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눈부신 안부
도서정보 : 백수린 / 문학동네 / 2023년 06월 02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문장에 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
눈부시게 서툴렀던 시절에 바치는 백수린 첫 장편소설
발표하는 작품마다 흔들림 없는 기량을 보여주며 평단과 독자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소설가 백수린의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가 출간되었다. 2011년 데뷔한 이래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중편소설, 짧은 소설들과 산문을 발표하는 동안 조급해하지 않고 장편의 그릇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기다린 그가 등단 12년 만에 펴내는 첫 장편소설인 만큼 이 작품의 탄생이 더욱 반갑고 귀하다. 『눈부신 안부』는 2021년 봄부터 2022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이토록 아름다운’이라는 제목으로 절찬리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특유의 성실하고 꼼꼼한 소설쓰기로 연재와 개고에 임한 끝에 지극히 완성도 높고 아름다운 첫 장편을 자신의 이력에 추가하게 되었다.
백수린은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에서 일찍이 “충실한 기본기”는 물론 “안정적인 보조와 감각으로 자기 세계를 부풀려가는 정통적인 스타일”(문학평론가 서영채)을 보여주었고, 두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안전한 껍질이 “더 깨진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샅샅이 알고 싶다고 마음먹”(소설가 김연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하며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더욱 섬세하게 벼려냈다. 그리고 작가에게 2020 한국일보문학상을 안겨준 세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로 “인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가장 우아하게 말하는 법. 그런 걸 찾는다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시인 박연준)는 평을 받으며 삶의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문장 위에서 구현하는 독보적인 감각을 드러내 보였다.
『눈부신 안부』는 백수린이 그간 이루어낸 이러한 성취가 집대성된 작품이다. 비극적 사건을 회피하려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던 한 인물이 어른이 된 후 한층 품 넓은 시야로 서툴렀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좇는다. 차분하게 쌓여가는 서사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치유와 성장에 도달하려는 한 인간의 미더운 움직임이 백수린의 다정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아름다운 결이 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확장되는 근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백수린 소설세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타국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홀로 마련해야 했던 한 아이를
다정히 보듬어준 파독간호사 여성들
그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넓어진 시야로 유년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보려는 진중한 발걸음
『눈부신 안부』의 책장을 펼치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성실히 거짓말을 해야 했던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해미’. 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를 한순간에 잃고 너무 일찍 인생의 비극성을 깨달아버린 아이다. 엄마와 아빠는 언니를 잃은 고통을 해미에게 감추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하고, 여동생 ‘해나’는 아직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마냥 해맑아 보인다. 장녀가 된 해미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고 해나의 응석을 받아주며 혼자 슬픔을 삼켜낸다. 아빠와 별거하기로 결정한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독일 G시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도 해미는 가족들에게 속마음을 숨길 뿐이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본문 중에서)
G시에서도 해미는 낯선 환경에서 혼자서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무혐의의 거짓말을 이어간다. 그런 해미의 고독과 불안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따뜻하게 손 내밀어준 사람은 해미의 친이모 ‘행자 이모’다. 행자 이모는 파독간호조무사가 되어 건너간 독일에 정착하여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 그 밖의 많은 파독 간호 여성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이모’들의 보살핌 속에서 해미는 자신보다 앞서 타국에 자리잡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파독간호사들의 건강한 활력과 긍정성에 감화된다. 그 여성들이 가족과 국가를 위해 삶을 희생한 집합체가 아닌 개별 주체로서 내뿜는 고유한 개성과 매력을 접하며, 해미는 멈춰 있던 일상을 조금씩 재가동한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지?”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흠칫 놀라 선자 이모를 돌아다보았다. 선자 이모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흰빛이 너울대는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을 테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
언제나 표정이 적어 화난 것처럼 보이던 선자 이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꽃그늘이 바람이 불 때마다 레이스처럼 어른거렸다. 마리아 이모가 우리를 웃기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할 때마다 꽃물이 번지듯 환해지던 선자 이모의 얼굴.(본문 중에서)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를 사귄 후 해미의 독일 생활은 더욱 찬란히 빛나기 시작한다. 한수가 해미와 레나에게 비밀스러운 부탁을 해오면서 세 아이의 우정은 한결 끈끈해지는데, 그 부탁이란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함께 찾아달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간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 K.H.를 찾기 위해 온갖 추리와 상상을 펼치며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동안, 해미는 점차 밝고 천진한 모습을 되찾아간다.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본문 중에서)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는 또 한번 커다란 상실을 겪은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해미는 여전히 유년의 비극에 붙들려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며 지내던 해미는 어느 날 대학 동창이면서 미묘한 연애 감정을 주고받기도 했었던 ‘우재’와 우연히 재회한다. 그리고 해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우재로 인해 타인을 향한 해미의 감각이 다시금 깨어나기 시작한다. 해미는 다시 한번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으며 K.H.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볼 수도 있으리라 믿으며.
이제, 거대한 슬픔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여렸던 어린 자신과 대면하기 위한 해미의 용기 있는 전진이 시작된다.
슬픔의 터널을 지나 쏟아지는 환한 빛처럼
긴 시차를 두고 도착한 애틋한 화해의 인사
『눈부신 안부』는 어린 시절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으려 했던 해미가 그후 20여 년이 지나 다시 한번 K.H.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서사의 굵직한 줄기를 이룬다. 이 두 번에 걸친 시도를 통해 해미는 자신이 그사이 훌쩍 성장했음을 느낀다. 어렸던 자신의 시선으로는 끝끝내 알아챌 수 없었을 K.H.에 관한 단서를 하나씩 찾아내면서, 해미는 자신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유년 시절의 한계가 당시로서는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해나간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넓어진 시야를 통해 과거를 용인함으로써 해미는 머지않아 과거가 될 현재의 자신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해미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며 눈부신 도약을 이루는 과정을 지켜봐주는 타인들의 존재 또한 소중하다. 그들은 해미가 스스로를 고립시킨 내면세계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해미의 안부를 묻는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선뜻 손 내미는 이러한 행위가 때로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기도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이 다정한 소설을 펴내며, 이제 백수린은 독자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 책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잘 가닿아 눈부신 세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었으면”(백수린, ‘작가의 말’) 좋겠다고.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어느새 당신에게도 소중한 이들에게 용기 내어 다가갈 힘이 차올랐을 거라고.
『눈부신 안부』에는 삶의 갖가지 비극으로 인해 멀어졌던 타인과의,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진심어린 화해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해나가기로 다짐한 인물들의 발걸음이 그려져 있다. 그 진중한 발걸음에 실린 힘은 읽는 이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더욱 상냥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가려는 현실의 동력으로 전환된다. 허구의 세계로부터 창출된 실재하는 힘.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 아닐까.
◆
작가가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쓰며 누구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지,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지를 살피면 그 작가의 디딘 곳과 향하는 곳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왔다. 『눈부신 안부』를 통해 백수린 작가가 부른 이름들이 찬란했다. 외로움은 다른 투명한 감정들과 얼마나 닮고 닮지 않았는지, 거짓말과 이야기가 어디에서 엉키고 또 풀리는지, 백수린의 질문들에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천천히 답장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아름답고 강렬한 발신의 책이, 착신과 회신으로 다음 이야기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_정세랑(소설가)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책을 덮기도 전에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었다. 어떤 소설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읽는 동안 나는 인물들의 내면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문득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와버렸음을 깨달았다. 백수린의 문장과 서사가 가진 힘이다.
어째서 이토록 부드럽고 단단한 힘이 있어서, 삶을 조금 더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걸까. 어째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통과 아픔, 슬픔을 간직하고서도 나아가보려는 용기를 갖게 만드는 걸까. 읽는 동안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지닌 무수히 많은 사랑을 만난 것 같다. 저마다의 삶의 반짝임을 만난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하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정한 마음이 전하는 안부만으로도 가능해지는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_안미옥(시인)
그즈음엔 주변에서 장편소설로 써보라며 해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어떤 이야기에도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 여름의 식탁에서 ‘파독간호사’에 대한 어떤 일화를 듣고 첫 장편소설을 마침내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그날 내가 떠올렸던 이야기, 내가 쓰고 싶었고 쓸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이야기와 실제로 완성된 이야기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지만, 첫 장편을 쓸 수 있으리라는 예감으로 벅차올랐던 그 마음만큼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_백수린, ‘작가의 말’에서
구매가격 : 11,200 원
디 에센셜 한강(무선 보급판)
도서정보 : 한강 / 문학동네 / 2023년 06월 0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디 에센셜 한강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산문을 한 권으로 만난다!
