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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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는 남자

도서정보 : 정해연 / 엘릭시르 / 2023년 08월 1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홍학의 자리』 정해연 작가의 신작
강렬한 서스펜스의 특수 설정 스릴러!

제영은 어느 날부터 타인의 죽음을 보게 된다. 조건은 음식을 먹는 것. 자신이 보는 게 단순한 환각이 아님을 알게 된 제영은 사람을 살려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그 결과 죽음의 법칙 두 가지를 알아낸다.
첫 번째, 죽음이 보이는 건 얼굴을 아는 사람뿐이다.
두 번째, 생의 운명은 바꿔도 사의 운명은 바꿀 수 없다.
법칙에 가로막힌 제영은 구하고자 했던 사람 중 누구도 구할 수 없었다. 죽음의 적나라한 순간들을 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결국 오로지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 먹는 빈도를 줄였고, 자신이 볼 죽음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아는 얼굴을 늘리지 않으려 애썼다. 열악한 환경에 고립되고 메말라가면서도 살고 싶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죽었어야 할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이 죽는 상황을 여러 번 겪은 제영은 죽음을 그만 보겠다는 일념으로 예외들을 추적했다. 이 상황의 끝에 있던 것은 제영과 같이 타인의 운명을 보는 능력으로 죽음을 중개하는 자, ‘중개인’이었다.

『홍학의 자리』를 통해 정통 스릴러, 깜짝 놀랄 반전 미스터리로 단숨에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정해연 작가는 신작 『못 먹는 남자』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서스펜스를 선보인다.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주인공, 제영. 하지만 죽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예견하는 것은 살기 위해 음식을 먹을 때뿐.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제영 한 사람이 아니었다. 『홍학의 자리』가 착실하게 미스터리를 쌓아나가면서 궁금증을 유발했다면, 『못 먹는 남자』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에 따라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쫓아가게 만든다.

‘못 먹던’ 남자, 특수 설정 스릴러의 ‘평범한’ 주인공

주인공 제영은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타인의 죽음을 보는’ 능력 외에는 한없이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옥죄는 운명의 굴레를 풀어헤칠 방법을 찾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를 추적하던 끝에 거대한 위험에 휘말린다. 간절히 살고 싶어 하면서도 사람의 목숨을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하는 ‘중개인’에게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해 생명의 위협에 시달린다. 매 순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고,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시점에 어처구니없이 사랑에 빠지고,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선 김을 확 빼버리는 농담을 던진다. 이 남자는 딱 그만치 평범하게 인간적이고, 그런 만큼 변칙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못 먹는 남자’였던 제영은 자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적과 싸우고, 사랑하는 사람과 교류하며 차츰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된다. 몸에 힘이 돌수록 서슴없이 더 큰 위협에 몸을 날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렬한 서스펜스다. 본인은 모르지만 자신의 대적자 중개인과 과거에 인연이 있었고,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안위를 위협받는다는 지점은 더더욱 그렇다. 무기력하게, 오로지 ‘그럼에도 살고 싶어서’ 살아왔던 인생은 사랑하는 솔지의 쓴소리와 중개인의 궤변을 들어가며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고, 그 결과 힘없이 감당하기만 하던 인생의 향방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바꿀 힘을 얻는다. 얼굴을 아는 타인의 운명을 무작위로 엿보는 능력이 있는 것치고는 ‘평범한’, 그렇기에 더더욱 익숙한 조형의 주인공이다. 그런 사람이 이끌어가는 스릴러는 다 알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새롭게 다가오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구매가격 : 11,100 원

사서 일기

도서정보 : 앨리 모건 / 문학동네 / 2023년 08월 09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지…”
오늘도 평화로운 대혼돈의 도서관에서
사서는 고군분투중!

큰활자책과 오디오북 빌리기, 동요 배우기, 인터넷 사용, 덥거나 추운 날 편히 쉬기, 따라잡기 힘은 스마트 기기 사용법 배우기……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가능한 공간이 있다면, 그곳은 도서관이다. 『사서 일기』는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안식처, 그리고 사회를 위한 훌륭한 균형장치인 도서관의 최전선에서 일한 어느 사서의 경험을 유쾌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에세이다.

작가 앨리 모건은 우울증과 PTSD,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중 지역 도서관에서 보조사서로 일을 시작했다. 학습장애 청소년, 노숙인, 실업자, 영유아, 싱글맘, 노인 등 다양한 이용자를 만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 앨리 역시 삶의 밑바닥에서 조금씩 떠올랐고, 도서관이 자신을 구한 것처럼 이제 자신이 위기에 빠진 도서관을, 그 공간을 사랑하고 그곳이 필요한 이용자들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갱단의 표적이 되는가 하면 삶의 벼랑 끝에 선 이용자의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기도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grumpwitch(성질 더러운 마녀)’라는 트위터 계정에 소개했고, ‘내가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라는 타래가 하룻밤 사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며 언론과 전 세계 도서관 애호가, 독서인의 관심이 쏟아졌다.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이 에세이는 그녀의 삶을 구한 이상하고도 멋진 도서관에 바치는 진심어린 러브레터이자, 그곳을 아끼는 이들에게 보내는 뜨겁고도 다정한 제안이다. SNS로는 전부 소개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에피소드와 책장 뒤 사서들의 분투에 다시 한번 열렬한 반응이 날아들었고, 이 책을 먼저 읽은 한국의 사서들 역시 지역공동체에서 도서관과 사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솔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에 한마음으로 공감과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 이 책은 공감 300%가 아닙니다. 1000% 대공감! _한우리도서관 사서
✐ 뒷이야기가 궁금해 마음을 재촉하게 되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꿈틀대더군요. _부산 분포초등학교 도서관 사서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일들을 실제로 현장에서 많이 겪는다는 사실…… _강남구립도서관 사서
✐ 도서관은 사서에게도 영혼의 치유소로 기능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_경북대학교 도서관 사서


도서관은 책을 보기 위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당신이 몰랐던 사서의 하루하루

오랫동안 정신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이제 삶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한 앨리의 마음을 돌린 것은 도서관에서 걸려온 채용 합격 전화 한 통이었다. 어린 시절 내내 사서가 되길 꿈꿨던 앨리는 자살 계획을 일단 미뤄둔 채 소규모 도서관 보조사서로 첫 출근을 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곳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괴괴하고 우울한 분위기에 장서는 먼지만 쌓여가는 상황. 얼마 되지 않는 방문객은 크게 세 부류로, 너무 비싸고 빨리 읽어버리는 어린이책을 자녀에게 사줄 형편이 안 되는 젊은 부모들, 추리소설을 들어오는 족족 읽어치우는 어르신들, 그리고 도서관이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집에서 냉난방을 할 여유가 없거나, 실업수당 수령을 위한 구직활동에 필요한 컴퓨터가 없거나, 둘 다 없는 취약계층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부유하지 못한 동네의 도서관에서는 컴퓨터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복지 혜택과 지원금을 신청하고 공과금을 납부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 서비스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꼭 책을 보기 위해서만 도서관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동요를 가르쳐주는 어린이 교실에 자녀를 참석시키러, 비 오는 날 따뜻하게 앉아 있을 공간을 찾아서, 온종일 혼자 지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 까다로운 양식 작성에 도움을 구하러 사람들은 도서관을 찾았다. 하지만 시 자치체는 공간의 가치를 이용자 수와 현금 수입이라는 숫자로만 측정했고, 그 기준에 따르면 앨리의 도서관은 충분한 지원을 받을 자격이 되기는커녕 폐관 위기였다. 그럼에도 제각기 다른 이유로 이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 이들을 만나며 앨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매혹했던 도서관의 마법을,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에도 이곳에 구직원서를 넣게 했던 힘을 되살려 이 공간을 지키고 널리 알리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일부 폭력적인 이용자, 매뉴얼에만 집착하는 관리자, 포스터의 서체 하나까지 간섭하는 관료, 예산을 좌우하지만 정작 도서관 서비스에는 무관심한 시의원 때문에 기운이 꺾이는 순간도 있지만, 앨리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도서관 수호대’를 결성해 뜨개질클럽, 성인 그림 교실, 작가와의 만남 등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이용자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도서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그 노력에 응답하듯 이용자 수가 빠르게 늘어가는 것을 보며 사서들은 용기를 얻고, 급기야 도서관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수익금 전액을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수제 케이크 경연대회. 마침내 대망의 행사 당일, 도서관에 도착한 앨리의 눈앞에 전혀 기대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그날 무엇보다 가슴 벅차고 짜릿했던 것은 우리가 바야흐로 새롭고 신나는 도약의 발판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로스크리 수호대의 반란을 넘어서 뚜렷한 목적을 품은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의식을 공유했다. 도서관이 케이크로 뒤덮인 광경, 최근까지 우중충하고 사무적이기만 했던 공간을 꽉꽉 채운 사람들, 수다와 혼란의 아우성은 지역공동체 전체가 도서관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신호로 느껴졌다. _본문 396쪽


