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고전 043] 연개소문전·명림답부전
도서정보 : 박은식 | 2012-10-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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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은 만주 망명 시절 독립운동 차원에서 설립된 동창학교에 재직하면서 몇 편의 역사 저술을 남겼다.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은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우리 민족 고대사의 줄기를 잡은 것이고, 《단조사고(檀祖事攷)》는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단군에 관한 여러 역사 기록들을, 자신의 견해를 곁들이며 엮은 것이다. 또한 《동명성왕 실기(實記)》를 비롯해 《명림답부전(明臨?夫傳)》과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은 고구려 시대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전기 성격의 글이고, 《발해 태조 건국지》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건국과 그 문화에 대한 개설서 성격의 글이다.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는 그가 우리 민족의 한 가지로 생각하는 금나라 태조를 꿈에서 만나 국권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소설적인 설정의 글이다.
이 책은 이 가운데 《천개소문전》과 《명림답부전》을 현대어로 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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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김재규
도서정보 : 김성태 | 2012-10-26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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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청와대 궁정동에서 18년 철권 독재정권을 누려오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쓰러졌다. 이로써 세계적으로 악명 높던 유신체제는 붕괴되고 대한민국에도 민주주의의 새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는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김재규는 우발적으로 대통령을 시해한 역적으로 취급받아왔다. 김재규의 거사는 소위 운동권으로부터도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후 12ㆍ12 쿠데타를 통한 전두환 신군부 집권의 빌미를 주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고의 걸림돌이던 박정희를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재규는 33년 동안 논의의 금기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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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고전 042] 을지문덕 - 우리나라 사천 년 최고의 위인
도서정보 : 신채호 | 2012-10-2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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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는 1910년 망명하기 전에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몇 개의 ‘위인전’을 썼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러한 ‘위인’ 내지 ‘영웅’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중국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저술을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三傑傳)》(1907)이다. 이를 통해 워밍업을 마친 그는 본격적으로 우리 민족사의 영웅들에 대한 전기 집필에 나서, 1908년 국한문판 《을지문덕》을 내고 뒤따라 그 한글판도 출간했다. 또 같은 해에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을 연재하고 그 한글본도 한 달여의 시차를 두고 동시에 연재했다. 이듬해인 1909년 말부터는 역시 《대한매일신보》에 고려 시대 최영 장군 전기인 《동국 거걸(巨傑) 최도통(崔都統)》 국한문판을 연재했으나 1910년 그가 망명하면서 연재가 중단돼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 책은 신채호의 국한문판 《을지문덕》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글판을 부분적으로 참고했다. 신채호는 단군기원을 요즘 통용되는 서기전 2333년이 아닌 서기전 2133년으로 보았던 듯, 국한문판 및 한글판이 모두 이런 체계를 따르고 있어 이 책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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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도서정보 : 김경숙 | 2012-10-20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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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통신사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일본으로 갔나?
조선통신사란 조선 후기,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신(使臣)이자 문화사절단을 뜻한다. 1607~1811년 모두 열두 번의 사행이 있었다. 참여한 인원은 평균 470명가량이었고, 기간은 1년 정도 걸렸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새로 건립한 막부(幕府, 바후쿠)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 사행을 요청했다. 일본을 찾은 조선 사신의 행차는 도쿠가와 막부의 위상 과시와 민심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이 임진왜란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기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일본의 청을 받아들여 사행을 파견한 이유 역시 정치적인 의도가 가장 컸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같은 전란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교통이 불편하고 외국과의 교류도 드물던 시절, 수백 명이 함께 사행길에 올라 1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면서 외국을 경험했다. 그러는 사이 크고 작은 일이 수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의 작은 일부터, 일본 사람이나 문화를 접하게 되는 외교적인 일들까지.
이 책은 그들이 겪었을 소소한 일상에 대한 궁금함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타고 어떻게 갔는지, 어디서 어떻게 잠을 잤는지, 긴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일이나 명절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무슨 시를 읊고 어떤 글을 썼는지,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소통했는지 등. 곧 조선통신사 내부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본 책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2. 1만 리 여행길 위에 펼쳐진 조선통신사의 파란만장 생활사(生活史)
조선통신사는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후 사행선(使行船)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바닷길을 항해해 일본 쓰시마(對馬島)로부터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모노세키)를 위시한 각 지역을 지나 오사카에 상륙한 뒤 육로를 통해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에도(지금의 도쿄)에 이르렀다. 여기서 국서(國書)를 전달하는 전명식을 거행하고, 여정을 다시 되짚어 귀국했다. 부산에서 에도까지 뱃길 3,190리, 강물 120리, 육로 1,330리에 이르니 왕복으로 치면 1만 리 길을 9~11개월에 걸쳐 다녀오는 고달픈 여정이다.