한강 작가는 1993년 등단 후 30년 가까이 문학이 삶에 제기하는 근본적인 물음─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상실과 고통 앞에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을 다양한 장르로 써왔다. 소설과 시뿐만 아니라 어른을 위한 동화나 자신이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와 글을 함께 담은 산문집, 시와 소설이 어우러진 작품집 등을 꾸준히 펴냈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통한 비주얼 퍼포먼스 작업도 이어가며 텍스트 밖으로 자신의 공간을 확장했다. 한국인 최초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으며, 아시아 최초로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선정되는 등의 쾌거를 이루며 국경을 넘어 한국문학의 센세이션이자 상징인 이름이 된 그를 ‘디 에센셜 한국작가 편’의 첫번째 작가로 선보인다.
『디 에센셜 한강』에는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과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 「파란 돌」 두 편, 시 다섯 편, 산문 여덟 편이 담겨 있다. ‘상실의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마주한 한줄기 빛’이라는 한강 소설의 미학이 응축된 작품들이다. 한 권으로 만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그려나가는 문학 지도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예전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기보다 닮은 사람(들)이다. 교정지를 읽는 동안 그 사람(들)과 묵묵히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사주에 역마가 들어서인지 무던히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왔는데, 오직 쓰기만을 떠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게 내 유일한 집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_『디 에센셜 한강』 ‘작가의 말’에서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희랍어 강의 수강생과 강사로 만난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침묵과 어스름이 놓여 있다. 말言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소멸하는 삶 속에서 서로를 단 한 순간 마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언어인 희랍어처럼, 고르고 또 고른 절제된 단어들로 세계를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더불어 언어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사유하는 한강 작가 작품세계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_『희랍어 시간』,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 「파란 돌」
‘인간은 어떻게 회복되는 존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숙고가 스민 두 편의 단편소설. 육체와 정신의 상처와 그 회복의 과정을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듯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라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시간 밖의 또다른 시간을 그리면서 그들은 천천히, 온몸으로 삶을 향해 간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_「회복하는 인간」,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_「파란 돌」,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외 4편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한강 작가는, 소설을 쓰는 틈틈이 시 또한 쓰고 발표했다. 2013년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출간하였고, 이 가운데 다섯 편을 골라 이번 『디 에센셜 한강』에 실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심장이라는 사물」 「마크 로스코와 나─2월의 죽음」 「해부극장 2」가 그것으로, 제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시의 정조가 느껴진다. 고독과 슬픔, 삶과 죽음, 어스름이 짙어지는 시간, 그리고 그사이 드러나는 환희의 순간까지, 작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영혼의 싸움이 정제된 언어로 잔잔히 빛난다.
•산문 「종이 피아노」 외 7편
유년의 기억부터 그리운 사람과의 추억, 글쓰기의 의미까지, 여덟 편의 산문에는 한강 작가의 나직한 음성이 스며 있다. 1980년 광주에 대한 기억과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던 시기의 일화가 담긴 「여름의 소년들에게」와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소감을 쓴 「백 년 동안의 기도」를 비롯해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후의 소회를 담은 「출간 후에」 등 작가의 내밀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구매가격 : 11,900 원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시인선191)
도서정보 : 김용택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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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
시력(詩歷) 41년, 김용택 시인이 온 생을 다해 골몰해온 일에 대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안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절제된 언어와 서정적 인식으로 담아 오랜 시간 독자의 삶을 다정히 어루만져온 김용택 시인. 그의 열네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이 문학동네시인선 191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를 이루었다 평가받는 첫 시집 『섬진강』 이후 ‘섬진강 시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한 지 올해로 41년, 짧지 않은 시력(詩歷)은 열네 권의 시집과 더불어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콩, 너는 죽었다』 등의 동시집과 8권으로 이루어진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촌철살인의 시 감상평을 담아 시의 장르적 문턱을 낮춘 『시가 내게로 왔다』,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등 시를 ‘쓰는’ 사람이자 시를 ‘살고’ 또 ‘알리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목록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는 고희를 훌쩍 넘긴 시인의 삶에 대한, 앎에 대한 통찰을 한층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진실하고 소박하고 소탈해진다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혼잣말 같기도, 편지 같기도, 때로 기도 같기도 한 55편의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비 걱정을 하고
이웃집 근심도 같이 나누면서
밭을 고르는 선량한 농부 곁에
서 있다 간다
그가 허리를 펴고 서서
시는 잘 써지냐고 내게
묻는다
그렇게 잠깐 서서
비의 기별을 기다리며
쉬시라고
하였다
_‘시인의 말’ 전문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사람들은 왜 모를까」, 199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이라 쓰며 인간사의 부박함을 잘 비추던 때로부터 “나무야/ 봄은 오고 있다/ 너를 올려다본다/ 내 나이 일흔여섯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라고 쓴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숭고한 자연 앞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짧은 한 생을 그리는 데 천착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겸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솟는 여러 번민들이 곳곳에 스민 이번 시집은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 세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거기서부터 삶은 진정으로 시작되리라 예감하게 한다.
“아는 일로 기울어질 때 관조(觀照)는 재확인으로 싱겁게 끝나지만, 모르는 일로 방향을 틀면 관조는 빛나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안다고 생각했으나 몰랐던 장면, 알아서 모르는 척했던 풍경, 알 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를 사방에서 줍고 다닌다. 줍는 일은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이다. 그의 시편에 깨달음 뒤에 찾아오는 물음과, 물음이 물고 오는 깨달음이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음과 깨달음이 반복되는 삶은 한시도 지루할 새가 없다.”
_오은 시인, 발문 「나—비(非)의 순리 잡기」에서
‘모른다’로 가득찬 겸허한 자세의 삶은 새로운 발견과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몸을 낮추어 “어느 날도/ 오늘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어느 날도 오 늘 같은 날은 없다」) 깨달을 수 있다면, ‘모두가 첫날처럼’ 이 삶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며 “경계가 없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나무와 같이 살 수 있으리라. 그렇게 “바람의, 눈송이들의, 새들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새들의 시」)
수십 번 반복된 사계와 수만 번 찾아온 하루를 ‘모두가 첫날처럼’ 새로이 마주하는 일. 어쩌면 그것은 능력이고, 노력과 훈련을 거듭하며 계발되기도 하는 재능이다. 그 훈련의 첫 단계는 “허리를 숙이는 일, 몸을 낮추는 일, 겸허해지는 일” 삼요소로 이루어진바, 민달팽이가 길을 건너는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살피고 곧이어 그것이 “그들의 오랜 역사를 내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내 생각대로 말”한 것이라 부연하는 것(「슬픈 역사」), 누군가의 발길에 무람없이 밟히고 말았을지 모를 구체적이고 생생한 풍경을 “어린 쑥들이 마른 풀밭 잔돌 곁에서 돋아”나고 “서리가 녹아 돌도 쑥도 젖”었다 씀으로써 시에 담아 보존하는 것(「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산을 넘어온 달이 강을 건너 마을로 오”는 매일의 반복을 “시의 길”로 받아들이는 것(「달이 다니는 길」)은 고행의 결과나 득도의 경지가 아니기에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느릿한 민달팽이부터 뜨고 지는 달까지, 이 시집 한 권이 관통하는 존재들의 거리감은 이렇듯 시인의 맑은 감각과 목소리로 개별성을 확보하고 아름답게 확장된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멀리 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 마을로 옵니다
마을로 돌아올 때 나는
뉘우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때도 새들은 날고 나뭇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릴 텐데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뒤돌아보며 슬퍼하지요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
한숨을 땅에 묻으면 새싹이 돋아나는 아픔이 인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_「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에서
삶의 유한함과 어쩔 수 없는 무상함은 슬픔과 후회를 가져온다. 덧없는 세상에서 덧없이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길 바란다. “새싹이 돋아나는” 데 아픔이 있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 권한다. 그때 비로소 차오를 온기, ‘모두가 첫날처럼’이라는 불가능한 소망을 간절히 붙든 시인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온기일 것이다.
