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장 아둑시니의 밤(夜叉)
백미륵
사향
손각시
칼을 뽑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2장 아뢰야(無沒)
꿩의 바다
3장 대해중(大海中)의 인(印)
천지불인
임신할 수 없는 성모
에필로그
성모와 아기장수, 그를 지키는 박마(駁馬)가 있는 세상
“박마가 해인을 찾으면 성모의 몸에 인식을 하지. 성모의 몸에 해인을 찍어 상처를 낸단 말이 야. 아기장수, 즉 진인을 낳을 수 있다는 표식을 하는 거지. 표식이 찍혔다면 준비가 된 거야. 그때부터 성모와 박마는 그 해인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아야 하네. 만약 인식한 이후에 해인이 도난당하거나 부서진다거나 또는 손상이라도 나면 말일세, 그 성모는 영원히 성모로만 사는 윤회를 반복한다네. 죽어도 다시 성모로 태어난다는 뜻이지.” (본문 299~300쪽)
『해인』의 세계는 이 땅의 과거와 현재를 무대로 한다. 멀게는 고려부터 조선과 동학혁명 시기를 지나 현재에 이른다. 여기에 작가는 영웅 신이담(神異譚) 아기장수 설화를 끌어온다. 옛날 어느 평민의 집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고 신력까지 발휘하자 부모는 이 아이가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까 겁이 나서 죽이고 만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에는 여러 버전이 있으나 구원자를 바라는 민중의 심리와 현실적인 힘에 의해 희망이 좌절되는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해인』에서는 아기장수라는 영웅보다는 그 영웅을 낳는 성모(聖母)와 성모를 둘러싼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해인(海印)’이란 이 땅에 구원자를 불러오기 위한 증표이자 성모와 아기장수를 잇는 매개체. 아기장수의 탄생을 위해 몇백 년의 시간 동안 해인과 성모를 찾는 백한과 또 다른 이유로 성모를 찾는 정만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고려, 여진인 백한은 우연히 만난 성모, 숙지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지키는 박마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스승인 백지는 조상 가운데 박마를 말살한 자가 있다는 이유로 쉽사리 백한에게 박마직을 내리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백한은 박마가 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나지 않은 좌절과 고통뿐이었다.
죽지 않는 자, 불사(不死)의 서로 다른 고통을 다룬 이야기
“흔히 ‘서쪽을 보는 자’라고들 하지. 예전에는 불사를 그렇게 불렀네. 매일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자신들의 끝없는 한을 되새긴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군.” (본문 121쪽)
『해인』은 윤회하는 성모를 두고 반목하는 두 불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백한과 만인은 각자 다른 이유로 성모를 찾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데, 이들이 어떻게 불사가 되었으며 왜 기나긴 세월을 성모를 쫓는지의 과정이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다. 처음에는 성모를 둘러싼 사건을 쫓는 스릴러의 재미만 보인다면, 시대를 건너뛰며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 속에서 해인에 숨겨진 비밀과 성모가 안고 있는 고뇌가 이야기 안에서 중첩된다. 그렇기에, 판타지 설정이 가미된 팩션으로 읽히던 이 소설은, 스릴러의 긴장감을 거쳐 점차로 본격 미스터리가 갖고 있는 수수께끼 풀이의 재미가 붙는다. 시간의 앞과 뒤로 어지럽게 시야를 혼란시키는 퍼즐 조각들은 마지막 반전에서 하나로 모이며 정점을 찍는다.
작가의 게임 시나리오 작업의 경험 덕분인지, 개성 넘치는 설정과 잘 짜인 스토리 구조와 곳곳에 배치된 복선이 이 작품의 재미를 한껏 높이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서 취해야 할 것과 작가가 장치해야 할 것의 취사선택이 훌륭하여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 불사(不死)와 불사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는 많지만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로 보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미 소설을 내놓은 경험 있는 작가지만 마치 새롭게 등장한 신인이 쓴 것 같은 『해인』은 작가의 경험과 참신한 발상이 잘 어우러진, 눈여겨볼 만한 한국 스릴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