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를 때리고
도서정보 : 김남천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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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南洙)의 입에서는 '이년' 소리가 나왔다.
자정 가까운 밤에 부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날 밤 열한시가 넘어 준호(俊鎬)와 헤어져서 이상한 흥분에 몸이 뜬 채 집에 와보니 이튿날에나 여행에서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이 열시 반 차로 와 있었다.
그는 트렁크를 방 가운데 놓고 양복을 입은 채 아랫목에 앉았다가 정숙(貞淑)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힐끗 쳐다보곤 아무 말도 안했다. 한참 뒤에 "어데 갔다 오느냐"고 묻는 것을 바른 대로 "준호와 같이 저녁을 먹고 산보한 뒤에 들어오는 길이라"면 좋았을 것을 얼김에 "친정 쪽 언니 집에 갔다 온다"고 속인 것이 잘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남수는 불만은 하나 어쩔 수 없는 듯이 "세간은 없어도 집을 그리 비우면 되겠소" 하고 나직이 말한 뒤에 그대로 윗방으로 올라가서 자리에 누웠다.
정숙은 준호와 저녁을 먹고 산보한 것이 감출 만한 것도 안 되는 것을 어째서 자기가 난생 처음 거짓말을 하였는가 하고 곧 후회되었으나 준호와 산보하던 때의 기분으로 보아 준호도 그것을 남수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두말없이 그대로 아랫방에 자리를 깔았다.
그것이 오늘 남수가 저녁을 먹고 나가서 준호와 만났을 때에 탄로가 난 것이다. 하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던 준호가 무슨 생각으론지 남수에게 그 말을 해버렸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물론 준호 역시 말해서 안 될 만한 불순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그만 일을 숨기느니보다 탁 털어놓고 농담으로 돌리는 것이 마음에 시원했을 것이다. 그는 늘 남수를 우당(愚堂) 선생이라 부른다.
"우당 선생 부재중에 부인과 산보 좀 했으니 그리 아우"쯤 말하고 껄껄 웃었는지 모른다.
아니 준호의 일이니 "내가 핸드백이 된 셈이죠. 어쨌거나 우당 선생 주의하슈. 그만 연세가 꼭 스왈로를 기르고 싶을 시깁니다" 정도의 말은 했을 것이다.
이런 농담을 들을 때 남수는 얼굴에 노기를 그릴 수는 없었으나 마음만은 몹시 불쾌하였을 것이다. 가랫물을 먹은 듯한 찡그린 얼굴로 애써 웃어 보려는 남수의 표정이 생각된다.
원체 자기네들이 남수에게 그날 밤 일을 어떻게 말할까. 다시 말하면 속일까 바른 대로 말할까. 또 말한다면 어느 정도로 고백할 것인가를 협의해 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그런 협의를 해둘 만큼 그들은 남수에게 죄를 짓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죄를 의식하고 그런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적어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산보까지도 중지했을 것이다.
그날 밤의 산보―---그것은 정숙이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물론 단순하게 길을 걷고 불이 아름답다느니 얼마 안에 꽃이 피겠느니 하는 것으로 시종된 것은 아니었다. 입으로 나온 말은 그 정도인지 몰라도 정숙이가 가졌던 흥분만은 이상하게 높았던 까닭이다.
어쨌든 그 말이 준호의 입에서 탄로가 나서 그 자리에선 웃고 만 모양이나 밤에 돌아오는 대로 남수는 정숙에게 치근스럽게 트집 비슷한 말을 걸었다. 그것이 벌어져서 드디어 싸움이 되었다.
지금 정숙은 팔을 걷어붙이고 남편에게 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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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곰네
도서정보 : 김동인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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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곰네였다.
어버이가 지어준 것으로는 길녀라 하는 이름이 있었다. 박가라 하는 성도 있었다. 정당히 부르자면 박길녀였다.
