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
도서정보 : 김동규 김응빈 / 문학동네 / 2019년 06월 0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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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과 철학의 만남
이 책은 생물학자와 철학자,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의 산물이다. 이 만남의 주인공은 『나는 미생물과 산다』 등을 통해 미생물의 ‘대중화’에 앞장서온 생물학자 김응빈(연세대 생물학과)과 『멜랑콜리 미학』『멜랑콜리아』 등을 통해 서양문화의 ‘멜랑콜리한’ 정체성을 탐구해온 철학자 김동규(연세대 철학과)이다. 전혀 다른 학문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2012년부터 연세대에서 함께 진행해온 화제의 강의 <활과 리라>가 이 책의 밑거름이 되었다. 저자들은 “이질적인 두 학문 사이의 짜릿한 조율”을 통해 사유를 확장하고,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고단한 현대인들에게 ‘공생’의 지혜를 전하고자 이 책을 썼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학제간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말이 회자되고 유행한 지는 한참 되었으나, 이처럼 생물학자와 철학자가 하나의 책을 공동집필한 사례는 (대화의 기록인 도정일?최재천의 『대담』을 제외하곤)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오랫동안 함께 공동수업을 이끌어온 경험에다 친밀한 대화와 치열한 토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생물학과 철학은 왜 만나야 할까?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그중에서도 합성생물학,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 등 비약적으로 발전해온 생물학은 자연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적 지식의 주체인 인간 자신마저 변형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생물학이 사회와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수록 자연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숙고하는 철학적 기반은 필수 불가결하다. 또한 학문적 골동품으로 전락한 철학도 고전 주석에나 매달리는 사변의 무능력을 반성하고 이 시대 가장 활력적인 지식 분야와 만나 소생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생물학자와 철학자는 단순한 만남에 그치지 않고 한목소리로 두 학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융합으로 나아간다. 그 융합의 지점에서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상은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의 원천인 사랑이다.
공생과 경쟁: 생물학이 전하는 삶의 지혜
이 책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공생부터 면역과 모방, 동물성과 인간성까지 생물학에서 발아한 다채로운 주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를 위해 생물학 쪽에서는 다윈과 파스퇴르에서 린 마굴리스, 리처드 도킨스, 칼 우즈로 이어지는 근현대 생물학자들이 소환되고, 철학 쪽에서는 플라톤,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르네 지라르, 조르조 아감벤 같은 사상가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더욱 풍성한 울림을 낳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핵심 개념은 ‘공생’이다. 우리 인간이 미생물만도 못한 지점, 즉 미생물에게 배워야 할 핵심 가치도 바로 이 ‘공생’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미생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여전히 하찮은 미물 정도로 인식한다. 병균처럼 인간에게 해로운 미생물은 소수에 불과하고 유산균처럼 유익한 미생물이 훨씬 많은데도 그렇다. 이런 선입견이 생긴 데에는 미생물 연구의 선구자인 루이 파스퇴르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파스퇴르는 박테리아를 ‘병원균’으로 명명하면서 스스로 미생물의 살육자가 되고자 했다. 병원균을 적대시한 파스퇴르 이후 수많은 파스퇴르 추종자들은 미생물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다윈주의적 생존 경쟁을 진화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그런데 20세기에 미토콘드리아 DNA가 발견되면서 ‘공생’ 이론이 부상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 내 소기관 중 하나로 핵의 DNA와는 다른 자기만의 DNA를 가지고 있다.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오히려 핵이 없는 원핵생물인 박테리아의 DNA를 닮아 있다. 이런 미토콘드리아의 특징을 바탕으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세포 내 공생설’을 제기한다. 지구에 박테리아들만 살던 까마득한 옛날, 덩치 큰 박테리아가 작은 박테리아를 먹어치웠는데 먹잇감이 포식자의 내부에서 우연히 살아남는 일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서로 공존의 기술을 터득하면서 박테리아 같은 원핵세포가 진핵세포로 진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다. 미토콘드리아는 진핵세포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진화의 숨은 지배자’로도 불린다.
이런 세포 내 공생설에서 나온 새로운 진화 이론이 ‘공생발생론’이다. 공생발생론은 적대적 경쟁과 유전자의 돌연변이 현상으로만 진화를 설명하는 대부분의 진화론과 달리 공생 과정을 통해 새로운 종의 발생을 설명한다. 그러나 처음에 마굴리스의 공생 이론은 학계에서 철저히 배척당한다. 논문은 열다섯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이는 그녀가 여성 과학자였기에 받은 차별이면서 동시에 비주류인 공생 이론의 주창자였기에 받은 차별이었다.
붉은 여왕에서 검은 여왕으로
적대적 경쟁에 주목하는 대표적인 진화 이론은 ‘붉은 여왕 가설’이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벤 베일런이 내놓은 이 가설은 경쟁 상대의 끊임없는 변화(진화)에 맞서 계속해서 변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결국 도태된다는 것이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 앨리스가 붉은 여왕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을 보고 이 이름을 떠올렸다고 한다. 거울 나라를 지배하는 붉은 여왕은 숨가빠하는 앨리스에게 말한다. “지금처럼 계속 달려야 제자리에 있을 수 있어.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더 빨리 뛰어야 한다고.” 머물기 위해서라도 계속 뛰어야만 하는 현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최근 생명체 간의 호혜적 의존성을 강조하는 ‘검은 여왕 가설’이 등장했다. 이 가설의 이름은 ‘하트(♥)’라는 카드 게임에서 유래한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카드를 주고받는 이 카드 게임은 마지막에 가지고 있는 카드 중 모든 하트 카드와 스페이드(♠) 퀸(Q) 카드만으로 점수를 낸다. 하트 카드는 각각 1점이고 스페이드 퀸은 13점으로 계산하며, 총점이 낮은 순서로 순위가 결정된다. 스페이드 퀸(검은 여왕)을 가지고 있으면 꼴찌이기에 게임에 이기고 싶다면 중간에 검은 여왕을 내놓아야 한다.
‘검은 여왕 가설’의 핵심은 미생물들이 자신의 대사 산물 일부를 공공재화로 내놓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참석자들이 음식을 하나씩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와 마찬가지다. 이처럼 ‘붉은 여왕 가설’과는 대조적으로 ‘검은 여왕 가설’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경쟁보다는 협동 또는 공생의 역할을 강조한다.
면역의 역설
생물학의 관점에서 면역은 세포들의 공동체가 개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식별 장치이자 자기보호 시스템이다. 하지만 생명체는 애초에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 몸이 자기를 비非자기로 오인해서 생기는 ‘자가면역’ 질환이 이를 증명한다. 자가면역 질환은 모든 장기에서 발생한다. 눈의 포도막염, 뇌의 다발성 경화증, 궤양성 대장염,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모두 그런 질환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면역관용’도 있다. 면역관용은 너그럽게 비자기를 자기로 간주하는 현상으로, 여성의 몸 안에서 자라는 태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태아는 엄마 유전자의 절반만 가지고 있기에 엄마의 면역계가 비자기로 인식해야 정상인데도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외부 물질의 유입이 많은 소화기관의 경우 면역계가 집중되어 있지만 그런 장내 미생물들에 대해서도 우리 몸은 관용을 베푼다.
이런 까닭에 면역은 단순한 자기방어 시스템으로 보기 어렵다. 자기보호의 과도한 몸짓은 자신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징후일 뿐이다. 멸균 상태와 같은 인공 환경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타자와의 공존은 필수적인 것이다.
예술은 바이러스다?
저자들은 쉽게 정의하기 힘든 예술의 속성을 생물학적 은유로 풀어낸다. 바로 “예술은 바이러스다”라는 명제다. 온갖 미학적 개념들을 제쳐두고 예술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인문학자들에게 예술이 설명하기 힘든 난제이듯, 자연과학자들에게 바이러스는 “자연의 풀리지 않는 암호”(92쪽)와 같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바이러스의 존재방식이 그만큼 기괴해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바이러스의 특성은 예술의 존재방식과 아주 유사하다.
