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 우리가 행복합니다”
삶과 서정을 아우르는 시인 도종환이 전하는 희망의 언어
이렇게 늦게 와 /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도종환 시인이 잠시 도시를 떠나 말 없는 산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퇴휴의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늦게 피어 가장 오래도록 곁을 지키는 들국화를 보며 쓴 시이다. 이렇듯 시인은 자연 속에 놓인 작은 것 하나에도 그 가치와 향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새로이 옷을 입혀 출간된 산문집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는 이때에 시인이 무상으로 받아 누린 자연의 기운과 사유가 오롯이 담겨 있다. 시인은 홀로 산방에 거하면서도 늘 자연과 함께했다. 대지와 하늘과 물의 기운이 그의 삶에 쉼 없이 간섭했고, 길가에 핀 들꽃도 그에게 말을 건네며 자신들의 이치를 설명해주었다. 민들레꽃 한 송이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는 바람, 흙, 물방울의 정령들과 그 자신도 최선을 다해 추위를 이겨내고 마침내 꽃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인은 우리네 삶도 이렇듯 주고받고 소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한다.
지금은 현실 깊숙이 들어와 소음과 먼지투성이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가슴속 한가운데는 깊은 산방, 마음의 거처가 있다. 그곳을 응시하며 이 책을 읽다 보면,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데려오는 풋풋한 흙냄새와 은은한 꽃향기 코끝에 닿으며, 자연의 섭리가 우리네 삶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 우리 곁을 맴돌며 희망의 노래가 된다.
고요한 영혼의 집에서 펴져오는 시인의 향기
당신은 어떤 향기를 지닌 사람입니까?
고단한 세월을 견뎌온 시인은 산방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몸과 마음을 쉬며 “천천히 고요한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시간을 즐긴다고 고백한다. 이 고요 속에서 시인은 “욕망의 높이를 한 옥타브 낮추고, 이불을 개듯 생각을 차곡차곡 개고, 티끌과 먼지 같던 일들도 깨끗하게” 한 후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썼다. 그래서 시인이 전하는 75편의 글들은 진한 삶의 흔적이 묻어 있으면서도 순수하고 청정하다.
다시 온유함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내게는 글 쓰는 시간입니다.
향기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꽃의 언어, 새의 언어, 나무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향기로우시길 바랍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시인은 연둣빛 나뭇잎에서 ‘초심’을 보고, 눈보라 속 겨울나무를 보며 ‘뒷심’을 본다. 깊은 밤 스미는 매화 향에서 고매하고 맑은 정신을 보고, 눈보라 속 산수유 열매를 보며 뜨거움을 본다. 짓밟힌 꽃을 보며 죄 없이 죽어간 어린 영혼들을 생각하고, 주변의 다람쥐, 벌집, 산새를 바라보며 함께 이루어가는 삶을 꿈꾼다. 이렇듯 도종환 시인의 글에는 자연과 사람이 한데 잘 어우러져 고요한 아침이나 적막한 저녁, 맘껏 들이키고 싶은 좋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읽는 이 스스로 ‘나는 어떤 향기를 지닌 사람인지’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는 이와
걸어가는 위로의 숲길 같은 책
오늘도 사막의 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것만 같은 날, 시인은 언제든 가면 위로받을 수 있는 숲길 하나 지니고 살자고 말한다.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로 그의 단정한 사색과 소탈한 삶에 대해 나눈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길이 되어주기에 충분하다. 글 사이로 펼쳐지는 산속 풍경과 작은 새 한 마리와도 대화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소외되고 연약한 것을 향하는 그의 마음과 걸음을 맞추고 있노라면,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는 이와 걸어가는 길, 잠시 돌 위에 앉아 땀을 닦으며 쉬어가는 길, 메마른 바닥에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길을 걷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내 안의 메마르고 황폐해져 있던 길들도 촉촉하게 젖어오고,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것들도 천천히 식어 가는 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면 비로소 발밑에 있는 작은 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원추리꽃 한 송이가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비로소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지게 될 겁니다._본문 중에서
삭막한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흠뻑 비를 맞은 나뭇잎의 표정이 점점 맑아지듯 우리 안의 황폐했던 것들이 촉촉해지고 밝아지며 미처 깨닫지 못한 고마운 이들이 생각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