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소개
“역사에 가정을 매다는 행위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망각과 거짓말 사이에서 진짜 로마니rromani를 만나다!
박해와 멸시의 대상이던 로마니의 역사 속으로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두 권의 소설집과 세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가 김솔이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로 신작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를 출선보인다. 2018년 초 두 권의 장편소설을 연달아 출간한 이후 1년 만에 펴내는 경장편소설이다. 독보적인 스타일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김솔은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동시에 받고 있기도 하다.
이국의 낯설고, 때로는 모호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의 작품은 장르적 실험과 독특한 질감의 상상 세계를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왔다. 이러한 작가 특유의 작품 세계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 매력을 더하는데,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그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가상의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로마니의 왕, 퀴에크 가문의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박해와 멸시의 대상이었던 로마니의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로마니는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유랑 민족으로, 흔히 영미권에서는 집시,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 등으로 불린다. 집시는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스스로를 ‘사람’의 의미를 가지로 있는 롬(Rom) 혹은 로마(Roma)라고 부르는데, 국제집시연맹은 rrom, 혹은 rroma, rromani로 명칭을 통일하여 공식적인 서류나 회의석상에서 사용하고 있다(‘r’이 두 번 쓰인 것은 이탈리아의 로마나 루마니아와 혼동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집시라는 명칭은 인종 차별적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나 여전히 문제의식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인터넷 검색만 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로마니’로 검색했을 때보다 ‘집시’로 검색했을 때 훨씬 더 많은 정보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칭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은, 정착할 곳 없이 떠도는 숙명을 지닌 그들의 역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파편적 기록들을 모아 소설로 완성해낸 이야기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의 얼굴은 또한 어떤 모습일지 함께 들어가보자.
“관용은 없고 편견뿐인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과 귀”가 되어줄,
어느 로마니가家의 아주 특별한 기록
“현재란 과거의 결과물이나 미래를 길러내는 양분도 아니며,
오히려 미래의 결과물이자 과거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라고 생각하셨다.
어제의 삶은 오늘의 실수와 후회로 이미 파괴되었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내일이 기약되어 있으며, 꿈 때문에 인간이 퇴화하고 있다고 걱정하셨다.”_ p. 91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로마니의 역사, 특히 퀴에크 가문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반적인 소설의 모습이 아닌, 작중 화자가 써내려간 역사책의 형식이다. 이 역사책에는 참고 문헌 대신 특이하게도 괄호의 문장들이 있다. “여기까지 읽은 자에게 영광을!”로 시작하는 이 괄호 안의 문장을 황제와 그의 가족들 앞에서 절대로 소리 내어 읽으면 안 된다고 화자는 밝히고 있다. 황제와 그의 혈족들은 문맹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일 수 없는 내용이 바로 이 괄호 안에 묶인 것이다.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가 아닌, 어쩌면 진실에 조금 가까운 이야기가 이 괄호 안에 있는 것일까. 조금은 특별한 형식의 이 기록물은 그 시작부터 독자들을 흡인력 있게 끌어당긴다.
이 책은 역사학자 보그단 마텔에 의해 기록된 셈 로만디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이다. 셈 로만디는 로마니의 황제 플로린 퀴에크에 의해 루마니아 영토 안에 건설된, 전 세계 모든 로마니의 유일한 자치국이다. 그런데 역사학자 는 사실 거짓 신분이라고 화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밝힌다. 선교를 위해 셈 로만디에 파견되었으나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역사학자라고 둘러댄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일보다 성서를 번역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던 그는 로마니의 현실과 그들의 과거를 알수록, 이웃의 위선과 위악을 고발해야겠다는 의무감이 강력해졌다. 이 책의 기록은 그 결과물이다.