저자들이 말하는 ‘예술 바이러스’는 우선 강한 ‘전염력’을 가진다. 예술은 그것을 접한 사람들을 쉽게 감염시키고 빠르게 확산되며 역사적으로 전승된다. 일찍이 플라톤이 예술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강한 전염성 때문이었다.
예술 바이러스는 숙주에 ‘기생’하면서 존속한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숙주, 즉 인간이 없다면 예술작품은 죽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보존하는 인간 없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예술 바이러스는 자신이 감염시킨 인간에 기생하면서 동시에 그 인간을 ‘변모’시킨다. 예술작품을 접함으로써,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의 정보와 관점이 뒤섞임으로써 감상자는 결국 자기 변형을 겪게 되며, 낯선 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런 예술 바이러스의 특성이 여실히 발현되는 것이 공공예술이다. 예술의 공공성은 인간의 불멸성이 실현되는 장소다. 거기서 개체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붙어사는 바이러스가 불멸하는 존재에 가깝듯”(104~5쪽), 숙주인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예술도 그 특이한 존재방식 덕분에 불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 바이러스 감염은 공동체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바이러스가 인간을 위협하는 악성 병원체이면서도 (인간이 기생하고 있는) 자연의 자정 작용의 하나일 수 있듯이, 예술은 개인중심주의, 공동체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등등 온갖 중심주의에 기생하면서 그것을 탈중심화하는 힘”인 것이다.(106쪽)
리처드 도킨스 이론의 한계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을 유전자의 운반체이자 생존기계로 규정한다. 이 ‘유전자중심주의’는 얼핏 인간중심주의 비판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킨스는 문화를 문화적 유전자 ‘밈’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다시 인간중심주의로 회귀하는 듯한 모순을 드러낸다.
도킨스가 모방(미메시스)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어근과 유전자gene의 영어 발음을 결합해 만든 용어인 ‘밈meme’은 비유전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의 전달 단위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이 문화는 모방의 산물이고 모방은 유전자처럼 자기복제를 통해 수행된다.
하지만 이런 도킨스의 모방론은 결코 독창적인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자의 눈에는 문화예술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이론인 미메시스론의 재탕으로 보일 뿐이다. 가령 『향연』에서 플라톤은 인간이 불멸에의 욕망을 실현하는 두 가지 길을 거론하는데, 하나는 육체의 사랑을 통해 자식을 낳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사랑을 통해 예술, 철학, 법 같은 문화를 창조하는 길이다. 여기서 영혼의 사랑을 문화적 유전자로 치환한다면, 도킨스의 유전자/밈 이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전자에 반항하는 밈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예컨대 피임법을 사례로 들며 도킨스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다시 유전자를 이길 수 있는 존재,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다른 인간중심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모방과 복제만을 기본 원리로 삼는 밈 이론으로는 기존에 없던 낯선 것을 만들어내는예술적 창조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창조성이 복제 과정의 돌연변이라는 설명은 “설명이라기보다는 설명이 궁지에 몰린 것을 자인하는 말”(128쪽)일 뿐이다.
미생물의 기억과 생명의 비밀
‘기억’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새와 회귀성 어류의 기억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미생물의 세계에서도 기억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면역계의 기억세포는 과거에 침투했던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평생 잊지 않는다. 많은 세균들이 지니고 있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도 대표적인 사례다.(150~1쪽) 숙주의 특성과 면역력 수준을 감지하고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숙주에 따라 상이한 병원성을 보이는 세균도 존재한다.
생명을 이루는 기본 정보이자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정보의 단위인 유전자도 결국은 “자연의 변화와 흐름이 남긴 자국의 총체, 곧 기억”(154쪽)이다. 현생 인류 유전자의 10퍼센트 정도는 고대부터 있던 바이러스 유전자다. 이렇게 우리 몸에는 고대 바이러스의 감염 흔적이 남아 있다.
미생물은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지만, 그때 인간을 구하는 것도 결국 미생물이다. 미생물이라는 미시적 생명의 세계가 잘 보여주듯, 인간의 생명은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인간의 생명마저 ‘인공적’으로 만듦으로써 자연과 단절하려 한다.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지능까지도 인공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환호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 이런 현상을 대변한다.
그동안 생물학은 생명의 단일성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을 찾아 ‘세포’ 단위로, DNA와 RNA의 차원으로 내려갔다. 생물학의 좁은 한계를 벗어나 생명 개념을 인문학적으로 폭넓게 확장해 바라보는 저자들은 기억(진리), 자유, 사랑을 생명의 삼위일체로 꼽는다. 이들 개념은 생명 존엄성의 원천이자 인간 존엄성의 원천이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결국 사랑이다.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은 자유를 가질지언정 사랑만큼은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로 매장 풍습을 든다. “사랑하는 인간만이 애도할 수 있고, 그 애도의 사회적 표현방식이 매장”(253쪽)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들이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생명을 사랑으로 고양시키는 한편, 사랑을 생명으로 육화시키고자” 하는 지적 노력의 산물이다. “생명의 진화 과정이 곧 사랑의 역사”라 보기 때문이다.(260쪽)
구매가격 : 10,500 원
자정 4분 뒤 1
도서정보 : 스티븐 킹 / 엘릭시르 / 2019년 05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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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킹의 환상 특급 승차 시 주의 사항!
독자 여러분,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이렇게 건재한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또다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여러분도 다른 곳?어쩌면 벽에는 눈이 달렸고 나무에는 귀가 달렸고, 정말로 기분 나쁜 무언가가 다락방과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있는 데로 기어나오려 하는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건재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 관심이 많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까, 들어주지 않을까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_ 머리말 중에서
스티븐 킹은 1974년의 첫 출간작 『캐리』를 비롯하여 『살렘스 롯』, 『샤이닝』 등 호러 소설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로는 호러뿐 아니라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SF 등을 집필했으나, 초기의 호러 소설이 인상 깊었던 탓에 여전히 호러 소설의 제왕, 호러 킹(King of Horror)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990년 출간된, 네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자정 4분 뒤』 역시 본격 호러 소설의 계보를 잇는 중편집이다. 『자정 4분 뒤』를 집필하던 시기는 킹이 알코올과 마약, 담배에 심각하게 의존하던 때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작품에 그대로 담긴 작가의 심리가 이토록 두려운 호러를 자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한편 『자정 4분 뒤』는 네 편의 중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또다른 중편집인 『사계』와 결을 함께한다. 스티븐 킹은 다양한 작품을 써왔으나 네 편의 중편을 묶은 중편집은 이 둘뿐이다. 스티븐 킹은 『자정 4분 뒤』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계』는 세 편의 ‘주류’와 한 편의 초자연적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자정 4분 뒤』에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공포물이다. 이 중편집이 『사계』와 다른 이유는, 일시적으로나마 머릿속에서 암울한 주제만 맴돌던 시절에 집필한 작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킹의 말과 같이 『자정 4분 뒤』에 속한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초자연적인 무언가이자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에 맞닿아 있다. 이는 작가의 초기 작풍과 일치하며, 직전의 중편집 『사계』가 대체로 주류 문학의 노선을 따랐던 것과는 차별된다.
스티븐 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씐 『자정 4분 뒤』의 이번 출간은 그의 초기 작풍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반갑다. 이 책은 출간된 그해의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했으며 그다음 해에는 로커스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이 영상화되었듯이, 『자정 4분 뒤』의 중편들 중에도 영상으로 소개된 것이 있다. 「랭골리어」는 미국의 ABC 방송국에서 2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송된 바 있다. 「비밀의 창, 비밀의 화원」는 조니 뎁 주연의 <시크릿 윈도우>라는 제목의 영화로 2004년 국내에 개봉했다.