조선통신사의 사행원 구성을 보면 신분과 직역이 다채롭다. 정사와 부사, 종사관 등 공식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도 문사(文士)를 비롯한 음악, 미술, 잡기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역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군관, 일본인과의 시문창화(詩文唱和) 임무를 맡은 제술관과 서기, 통역을 맡은 역관, 공식 의식이나 행차 등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화원, 글씨 쓰는 일을 맡은 사자관(寫字官), 의술을 담당하는 의원, 말을 타고 기예를 하는 마상재(馬上才),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 그 외 선원과 기졸(旗卒), 각종 잡무 담당, 요리사, 관노 그리고 개인적으로 데려가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을 보면 통신사들이 타고 가는 배 안이 하나의 작은 조선이라 할 수 있다.
①묵을 곳과 탈것 배정을 둘러싼 쟁탈과 갈등
쓰시마에서 에도에 이르기까지 통신사행은 60곳 이상의 관소에 머물렀다. 400-500명의 인원이 지역을 옮겨갈 때마다 새로운 관소에 들어가 방을 배정 받고 짐을 푸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혼란스럽다. 더욱이 사행원들은 배정된 처소에 얌전히 들지 않았다. 이는 사행선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방을 서로의 묵인 아래 자주 바꿨다. 친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방 바꾸기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만은 않았다. 좀더 넓고 좋은 숙소를 차지하고픈 바람 때문에 먼저 도착한 사람의 하인들이 방 앞에 붙어있는 이름 팻말을 바꿔치기하는 장면이 자주 일어났다. 숙소 쟁탈전과 그에 따른 갈등이 심해지자 어느 사행에서는 처소 쟁탈을 금하기도 했다.
통신사행이 지역에 도착하기 전 일본 측에서는 신분과 직역에 따라 미리 처소 배정을 하는데, 이를테면 의원의 우두머리인 양의와 문사인 제술관에게 따로 처소를 배정하고, 서기·사자관·화원은 한곳에 배정했다. 그러나 제술관과 서기는 서얼 출신 문사라 서로 친했고, 사자관·화원·양의는 중인이라 서로 친했다. 따라서 관소에 도착하면 문사들은 처소를 바꾸어 제술관이나 서기의 처소에 함께 모이고, 사자관·화원·양의는 또한 그들끼리 모였다. 이는 숙소 쟁탈이 아니라 서로의 양해를 구해 바꾸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었다. 사행원들은 교통수단 때문에도 갈등을 겪었다. 일본에서 제공한 가마와 말을 놓고 누가 더 편한 것을 탈 것이냐 신경전이 일었다. 에도로 향하는 육로 여정이 험하고 일기도 좋지 않으니 탈것에 집착했던 것이다.
묵을 곳과 탈것 쟁탈전에 대한 몇몇 일화를 들여다보면 이것이 단순히 숙소와 교통수단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툼은 대체로 제술관 및 서기인 서얼 출신 문사와 역관 및 의원 혹은 화원 등 중인 출신 기술직 사행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역관과 문사들은 종종 노골적으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 바탕에는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문제점이 있었다.
②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땅을 여행하며 일어난 일들
1748년 2월 16일 부산항을 출발해 쓰시마로 간 통신사행은 역풍 때문에 원래 예정지인 사스나로 가지 못하고 쓰시마 북단의 포구에 정박했다. 이곳에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2월 21일 밤 부기선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사령과 악공이 배 안에서 타죽는 참변이 일어났다. 예정에 없던 숙박을 하게 되자 당시 사신 우두머리인 정사 홍계희가 하인들은 배 안에서 묵기를 명했고, 또 바람이 바뀌면 언제든지 출발을 할 예정이었기에 많은 사행원들이 대기상태로 배 안에 남아있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 당시 종사관으로 간 조명채는 옷도 갖춰 입지 못하고 자던 모양새로 뛰쳐나와 물속에 몸을 던지거나 옆에 있는 배로 뛰어내리거나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 불에 데고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쓸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을 기록하며, 사명을 변변히 수행하지도 못하고 이국에서 이런 재난을 만나는 죄를 저지르니 죽고만 싶었다고 하였다(51쪽).
