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말처럼 영혼을 노래할 수 있을까?
시인은 모름지기 영혼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영혼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못하는 시인은 시인도 아니다.
그럼 나는 시인인가? 세칭 시인이 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영혼을 부를 수 없음은 어인 일인가? 아직 시인이 덜 된 것이다. 무늬만 시인이고 진짜배기가 아니다. 얼간이다. 난 영(靈)이 부족한 얼치기 시인이다.
시인에게도 대장간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디딜방앗간이 필요하다. 시어(詩語)를 화로와 절구에 넣고 부수고 빻고 찧어야 한다.
지금의 삭막한 시대에 어딜 가야 이를 빻고 고칠 수 있을까?
곱씹어 본다. 나와 우리는 어디에서 났는가?
글머리를 고향으로 향해본다. 고향 동리는 내게 시의 밭이다. 고향은 미천한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 세상 시인들의 고향이 될 수 있다.
고향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영혼을 찾아보자. 그리하려면 돌아가야 한다.
되돌아보아야 한다. 돌아보는 것은 바보짓이다. 구린 추억들만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추억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되돌아보는 것은 퇴보이다. 갈등이자 모순이다.
그러나 자꾸 시선이 고향에 멈추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치 바람난 사춘기의 청소년처럼 욕망을 따라,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고향의 학동(學童)시절이 40여 년도 넘었는데도 그 시절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포근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리고 어딜 가야 다시 그 맛을 느낄 수 있을까? 꼬깃꼬깃 할머니 쌈짓돈처럼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글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내게서 7번째 소생한 저서이다.
모든 이들이 고향으로 쉽게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고향은 생각만 하여도 냄새가 폴폴 솟아난다. 고향이야기만 들어도 얼른 귀가 향해지고, 또 열리고, 들린다.
고향은 분명 고향에서 살든, 타향살이든, 실향민이든 우리 모두의 안식처다.
누군가는 노래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간직할 것이다. 어느 시인인가는 읊을 것이다.
‘시의 고향 아닌 곳 어디 있으랴’
그렇다. 산이며, 들이 다 시의 고향이다.
이제는 흔하지 않은 소재들을 불러 모으고 싶었다. 마치 고물장수처럼 마루 밑도 뒤지고, 광도 열어 보고, 헛간도 기웃거리고, 정지간도 둘러보고, 마실도 가 보았다. 향토색 나는 고향 마을 언저리에서 채집된 추억들이 시가 되었다.
이 시집 한 권 때문에 우리네 삶을, 메마른 우리네 삶을 소담스럽고 정겹게 만들 수가 있다면,
고향을 두고 떠나 온 이들에게 벗이 될 수 있다면,
우리를 다시 어릴 적 천진난만한 소년 소녀로 돌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라져가는 옛 풍습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점차 골동품으로 변하는 고물(古物)들을 영원히 소장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다.
조용히 눈 감으면 되살아나는 고향.
딱딱해 보이는 시제(詩題)도 구부리면 굽혀지는 곳.
아무리 먼 곳의 시상(詩想)도 부르면 달려오는 곳.
그 글밭에 푹 파묻혀 하늘 향해 눕고 싶다.
― 문태성, 시인의 말(책머리글) [조용히 눈 감으면 되살아나는 고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