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블랙 아이스
도서정보 : 이수안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24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출입이 통제된 미개통 도로에서
한 사람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다
의문의 사건에 휘말려 위독해진 기업 총수의 자제,
그가 감춰둔 단서를 조합해
거액이 든 금고의 패스워드를 찾아라!
사건의 진범과 검은돈 200억원을 쫓으며 펼쳐지는
레이싱 미스터리 추격극!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출발해 마법과도 같은 자기 내면의 힘을 인식하게 되는 이야기를 선보여온 소설가 이수안의 두번째 장편소설 『블랙 아이스』가 출간되었다. 2019년 김유정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할 당시 “슬픔과 고통을 대범하게 끌어안는 성숙성, 세상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긍정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작가는 2021년 첫 장편소설 『시커의 영역』으로 제4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초자연적인 소재와 흥미로운 세계관, 생동감 넘치는 인물을 통해 “좋은 장편소설”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으며, 작가 이수안은 스토리텔러로서 새로운 궤적을 그려 보였다.
『블랙 아이스』는 첫 장편 『시커의 영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강렬하게 내뿜는 미스터리 소설로, 다양한 서사를 솜씨 있게 부려내는 이수안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출입이 금지된 미개통 도로에서 한 사람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쓰러져 있던 사람은 건설 회사 회장 김상진의 자제 김유영. 유영은 김회장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자 김회장이 세탁한 검은돈 200억원을 인출하는 데 필요한 패스워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유영이 발견되기 직전 그 도로를 통과한 슈퍼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회장은 자동차에 일가견이 있는 측근들을 불러모아 유영이 휘말린 사건을 해결하고 패스워드를 되찾아줄 것을 의뢰한다. 유영을 해한 범인과 검은돈 200억원을 쫓으며 소설은 등장인물들 각각의 결핍과 욕망에 다가서고, 이들의 이야기가 풀려나가며 사건의 전말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수안이 발표하는 첫 미스터리임을 믿기 어려울 만큼 몰입감 넘치는 전개가 특징인 이 작품은, 화려한 스포츠카 레이싱과 함께 진정한 꿈을 가진 이들과 끝없는 탐욕을 가진 이들이 각각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는지 박진감 넘치는 필체로 펼쳐 보인다.
“만약에 자네들에게 100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겠나?”
“내 질문이 틀렸군. 만약 자네들에게 100억의 보수가 주어진다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겠나?”
김회장의 의뢰를 받은 중고차 딜러 차인성과 자동차 정비사 신준희는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이다. 어린 나이에 미혼부가 되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차인성은 언젠가 멋진 스포츠카를 소유하는 게 꿈이지만, 희소병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꿈을 잠시 접어두고 성실히 사업을 일궈나가고 있다. 신준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동차 사고로 잃고 괴로워하지만, 스포츠카를 향한 연인의 뜨거운 애정을 기리며 여전히 취미이자 일로서 소중히 차를 대한다. 그러나 언뜻 단단해 보이는 준희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다. 바로 김회장과 그의 전 부인 채희주에 대한 원망이다. 그들은 자식인 유영과 조카인 준희를 기르며 간혹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왔고, 그것이 오래도록 준희를 괴롭게 한 것이다.
차인성과 신준희 두 사람은 패스워드를 찾기 위해 콤비를 이뤄 유영이 남긴 흔적을 쫓기 시작한다. 그간 이수안 작가가 천착해온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머금고, 소설은 패스워드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서히 풀어나간다. 준희는 과연 상처를 대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유영을 해치려 한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과연 두 사람은 패스워드를 알아내고 김회장이 약속한 100억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자동차 마니아인 작가의 취향이 곁들여진 이 소설에는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S와 포르셰 GT2 RS를 포함하여 다양한 스포츠카가 등장해 이야기를 힘차게 이끈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의 등장으로 내연기관을 가진 차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지금, 작가는 언젠가 사라질지 모를 스포츠카의 아름다움과 치명적인 속도감을 통해 청년 세대의 꿈과 욕망을 향한 질주를 은유하는 듯하다. 등장인물이 오랜 시간 지녀온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리고 공허한 탐욕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를 상기시키며 소설은 결말로 달려나간다. 가슴 뛰는 꿈을 지닌 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스포츠카 레이싱이 자아내는 속도감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독자들을 숨막히는 미스터리 추격극 속으로 금세 빨려들게 할 것이다.
구매가격 : 11,800 원
매니악
도서정보 : 벵하민 라바투트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26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2023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
★ 2023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 2024 앤드루카네기메달 최종 후보작
“지금 우리가 만드는 괴물은 역사를 바꾸겠지,
미래에도 역사라는 게 남아 있다면 말이야!”
_존 폰 노이만
에렌페스트, 폰 노이만, 파인먼, 그리고 이세돌과 AI……
과학사와 세계사를 뿌리째 뒤흔든 ‘폭발적 지성’을 만나다!
2021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자 전 세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화제를 모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또 하나의 문제작을 들고 찾아왔다. 전작이 현대 과학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온 여러 과학자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신작 『매니악』은 ①파울 에렌페스트(물리학자) ②존 폰 노이만(수학자・물리학자・컴퓨터과학자) ③이세돌(바둑 기사)의 내면과 행동, 그로 인해 격변하는 세계에 초점을 맞춘 소설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근거한 허구로 쓰여진 논픽션소설이다.
이야기는 에렌페스트의 비이성(불확정성・양자역학)의 발견으로 시작되어 → 폰 노이만에 의해 매니악 컴퓨터가 발명되고 → 그것이 더욱 발전되어 지금의 AI(알파고)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내며 전개된다. 특히 3부 대미를 장식하는 이세돌 파트는 바둑과 AI라는 과거와 현재가, 동양과 서양이, 인간과 기계가 충돌-대결하는 격전장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히 펼쳐진다.
양자역학의 부상-컴퓨터의 탄생-AI 혁명
누구도 예상 못한 ‘세상의 창조’는
누구도 짐작 못할 ‘지성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
과학사의 천재들, 우리와 다른 외계인…… 감히 범접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천재들의 머릿속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그의 두뇌가 일반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맥 빠지는 사실만 확인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진 사고는 분명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재들의 머릿속에선 대체 어떤 생각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고, 그 과정이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걸까?
『매니악』에서 펼쳐지는 천재들의 광기 어린 정신세계는 그 의문에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폭발적 지성’은 결국 붕괴로 이어졌고, 그 붕괴는 ‘새로운 창조’의 폭발을 낳았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유토피아인가, 아포칼립스인가?
인류를 이긴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하기까지, 천재들의 격돌과 고뇌를 추적하다
실존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어둡고 매혹적인 소설에서 라바투트는 과학기술이 폭압적 힘이 되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로부터 시작해, 100년 후 한국의 바둑 고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마무리되는 3부작의 중심에 존 폰 노이만을 배치했다. 즉 『매니악』은 폰 노이만 프로젝트의 핵심 질문, 즉 ‘인간의 이해나 통제를 넘어 진화하는 지능을 가진 자기 복제 기계의 탄생은 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비록 그 야심찬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후대 학자들의 도전으로 이어져 인류사에 또다른 족적을 남겼다.