무엇이든 가능한,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오늘도 우리는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어린 시절 앨리는 도서관에서 한 권 한 권 저마다의 우주가 담긴 책들을 탐독하며 세상을 만났다. 책을 읽는 순간만은 해적도 뱀파이어도, 법정심리학자도 될 수 있었던 앨리는 이제 사서가 되어 아기와 청소년, 연금생활자에게 다양한 책과 그 안에 담긴 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수많은 책처럼 각양각색의 이용객을 만나며 깨닫는다. 도서관의 가치는 서가 위나 책 속에만 깃든 것이 아니라는 것.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역할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 전 세계적인 전염병 코로나19가 당도했을 때도 사람들은 사서를 신뢰하며 조언과 정보를 구했고, 도서관은 임시콜센터 역할을 하고 취약계층에 식료품을 전달하거나 처방약을 배송하는 등 지역사회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거치며 더욱 분명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능이 대폭 축소된 상황에서도 도서관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 목소리가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최전선에서 제공하는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앨리와 도서관은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을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도서관의 운명은 그곳을 찾는 이용자들에게, 지역사회에 달려 있으므로. 앨리는 도서관의 특별한 마법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당부한다. 지역공동체의 이 귀중한 자원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시끄럽게 설치고 외쳐달라고. 그동안 사서들은 최선을 다해 그곳을 꾸준히 지키고, 열어두고, 마법을 부릴 것이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들의 진심어린 애정과 분투가 담긴 이 책을 덮고 나면 누구라도 앨리가 말한 바로 그 마법을 확인하러 가까운 도서관에 달려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모두의 이야기가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구매가격 : 11,900 원

희귀종 눈물귀신버섯(문학동네시인선 199)

도서정보 : 한연희 / 문학동네 / 2023년 08월 18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 혼란 속에서”

그늘진 땅속 서로의 손을 붙들고서
신비하고 이채롭게 자라나는 눈물, 귀신, 버섯


감각적이고 새로운 목소리의 시인들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문학동네시인선이 200번을 앞두고 199번으로 한연희 시인의 두번째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을 선보인다. 2016년 창비신인문학상을 통해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능란”하고 “일상의 친근한 사물과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데서 시적 “기반이 탄탄함”을 알 수 있다는 평(심사위원 박성우 박소란 송종원 진은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첫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아침달, 2020)에서 매 순간 우리를 틀에 가두고 교정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비뚤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어 아름다운 화자를 앞세워 끊임없는 폭설이 쏟아지는 종말론적 세계 속에서 절망하는 대신 사랑의 힘으로 지지 않고 걸어나갈 것을 다짐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좀더 어둡고 축축한 곳, 빛이 들지 않아 외면받기 쉬운 곳으로 눈길을 돌려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기묘한 존재들을 들여다본다. “저 혼자 자라나” “귀신처럼 들러붙은” “이상한 유기체 같”(한연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에서)은 이 존재들은 때로는 ‘기계 속 유령’과 ‘계곡 속 원한’으로, 때로는 “잿물과 산비둘기의 피로 이루어진 비누”(「비누의 탄생」)로 몸을 바꿔가며 신비롭고 발랄한 목소리로 서늘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끝이 난 시점
거기엔
경계선이 있고
넘어서기에 딱 좋고

축축해진 손을 흙에 묻었더니
금세 와글와글한 이야기가 자라났다
(…)
손……님……
서두를 부탁드려요

주렁주렁 열린 손을 뽑는다

이 이야기가
부디
아무나 꽉 잡아주기를
_「손고사리의 손」에서

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
어떤 응어리가 데구루루 굴러간다
(…)
개는 죽으면 영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고
인간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빨간 실타래와 부적을 베개 밑에서 꺼내
가스불에 태우고 나서야
선명하게 보인다

드디어 찾았다
내가 발뻗고 죽을 자리!
_「광기 아니면 도루묵」에서


“끝이 난 시점”(「손고사리의 손」)에 경계선을 넘어서서 ‘영혼’ ‘귀신’ ‘유령’이 되기를 택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응어리”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빨간 실타래와 부적을 베개 밑에서 꺼내/ 가스불에 태우고”(「광기 아니면 도루묵」)서도 풀 수 없는, 이들로 하여금 지박령이 되어 영원히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이 응어리는 무엇일까. 시집을 채우고 있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무참하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자신이 다친 것도, 자신에게 갓난아이가 있는 것도 까먹다 영혼마저 까먹어버린 채 창밖으로 떨어진다(「고딕 모자」). 이웃집 아저씨가 낚아챘던 여자애의 손목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비린내가 나고(「알루미늄」), 또다른 여자애는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며(「굴 소녀 컴백 홈」), 피서객들이 노니는 캠핑장 인근에는 누군가의 피 묻은 옷더미와 구더기가 있다(「캠핑장에서 왼쪽」). 이토록 “무책임한 군중 무차별적 폭력 무의미한 처벌”(「굴 소녀 컴백 홈」)뿐인 세상에서 ‘끝’을 맞이한 이들은 “썩지 않는 몸과 뒤섞인 몸의 사체를// 걷어버리면/ 세상에 태어난 흔적도 없어져버”(「미드웨이섬」)리므로 수습되지 못한 채 부패해갈 뿐 제대로 된 애도를 받을 수 없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썩어들어가며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딸기해방전선」)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토록 참혹한 사연으로 인해 원혼이 되어버린 존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한을 풀어내기는커녕 이야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들에게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자에게는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그들은 ‘손님’, 즉 샤먼의 힘을 빌려야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샤먼의 역할로서 이 세계에 초대받은 인물이 한연희의 화자이다. 그는 “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 혼란 속에서”(「12월」) 방울 달린 천조각을 흔들면서, 버림받고 상처 입은 존재들이 자신의 못다 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그들 각각의 존재가 ‘희귀종’으로 호명되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름을 찾고 또 찾는다.

누군가를 부르기에 적당할 때까지
누군가의 형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름을 만든다

온 자와
간 자의 이름은 늘 다르다
(…)
희고 둥그런 기계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의 이름은 에밀리
_「에밀리 껴안기」에서


여전히 아이들은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가볍고 작고 흰 손가락이 그렇게 무참히 얼어붙고 있는데

그러니 12월에는
뜨거운 통 안에서 퍼올린 이름들을 불러줘야 해
이 끈질긴 애정으로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무슨 이야기든 듣고 말해야 한다
_「12월」에서


무지개를 건너간 반려동물 나의 친구 언제나 자매 카레의 여왕 다정한 이웃 혹은 선생님 저 먼 인도의 수많은 신의 부름을 물려받은 자 그리고 내가 식탁에 마주앉아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든지 네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할게
_「어제의 카레」에서


그렇게 ‘영혼’ ‘귀신’ ‘유령’이 “나의 친구 언제나 자매 카레의 여왕 다정한 이웃” 혹은 “에밀리”가 될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든지 네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하며 서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존재를 증언하기 시작할 때, ‘눈물’ ‘귀신’ ‘버섯’은 한데 모여 ‘눈물귀신버섯’이라는 희귀하고 새로운 버섯의 이름을 얻는다. 불가해한 메아리와 섬뜩한 흐느낌은 이야기로 자라나 마주앉은 식탁은 어느새 와글와글한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해진다.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을 파헤쳐야 합니다
꾹꾹 적어나갈 수 있는 연필을
언니가 손에 쥔다
엄마가 이름을 쓴다
이모가 일기를 끝마친다
딸이 필통 가득히 연필을 모은다
그렇게
씨가 나무로 나무가 연필로 연필이 진실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세계에서는
작고 여린 씨앗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을 거야
무궁무진한 다음을 기다릴 거야
_「씨, 자두, 나무토막 그리고 다시」에서


한연희의 화자는 말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금세 사라질 거라고 다들 말했지만”(「하이볼 팀플레이」), 이야기의 손이 끝끝내 우리를 꽉 잡아줄 것이라고. 사라지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무궁무진한 다음”이 기다리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자애는 무럭무럭 어른이 되”고, “비좁고 어두운 동굴을” 막 빠져나온 자리에서 우리는 마침내 “모두 나이 많은 여자”(「표고버섯 키트」)가 되어 있는 서로를 무사히 마주할 것이다.

