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玄鎭健)
1900~1943. 경북 대구 출생.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후 동명, 시대일보를 거쳐,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될 때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1921년 자전적 소설 [빈처]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저서에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무영탑] 등이 있다.
안국선(安國善)
1878(고종 15)~1926. 경기도 고삼(古三) 출생.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으며, 귀국 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해산과 함께 체포, 투옥되어 참형선고를 받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1911년부터 약 2년간 청도 군수를 역임했고, 계명구락부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정신개조를 통한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이루려는 그의 태도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개화파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서에 [금수회의록] [공진회] 등이 있다.
이해조(李海朝)
1869~1927. 경기도 포천 출생.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여 진사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신학문에 관심을 두어 고향인 포천에 청성제일학교(靑城第一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활쏘기를 즐겼고 거문고 타기 등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 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킬 의도로 실화(實話)에 근거하여 소설을 썼다. 이인직(李人稙)과 더불어 신소설 확립에 기여하였다.
염상섭(廉尙燮)
1897~1963. 서울 출생.
1920년 김억, 김찬영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했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삼대]가 있다. [삼대]는 서울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벌어지는 재산싸움을 통하여 1930년대의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저서에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 [짖지 않는 개] [일대의 유업] [취우] 등이 있다.
이인직(李人稙)
1862~1916. 경기도 이천 출생.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의 정치학교에 수학하였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 육군성 한국어 통역에 임명되어 종군하였다. 국민신보, 만세보의 주필을 역임하였고 1907년 대한신문을 창간하였다. 경술국치 이전에는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하여 일본 관원 고마쓰(小松綠)와 내통, 일본 강점에 협력하였다. 국치 이후에는 경학원사성(經學院司成)을 지냈다.
저서에 [혈의 누(淚)] [귀의 성] [치악산] [은세계] [모란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