세상에 없는 것, 완전히 새로운 것,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하는 결정적인 것을 향한 천재들의 광기 어린 지성이 폭발한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매니악과 핵무기, 인간 발명품 중 가장 독창적인 물건과 가장 파괴적인 물건이 정확히 동시에 탄생했고, 결국 인류는 파국을 향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다. 『매니악』에서 우리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가담했던 천재들의 고뇌와 격돌, 갈등과 갈망을 보다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며, 영화 <오펜하이머>에 미처 담기지 못한 과학자들의 민낯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 꿈꿨던 것은 유토피아였을까, 아포칼립스였을까. 이에 대한 답은 명확히 내릴 수 없지만, 이후 존 폰 노이만이 그토록 꿈꾸고 갈망했던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기계’ 알파고의 탄생은 세계사를 뒤흔든 위대한 창조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고뇌, 노력과 땀이 바쳐지는지를 드러내며, 새삼 놀라움과 감탄을 선사한다.
구매가격 : 13,500 원
남자의 후반생
도서정보 : 정진홍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완벽에의 충동』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이후
정진홍 11년 만의 신작
당신의 가슴을 또 한번 뛰게 할 단 한 권의 인문 수업
『논어』에서 『노인과 바다』
베토벤부터 반 고흐에 이르는
동서양 고전과 예술에서 길어올린 생의 철학
인문학적 깊이와 날카로운 통찰로 대한민국에 ‘인문경영’ 열풍을 일으킨 리딩멘토 정진홍이 11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왔다. 저자는 이번 책의 제목을 과감하게 ‘남자의 후반생’이라고 붙였다. ‘백세 시대’인 요즈음 후반생이라고 칭하면 막연하게 오십대 중년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숫자 그대로 ‘나이 오십’부터가 아닌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분명한 삶의 의지를 품는 순간부터 후반생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떤 태도와 가치를 추구해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후반생은 스스로 “더는 이따위로 살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며 다시 살아볼 엄두를 내는 바로 그 시점부터다. 물론 이 한마디가 술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고 홧김에 내지르는 말이 아니어야 한다. 푸념이나 입에 발린 말로 나와서는 흔해빠진 체념과 탄식의 췌언에 불과하겠지만 지난한 삶의 몸부림 끝에 나온 결기어린 외마디라면 삶을 송두리째 뒤집고 바꾸어놓을 만한 파괴력 있는 말이다. 결국, 어떤 계기에서든 정직하고 순절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진짜 제대로 살아봐야겠다고 스스로 각성하고 결심하며 결행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생 후반전에 돌입하는 셈이다. _13쪽
준비 없이 맞닥뜨린 삶의 한 시기에, 저자는 지나온 삶을 성찰해볼 만한 질문들을 던지며 인생 후반전을 위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 역설한다. 특유의 해박한 문화적 식견과 예술적 안목을 밑감으로 삼아 『논어』 『손자병법』 『노인과 바다』 등 동서양 고전을 재해석하고, 베토벤, 반 고흐, 윤봉길 등 역사 속 인물들의 생애를 반추하며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인생사계’ ‘심중지검’ ‘변화지세’ ‘본래면목’ 등 『남자의 후반생』에 담긴 화두는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절실한 삶의 지표를 제시하며, 단 하나뿐인 인문 수업이 될 것이다.
내일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결기
“추락한 곳에서 다시 날개를 펼쳐라!”
바쁜 일상에 치이고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하다보면 누구나 목표 의식이 희미해지는 정체 구간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설상가상으로 삶이 정체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명예, 부, 지위는 물론 건강까지도 잃게 된다. 저자는 그 시기에 무슨 각오를 다지고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삶은 다시 피어오를 수도 그대로 져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변화가 두려운 나머지 도전을 포기한 채 해오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산다면 인생 후반전 휘슬을 불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 저자는 그런 삶을 “미지근한 물속에서 중탕되어 익사하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라고 비유한다.
미지근한 삶의 중탕 그릇을 깨뜨리고 뛰쳐나와 다시 진정한 자기 삶을 꾸려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후반생이 시작되고 생이 다시 도약한다. 저자가 말하는 ‘제2의 전성기’는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다시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결기에서 나온다.
소는 두 종류다. 비육소와 싸움소. 비육소가 돼 살집만 키우다 기껏해야 2년이면 도살돼 정육점에 걸리는 소가 있고, 싸움소가 돼 자기 목숨을 걸고 10년 이상을 싸우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다 죽는 소가 있다. 비육소가 될 것인가, 싸움소가 될 것인가. 그 선택과 결정이 지금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끝끝내 싸움소로 살련다. _65쪽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고 했다. 누구나 쓰러지고 넘어진다. 때론 추락한다. 하지만 넘어진 곳에 주저앉지 않고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다시 열린다. 추락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애써 날갯짓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날마다 재창조된다. 그러니 바닥치고 일어서라! 추락한 곳에서 다시 날개를 펼쳐라! _91쪽
“삶은 떠밀린 지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다시 시작된다!”
모험을 마다않는 결기만큼 꺾이지 않는 마음 역시 중요하다. 저자는 삶의 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인물들의 생애를 그만의 시선으로 좇으며, 그 마음을 읽어낸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고흐는 생전에 외면당했지만 사후에 작품성을 인정받아 위대한 화가 반열에 올랐다. 고흐의 굴곡진 생애는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감동과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저자는 더 나아가 그의 삶이 떠밀린 삶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고흐는 어린 시절 목사를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떠밀리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작 십 년 남짓한 세월 동안 습작을 포함해 이천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저자에게 고흐의 그림은 “떠밀린 지점에서조차 처절하게 싸운 삶의 위대한 흔적”인 셈이다.
실패를 바라며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이 없듯이 떠밀리길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마련이다. 저자는 반 고흐의 생애를 반추하며 비록 떠밀린 삶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빛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되묻는다. “오늘 우리는 고흐처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가?”
잊지 말자. 삶은 떠밀린 바로 그 지점에서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처절한 싸움임을. 고흐는 떠밀린 지점에서조차 죽도록 그렸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삶의 위대한 작품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려라! 주저하지 말고. 싸워라! 처절하리만큼. 삶은 떠밀린 지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말자. _44쪽
머리를 곧게 세워라. 지금 우리 주변엔 고개 떨군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곳을 못 찾아 고개 떨군 젊은이들. 간신히 붙어는 있지만 언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고개 떨군 중년들. 하지만 다시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 아직 끝이 아니다. 끝인 듯 보이는 거기가 새 출발점이다. _77쪽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묻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남자의 후반생』에서 제시하는 삶의 태도와 가치는 결국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 “송곳 같은 물음”이야말로 후반생을 열어젖히는 열쇠라고 말한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노벨상 제정자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어느 날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자신의 부음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기사는 오보였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그 한 줄로 요약된다는 데 회의했고,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고민한 끝에 노벨상을 만든다. 노벨은 자신의 삶을 찌르는 질문에 “인류에 수여되는 최고로 가치 있는 상의 창설자”라는 답을 내린 셈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삶을 일구고 싶은지 물을 때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는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절실하게 묻고 또 묻는 저자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그리고 후반생을 맞는 이에게 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구매가격 : 14,000 원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
도서정보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 / (엮은이) 알방 스리지에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26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생텍쥐페리 실종 77년 만에 공개된 연서,
『어린 왕자』를 꽃피운 세기의 사랑을 만나다
전 세계인이 사랑한 『어린 왕자』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 작품의 주요한 모티프인 장미는 누구를 가리킬까?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에 수록된, 생텍쥐페리가 그의 아내 콘수엘로와 주고받은 168통의 편지는 독자들의 궁금증에 한 가지 답을 준다. 1930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점부터 생텍쥐페리가 비행중 실종된 1944년까지, 15년간 서로에게 부친 편지들이 작가의 내면과 창작의 이면을 생생히 드러낸 덕분이다.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어머니, 동료들에게도 많은 편지를 남겼지만, 그 글들과 달리 연인이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때론 격정적이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관계의 편린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은 그간 베일에 가려진 콘수엘로의 삶과 이들 부부의 관계뿐 아니라 앙투안의 창작의 순간을 재생하며, 결국 그 장미는 다름 아닌 콘수엘로였음을 보여준다. ‘생텍쥐페리 재단’과 갈리마르 출판사의 협업을 통해 168통의 편지, 앙투안과 콘수엘로가 직접 그린 그림과 육필원고, 보도사진 등 72점의 이미지를 촘촘히 수록한 이 책은 명작을 탄생시키기까지 두 작가의 불꽃 같은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나의 모든 것, 난 당신에게 충실해. 나는 당신을 세계 곳곳으로 데려갈 거고, 우리는 별들을 길들일 거야.”