구매가격 : 8,400 원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학동네시인선197)

도서정보 : 문보영 / 문학동네 / 2023년 08월 1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우리는 도시 전설 확산자들이야.”

세계라는 책을 지그시 누르는 반구형 크리스털 문진
그 안의 산뜻하고 가뿐한 평행 우주를 노니는 정답고 귀여운 친구들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고, 이듬해 『책기둥』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한국 시의 특별한 고유명이 된 문보영의 세번째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이 출간되었다. 시의 바깥에서도 문보영은 일상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이야기를 덧입혀 하루하루를 새로 살게 하는 산문과 소설, 시쓰기와 독서의 내면을 고스란히 속삭이는 손편지를 발송하는 ‘일기 딜리버리’, 시인으로서의 삶을 매력적으로 채색한 브이로그 등을 통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에게 독자들이 열광한 이유는 자유로운 동시에 세심하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도 삶의 여정에 함께해줄 동지들을 찾아나서는 산뜻한 발걸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문보영은 정교하게 묘사된 미니어처처럼 귀여운 존재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정겨운 움직임과 대화를 통해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연습하는 소중한 선례를 보여준다.

시집의 제목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은 모래에 파묻힌 책 위로 모래비가 휘날리는 서점으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잘린 손을 잡고 타인의 인생을 읽는다. 서시의 첫 문장 “있잖아, 지금부터 내가 지어낼 세상에는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어”(「방한 나무」)처럼 시집 속 존재들은 일반적인 현실 세계와는 다른 논리를 가진, 놀랍고 귀여운 전환이 가득한 세계를 살아간다. 수영장은 더이상 수영을 하는 곳이 아니라 물을 구경하는 곳이 되고(「사람을 버리러 가는 수영장」), 식당의 음식값엔 우리가 다른 평행 우주에서 시켰을 수도 있는 모든 음식의 값이 포함되며(「캐셔」), 세상의 모든 질문은 공항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답해준다(「모르는 게 있을 땐 공항에 가라」).


“그런데 그런 세상을 왜 만드는 거야?” 애인이 물었다. “왜긴 왜야,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지.” 나는 녹색불로 바뀐 신호등을 가리켰다. 애인은 다음 데이트도 기대된다고 말하고는 꼬리 달린 동물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오늘도 애인을 보내주었다.
_「횡단보도 앞에서」 부분

문보영은 왜 이런 상상에 골몰하는가? 그는 “인간이 조금 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적응을 이해하다」) 인간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고기인데 사람인 척하고 있”(「사람을 버리러 가는 수영장」)는 이들. “늘 뭔가를 숨긴 채 홀로 느끼고 있”(「10만 개의 느낌」)는 이들에게 문보영은 간절한 마음을 조심스레 들고 다가간다. 마치 서시에서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함으로써 의지와 공상을 북돋우는 ‘방한 나무’처럼.

일견 상큼하고 풋풋한 상상에 몰두하면서도 문보영은 존재 사이에, 세계의 한가운데에 뚫린 깊은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에게 “이상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쳐 있는 존재”(「적응을 이해하다」)이며, 그가 “아는 인간의 기본형”은 “정말을 절망으로 발음”해 “나는 절망 살고 싶어요”(「절망적인 인간 그리기」) 말하는 존재다. 문보영은 그런 존재들이 홀로 외롭지 않도록 일생 동안 일용할 이야기들을 도모한다. 시집 안에서 인간은 비인간에게 온기를 얻고, 비인간은 인간을 신기해하며 바라본다. 그처럼 존재와 존재가 모여 이루는 관계의 모양을 빚어내는 문보영의 시는 혼자 읽기에 외롭지 않고 다정하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상상한다 상상되어진 인간의 어깨에 두 손을 얹는다 그러면 등과 무릎을 굽히게 되고 엉덩이는 뒤로 빠지며 나의 키는 약간 줄어드는 것인데

이로써 사람 뒤에 숨은 사람의 자세가 된다

하나의 낯선 공 위에서 홀로 균형을 잡는 방법이다

상상되어진 사람이 내 무게를 견디려면
그 또한 어딘가에 두 발을 딛고 있어야 하기에
나는 상상되어진 사람에게도 하나의 커다랗고 낯선 공을 만들어준다

공이 우리를 의아해해도
어쩔 수 없다

_「위험한 공」 부분

문보영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사람 뒤에 숨은 사람의 자세”를 통해 “하나의 낯선 공 위에서 홀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쓸쓸하고 막막한 세계를 적적하지 않게, 개운하고 가뿐하게 꿰차고 나가는 걸음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시인의 말’은 독자에게 “아직 잠들지 마/ 우리는 현실을 사냥해야 해”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또다른 시인의 말은 이렇다. “꿈을 꾸는 동안에도 나는 바깥의 나와 맞물린다”(「시인의 말」). 문보영은 정합성과 개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평행 우주를 무수히 만들어낸다. 시이기에 가능한 그의 유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바나나 걸이에 걸린 채 자신이 썩어가지 않고 있다고 믿는 바나나가 “자신이 썩어가는 걸 막지 못하”더라도 “바나나가 상상하는 쪽을 응원”(「계속 살기의 어려움」)하는 문보영의 다정한 격려는 여기의 세계에 긴요하다. 설령 바뀌는 건 없어 보일지라도, “이 이야기를 짓는 내 마음”(「세상을 느리게 구하다」)만큼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시인의 ‘역자 후기’가 실려 있다. 문보영의 시집을 번역한 역자 문보영의 후기를 또다른 번역가가 2차 번역했다는 설정으로, ‘시인의 말’과 시들이 다르게 인용되며 설명된다. 시라는 예술은 진위를 판별하는 법정보다는 자유로운 상상의 장이 됨으로써 그 상상력으로 하여금 모래에 묻힌 존재들의 고유한 쓸모와 기능, 그리고 재미를 발견하게 할 것이다. “회전 책장의 고유한 기능은 책을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돌게 하는 것이다. (……) 책은 스스로 산책을 할 수 없기에 이렇게라도 바람을 쐐야”(문보영, 「역자 후기」) 하듯이. 혼돈과 곤란이 가득한 멀티버스의 세계에서 진짜를 가려내기 위해 소모되는 우리에게 문보영은 이토록 복잡한 세계 자체를 즐기고, 세계의 겹과 겹 사이 매력적인 여백을 누릴 수 있는 상상력을 선물한다.

