀자.』
한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참 재미있단다.』
『그래 여간 기쁘지 않아 얘』
『얼는 나온!』
하며 충동을 하나 식이는 낯을 붉히며 고개를 흔드니, 그것은 그가 비겁하거나 그 같은 놀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몸이 약질이라 아이들 틈에 섞이어 놀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과연 그의 얼굴은 맑고 준수하기는 하난 소년다운 혈색이 없이 오직 창백할 뿐이오, 손팔 역시 피부 속을 달리는 정맥(靜脈)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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