_「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당신에게는 빛이 있어. 당신은 그 빛을 어디서 얻었지? 그 빛을 어떻게 돌려줘? 자기 행성을 떠난 어린 왕자들이 노래하게 만드는, 그 왕자들을 소생시키는 달빛은 어디로 스며들지?”
_「콘수엘로가 앙투안에게」
“편지를 써줘…… 편지가 오면 내 마음에도 봄이 와”
생텍쥐페리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
그들의 열정적이고도 파란만장했던 운명 속으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운명의 여인 콘수엘로를 만난 것은 1930년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프랑스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장에서였다. 생텍쥐페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콘수엘로에게서 시적이고 창조적인 분신을 발견하고 첫눈에 매료되었고, 석 달간의 동거 끝에 1931년 결혼식을 올린다. 앙투안은 콘수엘로를 ‘황금 깃털’ ‘병아리’ ‘오이풀’ 등의 애칭으로, 콘수엘로는 앙투안을 ‘파푸’ ‘토니오’ 등의 애칭으로 부르며 그들만의 “몽상적 영토”(갈리마르 편집자, 알방 스리지에)를 공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첫 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앙투안이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보물을 품지 못하는 우울한 아이’에 빗댄 것처럼, 둘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북아프리카부터 남아메리카까지 세계의 상공을 누비던 그의 불안정한 생활 탓도 있지만, 두 사람의 기질 차이도 한몫을 했다. 엘살바도르 출신으로 자주 고립감을 느꼈던 콘수엘로는 친구들과 자유로운 교류를 원한 반면, 긴 비행에 지친 앙투안은 그녀가 안정적인 보금자리 역할을 해주길 바란 것이다. 때로 이런 갈등은 격화되어 앙투안은 『어린 왕자』를 인용해가며 “‘꽃은 언제나 어린 왕자 탓을 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떠났다!’ 이게 바로 내가 불평하는 이유야”(204쪽)라고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안식처였으며―“앙투안은 용암처럼 들끓는 알제에서 외롭고, 콘수엘로는 밀림 같은 뉴욕에서 외롭다. 세상천지에 오로지 둘뿐이다”(생텍쥐페리의 증손자 올리비에 다게, 22쪽)― 서로의 창작 활동을 독려하는 동반자 관계였다. 비행으로 평탄치 못한 일상을 보내는 남편에게 콘수엘로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독려하고, 전작들의 반응을 전하며 심정적 지지를 놓지 않는다.
“토니오. 소설 열심히 써서, 아주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봐. 우리의 이별, 절망, 우리 사랑이 흘린 눈물이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물들의 신비를 꿰뚫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_「콘수엘로가 앙투안에게」
“계속해야 해. 허튼 생각 하면 안 돼, 남편. 난 당신이 그 책을 끝내야 한다고 굳게 믿어. 책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야. 글을 써, 절대 피하지 말고. 가능하면 지금 있는 곳에서, 안전하게 있다면(나는 신경쓰지 마) 꼭 쓰도록 해.”
_「콘수엘로가 앙투안에게」
“『어린 왕자』는 당신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태어났지”
길들여진 한 송이 꽃과의 사랑을 담기까지,
서간집으로 만나는 『어린 왕자』의 기원
관계에 대한 시적인 통찰을 담은 책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꼽히는 『어린 왕자』. 놀랍게도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에서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앙투안은 ‘어린 왕자와 길들여진 한 송이 꽃의 사랑’이라는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랑을 우수에 찬 마음으로 떠올리면서 콘수엘로와 함께 시를 누렸고, 그 시는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었다. 앙투안이 아직 『어린 왕자』(1943)를 한 줄도 쓰지 않았고 그림 한 점도 그리지 않은 1940년, 콘수엘로가 쓴 편지에는 이미 여인이 장미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콘수엘로와 함께한 초기부터 그녀를 ‘오이풀’이라고 불렀던 앙투안은 이야기 초반에 꽃을 오이풀 모양으로 그린 바 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어린 왕자가 한 그루 나무가 쓰러지듯 서서히 쓰러진 것 역시 콘수엘로가 앙투안을 나무에 비유하곤 했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날아든 씨앗, 멋 부리는 꽃, 그 꽃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어린 왕자, 어린 왕자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지만 바람을 무서워하는 꽃, 기침을 하고―콘수엘로에게는 천식이 있었다― 가시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다정함을 감추는 꽃…… 『어린 왕자』 속 왕자와 꽃의 모습은 서간집 속 앙투안과 콘수엘로의 모습과 겹치며, 혼란스러웠던 부부의 삶이 앙투안을 이 이야기로 이끌었으리라 짐작게 한다.
“난 곧 오이풀이 될 거야. (...) 나는 예쁜 오이풀이 될 거야. 오이풀은 길을 잃었어. 죽었어. 그 예쁜 오이풀을 초록 풀밭으로 데려가서 꽃과 노래로 옷을 입혀줘. 더는 누구도 그 오이풀에 상처 주지 못하게. 오이풀은 파푸의 시가 될 거야, 파푸가 흘린 그 많은 피로 쓴 시!