‘예전에 나도 바나나 걸이에 걸어둔 바나나는 자기가 죽은 지 몰라서 오래 산다는 내용을 쓴 적이 있는데, 누가 그거 보고 유사 과학 퍼뜨리지 말랬어…… 심지어 바나나는 하늘을 향해 자란다며. 찾아보니 그 사람 말이 맞더라고.’
‘유사 과학!’
‘응, 근데 시는 원래 유사 과학이 아닌가……’
‘도시 전설이라고 하면 좀 나을까?’
‘도시 전설?’
‘도시 전설은 유령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그런가.’
‘뭐, 어쨌든 유사 과학보다는 도시 전설이 더 멋진데?’
‘우리는 도시 전설 확산자들이야.’
_문보영, 「역자 후기」 부분

구매가격 : 8,400 원

먹는 마음

도서정보 : 호사 / 문학동네 / 2023년 08월 18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언제부터였을까.
맛있는 걸 먹으면 엄마부터 생각난 건……”

오래오래 같이 먹고 싶은 ‘그들’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을 담아 전하는 음식 연서(戀書)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 작가 ‘호사’가 그간 홀로, 또 함께 먹어온 다양한 음식을 토대로 음식에 담긴 마음과 음식을 먹으며 헤아리고 다짐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에세이.
저자는 나이 일흔에 처음으로 ‘티라미수’를 맛보고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면서 앞으로 당신께 부지런히 ‘설레는 처음’을 선물하겠다고 결심하고, 큰언니가 정성스레 끓인 ‘보리차’와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는 자신을 위해 후배가 사다준 ‘보리차 음료’를 들이켜며 음식에 담긴 정성과 관심의 힘을 다시금 깨닫는다. 특히 이 책에서 빛나는 것은 나이 든 부모님들을 낯선 음식의 세계로 인도하며 식탁 위 대화를 통해 미처 몰랐던 당신들의 모습을 이해해가는 여정이다. 파스타, 과카몰레, 파히타 접시를 앞에 두고 망설이면서도 딸의 재촉에 조심스레 맛의 지도를 넓혀가려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당신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늠하고는 오늘도 두 분을 최고의 식탁으로 안내하려 열심을 다한다.

앞으로 엄마 인생에 몇 번의 티라미수가 있을까? (중략) 시간이 허락하는 한 부지런히 엄마에게 설레는 ‘처음’을 선물해야겠다. 옹알이, 뒤집기, 걸음마 등등 나의 수많은 처음에 엄마가 있었던 것처럼 엄마의 무수한 ‘시작’에 이제 내가 있다. _「엄마의 티라미수」에서

어디를 가든 보리차를 내주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마신다. 아무리 배가 차도, 필요한 양의 물을 이미 충분히 마셨어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다. 보리차 한잔에 담긴 크고 작은 마음들을 알기에 허투루 대할 수 없다.
마음이 헛헛하거나 주책없이 날뛸 때면 보리차가 생각난다. 텅 빈 나를 채워주고 또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주던 수많은 보리차들. 그 기억이 있었기에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_「보리차를 끓이는 마음」에서



엄마의 티라미수, 아빠의 아포가토, 큰언니의 보리차, 작은언니의 돈가스……
먹는 마음과 먹이는 마음
흔들리는 삶을 지탱해준 음식과 사람 이야기

이전까지 커피 ‘한잔의 여유’도 즐길 줄 몰랐던 아빠가 ‘아포가토’를 떠먹으며 뒤늦게 당신의 취향을 알게 된 이야기, 동생은 창피를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포크와 나이프로 ‘돈가스’를 먹는 법을 알려주던 작은언니와의 추억 등, 책에 담긴 이야기는 단순히 새로운 음식을 맛본 경험을 넘어 음식에 담긴 마음, 음식과 함께한 사람들을 애틋하게 풀어놓는다.
이를테면 큰맘 먹고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 모은 돈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일명 ‘달랏 피자’라 불리는 ‘반짱느엉’을 엄마와 사 먹은 일화에서는, 딸 둘을 데리고 노점에서 피자를 굽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삼십 년 전 당신의 얼굴을 겹쳐 보는 엄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줄줄이 딸린 자식새끼들 입에 뭐라도 더 넣어주고자 뼈에 바람이 드는지도 모르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던 삼십 년 전의 엄마. 그 자식 중 하나가 커서 모시고 온 여행에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엄마의 마음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저자는 목구멍에서 차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반짱느엉으로 꾸역꾸역 밀어내린다.
일흔 넘어 처음으로 ‘파스타의 세계’에 입성한 엄마와 냉장고 속 재료들을 털어 만든 ‘제철 채소 왕창 오일 파스타’를 나눠 먹으며 나중에 엄마 제사상에 올릴 파스타를 궁리하는 에피소드, 무릎 수술을 한 엄마를 위해 도가니탕을 끓이며 과거 가족들이 골골할 때면 사골국을 끓이던 엄마를 이해하게 된 사연 등은 피할 수 없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님이 살아 계신 동안 마음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저자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중에 엄마 제사상에 파스타 올릴게. 어떤 파스타면 좋겠어?” (…)
“다 좋아. 딸이 한 건 뭐든.”
본인의 입맛보다는 남편과 자식들의 취향이 먼저였던 엄마. 딸이 만든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도 엄마는 끝내 한 종류의 파스타를 정하지 못하셨다. 살아 계시는 동안 다양한 종류로 자주 드시다보면 엄마에게도 선명한 파스타 취향이 생기지 않을까? 일흔 넘어 파스타맛에 눈을 뜨셨으니 발전할 날만 남았다. 그릇을 치우며, 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들어간 홈메이드 파스타도 좋지만, 종종 엄마의 파스타 세계를 넓혀줄 셰프의 파스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와 내가 함께 파스타를 먹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_「엄마 제사상엔 무슨 파스타 올릴까?」에서

그렇게 자꾸 엄마를 귀찮게 하고 싶었다. 통증을 줄여주는 약 때문에 자꾸 잠을 자거나 TV를 멍하니 보고 있는 엄마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또렷하게 만들고 싶었다. 가족들이 골골할 때면 밤잠을 설쳐가며 사골국을 끓이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시간과 정성을 쏟아 도가니탕을 끓이면서, 엄마가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이 뜨끈한 도가니탕 한 그릇이 엄마를 씻은듯 낫게 해주기를. _「도가니탕을 끓이는 마음」에서

이처럼『먹는 마음』에는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 미안함, 응원과 격려, 위로와 조언이 달콤 쌉쌀 짭짤한 음식 이야기와 함께 펼쳐진다. 오래오래 같이 먹고 싶은 ‘그들’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을 담아 전하는 이 음식 연서(戀書)는 우리가 무심결에 흘려보낸 한 끼, 그 한 끼를 내 곁의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설탕 한 스푼에 사랑 두 큰술,
소금 한 꼬집에 눈물 두 방울!
‘마음’이란 양념으로 버무린, 평범하고도 특별한 음식 이야기

저자에게 ‘음식’을 먹는 일은 곧 ‘마음’을 먹는 일. 그 마음이란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 음식이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결심과 다짐이기도 하다.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음식을 먹으며 감탄하는 그 소중한 시간은 매년 나를 한층 더 성장시켰고, 단단하게 채워줬다”는 고백처럼, 그에게 식사는 ‘씹고 뜯고 맛보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생각하며 내일을 그려보는 의식이다.
저자는 바게트를 먹으며 빵에 상처(‘쿠프’라고 불리는 칼자국)가 있기에 볼륨감이 살아나고 속이 촉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바게트의 쿠프처럼 자신의 삶에 난 실패와 상처도 운을 만들고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깨달으며, 피하고만 싶은 고통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명절마다 전을 부쳐온 경력 삼십 년 차의 ‘전의 요정’으로서 불 조절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전은 불이 약하면 기름만 잔뜩 배고, 불이 강하면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는다는 것, 나아가 전 부치기와 마찬가지로 삶도 불 조절이 관건이라는 자신의 인생론을 공유한다.

각자의 인생 시기에 따라 강불로 뜨겁게 우르르 끓이기도 하지만, 중불로 속까지 충분히 익히고, 때로는 약불로 줄여 뜸을 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삶이 맛있게 무르익는 순서와 절차를 무시하면 결국 설익은 인생이 되어버리고 만다. 당신의 맛있는 인생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 인생이 맛있으려면 지금은 어떤 불이 필요하지? _「요리 못하는 사람의 특징, 약불이 뭐죠?」에서

설탕 한 스푼에 사랑 두 큰술, 소금 한 꼬집에 눈물 두 방울. 저자가 ‘마음’이란 양념으로 버무려 차린 음식들을 먹다보면 우리의 평범한 오늘도 조금은 특별해지지 않을까.