1764년 4월 7일에는 오사카에서 정사 조엄의 집사인 최천종이 쓰시마 통사의 칼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행원들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오사카를 떠날 수 없다며 즉각 해결을 요구했고, 결국 일본 측에서 도망간 범인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떠났다. 범인 스즈키 덴조는 5월 2일 처형되었고 통신사행은 5월 6일 관소를 출발해 회정길에 올랐으니 한 달 가까이 묶여있던 셈이다(63쪽).
1624년 사행의 부사 강홍중은 전명(傳命)을 하고 돌아가는 길 모리야마에서 피로인(被擄人) 세 명을 만났다. 그중 한 명은 양반가의 여인으로 정유재란 당시 8살의 나이로 잡혀와 28년간 포로로 살았으며 14살 된 딸이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갈지 말지 망설이는 피로인들을 설득하여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행원들이 서울로 상경하던 날 피로인들은 말 앞에서 울며 호소했고, 강홍중은 행중에서 쓰고 남은 쌀을 덜어내어 각기 5일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전라도가 고향이라던 그 여인이 딸을 데리고 낯선 고국에서 살아갈 밑천은 5일치 식량이 전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환향녀(還鄕女)’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간 많은 여인들의 운명이 그러했다. 1625년,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신들이 인조를 만난 자리에서 강홍중은 “현재 일본에 있는 조선인 포로들이 만약 먼저 돌아온 포로들의 낭패한 사정을 듣는다면 다음부터는 쇄환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22쪽).
1748년 조명채의 사행록을 보면, 통신사가 쓰시마 도주와 서계(書契)의 문구를 바꾸는 일로 신경전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표현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은 통신사행 내내 이어졌다. 두 나라의 의례와 자존심에 관한 일이기도 했으므로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부산에서 오사카까지는 배로 두세 달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일기가 좋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항해였다. 모진 풍랑을 만나 멀미와 두려움으로 만번을 죽다 살아났다는 기록 또한 곳곳에 남아있으며, 1655년 사행에서는 힘든 뱃길의 와중에 관노가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③이국에서 맞는 생일과 명절
수백 명이 1년여 동안 함께 여행을 하다 보니 늘 누군가의 생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행록에는 생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공적인 사행을 기록한 글에 개인의 생일을 언급하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더구나 사행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황폐화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오랑캐의 나라에서 생일을 맞는 것이 우울감을 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1643년 사행의 부사 조경이 당시 정사 윤순지의 생일을 맞아 위로하는 시를 보면, 윤순지가 고향에서는 생일에 양고기와 술을 차리고 이웃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는데 지금 사신으로 온 일본땅에서는 술잔조차 들지 않는다고 그려놓았다. 1682년 사행의 역관 홍우재는 10월 1일 기록의 말미에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라는 문구를 다른 문장보다 작은 글씨로 써놓았다. 생일인데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처량한 심사가 느껴진다(127쪽). 1763년 계미사행 때는 조촐하나마 생일잔치를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일본을 적국으로 생각하며 사행길에 올랐던 초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좀더 유연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사행록에는 제석, 설,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칠석, 추석, 중양절, 동지 등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우리 조상들이 위와 같은 명절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1655년에는 칠석에 쓰시마 측에서 물고기를 일곱 마리씩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1682년에는 가짓수가 늘어 콩밥, 도미, 청어, 수박, 술 등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조선통신사도 답례를 했는데, 1655년에는 역관을 보내 인사를 했고 1682년에는 하례품을 가져온 쓰시마 관리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1711년에는 숙종의 생일에 일본인들이 문안을 하며 사슴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통신사들이 특별히 중요하게 챙긴 명절은 망하례를 행하는 동지였는데, 문무관이 동서로 나뉘어 서열대로 서서는 국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만세삼창을 한 뒤 예식이 끝나면 팥죽과 어탕을 먹었다고 했다. 1763년에는 정사 조엄과 서기 원중거가 동지 망하례가 끝난 뒤 일본인들에게 고래 잡는 장면을 보여달라고 하여 섬의 높은 언덕에 앉아 일본인들이 너른 바다에서 고래 잡는 모습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155쪽). 또한 새해맞이 음식으로 떡국과 생선회를 먹고 서열에 따라 세배를 함으로써 이국에서도 고향의 명절음식과 풍속을 지킨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의 명절 풍습과 음식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1763년 제석에 쓰시마 도주가 둥근 종 모양의 생면병(生?餠), 곧 서양빵을 보내 먹었다고도 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 일본으로 간 최초의 한류(韓流), 조선통신사의 문화교류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했던 조선은 사행 파견을 일시적인 정책으로 여겼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사신으로 뽑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교통이 불편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니 고생길일 뿐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그런데 그 고생길을 겪으며 일본에 가서는 필연적으로 저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에서 신분적으로 열세에 있던 서얼이나 중인은 ‘우물 안 개구리’의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했다.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고단한 여정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국으로의 여행에 대한 욕구와 설렘을 동시에 느꼈고, 그래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탐구했다.
