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두 발의 총성 —7
하늘을 보는 소년 —16
총을 쥔 꽃 —32
검은 눈동자 —44
치맛자락의 붉은 피 —55
나룻배의 동행 —72
이방인 —89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 —117
그쪽으로 걸을까 하여 —139
눈깔사탕 —153
합시다, 러브 —170
읽지 못한 편지 —194
질투의 끝자락 —212
세 남자 —225
기다림 —238
푸른 옷소매 —254
보고 싶었소 —281
작별 인사 —309
미스터 션샤인 —334
선물 —353
바람개비 —372
고백 —387
■ 책 속에서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유진은 곧게 앉아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 애신을 바라보았다. 단호하고, 굳은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말하며 애신이 유진을 향해 살포시 웃었다. 애신이 유진에게 처음으로 보인 미소였다. 그 자그마한 미소가 유진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잔잔한 강물 위에 분 바람이었다. 노를 쥔 유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룻배의 동행> 중에서
가마 안의 아이처럼, 빗속을 걷는 광인처럼 젖어들던 동매의 눈이 어느덧 무미건조해졌다.
“제가 왜 조선에 돌아왔는지 아십니까?”
답하지 않는 애신의 얼굴에 불안이 서렸다. 어미가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던 때, 가마 안에서 저를 살피던 애신의 새카만 눈을 동매는 기억하고 있었다. 동매에게 내밀어졌던 손도, 동매를 뿌리쳤던 손도.
“겨우 한 번. 그 한순간 때문에.”
“…….”
“백 번을 돌아서도 이 길 하나뿐입니다. 애기씨.”
투박한 동매의 고백이 애신에게 아프게 던져졌다. 동매는 치맛자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지물포 문밖을 나섰다. 비가 동매의 뒤를 따랐다.
-<눈깔사탕> 중에서
“아직 유효하오?”
“무엇이 말이오.”
“같이 하자고 했던 거. 생각이 끝났소.”
유진의 시선은 곧았으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은 떨리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애신은 유진의 말을 기다리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휘몰아치는 감정들 속에서 건져낸 이 말들의 저의를 유진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했다. 복수의 시작인지, 질투의 끝자락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애신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애신이 활짝 웃었다.
“좋소.”
-<합시다, 러브> 중에서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다 그리 살던데.”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단호한 애신의 눈 속에 불꽃이 있었다. 애신은 손에 쥔 복면을 놓치지 않으며 말했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봐서 알 텐데.”
이미 모든 것을 다 건 후여서 애신은 초연했다. 농담을 섞는 애신에 유진은 애써 웃었다.
-<푸른 옷소매> 중에서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던 유진이 허공에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이 아닌 글자였다.
‘고애신.’
허공에 쓰여진 자신의 이름에 애신이 놀랐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참고로 영문, 일문, 한문 다 가능하오. 국문만 못 하는 거요.”
“잘됐소. 하면 앞으로는 한자로 쓰겠소.”
“……보고 싶었소.”
그 말 하나에 애신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애신도 보고 싶었다.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아플 만큼. 물끄러미 유진을 보자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것도 쓸 수 있소. 보겠소?”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에 당황해하는 애신을 모르는지 유진은 그저 애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이 ‘보고 싶었소’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고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