● “구름 아래 뭐가 있을지 두렵단 말이죠.
아니, 구름 아래 뭐가 없을지.”
『자정 4분 뒤』는 총 네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중편마다 ‘자정 1분 뒤’, ‘자정 2분 뒤’, ‘자정 3분 뒤’, ‘자정 4분 뒤’ 하는 식의 소제목이 붙어 있다. 오늘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순간인 ‘자정’은 고요한 순간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좋은 시각이다. 스티븐 킹은 이 ‘자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네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가 생각하는 ‘자정’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을까?
「랭골리어」 - 이혼한 아내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은 항공기 조종사 브라이언은 아내가 살던 곳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지난 비행으로 피곤했던 브라이언은 이번 비행에 승객으로 탑승하자마자 잠이 든다. 얼마 후, 잠에서 깬 브라이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다. 조종사, 승무원, 대부분의 승객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없어진 곳에는 틀니, 가발, 시계 등 한때 인간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다. 브라이언과 함께 남겨진 열 명가량의 승객들은 모두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항공기 조종사인 브라이언 덕분에 비행기는 가장 가까운 근처 공항에 착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더 끔찍한 풍경은? 비행기 안에서는 절대로 읽지 않기를 바라는 중편, 「랭골리어」 는 비행기 탑승객이라면 한 번쯤 떠올렸을 법한 비행에 관련한 공포는 물론 유년기 트라우마까지 파고들어 어린시절 막연하게 상상하던 괴물까지 수면 위로 떠올려 구체화한다.
「비밀의 창, 비밀의 화원」 - 소설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이 작품에는 스티븐 킹을 닮은 인기 소설가 모턴 레이니가 등장한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 장면을 목격한 충격 속에서 이혼 수속을 진행한 그는 홀로 부부가 여름을 보내던 별장에 와서 소설을 집필한다. 그런 그에게 한 농부가 찾아온다. 추레한 차림의 농부는 모턴에게 당신이 자기 소설을 훔쳤다고 따져 묻는다. 소설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소설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 아닐까. 모턴 스스로는 표절을 한 적이 없고, 농부가 무슨 착오가 있거나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표절 작가로 몰고 간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집 전체가 타버리고, 키우던 고양이가 살해당하고,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의 시신을 발견하자 이 모든 일이 농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왜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구심과 더불어 두려움을 품는다. 모턴은 농부를 죽이겠다는 생각마저 품게 된다. 과연 모턴은 농부를 찾을 수 있을까? 농부가 말한 훔쳤다는 소설은 도대체 무엇일까?
「도서관 경찰」 -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대출한 도서를 연체한 경험이 있다면, 도서관 경찰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경찰은 도서 연체 발생 시 도서관 관장이 활용하는 사설 경찰이다. 마흔이 되도록 썩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았던 샘은 어느 날 동네 로터리클럽의 연사를 맡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받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한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도서관에서 샘은 연설문에 필요한 도서를 빌렸다가 반납을 잊어버리고는 책을 그대로 분실한다. 며칠 후 도서관 경찰의 방문을 받은 샘은 그 충격으로 자리에서 소변을 지리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렸다. 제일 놀라운 것은, 도서관 경찰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 샘은 똑같은 책을 사다가 반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데…….
「폴라로이드 개」 - 생일 선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좋은 선택일까, 좋지 않은 선택일까? 열다섯 살 생일 선물로 고대하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받은 케빈에게는 분명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카메라를 받자마자 가족사진을 찍었으나 카메라에서는 가족들의 모습 대신 말뚝 울타리를 산책하는 흉측한 생김새의 개 사진이 나왔다. 몇 장을 찍어도 그랬다. 케빈은 카메라를 교환하거나 환불하는 대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카메라는 자꾸만 나를 버리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치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에서 반지가 소유주를 현혹하듯이 말이다. 마흔 장 정도 사진을 찍어본 케빈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사진기는 똑같은 개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개는 움직이고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사진사가 촬영하는 소리를 들은 듯이 사진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의 얼굴은 몹시 끔찍하고 드러난 이빨은 날카로웠다. 사진을 계속 촬영하면 어떻게 될까? 개가 사진사를 물어버리는 걸까? 그러면 이 카메라는 어떻게 될까?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부터 사람들은 카메라를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담아내는 전자기기로 인식했다. 카메라는 순간을 담아내지만, 카메라가 담아낸 순간은 현실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면 카메라는 담아낼지도 모르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는 녹음기에도 적용된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녹음기는 담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차가운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자 기기가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들이밀 때,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 호러 킹이 선보이는 원인 불명의 현상에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공포!
스티븐 킹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셜리 잭슨, 레이 브래드버리, H.P. 러브크래프트 등의 호러, SF, 판타지 문학 거장들의 뒤를 잇는 작가다. 열두 살 무렵 스티븐 킹은 친척 집에서 우연히 잡지들이 든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상자 안에는 다양한 호러, SF, 판타지 잡지가 담겨 있었고, 어린 킹은 잡지들을 탐닉하며 그 분야에 매료되었다. 어릴 때부터 습작을 해왔던 킹은 스무 살 무렵 만화 잡지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게재하여 이름을 알렸다. 그의 첫 단편인 「나는 십 대 무덤 도굴꾼이다 I was a teenage grave robber」는 호러와 판타지가 절묘하게 뒤엉킨 작품이었고, 킹의 이후 작품들 역시 이 단편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의 작품에는 평범한 인물, 평범한 장소, 평범한 배경이 등장하지만, 곧 이 평범한 일상이 끔찍한 공포의 배경으로 바뀐다. 보통의 일상에 두려움의 씨앗이 뿌려지고, 주인공들은 영문도 모른 채 호러 무대에 올려 세워진다. 비행기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홀로 남겨진 브라이언, 평화로웠던 일상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모턴의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문객,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며칠 연체했을 뿐인데 득달같이 찾아온 도서관 경찰, 케빈이 생일 선물로 받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행태. 독자들은 머릿속으로 한 번쯤은 이런 기이하고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봤을지도 모르지만, 상상은 아주 잠시 왔다가 금세 떠났을 따름이다. 스티븐 킹은 이런 독특한 상상에 스토리를 부여한다. 누구라도 가질 법한 원초적인 공포의 실마리를 붙들고 타래를 감기 시작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공포감을 자극하는 킹의 『자정 4분 뒤』는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든 작품이다.
구매가격 : 11,800 원
자정 4분 뒤 2
도서정보 : 스티븐 킹 / 엘릭시르 / 2019년 05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호러 킹의 환상 특급 승차 시 주의 사항!
독자 여러분,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이렇게 건재한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또다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여러분도 다른 곳?어쩌면 벽에는 눈이 달렸고 나무에는 귀가 달렸고, 정말로 기분 나쁜 무언가가 다락방과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있는 데로 기어나오려 하는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건재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 관심이 많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까, 들어주지 않을까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_ 머리말 중에서
스티븐 킹은 1974년의 첫 출간작 『캐리』를 비롯하여 『살렘스 롯』, 『샤이닝』 등 호러 소설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로는 호러뿐 아니라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SF 등을 집필했으나, 초기의 호러 소설이 인상 깊었던 탓에 여전히 호러 소설의 제왕, 호러 킹(King of Horror)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990년 출간된, 네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자정 4분 뒤』 역시 본격 호러 소설의 계보를 잇는 중편집이다. 『자정 4분 뒤』를 집필하던 시기는 킹이 알코올과 마약, 담배에 심각하게 의존하던 때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작품에 그대로 담긴 작가의 심리가 이토록 두려운 호러를 자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한편 『자정 4분 뒤』는 네 편의 중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또다른 중편집인 『사계』와 결을 함께한다. 스티븐 킹은 다양한 작품을 써왔으나 네 편의 중편을 묶은 중편집은 이 둘뿐이다. 스티븐 킹은 『자정 4분 뒤』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계』는 세 편의 ‘주류’와 한 편의 초자연적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자정 4분 뒤』에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공포물이다. 이 중편집이 『사계』와 다른 이유는, 일시적으로나마 머릿속에서 암울한 주제만 맴돌던 시절에 집필한 작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킹의 말과 같이 『자정 4분 뒤』에 속한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초자연적인 무언가이자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에 맞닿아 있다. 이는 작가의 초기 작풍과 일치하며, 직전의 중편집 『사계』가 대체로 주류 문학의 노선을 따랐던 것과는 차별된다.