그러나 길녀라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부터가 벌써 정당한 이름을 불러주지를 않았다. 대여섯 살 나는 때부터 벌써 부모에게 ‘곰네’라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어린애를 붙안고 늘 곰네곰네 하였는지라 그 집에 다니는 어른들도 저절로 곰네라 부르게 되었고, 이 곰네 자신도 자기가 늘 곰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라 제 이름이 곰네인 줄만 알았지 길녀인 줄은 몰랐다. 좌우간 그가 여덟 살인가 났을 때에 먼 일가 노파가 찾아와서 그를 부름에 길녀야 하였기 때문에 곰네는 누구를 부르는 소린지 몰라서 제 장난만 그냥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자기 쪽으로 손을 벌리며 그냥 길녀야 길녀야 이리 오너라 하고 연방 부르는 바람에 비로소 자기를 부르는 소린 줄을 알았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로 가지 않고 제 어미에게로 갔다.
“엄마, 엄마, 데 사람이 나보구 길네라구 그래. 길네가 무어요? 남의 이름두 모르고 우섭구나야…….”
어머니가 곰네를 위하여 변명하였다.
“이 엠나이! 어른보구 그게 뭐야. 엠나이두 하두 곰통같이 굴러서 곰네라구 곤쳤다우. 이 엠나이, 좀 나가 놀알!”
“히! 곱다구 곱네디 곰통 같다구 곰넬까. 곰통 같으믄 곰퉁네디.”
“나가 놀알!”
“잉우 찍!”
사실 계집애가 하두 곰같이 완하고 억세기 때문에 ‘곰’네였다. 얼굴의 가죽이 두껍고 거칠고 손과 팔의 마디가 완장하고 클 뿐 아니라, 가슴이 턱 벙글어지고 왁살스럽고, 그 목소리까지도 거칠고 툭하였다. 머리카락까지도 굵고 뻣뻣하였다. 그에게서 억지로라도 여자다운 점을 찾아내자 하면 그것은 그의 잠꼬대뿐이었다. 잠꼬대에서는 그래도 간간 갸날픈 소리며 애기를 업고 싶어하는 본능이 보였다. 그 밖에는 여자다운 점을 털끝만치도 없었다.
이름이 길녀라 하지만 길하다든가 실하다든가 한 점은 얻어낼 수가 없었다. 곱다는 곱네가 아니요 곰 같다는 곰네야말로 명실이 같은 그의 이름이었다.
젖 떨어지면서부터 농터에 나섰다. 농터라야 빈약한 것으로, 풍년이나 들면 간신히 그의 식구(아버지, 어머니, 곰네, 이렇게 단 세 사람)의 굶주림이나 면할 정도의 것이었다.
곰네가 농터에 나서면서부터는 어머니의 부담이 훨씬 줄었다. 그의 아버지 라는 사람은 농꾼답지 않은 게으름뱅이에 기력도 적은 사람이어서 보잘 여지없이 소위 망나니였다. 술이나 얻어먹고 투전판이나 찾아다니고 남의 집 여편네나 담 넘어 엿보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농사 때에는 단 내외의 살림 이라 하릴없이 농터에 나서기는 하지만 손에 흙을 대기는 싫어하고, 게다가 기운이 없어서 조금 힘든 일을 하면 숨이 차서 당하지를 못하고 게으름 꾀 만 가득 차서 피할 궁리만 공교롭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지라 아주 쉽고 가벼운 심부름 이상은 하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시킨댔자 감당도 못할 위인 이었다.
대여섯 살 나서부터 농사에 어머니에게 몸 내놓고 조력한 곰네가 훨씬 도움이 되었다. 힘과 기운으로도 벌써 아버지보다 승하였거니와, 어린애답게 열이 있고 정성이 있었다.
그런지라 팔구 세 때에는 벌써 농군으로서의 한몫을 당해냈고 농사의 눈치도 어른 뜸 떠먹으리만치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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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도서정보 : 김동인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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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阿片戰爭)은 세계전사상에서 최악의 전쟁이다. 호랑(虎狼) 영국 백 년의 동아 침략과 착취의 계기는 실로 이 아편전쟁에서 발단된 것이며 지나와 지나인에게 아편 구입과 사용을 강요한 영국의 전 인류적인 죄악은 홍콩(香港) 약탈에서 배가된 것이다. 영국인 그 자신들도 아편전쟁을 가지고 영구히 지워 버릴 수 없는 오점을 영국사상에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이 동아 침략의 아성 홍콩이 작년 십이월 이십오일 용맹과감한 황군(皇軍)에게 괴멸된 것을 기회로 본지는 거장 동인(東仁)의 붓을 빌어 이 세계 최대의 죄악사를 독자 제씨 앞에 전개시키려 하는 것이다.
