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부 이런 사람들
우리 성님 | 서옥렬 선생 | 동아실 아짐네 여시 | 연희야, 연희야 | 유정 할머니 | 방촌댁 | 다미아노 | 세라피나의 모시적삼 | 유딧 | 순조 | 카바레의 역사
2부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지
엄마의 가출은 장독대까지 | 아슬아슬한 고부 삼대 | 니 미 | 할머니와 어머니 | 소캐 같은 년 | 네가 살다 온 곳이 어디냐 | 나, 마늘 캐야 한다 | 내 생일 | 병동 | 엄마, 미안해 | 풀전 | 회충약 엄마 주려고 | 딸의 후회
3부 되돌아보는 삶
1980년 5월 | 5·18의 한가운데를 우리는 수수방관자로 살았다 | 말이라도 하고 싶은 날, 간첩 | 반칙왕을 고발한다 | 나는 | 고모라도 왔으면 했던 가을 | 흉통의 이유 | 의기양양 막내 이모 | 실연 | 이게 나라냐 | 추억이야! | 이야기해줘요 | 내 고향 여름 | 토마토를 애도함
4부 이렇게 살아요
날벌레 | 흰니 | 기도 | 조청 | 제사 | 구인광고 | 다짐은 어디에 두고 | 편하게 해주는 손님 | 고백 1 | 고백 2 | 고백 3 | 고백 4 | 누님 | 어버이날 | 그 아이 | 이제 다른 곳을 봐 | 추석 | 양말
5부 두고 온 시절
아버지 기억 | 너나 잘 살어라이 | 그때 그 마을 | 약수터 | 달콤한 역사 | 택시 속의 변사 | 내 거래처에 책 팔아줄게 | “거그 부자 되면 뭣하냐” | 숙이에 대해 떠들어댔다 | 시집살이 딸 보러 온 할머니와 어머니 | 불의 기억 | 대밭이 있던 사람은 안다 | 짚시랑물 조심해라 | 고요한 정읍, 고요했던 이모 | 1977년 | 세상사 | 맞선의 추억 | 봄조차 가려 하는군요 | 배 봉지가 된 일기장 | 역사는 흘러가고 | 무슨 가풍을 익힌다고
“다른 사람 궁금해하지 말고 너나 잘 살아라잉.”
오지랖 넓은 성격과 다정함, 서민적 마음 씀씀이, 관습이나 정치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생각들, 구세대 특유의 조마조마한 마음이 얽혀 순간의 삶들은 한 권의 에세이로 완성된다.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뒷집 앞집 사람들도 그녀의 시선을 비껴가지 못한다. 한번 주워들은 이야기를 절대 잊지 않는 저자는 제 삶의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순간 수시로 이웃들의 삶을 참조해 방향을 조정하고 면적을 넓히며 자기 밑바탕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 사는 거 궁금해하지 말고 너나 잘 살아라잉.” 엄마가 늘 저자한테 했던 말이다.
아이 다섯을 낳고 넷을 키웠다(첫째 아이는 등굣길에 잃어버려 저자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살림 살면서 가까이한 건 문학이었고, 소설 몇 편을 시도했지만 등단에 실패했다. 한 번도 작가인 적 없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글이었지만, 그럼에도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썼다. 살아오면서 글쓰기와 책읽기 모임에 몸담은 이유다. 멤버들의 지리멸렬한 성과를 보면서 글쓰기 선생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이들에게 말했다. “내 밥은 내가 버는 게 옳다. 식당에 가서 설거지라도 해야 한다.” 저자도 그 참에 멤버 몇 명과 함께 식당을 차렸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밥을 먹었으며, 돈은 성큼 굴러들어왔다. 그런데도 마음엔 기쁨이 없었다. 이러다 삶이 끝날 것만 같았다.