스티븐 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씐 『자정 4분 뒤』의 이번 출간은 그의 초기 작풍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반갑다. 이 책은 출간된 그해의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했으며 그다음 해에는 로커스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이 영상화되었듯이, 『자정 4분 뒤』의 중편들 중에도 영상으로 소개된 것이 있다. 「랭골리어」는 미국의 ABC 방송국에서 2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송된 바 있다. 「비밀의 창, 비밀의 화원」는 조니 뎁 주연의 <시크릿 윈도우>라는 제목의 영화로 2004년 국내에 개봉했다.
● “구름 아래 뭐가 있을지 두렵단 말이죠.
아니, 구름 아래 뭐가 없을지.”
『자정 4분 뒤』는 총 네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중편마다 ‘자정 1분 뒤’, ‘자정 2분 뒤’, ‘자정 3분 뒤’, ‘자정 4분 뒤’ 하는 식의 소제목이 붙어 있다. 오늘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순간인 ‘자정’은 고요한 순간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좋은 시각이다. 스티븐 킹은 이 ‘자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네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가 생각하는 ‘자정’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을까?
「랭골리어」 - 이혼한 아내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은 항공기 조종사 브라이언은 아내가 살던 곳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지난 비행으로 피곤했던 브라이언은 이번 비행에 승객으로 탑승하자마자 잠이 든다. 얼마 후, 잠에서 깬 브라이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다. 조종사, 승무원, 대부분의 승객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없어진 곳에는 틀니, 가발, 시계 등 한때 인간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다. 브라이언과 함께 남겨진 열 명가량의 승객들은 모두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항공기 조종사인 브라이언 덕분에 비행기는 가장 가까운 근처 공항에 착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더 끔찍한 풍경은? 비행기 안에서는 절대로 읽지 않기를 바라는 중편, 「랭골리어」 는 비행기 탑승객이라면 한 번쯤 떠올렸을 법한 비행에 관련한 공포는 물론 유년기 트라우마까지 파고들어 어린시절 막연하게 상상하던 괴물까지 수면 위로 떠올려 구체화한다.
「비밀의 창, 비밀의 화원」 - 소설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이 작품에는 스티븐 킹을 닮은 인기 소설가 모턴 레이니가 등장한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 장면을 목격한 충격 속에서 이혼 수속을 진행한 그는 홀로 부부가 여름을 보내던 별장에 와서 소설을 집필한다. 그런 그에게 한 농부가 찾아온다. 추레한 차림의 농부는 모턴에게 당신이 자기 소설을 훔쳤다고 따져 묻는다. 소설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소설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 아닐까. 모턴 스스로는 표절을 한 적이 없고, 농부가 무슨 착오가 있거나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표절 작가로 몰고 간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집 전체가 타버리고, 키우던 고양이가 살해당하고,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의 시신을 발견하자 이 모든 일이 농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왜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구심과 더불어 두려움을 품는다. 모턴은 농부를 죽이겠다는 생각마저 품게 된다. 과연 모턴은 농부를 찾을 수 있을까? 농부가 말한 훔쳤다는 소설은 도대체 무엇일까?
「도서관 경찰」 -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대출한 도서를 연체한 경험이 있다면, 도서관 경찰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경찰은 도서 연체 발생 시 도서관 관장이 활용하는 사설 경찰이다. 마흔이 되도록 썩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았던 샘은 어느 날 동네 로터리클럽의 연사를 맡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받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한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도서관에서 샘은 연설문에 필요한 도서를 빌렸다가 반납을 잊어버리고는 책을 그대로 분실한다. 며칠 후 도서관 경찰의 방문을 받은 샘은 그 충격으로 자리에서 소변을 지리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렸다. 제일 놀라운 것은, 도서관 경찰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 샘은 똑같은 책을 사다가 반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데…….
「폴라로이드 개」 - 생일 선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좋은 선택일까, 좋지 않은 선택일까? 열다섯 살 생일 선물로 고대하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받은 케빈에게는 분명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카메라를 받자마자 가족사진을 찍었으나 카메라에서는 가족들의 모습 대신 말뚝 울타리를 산책하는 흉측한 생김새의 개 사진이 나왔다. 몇 장을 찍어도 그랬다. 케빈은 카메라를 교환하거나 환불하는 대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카메라는 자꾸만 나를 버리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치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에서 반지가 소유주를 현혹하듯이 말이다. 마흔 장 정도 사진을 찍어본 케빈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사진기는 똑같은 개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개는 움직이고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사진사가 촬영하는 소리를 들은 듯이 사진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의 얼굴은 몹시 끔찍하고 드러난 이빨은 날카로웠다. 사진을 계속 촬영하면 어떻게 될까? 개가 사진사를 물어버리는 걸까? 그러면 이 카메라는 어떻게 될까?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부터 사람들은 카메라를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담아내는 전자기기로 인식했다. 카메라는 순간을 담아내지만, 카메라가 담아낸 순간은 현실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면 카메라는 담아낼지도 모르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는 녹음기에도 적용된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녹음기는 담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차가운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자 기기가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들이밀 때,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 호러 킹이 선보이는 원인 불명의 현상에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공포!
스티븐 킹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셜리 잭슨, 레이 브래드버리, H.P. 러브크래프트 등의 호러, SF, 판타지 문학 거장들의 뒤를 잇는 작가다. 열두 살 무렵 스티븐 킹은 친척 집에서 우연히 잡지들이 든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상자 안에는 다양한 호러, SF, 판타지 잡지가 담겨 있었고, 어린 킹은 잡지들을 탐닉하며 그 분야에 매료되었다. 어릴 때부터 습작을 해왔던 킹은 스무 살 무렵 만화 잡지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게재하여 이름을 알렸다. 그의 첫 단편인 「나는 십 대 무덤 도굴꾼이다 I was a teenage grave robber」는 호러와 판타지가 절묘하게 뒤엉킨 작품이었고, 킹의 이후 작품들 역시 이 단편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의 작품에는 평범한 인물, 평범한 장소, 평범한 배경이 등장하지만, 곧 이 평범한 일상이 끔찍한 공포의 배경으로 바뀐다. 보통의 일상에 두려움의 씨앗이 뿌려지고, 주인공들은 영문도 모른 채 호러 무대에 올려 세워진다. 비행기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홀로 남겨진 브라이언, 평화로웠던 일상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모턴의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문객,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며칠 연체했을 뿐인데 득달같이 찾아온 도서관 경찰, 케빈이 생일 선물로 받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행태. 독자들은 머릿속으로 한 번쯤은 이런 기이하고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봤을지도 모르지만, 상상은 아주 잠시 왔다가 금세 떠났을 따름이다. 스티븐 킹은 이런 독특한 상상에 스토리를 부여한다. 누구라도 가질 법한 원초적인 공포의 실마리를 붙들고 타래를 감기 시작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공포감을 자극하는 킹의 『자정 4분 뒤』는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든 작품이다.