〈朝光[조광]〉, 19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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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탕지 아주머니
도서정보 : 김동인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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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여성(女性)』에 실린 삼인칭 시점의 단편소설로 일제 식민지 상황 속에서 현실적 생계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하급 여성의 삶의 양태가 희화적으로 형상화되어 주인공의 내적 갈등보다는 외적 갈등이 강하게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묘사가 주로 성적 대상으로, 우둔하고 어리석게 그려져 김동인의 남성 중심의 봉건의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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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자
도서정보 : 김동인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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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모를 꿈을 훌쩍 깨면서 순애는 히스테리칼하게 울기 시작하였다. 꿈은 무엇인지 뜻을 모를 것이다. 뜻만 모를 뿐 아니라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검고 넓은 것밖에는 그 꿈의 인상이라고는 순애의 머리에 남은 것은 없다. 그는 슬펐다. 그는 무서웠다. 그 꿈의 인상의 남은 것의 변화는 이것뿐이다. 탁탁 가슴에 치받치는 울음을 한참 운 뒤에 눈물을 거두고 그는 전등을 켰다. 눈이 부신 밝은 빛은 방안에 측 퍼져 나아간다.
(아직 안 돌아왔을까?)
생각하고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맥 난 손으로 짐작으로 풀어진 머리에 비녀를 지르고 두 팔을 무릎 위에 털썩 놓은 뒤에 졸음 오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그러면서도 어떤 때에는 아무런 말이라도 순종하는 벌써 스물 둘이 되었지만, 아직 외도란 하여 보지도 못한 그의 오라비 동생의 네모난 얼굴이 나타났다.
「꼭 돌아왔다.」
그는 중얼거리고 눈을 떴다. 그에게는 밸은 좀 세지만 그렇게 정직하던 애가, 순애 그에게 말하라면 남자란 다?하면서도 또 차마 사람으로 나서는 못할 일?외도를 하리라고는 사실은 어떻든 생각은 안 하려 하였다. 남에게 눌러서만 살던 사람은 다 그렇거니와 순애도 무슨 일이든 사실보다 자기 본능에 대하여 자신이 더 많았다.
그러나? 여기도 순애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의 오라비 P의 이즈음 행동에 대한 한 점의 의혹이 있다.
P에게는 이즈음 알지 못할 벗이 흔히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중절모를 빗쓰고 키드 구두 소리 부드럽게 순애 같은 가정의 여자에게도 한 번 보아서 건달인 줄 알 만한 사람들이었었다. 그들이 와도 집안에서 P와 무슨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고 언제든지 P를 더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P도 이즈음은 모양 차림이 차차 심하여지며 어떤 때는 술이 잔뜩 취하여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
순애는 어떠한 사실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역시 자기 본능이 나왔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치맛고름을 매면서 문을 열고 나섰다. 발은 달빛은 푸르게 적적히 어두운 뜰에 비치고 있었다. 순애는 짧게 비치는 검은 자기 그림자와 함께 발자국 소리 안 나게 가만히 걸어가서 건넌방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 바늘구멍만한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안 돌아왔다.」
좀 있다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오라비는 순애가 본 바와 같이 아직 안 돌아왔다. 이십 사 촉의 밝은 전등은 빈틈없이 그 방을 비추고 있고, 순애 자기가 펴놓은 자리는 아직 그냥 적적히 방안에 벌려 있으며 그 머리맡에는 책상과 그 밖의 몇 가지가 규칙 있게 놓여 있으되, 그 방의 주인인 순애의 오라비는 아직 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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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도서정보 : 현진건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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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이 지은 장편소설. 1933년 12월 20일부터 1934년 6월 17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그 뒤 1939년 박문서관에서 『현대걸작장편소설선 4』로 간행하였다. 단편작가로 출발한 현진건이 처음으로 장편에 붓을 든 작품이다. 1930년대는 일제의 검열이 심하여지고, 또한 출판사정의 악화로 소설의 발표가 주로 신문연재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독자의 취미를 외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검열을 피하면서 독자의 호기심도 충족시키고 자신의 현실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 양식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적도」였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젊은이 김여해와 홍영애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홍영애는 돈 때문에 부자인 박병일과 결혼한다.
