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1부 거미와 나
간이역 / 거미와 나 / 풍금 / 침대 / 구름 속의 산책 / 몽환의 마을 / 은행나무숲으로 가는 기린 / 음악회 / 중독 / 밤에 쓰는 편지 / 가을 / 밤이면 / 손님 / 열대의 밤 / 비
2부 나선의 마을
구름 / 녹색 뱀 / 기린 / 알데바란 / 낮잠 / 아다지오 / 알레그레토 / 낮은 담 / 겨울 / 기억의 고집 / 황사 / 나선의 마을 / 연못 / 붉은 기린 / 기린
3부 기괴한 서커스
염소 / 이상한 마을 / 똑같은 여인숙이 있는 마을 / 선인장 / 노랫소리 / 기괴한 서커스 1 / 기괴한 서커스 2 / 기괴한 서커스 3 / 기괴한 서커스 4 / 겨울 / 유령의 세계 / 벌목 / 보름 / 거미와 나 / 아득한 거리
4부 내가 그린 그림들
백합 / 외발자전거 / 눈 / 내가 그린 그림들 / 그녀가 그린 그림들 / 그림 벽지로 도배된 방 / 아코디언 / 피아니스트 / 안개 / 초록 도마뱀의 방 / 개미와 나 / 저수지 / 물푸레나무숲 / 발자국에 관한 단상 / 대저를 지나며
해설 | 뿔을 단 거인과 이미지의 시학 | 김경복(문학평론가)
“이상하다. 이곳에 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것 같다.”
문학동네시인선 133 김참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가 출간되었어요. 1995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미로 여행』 『그림자들』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을 펴낸 시인이 4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기도 하지요.
앞선 시집들의 제목을 제 소개를 좇아 읽어보셔서 짐작들 하시겠지만요, 김참 시인은 제 시의 출발점에서부터 환상의 축지법을 제 특기로 잘도 써온 이여요. 혹여 환상이라 하면 헛꿈 같은 것이 아니겠나, 혀부터 끌끌 차는 분도 있으실 수 있겠으나 허무와 맹랑함을 기저로 하는 데서 환상이 불러오는 상상의 그 ‘역(力)’은 공깃돌을 지구로 지구를 공깃돌로 순식간에 부풀렸다가 부지불식간에 오므라뜨릴 줄도 알지요.
무모한 일일 수 있음에도 시도해보는 일의 아름다움, 그 의지의 빠름, 그 빠름의 뜨거움, 그 뜨거움의 쏟아짐, 그 쏟아짐의 어찌할 수 없음, 그 어찌할 수 없음의 앎, 그 앎의 이상함, 그 이상함의 계절은 바야흐로 언제나 오늘. 김참 시인의 시들이 줄곧 묘하다 할 만큼 잡히지가 않고 고이지가 않고 절로 빠져나가고 절로 흐르는 데는 그 ‘오늘’만을 담보로 그 ‘오늘’만의 힘으로 살아가는 ‘청춘’을 도통 놓을 줄 몰라서라 하겠지요.
시인은 왜 이토록 나이를 안 먹을까요. 시인은 어쩌면 이렇게도 나이를 안 먹을 수 있을까요. 새삼 시인의 시 안으로 뛰어들고 보니 바로 또 알겠는 것이 일단은 나이의 정의라는 것부터 주룩주룩 미끄러지고 있는 거예요. 누가요? 시인이요. 미끄덩미끄덩 밀쳐내고 있는 거예요. 훌렁훌렁 벗어버리는 거예요.
그도 말해요. 이 세상이 “아주 이상한 계절”이라고요. “이토록 이상한 계절”일 수가 없다고요. 이상하여 수상하다 말할밖에 확실한 게 없는 이 계절에 그는 제가 본 것만 말하고 제가 들은 것만 말하고 제가 맡은 것만 말하고 제가 만진 것만 말해요. 뜬 이불처럼 그도 떴다 가라앉곤 하지만 그런 그가 단언하는 것은 이 하나의 문장이라지요. 그러니까 “그가 죽은 이유는 그가 태어났기 때문이”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지도 않았을 것”(「알데바란」)이라는 어찌 보면 너무 빤함에 기댄 전언이요. 그렇잖아요. 이건 아니다 아니라 하며 빠져나갈 구멍이란 구멍에 죄다 뜨거운 물로 갠 시멘트를 부어 굳힌 단단한 명제잖아요.