구매가격 : 11,800 원
인어공주
도서정보 : 기타야마 다케쿠니 / 엘릭시르 / 2019년 06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물리 트릭의 귀재가 선보이는 일본 미스터리의 현재
『인어공주』의 작가 기타야마 다케쿠니는 현재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선두에 서서 활동하는 작가이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에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된 만큼, 기타야마의 작품의 근간에는 본격 미스터리가 자리잡고 있다. 2002년 『클락성 살인 사건』으로 메피스토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래, 2015년 현재까지 출간된 총 열네 종의 작품에 본격 미스터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 트릭이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물리 트릭이라 함은 물리적인 장치를 이용해서 사건의 범행 과정, 알리바이, 시간, 동기 등을 속이는 트릭을 말한다.
본격 미스터리는 틀이 정해져 있기에 설정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타야마의 작품은 다르다. 판타지나 SF적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에 본격 미스터리를 접목시키는 독특한 문체로 여타 미스터리 작가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현실성과 논리성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에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대표적 장르의 소재를 끌어오는 것은 본격 작가로서 떠안게 되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에,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공정함을 바탕으로 하는 물리 트릭으로 작품을 완결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했다는 점은, 그리고 그 작풍을 데뷔 이래 지금까지 일관되게 유지해왔다는 점은, 여타 미스터리 작가가 가지지 못한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커다란 개성이자 무기라 할 수 있다.
“예전부터 동화의 세계는 미스터리와 친화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인어공주』는 아름답고 비극적인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본격 미스터리로 완벽하게 재해석해낸 작품이다. 작가 안데르센을 열네 살의 소년 화자, 인어공주를 살인 용의자, 가상의 인물인 작가 그림 형제의 동생을 탐정 역으로 그려내, 현실과 동화의 절묘한 화합을 이끌어냈다.
인어공주와 『인어공주』의 기본 플롯을 가져와 작품의 골자가 되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실제 인물인 안데르센과 붕케플로드 부인, 안데르센이 실제 살았던 오덴세의 뭉케묄레 거리 등을 등장시켜 현실성을 더했다.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으로 그림 형제의 가상의 막냇동생인 루트비히 그림을 더해 동화 속 허구와 역사의 균형을 적절하게 조절했다. 『인어공주』는 동화 속에 머물려고만 하지 않고, 현실성을 위해 동화 속 설정을 버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동화의 주인공들을 트릭으로 행복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결과 태어난 작품이 바로 『인어공주』이다. 기타야마의 기존 작품들이 긴장에서 파국으로 이어져 종식되던 것에 비해 『인어공주』는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마주한 소년이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비극에서 희망으로 변화해간다. 데뷔 초에는 세기말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설정이 많았다. 상황을 타개하거나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보다는 현실을 거스르지 않고 직면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사건을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기에’ 파헤쳐나가는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주인공인 소년이 자신의 의지로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고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화자인 소년은 사건의 관찰자에 가깝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을 따로 둠으로써 소년의 역할에 제한을 두었지만, 소년은 자신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 낙담하기보다는 인어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 의지는 곧 물리 트릭의 해결과 일맥상통한다. “물리 트릭은 움직이기 시작하면 파멸한다.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있다.” 파멸에서 비로소 행복이 찾아오다니,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인어공주』는 동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과감함과 물리 트릭을 고수하는 성실함으로, 동화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걸출한 본격 미스터리로 거듭났다. 액자식 구성을 통해 동화 속 분위기를 극대화시키고, 꼬리 무는 반전을 통해 신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물리 트릭의 귀재라 불리며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현재를 대표하는 선두주자 기타야마 다케쿠니가 『인어공주』를 통해 본격 마니아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인어공주』는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작품성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화와 본격 미스터리의 만남. 하지만 작품은 결코 무르지는 않다. 안데르센과 그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어공주의 미스터리 사건을 통해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현재를 엿보는 것은 어떨까.
구매가격 : 9,500 원
자물쇠 잠긴 남자 (세트)
도서정보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엘릭시르 / 2019년 06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저의 죽음은, 자살입니까?
본격 미스터리의 대가가 어른들에게 보내는 비극적 미스터리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한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던 노인 나시다 미노루가 목을 매단다. 경찰은 이 사건을 자살로 결론내리지만 그의 지인인 작가 가게우라 나미코는 의문을 가지고 히무라 히데오와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사건의 조사를 부탁한다. 입시철이라 바쁜 히무라 대신 아리스가와가 조사에 나서지만 일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어둠에 휩싸여 한 치 앞을 들여다볼 수 없는 나시다의 인생. 과연 이 남성은 대체 누구인가? 그 죽음에 얽힌 진상은?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자물쇠 잠긴 남자』는 범죄학자 히무라와 그 친구인 작가 아리스가와가 활약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로, 한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던 남성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남성의 죽음을 마주하며 남성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탐정 행위가 죽은 자에 대한 진혼에 다름없다는 통절한 주제를 전하고 있다.
●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우리는 언제나 경찰이 살인 사건 소식을 알려주면 수사에 참여했지. 혹은 우연히 살인 현장에 있었을 때 수사에 뛰어들었어.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라. 자살인지도, 타살인지도 모를 죽음의 진상을 찾기 위해 먼저 피해자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어. (중략) 언제나 피해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_ 본문 하권 123쪽
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가 친구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필드워크라는 명목으로 사건 수사에 참여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데뷔작인 『46번째 밀실』 이후로 수많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왔다. 이 작품은 이전에 출간되었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어느 작품과도 맥을 달리한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콤비는 이제껏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왔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이나 트릭을 찾아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부터 조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당 인물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기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자물쇠 잠긴 남자’라는 제목에서 ‘자물쇠 잠긴 방’이 쉽게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밀실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다.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사건에 관련된 증거를 모아 범인이나 트릭을 특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정보’다. 피해자인 나시다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감싸인 수수께끼의 인물.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전무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정보 없이는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도 동기를 유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베일에 감싸인 피해자 덕분에 독특하게도 범인은 직접적인 단서를 흘리지 않은 것은 물론, 밀실이나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보의 우위를 선점하는 형태로 철저하게 사건의 진상을 숨긴다.
● “여기 엘리테이터에 관은 들어갑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바로 오사카를 무대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자물쇠 잠긴 남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배경인 긴세이 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나카노시마에 사는 사람들을 ‘섬사람’, 사건의 발단이 되는 제1장의 장제목을 ‘어느 섬사람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처럼 두 줄기의 강물에 둘러싸여 수많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나카노시마를 작중에서는 일종의 ‘섬’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섬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 나시다의 말에서 나카노시마와 긴세이 호텔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에피소드나 역시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이야기는 호텔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던(실제로 마감한) 나시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바탕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육지에서 고립되어 있는 섬과 호텔방, 죽음은 비밀로 가득찬 나시다와 나시다의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
나시다 미노루의 죽음을 마주한 히무라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탐정이 되어 알아내는 것. 그런다고 이 세상에서 살인을 근절할 수는 없지만 죽은 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는 되리라.
_본문 하권 124쪽
바쁜 히무라를 대신해 조사에 나선 아리스가와가 나시다의 반생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수사의 일환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남성의 인생을 반추하는 이 행위는 아슬아슬하고 잔인하며 통절하기까지 한 어른들의 미스터리이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죽은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가 될 거라고 말한다. 말하지 않는 시체를 앞에 두고 그 사람의 반생을 추적하는 행위 자체가 추리의 과정이며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인 것이다.
피해자 나시다가 안고 있는 수수께끼는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에 의해 말끔하게 풀리지만,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 히무라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일단락되는 순간은 바로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의 자물쇠가 풀리는 날이 아닐까.