구매가격 : 11,200 원

있을 법한 모든 것

도서정보 : 구병모 / 문학동네 / 2023년 08월 03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구병모가 펼쳐 보이는 무한한 가능 세계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이야기

오늘의작가상,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가 구병모 신작 소설집

2022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
「니니코라치우푼타」 수록

구병모의 신작 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환상으로 구현된 낯선 세계부터 이미지와 사유로 직조된 추상 세계, 우리가 단단히 발 딛고 살아가는 실재 세계까지, 소설이란 형식에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이야기로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온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파과』 『네 이웃의 식탁』 『상아의 문으로』 『바늘과 가죽의 시』 등으로 증명했듯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일 그의 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에는 제목처럼 그가 펼쳐 보이는 무한한 가능 세계가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도 한 번쯤 상상해보았을, 혹은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언젠가 구병모가 평생 써온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 책에 바로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야심만만한 제목을 붙일 정도로 『있을 법한 모든 것』에는 오늘의 구병모가 지닌 작품세계가 집약되어 있다.

“이런 세상인데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이 책의 문을 여는 첫 소설은 「니니코라치우푼타」이다. 김유정문학상과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이미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소설은 중위 연령이 61세에 달하는 초고령 사회가 되어 노인 돌봄 비용이 사회적 문제가 된 근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요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는 노인들. 특수분장사로 일하는 화자는 자신의 딸도 못 알아볼 정도로 심각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어린 시절 만났던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길고도 이상한 이름을 가진 외계인은 정말 실재하는 것일까? 미스터리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조금씩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 이면의 모습을 비추며 동시에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는 놀라운 작품이다.
「노커」에는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은 언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어버리는 ‘노커knocker’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자신과 부딪치고 사과도 없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쫓아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 ‘다정’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말은 물론 글을 쓰는 일과 의미를 전달하는 제스처를 포함해 그 어떤 언어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언어를 상실한 피해자들이 늘어가자 사회의 기초 시스템은 붕괴될 위기에 처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치명적인 재난 상황을 속도감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단지 재난의 상황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소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이 언제 소통의 도구이긴 했던가? 우리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말은 이해보다는 오히려 오해의 도구가 아니었나? 아무에게 돌을 던지거나 아무의 목을 매달아 까마귀밥으로 걸어놓는 무기의 일종이며, 특히 현란한 말이야말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입속의 혀처럼 부리다 그 가치와 흥미를 상실했다고 판단하는 즉시 도륙내기를 일삼던 독재자들의 필수 재능 아닌가?
_「노커」에서

「있을 법한 모든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 세계에 대해 모색하는 이야기이다. 로맨스 소설을 의뢰받은 소설가 C는 그날 밤 잠에 들어 꿈속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으로 진행되는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결말은 보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고, 그는 그 이야기가 언젠가 어디서 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떠올린 것인지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 단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있을 법한 모든’ 결말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가능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로 나아간다.
이렇듯 구병모는 낯선 존재, 낯선 공간, 낯선 세계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에서는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지나 현대에 이른 화자의 회고를 통해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있으며, 「Q의 진혼」은 발신된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공간을 추상적 이미지로 구현한다. 메시지가 도달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1’은 디지털 코드화되어 의미의 구천을 떠돌고,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하는 양자의 세계는 구병모의 독창적이고 섬세한 언어에 의해 경이롭게 가시화된다.
「이동과 정동」은 반복되는 전염병으로 황폐화되어 이동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된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트럭 운전사인 ‘얼’은 동료 운전사인 ‘샤드’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그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그의 실종에는 명상을 통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영성주의자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얼의 이야기를 통해 경계를 넘는 이동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 막…… 당신이 말했네요.
—뭐요?
—이런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없겠지요.
_「이동과 정동」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을 법한 어떤 것과
있을 법한 모든 것 사이의 어디쯤에 당신이
촉발되고 솟아오르고 흘러넘치고 울려퍼지고 자리잡으니.”

구병모는 2008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해 베스트셀러가 된 『위저드 베이커리』로 우리 앞에 등장해 늘 자신을 갱신하며 우리에게 낯설고도 놀라운 문학적 경험을 선물해온 작가다. 『파과』와 『네 이웃의 식탁』 등 장편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작가지만, 그가 밀도 높은 언어로 그려내는 강렬한 이미지와 다층적인 사유는 단편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단지 상상에 그칠 수 있는 발상을 독창적이고 거침없는 언어를 통해 총천연색의 이야기로 구현해내는 구병모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무대가 바로 그의 소설집인 것이다. 그러나 구병모 소설의 미덕이 비단 다채로운 이야기를 빚어내는 탁월한 상상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를 즐거이 사로잡음과 동시에 마치 동경(銅鏡)처럼 우리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비춘다. 그걸 가능케 하는 그의 날카로운 현실 감각은 어쩌면 구병모가 소설가로서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있을 법한 모든 것』을 읽으며 낯선 존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라는 낯선 존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고, 구병모를 읽는 이유일 것이다.

구매가격 : 10,500 원

사랑을 담아

도서정보 : 에이미 블룸 / 문학동네 / 2023년 07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타임> 선정 2022 최고의 논픽션 1위
<뉴욕 타임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 <퍼블리셔스 위클리> <커커스 리뷰>, NPR, 아마존 선정 올해의 책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고민하며 걱정해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구원 같은 책.”
알랭 드 보통(소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스스로 삶을 떠나길 선택한다면, 그 선택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아직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삶을 점점 더 잃어가기 전에 이 땅을 떠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결정에 동의하고 마지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함께할 수 있을까? 소설가 에이미 블룸의 에세이 『사랑을 담아』는 바로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한 아내의 가슴 절절한 상실의 기록이자 가장 애틋한 러브스토리다.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스스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 『사랑을 담아』는 조력자살을 지원하는 스위스의 비영리기관 디그니타스의 문을 두드린 부부가 함께 취리히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 함께 울고 웃으며 이별을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의 사랑 가득한 이야기는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울리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뉴욕 타임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 NPR, 아마존 등 여러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 슬픔은 가장 지극한 사랑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라는 평을 받으며 <타임> 선정 ‘2022년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올랐다.


알츠하이머병의 ‘긴 작별’을 거부하고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삶을 떠나길 선택한 남편
그 마지막 여정을 함께한 아내의 숭고한 사랑의 기록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저자 에이미와 남편 브라이언은 스위스 취리히로 떠난다. 평소처럼 픽업 서비스를 이용해 공항에 가고, 함께 식사하고, 간단한 물건과 간식을 구매하고, 늘 타던 이코노미석이 아닌 비즈니스석에서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부딪치며 비행을 즐기는 두 사람은 얼핏 보면 휴가를 떠난 여느 부부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향한 곳은 스위스의 조력자살 지원기관 디그니타스다.
중년에 들어서 서로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최근 삼 년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브라이언은 삼 년 전부터 이미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을 보였고, 에이미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에이미가 쓴 글을 매번 읽고 정성스레 피드백해주던 브라이언이 언젠가부터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글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무채색 셔츠만 입는 아내에게 튈 레이스가 달린 얼룩무늬 옷을 선물하는가 하면, 몇 년이나 참여했던 독서모임의 일정을 헷갈리거나 모임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고, 불과 십 분 거리로 이사간 회원이 아주 먼 곳으로 이사갔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다.
브라이언의 문제는 직장에서도 계속되어 예상보다 이른 은퇴를 맞이하기에 이르고, 결국 부부는 신경외과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MRI 촬영 결과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주말 내내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갖는다. 진단을 받고 48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브라이언은 스스로 삶을 떠나길 결정하고, 그 결심에 흔들림이 없다. 그때부터 에이미는 브라이언이 선택한 마지막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그 과정에서 디그니타스를 발견한다. 그리고 브라이언의 존엄사 승인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가기 시작한다.


