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굉지(宏智) 선사 광록(廣錄)≫ 9권 가운데 제2권에 수록되어 있는 ≪송고(頌古) 100칙(則)≫을 번역한 것으로, 사주(泗州)의 보조선사(普照禪寺)에 주석했던 굉지 정각(正覺)의 송고 100칙을 시자 법윤(法潤) 및 신오(信悟)가 굉지 입적 40년 후인 1197년에 편찬한 것이다.
송고(頌古)는 고인의 일화에 해당하는 고칙(古則) 내지 본칙(本則)에 대하여 송고의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운문의 형태인 게송을 붙인 것을 말한다. 굉지의 ≪송고 100칙≫은 다시 원나라 초기에 만송(萬松) 행수(行秀)가 그 전체적인 대의에 해당하는 수시(垂示), 짤막한 주석에 해당하는 착어(著語), 고칙 내지 본칙의 일화에 얽힌 자세한 배경 설명에 해당하는 평창(評唱) 등을 붙여 ≪만송노인 평창(評唱) 천동각화상(天童覺和尙) 종용암록(從容庵錄)≫ 6권으로 만들었다.
- 문자와 언설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술은 먹지 못하고 술지게미만 먹는 꼴과 같다. 부처님을 흉내 내고 달마를 모방하는 것으로는 끝내 자신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언설을 통해서 그리고 밖을 향해서 찾으려 한다면 대당국처럼 드넓은 세상에 한 사람의 선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오직 자성의 법문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깨침을 지향하는 향상의 도리와 교화를 펴는 향하의 보살도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도리를 내세우는 동산의 가풍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수행과 깨침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은 깨침의 행위이고 깨침은 수행의 양상이다. 수행은 깨침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깨침은 수행의 작용이 완전하게 드러난 양태이다.
- 눈 밝은 사람이라면 조주가 말한 ‘내려놓거라’와 ‘그러면 들고 있게나’에 속지 말아야 한다. 내려놓는 것과 들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다. 단견에 빠져 있는 자에게는 영원의 속성을 가지고 그 어리석음을 벗겨주고, 상견에 빠져 있는 자에게는 무상의 속성을 가지고 그 눈꺼풀을 벗겨준다.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는 엄양의 견해는 벌써 공무(空無) 내지 단견이다. 그 단견이라는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느냐 하는 견해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집착으로 상견이다. 이 또한 손톱 밑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말끔하게 뽑아버려야 한다.
- 애당초 본래불이지 않으면 수행이니 깨침이니 하는 것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축생인 개가 수행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개는 여래성의 깊은 믿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중생은 다르다. 적어도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깊은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축생을 건지려면 자신이 직접 축생이 되고, 인간을 건지려면 직접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삼세제불이 축생과 더불어 아무런 차별도 없는 이유이다. 보살이 터럭과 뿔을 뒤집어쓴 축생으로 환생해 펼치는 보살행을 인간의 부류와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류중행이라 한다.
- 수행하는 납자는 깨침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깨침을 얻은 이후에는 수행을 잊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행은 깨침이 되고 깨침은 수행이 된다. 수행과 깨침은 동등한 입장이다. 수행과 깨침이 서로 열린 관계에 있다. 만약 깨침을 겨냥한 수행이라면 이미 수행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결코 깨침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수행을 바탕으로 한 깨침은 수행을 벗어나지 못한 깨침으로서 불완전하다.
- 실로 선 수행에서는 일체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선입관념의 모두를 버리고 불(佛)과 법이라는 것마저도 모두 버려 무소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서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마저도 다시 버려야 한다. 하물며 열등한 신념은 물론 부처이든 신이든 진리이든 사상이든 깨끗하게 그것을 버려 마음의 대청소를 함으로써 갓난아이의 마음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 호떡을 사려고 하는데 정작 먹어보니 만두였다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속의 상황이다. 소리와 색을 통해서 도를 깨치고 마음을 밝힌다고 하지만, 소리 가운데 정해진 도가 없고 색 가운데 정해진 마음이 없다. 마찬가지로 호떡을 사지만 그것이 언제나 호떡일 수는 없다. 그것을 먹어보면 만두일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소리 속에서 소리를 해탈하고 색 속에서 색을 해탈하는 근진삼매이다.