구매가격 : 8,400 원
매트릭스
도서정보 : 로런 그로프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운명과 분노』의 작가 로런 그로프 신작
조이스 캐럴 오츠 상 수상 |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버락 오바마,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타임> 등 선정 올해의 책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운명과 분노』(2015)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거머쥔 소설가 로런 그로프가 단편집 『플로리다』(2018) 이후 삼 년 만에 새로운 장편소설 『매트릭스』를 펴냈다. 프랑스어로 시를 쓴 최초의 여성으로 알려진 12세기 실존 인물 마리 드 프랑스의 생애를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탁월하게 재구성한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시적이고 지적인 문체와 독창적인 세계관, 물 흐르듯 우아하면서도 몰입도 높은 서사를 어김없이 보여주며 “산문의 거장”이자 “동시대 가장 뛰어난 미국 작가 중 한 명”이라는 타이틀을 공고히한다. 『매트릭스』는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운명과 분노』에 이어 두번째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2021)에 올랐으며 조이스 캐럴 오츠 상(2022)을 수상했고,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타임> <파이낸셜 타임스> <에스콰이어> <마리 클레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NPR 등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전작인 『아르카디아』(2012)가 1970년대 히피 대안 공동체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매트릭스』는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십자군전쟁이 한창이던 중세의 혼란기 한복판으로, 그곳에 자리한 혁명적인 여성 공동체의 중심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가난한 잉글랜드 수녀원의 부원장으로 임명된 열일곱 살짜리 왕가의 사생아 마리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소외된 공동체를 부강한 불가침의 성역이자 오직 여성들만을 위한 유토피아로 바꾸어놓는 치열한 과정이 생생한 필치로 유려하게 펼쳐진다. 로런 그로프는 남성들만의 역사를 걷어내고 그 아래에서 번득이는 여성들의 지성과 비전을, 다채롭게 빛나는 우정과 사랑과 다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작가의 섬세하고 정밀한 언어 감각은 중세 수녀원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의 촉감까지 마법처럼 구현해내며 “팔백여 년 전의 중세에 동참한 듯한 긴박한 현장감으로 질식할”(구병모) 것 같은 느낌을 안기는 동시에, 남다른 기지와 지혜와 강인함으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한 여성의 영웅적 삶을 조명하며 “오직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온 서사시의 새로운 원형에 도달한다”.(천희란)
존재 자체가 혁명인 여성, 마리 드 프랑스
그가 일군 공동체의 웅장한 일대기이자
오직 여성의 언어로 쓰인 서사시의 새로운 원형
1158년, 열일곱 살의 마리는 흩뿌리는 찬비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잉글랜드의 어느 왕립수녀원에 도착한다. 굶주린 스물 남짓의 수녀들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 누추한 회색빛 공간은 왕가의 핏줄이지만 강간으로 잉태된 사생아라는 신분과 건장하고 ‘여성스럽지’ 않은 외모 탓에 평범한 귀부인의 삶을 누릴 수 없는 마리에게 주어진 감옥이자 유배지다. 이 우울한 수녀원처럼 그녀의 남은 인생도 온통 회색빛일 거라고, 절망 속에서 마리는 생각한다. 게다가 마리를 이곳으로 내쫓은 사람이 그녀가 가장 경애하는 빛나는 여인, 왕비 알리에노르라는 사실이 마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평생 한 번도 종교적인 믿음이나 신앙심을 가져본 적 없는, 남성의 갈빗대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여성을 열등한 성별로 취급하는 종교에 의문과 반감만을 가지고 있던 마리에게 수녀원은 너무나도 낯설고 척박한 곳이다. 물론 난데없이 왕비가 보낸 이 거대한 체격의 어린 신임 부수녀원장을 보는 수녀들의 시선 또한 곱지 않다. 캄캄한 새벽부터 깨어나 어디에도 가닿지 않는 듯한 기도를 올려야 하는 고된 일과 속에서 마리는 다시 밝고 따뜻한 왕궁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왕비에게 바치는 진심어린 사랑의 시를 지어서 마음을 돌려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왕비에게서는 매번 침묵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녀원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각오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 비참한 곳에서 주어진 삶을 최고로 살아내리라는 각오, 자신을 쫓아낸 자들이 스스로 한 일을 후회하도록, 언젠가 자신의 위엄을 보고 경외감을 느끼도록 만들겠다는 각오가. 그렇게 마리는 수녀원을 개혁하는 거대하고 장기적인 계획에 돌입한다. 겸손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수녀들에게 각자 가장 못하는 일을 시키던 관행을 능력과 강점에 따라 배분하도록 고치고, 엉망인 회계장부를 정리하고, 직접 소작농들을 찾아가 위협하며 밀린 소작료를 걷는다. 처음에는 마리의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파격적인 방침에 거부감을 느끼던 수녀들도 점차 수녀원의 운영이 체계화되고 생활이 풍족해지는 것을 보며 마리의 능력을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마리의 권위 말고는 누구의 권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녀원이 늘 존재해온 이 땅에 계속 살겠지만, 그녀의 딸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미로에 둘러싸인 채로 안전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끼리만 오롯이 지내며 자급자족할 것이다. 여자들의 섬이 되는 것이다. ” _본문 중에서
어느덧 기도와 노동으로 점철된 삼십 년의 시간이 흘러 마리가 수녀원장이 되었을 때, 수녀원은 백 명에 가까운 수녀와 수십 명의 하인과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번영한 곳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마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따금 들이치는 바깥세상의 위협, 전쟁과 남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더욱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마리에게 동정 마리아의 첫번째 환시가 찾아온다. 사랑의 빛이 반짝이는 마리아의 얼굴과 함께 흩날리는 장미 꽃잎으로 된 미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마리는 그것이 수녀원 주변에 미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임을 이해한다. 그들의 성스러운 집이 외부인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 온전한 여자들만의 세계가 되도록. 그리하여 마리의 지도 아래 거대한 창조의 프로젝트가 개시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여성들의 손에 의해 지상에 두번째 에덴동산이 형태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한다.
역사 속에 묻힌 중세의 시인에서
과거의 땅에 미래를 건설한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
이 소설에 영감을 준 실존 인물 마리 드 프랑스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2세기 잉글랜드 헨리 2세의 왕궁을 드나들며 유명한 로맨스 서사시와 우화집 등을 남긴 뛰어난 여성 시인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로런 그로프는 대학에서 마리 드 프랑스의 작품을 번역하는 수업을 듣다가 까마득한 시간의 베일 속에 묻힌 이 인물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후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로프의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르던 중세의 시인은 21세기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점점 구체화되어, 과거의 땅에 미래를 건설한 강력하고 뛰어난 여성 지도자로 현재 속에 재탄생했다. “여성으로서 자율권을 잃어가는 이 나라에서 권력에 대해, 자율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마리의 삶은 사실적으로 구현된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놀라울 만큼 시의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몸으로 하는 일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잘못된 것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녀는 한 번도 납득된 적이 없었다. 신도 당연히, 당신이 모든 일을 좋게 해냈으니, 모든 일이 좋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_본문 중에서
로런 그로프가 형상화한 『매트릭스』 속 마리 드 프랑스는 외모부터 성격, 그리고 종교를 대하는 태도까지 당시 여성들에게 기대하거나 강요했던 전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마리는 신을 섬기는 순종적인 성직자가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자신과 수녀들의 안전과 이익을 쟁취해내는 투쟁가이자 정치가다. 마리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성스러운 종교적 환시(vision)는 뛰어난 지도자에게 찾아오는 혁신적인 ‘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리는 수녀원에 평생을 바쳤으나 그 행위는 그저 희생적인 고행이나 봉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취이자 보람이다. 작가는 성애적인 욕구를 포함해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기쁨을 수녀원의 성스러운 여인들에게 허락한다. 육신을 가진 지상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긍정한다. 마리의 야망을 통해 수녀원이 부강해졌듯 수녀들의 영혼은 각자의 성취와 육체적 기쁨을 통해 비옥해진다.