이에 분노한 김여해는 신방을 습격하게 되고, 독립군 군자금을 위한 범행이라는 박병일의 조작에 따라 5년간 징역을 살게 된다. 그 뒤 출옥한 김여해는 복수의 심정으로 박병일의 동생 은주를 강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병일은 자신의 체면을 위하여 동생을 자기 회사의 간부이자 대학동창인 원석호의 후처로 보내려 한다.
오빠의 이기적인 처사에 충격을 받은 은주는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는데, 이를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김여해는 강에 뛰어들어 은주를 구출한다. 한편, 박병일은 기생 명화에게 빠져 홍영애와 갈등을 일으키고, 명화를 알게 된 김여해 또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명화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박병일도 김여해도 아닌 해외에 망명한 독립투사 김상열이었다.
김상열이 밀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하여 명화를 만나자 김여해는 질투심으로 그를 고발하려다가, 그 임무의 중요성과 애국정신을 알게 됨으로써 명화를 양보하고 대신 임무를 맡는다. 김상열은 은주와 명화를 데리고 다시 해외로 나가고, 김여해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되어 취조 도중 자살한다.
이 작품은 신문 독자의 흥미를 유발, 지속시키기 위하여 일곱 개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연속시켜 나가면서도 작자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 대응 방식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두 유형의 인간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한쪽은 자신의 재산만을 위하여 환락과 비열 속에 사는 박병일·원석호 등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일제와 투쟁하려는 김상열·명화 등이다.
이 사이에서 김여해는 개인적 감정, 즉 사랑·질투·복수 등에 사로잡혀 있던 평범한 청년에서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에 눈떠가는 인물로 변모한다. 결국, 김상열·명화·김여해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작자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 투쟁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통속성과 사회의식을 조화시키려 한 1930년대 전기 장편소설의 한 표본적 작품이라는 데에서 그 소설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통속성과 민족 현실의 인식이 조화롭게 결합, 형상화되지 못함으로써 통속소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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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와 철창
도서정보 : 현진건 | 2020-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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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쭙잖은 일로 삼남 지방 T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츨을 보낸 일이 있었다.
사월 그믐께 서울에서는 창경원 밤 꽃구경이 한참일 무렵이었다. 앞문 목 책과 뒤 쇠창살 사이로 햇발은 금강석과 같이 부시다. 조각밖에 아니 보이는 하늘가로 흰 구름의 끄트머리가 어른어른 떠돈다.
지금까지 문 앞에서 서성서성하고 있던 우리 방에서는 제일 존장인 오십 남짓한 구레나룻이 한숨인지 감탄인지 분간 못할 소리로 읊조렸다.
“에에헷! 일기는 참 좋군! 저 홰나뭇가지를 보시오. 거기는 바람이 있구려. 새파란 잎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곧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 같구려.”
나는 그 절묘한 형용사에 놀래었다. 그는 주막집 주인으로 오늘날까지 그럭저럭 꾸려가다가 수상한 청년 한 명을 재운 죄로 벌써 열이틀째 고생을 하고 있는 중늙은이다. 그에게 이런 시흥이 있을 줄이야! 나의 눈에도 그 홰나무가 뜨인 지는 오래였다. 경찰서 마당 소방대 망루가 있는 바로 옆에 그 홰나무는 넓은 마당을 덮은 듯이 푸른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때마츰 불어오는 동풍을 안고 길게 늘어진 가지들이 휘영휘영 흔들린다. 갇힌 이에게는 그 자연스러운―자연스럽지 못한 경우에 쪼들리는 우리는 얼마나 자연스러운 데 주렸으랴―푸른 빛이 끝없는 감흥을 일으켰음이리라. 그 바람을 따라 아모 거리낌 없이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는 모양이 어데까지 자유스럽고 어데까지 즐겁게 보였음이리라. 하늘에 날아 오르는 것 같다는 한 마디 말에 그 홰나무의 형용과 아울러 그의 처지와 감정과 심회를 여실하게 나타낸 것이다.