작은 키보드를 구입해 휴대전화에 연결하여 시작한 것은 손님 없는 틈틈이 글을 쓰는 일이었다(노트북을 놓고 쓰면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것 같았다). 이때부터 그의 생활반경에 들어온 이웃들과 돌아가신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고부 3대의 삶, 아르바이트생과 식당 손님 하나하나가 한 편의 서사로 태어난다. 관념, 도덕과 선악, 가치, 이론의 틀에 얽매임 없이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생이 의미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묘사되는 삶 속에서 타인은 내가 되고 나는 타인이 돼볼 뿐이다. 서로 간의 차이를 걷어내고 반짝이는 깨달음의 순간으로 수렴되는 것, 어쩌면 여기에 일말의 삶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5·18의 한가운데를 수수방관자로 살았다
저자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결혼 후 광주에 정착해 평생 한곳에 뿌리박고 살았다. 새댁이었던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으며, 이웃이 간첩으로 몰렸고, 분노와 울분이 뒤엉키는 것을 봤다. 생선 사다 간하여 볕에 말리고, 그늘에 앉아 고구마줄기 껍질 벗기고, 누가 시장에 다녀오며 뭐가 값이 싸더라 하면 아이 업고 그쪽으로 가 좀 헐하게 사오던 때에 자신과 이웃을 휩쓴 억압과 폭거였다. 이때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보람 있는 훗날이 있을 거라는 등식은 흔들렸다. 저자는 기록한다. “정신이 좀처럼 차려지질 않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 게 옳은가, 가치관도 존재감도 삶의 의욕도 없이 우리는 그저 했던 일이니 관성으로 움직였다. 시금치나물 하나도 듣고 물어 맛을 낼 노력을 하던 예전의 아낙은 세상살이가 심드렁해지는 몸의 변화를 느꼈다.”
80년 광주의 억압은 한낱 시민이었던 그에게 삶이 모욕임을 일깨워줬고, 그는 자기비하의 기억들을 마음에 새기며 기록으로 풀어낸다. ‘세탁기 두고도 물 절약하겠다며 손빨래하던 나는 무엇인가.’ ‘고무 다라에 물 담아 낮 동안 햇볕에 데워서 아기들 씻긴 절약은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나를 비웃자 나 자신조차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 자신이 없었다.
정부와 위정자를 못 미더워하면서 원망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역시나 무력한 ‘수수방관자’였을 뿐이어서 원망은 제 몸으로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자박자박 걷는 아이와 업어 키우는 아이 둘을 돌보고 있을 당시 그는 이모네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의 소문을 들었고, 분노했다. 시내엔 벌써 시체가 가득하다고 했다, 마구잡이로 죽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저자가 한 건 아이를 달래면서 우는 것뿐이었고, 고향 쪽을 바라보면서 이 일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남편은 어떠했던가. 선생 일을 하고 있었던 남편 역시 도청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자신을 비겁하다 여겼다. 그래서 어느 날 부부는 아이들을 업고 시내로 나섰다. 하지만 그때 남편의 스승을 길에서 맞닥뜨렸고, 그 스승은 제자 부부를 얼른 집으로 돌려보냈다. “성난 시민군에 편승할 용기도 없고, 마구잡이로 총검을 휘두른다는 진압군과 마주치는 것도 두렵다”라는 생각이 들던 차 스승의 권유는 부부에게 자신을 보호할 정당한 명분을 마련해주었다. 저자는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5·18의 한가운데를 우리는 수수방관자로 살았다.” 농사는 망치고 우유 집유차도 못 들어오던 시절, 차라리 안 보고 안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고장의 아픔을 보며 울었지만,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 엄마의 기록은 이제야 한 편의 글이 되어 그 시절의 사회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고발한다.
엄마, 가출한다면서 마당 뒤에 숨었어?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남편의 습관적 외도와 정신적 학대, 시어머니의 꼬집어 비트는 독설과 멸시, 허리 한번 펼 날 없는 육체노동…… 이것은 엄마의 삶이었고 저자는 목격자로서 이를 기록한다. 어느 날 가출을 결심한 엄마, 그 모습을 본 딸은 기억을 되짚어 꺼내놓는다. 날 저문 저녁, 식구들은 밥하는 엄마가 사라지자 평소 등한시와 타박의 대상이 부재함을 알아차렸다. 가마솥에 불 지피고, 참기름·간장·깨소금으로 가지와 풋고추를 조물조물 묻혀 내며, 철따라 장아찌를 담던 여자였다. 수많은 봉제사를 위한 누룩이며 엿기름, 마른 나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연필로 기록하는 법 없이도 머리에서 술술 풀어내던 무덤덤한 얼굴의 여자. 그치만 늘 만만해 호령과 핀잔을 한 몸에 받고 고개 한번 못 든 채 살았었다. 그런 여자가 없어지자 할머니, 아버지 얼굴에는 불안이 역력했다. 엄마의 존재가 일천하지만은 않았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린 딸은 엄마의 부재를 조마조마해하며 울었을까. 아니다. 해 떨어졌을 때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장독 옆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엄마를 봤을 때 딸은 하마터면 “엄마를 조롱할 뻔했다”. 집안일로 바빴던 엄마는 딸한테 그리 살갑지 못했고, 집안의 권력자 할머니의 손안에서 큰 저자는 기껏 장독대까지 가출한 엄마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현재 몸져누운 엄마를 옆에 두고 그 시절을 되짚어 생각한다. “누구도 낱알이 모뚝하게 살아 있으면서 날쌍한 밥을 지을 수 없으며, 간장 된장의 깊은 맛을 내기 어렵고, 스물네 시간 군말 없이 빨래 푸새하고, 일꾼들 밥 하고 들일까지 해대는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 숱한 역사를 엄마는 입 싼 딸년처럼 입으로 뿜어낼 줄도 모르며 원망도 상처도 되뇌지 않고 살아왔다.