존엄한 삶을 마무리하는 존엄한 죽음
인간답게 살고 또 인간답게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을 기치로 내건 디그니타스는 1998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로 현재까지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스스로 삶을 떠났다. 미국의 말기환자 가운데 죽음을 원하지만 앞으로 남은 수명이 육 개월 이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얻지 못한 이들이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요구하는 동행자살(디그니타스는 생명 중단 선택에서 동반과 지지를 중시하는 의미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 대신 ‘동행자살accompanied suicide’이라는 표현을 쓴다)의 전제 조건은 노령이거나 불치병 환자 또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견딜 수 없는 장애”나 “통제 불가능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사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면담을 하고 각종 서류를 제출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브라이언의 확고한 결정을 에이미는 지지하고 또 그 길에 이르는 여러 복잡하고 세세한 과정을 기꺼이 돕지만, 사랑하는 이를 영영 떠나보내는 방법을 직접 찾아보고 실행한다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다. 이제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정말로 어떤 느낌인지를 더 잘 알게 된 에이미는 과거 그 표현을 가볍게 사용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리고 브라이언이 다른 아내, “더 좋은 아내”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이따금 나는 그가 더 좋은 아내, 적어도 다른 아내를 만났다면, 그 사람이 이 결정에 반대하고 남편의 육신이 스러질 때까지 그를 이 세상에 잡아두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나는 옳은 일을 하는 거라고, 브라이언의 결정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믿지만, 그가 이 모든 준비를 직접 하고 나는 그의 뒤를 새끼 오리처럼 충실히 졸졸 따라다닐 수 있었다면 마음이 한결 편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자기 스스로 모든 걸 준비할 수 있다면 애초에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아닐 테지만―또 애초에 자기 스스로 모든 걸 준비하기를 원한다면 그건 브라이언이 아닐 테지만. 본문 중에서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이 흔들림 없이 디그니타스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밟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떠나고 싶”다는, “무릎 꿇고 살고 싶지는 않”다는 브라이언의 굳은 의지를 에이미가 마음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존엄한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소망, 인간답게 살고 또 인간답게 떠나고 싶다는 바람, 알츠하이머병의 기나긴 투병생활을 거치며 지친 가족들이 그의 생이 다하는 날 슬픔과 함께 안도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결코 쉽지 않은 마지막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가슴 절절한 러브스토리이자
삶을 비추는 사랑에 대한 가장 찬란한 찬사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 충만한 삶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잘생기고 너그럽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사람”인 브라이언은 식당에 가면 주방장이 달려나와 맞이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에 진심이며 대학 시절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고 열정적인 건축가로 사십 년을 일했으며 다정한 남편이자 손녀 넷의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하부지”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가 “깜박이며 스러져가는 인지의 불꽃에 기댄 위태로운 삶을, 꺼져가는 삶과 그후에 올 죽음의 어둠으로 침잠하는 과정”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삶이 커다란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힘으로 용기 있는 이별을 선택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상실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에이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삶에 더욱 간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되뇌게 된다. 내 삶의 모든 날에, 사랑을 담아 살아가겠노라고.

그저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맺은 인연도 꼭 죽음이 우릴 갈라서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아니면 어떤 예상치 못한 계기로 언제 수명이 다할지 모른다.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우리에게 남은 모든 날에. 옮긴이의 말에서

구매가격 : 11,800 원

북과 남(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229)

도서정보 : 엘리자베스 개스켈 / 문학동네 / 2023년 07월 17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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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역동적인 삶을 심도 있게 그려낸 명작
제인 오스틴의 계보를 잇는 탁월한 이야기꾼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사회소설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북과 남』(1855)은 “『오만과 편견』의 산업적” 버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영국 남부 시골과 북부 도시의 선명한 대비 속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 노사갈등 같은 당시 사회상을 생생히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남부 출신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여성 마거릿 헤일과 자수성가한 만큼 자부심이 강한 공장주 존 손턴이 서로 대립하고 오해를 겪은 끝에 이해와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를 모델로 한 가상의 공업도시 밀턴을 주요 무대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며 여러 계층의 삶을 세심히 들여다본 사회소설이자,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산업소설이며, 주인공 마거릿이 시련과 아픔을 겪어내며 독립적인 인간으로 바로 서기까지의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성장소설이다.

급격한 산업화가 빚어낸 온갖 문제들,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을
담대하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린 빅토리아시대의 초상
‘재발견된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사회성 짙은 대표작

조르주 상드가 “개스켈의 작품을 읽으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며 인도주의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고, 조지 엘리엇이 “내 인생관이나 예술관은 개스켈의 그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며 공감을 표하는 등,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에 당시 작가들에게서 인정받았고 독자들의 열띤 호응도 얻은 엘리자베스 개스켈. 생전에는 이렇게 명성과 인기를 누리던 개스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동시대에 활약한 찰스 디킨스나 윌리엄 새커리, 브론테 자매 등의 작가들과 비교하면 다소 잊힌 감이 있었다.
그러다가 빈민층을 포함한 여러 계층의 삶과 산업화가 초래한 문제의 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냈다는 점에서 1950년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어 그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게 되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진보적인 시선으로 그렸다는 점에서는 1970년대 페미니즘 문학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미덕과 개성을 두루 평가받게 된 개스켈은 근래에 국내에서는,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이 등장하는 스릴 넘치는 고딕소설에 일가견 있는 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재조명받고 있는 작가 개스켈의 『북과 남』은 빅토리아시대 중기 영국 북부와 남부의 대조적인 생활양식에 초점을 두고 각계각층 사람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맨체스터 노동자의 고단한 생활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개스켈의 첫 장편소설이자 출세작 『메리 바턴』에 이은 두번째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개스켈을 “셰에라자드”라 칭송한 찰스 디킨스가 펴내던 문예지 〈하우스홀드 워즈〉에 1854년부터 1855년까지 20편으로 나뉘어 매주 연재된 후 수정과 보완을 거쳐 185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공업도시 밀턴의 모델이 된 맨체스터는 당시 영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기계화와 대량생산을 토대로 한 산업자본주의의 중심지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지내며 빈곤한 노동자층을 관찰한 후 이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폭로한 「1844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1845)을 집필했는데, 이 연구서가 다룬 노동자들의 생활상이 『북과 남』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조위원으로 분투하는 니컬러스 히긴스와 그의 딸로 공장에서 일하다 얻은 폐병 때문에 단명한 베시 히긴스, 그리고 병약한 아내와 여섯 아이를 둔 가장인 탓에 생계를 위해 노조를 거스르다가 궁지에 몰린 존 바우처 등의 인물을 통해 노동자들이 처한 엄혹한 현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아가 노동자와 공장주 사이의 대립과 불신이 최고조에 이르며 파업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 이로 인한 여파와 후유증은 물론, 니컬러스가 손턴의 공장에 일하게 되면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화합에 이르는 모습이 개스켈 특유의 사려 깊고 연민어린 시선을 통해 그려진다.
사회문제와 파업 같은 소재를 진지하게 다룬데다 비극적인 죽음이 연이어 등장하지만 『북과 남』은 그저 심각하고 무겁기만 한 소설은 아니다. 처음에는 반목했던 마거릿과 손턴이 서로 엇갈리다가 오해를 풀고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릴 뿐만 아니라, 마거릿이 고난과 슬픔을 겪고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가지각색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예리하고 재치 넘치는 필치로 묘사해서 읽는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주간지에 연재된 작품답게 시리즈물을 연이어 시청하듯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며 몰입해 읽게 만드는 저력을 지닌 이 소설은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BBC에서 1966년, 1975년, 2004년 세 차례에 걸쳐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특히 4부작으로 선보인 2004년도 판은 그해 BBC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49.43%의 지지를 받으며 ‘최고의 드라마’로 꼽혔다. 드라마의 선풍적인 인기는 ‘빅토리아시대의 제인 오스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야기꾼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더한층 촉발시켰다.