구매가격 : 19,000 원
자물쇠 잠긴 남자 (상)
도서정보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엘릭시르 / 2019년 06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우리는 언제나 경찰이 살인 사건 소식을 알려주면 수사에 참여했지. 혹은 우연히 살인 현장에 있었을 때 수사에 뛰어들었어.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라. 자살인지도, 타살인지도 모를 죽음의 진상을 찾기 위해 먼저 피해자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어. (중략) 언제나 피해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_ 본문 하권 123쪽
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가 친구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필드워크라는 명목으로 사건 수사에 참여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데뷔작인 『46번째 밀실』 이후로 수많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왔다. 이 작품은 이전에 출간되었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어느 작품과도 맥을 달리한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콤비는 이제껏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왔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이나 트릭을 찾아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부터 조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당 인물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기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자물쇠 잠긴 남자’라는 제목에서 ‘자물쇠 잠긴 방’이 쉽게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밀실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다.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사건에 관련된 증거를 모아 범인이나 트릭을 특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정보’다. 피해자인 나시다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감싸인 수수께끼의 인물.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전무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정보 없이는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도 동기를 유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베일에 감싸인 피해자 덕분에 독특하게도 범인은 직접적인 단서를 흘리지 않은 것은 물론, 밀실이나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보의 우위를 선점하는 형태로 철저하게 사건의 진상을 숨긴다.
● “여기 엘리테이터에 관은 들어갑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바로 오사카를 무대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자물쇠 잠긴 남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배경인 긴세이 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나카노시마에 사는 사람들을 ‘섬사람’, 사건의 발단이 되는 제1장의 장제목을 ‘어느 섬사람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처럼 두 줄기의 강물에 둘러싸여 수많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나카노시마를 작중에서는 일종의 ‘섬’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섬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 나시다의 말에서 나카노시마와 긴세이 호텔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에피소드나 역시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이야기는 호텔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던(실제로 마감한) 나시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바탕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육지에서 고립되어 있는 섬과 호텔방, 죽음은 비밀로 가득찬 나시다와 나시다의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
나시다 미노루의 죽음을 마주한 히무라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탐정이 되어 알아내는 것. 그런다고 이 세상에서 살인을 근절할 수는 없지만 죽은 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는 되리라._본문 하권 124쪽
바쁜 히무라를 대신해 조사에 나선 아리스가와가 나시다의 반생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수사의 일환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남성의 인생을 반추하는 이 행위는 아슬아슬하고 잔인하며 통절하기까지 한 어른들의 미스터리이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죽은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가 될 거라고 말한다. 말하지 않는 시체를 앞에 두고 그 사람의 반생을 추적하는 행위 자체가 추리의 과정이며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인 것이다.
피해자 나시다가 안고 있는 수수께끼는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에 의해 말끔하게 풀리지만,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 히무라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일단락되는 순간은 바로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의 자물쇠가 풀리는 날이 아닐까.
구매가격 : 9,500 원
자물쇠 잠긴 남자 (하)
도서정보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엘릭시르 / 2019년 06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우리는 언제나 경찰이 살인 사건 소식을 알려주면 수사에 참여했지. 혹은 우연히 살인 현장에 있었을 때 수사에 뛰어들었어.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라. 자살인지도, 타살인지도 모를 죽음의 진상을 찾기 위해 먼저 피해자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어. (중략) 언제나 피해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은 자를 똑바로 마주한 기억은 없어.” _ 본문 하권 123쪽
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가 친구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필드워크라는 명목으로 사건 수사에 참여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데뷔작인 『46번째 밀실』 이후로 수많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왔다. 이 작품은 이전에 출간되었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어느 작품과도 맥을 달리한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콤비는 이제껏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왔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이나 트릭을 찾아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부터 조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당 인물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기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자물쇠 잠긴 남자’라는 제목에서 ‘자물쇠 잠긴 방’이 쉽게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밀실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다.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사건에 관련된 증거를 모아 범인이나 트릭을 특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정보’다. 피해자인 나시다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감싸인 수수께끼의 인물.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전무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정보 없이는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도 동기를 유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베일에 감싸인 피해자 덕분에 독특하게도 범인은 직접적인 단서를 흘리지 않은 것은 물론, 밀실이나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보의 우위를 선점하는 형태로 철저하게 사건의 진상을 숨긴다.
● “여기 엘리테이터에 관은 들어갑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바로 오사카를 무대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자물쇠 잠긴 남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배경인 긴세이 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나카노시마에 사는 사람들을 ‘섬사람’, 사건의 발단이 되는 제1장의 장제목을 ‘어느 섬사람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처럼 두 줄기의 강물에 둘러싸여 수많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나카노시마를 작중에서는 일종의 ‘섬’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섬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 나시다의 말에서 나카노시마와 긴세이 호텔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에피소드나 역시 만년을 호텔에서 보냈던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이야기는 호텔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던(실제로 마감한) 나시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바탕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육지에서 고립되어 있는 섬과 호텔방, 죽음은 비밀로 가득찬 나시다와 나시다의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
나시다 미노루의 죽음을 마주한 히무라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탐정이 되어 알아내는 것. 그런다고 이 세상에서 살인을 근절할 수는 없지만 죽은 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는 되리라._본문 하권 124쪽
바쁜 히무라를 대신해 조사에 나선 아리스가와가 나시다의 반생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수사의 일환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남성의 인생을 반추하는 이 행위는 아슬아슬하고 잔인하며 통절하기까지 한 어른들의 미스터리이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죽은이를 기리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실마리”가 될 거라고 말한다. 말하지 않는 시체를 앞에 두고 그 사람의 반생을 추적하는 행위 자체가 추리의 과정이며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인 것이다.
피해자 나시다가 안고 있는 수수께끼는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에 의해 말끔하게 풀리지만,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 히무라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일단락되는 순간은 바로 또 다른 자물쇠 잠긴 남자의 자물쇠가 풀리는 날이 아닐까.
구매가격 : 9,500 원
추락하는 새
도서정보 : 예른 리르 호르스트 / 엘릭시르 / 2019년 06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전 세계 30개 언어로 번역, 150만 부 이상 판매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출간
유리열쇠상, 마르틴 베크상, 노르웨이 북셀러상, 리베르톤상을 휩쓴
예른 리르 호르스트의 대표작
비수기의 여름 별장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빌리암 비스팅 형사는 곧바로 현장에 출동하지만 수수께끼의 괴한에게 공격받고 차를 빼앗긴다. 탁월한 직관과 신문 능력으로 노르웨이 최고의 형사가 된 빌리암 비스팅은 대담함과 총명함으로 뭉친 딸 리네의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사건의 흔적을 쫓는다.
유리열쇠상, 마르틴 베크상, 노르웨이 북셀러상, 리베르톤상을 휩쓴 노르웨이의 대표 경찰소설 작가 예른 리르 호르스트의 대표작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추락하는 새』가 엘릭시르에서 출간되었다. 『추락하는 새』는 작가가 실제로 경찰에서 수사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씌어 사건 수사 현장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직업에 찌들어 우울한 삶을 사는 북유럽 형사의 틀을 깬 이 작품은 활기찬 수사 현장의 에너지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엘릭시르의 『추락하는 새』에는 낯선 나라 노르웨이와의 거리감을 줄여주는 지도가 실려 있어 한층 생생한 독서를 보장한다.
● “우리는 항상 하던 일을 해야지, 수사 말이야.”
주인공 빌리암 비스팅은 노르웨이 라르비크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베테랑 경찰관이다. 북유럽 경찰소설 주인공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우울감이나 회의감 대신, 명쾌한 노련함과 활력을 가진 색다른 주인공이다. 비스팅의 세계는 고통스러운 삶과 범죄가 들끓는 사회에 대한 고뇌보다는 현장에서 경찰들과 함께 수사를 펼쳐나가는 듯한 생생함으로 가득하다. 자동차 추적 장면에서는 연달아 터져 나오는 경찰 무전을 함께 듣는 듯한 긴박함이 있고, 클라이막스의 체포 작전에서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수사관들의 전문가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번에 출간되는 『추락하는 새』에서는 수사를 지휘하는 비스팅의 빼어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한편, 그의 딸 리네가 협력자로서 시리즈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작품에 한결 빛깔을 더한다.