_「콘수엘로가 앙투안에게」
“난 어린 왕자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세계 속을 거닐어…… 거기선 아무도 날 건들지 못하지…… 비록 가시는 네 개뿐이지만, 당신이 그 가시를 보아주고, 세어봐주고, 기억해주니까……”
_「콘수엘로가 앙투안에게」
문학 독자들의 허기를 채울 충실한 아카이빙
갈리마르 출판사·생텍쥐페리 재단의 협업으로 작가의 삶과 시대를 복원하다
스타 부부의 가려진 삶과 『어린 왕자』의 탄생 배경을 전하는 것 외에 이 서간집이 가진 미덕은 또 있다. ‘생텍쥐페리 재단’과 갈리마르 출판사의 협업을 통해 육필원고, 작가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 삽화(434쪽) 등 풍성한 자료를 수록한 것은 물론, 편지가 쓰인 당대의 맥락을 상세한 각주로 복원했기에 생텍쥐페리의 삶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앙투안이 당대 문화계를 지배한 초현실주의자들(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등)과 교류한 점이나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 시의 언어유희를 시도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한 오랜 비행 경력을 자랑하는 그가 상공이나 이국에서의 풍광을 묘사한 부분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시공간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날씨가 나빴어. 쉼없이 바람에 얻어맞았지. 때로 푸른 하늘이 나타나면 3천 피트 고도에 피해 있었어.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바람이 세차게 일면 그 차가운 기운에 땀이 마르지. 그런 바람은 위험하진 않아. 하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 너무 세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지. 그러면 부동의 황금빛 휴식을 멈추고 다시 지상의 무질서와 흔들림과 참을 수 없는 열기 속으로 들어가야 해. 탕헤르, 죽어 있는 작은 도시.”
_「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무엇보다 제2차세계대전시 정찰병으로 참전한 바 있는 그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가감 없이 드러나는데, 당대 전쟁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입장 가운데 하나로서 참고할 만하다. 실상 앙투안은 비시 정부의 수반 페탱도,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이끌며 독일에 맞선 드골도 지지하지 않았고 이런 태도로 인해 뉴욕에 머물던 시기, 비시 정부 협력자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는 어느 쪽도 아니었고, 다만 그가 택한 것은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전쟁터에 출격해 비행을 마다하지 않는 실천이었다. 정치적 외로움과 전쟁의 불안 속에서 앙투안을 위로하는 것은 끝내 그의 다정한 별, 콘수엘로였을 것이다.
“그래도 난 떠나. 서류 작업도 아니고 전투비행을 하러 간다고. 그쪽으로 지원했어. 난 전쟁을 하러 떠나. 나는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어. 내가 아는 한, 양심에 거리낌 없이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최대한 고통받는 것. 가능한 한 많은 고통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어.”
_「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구매가격 : 24,500 원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문학동네청소년 68)
도서정보 : 문이소 / 문학동네 / 2024년 02월 05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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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나를 덕질한다면?
21세기에 도착한 22세기 인간이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라면?
퇴치 대상으로 여겼던 존재가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내 옆의 그가 감쪽같이 정체를 숨긴 외계 생명체라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꿈으로 그린다면?
시공간은 현재에 우리를 붙들어 두지만, 눈은 저 너머 닿고 싶은 미래로, 모험해 볼 만한 미래로 향한다. 21세기와 22세기 인간이, 인간과 인공지능이, 외계 생명체와 지구 거주자가, 동물과 반려로봇이, 죽음과 삶이 온화하게 연결된 미래. 「마지막 히치하이커」로 제4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수상한 문이소 작가가 그간 발표한 작품과 미발표작으로 꾸린 첫 SF 소설집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은 기발한 발상으로 재깍재깍 흘러가는 현재를 거쳐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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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살아 봐서 아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나를 안지 못할 때, 나를 안아 주는 존재들
우주의 광막함을 유머와 다정으로 방울방울 채운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 작가, 문이소의 첫 SF 소설집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에는 비밀을 숨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정체를, 누군가는 목적을,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모종의 계획을. ‘나’로 살아가는 게 어렵지만 ‘나’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그들. ‘우리’라는 아름다운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그들.
우주의 시공간을 구부리고 비트는 작가는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로 독자의 시공간을 접는 마법을 보여 준다. 독자의 팔짱을 끼고 지면을 내달리는 재미, 가뿐한 호흡, 삼라만상 다정한 거리, 깊이 있는 주제로 첫 페이지를 펼치면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후루룩 넘어가 있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불규칙한 단차 앞에서 걸음을 휘청하듯 의외의 농담에 허를 찔리기도. 이 쫀득한 유머야말로 문이소 작품의 핵심 아닐는지. 그러나 이 유머 레이어 아래 작가가 견지하는 것은 이것이다. “대입을 목표로 달려가는 삶이 아닌 취업 혹은 그 외의 길을 찾아 조심스레 걸어가는 청소년, 일상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이들, 인간들이 점령한 터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향한 응원. 핵개인화되고 있는 지금 마음을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과의 건강한 거리”. 비인간과 인간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를 넘어서, 은하와 은하, 삶과 죽음을 넘어서.
구매가격 : 8,800 원
18세기의 사랑
도서정보 : 이영목·김영욱·민은경 외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낭만적 사랑’은 18세기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인류 역사의 역동을 이끈 아름다운 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술과 생각의 새로움을 이끈 사랑의 모험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번에는 사랑이다. 일면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지만 끝내 탐구해야 할 인간의 조건이다. 학문의 궁극은 인간을 향한다. 인류 역사의 동력인 사랑은 문학과 역사, 철학과 사회에 대한 성찰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때론 변화를 이끌었다.
『18세기의 사랑: 낭만의 혁명과 연애의 탄생』은 한국18세기학회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 열네 명이 ‘사랑’을 키워드로 18세기 사랑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를 탐구한 책이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개인의 갈망과 욕망은 사회를 변화시켰고, 반대로 세상의 억압이나 시대의 변화가 사랑이란 관념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문학가와 철학가의 지적이고도 환희에 찬 연애, 사교계 남녀의 은밀한 유혹, 자화상과 신화화(神話畵)에 나타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각자의 사랑 이야기에 계몽주의, 낭만주의의 시작, 개인의 등장과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그늘,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제법 묵직한 주제가 갈피갈피 끼어들지만, 결말이 궁금한 로맨스 드라마 다음 회 재생하듯 어느새 단숨에 읽힌다. 역시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기 때문일까.
책에 실린 글은 2023년 ‘18세기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네이버 문학동네 포스트에 연재되며 큰 호응을 얻었다.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18세기 도시: 교류의 시작과 장소의 역사』 『18세기의 방: 공간의 욕망과 사생활의 발견』과 궤를 나란히 하는 한국18세기학회의 네번째 책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혁명
삼자결혼은 행복의 트라이앵글? 우정의 찬미에서 사랑의 합일로
유럽의, 특히 프랑스의 18세기는 ‘빛의 세기’이자 ‘철학자들의 세기’이다. 이 시기 사랑은 혁명적 변혁을 겪으며 도약했다. 유럽 18세기의 위대한 발명품, ‘낭만적 사랑’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드디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며, ‘영혼의 반쪽’을 만나는 합일의 관계를 꿈꿨다.