‘경우가 시인을 낳는구나.’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구레나룻의 탄식과 내 한숨은 단박에 전염이 되었다. 한 칸 소침한 우리 방에 빡빡하게 들어찬 열두 명의 입에서는 마치 군호나 부른 듯이 일제히 한숨이 터졌다. 한숨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곳에는 그것같이 전염 잘되는 것은 없었다. 한 사람이 쉬면 왼 방이 모조리 따르고 한 방에서 일어나면 삽시간에 각 방으로 퍼져,
“후우!”
“아이구우!”
하는 소리가 마치 회호리바람과 같이 지나간다. 이 아모런 의미 없는 숨길에 얼마나 많은 뜻이 품겼으랴, 얼마나 많은 하소연이 섞였으랴. 그것은 입술에 발린 천마디만마디 말보담도 몇 백 곱절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은 미어지는 제 가슴 한 모퉁이를 역력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말라 가는 제 피 방울방울을 무더기로 뿜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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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도서정보 : 윤기정 | 2020-06-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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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어 정옥이는 가방매고 학교에 가”
아침밥을 먹고 좀 가뻐서 방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던 경애의 가슴은 이 소리에 바늘로나 찔리는 것처럼 뜨끔하였다.
‘저게 머 내 자식인가 아무 때든 제 애비가 찾아가면 고만일걸’ 하고 아주 정떨어지는 생각을 하다가도, 아무리 외할머니가 흠살굽게하고 엄뚜드린다 하더라도 외삼촌의 변변치않은 벌이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만 하다시피 살아가는 외가라 밥먹을 때면 눈칫밥을 먹이는 것 같고 조금만 시침한 소리를 들어도 눈총을 받는 것 같아 아무튼 제 간줄기에서 딸려진 자식이라 가슴이 뭉클하고 두 눈에서 더운 눈물이 핑 돈다. 그럴 적마다 시골 제 애비한테로 당장 내리쫓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났다. 허나 몇 번 편지로 데려 내려가라고 하여도 지금 같이 사는 새로 얻은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더 좀 맡아두라고 하면서 종시 안 데려갈 뿐만 아니라 혜숙이년조차 한사하고 외할머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며 어머니 역시 외손녀에게 애미 이상으로 정을 쏟아 사부주가 드러맞어 오늘날까지 미적미적거려 내려온 것이다.
한 달 동안을 두고서 학교 논란을 신이기듯 논이기듯 하다가 건넛집, 혜숙이의 동무요 같은 동갑인 정옥이만이 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혜숙이는 민적이 없어서 그만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 개학날인 오늘에 정옥이가 호기 있게 우쭐거리며 학교에 가는 꼴을 혜숙이가 바깥에 놀러 나갔다가 부러운 듯이 한참동안 넋잃고 바라보다 말고 안으로 뛰어들어와 무슨 신기한 것이나 발견한 듯이 또는 하소연 하는 듯이 어머니를 불러 정옥이가 학교 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드러누웠던 경애는 일어나 앉으며 방문둑겁다지에 기대 선 혜숙이를 바라보았다. 제 또래를 둘셋씩 윽박지르는 왈패요 부끄럼과는 아주 담을 쌓고 누구 앞에서나 깔딱대고 수선만 피는 말괄량이로 소문난 혜숙이지만 지금만은 평상시와 걸맞지 않게 새치무례한 그 모양이라든가 얼굴에는 밖에서부터 부러워하던 기색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것을 본 경애의 가슴은 전기나 통한 듯이 찌르르하게 쓰라렸다. 그 모양이 측은하고 가엾어 보였다.
“이제 너도 학교 보내주마”
“뭘, 거짓말…난, 다 안다”
“알기는 뭘 다 알어”
“할머니가, 너는 민적이 없어서 학교 못 들어…”
“예이 요년! 꼴베기 싫다. 어서 나가 놀아라.”
경애가 이렇게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가뜩이나 서먹서먹하게 서서 풀 없이 하던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무안당한 사람처럼 슬며시 돌아서서 방문 밖으로 나가는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억제할 수 없는 더운 눈물이 앞을 가려 그만 고개를 돌이켰다.
경애는 참으로 진정할 수 없는 자기의 가슴을 두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다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따금씩 꿈틀거리는 만삭된 배위로 슬며시 손이 내려가 옷 위로 통통한 배를 어루만지니 기막힌 생각이 더한층 복받쳐 올라 방 한구석에 볼품없이 쌓아 논 이불귀퉁이에 픽 쓰러져 얼굴을 폭 파묻고 흑흑 느껴가며 울기를 시작하였다.
