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몰랐던, 우리가 알아야 할
백성을 섬긴 마지막 유의 석곡 이규준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했던 암울한 일제시대. 나라는 백성을 버렸고, 이규준을 알아주지 않았다. 시대는 그를 사문난적으로 내몰았고, 일제의 탄압마저 휘몰아쳤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백성을 믿고 섬겼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석곡 선생은 포항 영일 바닷가 임곡마을에서 나고 자란 외톨박이였다. 먼바다를 항해하다가 표류한 배처럼 떠돌다 가셨다. 그래서였을까. 푸념처럼 100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찾게 될 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어언 100년, 우린 광복을 맞았고, 나라 구실을 하는 나라를 얻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린 그를 모른다. 2018년, 너무나 늦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알아야 한다. 백성을 섬긴 조선의 마지막 유의 석곡 이규준. 그를 최초로 조명한다.
“내 삶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세 가지 있었다.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스승을 얻지 못한 것, 조선
말, 혼란기에 태어난 것이 내 삶을 끌고 왔다.”
석곡 이규준 선생은 조선말 1855년에 태어나서 1923년 일제 강점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사셨다. 갯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하여 낮에는 논밭으로 나갔으며, 밤에는 골방에 찾아들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갔다. 가난하였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 나는 처지를 알고 그들과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학문을 어렵게 스스로 익혔기 때문에 그 글을 자신의 부귀를 위해 쓰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의술에 나선 것도 이처럼 백성들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모두가 떨쳐버리고 싶어 하는 흙수저 처지를 다행으로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곤궁함을 에너지로 삼아 삶의 완성을 끌어냈다는 역설적인 토로가 함부로 들리지 않는다.
북쪽에 이제마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었다
한의학계에서는 “북쪽에 이제마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었다.”는 말을 한다. 석곡은 사상체질(四象體質) 의학으로 유명한 동무 이제마(1837∼1899)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선생은 <부양론>과 <기혈론>을 주창했고, 한의학의 경전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황제내경』과 허준의 『동의보감』을 『소문대요』와 『의감중마』로 재정리 하였는데, 이러한 업적은,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재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 조선말 유학 사상을 기반으로 <부양론>을 주창했던 석곡은 한의학의 경전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황제내경』과 허준의 『동의보감』을 『소문대요』와 『의감중마』로 재정리하였다. 석곡은 허준에 이어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선각자로 재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바로 이 책이 그 시작을 여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
- 피국현 (소문학회 회장)
★ 한말과 일제강점기 유의였던 석곡 이규준 선생을 제대로 알기 위해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게 벌써 10여 년 세월이다. 백성을 섬기며 백성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몸부림쳤던 석곡의 애민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나라 잃은 원인이 백성을 외면한 권력 때문이라고 지적했던 선생은 애처로운 백성들을 품고 섬기며 살다 가셨다.
- 황 인 (향토사가)
★ 무위당 선생을 통해 석곡의 애민사상을 만났다. 요즘 석곡의 심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가장 중심에 두었던 석곡 선생의 마음 중심 의학이 오늘날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때에 맞추어 나온 석곡 선생의 책이 반갑다. 모든 학문이 백성 섬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석곡 선생의 생각이 널리 알려지길 희망한다.
- 김학동 (한의학박사, 김학동 한의원 원장)
★ 석곡 선생은?유교의 경전인 <십삼경>을 주소하고, 이를 요약하여 『석곡심서』 『경수삼편』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께서는 삶을 통해 자연이라는 생명체가 나와 한가지니, 나를 사랑(仁)하고 용서(恕)하듯이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라는 사상을 보여주셨다. 특히 수기이경(修己以敬)을 강조하셨는데,?사랑과 용서에는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中), 상대를?대할 때는 과(過), 불급(不及) 없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타나야 만물과 내가 하나 될 수 있다(和)는 말이다. 이런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때(誠) 비로소 시비가 없어지고 국가와 사회가 온전히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 황원덕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 책 속에서
“제가 어려운 이웃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를 그냥 버려두었답니다. 만약에…….”
“만약에? 계속해 보아라.”
“만약에 그가 높은 벼슬아치였거나 곳간이 가득 찬 부자였다면 그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어렵고 약한 사람을 차별하였습니다. 백성을 업신여겼습니다. 제가 한 학문이 그것밖에되지 않았습니다.”
김 의원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며 규준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마주하는 눈빛이 규준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찾아오는 백성들을 피하고 외면했느냐? 작은 약속을 못 지켰으면 큰 약속으로 갚아야지. 좁은 생각에 빠져 방구석으로 피해 있다면 탐관오리들과 다른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규준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본문 109쪽
“저자는 사문난적이요. 고을 밖으로 멀리 내쫓아야 합니다.”
이화익이 내지르는 고함이 자꾸만 뒤를 따라왔다. 규준은 성문을 나서며 멀리 숲 끝으로 가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 너머에 펼쳐진 넓디넓은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옹졸한 조선 선비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선생님!”
황보준이 규준의 얼굴빛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나를 사문난적이라는 구나. 허허허.”
황보준도 따라서 웃었다.
“어서 가세. 해 떨어지기 전에 서당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네.”
“저들이 이번 소란으로 끝낼까요?”
“나라가 기울어가는 때에 저런 쓸데없는 짓들이나 하고 있으니 쯧쯧쯧.”
주자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사문난적이라고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문 144쪽
“나는 이들과 함께할 겁니다.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백성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서는 게 바로 나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장헌문은 규준의 손을 잡고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규준도 장헌문 의병장의 손을 꽉 잡았다.
“이 나라는 백성의 것이라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 의병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듯이 경서와 의서 인쇄 작업도 그렇게 해야 할 일이었다.
-본문 203쪽
시대를 아파하고 변화를 관찰하면서 세상 구제할 방법을 지니신 채 아직 때를 기다리시고 계시는지요. … 통치자가 바른 도리를 잃어 백성이 이처럼 오랫동안 뿔뿔이 흩어진 일은 그 어느 시대에도 없었습니다. 서로 편을 나누어 서로 원수가 되고 위협과 권세로 서로를 죽이는 사이에 우리 문명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오랑캐가 문명화된 것보다 오히려 못합니다. 노예가 되는 것도 부족하여 장차 많은 백성이 희생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난 선비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216쪽
“서당에 나오지 않아도 스승님의 가르침은 늘 저희 곁에 있답니다.”
“늘 너희들 곁에 있다고?”
“그럼요. 우리는 늘 스승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요.”
…
생각 하나가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성현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 가르침은 이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가르쳤구나.”
…
규준은 우리 학문과 의학, 예법에 대한 서책 보급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속에는 우리 모습, 우리 문화 그리고 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바로 가르침이자 나아가서는 우리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서당이 아닌 새로운 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본문 236
“돌아보니 나는 참 다행스러운 삶을 살아왔네. 내가 가난했던 게 다행이었네. 가난을 겪어 보았기에 가난한 백성의 마음을 읽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네.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스승을 얻을 수 없었던 게 참 다행이었네. 그래서 어느 학파에도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네. 마지막으로 조선의 끝자락에 태어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네. 사문난적으로 몰렸지만 세상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네.”
-본문 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