「낭만적 사랑의 혁명」에서는 슐레겔의 소설 『루친데』를 통해, 사랑과 우정 사이의 우열 관계에 대한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사랑이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총체적인 것이자 가장 배타적인 것”으로 격상하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율리우스를 구원해준 것이 루친데와의 낭만적 사랑이다. 그는 화가 루친데와 같이 밤을 보내면서 그녀와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존재의 통일성을 체험한다. 그녀와의 사랑이 개인의 분열된 관계를 극복하는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루친데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다. “사랑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우정, 아름다운 사교, 감각적 욕망과 열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어야 […] 해요.” 여기서 처음으로 육체적 사랑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진정한 사랑은 성적 사랑에서 절정에 이르며, 성적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필수 전제가 된다. 물론 육체적 관계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 사랑의 의미는 감각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구분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분리를 모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이란 한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사랑하는 일일진대, 어떻게 연인의 정신과 몸을 분리해서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슐레겔은 이렇게 사랑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사랑의 유구한 이원론적 전통을 파괴한다. 낭만적 사랑은 이런 점에서 ‘혁명’이라 불려도 마땅하다. -「낭만적 사랑의 혁명」 63~64쪽
그전까지만 해도 사랑은 그다지 존중받는 감정도, 인간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 독일에서는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 친구를 두거나 “삼자결혼(die Ehe zu Dritt)”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가 발견된다. 예컨대 게오르크 포르스터(제임스 쿡의 세계일주에 동행해 유명해진 민속·박물학자이자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공화주의자)는 자신의 아내 테레제의 친한 남자 친구이자 작가인 마이어(F. L. W. Meyer)를 질투하기는커녕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테레제의 형제이자 친구로서 서로 사랑합시다.” 또한 작가이자 여권론자였던 에밀리에 폰 베를랩슈는 소설가 장 파울에게 다른 여성과의 결혼을 권하면서 자신은 그 옆에서 친구로 함께 살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삼각관계는 사교계에서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행복의 트라이앵글”로 찬미되기도 했다. 삼자결혼은 친구와 연인, 부부가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고유한 관계라는 굳건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듯 외도나 ‘정신적 바람’으로 쉽게 치부될 수 없었다. 사랑의 진정한 배타성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다.
욕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갈증, 사랑하므로 인간이다
에로티슴, 자기색정… 사랑을 향한 지적 유희와 탐구
실제로 있었던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와 가난한 가정교사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중세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는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의 비극적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루소는 『쥘리, 신 엘로이즈』를 썼다. 그 밖에도 많은 문필가의 손 끝에서 당대의 새로운 엘로이즈/엘로이자는 수용되고 변형되면서 낭만적 사랑의 여러 특성을 보여주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는 1717년에 발표된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자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에서 따온 것이다.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먼이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이야기에 깊이 매혹된 흔적은 그의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의 인형극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18세기 문인의 대표인 볼테르의 삶에서 샤틀레 부인은 거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규범에 맞지 않으나 용인되었던 이들 커플은 당대 최고 지성인의 사교계에서 “개인적 삶을 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사회라는 무대에 배우로서 등장”했다. 이들의 사랑엔 과학에 대한 순수한 탐구와 지적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떤 철학자들은 “생명을 얻게 된 석상이 점차 지식을 얻고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자기색정’과 ‘에로티슴’은 무슨 말인가? 「피그말리온의 사랑」에서는 피그말리온 신화의 18세기적 변형이 로크의 감각론과 함께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지 추적한다.
유혹과 기록
가짜 점과 부채, 신화 속 사랑, 모차르트의 오페라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가짜 점이 유행했다. 부채를 펼치고 흔드는 동작에도 다 의미가 있었다. 모두 이성을 유혹하는 은밀한 암호였다(「가짜 점, 부채 그리고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프랑스 신화화의 장면들」에서는 ‘페트 갈랑트’라는 장르의 유행에서 개인의 존재, 감각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읽어냈다. 「모차르트의 풀리지 않는 사랑 방정식과 그의 오페라에 투영된 성」에서는 모차르트가 계몽주의자라는 신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서 시작해, 그의 오페라에서 새로운 개인의 성적 정체성의 확립과 혁명 직전의 격동하는 사회의 상징이 있음을 간파했다.
사랑은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의 감정이지만 오래도록 우리에게 여운과 잔상을 남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느끼는 사회적 감정의 메커니즘으로서 사랑은 종족 번식을 위한 동물의 교미나 쾌락을 위한 섹스와는 달라야 한다는 18세기의 계몽주의적 태도는, 강박적으로 사랑의 완수를 위한 사회적 과정과 태도에 집착했다. 연애 장면과 성애 장면을 포착해 생생한 감각을 화폭에 담은 회화 작품은 그 자체로 사랑의 완수에 대한 시각적 증거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찰나의 사랑이 신화가 되는 순간을 기록해 영원으로 박제하는 일은 회화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에 대한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프랑스 신화화의 장면들」 104, 106쪽
시대의 사랑
신분을 뛰어넘고 금기를 비웃으며 이념과 제도의 벽을 가뿐히 부수고 달려가는 힘
18세기는 전시대의 ‘지리상의 발견’의 여러 좋고 나쁜 가능성들이 실현되는 시대다.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성찰의 계기는 노예무역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현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잉클과 야리코의 이야기」는 이 불행한 결합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영국의 몰락한 왕당파 라이곤은 신대륙을 찾아 떠났다가 바베이도스섬에 도착해 그곳의 원주민 야리코를 만난다. 원주민 부족의 공격에 노출된 라이곤을 발견한 야리코는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를 동굴에 숨겨주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데…… 실화였던 이 이야기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잉클과 야리코’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다)의 낭만적 결말로 끝나지 않았다. 야리코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의 지배를 받지만 그 현실의 질곡조차 뛰어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어떤 사랑은 기적처럼 세상의 편견과 굴레를 뛰어넘었다. 캐서린(캐서린 데스파드의 어머니는 자메이카의 노예였거나 자유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과 에드워드 데스파드 대령의 결혼은 인종 간 결혼으로 주목을 받았다. 데스파드 대령은 스스로를 “빈민의 친구”라 칭한 평등주의자였다. 점령지에서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관계없이 동등하게 토지 분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공분을 샀다. 점령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캐서린을 아내로 소개했다.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였을까?
사랑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이 수많은 현상, 욕망,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8세기의 사랑’ 프로젝트를 이끈 한국18세기학회장 이영목 교수(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다양한 표현에서 어떤 인간의 본성을 읽기에는 우리의 이성이 너무 제한적”이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다만 지금 현재로서는 ‘알려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정원을 경작’할 뿐”이다. 그런 지적 겸손이 어쩌면 사랑을 사랑하는 마음이리라.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혹여 생명을 부지하는 일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능하다 한들 숨만 붙어 있고 사랑 없는 삶, 그런 삶은 계속 호흡하고 싶은 삶일까? 이번에는 사랑이다. 일면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지만 끝내 탐구해야 할 인간의 조건이다. 학문의 궁극은 인간을 향한다. 인류 역사의 동력인 사랑은 우리가 탐구하는 문학과 역사, 철학과 사회에 대한 성찰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때론 변화를 이끌었다. 우리는 사랑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사랑의 마음으로. 볼테르가 말했듯이, “사랑하고 사유하는 데 바쳐진 삶이 진정한 삶”이기에.