관습을 거스르고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인물의 탄생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마거릿 헤일
노동자의 의견을 경청하는 포용적인 고용주로 진화하는 존 손턴

총 2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런던의 이모 댁에서 지내던 마거릿 헤일이 사촌 이디스의 결혼 준비를 분주히 돕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디스의 결혼을 계기로 십 년간 살아온 런던을 떠나 부모님이 계신 남부의 시골 마을 헬스톤으로 돌아온 마거릿은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지만, 급히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 이내 직면한다. 교구목사인 아버지 헤일 씨가 양심상의 문제로 사임하고 북부의 도시 밀턴에 가서 가정교사로 일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헬스톤에서 매연 가득한 잿빛 도시 밀턴으로 이사하며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 일가족은 지나치리만큼 역동적이고 번잡스러운 분위기에 난색을 표하지만 밀턴의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차츰 적응해나간다. 그중에서도 헤일 씨의 총애를 받는 첫 제자 존 손턴은 방직공장의 주인으로,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만큼 자부심 강하고 냉철한 인물이다. 애초에 제조업자들을 돈만 아는 장사치들이라며 경멸했던 마거릿은 손턴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자신을 경멸하는 마거릿에게서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매력에 이끌리던 손턴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자신을 겨냥해 날아온 돌을 대신 맞아준 마거릿에게 사랑을 느끼고 청혼하지만 매몰찬 거절을 당한다. 1부는 파업과 폭동, 그리고 손턴의 청혼이라는 주요한 사건을 분수령으로 끝나고, 2부는 좌절된 사랑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손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이 열린다. 한편, 에스파냐에 도피해 살던 마거릿의 오빠 프레더릭이 헤일 부인이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비밀리에 밀턴으로 찾아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다. 하지만 해군으로 복무했던 프레더릭은 선상반란의 주모자로 낙인이 찍혀서 잡히면 사형당할 위험이 있기에 급히 밀턴을 떠나야 한다. 그리하여 런던으로 가는 오빠를 배웅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마거릿은 피치 못할 거짓말을 하고는 양심의 가책과 불안에 시달리고 잇따른 시련을 겪게 된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솔직하고 당당하며 지적인 주인공 마거릿 헤일이다. 개스켈은 애초에 제목을 ‘마거릿 헤일’이라고 지으려 했을 정도로 마거릿의 이야기를 이 소설의 주제로 여겼다. 하지만 찰스 디킨스의 권고에 따라, 보다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면서 대조되는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북과 남’으로 결정했다.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지만 심약한 부모님, 해외에 도피해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인 오빠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나가는 마거릿은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하인을 대동하지 않고는 외출을 꺼리는 이모 쇼 부인과 사촌 이디스와는 달리, 밀턴의 이곳저곳을 혼자 돌아다니며 도시 빈민의 비참한 삶을 피부 가까이 느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폭도들의 공격을 받은 손턴을 보호해 위험에서 구해주고, 손턴의 사업이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투자함으로써 회생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전복시키는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가부장적인 빅토리아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으로 머물기를 거부하는 마거릿은 주체적이고 강인한 사람으로 점차 성장해간다.
이 마거릿에게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얼마간 투영되어 있다. 개스켈은 헤일 씨처럼 목사였으나 그만두고 공직에 종사한 아버지, 해외로 떠난 유일한 혈육인 오빠를 두었고 이모 댁에 맡겨져 자라기도 했다. 게다가 여성 교육을 권장한 유니테리언파 집안 출신답게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여러 언어를 익히고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다. 목사의 아내로서 도시 빈민들과 자주 접하며 자선을 베풀고 교구민을 교육하는 데 전념한 경험은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전제군주처럼 권위적인 고용주를 표방했던 손턴은 파업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자신이 고용한 니컬러스와 교류하면서 차츰 변화해간다.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다. 대립하는 양쪽의 입장을 공평히 이해하고 갈등을 풀어내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썼던 개스켈의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부분으로, 처음엔 불화하던 마거릿과 손턴이 마지막에 이르러 화합을 이루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구매가격 : 15,400 원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도서정보 : 최현숙 / 문학동네 / 2023년 07월 14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낙인찍힌 삶을 타협 없이 마주하며
비로소 ‘나’를 해명하는 글쓰기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 각자의 생애를 귀기울여 듣고 기록해온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 “흔해빠진 사람들의 흔해빠진 이야기”를 글의 주재료로 삼고 타인의 아픔과 실패, 한계를 깊이 살펴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 통찰을 길어올리는 것이 그가 지금껏 누구보다 열심하게 해온 일이다.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듣는 보통 사람들의 생은 저마다 각별했다.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는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에 귀기울여본 흔적이다. 그는 어쩌다 홈리스 활동가이자 구술생애사 작가가 되었을까. 홀로 혼돈 속을 헤매던 청년 시절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게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통과해온 곡절을 되짚는다. 도둑년, 미친년, 냄새나는 여자로 낙인찍힌 삶을 살아오며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 그들에게 이끌리며 느끼는 “무작정한 설렘”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자신의 생애 내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부모와의 갈등으로 인한 자기분열, 액취증과 도벽증을 앓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멸시는 현재의 삶이 발아한 씨앗이다.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곤한 남자와 결혼해 제 발로 빈곤 속으로 걸어들어간 그는 이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해오던 중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고, 커밍아웃하며 이혼했다. 이후 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원가족과의 관계도 단절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중독, 소외 등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되돌아보기 힘들었던 묵은 상처의 기억들을 뜯어내며, 지금에 닿은 ‘나’ 스스로를 해명하고자 했다. 질곡의 생애 마디마다 타협하거나 회피하기는커녕 거역과 배반, 저항을 택한 사람, 세상을 미워한 힘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간 사람. 예순일곱인 지금도 그는 “거리의 냄새나는 노숙인들과 쪽방촌 사람들, 어딘가에 중독된 사람들과 미쳐버린 여자들을 하염없이 쫓아다니고 있다”.

불가해한 희망을 안고 세상과 충돌하며
제 길을 만들어나간 한 생生의 기록

최현숙은 십대와 이십대 시절 액취증과 도벽증으로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활발한 성격으로 어린 시절에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고 함께 운동도 곧잘 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며 시작된 액취증은 그에게 뼈아픈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몸에서 나는 나쁜 냄새는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었다. 사람들은 코를 틀어막거나 수군거렸다. 남들이 자신을 밀어내기 전에 먼저 타인을 멀리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한편 발각을 통해서만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도벽은 “젊은 시절 치명적인 상처이자 혼돈의 핵심”이었다. 엄마의 돈 심부름을 하던 중 ‘삥땅’한 경험이 쌓이며 지속된 돈을 훔치는 버릇은 스물세 살 동급생에게 들켜 망신을 겪은 후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며 소외와 고독을 자처하던 시기, 낮보다는 밤을, 빛보다는 어둠에 탐닉하던 시절,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던 혼돈과 방황 속에서도 나중의 ‘좋은 나’에 대한 희망을 결코 놓을 수는 없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 불가해한 희망 탓에 더욱 자괴감이 심했다. 1부 ‘혼돈과 어둠 속에서’는 칠십 줄을 앞둔 이제야 스스로에게 조금씩 해명되기 시작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돌아보는 기록이다. 가족 내에서 불거진 숱한 갈등과 충돌, 폭력의 기억을 회상하고, 엄마의 죽음 이후 남매들과 절연하기까지의 과정도 속속들이 꺼내 보인다. 모든 족族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 자유로워진 최현숙의 고유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담겼다. 자신의 모순과 상처를 모조리 도마 위에 올려 살과 뼈를 발라 내어놓으면서도 순간순간 돌출하는 유머와 호쾌한 통찰은 우리 시대 독보적 에세이스트가 탄생했음을 강렬히 예감하게 한다.