구매가격 : 11,200 원
각각의 계절
도서정보 : 권여선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23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한끗이 만들어내는 차이,
한국문학의 대표 작가 권여선 신작 소설집
2021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기억의 왈츠」,
2020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실버들 천만사」,
2019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하늘 높이 아름답게」 수록
유려하고도 엄정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한국문학이 신뢰하는 이름이 된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다. 술과 인생이 결합할 때 터져나오는 애틋한 삶의 목소리를 담아낸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으로 현실을 촘촘하게 새긴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2020) 이후 일곱번째 소설집으로, 책으로 묶이기 전부터 호평받은 일곱 편의 작품이 봄날의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한데 모였다. 1996년에 등단해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글쓰기에 매진하며 많은 사람의 인생작으로 남은 작품들을 선보여온 권여선은 이번 소설집에서 기억, 감정, 관계의 중핵으로 파고들며 한 시절을, 한 인물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 직시의 과정을 거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결코 화사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하는 곳으로 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권여선의 깊고 집요한 물음
기억의 속수무책, 감정의 속수무책, 관계의 속수무책
우리를 단번에 무장해제시키는 권여선의 계절 소설
소설집의 제목인 ‘각각의 계절’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114쪽)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일흔두 살에 병으로 죽은 ‘마리아’를 회상하는 성당 신도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며 마리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신도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앞다투어 이야기하며 마리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 시선에는 마리아를 자신들보다 아래에 놓는 은근한 배타성이 담겨 있다. ‘베르타’ 또한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91쪽)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위선을 예민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91쪽). 그에 대한 답변이 소설 마지막에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베르타는 마리아가 죽기 전 그녀와 함께 동행했다가 어떤 여자의 양산에 눈가가 찔리고 주저앉는데, 황급히 자신에게 다가와 눈가를 살피려는 마리아에게서 구취를 맡고 그녀를 밀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떠올린 베르타는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114쪽)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같은 쪽) 하지만 ‘고귀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그 가차없고 엄격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마리아는 성당 신도들이 퍼즐을 맞추듯 조각조각 이어붙여 완성된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는 그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히는 소설집의 제목은 계절뿐만 아니라 인물들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다른 어떤 관계보다 질기고 단단하게 엮여 있는 모녀를 ‘각각의 계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실버들 천만사」의 ‘반희’는 코로나19로 일하던 체육관이 휴관에 들어간 어느 날 딸 ‘채운’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가까운 곳으로 함께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자고. 이혼을 한 후 채운과 따로 살고 있는 반희는 그 제안에 다소 놀란다.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어서,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50쪽)어서, 채운과 자신을 끈끈한 모녀 관계로 묶기보다 고유한 개인으로 지켜주고 싶어서 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반희에게 채운은 “갑자기 말이 빨라”지면서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자기가 아는 펜션이 있다고, 차 몰고 갔다 차 몰고 오면 된다고, 거기서는 밥도 해먹을 수 있어서 밖에 나갈 일이 없다고, 거기 꼭꼭 숨어서 아무도 안 만나고 그 근처만 산책하고 그렇게 딱 하루만 지내다 오면 괜찮지 않겠느냐며”(49~50쪽), 마치 반희가 거절하리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을 쏟아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고, 서로를 엄마나 딸이 아니라 ‘반희씨’와 ‘채운씨’라고 부르기로 한다. 가정 내 역할이 아닌 한 개인으로 서로를 지켜주려는 이 행동은 여행의 산뜻한 시작을 알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행을 통해 그것이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 깨닫게 된다. 반희에게 있어 채운은 자꾸 살피고 점검해야 하는 딸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채운에게 있어 반희 또한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이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반희는 담배를 끄고 두 손을 맞잡았다. 바람이 휙 지나가면서 진한 흙내와 풀 향이 스쳤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79쪽)
서로를 이어주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는 것이 아니라 밧줄로 꼬아 더 단단하게 연결하기. 뜻밖이면서 자연스러운 이 전환은 계절의 변화를 닮아 있는 듯하다. 계절이 달라지면 필요한 힘도 달라지듯이 두 사람은 이제 그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 앞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계절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의 연결된 흐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구분함으로써 현재의 계절을 마무리하고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권여선이 우리에게 건네는 건 지금 필요한 새로운 계절, 그러니깐 ‘각각의 계절’인 듯하다.
구매가격 : 10,500 원
왜 쓰는가
도서정보 : 필립 로스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22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듯이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 시대의 거장, 문학의 화신化身
필립 로스를 평생토록 사로잡아온 질문
나는 필립 로스의 솔직함을 사랑한다. 문학에 있어서 그는 나의 영웅이다.
_살만 루슈디(소설가)
모두가 필립 로스가 되길 원했지만, 그 누구도 근접조차 하지 못했다.
_인디펜던트
여기 내가 있다. 소설이라는 변장과 꾸밈과 책략에서 나와 여기에 있다. 여기 내가 있다. 날랜 손재주를 빼앗기고 그간 내가 소설 작가로서 누린 상상의 자유를 부여하던 그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여기에 있다.
_본문 중에서
2018년 5월 22일 타계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 문학동네에서 2023년 5월 22일 그의 5주기를 맞이해 그가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써온 산문을 집대성한 『왜 쓰는가』를 펴낸다. 『에브리맨』 『미국의 목가』 등의 작품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필립 로스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퓰리처상, 펜/포크너상, 펜/나보코프 상, 펜/솔벨로 상,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미국 예술문학아카데미 골드 메달, 코망되르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미국인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문학의 고전을 펴내는 비영리출판사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생존 작가로서 세번째로 완전 결정판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현대 미국문학에는 필립 로스가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머지 작가들이 있다”(시카고 트리뷴)라는 논평처럼 현대 작가로서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문학적 성취에 도달했다고도 할 수 있는 필립 로스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첫 소설집 『굿바이, 콜럼버스』 이후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까지 서른 권이 넘는 소설을 집필하고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거의 내 삶의 전부”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야말로 문학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왜 쓰는가』는 그런 그가 1960년부터 2014년까지 쓴 창작론, 문학론, 서평, 인터뷰, 대담, 연설문 등을 총망라한 책이다. 다채로운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은 결국 필립 로스가 평생 동안 몰두해온 주제, 도대체 ‘왜 쓰는가’에 대한 집요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유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필립 로스는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것을 고민해왔고, 그 고민의 과정과 결과가 한데 담긴 책이 바로 『왜 쓰는가』이다. 가히 전투적이라 할 정도로 처절하게 문학적 삶을 살아낸 그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왜 쓰는가』는 21세기에 여전히 읽거나 쓰며, 문학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지평과 함께 커다란 문학적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예술은 인생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독도 인생이고, 명상도 인생이고, 허세도 인생이고, 불평도 인생이고, 사색도 인생이고, 언어도 인생이지요. 문장을 더 낫게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등대로』를 읽는 것은 소젖을 짜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_본문 중에서
온 생이 문학 그 자체였던 필립 로스
그가 남긴 문학에 대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불멸의 산문들
1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읽으며’는 글쓰기라는 행위와 문학이라는 서사예술에 대한 산문들이 주를 이룬다. 일종의 창작론, 또는 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이다. 거기에 유대계 미국인인 필립 로스는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문학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한다. 유대인으로서의 글쓰기, 미국인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그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확장하기 위한 하나의 창작 방법론인 ‘무언가가 되기’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자신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의 얼터 에고가 되어준 소설 속 인물 네이선 주커먼으로 변신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소설 쓰기의 근본 원리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네이선 주커먼은 연기입니다. 그것은 모두 흉내의 기술이에요, 안 그래요? 그게 근본적인 소설가의 재능이죠. 주커먼은 포르노그래피 작가를 흉내내는 의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나는 포르노그래피 작가를 흉내내는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작가를 흉내내는 책을 쓰고 싶어하는 작가입니다—그런 다음에는, 그는 잘 알려진 문학 비평가인 척해서 연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가장자리에 철조망을 치지요. 가짜 전기, 허위 역사를 만들고 내 삶의 실제 드라마로부터 반半 상상의 존재를 지어내는 것이 바로 나의 삶입니다.