유럽의, 특히 프랑스의 18세기는 ‘빛의 세기’이자 ‘철학자들의 세기’이다. ‘낭만적 사랑’은 유럽 18세기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 머리말에서
구매가격 : 15,000 원
새로운 야생의 땅
도서정보 : 다이앤 쿡 / 문학동네 / 2024년 02월 02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우리가 기대한 것은 오직 깨끗한 공기와 물,
그리고 새로운 삶이었다”
서로 다른 생존을 꿈꾸는
엄마와 딸의 디스토피아 에코 픽션
기후 위기로 세상이 파괴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야생의 땅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새로운 야생의 땅』이 출간되었다.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고 미국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This American Life> 프로듀서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 다이앤 쿡은 진실을 전하는 소설의 힘을 절감한 뒤 소설 창작의 세계로 돌아가, 2015년 첫 소설집 『인간 대 자연Man V. Nature』을 발표했다. 이 책으로 가디언 퍼스트 북 어워드, 빌리버 북 어워드 최종후보에 오르며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딘 작가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긴장관계라는 관심사를 한층 더 깊게 파고들어 장편소설 작업에 착수했고, 2020년 『새로운 야생의 땅』을 발표해 출간 즉시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뒤이어 “우리 시대의 환경 소설. 충격적일 정도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다”는 평과 함께 그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지명되었고, 세번째 부커상 수상에 도전하는 영국의 대표작가 힐러리 맨틀을 제치고 첫 장편소설로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야생의 땅으로 떠난 모녀의 힘겨운 싸움을 그린 이 이야기는 “인간성에 대한 잔혹하고도 매력적인 우화. 시의적절한 것을 넘어 마치 최근에 재조명받는 고전인 듯 시대를 초월한 탄탄함을 갖췄다”(워싱턴 포스트) 등의 극찬을 받으며 그해 <워싱턴 포스트>와 NPR, 버즈피드 선정 ‘올해의 책’, <가디언> 선정 ‘올해의 SF’에 올랐다. <클로버필드> <혹성탈출> 시리즈의 감독 맷 리브스와 워너브러더스가 공동 제작해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발표되어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삶을 위해 선택한 새로운 야생의 땅
그곳에서 마주한 투명하고 잔혹한 진실
수많은 땅이 망가지고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거주지인 ‘시티’는 인구 과밀 등으로 심각하게 오염된 근미래. 서서히 죽어가는 다섯 살 난 딸 애그니스를 살리기 위해 비어트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 그러기 위해 비어트리스는 애그니스와 함께 한 가지 실험, 즉 야생의 땅 ‘윌더니스’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실험에 참가하기로 한다.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두 사람과 다른 열여덟 명의 참가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떠나기 전 기대했던 삶 이면에 전혀 예기치 못한 난관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참가자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자연에서 자급자족해야 할 뿐 아니라 한 장소에 일주일 이상 머무를 수 없으며,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는 인간이 생활했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야 한다. 출산을 하는 순간조차 문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누군가 세상을 떠나거나 부상을 당해도 수치의 증감으로 기록될 뿐이며, 사소한 규칙이라도 위반할 경우 그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레인저’에 의해 즉시 제지를 당한다. 피난처로 보였던 윌더니스는 사실 도시와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규칙에 따라 원시시대 유목민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가며 생존의 기술을 터득해나가는 사이 그들에게서는 도시인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진다. 위험이 도사리는 야생의 땅에서 목숨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가 된 그들은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며 무리의 숫자는 조금씩 줄어간다.
한편 애그니스는 윌더니스에서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체득하고, 거의 야생동물처럼 모든 감각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무리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는 애그니스를 바라보며 비어트리스는 안도감보다는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이 실험을 통해 애그니스의 목숨을 구한 대신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딸을 잃을 수도 있으리란 예감을 한다. 애그니스는 언제나 엄마의 사랑을 원하지만 묘하게 자신을 멀리하는 듯한 비어트리스의 태도를 보며 갈망과 원망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시티에서의 삶을, 유독한 공기로 오염되어 모든 생명이 죽어가는 그곳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듯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별을 예감한다.
자연과 인간,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시 묻는
이 시대에 반드시 읽어야 할 디스토피아 에코 픽션
『새로운 야생의 땅』은 독자를 단숨에 야생지대 한복판으로 초대한다. 취재차 미국 오리건주의 사막지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실제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을 돌아다니고 퓨마나 엘크 등의 야생동물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경험은 작품의 정교한 무대를 만들어내고 생생함을 더한다. 아름답지만 냉혹한, 삶의 터전으로서의 야생지대와 걷잡을 수 없이 오염되어가는 도시의 묘사에서 우리는 근미래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을 볼 수 있다. 깨끗하고 안전한 물과 공기가 더이상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고도 섬찟하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의 생존을 꿈꾸며, 결국 무겁고도 어려운 질문을 맞이한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또 생존을 위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있다. 반평생을 도시에서 자라 그곳의 참상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그곳을 그리워하는 비어트리스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야생지대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를 그곳에 사는 동물처럼 여기는 애그니스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주변과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소유욕을 놓지 못한 채 상대를 끊임없이 밀고 당긴다. 그리고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 마침내 비어트리스의 입장에 서게 된 애그니스의 깨달음은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도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모성과 모녀관계의 복잡함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완전히 무너진 세계에서 서로 다른 삶을 꿈꾸던 비어트리스와 애그니스 앞에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새로운 야생의 땅』은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이 시대에 반드시 읽어야 할”(USA 투데이) 디스토피아 에코 픽션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구매가격 : 13,000 원
토끼전・장끼전 (한국고전문학전집 033)
도서정보 : 정출헌(역자)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19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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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위협받는 힘없는 존재의 불안정한 삶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다
한국판 『레미제라블』!
가혹한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민초들의 꿋꿋한 의지
조선 최고의 연행 예술 판소리, 최하층 부류 유랑민을 주인공으로 발탁하다
『토끼전·장끼전』은 향촌 사회의 급속한 변화상과 세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포착하고 동물에 빗대어 희화화한 판소리계 우화소설이다. 『토끼전』은 충절이란 명분으로 백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봉건국가에서 토끼와 자라라는 힘없는 존재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준다. 『장끼전』은 장끼와 까투리로 대변되는 하층 유랑민이 엄동설한에 극심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비극뿐 아니라 과부가 남성들의 겁박에 맞서야 하는 수난을 그린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재치 있게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을 때로 희극적으로 그려내지만 고난에 찬 삶의 무게를 마냥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든다. 수백 년 전 소설이 오늘날 독자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현재 힘없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 겪는 수난과 고심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토끼전·장끼전』을 통해, 고전문학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와 유쾌한 저항정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 대신 동물을 내세우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전승되던 동물우화를 소설적 편폭으로 확장시킨 우화소설이 유행했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구성원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대립을 다루는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화소설에서는 토끼와 자라, 장끼와 까투리를 비롯해 별별 동물이 다투고 경쟁한다. 그저 그런 부류들이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는 꼴이라든가 부패한 수령과 결탁해 재물을 탈취하려는 모습을 그려 세태를 희화화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각축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부유한 평민과 실세한 사족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화소설은 그 같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포착했다.