『추락하는 새』는 강렬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때는 늦가을, 텅 빈 여름 별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빌리암 비스팅이 출동한다. 비스팅의 자동차 앞유리창에 죽은 새가 툭 떨어진 직후 수수께끼의 괴한이 습격해 온다. 노르웨이 최고의 수사관에게 시작부터 닥친 고난을, 그는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비스팅의 무기는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이다. 베테랑 수사관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비스팅은 독자를 실망시키는 법 없이 침착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위기를 빠져나온다.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는 점차로 절도와 마약 사건으로 확장되는데, 이때 리네는 신문기자로서 비스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포착하여 수사에 활력을 보태는 등 톡톡히 활약한다. 침착한 아버지와 겁 없는 딸로 이루어진 이 부녀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은 『추락하는 새』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작가 호르스트가 경찰로 근무했던 베스트폴 주의 실제 장소들이 작품 속에 세세하게 등장하여 현장감을 높여주고 있다.
● 총을 펜으로 바꾸다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의 작가 예른 리르 호르스트는 오슬로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 넘게 수사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범죄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도 수사 책임자로서 범죄 현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범죄자 혹은 피해자와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호르스트는 사람들 각각의 잔인한 운명에 대해,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화를 입은 피해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2004년에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경찰이 어떻게 일하고 생각하는지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이 시리즈는 호르스트의 경찰 후배들에게 교재에서 찾을 수 없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범죄 현장을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신문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와 더불어, 피해자 앞에서 경찰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전달할 수 있는 생동감과 리드미컬하면서도 명료한 문장을 가진 호르스트는 새로운 경찰소설을 찾는 독자들에게 믿음직스럽고 색다른 매력을 어필하고 있다.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출간하는 『추락하는 새』부터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해, 호르스트는 2011년 노르웨이 북셀러상을 수상했고 2013년에는 노르웨이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리베르톤상, 북유럽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에게 수여하는 유리열쇠상, 스웨덴 범죄소설 작가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는 마르틴 베크상을 수상했다. 2013년 호르스트는 십구 년간의 긴 경찰 생활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구매가격 : 10,200 원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도서정보 : 심보선 / 문학동네 / 2019년 06월 1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시인이자 사회학자의 눈으로 마주한 세상, 그리고 당신.
―심보선 첫 산문집
등단 14년 만인 2008년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펴낸 이래 대중과 문단의 폭넓은 사랑과 주목을 받아온 심보선 시인. 그의 첫 산문집을 펴낸다. 첫 시집 출간 직전인 2007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써온 산문을 가려 뽑고, 때로는 지금의 시점에서 반추한 코멘트를 덧붙이기도 하며, 77개의 글을 한 권에 담았다. 우리가 무엇을 잊고 무엇을 외면하는지 끊임없이 되새기는 글들이다. 사회적 문제를 타인의 문제로 외면하지 않고 우리의 문제로 생각하는 자세에 대한 글들이다. 요컨대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묻는 글들이다. 당신이 있는 곳을 돌아보기를, 내가 있는 ‘이쪽’의 풍경은 어떤지 바라보기를, 그리하여 나와 너,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어떤 움직임이 될 수 있을지, 어떤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지 묻는. 이것은 시인이자 사회학자라는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오로지 그 때문만이라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친구들과 연인과 동시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매혹”되고, 그 삶들의 움직임이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 말하는 ‘심보선’이라는 바로 그 사람에게 사회학을 하는 좌뇌와 시를 쓰는 우뇌가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그것이 시건 혹은 논문이건?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 나는 베버와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삶에 이끌린다. 친구들과 연인과 동시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매혹된다. 나는 삶과 일, 삶과 작품 사이를 쉼없이 오간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충고와 살아 있는 이들의 부름 사이를 쉼없이 오간다. 나의 말과 행동, 나의 기쁨과 슬픔은 그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나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8-9쪽, 「“멋지게 살려 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심보선은 자신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고 말한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다. 책은 그에 따라 총 세 개의 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삶과 사람, 가족, 일상과 관계를 소재 삼아 ‘영혼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그에게 영혼이란 선험적인 무언가가 아닌,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태도들 사이에서, 몸짓과 말투 속에서, 모종의 신호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강박과 예속에 대해 매 순간 저항하게 하고, 망설이게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어색하게” 하는 것이다. 일용직 노동자, 아버지, 택시 기사, 시인, 활동가, 친구와의 대화와 일화에서 마주한 영혼의 목소리를 제1부에 담긴 글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적인 길을 따라가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가 품은 첫 번째 수수께끼이다.
그 길은 자존심이나 생계처럼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가치나 필요성을 따르는 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 길은 겉으로는 창작의 길일 수도 있고 노동의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의 이면에는 비밀스러운 또다른 길이 깔려 있다. 보이는 길 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 명명될 수 있는 길과 명명될 수 없는 길, 그 둘 사이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길은 어찌됐든 굽이굽이 이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제는 없었던 새로운 지평선을 향하여. (18쪽, 「영혼의 문제」)
어째서 이렇게 영혼의 문제에 집착하는가, 하고 심보선에게 묻는다면 그는 “영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고 대답하리라.
영혼은 목적어의 자리가 텅 빈 명령어와 같다. 영혼은 어쩌면 허튼소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허튼소리다. 영혼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경이로운 역설(力說)이요, 가장 아름다운 역설(逆說)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영혼 때문에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영혼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산다. 영혼은 나의 시와 나의 삶을 뒤죽박죽 섞어버린다. 그러니 지금 영혼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미명을 맞이하는 나는, 내가 시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저 미명 이후의 아침만이 나의 유일한 윤리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22-23쪽, 「영혼의 문제」)
제2부는 심보선의 유년으로 시작된다. 사회학적으로 ‘문화 자본’이 결여된 집안에서 자라 시인이 될 확률이 지극히 낮았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에게 시쓰기란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행위, 상식의 세계에서 강요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타자’가 되어 쓰는 것일 터이다. 그것이 책 속에 끼워진 아버지의 육필 메모를 비밀스럽게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내밀한 고백도 담겼다. 이후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들을 레퍼런스 삼아 예술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성동혁?신해욱?최승자 시인의 시에 대한 단상, 김소연 시인과 함께 진행한 시 창작 워크숍 ‘퀼티드 포엠’ 활동부터, 체사레 파베세와 존 버거, 페르난두 페소아, 아르튀르 랭보 등을 다루며 이때 심보선의 해석과 사유는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화와 만남의 장소로서의 예술, 예술과 삶/계급의 관계, 작업실의 의미부터, 예술(시)이란 진리보다는 행복에 가까운 것이며, 자족적이기보다는 확산될수록 비범해지고 위대해지며, 무엇보다 자유로워진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무수한 익명의 인간이 시를 통해, 혹은 시적인 말과 행위를 통해 그 세계를 만들었고 거기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바로 그 익명성으로 인해 그 세계의 윤곽은 희미하고 그 세계의 지속은 위태롭다. 그 세계를 너무나 사랑해서, 혹은 그 세계를 너무나 소유하고 싶어서, 애호가의 맹목적인 열정으로, 혹은 호사가의 명예욕으로 그 세계를 상식과 학식으로 포획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그 세계를 예술적 탁월함이나 미적 완성도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며 언제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잉여의 감각 속에서, 예감 속에서, 텅 빈 침묵 같지만 사실은 넘쳐나는 수다의 말로, 서늘한 금속 같지만 사실은 뜨겁게 달아오른 칼날의 이미지로 출몰했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134-135쪽, 「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자는 취지의 거리연극제인 ‘안산순례길’, 고공 농성중인 해고 노동자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소설, 시, 에세이, 혹은 개인적인 지지 메세지를 녹음하여 육성으로 들려주었던 ‘소리연대’ 등 심보선은 사회적 갈등과 운동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를 시로 써 기록해왔다. 공동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애틋한 이름에 대한 심보선의 생각을 제3부에서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스를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억의 힘을 잃은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끔찍하도록 평화로운 지옥이기 때문이다. (263쪽, 「불편한 이야기꾼들」)