_본문 중에서
그는 등장 이후 끊임없이 논란의 한복판에 섰던 작가이기도 하다. 『굿바이, 콜럼버스』를 발표한 직후 자기혐오적 반유대주의자라는 혐의로 유대인 연맹에 맹렬한 비난을 받았으며, 한 유대인 소년의 성적 일탈을 적나라하게 다룬 『포트노이의 불평』은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필립 로스에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유명세와 악명을 동시에 선사하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그런 공격들에 전투적으로 대응했는데, 그 수단은 역시나 글이었다. 그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라는 혐의에 대해 강력한 논거로 항변하고, 『포트노이의 불평』에 쏟아진 집중포화를 격렬히 방어해내는 글은 뜻하지 않게 선명한 구체성을 띤 문학론이 된다. 우리는 그의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를 통해 흥미롭게도 문학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에 관한 아이디어는 내 경우는 완전히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다 끝내고 나면 일반적으로 지금 꼴이 갖추어진 것이 이전 소설, 최근의 소화되지 않은 개인사, 내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환경, 내가 읽고 가르쳐온 책들의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게 보이지만요. 이런 경험의 요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화무쌍한 관계에서 어떤 제재가 분명히 나타나고, 그때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붙들 방법을 찾아내지요.
_본문 중에서
2부 ‘업계 이야기─한 작가와 그의 동료들과 그들의 일’은 필립 로스가 인터뷰 진행자로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홀로코스트를 겪고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명저를 써낸 이탈리아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 전체주의 체제의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의 작품을 쓴 소설가 밀란 쿤데라를 비롯해 에드나 오브라이언, 이반 클리마, 아하론 아펠펠트 등 다양한 사회 조건 속에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들과 나눈 대담들이다. 필립 로스는 탁월한 작가이자 열광적인 독서가인 그만이 할 수 있는 질문들로 대담을 이끌어나가고, 이야기는 각각의 작가들이 개별적 예술가로서 겪는 창작의 고뇌에서 시작해, 집단적 폭력,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 자유주의 국가 등 그들이 속한 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예술 행위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어떤 문학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그 문학을 통해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가 이어진다.
신성불가침의 확실성에 기초한 세계에서 소설은 죽습니다. 전체주의 세계는 마르크스를 기초로 하든 이슬람을 기초로 하든 다른 어떤 것을 기초로 하든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소설의 자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요즘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해보다는 심판을, 묻기보다는 답하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소설의 목소리는 인간 확실성의 시끄러운 어리석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_본문 중에서
3부 ‘설명’에서는 문학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돌아보며 문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산문과 연설문이 수록되어 있다. 마치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진행되는 3부의 첫번째 글 「주스냐 그레이비냐?」는 갓 성인이 되어 문학적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뒤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눈부’시기 위해 거울을 보며 큰 소리로 다짐하는 장면은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가난한 시절 매일 찾아가던 식당, 요리사가 매번 ‘주스? 그레이비?’라고 묻던 그 식당에서 우연히 주운 종이에 정리되지 않은 채 쓰인 열아홉 개의 문장이 그가 이후 평생 써나간 모든 소설의 첫 문장이 되었다는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일화는 꽤나 흥미진진하다.
왜 못하겠는가? 내 아파트에는 나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좁았다. 또 매일 아침 욕실에 걸린 거울을 건너다보며 거기에 비친 나의 모습을 향해 큰 소리로 “네가 할 것은 오로지 일뿐이야!” 하고 말할 때 나를 방해할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나에게 있는 모든 자유로운 자투리 시간까지 이용했고, 눈부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내 야망이 분명하고 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만 하다면, 나의 불굴의 용기가 무한하고 나의 헌신이 무결하고 내가 내 상상력을 온전히 책임지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_본문 중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작가 필립 로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평생을 그의 문학에 재료가 되어준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심도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긴 글, 문학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에 대한 글들도 3부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필립 로스’ 항목의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 위키피디아에 보내는 편지글 형태의 「정오표」는 필립 로스의 논리적 글쓰기와 유머 감각이 빛나는 글이다.
필립 로스는 2012년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든의 나이가 된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문학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학사에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 또는 삶의 한 시기에 쏟아내듯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들은 많지만 필립 로스처럼 생애 내내 꾸준히 탁월한 작품을 써나간 이는 많지 않다. 그런 그가 절필 선언 이후 문학으로 이루어진 삶을 복기하며 쓴 산문 「사십오 년 뒤에」와 연설문 「소설의 무자비한 내밀성」은 문학적 삶이라는 긴 역주를 끝마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혜안이 담겨 있다. 자신이 쓴 작품 중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새버스의 극장』을 인용하며 끝나는 「소설의 무자비한 내밀성」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이에게는 마치 선물과 같은 깊은 감동을 준다.
『왜 쓰는가』에서 우리는 평생을 문학에 바친 한 작가의 언어에 대한 사랑, 세계에 대한 통찰, 독창적인 유쾌함, 한계 없는 상상력을 만나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세계와 격돌시키며 사유를 확장해온 문학인이자 “내게 더 큰 고난을 다오”라 외치며 삶을 온전히 경험하고자 했던 한 인간인 그가 써내려간 이 문학론이자 창작론, 그리고 인생론이 담긴 풍요롭고 탁월한 산문을 읽는 것은 필립 로스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거의 모든 진지한 소설가가 증언할 수 있겠지만, 자기 기량의 최고 수준에서도 이 직업이 요구하는 자기 고문의 양은 대개 적지 않지요. 모든 재능에는 조건이 따라붙지요—그 성격, 영역, 힘. 또 기간, 재임 기간, 수명. 수많은 확고한 이유로 거친 모험은 끝이 났습니다. 신음과 환희는 끝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나는 평생이 걸려 발견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_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19,600 원
미국을 노린 음모
도서정보 : 필립 로스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22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우리 삶은 악몽이 된다.”
비뚤어진 선동, 요동치는 민심, 가려진 진실
최악의 악몽으로 다시 쓰는 역사
반드시 읽어야 할 또하나의 필립 로스!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작가들의 작가”로 꼽히는 필립 로스 타계 5주기를 맞아 문학동네에서 『미국을 노린 음모』를 선보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필립 로스의 장편소설이다.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해 미국의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한 유대인 가족의 삶은 하루아침에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는데…… 아홉 살 소년의 눈에 비친 히스테리, 무지, 악의, 어리석음, 증오, 두려움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잘못 뽑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에 대한 끔찍한 예언이자 악몽을 보여준다.
“역사란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야.
심지어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언젠가는 역사가 된단다.”