엄마에 대한 기록은 여러 편의 글로 풀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어느 날 엄마의 중얼거림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집구석은 뱀을 독사로 맨들었지.” 하지만 시어머니가 죽던 날, 상을 치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건 자식들이 아닌 욕받이 엄마였다. “미안허요, 엄니. 이렇게 돌아가시는 것을 바랬단 말이오. 엄니, 미안허요. 용서해주시씨오.” 엄마는 두 손을 앞에 쥐고 서서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더욱이 초상 치를 일 때문에 음식을 여러 날 준비해왔던 엄마는 무척 허둥댔다. 본래 난리가 몰아와도 들썩이지 않는 엄마가 대청으로 마루로 오가며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장에 심부름 나갈 마을 아재가 거리제, 산신제, 평토제에 쓸 제수를 물었는데 엄마는 사과나 배를 사다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를 향한 평생의 미움은 며느리의 마음 한켠에 사랑의 싹을 틔운 건지 어떤 건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그이를 성님이라 불렀다”
이 책의 첫 장은 이웃들의 역사 쓰기로 시작한다. 어떤 삶이 특별히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을까. 1부 <이런 사람들>엔 저자가 쓰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은 이들의 삶이 기록된다. 권력과 명예와 돈 가진 자는 이미 그것의 소유 때문에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저자의 글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무명無名’의 사람들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왜 덜떨어졌을까. 왜 자신은 식당일, 여론조사, 고추 따기의 극한 직업에 몸담으면서 별 볼일 없는 남자를 먹여 살리려 할까. 시어머니한테 양 많은 나물때기 얻어먹고 고기반찬은 동서들에게 빼앗기면서도 그 면박이 뭐가 좋다고 가서 살림이며 반찬 해주고 제 몫은 하나도 못 챙기는 걸까. 커튼 일 그만둔 지 오래됐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이 찬장 해달라, 커튼 해달라 하면 거절하는 법 없이 와서 달아주는 이의 심성은 무엇일까.
이들은 사회에서 한 번도 드러난 적 없지만, 이웃들은 심심찮게 그들을 화젯거리로 올린다. ‘우리 성님’에 등장하는 성님도 그런 존재다. 아량이 남들 몇 배나 넓어 누구에게든 맛있는 것을 해먹이고 마음을 나눠주던 성님은 정작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공무원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받아 떠돌면서 노름에 빠졌던 것이다. 동네엔 그 집에서 주말이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 날 만난 성님의 머리가 쑥대밭이 돼 있었다. “성님 머리가 왜 그래요?” 모인 사람들이 물었다. “애들 아빠가 화투 쳐 돈 잃고 나면 애들 볶고 날더러 서방질했다는 말까지 하지 않던감. 듣다못해 내가 가위 들었네. 그런 짓 하는 년이라면 머리를 잘라 가두는 것이라고.” 그러던 성님은 몇 주 후 섬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간다면서 들떠 있었다. 성님 왈 “에이즈가 창궐하니 본처가 대접받네. 목포여관으로 가.” 당시는 1986~1987년경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에이즈 감염자가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남자들은 몸을 사렸다. 성님은 그런 일 때문에 오히려 본부인이 대접받는다며 들떠서 남편을 만나러 달려갔던 것이다.
이 책엔 도량 좁은 이들의 모습도 몇 편 기록해두었다. 주변을 보면 못나고 못된 사람들이 널려 있다. 자기 가진 거 지키려고 남의 삶에 생채기를 내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식당을 하다보면 몸보다는 마음고생 때문에 이 일을 접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순간들이 가끔 찾아든다. 사고는 어느 틈에라도 비집고 들어오려 준비 중인데, 어떤 손님은 한순간 음식으로 날벌레가 날아들자 카메라로 찍고 신고하겠다며 승리자와 고발자의 기세등등함을 취하면서 증거를 단단히 기록해갔다. 식당에 밥 먹으러 온 가족 간의 불화를 지켜보는 마음도 편치 않다. 식당일 하는 직원이 정작 전화 삼매경에 빠져 손을 놓고 바깥에 전화받으러 들락거리면 마음이 신산해진다. 그런 심란한 마음은 글쓰기를 재촉한다. 삶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듯이, 씁쓸함으로 얼룩진 기억들도 하나씩 소환되어 한 편의 글이 된다. 못난 삶도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