최하층 유랑민을 주인공으로 발탁한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두 편
『토끼전』과 『장끼전』은 미천한 신분의 광대가 판소리로 다듬어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넓은 공간에서 선보이며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판소리야말로 조선 후기 최고의 연행 예술로 꼽히는데, 열두 마당 가운데 우화소설이 두 편이나 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전소설 작가들은 주인공을 으레 영웅적 인물 또는 재자가인으로 설정해왔다. 하지만 판소리 광대들은 그런 관행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그런 판소리 광대들이 길짐승 토끼와 날짐승 꿩의 삶에까지 눈길을 주었다. 꿩과 토끼야말로 힘없는 존재들이다. 향촌 주변 논밭을 전전하며 곡식 낟알을 주워 허기를 채우던 장끼와 까투리, 조정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던 자라, 목동·포수·매 등에게 쫓기며 살아가던 토끼는 조선 후기 최하층의 부류인 유랑민의 모습과 비슷하다. 판소리 광대들은 유랑민이 고난에 찬 삶을 살아가면서 엄혹한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우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토끼전』: 꾀 많은 토끼와 또다른 주인공 자라
봉건국가의 군주로 상징화된 용왕의 죽을병을 고치기 위해 육지 동물 토끼를 잡으러 가는 소동을 벌이는 『토끼전』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라에게 위험한 육지에 가서 토끼를 잡아오라는 임무가 부과되는 과정도 그렇지만, 수궁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토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 용왕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자라와, 용왕의 요구를 거부하고 달아나버린 토끼의 엇갈린 행보라는 놀라운 결말은 충절이란 명분으로 백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봉건국가의 부당한 요구 앞에 선 개인의 선택을 보여준다.
『토끼전』은 이본의 양상이 흥미롭다. 어떤 작품은 결말까지 사뭇 다르게 난다. 어떤 이본에서는 토끼를 놓친 자라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자 용왕이 약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가 하면, 어떤 이본에서는 도사가 나타나 자라에게 불로초를 주어 용왕이 살아나기도 한다. 이처럼 결말에 차이가 나는 까닭은 『토끼전』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결말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일까.
딜레마에 봉착한 캐릭터는 자라다. 『토끼전』에서는 자라 역시 주인공이다. 그런 사실을 반영하듯, 『토끼전』은 이본에 따라 『별주부전』도 있고, 둘의 이름을 나란히 드러낸 『토별가』 또는 『별토가』도 있다. 19세기 중반 송만재는 『토끼전』을 읽으며 토끼 못지않게 자라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많은 사람은 자라를 조역으로 취급하거나 용왕과 함께 비판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지만, 실제로 자라의 작중 역할은 막중하고도 흥미롭다. 토끼와 자라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의 목숨을 노릴 정도로 치열하게 맞서지만 사실 그 둘은 진정한 적대자가 아니다. 진짜 토끼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토끼의 간을 필요로 하는, 곧 무고한 서민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용왕이다. 『토끼전』에서 토끼는 지혜를 발휘해 끝내 자유를 찾고, 용왕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라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초상 아닐까? 그가 직면한 애환이 문제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장끼전』: 다섯 번의 장례식과 이후의 삶
『장끼전』을 읽다보면 안뜻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돌싱’ 특집이 떠오른다. 까투리는 다섯 번 결혼하고서도 또다시 가장을 잃어버려야 했다.
작품의 현실적인 핵심 사안은 굶주림의 문제다. 콩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장끼는 덫에 걸려 비명횡사하고 까투리는 아홉 아들 열두 딸을 혼자 키워야 하는 과부 신세로 전락한다. 떠돌이로서 궁핍하고 불안정한 삶이 그들 부부 앞에 놓인 최대 문제였다. 장끼의 죽음으로 까투리는 험난한 세상에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 앞으로 모든 고난은 연약한 까투리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데, 장끼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숱한 잡새의 구혼으로 그 시련은 현실화된다.
그러나 까투리의 생명력은 질기다. 다섯번째 남편이 죽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끝끝내 까투리는 좋은 짝을 찾게 될까?
과부를 차지하려는 수컷들의 회유와 겁박에 맞서 까투리는 수절과 개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정절이 목숨보다 중하다고 여기던 봉건 사회에서 까투리가 개가를 선택한다는 결말은 결코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다.
조선 후기 유랑민이 겪은 고난과 그로부터 비롯된 비극적인 삶, 그러나 그냥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든다. 이를 꿋꿋하게 이겨내는 까투리의 모습을 통해 조선 후기 하층 여성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봉건국가의 침탈에 시달리던 토끼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통해 지배층의 끝없는 탐욕과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문에 판소리계 우화소설이 이룩한 고도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은 과거의 유산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부조리한 요구와 회유가 끊이지 않고 있고,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지금 이런 시대야말로 판소리계 우화소설의 두 주인공인 토끼와 까투리의 결단과 선택이 더없이 밝은 빛을 발하는 순간이지 않을까. 부익부빈익빈의 사회현상이 점차 심해지며 재물의 위력이 힘없는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할 때 어떤 결단이 필요한가를 생동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전소설 『토끼전』과 『장끼전』이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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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도서정보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1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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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 단편문학의 정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신작 소설집
문학이 줄 수 있는 자기 발견의 기쁨과 고통을 앤드루 포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은 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재발견하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의 차기작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_최은영(소설가)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한국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앤드루 포터의 두번째 소설집 『사라진 것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고, 포워드 매거진, 샌안토니오 익스프레스 등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장편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에서 단편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한 앤드루 포터가 내놓은 신작 소설집이다. 삶의 분기점에 이르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시선,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체, 쉽게 잊히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기는 강렬한 엔딩으로 미국 현대 단편소설 미학의 정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앤드루 포터는 국내에 소개된 뒤 문학 팬들은 물론 많은 작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배우 박정민, 유인나가 극찬하고 가수 아이유도 독서를 인증하는 등 문학계를 넘어 대중으로 확산되며 읽는 이를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 바 있다.
『사라진 것들』은 그런 앤드루 포터가 첫번째 소설집 이후 15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소설집이다. 첫 번째 소설집으로 “무시무시한 작품집”(런던 타임스)이라는 평과 함께 “현재 미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편 작가”(인디펜던스)로 꼽힌 그는 15년을 지나오며 삶에 대한 더욱 깊은 통찰이 담긴 열다섯 편의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다. 작가에게도, 한 사람의 삶에서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사라진 것들』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바로 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우리에게서 가져가는 것들, 우리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청춘이나 예술,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 『사라진 것들』의 인물들은 가까이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이후에 남겨진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사라짐은 때로 쓸쓸함을 남기고, 지나간 것들은 유난히 찬연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지금이, 아직 다가올 날들이 있다고 일깨우는 포터의 소설들은 우리의 마음에 깊고 넓은 파동을 만든다.