이에 따라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행의 목적이 초기에는 전쟁 재발 방지와 포로 쇄환이었으나 점차 ‘도덕적 교화’와 ‘문화적 교양’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더구나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화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일본 백성들은 조선의 문물에 광적으로 흥분했다. 통신사행을 통해 양국간 문화교류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①조선인의 시와 글씨에 열광하다
조선통신사와 일본인의 교류는 글씨와 그림에서 시작하여 시문창화로 이어졌다. 조선과 일본 문사들의 시문창화는 일본 전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반 백성들까지도 조선 문사의 시문이나 글씨를 열망하게 되었다. 문사들이 읊은 시는 다시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일본어 책으로 간행되었다. 오사카에서 시문을 창화하고 에도에 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더니 그 시문들이 이미 책으로 엮여 발행되어 있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조선 사신이 쓴 글씨면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얻고자 했으며, 항간에는 조선인의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말도 떠돌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두 나라의 문화교류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시문··서화·학문·음악·기예·특산품, 일본 명소에 대한 감상과 비평 등 여러 측면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②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 여성
조선통신사가 일본 여성을 직접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행차할 때 늘어선 길거리 군중 혹은 행사 장소에서 보게 되는 구경꾼으로서의 여성이 대부분이었기에 조선통신사의 일본 여성에 대한 인식은 우선 외모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계미사행 서기로 참석한 원중거는 일본 여성의 외모 치장과 옷차림, 이국적인 장식 등에 대해 상세하게 평가했다(234쪽). 그는 오사카·교토·나고야·에도의 여인들을 비교평가하기도 했는데, 특히 오사카 여성의 의복과 화장, 거리에서 젖먹이는 모습,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하며 이를 물들이는 풍속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적었다. 여인이 젖먹이까지 안고 나와 젖을 먹이며 행차 구경하는 것에 대해 혹 동원된 군중이 아닌가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조선 주자학자의 눈에 일본 여성의 지나친 화장과 외모 치장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원중거는 에도로 가는 길에 머문 오가키라는 곳에서 일본 유생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곳 여성들의 지나치게 짙은 분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그후 전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곳에 들렀더니 여성들의 화장이 눈에 띄게 옅어져 있더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 유생들이 행차에 구경나온 여인들에게 화장을 덜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한편 일본 여성의 대담한 애정표현과 과감한 노출에 놀라는 대목도 있다.
③조선과 일본의 서적 교류
조선과 일본의 서적 교류는 서로 입장이 많이 달랐다. 조선은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했다. 조선의 기밀이나 정보 혹은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일본에 전해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과의 서적 교류 혹은 매매는 대체로 밀무역 형태를 띠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조선의 일본 관련 서적이 활발하게 유입되어 간행 유통되었다. 임병 양난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이 침략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조선에 촉각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에 큰 관심을 가져 이황의 『퇴계집』은 거의 집집마다 둘 정도였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당시 일본인은 조선을 통한 문화 수입을 간절히 원했고, 이는 통신사들의 우월감을 복돋기도 했다.