“두려움의 뒷면은 혐오다”
실체 없이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다

2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에는 노쇠해가는 몸과 정신을 마주하고 주변의 죽음을 관찰하며 써내려간 글들을 묶었다. 한국에서 나이든 여성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비혼 1인 가구로 살아가며 일상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담겼다. 무너지는 치아와 갈수록 심해지는 몸 곳곳의 통증, 느려지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여전히 생동하는 노인의 섹슈얼리티 역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늙어가는 몸과 정신을 확인하며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생각한다.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며 아픈 노인들, 없이 사는 노인들을 돌보았고, 부자 노인이라 할 수 있을 부모의 노쇠와 죽음 과정 역시 밀착해 관찰한 바 있는 그는 노화와 질병, 죽음이야말로 “오만 가지가 불공정한 세상에서 모처럼 공정한” 현상임을 안다. 그러니 “생로병사의 어쩔 수 없음”은 혐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수긍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 테다. 3부 ‘희망 없이, 하염없이’에는 2020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역 인근 홈리스 현장에서 활동하며 몸소 관찰하고 느낀 바를 담았다. 거리에 사는 상처 입고 냄새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삶의 면면을 거침없이 들춰낸다.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버텨온 힘, 그들이 지닌 긍지와 지혜를 들여다보며 “더 추락해도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하는 값진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노려보며 가늠하는 삶의 향방
타협하지 않고 “전략하며” 나아가기

남들에게 내놓고 선뜻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생의 갈래까지 이토록 활짝 펼쳐 보이는 이유는 “모든 오류는 스스로 까놓고 떠들면 조금씩 벗어나”지기 때문이다. 퀴어이자 여성 독거노인인 그의 몸을 통과해 불려나오는 여러 사회적 의제들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뒤엉킨 가족사와 그가 여태껏 거쳐온 여러 가족의 형태를 살피다보면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허상을 인식하게 되고, 노인이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불편과 곤란을 발견하면서는 장애인 이동권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하게 된다. 몸 누일 방 한 칸이 없어 거리를 떠돌다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회와 국가에 뿌리박힌 불평등을 고민하게 한다.
그가 기록한 수많은 구술생애사 주인공들처럼, 아픔과 시행착오로 점철된 그의 생애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다양한 쓸모”를 남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에는 그 이면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의심부터 든다는 그는 규범과 제도, 일상 곳곳에 깃든 부조리를 노려보다가 결코 그에 타협하지 않기로 삶의 향방을 정했다. 오늘도 그는 사회가 ‘비정상’이라 못박은 이들이 모인 재난의 광장에서 놀며 싸우며 살아간다. “위가 아닌 아래로, 상승이 아닌 추락으로, 냄새나는 존재들”에게로 한걸음 더 내디디면서.

구매가격 : 12,600 원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도서정보 : 장강명 / 문학동네 / 2023년 07월 18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잿빛 유토피아, 혹은 오색찬란한 디스토피아
누구나 꿈꾸었던 기술의 발명,
그로부터 시작된 예측 불허한 일상
근미래 기술의 빛과 어둠을 그린 흥미진진한 ‘STS SF’

『표백』 『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재수사』 등의 소설과 르포집 『당선, 합격, 계급』 등을 펴내며 우리 사회에 날카로운 화두를 던지고 동시대 독자들과 부지런히 호흡해온 작가 장강명의 신작 소설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출간되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질문하는지, 왜 질문하는지, 무엇을 염려하는지 확인하게” 해준다는 심사평을 받은 심훈문학대상 수상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일본의 권위 있는 SF 문학상인 성운상 해외 단편부문 후보작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등 총 7편이 수록되었다. 1990년대에 일찍이 『과학동아』 『베스트셀러』 등의 잡지에 SF 단편과 칼럼을 실어왔고 월간SF웹진을 창간해 2001년까지 운영해온 작가는 SF에 대한 애정과 소양을 이번 소설집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장르를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명명한다. STS란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탐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과학기술이 “여러 영역에서 우리 사회에 실존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문학이 여기에 대응해야 하며, 대응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특별 소책자 ‘코멘터리 북’에 수록된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이자 STS의 권위자 홍성욱과의 대담에서 SF를 “사회에 대한 사고실험”이라고도 설명한바, 작가의 그러한 사유가 편편이 녹아 있는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급변하는 우리 사회를 한층 깊어진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이 열띤 사고실험에 동참시킨다.
『지극히 사소한 초능력』(2019)에 수록되었던 네 편의 중단편을 STS의 시선에서 다시 다듬은 뒤 세 편의 신작과 함께 선보이는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새롭게 읽히고 더욱 뜨겁게 논의될 만한 하나의 ‘화두’이다. 작가의 전매특허인 흥미진진한 설정과 몰입도 높은 플롯, 생생한 장면 묘사 또한 이야기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타인의 기억을 체험하는 기계, 증강현실 기술, 엽록체 이식 수술,
육체 부활 장치, 인간관계 예측 분석 앱…
삶의 풍경이 뒤바뀐 시대의 면면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STS SF’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단편이다. 눈앞의 풍경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편집해서 보여주는 증강현실 기술 ‘옵터’가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증강현실 규제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바다 위의 크루즈선에서 생활하며 본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통솔하는 가상현실에 안주하려는 “옵터 중독자”(9쪽)들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가 진짜인지, 진짜보다 진짜 같은 거짓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는 문제작으로,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편집되는 기이한 모습과 가상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들의 서늘한 대화 장면을 통해 근미래의 황량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가상현실로 도피한 이들의 심리를 다룬다면, 「당신은 뜨거운 별에」는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척박한 섭씨 400도의 행성 금성에서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수정’의 몸에 초점을 맞춘다. 거대 자본을 거느린 어느 탄산음료 회사가 우주로 파견한 과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람의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생체 기술을 개발하고, 수정은 몸을 지구의 냉동 시설에 맡긴 채 머리만 금성으로 보내진다. 금성을 탐사하던 수정은 어느 날 과학자들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회사의 비윤리적인 비밀을 알게 되고 탈주를 계획한다. 소설은 효율성이 극대화된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펼치면서 몸의 소유권을 침탈당한 여성의 울분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
한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대체 역사소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타인의 기억을 주입받을 수 있는 ‘체험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그린다. 유대인위원회는 아이히만을 체험 기계에 넣어 그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겪고 반성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그 자리에 기자단을 초청한다. 소설은 유대인 공동체와 과학계, 그리고 각국의 기자들의 반응을 다각도로 묘사하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라는 도덕적 황금률의 허점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연쇄살인마, 성폭력범, 아동 학대범들에게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을 굳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닮은 존재여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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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앞선 세 편의 소설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회공동체 전방위에 가해지는 충격파를 보여주고 있다면, 「나무가 됩시다」와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새로운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인 채 생활하는 개인의 내면 속 파문을 그려낸다. 「나무가 됩시다」는 피부에 엽록체를 이식하는 ‘그린 라이프’ 수술을 받은 사람이 쓴 수기 형태의 단편이다. 빛을 받아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처럼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게 된 트랜스휴먼의 모습을 통해, 먹고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살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죄와 그 죄에 대한 완전한 해방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흥미로운 단편이다.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소설 속 화자 ‘장강명’이 슬럼프를 겪으며 얻은 우울증을 떨치기 위해 플라스마 헤어밴드를 착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플라스마 헤어밴드는 집중력을 극대화해 지루한 일에도 강렬하게 몰입하게 해주는 특수 발명품인데, 소설 속 장강명은 이 물건을 쓰며 점차 예상치 못한 위기에 빠진다. 소설 속 헤어밴드와 같은 발명품을 한 번쯤 꿈꿔보았을 작금의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오답을 쌓아가며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구성하게 하는 소설

「아스타틴」은 한 편의 장대한 우주 활극으로, 목성과 토성권에서 우주 사회를 이룩한 천재 과학자 ‘아스타틴’을 그린다. 그는 육신을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부활 장치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대대로 다시 태어나면서 신적인 존재인 초지능통합체로 거듭난다. 자기 자신을 열다섯 명으로 복제한 그는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과 지능을 지닌 한 명의 개체를 최종 아스타틴으로 선정하는 부활식을 고안해낸다. 세상의 근본적인 생태를 송두리째 바꿀 만한, 길들일 수 없는 야수 같은 기술에 잠식된 포스트휴먼 시대의 이 생존 게임은 읽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마침내 커다란 갈등이 해소되면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결말부는 두말할 것 없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작품집의 말미에 수록된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관계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는 앱이 상용화된 사회를 그린다. 성격도 살아온 배경도 판이하게 다른 ‘이유진’과 ‘송유진’은 우연한 계기로 사랑에 빠지지만, 데이터 예측 앱이 전망하는 두 사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두 사람은 그 예측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끝내 앱의 예측대로 이별하고 만다. 그러나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묘미이다. 아무리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은유된 삶의 우연성과 불확실성은 제거하기도 제어하기도 어렵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또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고른 오답”을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본문 중에서) 것. 급변하는 기술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데 필요한 모험적인 용기와 주체적인 시선은 그렇게 함양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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