이 훌륭한 소설집을 읽고 나면 모든 글쓰기의 숨겨진 주제는 시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분명 시간은 사랑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고, 앤드루 포터의 유연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안타고니스트, 연인이자 적이다. 스쳐가는 의심을 귀신 들린 집으로 만드는 시간, 가장 소중한 희망을 상실이 메아리치는 밀실로 만드는 시간, 가장 강한 마음마저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시간. 그러나 시간과 고통 없이는 영혼도 없을 것이며, 이 이야기들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은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사라진 것들』은 이미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_찰스 담브로시오(소설가)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사라진 것들』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인생의 중반 단계에 진입한 화자들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그러했듯 과거의 한 시점에 있었던 일을 세심히 되짚어보며 회고하는 서술 방식은 여전한데, 겹겹이 쌓이며 삶을 이뤄나가는 시절의 지층을 헤아리는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
소설집의 첫 문을 여는 「오스틴」에서 ‘나’는 한 파티에서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하고 지낸 친구들을 만난다. 각기 다른 속도로 삶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의 면면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나’는 한 십대 소년의 아이러니한 죽음을 두고 벌어진 윤리 논쟁에 합류하지 못하고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라고 독백한다. 젊은 시절을 지나며 어떤 일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의 목소리는 따뜻한 듯 쓸쓸하다. 「넝쿨식물」에서 ‘나’는 미술가인 여자친구 마야와 작은 차고 아파트에 세들어 살던 시절을 회고한다. 사랑과 예술과 질투라는 단어들로 기억될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지만,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 예술을 통해 ‘특별한’ 삶을 살기 위해 ‘나’를 뒤로한 채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마야가 예술가로서 활개를 펴는 대신 오래도록 암과 투쟁하는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게 아마 인생에 펼쳐지는 보통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사라진 것들’이라는 소설집의 제목 그대로, 이처럼 이 책에는 사라진 많은 것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촉망받던 연주자가 희귀질환으로 한순간에 잃어버린 재능이기도 하고(「첼로」), 빛나는 청춘의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꿈꾸던 미래이기도 하며(「라인벡」), 한 부부의 사이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둘의 관계를 영영 바꿔버린 한 소녀이기도 하다(「히메나」). 앤드루 포터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그런 사라짐을 통해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이 실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_「라인벡」
표제작이자 소설집의 문을 닫는 단편 「사라진 것들」은 ‘나’와 절친했던 친구의 실종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광대한 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하다 실종된 대니얼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를 애도하거나 희망을 품는다. ‘나’는 대니얼이 돌아올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여자친구 앙투아네트와 함께 그가 남긴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대니얼을 회상한다. 같은 사람을 잃었지만 다른 것을 잃었을 두 사람은 대니얼의 집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며 그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깃든 그곳을 언젠가는 영영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움에 가깝게 예감하며.
불안하지만 빛나던 시절
청춘, 예술 그리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
『사라진 것들』은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 이후를 그리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모든 것은 과거로 향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들이 지나간 이후에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어느덧 우리의 인생이 예상치 못했던 낯선 곳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고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삶에 지울 수 없이 각인되는 순간들과 그로 인한 성장통을 다루었다면, 『사라진 것들』은 한층 깊어진 눈으로 삶에서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눈부시게 그려낸다. 어쩌면 찰나일지 모를 지금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졌고, 또 사라져갈 그 모든 것들이 눈부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앤드루 포터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구매가격 : 12,600 원
박하네 분짜 (보름달문고 92)
도서정보 : 유영소 / 문학동네 / 2024년 01월 13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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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억될 열세 살의 순간
흔들리는 오늘이 있기에 더욱 선명할 내일
마해송문학상, 정채봉문학상을 수상한 유영소 작가의 신작 동화집 『박하네 분짜』가 출간되었다. 마냥 어리지도, 그렇다고 아직 청소년도 아닌 6학년 여섯 아이의 여섯 가지 이야기가 담겼다. 소꿉친구 박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미소,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자기만 외돌토리인 것 같은 지수,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연우, 얼떨결에 남자친구가 생긴 해린, 어긋난 친구 관계에 혼란스러운 이진, 이사와 전학을 앞두고 정든 동네를 돌아보는 나윤. 평범한 하루하루 같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툭 떠오를, 잊지 못할 성장의 순간이 펼쳐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고,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바로 오늘도 보통의 하루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길! 진짜 재미나길!_작가의 말에서
“아무나 좋아하지 말라고. 너를 존중하는 사람을 좋아해. 쫌!”
“너처럼?”
눈치 없는 너와 먹는 새콤달콤 분짜의 맛
#우정일까_사랑일까 #고백 #연애
어린이에게도 사랑과 연애는 정말이지 중요한 사건이다. 미소는 요즘 들어 소꿉친구 박하가 자꾸 떠올라 당황스럽다. 박하가 자기 엄마의 고향 필리핀에 다녀온 후로 키가 훌쩍 자라서일까? 아니면 친구 예지가 떠들썩한 공개 고백을 받아서일까? 중학교에 가기 전까진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조급함에서일지도 모른다. 「박하네 분짜」는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간질간질한 감정,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는 초조함을 찬찬히 보여 준다.
반면에 연애에 대한 또래 친구들의 높은 관심이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다. 「하필이면 까망」의 해린이는 친구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등 떠밀려 진서와 사귀게 된다. 하지만 막상 사귄다고 생각하니 진서가 갑자기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고 많은 색 중에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까만색” 옷을 입을 게 뭐람! 해린이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유영소 작가는 어린이들이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 마음, 내 생각을 먼저 헤아려 보고 싶었다.”
서먹해진 친구와 맞은 반짝반짝 첫눈
#친구 #우정 #전학
학교생활과 친구 관계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전학으로 갑자기 낯선 공간, 처음 보는 친구들 사이에 놓이게 되면 난도는 더욱 올라간다. 진이는 6학년, 그것도 2학기에 전학 온 온이가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진이도 1학기 때 전학 와서 단짝 무리에 끼는 데 꽤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이는 단짝이 없어도, 혼자 밥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친구들과 억지로 맞추는 대신 내가 좋은 대로, 내 뜻대로 가뿐한 온이를 보며 진이도 점차 자기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김온 스타일」은 또래 사이에서 나만 겉도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린다.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또 가까워지기도 한다. 「안녕」의 나윤이는 이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동네 산책길에 나선다. 약수터에서 떠올리는 유치원 때 친구 예주, 놀이터에서 마주친 지금은 서먹해진 윤지, 아파트 산책로에서 기억하는 반려견 별이……. 장소마다 한때는 전부인 것 같았던 존재들,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 있다. 나윤이는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새로운 곳으로 나아간다.
『박하네 분짜』는 이사와 전학을 겪는 어린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찬찬히 풀어낸다. 그러면서 오늘은 비록 오해와 거절, 실수 등의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내일은 첫눈처럼 밝은 새날이 기다릴 거라고 조용한 응원을 건넨다.
“지금 엄마에게 나보다 엄마가 더 중요하다는 게, 속상하다.”
속상한 내 마음만큼 독한 염색약 냄새
#가족 #기억 #성장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아이들이 처한 밝지만은 않은 현실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빨강 머리 하이디」의 지수는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다.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린 아빠와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엄마도 해외로 일하러 가면서 지수를 이모에게 맡겨 버린다. 하지만 묵묵하게 지수를 돌보아 주는 이모, 품이 넓은 이웃들, 오지랖 넓은 친구가 있기에 지수는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낸다.
「빨강 머리 하이디」의 지수가 가족 바깥으로 관계의 폭을 확장하며 위로받는다면, 「내가 기억할게」의 연우는 잊고 있던 가족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아이다. 연우는 새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문득 얼굴도 모르는 친아빠를 떠올린다. 엄마와 함께 북한에서 오다가 죽었다는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도중에 혼자가 되어 여기까지 온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빠의 사진 앞에 소국 한 다발을 내려놓으며, 연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자란다.
『박하네 분짜』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다루되 섣부른 해답은 내놓지 않는다. 어린이 스스로 생각하고, 부딪치고, 깨달아 가는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아주 조금씩 씩씩해질” 수 있도록 믿어 줄 뿐이다. 무엇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독자의 마음에도 따스한 온기를 밝힌다.
남수 화가는 다감하면서도 재치 있는 그림으로 이야기의 장면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행간에 숨은 등장인물들의 사연,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나는 재미가 크다.
구매가격 : 8,8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