어린 것 하나도 부모를 잘못 만나 남과 같이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하는 것도 원통하고 원통한데 더구나 가르칠 시기에 가르치지 못하고 배울 때 배워주지 못하고 그만 때를 놓쳐 눈뜬 장님을 만들고마는 비극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 빚어내고 있는것도 사람으로서 그 태도 뜻 있는 부모로서 차마 못 볼 노릇인데 지금 이 뱃속에 들어 앉은 새로운 생명 조차 불운한 혜숙이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경우를 만들성 싶으니 차라리 두생명이 함께, 아니 자기만 죽는대도 뱃속의 것은 저절로 힘 안들이고 죽을 것이니까 당장 죽어 없어져 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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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와 안잠이
도서정보 : 윤기정 | 2020-06-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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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게 있나? 세숫물 좀 떠오게."
여태까지 세상모르고 자거나 그렇지 않으면 깨서라도 그저 이불 속에 드러누워 있을 줄만 안 주인아씨의 포달부리는 듯한 암상스런 음성이 안방에서 벼락같이 일어나 고요하던 이 집의 아침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내! 밥퍼요.”
새로 들어온 지 한달 쯤밖에 안 되는 노상 앳된 안잠재기가 밥 푸던 주걱을 옹솥 안에다 그루박채 멈칫하고서 고개를 살짝 들어 부엌 창살을 향하고 소리를 지른다.
“떠오고 나선 못 푸나 어서 떠와 잔소리 말고.”
먼저보다도 더 한층 독살이 난 째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지간히 약이 오른 모양이다.
“내 곧 떠 들여가요.”
젊은 안잠재기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바로 옹솥 옆에 걸린 그리 크지 않은 가마솥 뚜껑을 밀쳐 연 다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더운 물을 한바가지 듬뿍 떠가지고 부엌문턱을 넘어설 제 슬며시 골이나 해가 일고삼장해 똥구멍을 찌를 때까지 잘 적은 언제고 이렇게 물이 못나게 재촉할 적은 언제고 하고 혼자 입 안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얼굴이 비치도록 길이 번들번들 들은 뒤주와 찬장 사이 틈에 끼워둔 놋대야를 집어가지고 급하게 재촉하는 품 봐서는 바가지의 물을 그대로 불까 하다가 혹시 먼지라도 뜰라치면 가뜩이나 심사가 뒤집힌 판이라 더욱 펄펄 뛰며 쨍쨍거릴까봐 얼추라도 한번 부시려고 마루 끝으로 나오니 마루 끝으로 나오니 마루 반을 넘어 들이비친 가을볕으론 유난히 쨍쨍하고 두꺼운 광선이 잘 닦아 번쩍거리는 대야에 가 반사되어 으리으리하게 번쩍거린다.
“뭘 그렇게 꿈지럭거려 굼벵이 천장하듯 어서 들여오지 않고.”
안방에서는 여전히 톡 쏘는 듯한 아씨의 날카로운 음성이 또 화살처럼 안 잠재기의 귀를 따갑게 드리 쏜다.
“내 지금 곧 들여가요.”
안잠재기도 약간 짜증이 난 듯한 말씨였다. 허나 남한테 맨 목숨이라 꿀꺽 참고서 안방미닫이를 조심성스럽게 연 다음 간반통 이간이나 되는 덩그런 방 한가운데다가 물대야를 갖다 놓고 나니 아랫목 쪽으로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삼십이 될락말락한 어느 모에 내놓든지 미인이라고 할 만한 제법 요염하게 생긴 주인아씨가 뾰로통한 얼굴을 해가지고 살기가 등등한 눈초리로 안잠재기를 갈아 마실 듯이 노려보면서
“자네꺼정 내 속을 태나, 왜 그리 꿈지럭거려……에이 화나 죽겠네 죽겠어. 자네마저 내 맘을 편치 않게 해주려거든 오늘이라도 썩 나가게 썩 나가.”
하고 대야를 와락 잡아 당기다가 물이 좀 방바닥에 엎질러졌다.