“이제 노벨문학상만 받으면 된다”는 말과 함께 해마다 가장 강력한 수상 후보로 점쳐지고, 데뷔 이래 50여 년간 서른 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매번 꾸준히 주목을 받아옴은 물론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작가들의 작가”로 꼽히는 필립 로스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필립 로스 타계 5주기를 맞아 문학동네에서 『미국을 노린 음모』를 선보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필립 로스의 장편소설이다. 로스는 이 작품으로 “미국을 테마로 한 탁월한 역사소설에 수여하는” 미국 역사가협회상(2005)과 영국 WH 스미스 문학상 ‘올해의 도서상’(2005)을 수상했다. <가디언>은 “로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썼다. 살아 있는 모든 이의 피부를 파고드는 역사를 그보다 잘 포착해내는 작가는 없다”라고 평했다. 2019년에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HBO에서 제작, 방영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0년 대선에서 찰스 린드버그에게 패배해 3선에 실패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해 미국의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고, 고립주의와 친파시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정책을 펼쳐나간다. 미국 사회는 급격히 우경화되고 국민들은 분열한다. 그리고 한 유대인 가족의 삶은 하루아침에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는데…… 아홉 살 소년의 눈에 비친 히스테리, 무지, 악의, 어리석음, 증오, 두려움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오직 필립 로스만이 쓸 수 있는 유크로니아(Uchronia, 과거의 허구적 시기) 소설이자 최악의 악몽으로 다시 쓰는 역사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다. 이것은 악몽이다. _뉴요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찰스 A. 린드버그는 실존 인물이다. 1927년 5월, 25세의 스턴트 비행사이자 항공 우편 비행사인 찰스 린드버그는 단엽기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뉴욕에서 출발해 서른세 시간 삼십 분 후 파리에 착륙한다. 이 최초의 무착륙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으로 그는 국민 영웅에 등극한다. 그의 도전과 성공은 대공황으로 시름하던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전 국민의 희망이자 우상이 된 그는 당시 대통령 쿨리지로부터 훈장을 받고 미국 육군 항공단 대령으로 임명된다. 나치의 항공기 개발에 관한 정보 수집을 위해 독일을 드나들던 그는 친구에게 “그(히틀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베를린에서 열린 만찬회에서 ‘독일제국에 봉사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독일독수리공로훈장을 수여받는다. 히틀러가 체코와 폴란드를 침공한 뒤, 그는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입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은연중에 미국의 참전을 종용하는 세력으로 유대인을 지목한다.
필립 로스는 어느 책에서 몇몇 공화당 고립주의자들이 린드버그를 194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키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린드버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상상력을 펼쳐간다. 그러자 우리가 알던 역사와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린드버그의 고립주의 정책으로 미국은 유럽 전쟁에서 발을 떼지만, 사실상 나치의 손아귀에 놀아나며 유대계 미국인의 삶은 위태로워진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히스테리가 극에 달하고 국민들은 극렬하게 분열한다.
로스는 “그(린드버그)가 출마하고 당선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공화당 고립주의자와 민주당 개입주의자로 양분되다시피 했다. 반유대주의 단체들의 활동은 맹렬했고, 헨리 포드는 기독교 지상주의를 설교했고, 린드버그는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주창했다. 작품 속 사건들은 철저히 사실적 토대 위에서 펼쳐졌다. 작가는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작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도 근거 없는 상상력을 펼치지 않았다. 이 책의 말미에 덧붙여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일대기와 역사적 사실들이 작가의 이런 노력을 뒷받침한다. 이 소설의 가장 소름 돋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최악의 악몽이 사실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잘못 뽑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때아닌 디스토피아 소설 열풍이 불었다. 문학작품들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가 도래하고야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디스토피아 소설 열풍의 중심에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가 있었다. 이 소설은 이런 열풍에 힘입어 HBO방송국에서 미니시리즈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을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위대한 미국 소설』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암울한 미래를 충분히 생생하게 그려냈다. 미국사회에 처절한 경고를 던진 이 소설이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잘못 뽑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에 대해 또 한번 끔찍한 예언이자 악몽을 보여주는 듯하다.
구매가격 : 13,000 원
경찰 살해자
도서정보 : 마이 셰발, 페르 발뢰 / 엘릭시르 / 2023년 05월 03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모든 범죄소설가는 셰발과 발뢰를 거쳐야 한다.
그들은 이 장르를 지키는 두 보초와 같다.”
_라르스 셰플레르
요 네스뵈, 헨닝 망켈 등 유수의 범죄소설 작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리즈,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 경찰소설의 모범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9번째 작품 『경찰 살해자』가 출간되었다. 전작 『잠긴 방』 에서 15개월 만에 복귀했음에도 전혀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마르틴 베크가, 이번에는 스톡홀름에서 멀리 떨어진 스웨덴 남부에서 한 여성의 실종 사건을 수사한다.
열 권으로 이루어진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에 근무하는 형사 마르틴 베크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찰소설이다. 공동 저자인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이 시리즈에 ‘범죄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여 부르주아 복지국가인 스웨덴이 숨기고 있는 빈곤과 범죄를 고발하고자 했다. 또한 긴박한 전개와 현실적인 인물이 자아내는 위트까지 갖추어 대중소설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 걸맞은 경찰을 갖기 마련이다.
스웨덴 최남단의 조용한 시골 마을. 한 여성이 실종되고, 사건은 국가범죄수사국 살인수사과 책임자 마르틴 베크에게 맡겨진다. 마르틴 베크는 수년 전 자신의 손으로 체포한 ‘로재나 사건’의 범인이 실종 여성의 이웃에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 ‘윗선’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신중을 기하는 베크. 그러나 사건이 일단락될 즈음, 경찰과 빈집털이범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며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는데…….
『경찰 살해자』는 어느 여성의 실종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최남단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한 여성이 홀연히 사라진다. 시신도 확실한 증언도 없는 상황에서, 사건은 스톡홀름에서 절도범을 추적하고 있던 마르틴 베크와 콜베리에게 할당된다. 곧장 남부로 향한 그들은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자가 과거 자신들의 손으로 체포했던 ‘로재나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과 마주하고 각자 복잡한 심경에 빠진다.
용의자는 이미 여성 살해를 저지른 적 있는 전과자인데다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그가 실종자와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담까지 있다. 얼핏 간단하게만 보이는 사건이기에 국가범죄수사국의 말름 국장은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대며 서둘러 사건을 정리하라고 마르틴 베크를 압박한다. 그리고 마침내 실종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며 수사가 전환점을 맞이하려는 찰나, 빈집털이범들과 순찰 경관들 사이에 총격전으로 경찰과 대중의 관심은 급격히 옮겨간다. 경찰청은 도주한 ‘경찰 살해범’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망을 펼치고 온 경찰력을 쏟아부으며, ‘실종 사건’은 홀로 마무리하라며 베크에게서 관심을 거두기까지 한다.
서로 관계없이 굴러가는 듯하던 각각의 사건들은 결말부를 향하면서 서로 절묘하게 맞물리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셰발과 발뢰는 전작들에 이어 스웨덴 사회의 타락과 경찰 조직의 방만한 실태를 더욱 날카롭게 공격한다. 부패와 무능이 뼛속 깊이 스민 스웨덴 경찰의 고위직은 정치 세력화하여 점점 더 자신들의 권위에만 집착한다. 그러한 현상 앞에서 마르틴 베크는 고집스럽게 자기 방식을 지키기를 택하고, 콜베리는 실망감을 안은 채 또 다른 길을 택한다.
‘라르스 셰플레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스웨덴의 범죄소설가 부부 알렉산데르 안도릴과 알렉산드로 코엘호 안도릴은 『경찰 살해자』에 대해, ‘죽음’과 ‘여성’이라는 “시대를 초월하여 친숙한 것”을 모티프로 삼았으면서도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이번에도 멋지게 해낸다”며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 범죄소설을 현실의 거울상으로 만들다
“범죄소설은 언제나 동시대를 가장 선명하게 재현한다.” _리사 마르클룬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전반에 흐르는 사회 비판적인 태도는 『경찰 살해자』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의 현실을 범죄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여과 없이 그려내, 독자들이 즐거운 독서 안에서 1970년대 스웨덴 사회의 문제적 면면들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등장인물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인종차별주의 정책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을 지나치기도 하는데, 이렇게 사회상을 문학작품에 녹여 넣는 작풍은 ‘마르틴 베크’ 이전의 범죄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라르스 셰플레르는 이 책의 서문에서, 영국 탐정소설과 귀족적인 주인공에게서 영향을 받아 학술적이고 건조했던 스웨덴 범죄소설에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더러운 현재를 끌어들”여 “사회의 위험한 보수주의, 정치적 부패,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고를 집어넣었다”고 설명한다. 셰발과 발뢰는 “(상업적인 장르를 활용해) 사회의 위선과 부정을 폭로”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글은 독자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노골적인 현재성”을 지닌다. 한편, 첫 출간으로부터 이미 오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은 작품이 그려내는 시대로부터 독자들의 시대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음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이후로 범죄소설은 흐름이 완전히 달라져, 범죄를 통해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후배 작가들에게 범죄소설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경찰 소설의 모범”(요 네스뵈), “현대의 고전, 오늘날에도 유효한 소설”(헨닝 망켈) 등 유수의 작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연내 완간될 예정이다.
