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이후
공원에서
믿을 수 없는 얼굴
보이지 않는 정원
음의 속성
파도
대지의 노래
글렌
해설│김나영(문학평론가)
당신의 안무이자 악보가 될 이야기들
작가의 말
작은 기척과 고요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감각을 한껏 열어놓는 김유진 세번째 소설집
세련되고 강렬한 이미지와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인상적인 소설세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김유진의 신작 소설집 『보이지 않는 정원』이 출간되었다. 소설집 『늑대의 문장』(2009) 『여름』(2012), 장편소설 『숨은 밤』(2011)에 이어 선보이는 네번째 소설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비극을 겪은 당사자의 시선에서 통념을 벗어나 싹 뽑아낸 듯한 작품”(소설가 오정희) “비극을 겪은 이후의 상당히 강렬하고, 그러면서 할 얘기는 다 하는 세련된 소설”(문학평론가 신수정)이라는 호평을 받은 「비극 이후」를 비롯하여, 2012년 여름부터 2018년 봄까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꾸준히 써내려간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이 한 곡의 음악이라면 김유진의 소설은 화려한 멜로디가 아닌 “묵음의 순간들”(「글렌」)로 채워진 음악이고, 소설이 한 점의 그림이라면 김유진의 소설은 ‘나무의 거대한 뿌리’로도 ‘들판에 내리치는 번개’로도 보이는(「비극 이후」), 하나의 해석으로 수렴되지 않고 계속해서 달아나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문학평론가 김나영이 적절하게 짚어주었듯이 김유진의 소설은 “말(언어)로 쓰이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소리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이야기”이다. 음악, 무용, 미술과 관련한 풍부한 레퍼런스가 녹아들어 있는 그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한껏 민감해진 오감으로, 인물의 작은 움직임 하나, 고요히 떠올랐다 사라지는 감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전달받을 수 있게 된다.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면 몸속 깊은 곳에서
즉각적으로 온기가 피어났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정원 안에서,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단 하나의 실루엣으로 존재한다는 것
소설집 첫머리에 놓인 「비극 이후」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이륙한 비행기 안의 상황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다른 비행기는 결항이라면서 왜 네 것만 아니야? 그러다 사고라고 나면 어쩌라고 그래?”라며 불안해하는 엄마에게 ‘수인’은 “죽으면 뭘 어떻게 해, 할 수 없지”라고 대꾸할 뿐이다. 수인이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건, 이번 여행이 연인과 이별한 뒤 충동적으로 떠난 것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추락할 듯 기체가 급강하하기 시작하자, 막연하게 상상했던 죽음의 모습은 생생하고 강렬하게 수인의 몸을 통과한다. 자신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무서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는 그쳐 있지만, 빽빽한 안개로 둘러싸인 사방은 비행기 안과 다를 바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옛 애인을 애도하는 혹은 애도할 수 없는 ‘비극 이후’의 시간이 되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공간 안으로 독자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마치 「비극 이후」의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어지는 단편 「공원에서」는 “비행기는 결국 폭발했다”라는 문장으로 긴장감 있게 시작된다. 비행기 추락 사고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우니’. 그 비극적인 영상 한편으로 연인 K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배치된다. ‘공식적으로’ 결별하지 않았을 뿐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인 K. 관계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관계를 끝장내지도 않은 채, 우니는 다만 K와의 관계를 “유예”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애매모호함은 급격히 풀린 날씨처럼, “빠르고 가볍게 햇빛 속으로” 사라지는 우니의 모습을 통해 전환된다. “스스로 빛 속으로 뛰어들어 점점 먹혀 들어가는” 모습은 이미지의 강렬함만큼이나 그간 수동적이었던 우니가 드물게 적극적으로 달려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새로운 시작을 예감케 한다.
연인의 죽음 혹은 연인과의 이별 때문에 혼자 남게 된 인물들뿐만 아니라 “홀로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혼자 됨’을 선택한 인물의 모습 또한 이번 소설집의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자신과 함께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타인과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사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표제작 「보이지 않는 정원」은 ‘두 사람’이 아니라 ‘혼자서’ 하는 사랑의 풍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완만한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앞으로는 강이 끝없이 펼쳐지는 마을, 아름답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고요한 이곳에서 나고 자란 ‘태희’는 어머니를 도와 민박 일을 하며 지낸다. 이 조용하던 공간에 소설가 오정이 머물게 되면서, 평화롭던 태희의 일상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혼자 있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까지 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정원」은 그 선택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타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정하고 고요한 공간과 대조하여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그곳에 “암자를 짓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정원”을 가꾸는 누군가의 모습. 흔히 쓸쓸하거나 초라하다고 할 만한 장면이지만, 『보이지 않는 정원』에서 이 정원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잡초들이 손톱 반만한 크기의 꽃잎”을 틔우는, 작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수많은 고독의 날들을 응시”(「글렌」)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반대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전달받지 못하는 ‘안온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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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때로, 글을 쓰는 일이 앞서 걷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고 느낀다. 뒷모습밖에 본 적 없지만, 그래서 더 멋지다. 어서 따라잡길 바라는 마음과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회의와 망설임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어떻게 될까?. _‘작가의 말’에서
이번 작품집에서는 김유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독보적인 형식, 즉 말(언어)로 쓰이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소리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이야기라는 점이 더욱 강화되어 드러난다. (…) 단어와 문장에 기입된 한정적인 의미로 말미암아 말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의미와 의도로 고정된 세계를 묘사하게 된다. 하지만 몸짓과 소리가 그것을 보고 듣는 자들에게 주는 이해와 감각의 여지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그것들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는 현실을 묘파하는 동시에 거듭 열리고 확장된다. _김나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