공연히 생트집을 해가지고 사람을 들볶는 것이 몹시 배리가 꼴려 견디다 견디다 못해 여볏 입에서 뭐라고 말대답이 터져나올 듯한 것을 삽시간에 생각을 돌려 꿀꺽 참았다. 요 때만 지나 성깔이 꺼질라치면 그야말로 정답게 살을 비어 맥일 듯 하고 싹싹하기 봉산 참배같은 아씨의 성미를 들어 온 지 얼마 안된 터이지만 잘 아는지라 가슴에서 금방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꿀꺽꿀꺽 참고서 윗목 한구석에 틀어 박힌 걸레를 얼핏 집어다가 방바닥에 튄 물방울을 그저 잠잠히 훔치고만 있었다. 아무 죄 없이 뿌옇게 몰려댄 안잠재기가 아까 푸다가 내버려둔 밥을 마저 푸려고 부엌을 향하여 발을 옮기면서 하루 이틀 밤도 아니고 사흘 저녁씩이나 나가 잤으니, 그것도 딴 계집에 미쳐 다니는 줄 번연히 아는 아씨로서 골을 내는 것은 그럴 법도 한 노릇이지만 제 남편 안 들어온 화풀이를 나한테 하는 것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며 살이 내리도록 성가신 노릇인걸 하고 생각한 다음 상을 약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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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승신수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06-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파주(坡州) 낙수(落水) 남편에 있는 승(僧) 신수(信修)의 암자에는 오늘밤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으로 불빛이 절 밖에까지 비치어 흐르며 흥에 겨운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드믄드믄 들려온다.
때는 여말(麗末) 홍건적의 난리입네, 김용(金鏞)의 반란입네 하고 온 나라가 물끓듯하건만 이 파주 한 고을만은 세상사를 등진듯이 지극히 평화하게 지내가는 터이다.
『또 이 화상 한잔 하시나보군.』
하고 마침 그 암자 앞을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발을 멈추고 절 속을 기웃거렸다.
『흥 저자의 한잔이란 남의 백잔꼴은 되거든.』
같이 가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을 받으며 역시 발을 멈춘다.
신수는 이미 육십 가까운 노승으로 몸이 비록 승상(僧相)이나 원체 술을 잘 먹어 얼마든지 있는대로 한자리에서 마셔 버리고 마는고로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모양을 바닷속의 고래가 물먹듯한다고 모두 웃었다.
더욱이 그 음주하는 태도가 유쾌하니 사람들이 실없이 놀리느라고 혹 소(牛) 오줌 같은 것을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졸라도 허허 웃고 단숨에 들이키면서,
『이 술이 심히 쓰다.』
하고 배를 두드렸다.
또 음식을 잘 먹어 쉰 고기나 마른 떡일지라도 가림 없이 다 먹어 없애며 심지어 많은 사람이 모이는 회중에서라도 고기, 생선을 가리지 않고 양껏 먹으니 그 상좌가 민망해하며,
『좀 삼가시오.』
하고 주의를 시키나 못들은척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그제야 자기도 허허 대소하면서 하는 말이,
『고기는 원래 물에 있는 것인데 이 고기가 땅에 있으니 내가 죽인 것이 아님은 알겠지요? 그러니 먹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다른 사람들은 웃고 상좌도 웃고 신수도 또한 가장 웃으운 듯이 박장대소하였다.
이날 밤도 신수는 상당히 먹고 취한 모양으로 그 활달한 웃음소리가 길 가는 두 사람의 귀에까지 들려와 이렇게 발을 멈추게 하였으나 먼저 가던 나이 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오늘 신수의 절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짐작하는 모양으로 공연히 열심으로 그 속을 들여다 보고 서 있다. 뒤따라가는 친구는 딱해졌다.
그러나 동무가 이처럼 열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라 차마 탓할 수는 없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어서 가세.』
하고 그 소매끝을 잡아다닌다. 그러나 친구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참 세상에 횡재하는 놈도 많으이.』
하며 혼자 탄식하였다.
같이 가던 친구는 더욱 못 마땅한 듯이 입맛을 쩍쩍 다시더니,
『이 사람 정신이 바뀌었네.』
하고 기가 막혀 하늘을 쳐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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