구매가격 : 11,100 원
형사 박미옥
도서정보 : 박미옥 / 이야기장수 / 2023년 05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수사를 끌고 간 대한민국 여경女警의 전설 박미옥
인간의 죄와 벌, 선과 악을 끝까지 마주한 여형사, 그 최초의 기록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최초의 여성 마약수사팀장,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을 스스로 갈아치우며
여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쓴 형사 박미옥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는 전설의 여형사가 있다.
1991년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되던 해,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가 된 박미옥. 교통순경으로서 거리에서 힘차게 수신호를 하던 그가 초보 형사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후 30년간 강력계 여형사로 살아가며 그가 어떤 지옥 같은 사건과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지를. 그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를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가 그 선함을 지키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지를.
탈옥수 신창원 사건,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맡았던 형사 박미옥이 직접 쓴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여성으로서 순경에서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일반적으로 순경 출신 경위의 경우 근무경력 20년)하고, 경찰조직 내에서 여성으로서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을 끊임없이 갈아치운 ‘여경의 전설’로 불린다.
지금 그는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하여 제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집 마당 한쪽에는 인간의 선악과 마음에 대한 책들이 가득 들어찬 서재 겸 책방이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유난히 자주 눈물을 터뜨린다. 형사 박미옥이 겪은 사람과 사건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마다 살아가면서 마주한 억울함과 분노, 절망과 희망이 번갈아 밀려든다. 사람들은 형사 박미옥의 집에 와서 읽고, 울고, 쉬어간다.
최근 몇몇 사건들로 인해 세간에 ‘여경 무용론’이 유행처럼 입길에 오르곤 했다. 형사 박미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존 남자 형사들은 물론 국민들도 여형사라는 존재를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기던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강력범죄 현장을 누비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해온 여경이 여기에 있다.
책제목에 다른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보탤 필요가 없었다. 여형사 박미옥이 아니라 ‘형사 박미옥’이다. 형사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감성’으로 하는 일이라 말하는 형사 박미옥. 여성으로 인간으로서 마주한 죄와 벌, 선과 악에 대한 놀라운 일화와 깨달음이 『형사 박미옥』에서 펼쳐진다.
형사의 기술과 연륜이란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디테일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노력과 맷집, 성찰을 요구한다.
형사 박미옥의 철학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다.
나는 늘 이야기한다.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현장은 사람의 이야기였고, 그 자체가 철학이자 인류학, 거대한 인문학의 산실이었다. 사람들의 욕망과 슬픔이 버글거리는 그 현장에서 나는 결코 이기적일 수 없었다. 때론 기꺼이 이익 앞에 물러나고 불편함을 감수한 것은 그것이 곧 형사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이미 현장이 된 사람보다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제 나는 일상의 당신들을 만나고 싶다.
_본문에서
드라마 〈시그널〉〈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괴물〉〈너희들은 포위됐다〉, 영화〈감시자들〉…
수많은 작품을 자문하고, 극의 모티브가 된 형사 박미옥.
여경 무용론과 성별에 대한 모든 편견을 무너뜨리는 그의 실화가 공개된다.
그가 처음 강력계 형사가 되었을 때,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남자 형사들에게도 여자 형사란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 여형사들은 쉽게 복사 심부름이나 보조업무로 밀려나기 일쑤였고, 여형사가 배치되면 ‘형사기동대 차로 운전연습을 하더라’ 같은 구설이 퍼지기도 했다. 여형사들끼리 거의 다 해결해놓은 사건을 막판에 ‘여형사가 범인을 직접 검거하기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남자 형사에게 고스란히 공을 돌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형사들은 이렇게 사건뿐만 아니라 세간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하물며 최고의 검거 실적을 쌓아가던 박미옥 형사가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그는 공식석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강력계장실로 기자들이 몰려왔다.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순간 어느 기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립스틱 정책입니까?”
아니, 립스틱도 잘 안 바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기자에게 되물었다
“립스틱 정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유착 비리가 여자 강력계장을 얼굴 마담으로 앉혀놓는다고 해결되느냐는 뜻입니다.”
기자의 빈정거림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바로 말해주었다. 오랜 형사 생활 동안 만들어진 공격성이 즉각 가동되면서 나는 머뭇거림 없이 맞받아쳤다.
“기자님, 제가 강력사건 경험이 일천하다거나 강력계장직을 해본 적도 없다거나 지금껏 사건 수사경력이 허접하여 강남을 책임질 정도의 실력이 안 된다면, 오늘 기자님 말씀을 깊이 반성하고 듣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력계 경력이 오래되고 강력계장으로서의 경험도 괜찮고 실력도 꽤 인정받아 상위그룹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기자님 말씀은 여성 비하 발언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기자님이 아직 저를 판단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정보 확인 후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여성 비하 발언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본문 중에서)
탈옥수 신창원 검거 특별팀에 투입되었을 때는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느냐는 거친 언사도 들었지만, 그는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하며 곧장 현장에 집중한다. 결국 현장에서 사건은 여경과 남경의 성대결이 아니라, 언제나 긴밀한 팀워크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범인을 검거하다가 도리어 경찰이 부상당하거나 때론 사망하기도 하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현장. 그는 이 현장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의 삶과 죽음들을 곡진한 문장으로 위로하고 쓰다듬는다.
애통하게 떠난 두 형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날, 나는 그곳에서 두 형사를 보내는 진혼시를 낭독했다. 그때 내 안에서 나 자신과 내가 아는 모든 형사들의 영혼이 목놓아 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형사의 울음이었다. 경찰관으로서 제복 입고 가슴에는 흉장을 달고서 밤낮없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경찰 정신을 안고 살지만, 실은 언제 칼 맞고 총 맞을지 모르는 운명. 경찰관 이전에 우리도 흉기를 보면 두렵고 괴한에게 죽임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대놓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우리 동료들끼리만 아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현장을 함께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남녀 불문 우리 모두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때론 나의 불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경찰의 세계는 여경과 남경으로 갈리지 않는다.
한마음으로, 서로 함께하는 호흡과 노력으로, 오던 칼도 멈추게 하고 가던 범인도 우리 손 안에 들어오게 하는 기운은 오직 팀워크에 있다. (「여경 무용론과 경찰에 대한 욕설 앞에서 떠오르는 얼굴들」, 본문 중에서)
한편 책에는 대한민국의 국보 1호가 잿더미가 되어가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온 국민에게 생중계된 숭례문 방화사건, 국민들 사이에 의적이라도 된 듯 신드롬을 일으켰던 탈주범 신창원을 검거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의 일기장을 분석했던 때의 일을 비롯해 그가 파헤쳐나간 수많은 사건들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 특진과 포상을 안기며 그의 이름을 인구에 회자되게 한 것은 대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큰 사건과 지독한 범죄자들일 테지만, 이 책에서 그가 특히 공들여 기록한 것은 뉴스에 한 줄 나가지 못한 소매치기 일당이나 스토커, 차량 절도범들과의 전투다.
소매치기는 반드시 현장검거를 해야만 하는데, 훔치는 손은 너무도 빨라서 그의 눈에 잡히지 않는다. 형사 박미옥은 만원 전철 속으로 스며들어가 소매치기로 추정되는 이의 등에 슬그머니 제 어깨를 기대본다. 그리고 가만히 포착한다, 범인의 어깨뼈가 움직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눈보다 예리한 감각으로 마침내 그는 소매치기 일당을 현장검거한다.
흔히 형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사건이나 흉악범들이 회자될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지만, 형사들이 자신의 업에 뿌듯함을 느끼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범죄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 범죄 피해를 막아냈을 때, 뉴스에도 한 줄 나가지 못할 작은 사건일지라도 서민들이 가슴 칠 일을 막아냈을 때 말이다.
내가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 일이 필요했을 때, 소매치기 두목과 기술자를 잡았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자주 내 일에 대한 성과와 보답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을 향해 넘어갈 수 있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한다.
