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를 사모하던 때가 중 2 때부터였나 싶다. 무척 빠졌었다.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바람이 내 안에 머물렀다. 세상에는 없는 어떤 공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영시를 처음 접한 때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바람에 왜 흔들리는지, 그런 영시를 배우던 때 나는 영어 시간에 손을 번쩍 들었던가, 영어 선생님이 지목을 했었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때 외우고 다니던 시조를 서서 낭독했다. 그 후 오래 나는 시인을 흠모했다. 시에 빠져 헤매기 일쑤였다.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고 외웠다. 그때부터 난 시인이 천상의 인물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신선의 존재로 여겨졌다. 정말 그랬었다. 그때가 십 대 시절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몇 년을 사로잡혀 거리를 방황하고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 시에 젖어 나의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에 젖었다.
그리고 청록파 시인의 시를 몹시 좋아했고 많은 날 그 시들과 함께했다.
남자의 글이 어떻게 저렇게도 섬세할 수 있을까, 하며 감탄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계관 시인 조병화 시인에 한동안 빠져 살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파블로 네루다와 어느 공산국가 유고 슬로비아든가,의 서사시에 매료되어 산 적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아~~ 시가 내게도 왔다. 시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잠자리에 들 때마다 메모지와 펜이나 연필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몇 년을 그렇게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 잠에 빠지기 전에 늘 불현듯 어떤 시상이 문득문득 튀어나오곤 했었다. 그런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요즘 나는 2년 전부터 노안이 와서 글을 보기가 힘들다. 돋보기를 좀 쓰고 나면 눈이 더 침침해져서 조금 멀리하려고 한다. 수많은 꽃이 피고 지고 또 새로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