그는 흡사 고무줄과 같은 사유를 갖고 노는 이 같아요. 그 고무줄을 늘이거나 그 고무줄에 묶이거나 그 고무줄의 유연한 탄성 안에서 재미를 찾는 순응이란 순함도 와중에 천성처럼 갖고 있다 싶은데요, 그래서인지 제 사유의 단면을 가위로 짤똑 끊거나 칼로 싹둑 자르거나 하는 적나라함은 감행하지도 않고 단행하지도 않아요. 정확하게 적어나간 단문의 문장이 몹시도 리드미컬하게 읽혀나가는 가운데 그가 움직이는 방향성에 연둣빛 싹이 보이는 건 그가 기댄 자연, 그 서정을 그가 사랑하기도 하는 까닭이 아닐까 짐작도 가요.
침대가 뜨고 이불이 뜨고 얼굴이 뜨고 팔다리가 뜨면 어딘가 이상한데 자연이 뜨면 결단코 이상할 것이 없는 이야기. “이상하다. 이곳에 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것 같다. 마을 한복판에 서서 나는 멀리 있는 산을 본다. 갑자기 울고 싶은 생각이 든다”(「구름 속의 산책」)라고 할 때의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이해되는 슬픔의 감정, 이 공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하는 걸까요.
그가 만든 ‘몽환’의 세계는 퍼져나가는 음악으로 달팽이들이 즐거울 수 있는 세상이지요. 숲으로 돌아간 기린들이 쭉쭉 길어져서 꽃목걸이 대신 구름을 목에 건 기린들이 우리들과 뒤섞여 있는 세상이지요. 왜 이렇게 꿈만 같을까요. 꿈에서 깨었다고 우리는 꿈이 아닌 세상 속을 살고 있는 건 맞을까요. “죽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구름 위로 올라오는 계절”(「가을」), 실은 그러지 않는 날들이 없고 그 ‘나선’ 속에서 살고 사라짐을 매일같이 계속 반복하는 게 우리라 할 때 높디높고 가볍디가벼운, 어쩌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겠느냐 할 ‘구름’에게 닿기 위해 늘이면 늘어나는 목을 가진 ‘기린’으로 저 자신이 분해보는 과정, 그 시라는 행위의 가동 가운데의 건강성. 어쩌면 우리가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이유를 이런 능동성의 와중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지 않을는지요.
「기괴한 서커스 3」의 이 두 문장, “이미 다 알고 있는 레퍼토리지만 그래도 온다”라는 것이, “예정된 시간에 시작되고 예고 없이 끝날 것이”란 게 비단 ‘서커스’만의 정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담장을 넘어 생과 사를 넘실대는 함의임을 다들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우리들의 발아래로 성난 황소처럼 구름이 흘러가는 계절, 가을은 아니지만 구름이 자주 뜨고 사물이 뜨고 우리들이 뜨는 이야기가 또 자주 떠서요, 글쎄요, 나는 것을 타고난 운명처럼 삼은 시들이랄까요.
맥 잡기보다 맥 놓고 싶을 때, 의미부여 같은 데서 맘껏 놓여나고 싶을 때, 그냥 뭐 멍하게 가만있어보고 싶을 때, 아무려나 흘러가는 구름처럼 책장을 넘기면 함께 흘러가고 있구나, 실감도 하게 하는 시집이 아닐까 하여요. 거기 나 있고요, 거기 우리 있고요. 멈춘 듯해도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우리 오늘도 그런 '맴돌곤'의 자기장 속에 스스로에게 속고 스스로를 속이며 있겠지요. 시인의 말마따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요.
이상하게 그림이 그리고 싶어질 때, 그림 그리고 있는 나를 보고 싶을 때, 그 내 그림에 그 네 그림을 더하고 싶을 때, 그리하여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 때, 그렇게 펼치면 펼칠수록 역전에서 나아가 새로운 풍경과의 조우를 더없이 빈번하게 만들어줄 그런 시집이 아닐까 해요. 심심한 듯한데 간이 어려운 걸 보니 지금 이대로의 여기에 있음이 필요한 시들이 맞는가도 싶네요. 김참 시인의 이름이 낯설다면 생소하다면 이 시집부터 시작해보심이요. 날기 좋은 봄이고 연두니까요.