조선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은 1763년 사행록에 가서야 확인된다. 원중거 등에 의해 일본을 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이 개방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서적의 조선 유입은 주로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의 사상은 사행록과 주선 후기 지식인들의 문집에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원중거를 위시해 조엄, 남옥, 이덕무 등이 대표적이고, 주자학파인 다루미즈 히로노부와 다케다 마사노부를 긍정하고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의 서적과 사상을 주로 논쟁거리로 삼았는데, 그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을 오랑캐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일본의 정치와 사상, 문화 전반에 대해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 시기에 일본은 반대로 조선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고 통신사에 대한 대접이 허술해지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시기에 변화하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조선이 타국의 실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린 시각을 갖게 된 데는 조선통신사와 그들을 통한 서적 교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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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도서정보 : 백승종 | 2012-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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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선택의 고비에 섰을 때 알아야 할
역사 속 인물 15인의 지혜
많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깊이 있는 지혜는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은 통찰이 있는 지혜로 우리 삶에 교훈이 되는 인물과 마흔 이후의 삶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인물 15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인 백승종 교수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공부한 경험을 바탕 삼아,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런 관점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바라봄으로써 그 인물의 행보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전달한다. 또한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우리가 모르고 지나간 역사적 인물의 면면도 발견할 수 있다.
유연하고 균형 잡힌 사고와 때로는 과감한 결단으로 영역을 확장한 광개토대왕, 원대한 꿈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던 연개소문, 불리한 입지에서도 기회를 보며 인내의 시간을 가졌던 김춘추, 현실적이고 포용력 있는 정치로 앞길을 닦은 광해군 등 이 책에서는 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짚어주고 동시에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을 제안한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선택의 고비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뒤로도 갈 수 없고, 앞뒤 재지 않고 앞으로만 갈 수도 없는 시기다. 선택에 따른 실패를 만회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고려한 한 번의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은 한국사를 통해 지금까지의 인생을 성찰해 봄과 동시에 향후 인생의 비전을 보여준다. 인생의 출발점에 다시 서야 하는 이들을 위한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이다.
인생의 승기를 쥐는 통렬한 깨달음
격변의 시기를 헤쳐 나가는 현명함, 역사 속에서 찾다!
우리가 접하게 될 인물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모두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은 이들이다. 각 인물들의 성향은 제각기 다르지만, 내면에는 동일한 힘을 감춰두고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특징을 더한다. 첫째, 거칠고 험한 파도에도 굴하지 않은 용기와 신념을 가졌다. 둘째,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어렵고 귀한 성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여정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그 선택의 성패와 무관하게 태도와 인격에 감화된다. 반면 그 시작과 꿈은 창대했지만 결국 사소한 실수와 불성실 등으로 대사를 그르치고 만 경우도 있다. 이 안타까운 사례를 통해서는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게 된다.
마흔이란 나이는 열정으로 달린 한 시기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시기다. 이전까지 달려온 것보다 더 먼 거리를 가고, 더 긴 시간을 내다봐야 한다. 마흔 이후의 삶에 어울리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인생에는 시행착오라는 것이 없다. 선택에 대한 결과 하나하나가 곧 인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다시 본다는 것은 첫째로는 삶의 나머지를 계획해야 하는 이들이 깊이 있는 삶을 위해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 것과 같다. 둘째로는 다른 이의 시행착오 혹은 성공의 결과를 내 것으로 삼아 변화의 시기에 취해야 하는 행동의 기준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셈이다.
격변하는 시기를 지내며 삶의 방향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에서 다루는 역사의 길목에서, 큰 흐름을 주도한 15인의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며, 역사를 아는 즐거움까지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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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도서정보 : 이종하 | 2012-10-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역사 속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을까? 『10월의 모든 역사: 한국사』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역사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과 유명한 인물의 출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을 날짜별로 수록한 책이다.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분량을 달리하였으며 연관된 사건은 각주를 달아 관련 페이지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사건의 단순한 사실뿐만 아니라 사건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와 영향까지 서술하여 사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0월의 모든 역사: 한국사》편은 10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 ‘세종의 《훈민정음》반포’, ‘《팔만대장경》완성’, ‘백제의 일본에 불교 전파’, ‘서울 지하철 3,4호선 준공’, ‘고구려 장수왕의 광개토왕비 건립’ 등의 115가지 다양한 사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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