제국주의 시대, 나치의 만행은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되는 추악한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픈 시기, 그 참혹한 역사의 뒷면엔 로마니가 있었다. 당시 유대인의 피해 사실과 저항의 활약상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로마니의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들을 외면한 것은 누구였을까, 이 책을 읽는 이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용은 없고 편견뿐인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과 귀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화자는 과연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그의 바람처럼 이 기록을 읽은 후 우리는 “진심으로 로마니를 위무하게 될”까.
「작가 노트」에서 김솔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어쩌면 로마니의 역사가 우리와 전혀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는지 모른다. 베를린의 모든 로마니가 체포되어 공동묘지와 쓰레기 매립장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그때, 일장기를 달고 1등과 3등으로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두 명의 (우리나라) 선수는 패자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이 소설은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1937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집시의 조국 건설’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이 단신 기사에는 조국을 되찾게 된 유대인 이야기에 이어 방랑의 민족이 무솔리니로부터 일정 지방을 국가 건설을 위해 제공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국만리의 이 소식이 식민지하의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품게 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는 작은 책 안에 거대한 서사를 담아 독자들을 압도하며, 그들의 이웃이었으나 그들을 외면했던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 본문 소개
로마니가 이웃에 미친 해악보다 오히려 이웃이 로마니에게 끼친 고통이 훨씬 컸지만 어떤 역사가도 그 진실을 가감 없이 기록하지 않았다. 로마니는 성서 밖의 오지로 추방되거나 성서 안에서 노예로 핍박받았고, 전쟁 중에 절멸 수용소에서 학살되기도 했다. 유대인도 이와 같은 처지였으나 신성한 책을 보관하고 꾸준히 읽은 덕분에 로마니와는 전혀 다른 운명을 얻었다. 유대인의 시오니즘에 자극받은 퀴에크 가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더라면 로마니도 영광스러운 현재를 누리고 있을 것이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몹시 유감이다. (pp. 13~14)
로마니는 풍문에서 태어나서 풍문으로 사라지는 족속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망각하지만 금세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그들의 역사는 실재(實在)보다도 더 길고 풍성하며,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다. 굳이 각각의 함량을 따지자면 과거의 비중이 가장 낮고 미래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이는 사실보다 거짓이 많다는 뜻인데, 거짓이란 비록 현재까지 실현되지 않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증명되거나 공리처럼 증명 없이 인정받게 될 진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근거 없는 거짓말이 훗날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p. 20)
역사에 가정을 매다는 행위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수백만 가지의 개연성이 작용한 결과이므로 그 사실을 수정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p. 25)
단 하나의 단어나 문장이 잘못되는 순간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역사가 통째로 부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인과율을 따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은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p. 69)
절멸 수용소 안에서 로마니와 유대인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유대인의 활약상은 널리 알려진 반면 로마니의 그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니는 수용소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절망과 대결했다. 그들은 거짓 희망에 쉽게 현혹되지 않기 때문에 자해와 가까운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전염병과 가뭄, 굶주림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은 그들이 나치의 수용소에서만큼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던 까닭은 인간의 범죄가 자연의 섭리보다도 더욱 잔악하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치보다 나치의 부역자들이 더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나치를 찾아내고 없애는 건 쉽지만, 그들에게 부역한 뒤에 자신의 죄악을 숨긴 채 피해자들 사이에 숨어버린 자들을 없애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세계에서 로마니는 영원한 박해와 차별을 피할 수 없다. (pp. 72~73)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자 유럽의 모든 나라는 승전국의 자격으로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챙겼다. 심지어 국가가 없던 유대인마저도 영토를 얻었으나, 로마니만큼은 보상은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다가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용서와 망각을 강요받았다. 통일된 언어와 종교가 없다는 사실보다 로마니의 미래를 걱정하고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이 로마니를 유대인과는 정반대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로마니는 또다시 반세기 동안 굴욕과 압제를 견디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야 했고,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가 나타나 로마니 최초의 자치국을 유럽 안에 건립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고 크게 기뻐하며, 세계 곳곳에서 축하 파티를 열고 수일 동안 춤추고 노래했다. (pp. 7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