일의 고통을 이겨낼 힘도, 일하다 얻은 상처를 싸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모두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 속에 있었다. (「어깨가 찰나에 움직였다」, 본문 중에서)
“형사 박미옥의 철학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다.”
그는 취조의 달인이자 범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기술자다. 범인의 화려한 범죄경력보다 살이 다 터지고 때가 낀 범인의 손등에 담긴 표정을 읽어내 기댈 곳 없는 범인의 마음을 달래고, 자백을 닦달하며 취조하기보다 질문하고 대화하며 속이야기를 끌어낸다. 위험천만한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그는 “지금 당신의 얘기를 듣고 도울 사람은 바로 나”라고 외치며 범인과 인질 모두를 살려낸다.
범인에게 ‘당신 왜 그랬느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더 정확하게 묻기 위해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고 서울과학수사계 프로파일링 팀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또다른 삶의 도구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그가 돌연 경찰 조직을 떠난다고 했을 때, 불치병에 걸렸다더라는 소문이 퍼질 만큼 그는 경찰로서의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는 이제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인생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들―그 복잡하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그는 듣고 싶다.
30년 형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경청과 응시로 사건을 해결했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범죄자라고, 전과자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판단하고 막 대하지 않는 법을 몸과 마음에 새겼다.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들이 수시로 터져나오는 강력범죄 현장에서 선과 악의 끝을 목격한 형사 박미옥―이 책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 남모르는 아픔들로 앓고 있는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 건네는 그의 안부인사이다. 그는 말한다. 오래된 상처와 원한들이 터져 피와 눈물이 되어 흐르는 현장에서 끝없이 후회하고 애도하지만 말고, 이제는 일상 속에서 서로 이해하고 풀며 살자고. 우리는 끝내 그럴 수 있다고.
지금 나는 제주에 책과 사람과 마음이 머물다 가는 공간을 열어놓고, 육지에서 온갖 일로 들볶이고 또 스스로를 몰아붙인 지인들이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 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곳에서 울다 웃다 마음을 토로하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그렇게 쉬었다 간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서재에서 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이 공간에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들도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책들로 채웠다.
이 공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단 나를 쓰는 것이었다. 내 삶의 태도와 시선의 증거들, 범죄 현장에서 본 사람과 희망, 그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응원하고 격려하며 살아낸 시간을 기록하면서, 30년간 쌓여온 나의 내상도 말끔히 밀어내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이제 나는 이 공간에서 이미 현장이 된 사람보다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쩌면 공간이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이제 나는 일상의 당신들을 만나고 싶다. (「전생에 형사였던 여자들의 책방」, 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11,800 원
권력과 인간 (개정증보판)
도서정보 : 정병설 / 문학동네 / 2023년 05월 12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최근 연구 성과를 더한 11년 만의 개정증보판!
영화 <사도> 이준익 감독 추천!
중국어판 출간 즉시 온라인 서점 당당왕 세계사 신간 1위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밝히다!
조선의 르네상스,
그 뒤에 감춰진 광기의 그림자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꼼꼼히 읽어나가며 비정한 권력의 이면과 당대 역사를 통찰한 책이다.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일 세기 동안의 역사를 생생히 되살려냈다. 출간 11년 만에 새로운 표지의 개정증보판으로 독자를 찾았다. 몇몇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부록에 보강했다. 이 책에서는 각종 사료를 토대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역사의 다단함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을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은 한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것도 뒤주에 가두어 세자가 죽기까지 칠팔 일을 기다렸다. 그렇기에 이 역사적 사건은 <옷소매 붉은 끝동> <사도> <이산> 같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끊임없이 각색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작 학문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미쳤다 하여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도세자가 약소 당파를 편들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 정도의 논의가 있었으나 두 가지 설 모두 제대로 된 근거 자료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단순한 견해에 그쳤다. 이렇게 제대로 된 학문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출간된 『권력과 인간』은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사이에서 우리가 그동안 오독해온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각도로 분석하고자 한 첫 성과다.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를 계기로 정병설 교수는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사도>의 감수를 맡기도 했다. 『권력과 인간』은 치밀한 문헌 고증을 바탕으로 연구한 궁궐사를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해내 지금껏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으며 대중 역사서로 자리매김했다. 2023년에는 중국어판 출간 즉시 온라인 서점 당당왕에서 세계사 신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라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끈질긴 집념이 『권력과 인간』에 담겨 있다. 정병설 교수는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가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따르지만, 『한중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이재난고』 『현고기』 『대천록』 같은 각종 사찬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폭넓은 관점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한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사도세자를 지켜본 혜경궁 또한 『한중록』을 통해 세자의 병증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렸고,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여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가학증도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내관이나 내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 이내 후궁이나 아내, 심지어는 생모 선희궁과 부왕 영조에게까지 그 칼끝이 향했다. 이런 상황을 더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단순히 미쳤다면 치료를 하거나 보호하여 감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죽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한 달 전,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올렸다. 영조는 세자를 얕보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결행할 만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당장 처분하지 않고 처소로 돌려보내 반성하게 내버려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더 큰일이 벌어졌다. 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하루이틀 전, 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차고 영조가 있는 경희궁 쪽으로 갔다. 이 소식을 비롯해 그동안 세자의 비행에 대해 선희궁에게 전해들은 영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역모죄를 이유로 세자를 처벌했다. 그 누구도 세자를 죽이는 데 선뜻 나서지 못했기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다. 그렇게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세자는 천천히 죽어갔다.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 죽음’에 얽힌 권력과 인간의 진실을 밝히다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이렇게 폭넓게 궁중사를 소개한 것은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나아가 그에 대한 담론의 변화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주위에 분노를 폭발했던 비정한 임금 영조, 그런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평생 울화를 가슴에 안고 쓸쓸히 살았던 왕비 정성왕후, 영조의 후견인이지만 때때로 그와 심한 충돌을 빚었던 대비 인원왕후, 신분 때문에 그저 사도세자를 낳은 여자로 만족해야 했던 생모 선희궁. 사도세자와 그들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사도세자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의 권력욕, 권모술수, 배신과 절망 그리고 공포를 읽지 못하면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이지만 그 시대 궁궐로 깊이 들어가 궁중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병설 교수는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만 다룬 것이 아니라 임금, 왕비, 대비, 후궁, 세자, 내관, 내인 등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살펴 자연스럽게 독자가 입체적으로 사건에 접근하게끔 돕는다. 이 같은 접근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실체를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읽게 했고, 때로는 권력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모습까지 드러냈다.
절대 권력자는 자기 것을 뺏으려드는 자도 공격하지만, 권력을 뺏을 힘을 가진 자도 미리 싹을 자른다. 권력의 존립을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권력의 비정함은 여기서 나온다. 영조는 평소 사도세자에게 냉정하고 엄격했다. 자식을 죽일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 없다. 영조는 종묘와 사직을 위한다면서 자식에게 죽음을 요구했다. 하지만 본질을 보면 그가 말한 사백 년 종사는 다름 아닌 자신의 권력이다. 권력의 핵심인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은 털끝만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자식이라도 봐줄 수 없다. 평범한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권력의 일반적 논리에 따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비정함은 정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외가를 박살냈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까지 속였다. 나중에는 친구처럼 가까웠던 홍국영마저 죽음으로 몰았다. 권력자에게는 친구도 집안도 부모도 자식도 없다. _331~332쪽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정조 시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이 다시 한번 기강을 잡는 시기이자 실학의 융성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라 칭할 수 있었던 때였다. 영조와 정조는 자기 주변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사치를 멀리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으며 누구보다 성실했다. 어쩌면 그토록 냉정하고 엄격했기에 최상의 통치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라는 빛 뒤에는 사도세자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이 그림자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서 영정조 시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권력과 인간』 속 비정한 세계를 읽어가다보면 가슴 한편이 답답해진다. “내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내가 되는” 상황, “원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니 오로지 자기만이 가질 자격이 있다는 식”의 비약. 떠날 때를 알지 못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고위(孤危)함에 마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을 통해 인간을 읽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인간의 내면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더 밝은 역사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시대를 넘어 18세기 궁중사를 읽어야 하는 의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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