나는 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타인이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나 또한 동일하게 가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타인 또한 동일하게 가지기 때문이다. (316쪽,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핵화」)
작은 것이 작은 것 너머로 이동할 때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이 책의 부제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는 “내가 읽는 시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말, 공통의 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259쪽)에서 가져와 변형했다. 책에 실린 77개의 글은 과거에 쓰였고 글이 쓰일 당시보다 더 과거의 일들에 대해 쓰인 것도 많지만, 이 책은 결국 미래의 누군가를 향해 띄우는 편지 같다 생각했기에. “작은 것이 작은 것 너머로 이동하는 마술이 일어날 때가 있다.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이 발견될 때도 있다. 이때 불확실성은 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놀랍고도 설레는 모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98쪽)는 믿음을 담았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단정적으로 확언하지 못하는 사람, 사실은 희망하기 위해 비관하는 사람, 세 가지 수수께끼를 화두로 붙잡고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는 사람, 그가 가만히 묻는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추천사
질투는 판단을 방해한다. 세상에는 질투심 때문에 일그러진 평가와 문장들이 많은데, 그렇다는 것을 당사자만 모른다. 그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나는 다른 저자의 뛰어난 글을 읽을 때마다 내 순수한 경탄에 질투가 섞여들지 못하게 주문을 왼다. ‘안 돼, 질투하지 마, 그냥 인정하고 좋아해버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나는 티끌 하나 없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 나는 심보선의 글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나는 사회학을 하는 그의 좌뇌와 시를 쓰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그의 좌뇌를 질투하지 않고,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 두 뇌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이 책의 우아한 ‘좌우합작’을, 그래서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 같은 주제로 글을 쓸 때조차 관철되는 두 능력의 아름다운 협주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냥 그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구매가격 : 10,200 원
외롭고 쓸쓸한 사람 가운데
도서정보 : 리자퉁 / 문학동네 / 2019년 05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낮에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밤에 쓸 것이 생긴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평소에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고, 게다가 행정업무까지 처리하면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지 묻는다. 비결은 많이 듣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를 생각하기만 하면 글 쓰는 영감은 대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더이상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면, 분명 어떤 글도 써낼 수 없을 것이다. _에필로그 254쪽
리자퉁의 글은 관념적이지 않다. 리자퉁 스스로가 말하듯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 신문기사, 영화, 그림 한 편 등을 접하고서 영감을 얻는다. 즉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글감이 된다. 영화 한 편을 보고선, “당연히 원작자의 의도를 알 길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비교적 건설적인 해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한 후 영화에 대한 해석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그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글은 어떤 주의主義나 사조思潮 류의 분석이 될 수 없다. 때문에 편안하고 익숙한 그의 글에는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어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자아낸다.
소탈하고 담담한 문체는 그의 ‘배경과 이력’을 떠올리면 다소 의외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대만의 명문가 태생이다. 그의 증조부는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중국 근대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의 친형 이한장李瀚章(1821~1899)이다. ‘이한장’ 역시 청나라의 대신으로, 양광총독까지 지낸 세력가였다. 리자퉁은 대만의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대학교수에 이어 총장직을 연임했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았으나 젠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멍청한 늙은이”라 칭하며 제자들의 배려나 관심을 과분해하고, 자신은 좌우명을 갖기에도 모자란 사람이라고 시종 겸허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삶의 태도가 그의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문중유애, 애중유문
글마다 사랑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속에 글이 있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리자퉁은 대학 재학중에 군교도소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주로 수감자들과 대화를 하며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의 일이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차별과 편견에 눈뜨는 계기가 됐다. 미국 유학을 가서는 지도교수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던 관계로, 장애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는 경험을 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만 내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정부는 시각장애인이 근무하거나 학습하는 과정 중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선량한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인류의 아름다운 정서가 충분히 발휘되기만 한다면 인류에게는 곧 진정한 평화가 올 테고, (중략) 반대로 인류의 저열한 감정에 내맡겨 세상을 이끌어간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지옥을 만들고 있는 셈일 테다” 라며 인류의 선善과 양심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차별과 편견이 있는 곳에, 따뜻한 시선을 두길 바라는 그의 관심은 가까운 이웃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리자퉁은 르완다의 난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떠돌이 아이들, 보스니아전쟁에서 희생된 청년들까지 두루 살핀다. 반백의 나이에 굶주린 여덟 살 아이의 입장이 되어 독수리에게 쫓기고(「저는 여덟 살입니다」), 열세 살 소년이 되어 총성이 오가는 거리에 서며 (「모반」), 라일락이 있는 초원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청년이 된다(「산골짜기에 핀 라일락꽃」). 세상 어디든 소외된 이가 있는 곳이라면 그이가 겪는 상황을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감정이입에 기반한 공감을 촉구한다.
공학도의 잡학다식한 상상력이 가닿는 곳은
오직 ‘생명의 존엄’
전기기계학을 전공한 공학도답게, 그의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속으로만 하는 생각을 영상화하는 장치가 고안된 독재자의 집무실(「진면목」), 인류의 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 외계인이 등장해, 인류는 ‘진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학명을 가졌다고 말하는 SF적인 에피소드(「몰래 엿듣는 사람」), 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약’의 실험 대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인 한 야심가의 이야기(「부작용」) , 신원 조회를 한 후 입장 허가를 내리는 천국의 최신식 시스템 ‘등록처’ (「나는 누구인가?」)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이런 소재들이 수렴되는 곳은 결국 생명이다.
그가 접하는 여러 과학 저널에서는 약물이 인간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지만, ‘과학’을 신봉하는 그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감정인 사랑은 약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또한 생의 가치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획득한 지위가 아니라 살고 있을 때 행했던 좋은 일에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존엄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갖고 있는 여러 과학적 지식들을 끌어온 것이다.
“나의 세계는 행복하고 또한 아름답다.”
리자퉁 자신이 직접 겪은 바를 이야기하는 글 중 백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나고, ‘임종자의 집’에서 봉사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 담긴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를 꼽을 수 있다.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는 이 책의 대만판 원제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인 리자퉁은 본인의 신앙과 신념을 따라 줄곧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인도 콜카타로 건너가 테레사 수녀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리자퉁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인 ‘임종자의 집’에서 머물며 사흘 간 봉사를 하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다.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정작 진정한 빈곤과 불행은 회피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십육 년 이래 편안했던 날들이 갑자기 자리를 내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간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던 “한 조각의 순결한 마음이어야, 자유롭게 베풀 수 있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까지 줄곧 그래야 한다”는 테레사 수녀의 말을 섬광처럼 이해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쉰을 훌쩍 넘은 나이, 리자퉁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변하는 경험을 한 후 한참을 눈물을 흘린다. 그러고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들 모두는 마음속에 높은 담을 쌓는다. 높은 담 안에서 천국 같은 생활을 하면서 높은 담 밖으로 지옥을 밀어버리려 한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그럴듯하다고 내심 아주 만족하며 인간 세상에 비참함이라고는 없는 듯 가장할 수 있다. 누군가가 굶어죽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잘 먹고 잘 마실 수 있다.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 높은 담을 헐어버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넓은 마음 한 자락을 가질 수 있다. _197쪽
구매가격 : 9,5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