- 일행삼매는 자유롭게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주인이다. 그러나 주인이라는 분별상이 없다. 주객을 잊었지만 자신이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구지의 일지두선이야말로 구지 자신의 손가락이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각자의 몫으로서 남는다. 모든 시방세계가 하나의 손가락이요, 모든 천하대지가 그 손톱 밑에 끼어 있는 하찮은 때일 뿐이다.
- 일체중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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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지 정각(1091~1157)은 중국 조동종(曹洞宗) 제10세로서 그 법맥은 동산(洞山) 양개(良价), 운거(雲居) 도응(道膺), 동안(同安) 도비(道丕), 동안(同安) 관지(觀志), 양산(梁山) 연관(緣觀), 대양(大陽) 경현(警玄), 투자(投子) 의청(義靑), 부용(芙蓉) 도해(道楷), 단하(丹霞) 자순(子淳), 굉지 정각으로 이어졌다. 산서성(山西省)의 습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습주고불(?州古佛)이라 불리기도 하고, 천동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천동화상(天童和尙)이라 불리기도 한다. 묵조선(默照禪)은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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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귀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와 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과 전자불전문화재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 및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외래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묵조선 연구≫, ≪묵조선 입문≫, ≪묵조선의 이론과 실제≫, ≪선과 수행≫, ≪화두와 좌선≫, ≪조동선요≫, ≪인물한국선종사≫, ≪선문답의 세계≫, ≪선문답 강화≫ 등이 있고, ≪현대와 선≫, ≪육조대사 법보단경≫, ≪금강삼매경론≫, ≪금강선론≫, ≪금강경 주해≫, ≪금강반야경소≫, ≪금강경 찬술≫, ≪게송으로 풀이한 금강경≫, ≪금강경 약소≫, ≪열반종요≫, ≪선과 교의 통로(都序)≫, ≪선수행의 길(禪要)≫, ≪선가귀감≫ 등의 책을 번역했다.
제51칙 법안강륙(法眼舡陸)
제52칙 조산법신(曹山法身)
제53칙 황벽당조(黃檗?糟)
제54칙 운암대비(雲巖大悲)
제55칙 설봉반두(雪峰飯頭)
제56칙 밀사백토(密師白兎)
제57칙 엄양일물(嚴陽一物)
제58칙 강경경천(剛經輕賤)
제59칙 청림사사(靑林死蛇)
제60칙 철마자우(鐵磨?牛)
제61칙 건봉일획(乾峰一?)
제62칙 미호오부(米胡悟否)
제63칙 조주문사(趙州問死)
제64칙 자소승사(子昭承嗣)
제65칙 수산신부(首山新婦)
제66칙 구봉두미(九峰頭尾)
제67칙 엄경지혜(嚴經智慧)
제68칙 협산휘검(夾山揮劍)
제69칙 남전백고(南泉白?)
제70칙 진산문성(進山問性)
제71칙 취암미모(翠巖眉毛)
제72칙 중읍미후(中邑??)
제73칙 조산효만(曹山孝滿)
제74칙 법안질명(法眼質名)
제75칙 서암상리(瑞巖常理)
제76칙 수산삼구(首山三句)
제77칙 앙산수분(仰山隨分)
제78칙 운문호병(雲門?餠)
제79칙 장사진보(長沙進步)
제80칙 용아과판(龍牙過板)
제81칙 현사도현(玄沙到縣)
제82칙 운문성색(雲門聲色)
제83칙 도오간병(道吾看病)
제84칙 구지일지(俱?一指)
제85칙 국사탑양(國師塔樣)
제86칙 임제대오(臨濟大悟)
제87칙 소산유무(疏山有無)
제88칙 능엄불견(楞嚴不見)
제89칙 동산무초(洞山無草)
제90칙 앙산근백(仰山謹白)
제91칙 남전모란(南泉牡丹)
제92칙 운문일보(雲門一寶)
제93칙 노조불회(魯祖不會)
제94칙 동산불안(洞山不安)
제95칙 임제일획(臨濟一?)
제96칙 구봉불긍(九峰不肯)
제97칙 광제복두(光帝?頭)
제98칙 동산상절(洞山常切)
제99칙 운문발통(雲門鉢桶)
제100칙 낭야산하(瑯?山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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