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줍기
다른 소년
B구역에 내리는 비
그림자 가이드
비와 바람과 숲
1105호
야간 정비
부서지는 밤의 미로
병(病)의 밤(夜)
해설 | 이지은(문학평론가)
머리맡이 흔들릴 때
작가의 말
같은 채로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달라진 모습으로 시간을 통과한다는 것,
아니 달라져야만 시간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소설가 이신조의 네번째 소설집 『다른 소년』이 출간되었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감각적인 문체와 현실에 대한 첨예한 사유가 돋보였던 『감각의 시절』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이신조는 199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오징어」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로 현실을 바라보는 긍정의 시선과 작가적 성실함을 한순간도 늦추지 않은 채 세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그리고 등단 20년을 맞아 펴내는 신작 소설집 『다른 소년』을 통해 불운한 현실에 에너지가 소진돼버린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이 지나온 삶의 인과과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어떠한 삶도 ‘다른’ 방향으로 또다시 나아가볼 수 있다는 희망과 그 실현의 가능성을 작가 특유의 탄탄하고 시적인 문장들로 그려내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잘못일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
표제작인 「다른 소년」은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 이신조의 소설세계가 도달한 성취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주인공 열여덟 살 소년은 버스에서 우연히 주운 스물한 살 대학생의 신분증을 이용해 낯선 도시를 헤맨다. 대학생의 이름으로 고시원의 방을 빌리고, 근처를 지나는 또래의 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이 대학생으로 보이기를 기대한다. 소년이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엄마를 죽인 고3 소년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부터다. 고3 소년은 엄마에게 오랜 정서적, 육체적 학대를 받아왔고, 사건이 벌어진 날에도 아홉 시간 동안 골프채로 이백 대를 맞고 견디다못해 엄마의 눈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별거중이던 아버지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 안 버릴 거지”라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엄마를 죽인 고3 소년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난생처음 와본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을 팔지 않는 중국집”을 보고 “그래도 되는 것”이란 당연한 진실을 깨닫는 소년은, 어쩌면 그가 박탈당한 ‘다른’ 삶으로 나아갈 기회를 떠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을 이 소설은 존속살인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의 이면을 냉정한 눈으로 되짚어보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비극적인 현실과 함께 타인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다른’ 삶으로 나아가보려는 인물의 용기 있는 시도를 긴장감 있고 밀도 높게 그린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부대에서 근무한 「야간 정비」의 ‘완’ 역시 ‘다른’ 삶으로 나아가려 한다. 완은 ‘그 새끼’라는 말로 지칭되는 범인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느끼는데, 이것은 연인이었던 ‘현’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부모마저 큰 빚을 지고 낯선 지역으로 쫓기듯 이주하게 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완을 심야에 터널이나 지하 차도 등을 청소하는 고된 일에 복무시킴으로써,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원인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서 찾도록 하며 ‘완’이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삶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아빠의 수감으로 시골의 이모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된 열세 살 소녀 ‘다민’의 이야기(「살구 줍기」)도 그렇다.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집에서 지내게 된 다민은 엄마의 바람대로 ‘다른’ 환경에 그런대로 적응해나가지만, 아빠의 수감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엄청난 조롱을 당하고, 때마침 시작된 초경의 두려움까지 더해져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결혼과 가정폭력, 이혼, 이별이 예정된 사랑, 투병 등 삶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온 이모할머니 ‘수옥’의 세심한 보살핌 아래 다민은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세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오직 사람이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는 마음의 온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지진과 방사능 유출로 인해 일순간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미리’(「B구역에 내리는 비」), 수술과 이혼, 사직을 겪은 뒤 ‘그림자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찾는 ‘태은’(「그림자 가이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촌과, 벌판의 외딴 천막집에서 노파를 돌보며 사는 소녀, 암 투병을 하며 격리실에서 지낸 경험 이후 삶의 방향이 달라진 여자(「비와 바람과 숲」), 서울 도심의 레지던스 호텔에서 남자친구와 하루를 보내는 ‘예슬’(「1105호」) 등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일련의 작품들도 함께 주목할 만하다. 잘 짜인 단편소설의 본보기라 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임과 동시에, 쉰여덟 수옥에서 대학 2학년인 예슬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 여성이 겪는 삶의 국면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옥은 “강고한 가부장 사회에서 극소수의 여학생으로 대상화”되거나 “따귀를 맞고 목이 졸”리는 등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해왔고, 예슬 역시 대학원생 선배 ‘강민’으로부터 지질하고 교활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은 작가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부각시켰다기보다 각계각층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어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그런 맥락에서 “난 뭐든 네가 싫다면 하고 싶지 않아”(「1105호」)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어쩐지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예슬의 남자친구 ‘지혁’의 말도 귀담아듣게 된다.
이신조는 소설의 인물들을 살인, 지진, 방사능 유출, 이혼, 데이트 폭력, 테러, 암 등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에 자주 처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러한 환경에서 ‘다른’ 삶을 꿈꾸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섬세하고 정밀한 소설의 언어로 보여준다. 삶의 다양한 방면 중에서 하나의 방향으로만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는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신조의 소설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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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圓), 지난 이십 년,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감히 원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미처 알지 못한 채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원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 원들이 어째서 그런 것들이었는지, 어디로 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메아리 같은, 비눗방울 같은, 빵 반죽 같은, 그릇 같은, 살구 같은, 고양이의 동공 같은, 아주 가끔은 만다라 같은, 그런 동그라미들…… 예전 그때처럼, 다시 가을이 왔다. ‘작가의 말’에서
낯선 공간에서 깨어난 인물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과정, 곧 어제의 ‘나’로부터 ‘다른 나’로 이행해가는 시간을 보여준다. 삶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가면서 벌어지는 틈, 그 일상으로부터 탈구된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익숙한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다른 소년』이 내건 화두다. 그것은 ‘다르다’라는 술어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여 줄곧 반복된다는 것을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소설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이혼, 파산, 살인, 총기 난사 사건, 낙태, 테러, 재난, 병 등을 직면하여 삶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데서, 그 두려운 이행의 시간을 소설의 언어가 함께 견뎌내고 있다는 데서 명백해진다. _이지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